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6

 

최 선생님은 주변 모든 이들을 위한 상담자 같으시다. 선생님 댁 현관 앞에서 울며 나오는 한 여자분을 만났다. 내담자려니 했는데, 친구분의 며느리란다. 얼마 전 치매 증상으로 요양병원에 가신 선생님 친구분, 그 소식으로 선생님도 한동안 적잖이 힘겨워하셨었다. 듣자 하니 어머니 요양병원 입원 후 자녀들 사이 갈등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며느리가 선생님을 찾은 것이다. 집에서 치매 어머니를 모시던 분이다. 스쳤지나 듯 마주쳤지만, 고통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일은 뭔가 남 일 같지가 않다.
 
     선생님, 힘들어 보이세요. 좀 쉬실까요?
그러게. 기력이 없네. 이젠 상담도 접어야 할 때가 됐나 봐. 잠깐 있어 봐. 으읏짜, 내가 뭘 좀 먹어야 한다.
     네, 선생님. 어여 홍삼 드시고요. 오늘은 좀 쉬세요. 저는 다음에 올게요.
예이, 사람아! 가긴 어딜 가? 노인네랑 놀아주고 가야지. 기력 없는 노인네 내쳐 두고 가버린다고? 걱정 마오. 벌써 다시 힘이 나는 걸.
     아니요, 기운이 없어 보이셔서요. 하긴 또 제가 인간 비타민이니까요. 에너지 팍팍 드리겠습니다. 헤헤. 힘든 얘기 들어주는 게 보통 에너지 드는 일이 아닌데, 선생님 대단하신 거예요.
그래? 정 선생은 상담할 때 들어주는 게 힘들어?
     저요? 어... 저는 인간 비타민이니까, 스스로 비타민 주입이 가능하니까 그리 힘들지 않죠. 헤헤. 상담 일 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그렇잖아요. 번 아웃이 오기도 하고요. 선생님은 그런 적 없으세요?
왜 없어? 그런데 나는 아픈 얘기 듣는 거 어렵진 않아요. 차라리 부동산 얘기, 건강식품 얘기, 연예인 얘기하는 친구들 수다가 더 괴로워. 교만한 노인네야. 후훗...
     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나는 상담이 좋아요. 아프고 힘든 얘기 하려고 상담 오는 거니까, 사실 그게 다 인생의 진실 아니오! 진실한 얘기는 아플지언정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아. 차라리 근사하게 포장하고 좋은 말만 오가는 대화가 에너지를 더 뺏더라.
     정말 그러네요. 좋은 말 대잔치가 피곤한 게 그런 거였군요. 진실한 대화! 그런 의미라면 저도 상담 안 힘들어요. 셀프 비타민 주입은 취소구요! 헤헤.
고통이 진실이지. 그래, 고통이 진실이야. 삶은 고해라고!
 
누가 문제예요? 딸이에요? 며느리예요?
 
