설교는 좋은데 비도덕적인 행동을 일삼는 목사님. 믿음은 좋은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틀어져 고립된 채로 살아가는 신앙인. 이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신앙과 인격이 겉도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울 야경에서 십자가를 찾는 것만큼 쉬운 일이지요. 그 괴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드러나는 내 모습에는 관심이 지대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돌아보는 데는 취약한 현대 사회, 그 속의 교회문화, 신앙교육 때문일 것입니다. ‘성찰 없는 신앙’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위기이며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영성의 길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기도만 봐도 그렇습니다. 내 바람을 쏟아내는 통성기도는 쉽지만 침묵 속에 그분의 음성을 듣는 기도는 10분을 채우기도 어렵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일상에서 물러나 고독에 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목사님은 설교만 잘 하면 되고, 성도들은 주일 성수나 십일조 등을 통해 믿음을 입증하는 외면적 삶에만 치우쳐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을까요. 우리는 자기 성찰을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는 방법,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완전히 잃은 것 같습니다.


--- 출간 임박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의 에필로그 일부분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기 성찰의 방법 하나로 에니어그램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 책은 내면을 돌아보고 내적인 삶을 살려고 그 방법을 찾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의 내면, 즉 자신의 속사람으로 안내하는 좋은 지도입니다. 아홉 개의 성격유형은 영적인 의미로 아홉 개의 ‘옛 자아’ 또는 ‘거짓자아’ (엡 4:22)입니다. 나의 습관적인 행동, 그 행동 아래의 동기, 나조차도 속고 있는 왜곡된 동기를 알려주며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구원과 회개, 성화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자아성찰’은 나의 빛과 공로가 아니라 그림자와 연약함을 날것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두려워서 바라볼 수 없는 나의 어두운 내면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한 것이 에니어그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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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하는 내적 여정9



(새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 도움을 구합니다.


모님, 안녕하셨어요.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입니다. 온 우주에 저 혼자 깨어있는 듯 지금은 저의 불안한 호흡과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만이 이 공간을 채웁니다. 여름 끝자락의 타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저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유들로 불면의 밤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님을 뵙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굳이 사람을 왜 유형으로 구분 지어야 하는지? 고유한 인격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 봐야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사실 인간이란 복잡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인데 아홉 유형 중 하나로 명확하게 구획을 지어버리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모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머리’로 듣고 머리로 말하는 방식인지 모르겠네요. 한 달여 무더위와 싸우면서 또한 제 자신과 직면하며 싸워야 했던 것은 저의 ‘거리두기’와 ‘감정의 차단’이라는 문제였어요. 아직도 실은 썩 인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제 주변의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혼란스럽더군요. 어쩌면 이것이 제 마음의 소리입니다. 이런 것들이 올라올수록 에니어그램 자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모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이런 제게 추천하실 책이 있으신가 해서입니다.


이런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망설여졌던 것은 결국 제가 또 다시 ‘지식’에 집착하는 제 유형의 한계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 아닐까 싶었던 거지요.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모님께 그렇게 판단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저는 모님 표현대로라면 (아니 본회퍼의 표현이라고 하셨나요?) 결국 사유의 비상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존재인 것을요. 여기까지입니다. - 오필 드림 -



☆ RE : 도움을 구합니다.


오필에게.


먼저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구나. 오필이의 솔직한 이야기들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 지난 번 오필이와 함께 마셨던 탄자니아AA를 마시면서 오필이의 메일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아프리카의 야성을 담고 있지만 그 뒷맛은 부드러운 탄자니아 커피는 외유내강의 오필이를 많이 닮았네. 특유의 깔끔한 산미와 함께 부드러운 쓴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데 마지막에 남는 믿겨지지 않는 단맛이 오늘따라 참 신비롭게 느껴지는군.


