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3

 

 

어느새 온통 한 덩어리의 푸르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무의 빛깔이 제각각이었다. 연두, 연두 같은 연보라, 조금 짙은 연두, 일찍 철든 아이처럼 벌써 진해진 초록도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제각각 짙어지더니 신록의 정점에 이른 것 같다. 정점에 이르니 이 나무 저 나무 구분이 안 된다. 양평 가는 강변길을 달린다. 왼편에는 한 덩어리의 신록이 넘실대고, 오른편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고요하다. 최 선생님을 모시고 가는 드라이브라 설렘 그 이상의 긴장이다. 이 순간 이 풍경이 선생님 마음에 꼭 들면 좋겠다는 간절함에 마른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평소 같았으면 “와아, 너무 좋다!” 연발하며 설레발쳤을 텐데, 오늘 이 나들이를 도모한 호스트로서 손님의 평가를 기다려야 했다. 말없이 차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시는 나의 VIP 최 선생님은 말씀이 없으시다. 자동차는 빠르게 달리는데 선생님 앉으신 강 쪽 풍경은 그림처럼 멈춰 있는 듯하다.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니 점점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가 무리한 제안을 한 것은 아닐까.

 

전부터 약속된 날이었는데 어제 갑자기 전화를 해오셨었다. 집에 손녀딸이 와서 지내고 있으니 다음에 보자고 하셨다. 그러겠노라 전화를 끊고는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모시고 드라이브를 한 번 가면 어떨까. 자연을 그렇게나 사랑하시는 선생님께 내가 좋아하는 두물머리의 한적한 강변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졌다. 다시 전화를 드려 댁에서 손녀와 함께 계셔야 할 것이 아니라면 밖에서 뵙는 것은 어떠신가 여쭈었다. “나야 감지덕지 좋지요. 정 선생이 수고스러워서 그렇지. 내가 지하철로 정 선생 근처로 갈 테니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 아니야, 여기까지 오면 나는 소풍 같이 안 가요.” 하며 좋아하셨다. 흔히 말하는 ‘벙개’다. 갑작스레 신나는 일을 도모하고 성사된 기쁨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도통 요즘 이런 일이 있어야 말이지.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고 만나야 하니 만나는 사람들이니! 그야말로 소풍 가는 날 아이 마음으로 신선한 원두로 내린 커피를 텀블러 두 개에 나눠 담아 준비하고, 차에서 틀 음악까지 선곡해두고 있었다.

 

두물머리 나들이

 

잠실역에서 만날 때만 해도 내 마음이 선생님 마음이려니 했다. 이 청명한 날씨에 나들이가 설레시겠지. 운전을 놓으신 지 한참 되셨고, 맘 편한 드라이브는 오랜만이실 거야. “어이구, 늙으니 호강하네! 하나 힘든 거 없어요. 지하철이 다 데려다주는 거 뭐가 힘들어요. 얼마 만에 양평 나들이인가.” 소풍 날 들떠서 나눈 인사 끝에 잠시 조용해진 틈에 조용필의 ‘허공’을 딱 틀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십팔 번이라며 언급하신 노래다. “어허, 이 사람 센스 하고는!” 하셨다. 음악이 끝나고 뭐라도 말씀하시길 기다리며 달리다 어느새 팔당대교를 넘고 양수리 근처 강변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처음엔 노래로 회한에 잠기신 것인가 싶었는데 그것만은 아닌 듯 점점 더 말씀이 없어지시고, 어쩐지 알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들떠 있던 마음이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보자고 하셨는데 굳이 이렇게 나오시게 한 것이 결례가 된 것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오래도록 제가 서울 동편에 살아서요. 마음만 먹으면 휘리릭 나와서 달리고 걸을 수 있는 곳이거든요. 이렇게 좋은 경치를 2, 30분 만에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 같아요. 언젠가 꼭 선생님 모시고 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아이구야, 내가 정신이 딴 데 가 있었구나! 고마워요, 나도 아주 좋아하는 곳이에요. 친구들과 한 번씩 바람 쐬러 와보기도 했고요. 아, 수종사라고 알아요? 그 앞마당에 서면 남한강 북한강 두 물이 만나는 게 그대로 보인답니다. 거기 참 좋은데,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해서 웬만한 운전 실력자가 아니면 엄두를 못 내죠.

     수종사 알지요. 저도요 참 좋아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이 운전해서 움직일 때나 가볼 수 있어요. 아, 열심히 연마해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 언젠가 선생님 모시고 고고씽 하겠습니다!

     하하,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하이튼 이 사람 참!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나를 태우고 수종사에 함께 가곤 했던 친구가 있어요. 쾌활하고 밝은 것이 정 선생과 비슷하네. 벌써 5년 됐네요. 그 친구 천국에 간 지가. 아니요, 괜찮아요. 가끔 그립긴 하지만 그리운 것이 어디 하나둘이어야지. 정 선생하고 이쪽에 나오니 그 친구와 다시 만난 기분이네. 늙은이랑 놀아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마음 써서 준비했는데, 노인네가 만나자마자 침울해서 마음 쓰였죠? 주책바가지.

     아뇨, 선생님. 혹시 손녀 따님과 함께 계셨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들이댔나 싶어요. 무리해서 나오신 건 아닌지...

     물론 괜찮아요. 집에서 나오는 데 며느리가 갑자기 왔어요. 집에 와 있는 손녀딸의 에미. 내가 같이 있으면서 중재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냥 두고 나왔어요. 아직 마음이 몸을 못 따라왔나 봐. 마음이 잠깐 집에 가 있었어요. 이제 마음까지 여기 왔습니다. 내 걱정은 말고 좋은 날씨, 풍경을 맘껏 즐깁시다. 야, 좋다! 하늘이 그림 같네요.

 

손녀딸 이야기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고, 사람들 없는 한적한 강변에 주차했다. 선생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바라보는 강물은 흐르기보다는 멈춰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번 만나면 서너 시간 대화는 기본이지만 개인 신상에 관해서는 내가 먼저 꺼내지 않는 한 잘 묻지 않으신다. 당신 이야기도 웬만해서는 잘 내놓지 않으신다. 어쩐 일인지 오늘 아침 상황을 설명하시며 손녀딸 이야기를 하셨다. 일종의 가출이라고.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과의 갈등 끝에 집을 나와 선생님 댁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다. 가정적이고 성실한 아드님은 두 딸을 남다르게 공들여 키웠다고 한다. 딸들의 아빠에 대한 마음도 깊어서 보기 드문 부녀지간이라고. 사춘기 어려운 시절에도 엄마와는 부대끼고 갈등이 있었을망정 아빠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하셨다. 결혼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였다. 딸들의 일이라면 ‘No’가 없는 아빠가 결혼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단다. 음악을 전공해 명문대에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딸이다. 유학을 포기하고 돌연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이 일로 부녀 사이는 전에 없던 갈등 관계가 되었다. 큰 소리 날 일 없었던 가정이었는데 가족 전체가 폭풍에 휘말린 것이다. 흔히 그렇듯 부모의 반대가 강할수록 남자 친구에 대한 열정은 더 커지고, 그럴수록 부모는 배신감으로 깊이 좌절하게 되고... 딸들에게 관대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태도가 바뀌어 박사과정 밟으며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는 큰딸에게도 결혼을 강요하더니 아예 부모 쪽 인맥으로 두 딸의 결혼 대상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에 없이 대화가 어긋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단다. 와중에 둘째는 최후통첩 후 집을 나와 할머니 집으로 온 것이다. 어떤 일에도 초연하실 듯한 선생님이다. 하나뿐인 아드님이지만 독립적으로 살고 계신 듯하여 보기가 좋았다. 나도 노인이 되면 자식들과 저렇게 지내야지 싶었다. 따뜻하고 세심하지만 연연하지 않는 태도는 좋은 노인의 표상처럼 느껴지는 최 선생님만의 매력이다. 그런데 평소 선생님답지 않게 쉬 떨쳐내지 못하시는 듯 말씀 끝에는 여운이, 표정에는 무거움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할머니시고 어머니시니 다행이고 부럽네요. 손녀 따님이 와서 기댈 할머님이 계시니... 멀리 갈 것 없이 상담가 할머님, 어머님께서 곁에 계시니 얼마나 좋을까요.

     평생 상담하고 상담 가르치며 살았지만 내 가족 문제에는 속수무책이에요. 다 큰 자식 앞길에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죠. 성경 말씀대로 결혼은 ‘부모를 떠나’는 것이니 떠나 보내는 것은 부모의 몫이고요. 헌데 이게 말이 쉽지요. 우리 아들 말마따나 고생길이 훤한 결혼은 막아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는데, 떠나보내라는 말이 들리지 않을 거예요. 제 살 도려내는 고통이라는 것을 내가 알지요. 하지만 다 큰 아이는 부모 말을 듣겠어요? 반대할수록 더 뜨거워지는 것이 남녀 간 정인데. 설령 고생길이 훤해도 부모가 개입하여 고생길을 꽃길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져주는 것이지요.

     그, 그렇군요. 선생님. 저로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잘 가늠이 되지 않아요. 할 수 있는 일이 져주는 것이라... 아무튼 집안에 선생님 같은 어머니, 할머니, 어른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엉뚱하게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다소 냉소적이랄까 자조적인 선생님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되겠죠? 정답이잖아요. 내 아들과 손녀 사이에선 이걸 갖고 들이댈 수가 없어요. 우리 아들의 그런 모습을 처음 봐요. 순한 사람이거든요. 딸들 앞에서 큰 소리 한 번 내는 것을 못 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완고해요. 철벽같아요. 처음엔 나도 반대하는 아들 마음에 수긍이 됐는데, 아니 할 말로 우리 손녀가 아깝단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아들이 자기 논리에 빠져 상황을 최악으로 상상하며 더욱 고집불통이 되네요. 이러다 보니 손녀는 물론이고 식구들 모두 당황하게 되고, 갈수록 실망하게 되는 거지요. 아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밥도 잘 못 먹고 어깨가 축 늘어진 손녀딸을 보면 그 녀석 또한 곁에 두고 보기가 아주 가엾죠. (깊은 한숨)하아... 내가 묻지도 않는 가족사를 떠들어대고 있네요. 정 선생이 청년들 많이 만나지 않아요? 아, 연애 강의도 한다고 했죠? 전문가가 여기 계시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아휴, 선생님 잘 아시면서요. 저라고 무슨 수가 있으려고요. 그런데 아드님이나 손녀를 따로 만나보진 않으셨어요? 선생님 의견을 말씀하시진 않으시나 봐요.

     내 의견이 뭐 중요하겠소. 각각 자기 소견이 분명한데. 아들 내외는 그들대로 손녀는 손녀대로 내게 서운한 것 같기도 해요. 특히 아들은 별말은 안 하지만 나마저도 제 편을 들지 않는 것이 내심 야속할 거예요. 그러고 보면.... 내가... 아, 아닙니다. 정 선생 배고프지 않아요? 맛있는 쌈밥집 간다고 했죠? 갑시다. 고마운 우리 정 기사님 점심 잘 대접해드리리다.

 

섭섭함과 쓸쓸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

 

식사 전엔 늘 여러 알의 약을 드시곤 하시는데. 오늘따라 약의 양이 많아 보였다. 늘 드시던 약이건만 오늘따라 마음이 쓰였다. 신선한 야채를 좋아하셔서 야심차게 고른 식당인데 내가 그렇게 보아서인지 생야채와 고기가 버거우신 듯 잘 드시지 못하셨다. 나도 덩달아 입이 써서 쌈 야채가 거칠게만 느껴졌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우리 큰애도, 아니 작은 녀석도 언젠가 결혼하겠다며 낯선 어느 녀석을 데려올 날이 있을 텐데. 어릴 적부터 자주 생각했었다. 주변 또래 아이들을 떠올려 상상으로 짝을 본 적이 있다. “그 녀석은 그래서 안 돼... 아, 누구는 제 엄마가 좀 문제야...” 어떤 청년이면 내가 만족할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나 성품을 가진 사람이면 어떡하지? 진로와 전공을 선택할 때마다 그러했듯 오직 아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면 더욱 그렇다. 식사를 마치고 강 전망의 카페에 가 앉았다.

 

     정 선생, 노인네 눈치가 많이 뵈지요?

     네? 아니에요. 선생님. 눈치는요... 식사도 많이 못하시고 안색이 안 좋으시니 조금 걱정이 될 뿐이에요.

     내가 왜 이럴까? 늙어서 좋은 것 중 하나가 웬만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거든요. 좋아서 뛰는 일도 없지만 그만큼 마음이 상하고 두려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요 며칠은 전에 없이 마음이 무겁네요. 그걸 숨길 수 없으니 정 선생이 내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일 거예요.

     눈치라기보다는요... 아, 저... 선생님, 저희 친정엄마나 시어머님 생각해보면 아직도 저희 사는 일에 좋게 말하면 걱정, 사실대로 말하면 잔소리와 간섭이 많으시거든요. 아까 떠나 보내야 한다는 표현하셨는데,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결코 저희를 놔주시지 않는다 싶어요. 물론 연세 드시며 전보다 약해지긴 하셨지만요. 선생님은 그 면에서 경계를 분명히 세우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며느님 얘기 가끔 하실 때 우리 어머님 같으시면 벌써 여러 번 섭섭해서 전화하셨겠다 싶은데. 선생님은 예삿일로 여기시더라고요. 그런 선생님을 잘 배우고 싶어요.

     정 선생 나한테 점수를 높이 주는 경향이 있어요. 나라고 왜 섭섭한 것이 없겠어요. 없기는! 섭섭한 것뿐이지. 허허. 노인의 길이지요. 어쩌면 소명일지도 몰라요. 섭섭함, 쓸쓸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요. 아하, 그런 내가 손녀딸 결혼 문제에 대해 개입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여요?

     아니요. 오히려 그러시고 싶지 않으셔서 더 힘드신 것 아니에요?