     그런데 선생님, 친구분 자녀들이요. 따님도 계속 전화하시는 거 아니에요? 전에 따님이 소식 알려주시고 상담도 하고 그랬던 거잖아요. 올케 시누이가 마주하고 싸울 얘기를 각각 선생님께 하는 거 아니에요?
, 이제 정 선생이랑 내 친구네 집안사까지 나누는 사이가 됐구나. 며느리는 오늘 처음 온 거야. 상담을 받겠다고 하는데 일단 보자고 했지... 아니나 다를까, 어디든 억울한 감정 쏟아놓을 곳이 필요했던 거야. 사정 아는 사람에게 제 마음 보여주고 싶은 거지 뭐.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여하튼 부모님 모시는 사람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쪽저쪽에서 좋은 소리는 못 듣는 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 같아요.
어라, 부모 모시는 속내를 겪어보지도 않은 정 선생이 어떻게 알아?
     모셨다고 볼 수는 없지만요. 아이들 어려서 풀타임 일할 때 육아 때문에 함께 산 적 있거든요. 제 필요로 함께 사는 건데도요. 정말 힘들더라고요. 힘든 것 꼽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뭐랄까. 같이 사는 건 일상이잖아요. 한 번씩 왔다 가는 자녀들과는 어떻게 비교할 수 없는 처지인 거죠. 아까 현관에서 잠깐 스쳤는데도 그 며느님 마음이 느껴지던데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제 필요 때문에 함께 사는데도 그렇게 힘들었는데요. 연로하신 어머니, 그것도 치매 어머니를 모시는 게... 아아, 저는 상상이 안 돼요.
그러게나 말이야. 치매 걸리기 전에도 내 친구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거든. 평생 교직에 있으면서 자부심도 컸고. 가르치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 말이야. 같은 사는 며느리 쉽지 않겠구나 싶었었어. 그 며느리 고생 많았지. 발병하고 요양병원 가기까지 한 3년인데, 처음에는 치매인 줄도 몰랐잖아. 하루하루 인격이 달라지는 시엄마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 거든.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에효, .... 죄 없는 자식들이 서로 할퀴고 그런다. 어쩌겠어. 병원으로 가야지. 갈 데로 간 건데 딸은 또 못내 안타까우니까 제 올케한테 싫은 소리를 한 모양이야.
     아오, 정말! 딸이 너무한 거 아녜요. 자기가 한 번 모셔보라죠. 노인네 세 끼 식사 차려드리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라고요. 그것도 치매 어머니를요. 너무 이기적이에요!
허허허, 그렇긴 한데. 정 선생이 왜 이리 흥분을 해? ? 시엄마 모시게 될까 겁나?
     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흥분했나요? 헤헤. 시어머니는 아직 젊으시고 혼자 지내는 것 좋아하시니까요. 아흔 넘은 엄마가 동생네하고 사시거든요. 올케한테 늘 미안하더라고요. 한 번씩 엄마 보러 가는데 눈치가 보여요. 올케는 이것저것 식사 한 끼라도 신경 쓰일 거고, 복잡하네요. 뭔가, 마음이...
그렇구나. 딸 말도 그래. 걔도 제 입장이 있더라고. 제 엄마 성질도 알고, 그 성질 받아내고 모셔 준 올케가 고맙고 미안하대. 그래서 제 딴에는 한다고 했다는 거지. 치매 엄마 병원에 넣고 보니 마음이 갈피가 잡히지 않았나 봐. 저는 힘든데 병원 보내고 좋아라하는 것 같은 올케가 이해도 되지만 섭섭했대. 어쩌다 그 말 한 마디가 나와서 옥신각신하게 된 모양인데, 말이 오가면서 감정이 커진 거지 뭐.
     아... 며느리가 좋아라 했어요?
속으로 좋아라, 했어도 좋다고야 했겠어? 벌써부터 병원으로 모시자고 한 건 딸이었어. 그런데 올케가 괜찮다, 괜찮다 했다는 거지.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인 거 알고 제가 나서서 추진했는데... 사리분간 못하는 엄마를 병원에 혼자 놓고는 몇 날 며칠 눈물 바람을 하다가 참았으면 좋았을 말을 내놓았나 봐.
     어떤 말을 참아야 하는데요?
하긴, 참아야 하는 말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
     그러면 선생님, 지금 누가 문제예요? 딸이에요, 아까 그 며느리예요? 양편 말을 다 들어보셨잖아요. 이런 경우 두 사람은 서로 어떻게 화해해야 할까요?
글쎄, 화해라... 화해만이 능사인가 싶고. 입장이란 게 있는 거잖아요. 정 선생도 며느리 입장으로 생각할 때와 딸 입장이 될 때 다르지 않은가?
     어... 그러네요, 선생님. 입장이란 게 있죠. 아니, 그러고 보니 도대체 이런 때 아들 사위는 왜 사라지고 없는 거죠? 요양병원으로 모시지 않는 한 부모님 수발은 거의 여성들 몫이잖아요. 그것도 주로 며느리요. 오래전 읽었는데 제목도 잊히지 않는 박완서 선생 소설 생각이 나요. 『환각의 나비』라는 소설인데요. 치매 어머니 돌보는 문제로 딸과 아들 사이 갈등인데, 어머니 자신이 “내가 아들이 있는데 왜 딸 집에서 죽어야 하냐?”는 식이었거든요. 아들 집이면 결국 돌봄 노동을 맡는 건 며느리잖아요. 젊을 때 읽었는데도 마음이 참 복잡했었던 게 생각이 나네요.
에이구, 그냥 병원으로 가야지! 병원! 뭐 아들 집, 딸 집이야? 에이구! 정말! 맞아,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유교적,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뿌리가 깊어. 내 친구들만 해도 비슷하다니까. 노년에 딸 집에서 돌봄 받는 걸 은근히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고.
 