먼저! 내가 뉘관데 정중하고 정직하게 도움을 구하는 오필이를 판단할 수 있겠나이까! 오필이의 ‘판단 받지는 않을까’ 두렵다는 표현을 읽으며 심장이 쿵했어. 여타 성격유형 도구가 그렇지만 에니어그램은 유난히 우리 안의 ‘하나님 놀이’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 같아. 즉 유형으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면 어느 정도 사람들의 행동과 동기가 정리되어 눈에 들어오거든. 그러다보면 늘 우리 맘 한 구석에서 기회를 엿보는 교만이 고개를 쳐들지. ‘내가 너의 동기와 속마음을 안다. 몇 번 유형인 너는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어’ 하면서 말이야. 그런 전제로 강의를 하거나 사람을 대하면 필연적으로 상대방에게 ‘넌 몇 유형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라며 표딱지를 붙이게 되어있어. 단지 유형의 하나로만 이해되는 상대방이 어떻게 자신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겠어. 당연히 판단 받는다고 느끼겠지.ㅠㅠ 처음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가르칠 때는 더 심했고, 지금도 애써 경계하지만 여전히 그런 우월의식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애. 오필이가 오필이의 유형으로 ‘판단받을까’ 염려하게 되었다는 게 그 반증이지. 혹여 나와의 대화가 ‘너의 모든 걸 알고 있다. 넌 네 틀에서 벗어나질 못해’ 라는 판단으로 느껴졌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불찰이니 용서하길 바래.


그래서 나 자신 뿐 아니라 나를 통해 에니어그램을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은 건 오직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이것이 타인을 판단하는 도구가 될 때는 여지없이 독이 되어버려. 물론 그런 유혹이 늘 있어.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나면 어느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다 번호로 보여. 또 그런 시각이 전적으로 무익하기만 한 것도 아니야. ‘같은 행동이라도 나와 저 사람의 동기는 이렇게나 다르구나.’를 진심으로 아는 것만으로도 성숙한 관계 맺기가 훨씬 수월해지니까. 다만, 타인을 향해서 쓸 때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이해의 수단으로만 들이대야 한다는 것! 허나, 우리가 아니 내가 그리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절감해. 내게 불편한 사람을 빼도 박도 못하게 비판하는 데만 이걸 쓰고 싶어지는 거야. 그래서 에니어그램을 통해 내적여정을 하겠다는 사람은 에니어그램에만 붙들려 있으면 안 돼. 반드시 정직한 마음의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필요해.


오필이가 말한 ‘감정의 차단과 거리두기’가 생각보다 더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을 거란 통찰, 아프지만 귀한 깨달음인 것 같아. 유형을 이해해서 얻는 또 하나의 유익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내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음을 아는 거야. 예를 들어, 누군가 오필이에게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개그프로의 유행어를 가지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면 참아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화의 방식이 각각 다르다는 걸 알기에 처음 한 두 번은 받아줄 수 있을거야. 그에게 있어선 나름대로 친밀함의 표현이라는 좋은 뜻임을 안다면 조금 더 빈번해져도 참아낼 수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이게 매일 봐야하는 사람이고 시도 때도 없이 (오필이 쪽에서 보기엔) 의미없어 공허한 말들로 개인적 시간과 공간을 침해하며 들어오면... 생각만 해도 죽음이겠지?^^ 그 정도 되면 친근감의 표현이라는 나쁘지 않은 동기를 안다해도 별 도움이 되질 않기 십상이야. 그냥 그 사람이 힘든거지. 너의 거리두기 역시 다른 사람에게 같은 맥락일거야.


'나’라는 고유하고 고귀한 인격을 유형의 틀에 집어넣어 이해하는 것, 참 위험하고 편협한 일처럼 보여. 오필이처럼 삶의 다양한 차원을 다면적으로 보려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럴 거야.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객관적이고 비정한 바로 그 잣대로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해. 브레넌 매닝은 『아바의 자녀』에서 ‘죄의 본질은 우리의 무시무시한 자기중심성에 있다’고 했어. 유형이라는 틀에 나를 넣어서 이해하는 겸손함이 때로 무시무시한 자기중심성을 발견하고 인정하게 해줘. 그러니까 나를 그 딴 유형 따위에 넣을 수도, 유형보다 말할 수 없이 큰 나의 존재도 볼 수 있어야지.