     독심술이 있네. 이 사람! 개입하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해도 소용없으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고요. 지켜보는 마음이 아파요. 실은 내가 아들에게 지은 죄가 있어요. 아들이 난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 평소답지 않게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내게서 비롯된 거예요. 결국 이 부끄러운 얘기를 하고 마네. 정 선생은 지금의 나를 보면서 선망하지만 젊을 때 나는 참 미숙한 사람이었어요. 자기중심적이었고 세속적이었죠. 그걸 직업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능력까지 있었으니... 아들이 결혼하고자 했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내가 반대했어요. 남편은 허락하는 걸, 내가 끝까지 반대했어요. 아들이 워낙 순종적이기도 하고, 제 엄마 고집을 아니까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요. 내가 이리저리 조건 따져서 선을 보게 해 며느리를 봤어요. 글쎄요, 아들이 지금 의식적으로 저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나는 알지요. 뒤늦은, 한참 늦은 나에 대한 반항의 뜻도 있다는 것을요. 아들 생각엔 이럴 때 내가 제 편을 들어야 맞는 거예요. 반대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네가 아직 젊고 세상을 몰라서 그렇지. 결혼하면 반드시 후회한다.’ 이거예요. 가슴이 미어져요. 살면서 잘못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아들에게 참 미안한 거예요. 돌아보면 정 선생 말마따나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한 인생을 내 맘대로 휘두른 것이죠. 후회하고 말고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내가 다르게 하겠어요? 그때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성공을 이루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요. 일, 가정, 아이 교육, 모든 것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신도 있었고요. 예수님을 모르는 인생이니, 눈에 보이는 게 전부였죠. 아들은 착하고 성실해요. 하지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잘 되는 삶에 대한 집착이 그때의 나와 다르지 않아요. 내가 하는 걸 본대로 제 딸에게 하는 거예요. 제 아빠에게 실망하여 분노하고 눈물짓는 손녀딸을 보면 한없이 미안할 뿐이에요. 정 선생, 나이 먹는 건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을 쌓아 가는 거예요. 나 이런 사람이라고. 그러니 나를 벤치마킹 하겠다느니 배우겠다느니 하는 말은 하덜 말어요.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는 삶

 

말씀 중간중간 강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말씀을 마치시며 고해성사하는 것 같다며 웃으셨다. 선생님은 당신을 존경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내 마음을 더 잡아당기신다. 당신의 실패담으로 가르치고 일깨우신다.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나이와 함께 쌓아온 ‘부끄러움’을 내어놓으심으로 깨우침을 주시는 것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나는 반면교사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이 좋아 敎師지. 누군가를 반면교사 삼겠다는 것은 그의 행태로 고통받았다는 뜻이고 상처 입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선생님의 실패담은 반면교사 삼을 것이 아니다. 무얼까, 한 노인의 실패담이 감동으로 오는 이유는. 나도 선생님 따라 말을 멈추고 흐르기보단 그대로 멈춰 반짝거리고 있는 듯 보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 돌려 선생님을 쳐다봤다. 눈물로 촉촉해진 눈가가 강물을 따라 반짝 빛이 났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책 제목 하나가 툭 마음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연달아 ‘성찰’이란 단어가 따라 나왔다. 삶의 성장이 긍정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경험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최 선생님께서 하신 적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가장 성숙한 사람에게 관찰되는 것은 성찰의 능력이더라고 하셨다. 실패담을 말씀하시는데 오히려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오히려 나로 더욱 배우는 태도가 되게 하시는 것은 성찰의 힘이신가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쌓는 것이지만, 잘 늙는다는 것은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카페를 나설 때 나는 한결 가벼워졌다. 내내 뭔가 선생님께 죄송하고 불편했던 마음 사라졌다. 뭔가 깊어지고 충만해졌다고나 할까. 선생님께서도 후련하고 가벼워졌다고 하셨다. 야심 찬 나들이 계획은 거의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지만 마지막 카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스마트폰 음악 앱에 저장해둔 노래를 틀고 카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어머나!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다. CCM 가수 한웅재 목사님이 부른 ‘하숙생’이다. 이 곡도 언젠가 선생님께서 강의 중에 언급하셨었다. 그때 듣고 검색해서 알게 된 리메이크 연주이다. 느끼함 없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차분한 피아노 반주에 맞춘 노래가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서 들으니 가사 하나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순례길인 인생,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향방 없는 여행은 아니다. 돌아갈 집이 있는 이 여행이 길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춘기 아이와 갈등하고 있는 나는 금세 아이 결혼으로 골머리를 싸매는 날이 오겠지. 선생님의 오늘 모습처럼 탓하기보다 성찰하고, 통제하기보다 조용히 기도하는 중년을 살아야겠다.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래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 선생, 고마워요. 오늘 참 좋았어요. 덕분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아들에게나 누구에게든 잘못한 것들 이제 와 어쩌겠어요. 치러야 할 값이 있다면 이제라도 감당해야겠죠. 아들과 손녀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뿐이지만 회개하는 마음으로 더욱 기도해야겠어요.” 마침 한웅재 목사님의 ‘임계점’이란 찬양이 차 안에 신나게 울려 퍼진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내일의 몫 오늘의 내 삶을 힘껏 디뎌 일어서...’ 더욱 기도하시겠다는 말씀이 힘껏 디뎌 일어서신다는 뜻으로 들렸다. 한 덩어리가 된 신록의 숲과 한결 부드러워진 오후의 빛을 받아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이 여전하다. 성찰의 힘으로 누구보다 강인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쓸쓸한 노인을 따스하게 안아주시는 그분의 품이려니.

 

 

* 시니어 매일성경 2021년 5,6월 호 기고글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2

 

 

 

“너희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소설 원작의 영화 『은교』에 나오는 대사이다. 노(老) 소설가 이적요의 독백이다. 그리 감명 깊게 본 영화도 아닌데, 저 대사만큼은 어쩐지 잊히질 않는다. 박완서 선생의 소설에 매료되어 출간을 기다리며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읽어댄 여러 소설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다. 이 역시 읽을 당시 그다지 큰 감동은 없었다. 선생의 소설 중 최고로 꼽는 작품은 따로 있다. 그런데 유독 기억나는 인물과 대사는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죄 모여 있다. 노인들이 주인공이고 노년의 쓸쓸한 나날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다. 나도 모르게 노년의 몸, 노년의 삶에 끌린다. 그런가 하면 실제 삶에선 이상하리만치 노인 대하는 것이 어려워 가까이 다가가질 못한다. 음악심리치료를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 학기마다 치료 실습이 있었다. 장애 비장애 아동부터 정신과 환자와 노인 질환자, 일반인까지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경험하는 것이 실습의 목표였다. 그러다 자연스레 적성에 맞는 대상을 찾아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대학원 내내 노인 대상 치료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핑계는 늘 있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피해 다닌 게 맞다. 졸업 후에는 학생들 실습 지도 일을 했었는데, 그때도 역시 노인기관은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것 같다. 이상하리만치 노인, 특히 노인의 몸에 대해 끌림과 거부 사이를 오갔다.

 

노인에 대한 양가감정

기억 저편의 소설 『은교』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 떠오른 것은 최 선생님 때문인 듯하다. 벌써 선생님을 여러 번 뵈었다. 일로 만나는 사이지만, 일 얘기는 헤어지기 전 몇 마디면 족하다. 책 작업과 관련 없는 수다로 몇 시간이 훌쩍 지나곤 한다. 주로 내 고민을 끝없이 털어놓는 격이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이 듣고만 계시는 건 아니다. 한 번씩 가볍게 질문 던지기도 하시는데, 그 때문에 내 얘기가 끝나질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줄줄 쏟아내게 하시니, 과연 평생 상담으로 살아오신 전문가답다. 이 만남이 참 좋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뵈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노인의 몸, 80을 넘긴 노구의 몸을 가진 선생님께 끌리면서 동시에 밀어내는 내 마음을 본다. 알 수 없는 내 마음이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끝없는 얘길 나누노라면 오후의 햇살이 거실 안쪽까지 깊게 훑고 지나가곤 한다. 빠져나가던 빛이 어쩌다 선생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볼 한쪽에 조각 햇살이 남아 그 부분만 환하게 도드라졌다. 그때 선생님의 피부가 유난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서둘러 눈길을 거두었다. 실은 마주하고 긴긴 얘기를 나누면서도 선생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바라보는 것 같은 모양새는 했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흐릿하게 보려 애썼다.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어우러진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어쩐지 죄송하고 민망하다. 선생님의 인격에 한없이 끌리지만, 그래서 자꾸 가까이 가고 싶지만, 한편 뒷걸음질 치게 되는 순간이다. 알 것도 같고 영 모르겠다 싶기도 한 노인에 대한 양가감정이다. 고백컨대, 처음 선생님과 가까이 마주 앉아 얘기 나누던 카페에서부터 작은 불편함이 있었다. 깊은 주름, 검버섯과 겉도는 밝은색 립스틱이 무척 버거웠다. 선생님은 좋지만, 선생님의 얼굴은 싫었다. 그런 마음을 들킬까, 도둑 제 발 저리는 심정으로 눈을 게슴츠레 떴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나쁜 짓 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선생, 내 얼굴이 좀 우습죠?” 나는 분명 재빠르게 거둬들였는데, 그새 내 눈길을 잡아채신 것인가. “네? 무... 무슨 말씀요. 서... 선생님 얼굴이... 왜요, 좋으신데요.” 당황해서 말이 잘 수습되지 않았다. “아, 글쎄 우리 아들 며느리가 저네들 다니는 병원에 데리고 가더니 얼굴에 주사를 놨지 뭡니까. 뭘 넣는다고 펴질 주름도 아닌데, 늘 이렇게 더 우습게 만들어놔요. 그래서 자꾸 쳐다보는 거죠? 우습죠?” 휴우, 안심이 되고 다른 한편 더욱 죄송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심정이 되었다. 어서 화제 전환을 해야지 싶은데, 웬걸. 직진을 하셨다.

 

      내 얼굴을 보는 게 참 낯설어요. 내 사진을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죠. 나인가 싶지 않은 거지. 그렇다고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익숙해지지 않을 뿐이지.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있습디다. 내담자나, 젊은 선생들과 얼굴 맞대고 있는 시간이 많은데. 그분들 참 고역이겠구나. 마른 대추같이 쭈글쭈글한 얼굴 들여다보는 게 좋겠어요?

 

     아, 아니에요.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에이, 뭐, 그, 그런 말씀을...

 

    정 선생은 유난히 사람을 뚫어져라 보잖아요. 하하. 정 선생 눈빛이 강렬하다고 아주. 가끔 쭈그렁 망탱이 노인네 민망해요. 하하. 우리 아들이 제 엄마 늙는 것에 아주 질색팔색을 해요. 먹을 것도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 매일 운동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죄다 별 소용없는 일인 줄 알지만 못 이기는 척 따라 하고 있어요. 시키는 대로 하는 것밖에 해줄 게 없으니. 가끔 이렇게 얼굴에 뭘 넣어 주름이 펴지면 그렇게 좋은가봐요. 나도 마지못해 따라가는 건, 조금 팽팽한 얼굴이 젊은 내담자들에게 덜 부담스러우려나 싶은 마음도 있답니다. 그러니 주책스러워 보이겠지만 그러려니 해줘요.

 

    아, 선생님 저는 정말 전혀 몰랐는데요. 평소와 다르지 않으신 것 같아요. 아? 아닌가? 이건... 어, 그러니까 선생님 자연스럽다는 말씀인데...

 

끌리는데 멀어지고 싶은 마음

나는 사실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봐 드리지 못한 것이 오히려 민망했다. 이미 충분히 노회한 얼굴에 사로잡혀 시술과 관리로 달라진 변화가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노인인 선생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묻지도 않는 당신 얼굴 얘길 하실 때,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깨달아졌다. 나는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가. 선생님의 늙음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닌데, 난 왜 똑바로 보지 못할까. 똑바로 보지 않으려 애썼는데 어째서 선생님은 그 반대로 느끼신 걸까. 난 정말 선생님의 정신과 말씀은 모두 좋지만, 시술로도 어떻게 안 되는 노화로 가득 찬 선생님의 얼굴과 몸은 버겁기만 하다. 처음으로 닮고 싶은 어르신을 만났다. 나도 저렇게 나이 먹었으면 싶은 바로 그 노인을 만났다. 선생님께선 ‘우정’이란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세대의 간극을 넘어 우정이 두터워지는 것이 느껴져 황송하고 행복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생님의 몸을 마주하는 것이 버거웠다. 그래서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이 설레면서 동시에 무거웠다. 노인의 몸에 끌리면서 동시에 거부감이 드는 딱 그 지점이다. 피할 수 없다. 한 번쯤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설명해주실 것 같고, 무엇보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않으면 진실하게 대화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들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참 희한한 것이요. 저의 친정엄마가 90이 넘으셨거든요. 그렇죠. 선생님보다 한참 위이시죠. 저를 늦게 낳으셨어요. 거의 뭐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주 차이죠. 어릴 적에야 제 부모님밖에 경험하지 못하니 다른 집도 다 그런 줄 알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노인들이 아이를 키우신 거예요. 그래서 그럴까요. 저는 노인들, 특히 노인들의 몸에 본능적으로 끌려요. 그런데 끌리는 만큼 밀어내는 힘도 강렬해요. 너무 마음이 쓰이는데 그럴수록 멀어지고 싶달까. 무슨 말씀인지 모르시겠죠? 저도 제가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어, 나는 알 것 같은데. (웃음) 그래서요? 궁금하다. 정 선생 노인네인 나한테 끌려서 이렇게 친해진 거잖아요. 끌리는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뭘까? 우리 집에 그만 오겠다는 말은 아니죠? 하하.

 

     헤헤, 당연히요! 선생님 조금 전에 선생님 얼굴이 낯설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나이를 완전히 잊게 되는 것 같아요. 제 또래 모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세대를 뛰어넘어 이렇듯 편안하게 말씀을 나눌 수 있다는 게 가끔 믿어지질 않아요. 그래서 그런가. 뭐랄까, 아, 뭐랄까. 그게 너무나 감사하고 좋죠. 그러니까 선생님의 정신은 젊으신데, 연세 드신 몸이 좀 순간순간 낯설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잘 표현이 안 되네요.

 

      허허, 거참 기분 야릇하네. 칭찬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늙은 얼굴이 부담된다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그.... 그게요. 선생님, 부담이 아니라.... 그....

 

      알겠어요.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믿길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도 그래요. 내 생각은 아직 한참 젊은데 몸만 늙은 것 같아요. 팔십 넘은 얼굴이 이래야지 어떠해야겠어요. 80년 넘게 쓴 몸이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머리로는 받아들이는데 나도 내 몸이 낯설어요.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정 선생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은 뭐 50 넘은 당신 몸이 적응이 되우? 몸이 가는 시간은 정직한데 마음이 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요. 그런데 정 선생은 그 말이 왜 그리 어려울까? 내가 어려워서 그러는 것 같진 않은데.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해봐요.

 

왜 그리 죽음에 끌려요?

몇 마디 말씀에 안심이 되었다. 영화 『은교』의 대사부터 시작해서 끙끙거리던 내적 갈등을 털어놓았다. 말을 할수록 금세 마음의 짐이 덜어졌다. 희한하게 선생님의 주름진 얼굴, 아니 의술의 힘으로 일부 팽팽해져 더욱 어색한 선생님 얼굴을 편안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내 얘기를 다 들으신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알 듯 모를 듯 웃음을 지으셨다.

 

      정 선생은 왜 그리 죽음에 끌려요?

 

      네? 죽음에 끌린다고요? 제가요? 그런 말씀 드린 적 없는데...

 

      나는 내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봐요. 아까 내 얼굴이 낯설다고 했는데, 이렇게 늙은 낯선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일부러 죽음을 생각해요. 노인의 몸으로 사는 것이 어떤지 물었죠? 죽음이 반쯤 덮친 몸이구나, 나는 이렇게 느껴요. 아기의 얼굴을 떠올려봐요. 다가가 어루만지고 싶고 입이라도 맞추고 싶죠. 누구랄 것 없이 아기의 몸에 끌려요. 노인에겐 어디 그런가요? 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봐요. 아기에게선 생명의 기운이, 노인에게선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탓이지. 정 선생의 말, 노인에게 유난히 끌리기도 하고 달아나고 싶기도 하단 말이 죽음에 대해 그러하다고 들려요. 정 선생, 가까이에서 경험한 죽음이 있어요?