웰다잉, 잘 죽는 게 뭐지?
 
     하아... 선생님 참. 막막하네요. 저도 마주해야 할 일인데... 양가 어머니들 생각하니까요. 집에서 편안히 돌아가시는 건 이상일 뿐일까요? 존엄한 죽음 같은 것 말이에요.
글쎄... 존엄한 죽음이라. 요즘은 웰빙이 아니라 웰다잉 웰다잉, 많이 하던데. 둘 다 콩글리쉬잖아. 웰다잉... 그게 무슨 뜻이야? 잘 죽는 게 뭐지? 살던 집에서 자식들 돌봄 받으며 죽으면 잘 죽는 걸까? 시설 좋은 요양병원에서 비싼 간병 받으면 존엄한 죽음이 되려나? 집에서 모실 자식 없고, 좋은 요양병원 갈 돈 없는 사람은 웰다잉도 애초 틀려먹은 거유?
     그러게요. 저는 그 따님이 너무 이해되는 게, 제가 친정엄마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딱 한 가지이거든요. 집에서, 엄마 방에서 돌아가시게 해주세요. 엄마도 늘 그러시죠. 잠자다 불러가시면 좋겠다. 기도하다 불러가시면 좋겠다. 엄마가 쓸쓸하게 병원에서 돌아가신다 생각하면... 아, 생각도 하기 싫으네요.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면 좋겠지, 정말 좋겠지... (한참 생각에 잠겨 말이 없으시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여사라고 알죠?
     그럼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말씀하신 분이죠?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였던가요? 애도 전문가시잖아요. 그 5단계는 정말 일리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죽음에 대해 현대적 의미로 가장 잘 정리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호스피스 운동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할 거야. 그 사람이 시한부 환자 5백여 명을 인터뷰하고 쓴 책이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인데, 5단계가 그 책에서 나와요.
     아... 읽어봐야겠네요.
정신의학자라고 다 그러지 않을 텐데, 죽음과 상실에 대한 남다른 영적 감각을 타고난 사람 같아요.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대하는 의료진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대. 환자 한 사람이 아니라 심박 수, 심전도, 폐 기능... 같은 것만 보더라는 거지. 사람, 그렇지! 한 사람의 죽음인데 말이야. 그런 계기로 일생 죽음을 연구했어.
     그러니까요, 선생님! 한 사람, 하나의 고유한 생명,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인데 병원에서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럴 수도 없을 거고요. 그래서 노부모님 병원에 두는 게 애달픈 일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친구분 따님 마음이 또 이해가 되고요.
그래, 말 잘했어. 죽음의 외주화라는 표현을 하지. 퀴블로 로스도 아까 말한 책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조부모가 집에서 임종을 마주하고, 아이들은 그 과정에 함께 하고, 심지어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고 대화하고, 가족들이 함께 애도할 수 있다면 인생에 대해 큰 가르침이 될 거라는 것이지. 맞아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 그 이상 좋을 수가 있겠나. 그런데 그야말로 이상이지.
     이상... 그렇죠. 저희 친정엄마도 지금은 혼자 화장실도 가시고 최소한의 자기 돌봄이 가능하니 집에서 사실 수 있는 거죠. 여기서 더 안 좋아지시면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아슬아슬해요.
어이구, 정 선생네도 올케가 고생이 많겠네.
     맞아요, 선생님. 동생 가족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죠. 그런데 말씀 듣다 보니 그 딸이 이해가 되는 게요. 무슨 말을 못 참았을지 딱 상상이 되네요. 가끔 엄마한테 가서 보면 제 눈에만 보이는 것이 있거든요. 조금 더 세심하게 챙겼으면 싶은 거예요. 그런 디테일들이 보일 때 참 힘들어요. 보여도 못 본 척해야 하는 거죠. 이런 것 좀 신경 써라, 잘 챙겨라, 한마디 하는 순간, 올케 입장에선 어이없고 서운하게 들릴 거예요. 그래서 꾹 참죠. 꾹 참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는 적도 많아요. 그러네요. 모두 마음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말 한마디면 사이가 나겠어요. 에고, 저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요.
그래, 어려운 거지. 저이들이 양쪽에서 울고불고하는 게 누구 잘못이 아니라고 봐. 지금 같은 가족 구조에서 집에서 생애 말기 돌봄이 가능한 집이 얼마나 되겠으며. 아까 정 선생이 말 잘했다. 한다 한들 그 짐은 고스란히 딸과 며느리 여성의 것이 되는 구조는 또 어떻고? 돈이 좀 있고, 입주 간병인을 쓸 수도 있겠지. 그렇더라도, 이것 봐. 이 사람들처럼 자식들 사이에서 뒤늦게 터지는 갈등이라니 말이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웰다잉이니, 존엄한 죽임이니, 말은 그럴 듯하지만.