얘기가 여기까지 가면 오필이가 던진 질문보다 답이 더 복잡해진 듯하네. 에니어그램은 내적여정에 도움이 되는 안내자이고, 내적인 여정이란 영적인 여정과 맞닿아 있어. 영적여정의 지향인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의 궁극은 신비일 수밖에 없지. 하나님 그 분이 신비이시니까. 마음의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 딱 떨어지는 모범답안이란 있을 수 없어. 진리는 신비야.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테레사 수녀를 만날 기회가 있었대. 많은 문제로 고민하시던 때라 충고를 들을 요량으로 만나자마자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하셨나봐. 장황하게 늘어놓고 입을 다물자 테레사수녀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대. “글쎄요. 하루 한 시간씩 주님을 사모하며 보내고, 잘못인 줄 아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을 것입니다.” 하셨다는군. 난 내적여정을 가면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에 이 말씀을 떠올려. 우리 마음의 여정은 단지 우리 마음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아래로 신비처럼 나아가는 것임이 분명해. 때문에 마음의 여정을 가면서 부대끼는 일이 생길 때, 뜻하지 않은 아픔을 느끼거나, 누군가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줄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예를 들면, 지난 번 오필이를 만났을 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대화했음에도 돌아보니 나는 어느 새 ‘내가 널 안다. 인간을 안다’며 교만하게 하나님 놀이를 했었더라구. 그럴 때 기도를 통해서 해독하지 않으면 내가 에니어그램 선생이 된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냐는 거지.


오필이가 물어온 것들은 지금 시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질문들인 것 같아.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여정은 반드시 기도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이고, 기도를 통해서 가야하는 길이야. 또 앞서 간 분들의 가르침을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을 하면서 좋은 동반자가 될 책 몇 권을 소개할께.


<내 안에 접힌 날개>   리챠드 로,  바오로 딸
<나 주님의 사랑에 안기다>   데이비드 베너,  생명의 말씀사
<영적 가면을 벗어라>   래리 크랩,  복 있는 사람
<마음의 혁명>   클리포드  윌리암스,  그루터기 하우스
<아직도 가야할 길>   스캇 펙,  열음사
<마음의 혁신>   달라스 윌라드,  복 있는 사람
<영적 발돋움>   헨리 나우웬,  두란노


책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을게. 난이도가 다르고, 저자의 스타일도 다르니까 서점에 직접 나가서 서문이나 목차 등을 보면서 잘 읽혀질 것 같은 책을 먼저 골라 읽어. 모든 책이 다 땡긴다면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고.


커피의 맛과 향을 구분하는 용어들이 있어. 바디감, 신맛, 와인맛, 과일향, 넛트향, 쵸콜릿향, 매운향... 사실 처음 커피를 배울 때는 도통 모르겠더라고. 한 모금의 커피에서 이런 것들을 느끼고 감별해내는 게 장난 같았어. 그저 쌉쌀한 커피향이면 됐지 너무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커피를 알아갈수록 막연하기만 했던 그 맛과 향의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알아가는 것들이 더 맛있게 마시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신비한 존재야. 그런 우리를 유형의 언어로 이해한다는 것은 다분히 작위적이게도 느껴져. 유형이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도 못하지. 신맛, 쓴맛으로 불리는 언어의 수식이 커피가 아닌 것처럼 유형의 언어로 설명된 우리가 다가 아니야. 그러나 유형의 언어로 설명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묘막측하게 창조된 신비로운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 되지. 자, 여기까지!^^




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하는 내적여정5






육미 : 모님, 드디어 오늘이 왔네요. 어젯밤에 살짝 잠 설쳤어요.

모님 : 왜? 모님 독대할 생각에 설레여서? 호호.

육미 : 네? 네, 물론 그렇기도 하구요. 좀 떨리기도 하구요. 6유형에 대해서 설명도 해주실 거지만 저도 말을 잘 해야 할 텐데. 혹시 제가 6유형이 아닌데 6유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고.

모님 : 6유형일까 봐 걱정, 6유형이 아닐까봐 걱정? 걱정근심 주식회사 사장님! 걱정 잠시 접어 두시고 커피 한 잔 드십시다. 아침에 커피 마셨니?

육미 : 네. 그런데 또 마실래요. 잠도 깨야겠구요.

모님 : 너 두 잔 마시면 심장 뛴다고 안했니? 부드럽게 까페라떼 해줄까?

육미 : 좋은데……. 번거롭지 않으시겠어요? 그냥 아무거나 주셔도……. 카페라떼 주세요. 흐흐흐.


6유형

자아이미지 : 나는 책임감이 강하고 충실하다

집 착 : 안전

회 피 : 일탈

근원적인 죄 : 두려움(공포)

방어기제 : 투사

성숙의 열매 : 용기

 

육미 : 감사합니다. 아, 부드럽고 커피향도 너무 좋은데요.

모님 : 직장에선 무슨 일로 그렇게 마음이 복닥거렸어?

육미 : 실은 해외지사에 자리가 하나 났어요. 제가 전부터 해외근무 하고 싶어 했던 것 아시죠? 저랑 친한 팀장님이 그 자리에 제가 갈 수도 있다고 귀띔을 해주시더라고요.