 

      네? 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어릴 적이라 뭐가 뭔지 몰랐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엔 아버지 없이 사는 것이 태산 같은 일이라, 깊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같아요. 죽음 자체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늘 강렬했고, 그러는 한편 죽음은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은 공포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거울에 비친 모습에 죽음을 떠올리신다는 말씀이 놀랍네요. 아, 놀랍다는 게 신선하달까 그런 느낌이라 좀 야릇해요.

 

      정 선생 처음 우리 집에 왔던 날, 좋은 노인이 되고 싶다고 했죠? 갱년기 증상을 겪으면서, 고치고 운동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당혹스럽다고 했던가?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려 태도를 봤어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갱년기 증상은 죽음이 보내는 강력한 신호라고 생각해요. 정 선생이 자기도 모르게 그 신호를 알아채고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때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정 선생 나이 때 그런 깨달음이 없었거든. 힘쓰고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도 마음먹은 것을 결국 대부분 이뤄내고 말았고요. 갱년기니 뭐니 하는 것도 나약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해보면 강단에서 가르쳤던 것, 내담자 앞에 두고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았죠. 좋은 노년은 없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좋은 노년은 좋은 중년의 결과예요. 내가 생각하기엔 그래요. 내 뼈아픈 경험에서 얻은 생각이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좋은 노년을 사시고 계시잖아요. 말씀대로라면 그 이전의 삶의 결과 아닌가요?

 

      정 선생이 좋게 봐줘서 그래요. 그나마 이렇게라도 깨달은 것은 나이 60이나 되어 호된 고난을 겪은 덕분이지요. 덕분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네. 말 그대로 죽음에 욱여쌈을 당한 시절이었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죽음에 욱여쌈을 당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셨다. 60대 초반, 선생님의 남편께서 암 선고를 받으셨다. 예고 없이 찾아든 청천벽력이라고 표현하셨다. 공교롭게도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 부부가 어렵사리 아이를 가져 기쁨과 설렘으로 지내던 나날이었다고 한다. 항암치료로 야윌 대로 야윈 남편분께서 갓 태어난 손주를 안고 눈물지으시던 장면, 당신 인생에서 가장 아픈 기억이라고 하셨다. 설상가상으로 연로하신 선생님의 어머님 또한 노환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셨으니, 그야말로 생로병사가 눈앞에서 교차하고 있었다고.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몇 년 안에 남편과 어머님을 천국에 보내셨다. 무엇 하나 부족하다 느끼지 않았던 삶은 텅 비어버렸고,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인생 신념이 무너졌다고 한다. 몇 년 캄캄한 시절을 보냈고, 뒤늦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셨다고. 죽음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것으로 슬픔에 맞섰고, 미국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스캇 펙(M. Scott Peck) 박사의 소설이 In Heaven as on Earth: A Vision of the Afterlife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포이에마)이었다. 빨려들 듯 읽으셨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렴풋하게나마 의문에 희망을 찾았다고 하셨다. 평생 인간의 마음을 연구해 온 선생님이시다. 이즈음의 경험과 독서로 영적 세계에 눈이 떠졌고 자연스레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셨다고 한다. 그전까지 선생님의 신앙은 불교에 가까웠다. 죽음의 욱여쌈이 도리어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이 되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되었다니! 그러니 당신은 죽음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다며 창밖 멀리 시선을 보내셨다. 거실 깊숙이 들어와 앉았던 해의 꼬리가 물러난 지 한참이다.

 

      , 선생님, 이런 간증을 듣다니요! 죽음과 삶의 연결이 신비롭게 느껴져요.

 

     주름진 얼굴, 노화가 불편한 것은 죽음을 부정하고 본능일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것이죠. 사회가 젊음, 젊은 몸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죽음에 대한 거부 아니겠어요? 중년을 넘긴 우리 아들이 유난히 젊음에 집착을 해요. 늙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제 몸뿐 아니라 죽을 날이 가까운 지 에미까지 관리하느라 공을 들이죠. 저기 저 운동기구며 안마의자도 다 아들이 사다 놓은 거예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 것을 알아요. 제 아버지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왜 아니겠어요. 첫 아이를 낳고 아버지 되는 기쁨과 제 아버지를 잃는 슬픔을 동시에 겪어야 했으니까요. 게다가 혼자 남은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부담도 컸을 거예요. 제 몸 제가 지켜야 한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서 자기 관리가 철저해요. 그 집착이 나는 안타까워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만큼 건강한 몸에 집착하거든요. 그 두려움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기 때문에 더 안타깝죠. 이제라도 아들이 깨우쳤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제 삶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일 때 신앙이 들어갈 여백이 생길 텐데. 정 선생 보면서 우리 아들 생각을 자꾸 하게 돼요. 나이 먹어 늙고 죽게 되는 인생의 비극을 받아들이고 제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자리가 주님 만날 자리인데, 아직 그러질 못하고 있네요. 생각나거든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어스름한 한강 변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하는 소리가 가슴에서 울렸다. 노인의 얼굴에 다가가고 싶고 멀어지고 싶은 알 수 없는 마음을 ‘죽음’에의 태도로 해석해주신 것은 선생님만의 따스한 지혜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또렷하게 선생님의 목소리로 다시 들린다. 좋은 노인으로 사는 것은 결국 죽음과 친해지는 일인 것이다. 죽음과 친해지는 것은 노년의 일 아니라 지금 여기의 과제이다. 선생님을 따라서 해봐야겠다. 거울을 볼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디까지 드리워졌나 찬찬히 꼽아 봐야지. 눈가의 주름과 쳐지는 피부로 내 죽음을 마주할 때, 어쩐지 더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브레넌 매닝이 『아바의 자녀』에서 말했다.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 앞으로 더욱 거세게 밀려들 노화의 파도를 순순히 기쁘게 맞도록 해야겠다. 삶의 끝은 죽음이 자명하니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리. 죽음 이전에 삶, 오늘의 삶이 있으니 이 순간을 두려움 없이 누리는 것 또한 포기하지 않으리.

 

<시니어 매일성경> 2021 3-4월호

 

2021년 1월부터 <시니어 매일성경>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란 큰 제목을 걸고 중년 이후의 삶과 영성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요. 무엇이든 써야하는데 무엇을 쓸지, 쓰고 싶은지 모를 때면 꼭 혜성 같이 나타나셔서 "새로운 글을 써보라" 옆구리 찔러주시고 멍석 깔아주시는 iami님 덕입니다. 엄마 돌아가신 이후 죽음, 상실, 애도에 천착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을 준비할 때라는 생각을 하는 중 제안을 해주셔서 도전해봅니다. 중년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일단 손을 놓았고요. 생의 오후인 중년 이야기를 건너 뛰어 저녁놀이 물드는 시간, 황혼에 머물러 보려고요. 쓰려고 마음 먹으니 살아보지 않은 날을 언감생심 논할 수 있나 싶어요. 감 놔라 배 놔라, 편하게 가르치고 행세하고 싶어서 '부캐(최선생님)'를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럼 한 번 써보겠습니다.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

 

 

내 나이 쉰셋,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이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고, 배울 것은 많은 세상이다. 새로운 일을 자주 시도하는 편이지만 좀처럼 설레는 일은 없다. 일은 물론이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새로운 사람 만나봐야 거기서 거기니 조금 서글프다. 헌데 오늘 예상치 못한 만남이 낯선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솜털 피부에 말랑한 언어를 가진, 호기심 가득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아니다. 여든을 넘긴 어르신! 눈꺼풀부터 턱밑 피부까지 중력의 법칙에 온전히 순응하는 근육이며, 검버섯이 핀 얼굴의 최 선생님이다. 한 학기 강의를 들었고, 종강하던 날엔 수강생들 다함께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전에 출간하신 책 개정판을 내시는데 도움을 드리기로 했고, 그 일로 오늘 처음 개인적으로 뵙게 된 것이다. 교정작업을 도와드리겠다고 한 것은 선생님과 만남의 끈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인 것을 알지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자원하여 결정했다. 뭔가 끌림이 있었고, 그저 그 끌림에 따른 것인데 결론적으로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좋은 노인을 만나고 싶다

 

여든 넘기신 선생님을 뵙고 와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어쩐지 안 계셔도 조금 죄송하지만. 50대가 되고 갱년기를 통과하며 나는 늙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 좋은 노년을 준비하고 싶다. 그러자니 닮고 싶은 노인들을 찾아보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조금 좌절이 된다. “저런 노인은 되지 말아야지반면교사는 정말 흔하디 흔한데, 닮고 싶은 분은 없다. 또래 친구들과의 대화는 갱년기 증상으로 시작하여 서서히 찾아오는 노화의 증상들을 경유한 후 종착지는 나이 드신 부모님 이야기이다. 부모님의 고집으로 속 터지는 이야기, 가여워서 더욱 답답한 이야기. “우리는 그렇게 늙지 말자!”로 대화가 끝나지만, 나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 그런 노인이 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노인을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요즘은 노인이 눈에 들어온다. 학창시절에는 길을 가거나 버스 안에서 그렇게 또래 남학생만 보이더니, 청년 때는 그 나이대 남자만 보였다. 임신해서 다닐 때는 임산부만 눈에 띄어, 세상에 임산부가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아이 키울 때는 당연히 유아차 밀고 가는 엄마와 그 안의 아기가 어떤 차보다 크게 보였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에서도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내 나이대 남자 사람, 여자 사람이 아니라 노인들이 자꾸 보인다. 길에서 마주치는 불특정 노인은 물론이고, 뉴스에 등장하는 노인과 노인집단, 무엇보다 주변 친밀한 관계 안에서도 유독 노인을 바라보고 관찰하게 된다. 연세 드신 부모님 걱정과 겹쳐진 탓도 있지만, 나름대로 누구를 찾는 것이다. 좋은 노인을 만나고 싶다. 이것은 내 노년을 상상하며 미리 가불해 가져온 두려움과 닿아 있다.

 

"오늘 밥은 내가 살게요."

 

 강의에서 최 선생님을 뵙고 깜짝 놀랐다. 강사가 은퇴 교수님이신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연세 드신 분일 줄은 몰랐다. 어쩐지 실망스럽기도 했다. 느릿한 말투나 걸음걸이가 불안해 보였고, 강의 계획도 엉성했다. 모처럼 마음 먹고 시간과 돈을 투자한 건데, 성의 없는 강사를 만난 것 아닌가 싶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아, 엉성한 계획이나마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뭘 그렇게 잘 잊으셨다. 다음 시간에 나눠주겠노라 하셨던 자료는 까맣게 잊기 일쑤. 질문 하나에 답하시다 강의 주제를 벗어나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렇다. 강의가 강의 흐름같았다. 지적인 구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내게는 정말 불편한 방식이었다. 강의 계획에 따라 어떤 책을 읽어가면 전혀 다른 책 얘기를 하셨다. 그런데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강의 흐름이 편해졌다. 듣는 내 태도도 달라졌다. 노트북 앞에 놓고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는 필기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귀로 듣고 손으로 바로 받아쳐서 강의를 한글파일로 만드는 기계라는 평을 들을 정도이다. 최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점점 기계 작동이 느슨해졌다. 어쩌다 보면 키보드에 올려놓은 손이 스르르 멈춰 서 있기 일쑤. 강의 후반에 가서는 제목만 쳐놓고 아예 손을 내리고 있었다.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저 흘러가게 되었다고나 할까.

 

필기할 내용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차라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워 담고 싶은 마음으로 필기하던 손을 내려놓았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저 마음으로 들어 젖어 들고, 물드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모르겠다. 맞다, 선생님의 강의는 악착같이 필기하여 어디 써먹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용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것도 아니며,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의가 강물처럼 나를 스쳐 가도록 두는 게 좋았다. 들을 땐 좋았는데 돌아서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필기한 것도 없으니 손에 남는 것도 없는 강의가 종강이라니 아쉬웠다. 다른 사람들도 내 마음과 같았는지, 선생님 모시고 식사로 인사 나누자고 했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가 오가고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며 최 선생님께서 오늘 밥은 내가 살게요.”라고 하셨다. 가당키나 한가. 여기저기서 아닙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요, 요란스럽더니 누군가 발 빠른 사람이 나가 계산을 해버렸다.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뒤쪽에서 선생님과 함께 섰다가 혼잣말처럼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 사람들, 노인 배려 없네. 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밥 사는 거밖에 없는데. 그걸 빼앗네.” 바람처럼 지나가는 말의 가벼움에 놀랐다. 말씀의 내용도 그렇고. 여태 15주를 가르쳐주셨는데,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밥 사는 일밖에 없다고?

 

드물게 만난 호감 노인

 

그 말씀이 마음에 콕 와서 박혔다. 무슨 말씀이지? 그냥 하시는 말씀인가? 노인이지만 80대라는 연세가 무색한 분 아닌가. 아직 가르칠 게 있는 분, 할 수 있는 게 없으시다니. 진정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까? 혼잣말처럼 하셨으니 누구 들으라고 예의상 하신 말씀 같지는 않다. 한 학기 동안 들었던 물 흐르듯 하는 강의는 다 빠져나가고 그 한 문장이 남은 듯하다. 어쩐지 그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카페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일부러 선생님 옆자리에 앉았다. 강의 들을 때와는 다른 새로운 호기심으로 선생님을 관찰했다. 호감 노인, 드물게 만난 호감 노인이었다. 내가 호감과 비호감을 구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가까이 다가가 앉고 싶은 사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은 호감. 저 멀리 나타나기만 해도 뒷걸음질 쳐지고, 되도록 피해가고 싶은 사람 비호감이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니 다가가 말 건네고 싶은 노인을 만난 건 거의 처음이다. 강의 때의 매력은 교수님으로서의 매력이지 한 인간, 한 노인은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 책 개정판 작업 얘기가 나왔고,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덥석 이 호감 노인을 붙들었다.

 

원고 받으러 간다는 명목으로 선생님 댁을 찾았다. 유난히 긴장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몇 주 전, 그 카페에서의 내 판단이 과연 옳았을까? 일을 도와드리는 문제가 아니라, 좋은 노인을 만났다는 판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만나 실망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게 걱정이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노인을 배려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식사비 계산하시도록 기꺼이 양보해드렸다. 일단 점수를 땄다. 하지만 실은 정말 점수를 딴 건지, 아닌지 잠시 확신이 흔들렸다. 지난 종강 식사 때처럼 얼른 나가서 계산하는 게 어르신 대접 아닐까. 예의 없다고 생각하시면 어떡하지? 라고 잠시 머릿속에 쓰던 소설이 사라진 것이, 식당을 나와 걷는데 어르신과 걷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파랗고 하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적당히 부는 바람에 취해서 감탄하느라. “선생님, 하늘 구름 바람은 아주 그냥 잘 어울리는 삼합이에요.” 했더니 하하 웃으셨다. 말도 참 재밌게 한다며 삼합, 삼합하며 웃으셨다.