 
부활의 확신이 곧 웰다잉의 길
 
     선생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할까? 착한 자식 없고, 돈 없는 노인들도 생애 말기에 조금 공평하게 인간적 대접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 복지국가가 뭐야. 이게 국가적인 대안이 생겨야지.
     그러네요. 선생님.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존엄한 죽음이라는 게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네요.
나도 곧 죽을 사람인데 말이야...
     어... 엇... 서, 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야죠. 무슨 말씀이요?
뭐 그렇게 당황해? 허허. 기력이 없어서 상담도 못하겠는 노인넨데,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요, 선생님...
괜찮아. 여태 우리가 한 얘기가 내 친구 얘기도 아니고, 정 선생 어머니 얘기만도 아니고 내 얘기야. 나한테는 생애 말기 시간이 안 오겠어요? 죽음이 나를 비켜가겠냐고?
     아...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지 알아? 말해줄까? 허허허.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이라고 알아요? 수식어가 많이 붙지만, 평화주의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분이 100세가 되었을 때 서서히 스스로 곡기를 끊으면서 생을 마감했어요. 자연사라는 게 기력이 떨어져 음식을 섭취할 수 없으면서 서서히 쇠약해지면서 죽는 것 아니유. 실제로 이런 식으로 죽게 되면 탈수 현상이 오고 피가 산성화되면서 고통 대신 행복감을 느끼게 된대요. 그런 복이 허락된다면 그리 죽고 싶네. 나는...
     스스로 곡기를 끊는다... 결국 자발적인 안락사인가요? 조금 혼란스러운데요, 선생님.
나는 의료행위로 생명을 연장하는 게 싫어요. 스콧 니어링처럼 하진 못해도, 적어도 의학의 힘으로 더 살고 싶진 않으네. 그래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신청을 해두었어요.
     아, 그러세요? 어떻게 그걸...
뭘 그리 놀라? 어떻게는 어떻게야. 그냥 가서 하면 되는 거야. 내가 신청했다 해도 나중에 가족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또 안 된대요. 나는 오래전부터 아들에게 얘기해뒀어요. 연명치료 하지 말아 달라고. 콧줄로 영양공급 하는 것도 원치 않아요.
     와아, 선생님. 디테일하시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덤덤하게 행동하고 말씀하실 수 있으신 거죠? 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좀 놀라워요, 선생님. 이렇듯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관리하실 수도 있는 거군요.
죽음을 관리한다고? 에잇, 그렇지 않아. 죽음을 어떻게 통제 관리해? 차라리 나는 통제할 수 없기에 이러는 거예요. 사전 연명치료거부서를 작성해 놓는다고 내 죽음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될까? 그걸 기대해서 한 건 아니야.
     그러면 왜 하신 거예요?
하하, 어찌 이리 순진한 표정이야? 내 말이 정신없는 노인네 같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요. 그냥 좀 마음이 먹먹하고, 뭔가 좀... 계속 말씀을 듣는 게 힘들고 슬프네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니까요.
그래. 그럴 수 있겠네. 나는 웰다잉이란 말이 불편하더라고. 죽음까지도 자기 계발식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평생 상담 일 하면서 발견한 것은요. 자기계발식 노력과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대부분의 고통이란 것이 인간의 통제 밖에 있거든. 하물며 죽음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실은 어떻게 죽을지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내가 열심한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기독교 신앙으로 분명하게 방향을 바꾼 것이 가족들의 죽음이잖아요.
