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고 기도했다. "주님, 족합니다. 이보다 더 큰 보상 바라지 않겠습니다." 연구소를 통해 하고 싶은 일, 마음에 품고 있는 소원을 그대로 적어주셨다. 아니, 체험해 주셨다. 이보다 큰 보상이 없다. 줄 수 있는 것을 기대해주고, 주는 것을 받는 마음이면 족하다. (P목사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옴) 

 


‘정신실 마음성장연구소’가 ‘루아영성심리연구소’로 새로운 걸음을 내디뎠다는 소식. 연구소를 처음 만났던 시기에 나는 거칠고 무책임한 신앙의 언어에 탈진해 있었다. 더는 목사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고, 어쩌면 기독교인으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연구소를 만났다. 그곳은 내가 기독교인으로 자라며 처음 마주한 여성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에니어그램과 내적 여정’ 과정에 참여했고, 연구소에서 마련한 성심수녀회 신소희 수녀님의 의식성찰 강의를 듣기도 했다. 이후에는 성심수녀회 예수마음배움터에서 진행한 예수마음기도 피정에도 참석했다.

연구소 프로그램에서 뭘 했더라? 이렇게 떠올려 보면 ‘가부장제’란 단어가 뒤따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으로 성장하며 숨겨뒀던 내면의 그늘에 과감하게 직면하기. 안전한 공간에서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드러내기. 나 자신의 내적 모순과 긴장을 애틋하게 바라보기. 구체적인 경험에서 기도를 시작하기. 마음의 소요와 동요를 반갑게 받아들이기 등. 분명 교회에서 할 법한 일들인데도 교회에서는 해본 적 없던 워크숍들을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해나갔다.

그럼 뭘 배웠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시의 언어와 내가 가장 부담스러워했던 기도의 언어가 실은 같은 종족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성찰과 발견이 나를 움직여간다는 말의 의미를 내 경험 속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다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엄마가 ‘요즘 너 기도는 하니?’ 라고 물어보면 ‘나도 매일 기도한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 망가져 있다. 나는 연구소라는 안전한 울타리에 머물며 나의 망가진 부분들을 마음껏 나눌 수 있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던 순간의 기쁨과 용기가 나에게도 있다는 걸 알았다. 물론 내 열등감과 그림자를 샅샅이 뒤져가면서. 그 과정에서 수시로 얼굴이 홧홧해질 만큼 부끄러웠지만 늘 무척이나 즐거웠다. 나의 짜치는 면들을 확인하고, 그런 나를 나 스스로 북돋아주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런 내 옆에는 항상 정신실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계셨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 선택한 후원단체도 ‘루아영성심리연구소’다. 연구소와 어떻게든 연결되고 싶어 후원을 시작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며 우려를 표하고 있지만, 눈을 조금만 돌리면 기독교 신앙의 오솔길을 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루아영성심리소가 그런 곳들 중 하나라고 믿는다. 계속 힘을 내셔서 나 같은 사람들에게 새 힘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Ruach루아영성심리연구소  (2) 2025.03.11
사귐의 기도, 사귀며 기도  (0) 2025.02.09
뜨개 깊은 수다  (0) 2025.02.01
모든 부치지 못한 감사 편지  (0) 2025.01.15
모든 특별한 기도  (0) 2025.01.06

 
심리와 영성 사이 다리 놓는 사람이 되자

 

10여 년 전에, 마음에 맞는 동생들과 영적 독서와 기도 모임을 했다. 그러던 중 작은 공간이 주어지고 자연스럽게 나음터라는 깃발을 꽂고 연구소를 시작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닌데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이름이 걸려 있어서 늘 속에 뭔가 걸려 있는 느낌으로 6, 7년을 보냈다.

 

수선해야 할 자아가 아니라 연결이 필요한 자아

 

 

인간의 고통은 수선해야 하는 자아가 아니라 연결이 끊어진 자아에서 비롯한다는 신념으로 늘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하고 기도했다. 말이 아니라 그 연결을 체험했다.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 여정, 의식 성찰 기도와 관상기도, 꿈 나눔을 통한 영적 여정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말로 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빛나는 존재들을 만나 연결되었다. 아니, 연결을 통해 나의 빛남을 누군가의 빛남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사람 만나는 일이라 사람 사랑하는 일이라 쉬운 시간은 아니었다. 연결되겠다는 자체가 이미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이런저런 한계에 부딪혀 보람만큼이나 좌절도 경험했다. 좌절감 속에서 불태웠다, 충분히 사랑했다, 충분하다, 이쯤에서 접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여러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나는 이제 조금 물러나 글 쓰는 일에 집중하면 좋겠다, 그런 부르심일지 모른다 여기며 기도하고 있었다. 뒤에서 여러 개의 문이 닫히는 중, 앞에서 작은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 문을 연 것은 모두 사람이다. 연결되었던 사람들이다.