 

하늘 구름 바람 삼합과 함께 선생님의 웃음에 무장해제 되었다. 선생님 댁 현관에 들어설 때는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사무실과 주거공간이 알맞게 분리된 넓은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시야가 뻥 뚫린 경관의 상담실이 있고 복도를 통과하면 거실이다. 거실이야말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는 탁 트인 하늘을 마주한다. 상담심리학 교수로 은퇴하신 선생님은 간간이 상담 일을 하시고, 마음에 관한 강의도 하신다. 혼자 사시는 넓은 집이 내담자를 받아들이는 선생님의 마음 같아 열린 공간 같이 느껴졌다. 용건인 선생님 책 얘기는 시작도 못하고 내 얘기를 털어놓아 버렸다. 묻지도 않으셨는데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선생님, 조금 오글거리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저는 제 나름 인생의 중요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저런 몸과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노년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거든요. 죄송해요, 선생님.

 

      (정색하시며) 뭐가요? 뭐가 죄송해요?

 

      (당황) 아, 선생님 앞에서 제가 노년이 가깝다느니 이런 말씀을 드려서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 앞이 어때서? 내가 늙은이라서? 정 선생 얘길 하는 거잖아요. 나는 내가 먹을 만큼 나이를 먹었고, 정 선생도 나이 먹는다는 얘긴데 그게 뭐? 노년이 몹쓸 시절도 아니고. 하하. 어려워하지 말아요. 하고 싶은 얘기 편하게 해요.

 

      실은 선생님, 저희 종강 식사 자리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이 남아 어쩐지 말씀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왜 식사 사려고 하셨잖아요. 노인이 되면 밥 사는 일 밖에 할 게 없는데... 하신 말씀을 들었어요. 저희에게 융(Carl Jung) 심리학을 가르쳐 주셨고, 여전히 상담도 하고 계시잖아요.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신데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 싶었고요. 그 말씀이 신선하게 들렸어요. 아까 제가 노년이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던 것은 좋은 노년의 삶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구요, 그러기 위해서 준비할 것이 있다면 준비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데 배울 곳이 없는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닮고 싶은 노년을 만나고 싶은데... 네, 뭐 그러던 중 선생님 말씀이 아주 크게 들렸어요. 밥 사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

 

      하하, 그 말이 정 선생에게 화두(話頭)가 되었구만. 내가 본의 아니게 공안(公案)을 던진 셈이고, 참구(參究)하던 정 선생을 오늘 우리집에까지 끌어들였네. 노인네가 어쩌다 흘린 말에 제대로 걸려들었어. 그나저나 나는 정 선생 나이 때 그런 생각 못했는데 어쩌다 그리 멀리 내다보는 고민을 해요.

 

그때 어디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 어디서 찬양이? 선생님의 휴대폰 벨 소리였다. , 그럼 선생님도 크리스천이신가. 그랬다. 이건 더 의외였다. 한 학기 만나면서 선생님이 종교가 있으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 종교를 가지셨다면 불교에 가까우실 분이었다. 조금 전에도 화두, 공안, 참구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의외였지만 선생님은 권사님이셨다. 말씀으로는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하셨다. 더욱 마음이 편해져 내 얘기를 늘어놓았다.

 

노인이 할 일은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

 

      선생님, 저는 이제 말로만 듣던 갱년기 증상을 겪는데요. 노안이 오고, 오십견에서 시작하여 몸 여기저기가 망가지면서 좀 많이 놀랐어요. 대부분의 증상 앞에는 ‘퇴행성’이 붙더라고요.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고치는 병이 아니라고 들렸거든요. 오십견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더라고요. 오십견이 낫는다 해도 노화는 진행될 것이고,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받아들이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하고요. 또래 친구들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이런 거거든요. 결론은 탄수화물을 끊고, 좋은 생각을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자!예요. 신앙이 있는 친구들은 천국 소망으로 훈훈하게 마무리하려 하기도 하죠. 그런데 어쩐지 저는 그럴수록 더욱 답답한 거예요. 젊을 때는 의지를 발동하고, 열정을 쏟아부으면 될 것 같은 희망이 있었죠. 실제로 되기도 했고요. 오십견 온 팔을 부여잡고 있으면 더는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리고 또 친구들 대화의 또 다른 주제는 ‘노년의 부모님’이거든요. 40년 한결같이 같은 문제로,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시는 부모님. 알코올 중독, 분노중독 아버지와 종교중독 어머니의 간극, 건강염려증에 애정결핍으로 늘 새로운 병원을 찾아 모셔야 하는 어머니도 계시고요. 늘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어머니에게 수십 수백 번 합리적 설명을 해야 하거나, 참다 참다 화를 내고 죄책감이 휩싸이는 일상 같은 것들이요. (이 지점에서 선생님의 표정에 살짝 먹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눈치챘으나, 발동 걸린 말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친구들 20년 후에는 자기 엄마와 똑같아지겠구나! 실은 이 친구들도 만날 때마다 하는 얘기가 똑같거든요.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오빠도 책임을 감당하시라고 해,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 아예 전화를 받지 말어. 쏟아지는 조언과 충고도 비슷해요. 이래서 소용없고, 저래서 소용없어. 되돌아오는 반응도 똑같고요. 뫼비우스의 띠 같아요. 그리고 헤어지며 하는 말은 늘 ‘야야, 우리는 정말 잘 늙자’예요. 그런데 저는 정말 잘 늙기는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만 드네요.

 

      (엄마 미소 지으시며) 틀린 말이 없네. 맞아요. 갈수록 어디 아프냐고 묻는 것보다 안 아픈데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빨라요. 나도 노인네지만 노인이 되어 고착된 생각, 특히 신앙 같은 것들은 변화나 성장이 거의 불가능해요. 나부터도 이렇게 늙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저 조금 민망하고 오글거리지만, 선생님 뵈면서 닮고 싶은 어르신을 제대로 처음 만났다 싶고요. 그래서 책 작업이든 무엇이든 도와드리면서 배우고 싶어요.

 

      하하, 사람 잘못 봤는데. 나 고집쟁이 노인네야. 우리 아들한테 물어봐요. 융 심리학에서 말하잖아.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나한테서 발견한 좋은 모습이 있다면 그건 선생님 안에 있는 것이에요. 무엇보다 좋은 노년을 꿈꾸는 마음을 잘 품고 지금처럼 배우고자 하면 정 선생이 그런 노인 될 거예요. 그렇게 되세요. 나는 아니에요.

 

      네, 선생님 그러면요, 이건 좀 답해주세요. ‘밥 사는 일밖에 할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어떻게,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이세요?

 

      꿈보다 해몽이네. 허허. 결국 나이 먹어 늙으면 알게 될 일, 미리 알 필요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어요. 나도 내 나이 믿어지지 않고, 이렇게 늙은 나이, 말 안 듣는 몸이 나 같지 않고 힘들어요. 내가 나이롱이라 성경은 잘 모르지만, 노인에게 아주 적실한 말씀이 하나 있어요. 어디 나오더라. 베드로 얘기예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일 거예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내 생각에 노인의 할 일은 주도권을 내려놓는 거예요. 무조건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 남이 누구든 나를 주도하도록 내어주어야 편하다니까. 가까이는 자식들에게 그렇고, 제자들에게 그러려고 해요. 나도 젊을 때는 무척 깐깐한 선생이었어요. 수퍼비전 줄 때는 울지 않았던 학생이 없었어. 지금은 내가 그렇게 해봐요. 누가 나를 만나러 오겠어.

 

유레카! 내가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선생님께서 다 설명할 수도 없으시지만 그런 삶의 기쁨이 있다고 하셨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는 행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책 작업을 하는 동안 베드로의 노년을 따르는 선생님의 노년을 많이 듣고 기록해야지 싶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유난히 보랏빛, 붉은빛의 오묘한 조합으로 아름다웠다.

 

      이 시간이면 소파에 앉아 해가 넘어가는 걸 봐요. 혼자 살기 때문에 참 쓸쓸한 시간이기도 해요. 내 인생의 시간이겠지. 아니다! 해가 넘어가고 노을이 물드는 시간은 정 선생의 시간이겠다. 나는 이제 밤이에요. 정 선생이 부럽네. 나는 5, 60대 늙음의 신호가 왔을 때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성공과 성취에 취해서 젊을 때 살던 그대로 살았지. 조금 더 일찍 노화를 받아들이고, 팔을 벌리는 방향으로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뭐, 그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어. 지는 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 빛으로 생기는 저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팔을 펴는 연습하라고 오십견이 오는지도 몰라. 정 선생 강의 들을 때 보니까 어깨 힘주고 정신없이 노트북 두드려대던데. 그렇지, 나중엔 손을 놓더라고. 하하. 노화의 강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요. 이야, 오늘 노을 정말 예쁘네. 정 선생같이 예쁘네.

 

새벽으로부터 동이 트고 정오를 향해 높아지는 해, 그리고 오후가 되어 부드러워지는 빛과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인생 주기와 빗대어 한참 이야기 나눴다. 선생님은 당신의 시간은 밤이라고 했다. 영원한 잠이 들기 전 마지막 시간으로 정리가 된다고. 그러며 좋은 노년은 없다, 고 하셨다. 좋은 노년은 좋은 중년의 결과일 뿐이라고. 어둠이 내리기 전, 하루 중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인 이 시간을 겸허하게, 나 자신을 진실하게 대면하며 지내면 좋겠다고 하셨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셔서 아쉽다고. 앞으로 뵐 때마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밤이 오기 전에 돌아봐야 할 진정한 나, 진정한 삶에 대해 얘기 나눠보자고 하셨다. 가슴이 뛴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지만, 남은 것은 늙음 뿐인 나날이라 생각했는데. 전에 느껴보지 못한 아주 고요한 새로운 설렘이다. 다음 만남이 벌써 기다려진다.

* 월간 <복음과 상황> 356호(2020년 7월호) 기고글입니다.

 

신령한 기도와 산신령 놀이 사이

기도해보고 결정할게요.” 청년부 시절 한 사람이 가끔 난다. 크고 작은 결정사항 앞에서 늘 이렇게 대답했다. 주보에 실을 수련회 후기를 써달라 부탁한 적이 있었다. “, 기도해보고 결정할게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이걸 두고 뭐라 할 수도 없는 것이 부모님 계신 고향에 갈 때도 버스를 탈지, 기차를 탈지 기도하고 결정하는 친구였으니. 그저 그의 하나님께서 글을 쓰라는 결재를 내려보내시길 기도(, 기도!) 할 수밖에. 그의 말에 자주 거부감을 느꼈다. 실은 이 친구가 싫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집사님이 계셨다. 친절하게 손잡아주고 위로해주시는 따뜻한 분이기도 했다. 가끔 교회 복도에서 마주쳐서 이런 말씀만 하지 않으시면 참 좋았는데. “정 선생님, 요즘 힘들어요? 내가 기도해보니까 정 선생님이 힘든 것 같던데…… 하여튼 힘내요. 내가 늘 기도하고 있으니까.” 위로로 다가와 순간적으로 울컥하려는 감정을 확 밀어 넣게 되었다. (인생 힘들지 않은 순간이 얼마나 있다고!) “하나님도 참. 제가 힘든 걸 아시면 저한테 직접 말씀하시든지, 해결을 해주시든지. 왜 집사님께 뒷담화를 하시죠?” 속으론 그렇지만, 대충 훈훈한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돌아서는 마음은 한없이 갑갑했던 기억.

 

기도하면 뭐가 그렇게 잘 보이고, 하나님 음성이 잘도 들리기론 우리 엄마가 1등이었다. “엄마가 기도해보니까 이번 일 잘 되겠더라. 기도 끝에 니가 활짝 웃더라고.” 엄마가 기도해보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시험도 잘 볼 거고, 면접 결과도 좋을 거고, 맡은 행사 잘 진행할 거고, 아픈 데는 큰 문제 아닐 거고. 어쨌든 엄마의 기도는 힘이 되었다. 시험 기간에는 내 시간표에 맞춰 꼼짝하지 않고 내내 기도를 하셨다. 공부는 안 했어도 엄마 기도 때문에 든든했다. 문제는 이랬던 엄마가 엄마가 기도해보니 너 그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런 점괘, 아니 응답을 받아올 때였다. 가령 엄마 마음에 차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나고 다닌다든지 할 때.

 

기도라는 이름의 욕망의 투사, 기도로 위장된 간섭과 통제, 기도라는 이름 뒤에 숨은 회피를 드러내는 예는 신앙생활 일상에 허다하다. 이런 행태를 간파하고 비판할 신학적 지식과 판단력이 내게 없지도 않다. 기도에 관해 읽은 무수한 책들이 내 편인 듯한데 무언가 찜찜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자고 저 기억들은 30여 년, 1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무엇보다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 청년, 그 집사님, 엄마 앞에 섰을 때의 이었다. 막힌 느낌,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느낌. 그 벽의 이름이 인간의 가장 성스러운 행위인 기도라는 것이 무엇보다 큰 좌절이다.

 

닫힌 종교와 종교 중독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조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 전통 안에서 진리를 찾고자 애썼던, 이후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가톨릭 신자가 된 쉴라 파브리칸트 린(Sheila Fabricant Linn)의 영적 여정에 공감되는 바가 크다. 유대교 전통 안에서 만물 안에 현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가톨릭 신학교에서 만난 교수들의 열린 태도와 사랑에 안내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종교를 넘나들며 그가 고민한 것은 열림과 닫힘, 그리고 자유였다. “(종교 안에) 닫혀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도달했단다. 그렇게 기독교 신자가 된 쉴라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다시 이런 질문 앞에 섰다고 한다. “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보다 더 닫혀 있게 하는가?” 유대교 공동체에서 만났던 벽을 자유를 찾아 안착한 기독교 안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중독과 회복에 대한 이해에서 찾게 되었다고 한다.

 

쉴라와 그의 동료들이 정의하는 중독은 우리의 삶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현실 특히,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피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실체 또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중독의 목적은 한마디로 자신과 대면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발견은 종교나 종교 행위들이 약물이나 알코올처럼 내면 안에 있는 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종교 중독을 정의한다. 종교 중독은 엄격한 믿음의 체계를 통해서 고통스러운 내면의 실재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엄격한 믿음 체계 안에 갇혀 모든 문제를 종교적 행위로 환원시키는, 그렇게 함으로 마주해야 할 내면의 진실로부터 끝없이 멀어지는 것이 중독 행동의 양태이다. 이 같은 중독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야기가 어린 왕자에 나온다.