모님 : 그래? 잘됐네. 충직하고 성실한 육미를 알아봐 주는구먼. 육미로 말하자면 책임감 있고,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 공동체에 충성을 다하는 변함없는 사람 아니니. 비오는 수요일에도 수요예배 빠지지 않는 사람, 육미! 하하하. 잘됐다. 좋겠네.

육미 : 그런데 좋지가 않아요. 과연 가서 잘할 수 있을까 싶고, 특혜라고 동료들이 뒤에서 뭐라 하지 않을까, 이제 막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중간에 가야하면 책임감 없는 행동이잖아요. 이래저래 불안해 죽겠어요.

모님 : 게다가 정말 가게 되기는 할까도 걱정되고? 가서 잘못되면 여기서 근무하는 것보다 못하게 될까 싶고, 또…….

육미 : 어? 어떻게 아셨어요?

모님 :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잘못되고 실패할 모든 경우를 나열하면 육미 마음!^^

육미 : 그.그렇죠. 아……. 저는 왜 이럴까요? 모님!

모님 : 에니어그램의 각 유형마다 끝끝내 놓지 못하고 붙드는 집착이 있어. 6유형에겐 그게 ‘안전’이야. 어떤 의미에서든 6유형은 어린 시절에 ‘신뢰감’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키워나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해. 부모가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는 분이었거나, 아이에게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거나, 냉정했거나 했거나……. 각각 경험은 다 다르겠지만 6유형에게는 ‘안전하지 못함’에 대한 뼈아픈 기억이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해야겠지.

육미 : 안전이라는 말이 제 심금을 울리는 말이기는 하죠. 저는 예나 지금이나 아빠가 무섭긴 하지만 ‘신뢰감이 형성이 안됐다’ 이런 건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모님 : 같은 유형이라고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이 똑같지는 않아. 같은 경험에도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해서 내면화 했느냐가 문제니까. 정직하게 마음에 소리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해.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 나눌 기회를 가져보자. 암튼, 6유형들은 안전하고 확실한 것만 추구하려고해. 그런데 인생살이가 어디 그렇게 안전하기만 하냐고. 세상은 너무 위협적인 곳 아니냐.

육미 : 그렇죠! 그러니까 항상 다가올 위험에 대비해 살아야지요.

모님 : 그래 항상 대비하니깐 대비가 되시든가요?

육미 : 네? 아, 하하하……. 대비가 되도록 해야죠. 갑자기 이렇게 예상에 없는 문제를 내시면 당황이……. 그러고 보면 저는 규칙과 정해진 틀어 벗어나 갑자기 생기는 일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게 약한 것 같아요.

모님 : 그래서 안전에 붙들린 6유형이 극구 회피하고자 하는 ‘일탈’이라는 거야. 6유형들은 규범, 법, 정해진 대로, 상식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잘 지키지. 그런데 그 동기가 뭐냐? 위협적인 세상에서 이런 외적 권위라도 부여잡고 있으면 그나마 안전하지 않겠냐는 거야.

육미 : 그래서 그런지 뭔가 정해진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걸 보면 화가 나는 것 같아요.

모님 : 정도에서 벗어난 ‘일탈’이라는 것은 6유형들이 그렇게도 목숨처럼 지키고 싶은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니까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의 일탈도 봐줄 수가 없겠지.

육미 : 제가 그래서 ‘다워야 한다’라는 말을 좋아하나봐요. 학생은 학생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목사님은 목사님답고……. 제발 그렇게 각자 지킬 것은 지키는 세상이었음 좋겠다고요. 아, 나 왜 이리 흥분을 하지. 저 좀 흥분했죠? 흐흐흐…….

모님 : 그러게 말이다.

육미 : 아, 어제 운전을 하고 가는데 집 앞 도로에서 어떤 고딩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차도로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옆에 버젓이 인도를 놔두고 말예요. 순간 너무 너무 화가 났어요. 클락션을 빵 울리니까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는데도 계속 화가 가라앉질 않는 거예요. 아우, 그런 인간들 때문에 속이 부글거리는 게 한 두 번이 아녜요.

모님 : 단지 인도 놔두고 차도로 걸어갔기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거야?

육미 : 아니, 그러니까 거기가 커브였는데요 제가 못 봐서 칠 수도 있었잖아요.

모님 : 그 짧은 순간에 벌써 머릿속에선 교통사고 났고, 119 부르고, 응급실까지 갔구먼.