     아, 그 얘기해주셨었죠. 남편분과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 죽음에 관한 책을 읽으시며 슬픔을 이기셨다고요. 스캇 펙(Scott Peck) 박사의 소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었던가요? 그 소설 읽으시고 죽음의 문제를 다시 보게 되셨고 신앙생활 시작하셨다고요.
기억력도 좋네. 맞아.
     이제야 이해가 돼요. 선생님은 다른 게 아니라 죽음을 통해 회심하신 것이군요. 아까 속으로 생각했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의연하실 수 있을까? 의연함이 믿어지지 않아서 좀 혼란스러웠어요. 그래서 그 근자감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죠.
근자감? 그게 무슨 감이야?
     하하, 근거 없는 자신감이요! 젊은 많이 쓰는 줄임말이에요.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지. 어머니와 남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정말 죽음이 두려웠어요. 죽을 운명을 안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 실은 남모르게 목숨을 거둘 생각도 했었다오. 내 비록 선데이 크리스천이고, 믿음도 적지만... 죽음 너머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겠어요. 그리고 그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천국이라는 것도. 그 믿음으로 마지막 시간을 버티고 있지. 아니야. 버티는 거 아니다.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 때문에 사는 게 의미가 있어요.
     부활 신앙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선생님, 믿음이 이렇게 좋으셨어요?
, 부활 신앙. 그래, 나는 부활 신앙인이야. 부활을 믿으려면 먼저 죽음을 믿어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가끔 열심인 교인들을 보면서 안 죽을 것처럼 산다고 느껴질 때가 있거든. 사전연명의료향서 신청 왜 했느냐고 했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겠다는 게 아니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예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집이든 호스피스든 어디서 어떻게 죽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존엄한 죽음 아닐까.
     아, 선생님 메멘토 모리요! 늘 메멘토 모리를 말씀하시는 이유이시군요.
그래, 메멘토 모리. 이 사람 참 기억력 좋고. 하하. 친구 며느리와 딸이 각각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마지막엔 어쩔 수 없이 하나 밖에 아들에게 의존해야 하겠죠. 정 선생 말대로 의연하고 싶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해둔 건, 아들이 져야 할 부담을 최소한으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죽든 기꺼이 받아들이며 죽고 싶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존엄한 죽음이에요.
     선생님, 웰다잉의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부활에의 확신이 존엄한 죽음, 웰다잉의 길이에요. 부활을 믿으려면 내 죽음을 믿어야 하고요. 오늘 부활 신앙에 대해 한 수 배웠어요.
허허, 참 이 사람 기억력도 좋고 정리도 잘 해. 아이고, 배고프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배고플 땐 먹어야지. 밥 먹읍시다!
 
 
<시니어 매일성경> 7,8월 호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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