 

거기서 뭘 하고 계시죠?” 빈 병 한 무더기와 술이 가득 차 있는 병 한 무더기를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는 술꾼을 보고 어린 왕자는 물었다. “마시고 있다.” 술꾼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마셔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잊으려고.” 술꾼이 대답했다. “무엇을 잊어요?” 어린 왕자는 벌써 그를 불쌍하게 여기며 캐물었다. “내가 부끄러운 놈이란 걸 잊기 위해서.” 술꾼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털어놓았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어린 왕자는 그를 도와주고 싶어 자세히 물었다. “마신다는 게 부끄러워!” 주정뱅이 말을 끝내고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어린왕자열린책들 (52)

 

위의 세 사람, 기도에 특별한 열정을 가진 이들이 내게 벽으로 느껴진 이유는, 모든 대화가 기도하나님으로 환원되는 것이었다. 도통 대화의 주제, 문제의 핵심에 다다를 수가 없었다. 배우자나 아이의 신앙 성장을 위해 기도하는데,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들의 신앙이 성장하기는커녕, 관계만 더 나빠진다면, 종교 중독 증상을 의심해봐야 한다. 기도할수록, 신앙에 열심을 낼수록 배제하고 배척할 대상이 많아진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행위를 강박적으로 지키고, 그것만이 옳다는 확신 속에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닦달하고 통제하고 있다면 거의 확실하다. 여타의 중독과 달리 종교 중독이 가진 치명적 해악이 여기에 있다. 알코올이나 마약처럼 누가 봐도 나쁜 것에 중독된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있다. 책상 밑에, 장롱 안에, 술병을 숨겨두거나 난 그 정도는 아니야하며 자신의 중독 행동을 깎아내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종교 중독의 행위들은 곧바로 종교적 자부심이 된다.

 

새벽기도, 십일조, 주일성수 등의 행위가 진실한 자기 대면을 대체할수록, 즉 중독 증상이 심화 될수록 흔히 믿음 좋은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중독 권하는 교회에서의 현실이다. 청년부 시절 그 친구, 교회 복도에서 만나는 집사님, 엄마가 내가 기도해보니까라며 치고 들어오면 반격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너는 저들만큼 기도하냐?”는 목소리가 내 안에 울린다. 기도와 말씀 생활에 할애하는 절대 시간을 비교하면 나는 작아지고 만다. “기도도 안 하는 것들이” “주일성수도 안 하는 것들이중독 행동으로 공격한다면 방어할 도리가 없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들 기도 중독자를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부끄러움 없는, 거침없는 중독 행동에의 몰입은 필연 나만 옳다는 자아 중독으로 귀결된다. 자아 중독의 몹쓸 폐해,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믿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통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신앙하는 사람을 배제하고 심지어 혐오하기에 십상인 것이다.

 

누가 종교 중독자인가?

중독과 은혜를 통해 제럴드 메이(Gerald G. May)가 우리에게 준 충격적인 통찰은, 우리 모두 중독자라는 것이다. 출간된 지 한참 된 그 책이 아직도(아니, 이제야) 사람들 사이 회자 되는 것은, 개인의 삶에서 경험적 증거가 쌓여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코올이나 마약 등, 약물 중독을 넘어 비물질적인 것들에의 중독 증상이 당신과 나의 일상에 흔하다. 어느 의사 선생님에게 들었다.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열 명이 있다면 그중 7명은 알코올 중독이라고. 누가 종교 중독자인가? 신자 10명이 있다면 그중 7명은 종교 중독자 아닐까?

 

종교 중독은 여타 물질 중독과 달리 명확한 진단 기준이 없다. 스티븐 아터번(Stephen Arterburn)과 잭 펠톤(Jack Felton)해로운 신앙에서는 종교 중독자를 진단하는 다양한 지표들이 나와 있다. 그 지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이 많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특히 동기를 더듬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체크리스트 몇 항목으로 단정 지을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행위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어떤 사람의 열정적 행위가 사랑의 발로인지, 자기과시이거나 현실도피인지를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오직 동기를 달아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All a man's ways seem innocent to him, but motives are weighed by the LORD. 16:2, NIV)

 

무의식의 지도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그려낸 프로이트(Freud)의 업적을 이은 신 프로이트 학파의 분석가 카렌 호나이(Karen Horney)가 열어준 마음의 세계는 더 깊고 영성적이다. 정신 병리적 관점으로 환자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치유할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의 이 말이 특히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건강한 성격발달과 성격장애 사이 어디 즈음에 있다.” 종교 중독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영성발달과 종교 중독 사이 어디 즈음에 있다.”

 

위의 기도 중독자 세 사람을 대놓고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내가 그들만큼 기도하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종교 중독의 개념을 처음 배웠을 때, 그런 종류의 신앙인에게 붙일 언표를 얻고, 속이 시원했다. 주변의 불편한 신앙인들, 하나님을 믿는지 산신령님을 믿는지 알 수 없는 기복신앙을 비추는 만능 거울을 손에 넣은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울에서 낯익은 얼굴이 어른거리니, 그것은 엄마의 얼굴이 아니라 엄마를 닮은 내 얼굴이었다. 누가 종교 중독자인가? 나다. 내가 종교 중독자이다. 나는 한때 지독한 종교 중독자였다. 아니 지금도 회복 중인 중독자이다. 이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중독과 은혜의 저자 제럴드 메이가 먼저 길을 열어주었고, 그의 진실한 고백과 연구로 가만히 나를 진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이다.

 

나는 니코틴, 카페인, 설탕, 초콜릿, 등 다양한 물질들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물리적 중독일까 혹은 단지 심리적 의존이었을까?…… 결국,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물질에만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끝없이 나열할 수 있는 다른 수많은 행위에도 중독되어 있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중독자이며, 알코올이나 다른 약물들에 대한 중독은 다른 종류의 중독들에 비해 그저 좀 더 명백하고 비참한 중독일 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살아 있다는 것은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중독과 은혜IVP (21, 23)

 

종교 중독, 유발자는 누구인가

종교 중독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성적 학대 분야의 권위자인 패트릭 칸스(Patrick Carnes) 박사가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우리의 연구는 아동 학대가 중독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 …… 그리고 아동기에 학대를 많이 받을수록, 성인기에 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독과 학대 경험은 떼어 설명하기 어렵다. 아동기 학대 경험이 중독으로 이어진다면, 종교 중독은 영적 학대와 맞물려 있다고 하겠다. 폭력적인 부모에 의해 아동 학대가 발생한다면, 폭력적인 영적 지도자에 의해 종교 집단의 영적 학대가 일어난다. 아동이든 종교 생활을 하는 성인이든 학대의 피해자는 치명적인 약자이다. 학대 가해자가 가진 힘과 권력에 대한 피해자의 두려움은, 학대를 지속시키는 동력이 되어 악의 고리를 더 강화하게 되어 있다.

 

앞의 쉴라 파브리칸트 린(Sheila Fabricant Linn)과 한 팀인 마태오 린(Matthew Linn, S.J)신부는 정서적 학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두 살 아이에게 열 살 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기대하거나, 열 살 아이에게 두 살 아이처럼 계속 의존하도록 하는 것’. 그대로 영적 학대에 빗댄다면 아직 믿음의 초보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성숙한 신자의 종교 행위를 강요하고, 충분히 성숙한 사람을 유치한 신앙과 신학으로 통제해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 이미지의 투사 대상이다. 아동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은 한 인간의 신적인 연결을 위해서는 매개자로서의 다른 인간과의 연결이 필요하다고 했다. 바로 그 매개자 역할을 공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목회자, 종교지도자이다. 종교 중독 유발자는 일차적으로 이런 목회자들이다. 신도들의 영적 갈망, 세속적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들이 가진 수치심(하나님 앞에서 뭔가 늘 부족하다는 느낌, 존재 자체에 흠이 있다는 느낌)(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연료로 삼아 종교 행위를 활활 불태우도록 하는 목사들 말이다. “집사님, 이렇게 기도를 안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아이 앞에 시온의 대로를 열어주시겠습니까?”

 

모든 중독의 핵심적인 감정은 수치심이다. 학대 피해자로 자란 아이들은 수치심을 내면화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항상 울리는 메시지가 있다. “믿지 마, 느끼지 마, 생각하지 마.” 느끼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혹 느끼거나 생각하더라도 자신의 그것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독으로 이어지는 학대의 메커니즘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의문을 품지 못하도록, 자신의 느낌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목회자들이 영적 학대자들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다른 사람의 영적 여정을 통제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학대라고 하였다. 종교 중독을 유발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목회자는 학대자이다. 역할로 부여받은 목회적 권위를 권력 삼아 휘두르고, 하나님과 자신을 동급으로 여기는 과대망상에 빠진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심각한 종교 중독 증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중독에 빠진 책임과 거기서 벗어나야 할 의무가 당사자에게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동 학대 피해자와 달리 우리는 힘을 가진 성인이고, 무엇보다 직접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이다. 성인 학대 피해자의 힘의 부족은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한다. 그 무력감이 학습되었다면 새로운 학습이 필요하다. 참된 앎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현실 특히,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피하고 통제하기 위한 빠른 해결책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을 대면하지 않기 위해 의존하는 종교적 행위들이 중독의 실체임을 알고,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다시 술을 마시는 순환을 멈추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중독 치료로 알려진 A.A(Alcoholics Anonymous,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를 창설하고 12단계 회복프로그램을 만든 빌 윌슨(Bill Wilson)은 중독자를 일컬어 통증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망치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두통이 있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 느끼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교회 봉사를 하고, 헌신하고, 하고, 하고, 하는· 망치질을 일단 멈춰봐야 한다. 두렵더라도 두통의 실체를 맞서고 드러내야 한다. 망치질 권하는 학대자의 목소리를 분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학대자와 함께 중독 유발자가 되는 것이고, 그 피해는 오롯이 망치질에 부서지는 자기 머리통이다.

 

종교 중독의 치유, 다시 잇기

A.A 12단계의 1단계는 이렇다.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우리의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음을 시인했다.” ,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것만큼 중독에서 벗어나는데 명확한 첫걸음은 없다. 우리 모두 종교 중독과 건강한 영성발달 단계 사이 어디쯤엔가 있다면, 건강의 지표는 중독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실존적으로 인정하는 정도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회복과 성장을 위한 희망은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나는 결코 종교 중독자일 수 없다,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인이다자부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철저하게 타자화하고, 거침없이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타자화한 그 존재와 유사한 경우가 많다.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자기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저 사람 사기꾼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내면에 사기꾼의 개념도 있어야 하고, 그 개념을 형성한 직간접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 타인의 종교 중독이 알아 차려지고 유난히 잘 보이는 것은 거기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를 읽으며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다.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일군의 노인들이 서명대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동 후에 행패를 부리던 노인 한 명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정혜신 박사는 소란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었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시작했다. 노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아들과 며느리 얘기 등,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한참 만에 노인이 불쑥 꺼낸 말이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건 좀 부끄럽지.”였다. 나는 광화문에서 세월호에 욕설을 퍼붓는 노인을 떠올리면 지독한 종교와 이념에 복합적으로 중독된 구제 불능의 중독자가 연상된다. 종교 중독의 그러데이션에서 가장 진한 부분, 저쪽 끝 어디에 두게 된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자기 성찰을 끌어낸 정혜신 박사의 내적인 힘이 놀랍기만 하다. 그 책에서 내내 말하는바, 존재에 주목하면 이어진다는 것이다.

종교(religion)의 어원 re-ligio다시 묶는다, 다시 띠를 두른다라는 뜻이다. 나와 타자, 나의 실존과 일상의 고통, 지금의 나와 미성숙했던 나를 분리하는 한, 중독의 회복도 영적인 성장도 불가능하다. 분열된 것들을 다시 잇는 참된 종교의 회복이 종교 중독으로부터의 치유이고,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회심인지 모르겠다. 잠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우리에게 연결되자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인지 모르겠다.

 

* 출처 : 월간 <복음과 상황> 356호(2020년 7월호) 커버 스토리 “중독과 열정 사이”

 



조금 울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연재 마지막 글을 위해 고른 찬송을 불러보다 조금 울었다. 기타 들고 소리 낮춰 불렀다. 누군가를, [큐티진] 독자를 앞에 세우고 불러주는 노래가 되었다. 누군가, 또는 독자가 구체적인 얼굴이 되었다. 오랜 취업준비생의 날을 보내고 있거나, 직장생활 한다지만 일의 기쁨 같은 건 느껴보지도 못하고 근근이 버티고 사는 무표정한 얼굴. 언제 펴질지 모를 형편으로 기약 없이 결혼을 미루고 있는 커플의 안타까운 얼굴.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연애와 결혼, 원치 않게 길어지는 비혼의 시간에 당황인지 좌절인지 모르는 무력한 얼굴. 오랜 기다림 끝에 결혼했으나 금세 불행의 낭떠러지 앞에 서서 되돌아가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막막한 얼굴. 미성숙한 부모 인생의 짐을 대신 지고 희망조차 품지 못하는 얼굴, 얼굴, 얼굴들. ‘인생역전의 소망을 노래하며 연재를 끝내려고 선곡했는데 가사 속 쉬운 반전이 현실의 얼굴들과 멀게만 느껴져 눈물이 났다.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 받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고 씨 뿌린 후에 추수하네

 

괴로움 후에 평안 있고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한 후에 친구 있네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중년이 된 나의 인생 여정에도, 청년들의 시간에도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분의 선의는 작동할 것이다. 어둠 후에 올 빛, 이 눈물 그친 후에 주실 새로운 웃음, 분명 좋은 것 주시는 분임을 안다. 문제는 빛이 오기까지의 어둠 속에서 어떻게 더듬어 가야 할지. 어둠과 빛, 눈물과 웃음, 괴로움과 평안 사이 우울과 무력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재즈처럼 하나님은>의 작가 도널드 밀러를 좋아한다. 그가 쓴 모든 책을 재미 그 이상의 감동으로 읽었다. 그 많은 이야기 중에도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남은 한 장면이 있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 어느 부분에 나왔던 것 같은데 뚱뚱한 몸으로 티브이 앞에 앉아 하염없이 스낵을 먹고 있는 저자의 모습이다. <재즈처럼 하나님은>이란 책으로 소위 대박이 났지만 그 이후에 낸 책들은 잘 팔리지 않았고, 작가의 말 그대로 다시 정서가 불안해졌고 일상으로 돌아갔단다. 이후로 도널드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이 배경화면으로 깔린다. 최근작 <무기가 되는 스토리>는 기독교 아닌 일반 서적으로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니 승승장구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면서도 티브이 앞에서 감자칩 먹는 폐인 모드의 도널드를 상상하며 웃음이 나왔다. 베스트셀러와 베스트셀러 사이, 강연과 강의 사이 혼자 있는 순간 외로움과 공허감에 여전히 잠깐씩 폐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엔 저 찬송의 어두운-후에-, 연약함-후에-강건, 고독한-후에-친구가 오는 과정이 장황하게 펼쳐진다. 반전이 오기 전의 그 지난한 시간-오늘 우리의 일상과 같은-을 견디는 비법도 등장한다.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 인물이 무엇인가를 원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얻어 낸다.’이다. 물론 한 인물은 도널드 자신이며 그의 열혈 독자인 나, 또 나의 이 글을 읽는 <큐티진>의 독자 여러분이다. 우울하고, 지루하고, 무력하여 맥락 없는 오늘이 기승전결의 큰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내가, 당신이) 이야기의 이나 쯤에 있다면 숲에서 길을 잃었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며, 비참한 상황으로 설정된다. 어두움, 비바람, 수고, 슬픔, 씨 뿌림, 멀어짐, 고독. 찬송에 등장하는 것들은 이야기의 흔한 소재들이다.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갈등의 소재 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무엇이 이들을 살아남게 했는가.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 터무니없는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라고 하였다. 도널드 밀러 식으로 말하면 소망 없어 보이는 오늘이라는 조각 시간이 맥락 있는 이야기 속에 있다는 의식일 것이다. 가장 크고 확실한 이야기는 십자가와 부활, 죽음 너머의 삶이겠고. 여러분과 내가 오늘을 견디고 사는 이유일 터이다. 이러한 도가 진리이다.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

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

 

내 맘에 있는 노래의 결국은 이렇듯 예정된 해피엔딩이다.