육미 : 헤헤헤……. 보험처리까지 끝났죠.

모님 : 그러니까 그 순간 치밀어 올랐던 감정은 차도로 걷는 고딩 때문이 아니라 육미 안에 있었고 순간적으로 건드려지고 증폭된 ‘두려움’ 때문이라는 거지. 그것이 6유형의 근원적인 죄야. 늘 걱정, 근심, 불안, 공포에 시달리는데 문제는 이것이 어디서 오느냐? 밑도 끝도 없는 온다는 거고, 이유 없는 두려움이라는 거지.

육미 : 으아, 밑도 끝도 없지는 않아요. 모님. 사고가 날까봐 그런 거잖아요.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시면 좀 억울한데요. 이유가 없다……. 이유가 없다…….라는 말씀이죠? 아, 좀 혼란스러운데……. 이런 기억이 있어요. 어렸을 적에 어느 날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서 아빠한테 무지 혼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놀다가 또 늦은 거예요. ‘오늘 집에 가면 죽었구나’하고 각오를 하고 들어갔는데 아무 일이 없었어요. 이상하게 혼날 예상을 하고 들어가면 안 혼나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면 혼나는 거예요. 이 때 부터 저는 일이 잘못되는 최악의 경우를 끝도 없이 상상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요. 실은 그 상상 속 불안과 공포 속에 있는 게 차라리 편한 것 같아요. 어, 이게 지금 뭐라는 거지? 암튼, 그래서인지 제가 사람들이 저를 이용하려 하거나 나쁜 뜻이 있는 게 잘 보여요.

모님 : 하하, 정말 그럴까? 물론 6유형들은 부조리한 것과 의심스러운 것을 감지하는 육감이 있다고 해. 그런데 이게 항상 맞겠느냐는 거지. 6유형이 쓰는 주된 방어기제는 ‘투사’야.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동기가 타인에게도 있다고 상상하는 거지. 그래서 타인들의 마음을 읽으려 하고, 배후에 감춰진 것을 찾아내려 하지. 또 자신이 읽어낸 게 진실로 맞다고 생각하는 게 투사야. 좀 과장하면 6유형들 ‘음모론자’라고 부를 수 있겠다. 늘 의심하고, 뭔가 음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하는 거 말이야.

육미 : 허거걱! 그…….그게 투사군요. 왜 이리 얼굴이 화끈거리죠?

모님 : 자신의 유형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면 에니어그램이 주는 선물의 더 깊은 차원으로 발을 들여놓은 거야.

육미 : 모님, 저의 두려움이 죄라는 말씀에 대해서 한 번 더 설명해 주세요.

모님 : 여기서 말하는 근원적인 죄란 도덕적인 죄가 관계적인 죄로 이해해야 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진짜 너 자신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죄지.

육미 : 두려운 건 그냥 두려운 거잖아요. 사람이 두려워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모님 : 그렇지. 말 잘했다. 두려워하니까 사람이야. 애초부터 혼자 힘으로는 안전할 수 없는 존재가 피조물인 인간의 자리잖아. 자신의 안전을 자신이 지키겠다고, 지켜야만 한다고 온 몸에 힘을 주고 사는 사람이 단적으로 6유형이라는 거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붙들고 씨름하는 거나 다름없지. 게다가 언젠가 네가 말한 것처럼 불안을 더 큰 불안으로 해결하려고 하잖아.

육미 : 그렇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죠. ㅜㅜ

모님 : 밑도 끝도 없는 정체불명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고, 꺼진 불 다시 보고 또 보고 단속하고 또 단속하면 위험에서 벗어날 거라는 환상 또한 하나님 노릇하겠다는 것이니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냐?

육미 : (울먹) 모님, 저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모님 : 두려움을 더 큰 두려움으로 피하지 말고 하나님께 피해야지. ‘걱정 근심 안전제일’ 시스템이 자동 테이프처럼 돌아가는 걸 알아챌 때마다 ‘어, 내가 또 이러고 있네.’ 하고 멈추는 거야. 멈추는 순간 우리 안에 이미 계시는 성령님의 안전한 품으로 피해야지. 네가 있는 그 곳, 성령님의 내미는 손을 붙잡기만 한다면 언제나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야.

육미 : 알 듯도 모를 듯도 하지만 아주 작은 빛이 마음에 비치는 것 같기도 해요. 감사해요. 모님, 저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또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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