<QTzine> 12월호


  1. 삼진이 2018.12.03 00:01

    아멘 아멘 아멘..
    해피엔딩 믿어요^_^



[뉴스앤조이]에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열 편의 글을 썼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인지 글이 내 인생을 쓰는 것인지.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글로 정리하는 몇 개월이 되었습니다.

또는 10년이 훌쩍 넘는 긴 방황을 글이 나서서 종결시켜 준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글을 기획 했지만, 이런 글이 나올 줄 몰랐고.

힘들고 아플 줄 알았지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열 편 모두 울지 않고 쓴 글이 없습니다.

글이란 게 내놓으면 더는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알았지만,

읽는 이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덧입을 수 있다는 것도, 

읽는 이의 태도에 따라 의미 없는 문법의 배열에 그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엄마, 동생까지 동원하여 가족의 흑역사를 까발린 사연팔이 글이라 

내놓고도 부끄러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마쳤다는 것이 좋아서 혼자 조금 들뜬 밤입니다.

모처럼 제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글은 링크를 따라가 읽을 수 있습니다.


[인터뷰] 영적 사춘기를 겪는 가나안 교인에게 

목사를 대적한 사람의 말로 : 더 깊은 사랑과 성장을 위하여

영적 학대, 재난이 온다 : 두 살 목사와 열 살 교인

어느 종교 중독자 : 중독과 은혜 사이

목사 혐오와 우상화를 넘어 : 종교 중독, 영적 학대에서 벗어나려면

영적 비신자, 종교적 신자 : 신앙 성숙의 기준

그러면 기도하지 말까 : 영성 생활의 출발점

착한 나쁜 그리스도인 : 생각하지 않는 죄

사모, 아프거나 미치거나 :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들

밥벌이로써의 목회 : '거룩한 소명'의 뒤안길

신앙 사춘기를 넘어 : 어른으로 가는 여정


  1. mary 2018.11.22 15:41

    정말 수고했네. 짝짝짝! 어느것 하나 아프지 않은게 없었을거란 짐작은 했다만..
    이 또한 작가의 사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

    • BlogIcon larinari 2018.11.25 08:51 신고

      이로써 명일동의 마지막 시간을 제대로 털어낸 것 같아요. 알아주시고, 늘 들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2. 성운 2018.12.10 21:21

    작은 소책자로 나오길 바랍니다.
    '저'같은 종교중독자들 혹은 신앙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읽혀지고 위로가 됬으면 좋겠습니다.

    • BlogIcon larinari 2018.12.11 12:38 신고

      그런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제게 다시 위로로 돌아오네요. 출간 생각을 하고 있어요 :)

  3. 성환 2019.01.20 10:53

    정신실 사모님, 오늘도 이곳에 슬며시 들어와서 사모님의 글을 읽고는
    1.5 리터 사이다를 단번에 들이킨것같은 이 청량감에 무한 감사드리옵니다...
    글을 통해 숨이 쉬어져요...ㅎㅎ Thank you for 심폐소생술!
    사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 올해도 몰래몰래 이곳에서 숨쉬다 갈게요~

    • BlogIcon larinari 2019.01.20 20:52 신고

      고마워요!
      성환 님 댓글이 제게 다시 청량한 공기로 다가와요. 성환 님도 '아바의 자녀'로 더 자유롭고 평화로운 한 해 보내세요 :)

  4. 이집사 2019.05.10 16:16

    안녕하세요 사모님. 우연히 사모님 인터뷰 기사를 보고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다른것들도 다 공감했지만 카톨릭 서적에서 성찰과 깊은 영성을 배웠다는 말씀에 그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던 기쁨을 나누고 싶어 왔습니다. 또 한가지 저는 애니어그램과는 다르지만 사람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타고난 성향과 잠재의식을 배우고 있어 이 부분도 반가웠습니다. 사모님, 용기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교인들이 알면 깜짝놀랄 것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성도들이 바로 알고, 무엇보다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이 알게 되길 소망합니다.

    • BlogIcon larinari 2019.05.23 00:51 신고

      반갑고 감사합니다. 짧은 글 안에서 깊은 번뇌를 느낄 수 있어요. 하나님 그분이 광대하신 만큼, 인간 존재가 누구와 비할 수 없이 고유한 만큼 그분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다양한 것 같아요. 이집사님의 여정에 깊이 공감하며 응원 드려요.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3

 


주일 예배 순서에 참회의 기도 시간이 있다. 솔직히 맹숭맹숭한 마음으로 눈만 감고 있는 날이 많다. 말로는 수백 수천 번 인정하고 고백했지만 실은 좀 무덤덤한 정체성이 죄인인 나이다. 익숙해서 무감각해진 것일까. 아니면 무감각 그 자체가 죄인지 모를 일이다. 투명하게 나의 를 느끼자면 어디 한 순간이라도 견딜 수 있겠는가.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찬송가 2741)

 

전도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말 중 하나가 죄인이라는 얘길 들었다. 비신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편해 하는 말이다. 뭘 그렇게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죄인, 죄인 하느냐는 것. 비신자만 그럴까. 우리도 불편하다. ‘내가 행한 것이 죄뿐이라!’ (하도 들어서)머리로는 인정, 가슴으로는? 글쎄다. 나름대로 큐티 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기도도 하고, 미운 사람 품으려 애쓰면 살고 있는데 행한 모든 것이 죄라니 좀 심하지 않은가.

맹숭맹숭하던 주일 참회의 기도시간이 뜨거워지는 때가 있다. 남편과 관계가 틀어져 말을 안 하고 있거나, 예배 가기 직전 아이들을 윽박지르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이다. 뒤틀려 무거운 마음으로 예배에 가 앉으면 오히려 일단은 심사가 더 뒤틀리는 것 같다. 누가 됐든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죄다 고발하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솔직히 그의 죄가 밝혀지는 순간 나의 치부까지 드러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다른 일로 화가 났던 걸 괜히 아이들에게 쏟아냈다는 자각이 생기면 비로소 뒤틀린 것들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만만한 아이들, 착한 남편에게 내 감정의 배설물을 쏟아놓고 말았구나! 그럴 때 꽉 쥔 주먹이 풀리고 가슴이 저릿하며 참회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내 어둔 눈 밝히시니 참 기쁘고 고마우나 그보다 더 원하오니 정결한 맘 주옵소서(2)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치오니 이러한 맘 나 얻으며 눈까지도 밝으리라(3)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냐는 태도에서 한 발만 이탈하면 작은 빛이 새어드는 것 같다. 죄가 보이기 시작한다. 빛 하나 들어올 틈 없이 온통 나의 의와 옳음으로 가득한 캄캄한 마음의 숲에 말이다. 그 작은 빛 한 줄기로 여기저기 내 마음을 조망한다. 그 신령한 빛이 닿는 지점마다 죄의 흔적으로 처참할 줄 알았건만. , 빛이 닿는 지점마다 즉시로 말끔해진다. 나 행한 것 죄 뿐인데! 죄로 가득했던 마음이라 차마 내보이기 싫어 꼭꼭 닫고 있었는데, 다 어디로 갔지? 눈물로 드린 참회의 기도는 알 수 없는 말끔함으로 끝이 난다. 죄의 고백과 끝은 용서로 주시는 정결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스캇 펙의 <주와 함께 가는 여행>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필리핀의 한 마을에 어린 소녀가 예수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마닐라의 추기경에게도 들려졌다. 추기경은 한 신부를 보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조치했다. 세 번의 조사에서 그 신부는 도저히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다고 느낀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사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고 실망한 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다. 네가 다음번에 예수님과 대화할 때 나의 마지막 고해성사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도록 해라.” 어린 소녀는 그 말에 동의했다. 한 주 뒤 그녀는 다시 소환되었고, 신부는 곧바로 물었다. “그래, 사랑하는 딸아, 지난주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느냐?” “, 신부님하고 어린 소녀는 대답했다. “그래, 네가 지난주에 예수님과 대화할 때, 나의 마지막 고해성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여쭈어 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 신부님 저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 호기심 어린 모습으로 신부는 따져 물었다. “나의 마지막 고해성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던?” 어린 소녀는 즉시 대답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잊어버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늘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우리 마음에 순도 100% 정결함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시시각각 찾아드는 자기중심성의 악함을 다 버릴 수 있겠는가.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정결함이다. 지고의 마음수련 같은 것들로도 가질 수 없는 것이 깨끗한 마음이다. 회개하는 자의 죄를 잊어버리시는 분, 도말해주시는 분의 신비하도록 놀라운 사랑 아니면 안 된다. 그저 우리는 무너지는 자존심을 부여안고 죄인 된 나의 생각과 행동을 인정할 뿐이다. 인정하고 회개할 뿐이다. 그리고 얻는 것은 용서와 정결함, 무엇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신비의 체험이다.

 

<QTzine> 11월호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2

 

 

쨍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듯이 멀쩡하던 마음이 급히 어두워질 때가 있다. 기분 좋은 대화에 함박웃음 짓다 무심코 확인한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 하나에 마음이 뒤집힌다. 친구의 SNS를 보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우울해질 수도 있다. 깊은 실망감 또는 좌절로 좀처럼 마음의 힘을 낼 수 없는 날이 오래 가기도 한다. 교회 나가기 싫고,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때도 있다. 시험에 들었다! 이 모든 일을 한데 묶는 말이다. 크고 작은 마음의 시험이 밀려왔다 밀려가곤 하는 것이 우리 일상이다.

 

너 시험을 당해 죄 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이 찬송이 좋다. 특히 시작 부분이 좋다. 결코 시험에 들지 말라, 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시험이라고, 너만 그렇게 자주 흔들리는 것 아니라고 토닥이며 시작하는 것 같다. 도종환 님의 시가 생각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그렇다. 이 땅에 한 존재로 피어 신앙의 여정을 간다는 것은 흔들리며 시험 당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시험을 통해 더욱 단단한 줄기로 설 것인가, 부러지고 말 것인가.

 

누구보다 자주 흔들리고 시험에 빠지는 내게는 나름의 이기는 비법이 있다. 시험을 당하되 그로 인해 더 큰 죄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다. 일단은 뒤집어진 내 마음에 대한 인정이다. ‘그래, 나 화났어, 배신감에 화났다고, 이런 대접을 받다니 정말 서럽고 슬퍼, 애썼는데 결국 이렇게 된 결과에 모든 자신감을 잃었어, 무기력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 진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냥, , 괜찮아.’ 같은 말로 포장하지 않는 것.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너 언행을 삼가 늘 조심하라

너 열심을 다해 늘 충성하고 온 정성을 다해 주 봉사하라

 

시험에 빠진 내 마음을 혼자 인식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누군가에게 토로해야 한다. 그런데 그때 선택하는 누군가가 참 중요하다. 공감을 못해줄 것 같은 친구는 당연히 패스. 잘 들어주지만 내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길 뿐인 친구 또한 조심해야 한다. 당장은 속 시원 하겠지만 돌아서고 나면 더욱 공허해지는 소통이 있다. 시험 당했을 때 마음 터놓을 친구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찬송 2절의 가사처럼 말이다.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너 언행을 삼가 늘 조심하라

 

십 수 년째 연애 강의를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된 두 사람이 연애를 한다면 갈등은 필수이다. 갈등은 필수이며, 동시에 깊은 사랑으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이다. 해결방법은 하나,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이다. 불편한 대화 끝에 헤어질까 두렵기도 하겠지만 끝까지 정직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하는 커플이 많지 않다. 불편한 얘기를 당사자에게 하는 것보다는 맘 편한 동성 친구에게 넋두리로 쏟아내는 것이 더 편하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도움이 안 되는 상담자가 또래의 동성친구일지 모른다. 당장의 위로는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방법은 당사자에게 투명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 구주의 힘과 주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나는 일상에서 맞는 모든 시험의 당사자는 예수님이라 생각한다. 영원불면의 당사자. ‘어머, 웬일이니!’ 공감 잘 해주는 친구가 주는 위안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담판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왜 이렇게 저를 막 다루시는데요? 저 할 만큼 했잖아요?’ 이런 질문은 하나님 앞에 버릇없이 구는 믿음 없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온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덮여 있더라도. 끝을 알 수 없는 장맛비가 계속 되는 날이라도. 구름 너머 푸른 하늘이 있음을 안다. 구름 너머의 푸른 하늘을 믿듯 그분의 선의만큼은 믿는 것이 나의 필살기이다. 나는 믿는다. 그분의 선의를 믿고, 선의의 결국을 믿고, 잘 이긴 후 내가 받을 상을 믿는다.

 

잘 이기는 자는 상 받으리니 너 낙심치 말고 늘 전진하라

네 구세주 예수 힘 주시리니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1. 2018.09.20 18:33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8.09.21 09:51 신고

      고마워요! ^^ 좋은 날씨, 맛있는 음식 평안히 누릴 수 있는 추석 되길!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1

 

 

경험과 그것이 만들어놓은 상상력의 협소함이란! ‘, 이 찬송 들어봐.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뭐가 생각나?’ 지금까진 물어본 사람들에겐 100% 합의된 정답이다. 야외예배! 그렇다, 우리에게 이 찬송(478)은 야외 예배다. 이에 견줄 야외예배 찬송이 한 곡 더 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79) 3절 밖에 안 되고 찬송 길이도 짧아서 더 자주 뽑히는 곡이 참 아름다워라일 것이다.

 

여러 교회 청년부에 강의를 다니며 다양한 공동체 문화 일일체험 하는 것이 큰 기쁨이다. 특히 찬양시간은 흥미진진하다. 교회마다 다르고, 인도자마다 다르고, 음악적 수준도 천차만별이인데 그 모든 수준이란 것들과 상관없이, 때로 나의 취향도 뛰어넘어 가슴으로 훅 들어오는 찬양이 있다. 여름 수련회 강의로 갔던 작은 청년부의 찬양시간이었다. 기타 한 대, 키보드 한 대와 찬양 팀 서너 명이 인도하는 작은 찬양 팀이었다. 싱어 중 하나가 솔로를 했다.

 

참 아름다운 곳이라 주님의 세계는 정말로 내가 나답고 솔직할 수 있는 곳

 

정말로 내가 다답고 솔직할 수 있는 곳이라니, 그렇지, 그런 곳이 있다면! 아슬아슬 떨리는 목소리의 찬양이 마음으로 쑤욱 들어왔다. 이 수련회의 주제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두려움 없이 내가 나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곳은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 아닌가. 낯선 멜로디이지만 마음으로는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곡이 478. 싱어들 소리가 몇 파트로 쫙 갈라지더니 금세 화음으로 만났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다. 수십 년 선입관이 깨지고 야외예배 느낌은 싹 지워졌다. 바깥 풍경이 아니라 내 마음의 풍경으로 시선이 옮아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는 마태복음의 말씀일 터.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6:28-29) 예뻐지고자 뭘 더 하지 않아도 그냥 예쁜 백합화 이야기이다. 하나도 꾸미지 않았는데 저 화려한 임금 솔로몬의 옷 100벌 보다 낫다는 것이다.

 

내가 나답고 솔직하게 있어도, 애쓰지 않고 있어도 정말 저렇게 아름답다면 뭘 더 바라랴. 그나마 회사보다는 안전한 교회에서 조차도 포장지 없는 나로 있기는 쉽지 않다. ‘에잇, 너무 말을 많이 했잖아. 조금만 참을 걸 그랬어. 너무 나대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아냐?’ ‘나는 왜 이리 소심하고 바보 같을까? 아까 그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다들 한 마디 씩 하는데 질문 받고 나만 말을 못했어. 정말 한심다고 생각했을 거야.’ 매순간 가장 적절한 모습이고자 애쓰는 우리의 내면은 쉴 새 없이 손을 놀려 길쌈질 하는 형국이다.

 

지금으로 충분해,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이 좋아! 이런 말이 좋은 건 안다. 내게 이런 말 들려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다지 와 닿지도 않는다. ‘말은 그렇게 하지. 내가 정말 나다운 모습 보여줘 봐? 네게 맞추려고 지금 이 순간도 애써 짓는 표정과 말, 모두 거두고? 실망하여 나가떨어질 걸. 그나마 내가 이거라도 하니까 나를 받아주는 거 아니야?’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나의 있는 그대로를 싫어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이런데 아름다운 공동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만든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바깥 풍경에서 내 마음 풍경으로 옮겨갔던 시선은 이제야 말로 다시 밖을 봐야 하는 시점이다. 고개를 들어서 들의 백합화를 보고, 심지어 공중에 나는 새에게도 눈길을 줘보라는 예수님의 뜻을 알겠다. 백합은 백합이 되려하지 키 큰 해바라기를 선망하거나 매혹적인 장미가 되려 하지 않는다. 새는 그저 새로서 창공을 날며, 시냇물을 흘러가고, 나무는 나무로 서 있다. 자연의 모든 것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끝도 없이 비교하고, 지금의 나보다 예전의 나, 더 나아진 미래의 나에 마음이 팔려있는 것은 사람들뿐이다. 그래서 때때로 야외 예배가 아니라도 자연을 바라보아야한다. 백합이 백합이고 참나무가 참나무이듯 너도 너 자신으로 충분해. 너 자신이 되어라, 하시는 주 음성이 거기서 들려, 내게 전하시는 바 그 뜻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 듯 하도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0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 하는 청년들에게 가정예배에 대한 로망을 자주 듣는다. 결혼 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이 둘러 앉아 예배드리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좋다는 것이다. 모태신앙이며 특히 부모님의 믿음이 열정적인 경우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다. 내게 가정예배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저녁 먹고 숙제도 다 하고 마음 편히 TV에 빠져들 시간이면 영락없이 들리는 소리, ‘성경 찬송 가져와라.’ 매일 밤 새롭게 귀찮고 짜증나고 지겨운 것이 가정예배였다. 교회 저녁 예배가 있는 수요일과 주일은 해방의 시간이었다. “고귀한 시간, ‘낭비예배”(마르바 던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를 고통스럽게 허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랬으니 어머니의 성경책은 나를 괴롭게 하는 율법책에 지나지 않았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솔직히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신 하나님 이야기는 기쁜 소식, 복음보다는 고된 소식에 가까웠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은 월요일에 학교 가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고, 주일성수라는 미명하에 일체의 매매 행위는 금지였다. 과자 하나도 사먹을 수 없었다. 꼭 필요한 학교 준비물도 주일에는 살 수 없었다. 교만하지 마라, 친구를 미워하지 마라, 동생을 사랑해라, 주일 성수해라, 순종해라. 지켜야할 목록은 한이 없는데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신다니 고된 복음일 수밖에. 부모님을 통해 소개받는 하나님은 내가 지은 죄를 깨알 같이 적고 있는 까다로운 기록관 같은 분, 잠복근무 하며 죄 짓기를 기다리다 걸려 넘어지는 순간 잡았다, 요놈!’ 하는 경찰관 같은 분이었다. 철이 들고 사유가 깊어지며 나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가게 되었다.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가 변하기도 했지만 어릴 적 새겨진 하나님 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그로 인해 사랑의 하나님께 온전히 안기고 내어맡기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는 가정예배며 부모님의 종교교육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이 찬송의 가사처럼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하나님이 그립고 아름답고 재밌는 분이었다면 어땠을까. 가정예배가 기다려지고 자발적으로 함께 하고 싶은 시간이었다면. 그 예배에서 읽는 성경 말씀이 달고 오묘하였다면. 텔레비전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어서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었다면 어땠을까. 내 젊은 날 하나님은 내가 뭔가를 해드려야 보상으로 복을 주시는 분이었고, 예배는 그 중 가장 큰 의무조항이었다. 고된 소식에 부응하여 늘 뭔가를 해야만 하는, 지킬 것투성이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앙생활 했다. 이런 유산을 남긴 어머니의 헤어진 성경책은 내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여기서 끝이었으면 가계를 흐르는 슬픈 하나님 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 그렇지 않다. 사춘기, 청년시절을 지나며 어머니가 소개한 하나님을 의심하며 신앙은 자라게 된다. 뭘 모르던 때는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 두려워 무작정 순종했는데, 교회 봉사 열심히 해야 좋은 배우자도 주시고 직장도 열어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님을 깨달아 가며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제목,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같은 것이 하나님의 심통이 아니라는 것, 그분과 나의 생각이 동급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가게 되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소개받은 하나님 이미지가 걸림돌인 줄 알았는데 거기 걸려 넘어져 코가 깨지고 무릎 까지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디딤돌이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성경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주시는 법은 잘 몰랐다. 그저 읽으라 했고, 기도하라 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대목에선 언제 어디서나 곧바로 목이 메어 울먹이곤 하셨다. 내 어릴 적에도 그러시더니 노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신다. , 이 순진한 십자가 사랑이 엄마의 힘이구나. 기복적 신앙이라고, 왜곡된 신앙교육에 해로운 신학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이렇게 믿음에 서 있는 것은 저 순진한 사랑과 기도 때문이구나. 수십 년 동안 일 년 일독을 지켜 온 어머니의 성경책은 나달나달 헤어져있다. 철없이 반항하고 방황하던 시절에 비하면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한결 찬송 가사에 가까워져있다. 귀하고 귀한 성경책이다. 내게도 다른 선택이 없다. 시시때때로 성경 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일 외에는.


  1. 2018.07.24 16:14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8.07.26 09:55 신고

      이렇게 우리는 배워가는 것 같아요. 오늘도 역시 지금 여기의 사랑에 충실하는 님과 제가 되기를 기도하며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2. 이슬여왕 2018.08.06 11:53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슬여왕이라고해요
    한주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항상 궁금해서요
    님은 혹시 교회를 다니곳 있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주일날에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고 그래여
    저는 어릴때부터 부모님하고 같이 교회를 다니고 그랬어요
    지금도 교회를 가고 있어요

  3. 파수꾼 2018.08.26 06:28

    주일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찬송이 떠올라서 검색하다 들어오게 되었는데 너무 공감되는 말씀이네요 성경은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죠 제가 얼마전 어려움에 처해 믿음을 시험당할때 저를 지켜준 생명의 말씀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달고 달게 느끼며 거의 매일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맨 처음 서술하신 것처럼 어려서부터 가정예배나 말씀생활을 해오신분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대체로 모태신앙이시기 때문에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일이라 괴로워하시는걸 많이 보아왔습니다 허나 저는 제가 선택했다기보다 선택받은 입장이어서 주님께서 주일성수니 십일조니 말씀생활까지 몸소 하나씩하나씩 알려주시는데 그럴때마다 감사드립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사람이라 지키기가 어렵게 느껴질때 괴롭기도 하고 갈등도 생기는데 하나님은 선하셔서 저를 항상 선으로 이끄시네요 할렐루야! 찬양받기 합당하신 주님을 찬송하며 주일을 시작할까합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 느끼는 게 있어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것이 있는데 말씀생활과 함께 기도생활이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글내용으로 보아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실것으로 예상되지만 특히나 요즘같이 동성애가 만연해지고 법적으로 인정받으려하는 타락한 시대에서 크리스찬으로서 깨어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법제도화되면 미국처럼 한국도 크리스찬들에게 고난의 시대가 열릴것이라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죠 아 얼마나 추악하고 타락한 시대인지 일일이 말씀드릴수는 없지만 그 추악한 민낮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가까워왔다걸 소름끼치도록 느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호의호식하며 잠들어 있는 크리스찬들이 깨어 기도해야합니다 과학은 크리스찬들의 목숨을 앗아갈만큼 발달하였습니다 지금도 물론 사단은 과학으로 인해 우리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과학을 통해서 소름끼칠 정도로 믿음을 깨뜨리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모든 전반에서 마지막이 가까왔다는 생각으로 우울함이 들때 주님이 주신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말씀과 함께 두려워 말라 깨어 기도하라 였습니다 아무쪼록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님께서도 혹시나 시대적으로 생명의 위협이 느껴질만큼 어려운 시험이 들었을때 기도와 말씀, 찬양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또 그럴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은혜받는 주일되시기 바랍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9

 


세상에 똑같이 생긴 얼굴이 없듯 사람마다 생각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안다. 내 생각 있듯이 네 생각 또한 분명하고, 그 차이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신비라는 것도 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내 주업이고, 고유한 자기다움 찾는 여정 안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더라. 머리로는 그렇게 다 아는데 차이는 늘 힘겹고 두렵더라. 내 생각과 다른 친구의 입장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다. 그에 대해 논쟁을 하는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때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마음 한 구석 휘~잉 찬바람이 일기도 한다. 셋이 친한데 나를 뺀 두 사람이 나만 모르는 것을 공유하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렇다. 숨기는 기술이 좋아서 당황한 마음 잘 들키진 않지만 역시나 휘~잉 마음을 쓸고 지나가는 찬바람 한 줄기는 어쩔 수 없다. 스치는 그 바람, 순간포착 하여 일시정지 버튼 누르고 확대해 들여다보면 이렇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관계가 끊어지고 외톨이가 될까 지레 겁먹음이다. 어렸을 적 왕따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관계 지향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이러하기에 찬송가 406장의 2절 가사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거절당함 또는 버려짐,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에의 두려움 때문이다. 필자의 관계 집착이 과하다 느껴지시는가? 인간의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한 홈즈-라헤 척도라는 것이 있다. 가장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생의 위기는 100점으로 환산되는 사별이라고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랭킹 5위까지의 공통점이다. 이혼, 별거, 수감,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 관계의 끊어짐이다. 그렇다. 아무리 독립적인 듯 보이고 강하게 보여도 알고 보면 따스한 연길이 필요하다. 그것을 상실할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함께 춤추시는 하나님을 본떠 창조된 존재이다. 어우러지고 연결되어 있을 때 인간답고, 본성에 부합하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 행복의 극단에 있는 불행감은 단절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감정 중 하나가 끊어져 고립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에덴동산을 잃고,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과 단절된 그때로부터 시작된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 이 두려움을 인정하고 나는 찬양한다. 조금 지질해보여도 살짝 과한 자위의 노래 같지만 당당하게 부르련다.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그러고 보니 369죄짐 맡은 우리 구주도 있다. 3절이 이러하다.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에서 참된 위로 받겠네비슷한 내용이지만 이 곡의 예수님은 대놓고 좋은 친구라니 한결 더 편안하다.

 

관계에 연연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또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같은 말씀이 주는 부담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것 같고, 누구와도 화평을 이루어야 예수님의 제자 인증 받을 것만 같다. 이러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초인적 자아상을 만들어낸다. 사랑스러운 그 사람에게도 한결같은 순도 100%의 사랑을 줄 수 없음을 안다. 하물며 밉상 그 친구까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니!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를 앞에서 나는 늘 죄책감에 허덕인다. 사랑이라곤 없는 죄인이다. 허튼 애를 써본다. 그러나 죄책감으론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없다.

 

나의 믿음이 연약해져도 미리 예비한 힘을 주시며

위태할 때도 안보하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연약한 믿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자리, 늘 부족한 사랑이어도 괜찮겠다. 대체로 연약하고 흔들리며 아주 가끔 큰 믿음 보이는 나를 위해 이미 예비 된 힘이 있단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펄럭펄럭 하다 꺼져가는 위태위태한 믿음이라도 그분이 붙드는 손은 차원이 다르다. 유한한 우리를 붙드는 영원한 팔이다. 이 대목에선 405장의 또 다른 주의 팔이 떠오른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친절한 팔이다! 영원하며 동시에 친절하고 따스한 팔이다. ‘으이그, 도대체 언제 철이 들래? 언제 나를 닮아 완전한 사랑 장착하고 모든 이들과 더불어 화평할 거냐고, 네가 그렇듯 사랑이 없으니 친구들이 너를 멀리하지. 제발 좀 완벽한 사랑의 사람이 되거라!’ 다그치고 타박하며 팔 빠지도록 끌어당기는 우리 엄마의 손과 다르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친절한 팔이다. 그 팔이 영원하다. , 주님 당신 그 팔, 팔 배게 삼아 쉬고 싶어요.

 

능치 못한 것 주께 없으니 나의 일생을 주께 맡기면

나의 모든 짐 대신 지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QTzine] 7월호


  1. 2018.07.01 17:29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8.07.06 21:14 신고

      나만 그런 게 아니죠?!^^
      나도 이런 댓글 받으면 '그래,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하고 힘을 얻어요.
      잘 지내죠?

  2. 2018.07.07 16:47

    비밀댓글입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8

 



기도제목이란 이름으로 일상의 아픔을 나누는 일이 흔하다.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 해도 안 해도 어려운 연애, 어려운 처지의 친구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 하다못해 계속 실패하는 다이어트 얘기까지. 누군가 내밀한 어려움을 내놓았을 때 하지 말아야할 것이 충고, 조언, 평가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내 얘기 꺼냈다 다시는 여기서 나누나봐라!’ 결심한 적이 있다. 여러 번 있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그러려니 해, 친구를 돕다 네가 우울해지면 그건 돕는 게 아니야, 경계를 지켜야지, 하나님이 다 좋은 사람 예비하셨을 거야, 일단 살을 빼, 저녁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마. 이래라 저래라, 일해라 절해라......” 교회만큼 사랑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간섭과 판단이 흔한 곳도 드물 것이다. 답을 몰라서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애나 친밀한 관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갈등이다. 여친(또는 남친)이 침을 튀기며 쏟아놓은 말끝에 그러면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말을 했어야지. 뒤에 와서 이러지 말고 처음부터 거절해야 하는 거야.” “, 내가 앞에서 딱 거절할 수 있으면 뒤에 와서 이러겠니?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저 공감해달라고!”

 

우리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어떤 말과 행동에도 판단 받지 않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 관계적 존재인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그런 안전한 곳이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한가 말이다. 문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심리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하는 말은 어설픈 충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그래. 이런 방법도 있다고 알려주려는 거야.” 단지 도우려는 뜻, 사랑의 발로라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딱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 사랑의 발로에다 기도의 권위까지 더해진 충고와 조언은 가히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정작 입장이 바뀌어 자기가 나눈 고통에 충고 어택이 들어오면 어떨까? ‘내가 몰라서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우면 기도제목으로 내놓겠어? 제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야야. 차라리 입을 다물자.’ 결국 이해받지 못했다는 느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어렵게 꺼내놓은 기도제목에 그저 손잡아 주고 조용히 같이 기도해주면 안 돼?’ 그저 들어주고, 생색내지 않고 기도해주는 사람 찾기 어렵다. 충고와 판단이 난무하는 위험한 인간관계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 찬송 214장의 1절이다. 참된 도움이신 예수님께 간다. 내 모습 이대로 다 받아주실 것 같은 예수님께...... 라 하기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생각해보니 예수님도 뭐라 하실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이기적이고 쎈 면도 있고 신앙도 예전보다 못하다. 꼭 직장상사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 믿는 내가 더 큰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했어야 하는데 좁은 내 마음이 문제인 것 같다. 안 되겠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면 안 되겠다. 일단 주일성수를 다시 확실하게 회복하고, 부장을 사랑하는 마음 장착한 후에, 술 담배 끊고 예수님께 가야겠다. 아직은 일러, 아직은 아니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지 않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 말이 다 맞다. 스트레스 받는 것도 내 성격 탓이고, 친구를 도우려면 끝까지 도와야 하는데 힘들다고 그만 내려놓으려는 건 내 이기심이지. 여기서 몇 킬로는 더 빼야 소개팅도 나가고 연애도 할 수 있지, 늘 다이어트 실패하면서 연애는 무슨!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실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못하는 것은 소그룹 멤버도, 친구도, 예수님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이 내 안에 크게 울리는 것은 마주쳐야 소리 나는 손뼉과도 같다. 내 마음 안에 항시 대기 중인 자기비판의 손바닥이여. 스스로를 때리는 비난의 손바닥이 밖에서 들어온 충고의 손바닥과 만나 짝! 하고 큰 소리를 낸다. 사랑의 주님께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선언된 내가 여전히 거절감의 늪을 헤매는 이유이다.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아주소서

 

죄로 만신창이 되어 돌아오는 탕자가 이 찬송을 부른다면 어떨까. 제가 아버지라도 자기 같은 인간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굶어죽지 않고 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진 탕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받아들여짐의 기준은 아버지께 있구나! 내 모습 이대로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탕자 체험이 필요하다. 언젠가 형편이 나아지면 아버지께 가겠노라, 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도 돌아가기만 하면 받아주시는 분께 가야겠다고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럴 때 나 스스로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며, 나 먼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돌아섬이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어릴 적 명절 아침 예배에선 늘 이 찬송을 불렀다. 앞집 친구네서는 제사가 한창인 시간이었을 테고. 목사인 아버지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참된 복의 근원을 천명하고자함이었을까. 조상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다! 하지만 어린 내게 이 찬송은 그저 떡국이나 세뱃돈, 명절에 모인 가족들의 분위기 같은 것을 연상시킬 뿐이다. 음악은 흔히 경험과 함께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바로 그 기억을 소환해내는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찬송가 28장을 부르면 어렴풋이 설날 아침을 떠올린다. 내게는 가족의 노래, 명절의 노래이다. 결혼 하고 명절 노래 한 곡을 더 얻었다. 시댁의 명절 아침 찬송은 559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내게는 생소한 가정예배였다. 그야말로 예배를 보는분이 대부분인 예배였다. 거의 어머니 한 분이 대표로 드리는 것 같았고, 다른 친척들은 구경 내지 그저 비참여의 태도로 자리만 지키셨다. 어머니께 힘을 실어드리기 위해 힘을 내어 찬송을 불러보지만 어쩐지 민망하고 어색하다.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장손 며느리인 어머님이 일찍이 홀로 신앙을 갖게 되셨다. 제사 문제로 내적 갈등을 겪으신 것은 당연한 일. 어떤 계기로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꾸겠노라 선언 하시고, 이 일로 친척들과 풀리지 않는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처음 그 자리에 합류한 시점은 오랜 갈등이 일상이 된 어느 명절이었다. 형식상 예배를 드리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앉아 있어주는 형식, 그것도 감지덕지인 분위기였다. 무언의 저항 속에서 고마워라 임마누엘힘주어 부르는 어머니의 찬송은 안타까움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렀던 찬송의 가사를 보라. 부조화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율배반이다.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즐거운 하루하루, 차라리 다른 찬송이면 어땠을까? 어쩌다 이 찬송이 명절 18번이 되었을까.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라는데 갈등에 휩싸인 동기들이 민망한 노래 속에 어정쩡하게 마주하고 있다. 조상의 복이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근본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가족들이 하나님 아버지 모셔서 믿음의 반석이 든든하다노래하고 있다. 어서 이 예배가 끝나 식사시간이 오길, 아니 이 불편한 명절 하루가 어서 지나가길. 한 발 물러 서 지켜보는 나의 심정조차 그러했다.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찬송의 가사를 일말의 아픔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부르던 나의 원가정 역시 말 못할 갈등과 사연을 배경처럼 깔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늘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명절 아침 복의 근원은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가 되었다. ‘산에서 10마일쯤 떨어져 있을 때만 그 산이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가정도 그 사정을 모를 때만 평..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C.S 루이스가 어느 편지에 썼다는 말이다. 친구가 정말 믿을 만 할 때, 충분히 친해졌다 싶을 때 보통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실은 우리 부모님 이혼하셨어, 아픈 형제자매가 있어, 부모님이 힘드셔서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어, 부모님과 소통 자체를 포기한지 오래야. 백 사람이면 백 개의 크고 작은 아픈 가족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예쁜 접시에 담긴 과일 먹는 가족은, 그런 거실은 없다.

 

가정의 달이 되어 이 찬송을 부르게 될 때 뭔가 조금 불편한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스캇펙의 그 유명한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은 고해(苦海).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가정은 따스하고 그리운 곳이지만 동시에 아픔과 갈등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금 다른 지점으로 옮겨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의 문제가 특별하고, 우리 집만이 갈등과 어려움에 휩싸여 있다고 위축되거나 불평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 문제 많고 아픔 있는 우리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이 현실감 없는 찬송은 소망의 노래가 된다. 비록 지금 믿지 않는 가족으로 가슴 아프고, 갈라진 마음으로 얼굴 마주하기 힘든 시절이라 할지라도. 예수만 섬기는, 예수만 닮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사랑이며 소망이다. 우리 인생, 우리 가정의 현실은 사철 찬바람 부는 날이지만 사철 봄바람의 나날을 그린다. 이것은 고해와 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의 소망이며 또한 소명이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6

 


내 마음에 있는 이 노래로 고백록을 써본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경계 지으며 살아온 세월이 길다. 뚜렷한 경계를 세워놓고 나는 불가침의 선 안쪽, 안전한 이쪽에 서 있다고 자신했다. 그것은 흡사 홍수로 떠밀려 내려가는 세상을 방주 안 창문으로 내다보는 안도감이며 다른 말로 하면 선민의식이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던 이런 속내가 오늘의 찬송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를 부를 때 유독 또렷하게 느껴지곤 했다. (예전 찬송 가사는 물 건.. 생명줄이었다) 후렴의 반복되는 가사는 은근히 선동적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방주의 안팎을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무모한 확신이 부끄럽다.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줄 그 누가 던지려나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누가 저 형제 구원하랴이런 가사에 몰입할 때는 나 아니면 안 된다며 앞장서다 정작 함께 힘을 모아 줄을 당겨야 할 배 안의 친구를 외면한 적도 있었다. 뜨거운 구령의 열정, 떠내려가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먹 꽉 쥐고 부르던 찬송. 그때 흘린 눈물, 떠밀려 가는 영혼을 품고 미어지는 가슴으로 드렸던 기도,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그 기도와 눈물들이 부끄럽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히 차고 넘쳤던 그 시절은 오히려 그립기도 하니 말이다. 한동안은 이 찬송을 부르지도 못했고, 입을 열어 내 안의 예수님 이야기 전하는 일에도 움츠러들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질 상 전도지 들고 노방전도를 하거나 대놓고 예수 믿으라, 교회 가자는 말은 잘 못한다. 대신 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는 물론 냉담한 시절을 보내는 교회 후배를 위한 기도만큼은 꾸준히 했다. 특히 냉담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에게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며 관심을 끈을 놓지 않았고 힘든 일상을 지나는 친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했다. 나름 보이지 않는 정성을 많이 들였다. 그러는 사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러고 있는 나는 참 좋은 선배지, 예수님의 제자의 면모란 이런 것일 거야.’ 죄가 틈입한 것이다. 생명줄 던지는 나의 마음, 위쪽으로 갈수록 높아진 것이다. 자아도취 병은 으레 치명적이 죄로 나를 이끈다.

 

너 어서 생명줄 던지어라 저 형제 지쳐서 허덕인다

시험과 근심의 거센 풍파 저 형제를 휩쓸어 몰아간다

 

시험과 근심의 풍파로 떠밀려 가는 형제자매에 대한 진심어린 연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인생의 답이라는 고귀한 진실을 알리고픈 열망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선한 일을 통해 오직 나를 높이는 수단 삼고자 하는 죄의 본성에 민감하지 못한 탓이었다. ‘민감은커녕 오랜 시간 알아채지도 못하고 신앙생활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찬송이다. ,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자기성찰만 하며 입 다물고 있겠다는 것은 아니다. 요 며칠 운전 하며, 걸으며, 설거지 하며 흥얼흥얼 많이 불렀다. 다시 이 찬송을 부른다.

 

너 빨리 생명줄 던지어라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랴

보아라 저 형제 빠져간다 이 구조선 타고서 속히 가라

 

내 노력으로 얻은 보상으로 생명줄 잡았다고 자신한다면 그 줄은 생명줄 아닌 썩은 동아줄임에 틀림없다. 물에 빠져 허덕이는 것은 예수님 모르는 그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왜곡된 특권의식에 허덕이는 나의 현주소일 것이다. 나도 저 형제, 빠져가는 형제와 똑같은 처지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모태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구원 방주 자동 탑승이 아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 소중한 생명줄을 붙들어야 함을(2:12). 방주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하나님 놀이는 그만두고 속히 손 내밀어 형제의 손을 잡을 일이다. 나를 스치는 공허한 눈빛, 근심어린 표정의 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생명으로 연결되고 연대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위험한 풍파는 빨리 지나고 곧 건너편 언덕에 이를 것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내게 주어진, 그들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은 지금 여기이다!

 

위험한 풍파가 곧 지나고 건너편 언덕에 이르리니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나 곧 생명줄 던져서 구원하라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5

 


제목이 내가 매일 기쁘게(찬송가 191)’이다. 이런 제목의 찬양을 부르면서 울 수 있을까? 빠른 템포로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온몸 들썩들썩 손뼉 치며 찬양하면서 말이다. 물론 너무 기뻐서 울기도 하니까 당연히 울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내가 매일 기쁘게찬양을 하면서 아픈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내가 해봐서 안다. 이 찬송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 콕 찍어 정해준 나의 찬송이다. 밝은 성격에 익살 떨며 깔깔거리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이기에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같은 가사와 딱 들어맞는 캐릭터라는 것. 동의한다. 내게 가장 쉬운 감정이 기쁨이다. 그러니 찬송가 191내가 매일 기쁘게는 나의 찬송이 맞다.

 

그러나 내 아무리 긍정의 사람이지만 늘 기쁘게 수는 없는 일이다. 지탱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로 어깨가 축 쳐지고 마음의 생기가 바짝 말라버린 어느 날이었다. 기쁘게 찬양하자는 인도자의 템포와 따라 손뼉 짝짝 치면서 찬송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전주가 끝나고 저 가사를 입에 담는 순간 눈물 둑이 터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가슴이 딩딩 울리는 통증이다. 한때 내가 숲의 새처럼 이 노래 하던 적이 있었는데, 공동묘지 사이를 휘파람 불며 걸어갈 기세로 소망과 긍정의 날을 살았는데. 그 기쁨의 날과 메마른 순간의 간극이 너무 크다. 슬픔이라고도, 막막함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어 흐르는 눈물이고 아픔이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여기서 노래하는 기쁨은 외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의 감정만은 아니다.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나를 알아주는 말이 무성하고, 몸은 건강하여 활기가 넘칠 때 흘러나오는 콧노래가 아니다. 순례의 길, 좁은 길이다. 성공하고 인정받는 것에 취해서 기뻐 그 자리에 안주한다면 순례의 길이 아니다. 누구보다 빨리 고지에 오르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제치고 달려야 하는 길, 성공을 위해 사랑과 진실을 유보하고 달리는 길을 좁은 길이 아니다. 그 순례의 길, 좁은 길에서 밤낮 기뻐할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의 감정이거나 노래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타고난 밝고 명랑한 성품에 힘입어 좋아라 손뼉 치며 부르는 찬송, 피상적인 기쁨 그 이상의 고백일 것이다. 많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바, 기쁨이 사라진 메마른 땅을 밟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행복과 기쁨이 꼭 좋은 것, 그 반대는 피해야할 것도 아니다.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1),

십자가 앞에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도(2),

기쁜 마음으로 주의 뜻을 행함(3)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음(벗을 날에 대한 소망, 4)

 

이유는 한 하나! 주의 영, 성령이 함께 하심이다. 평안과 기쁨은 성령 충만의 중요한 지표라고 한다. 내 안에 기쁨이 사라진 것도 서글퍼 눈물이 흐르는데, 성령 충만의 부재라고? , 나는 이 찬송을 계속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든 스미스 목사님은 저서 <예수의 음성>에서 우리 마음의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말한다. 기쁨과 평화는 성령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주는 시금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인다. ‘성령의 임재에 대한 중요한 지표로서 기쁨과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기쁨이나 평화가 유일하게 정당한 정서적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노, 두려움, 슬픔, 절망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불안정한 세상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찬송을 계속 부르기로 한다. 찔찔 짜면서 나는 숲에 새와 같이 기쁘다노래할 것이다. 깨어진 세상을 살며 때로 슬픔과 분노가 기쁨을 향한 정직한 발돋움이 될 수 있기에. 내가 주님 안의 참된 평화를 맛보았던 그 어느 날에도, 그 다른 어느 날 죄에 빠져 평안함이 없을 때에도, 그 어느 기쁨의 날을 그리워하며 상실감에 젖어 눈물 흘릴 때에도 주의 영은 함께 하시니 말이다. 기쁨의 근원이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


  1. 성환 2018.03.11 01:51

    사모님 공감지수 별5개입니다.
    개인적으로 사모님 글들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큰 발자국으로 남겨질것같은 믿음이 있사옵니다.ㅎㅎ
    좋은글 간만에 많이 읽고가요. 건강하세요~

    • BlogIcon larinari 2018.03.23 10:25 신고

      발이 225 밖에 안 돼서..... ^^ 감사해요. 잘 지내시죠? 가끔 떠오를 때 평안하시길 기도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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