 

Ruach루아영성심리연구소

 

 

그래서 새롭게 시작한다.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바꾸고! 무엇보다 연구소 이름에서 정신실뗐다. 우리가 하려는 바로 그것을 담은 루아Ruach(, 호흡) 그리고 영성심리이다. 새로 제작한 Symbol이 언어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새로 시작한다.

 

 

 

Symbol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2:7)

 

: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기도호흡으로 연결되어 깊은 평정심을 이루는 이미지를 상징함

 

Color

 

- 갈색 Deep Brown: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비옥한 땅. 깊은 평온과 평정심의 색을 상징함

- 연한 하늘색 Blue Gray: 하나님의 숨결, 생기, 성령님의 호흡, 생명의 색을 상징함

- 밝은 베이지 Mild Beige: 인간과 흙, 나무와 씨앗, 양모의 색을 상징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상  (2) 2025.03.13
사귐의 기도, 사귀며 기도  (0) 2025.02.09
뜨개 깊은 수다  (0) 2025.02.01
모든 부치지 못한 감사 편지  (0) 2025.01.15
모든 특별한 기도  (0) 2025.01.06

 

오랜만에 모든 찻잔 총출동 하는 거실 모임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우리 거실의 시그니처인 커피, 떡볶이, 수다 삼합이 어우러진 좋은 날이었다. 무슨 사골국물 우리 듯 어묵탕용 멸치 육수를 아침부터 불에 올리고 커피잔 꺼내어 식탁에 깔고 보니, "이런 모임 참 좋아하지, 내가..." 설레고 들뜨기 시작한다. 

 

커피, 떡볶이, 수다만 있어도 좋았겠으나. 여기에 더하여 기도가 있었다. 올해는 교회 중보기도 모임에 함께 하고자 마음 먹었다. 남편은 무엇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래라저래라"를 입에 달고 사는 나와 다르다.  교회에서 써먹기 좋은 많은 걸 갖춘 나를 자기 목회를 위한 수단 삼지 않는다. 그런 남편이 교회 일과 관련해 뭘 좀 해보라 할 때는 들으려 하는 편이다. "한나 기도회에서 강의 한 번 할래?" 작년에 이 말을 여러 번 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아빌라의 데레사로 논문을 썼고, 연구소에서는 침묵 기도, 향심기도를 안내하고 있는데. 중보 기도팀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마음의 변화는 다른 곳에서 왔다. 논문으로 쓴 <영혼의 성>으로 타 교회 중보 기도팀에서 강의할 기회가 생겼고, 이후로도 몇 번의 경험이 생겼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통성기도와 침묵기도, 중보기도와 성찰기도가 내 안에서 화해한 지는 오래다. 그런 내 마음을  나보다 먼저 알아차렸을 수도 있는 남편의 제안이었다. 교회 중보기도 모임에는 마음에 진 빚도 많다. 기도의 빚이라 해두자. 기쁘게 이 기도모임에 함께 하기로 했다. 이사도 했고, 사모님 집에서 집들이로 모이자는 제안이 있어서 날짜 잡고 추진되었다. 

 

떡볶이도 해야 하고, 간단하나마 기도회 준비도 해야 하는데... 집에서 모이는 건데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놀게 되면 놀고, 기도하게 되면 기도하자! 몇 가지 준비만 해두었다. 흘러가는 대로 찬양도 하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늘 하던 개인 기도 시간도 가졌다. 할까 말까, 하던 기도가 있었다. 조금 넘치는 일인가 싶어서 주저하다, 치즈 떡볶이 만드는 오븐 돌아가는 시간이 남았다는 핑계로 제안했다. 오랜 시간 남편과 친정어머니와 손주를 돌시던 집사님께서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생명이 다 빠져나간 몸을 하신 어머니를 요양병원 침대에 눕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 심정을 알기에... 심장이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나뿐이랴! 거기 모인 모든 집사님들이 겪으셨던, 겪으신 일이고. 결국 그 어머니의 길은 우리의 길이 될 것이다. 가족들의 병시중을 위해 한동안 교회 봉사에서 멀어져 그것도 힘드셨을 집사님을 위로하는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여성들이 모여 몸으로 연결되어하는 기도의 힘을 알기에, 그렇게 제안하고 기도했다. 
 
음식 준비를 돕고, 사이사이 사진을 찍어주던 채윤이가 그랬다. "오, 이상한 분위기였어. 일반 가정 집에서 그렇게 기도하고 주술행위 같은 걸 해도 되는 거야?" 좋아서 하는 얘기다. 나도 좋았다. 거실이 눈물의 기도로 가득 채워진 것이 좋았다. 기도의 길을 찾아 헤맬 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김영봉 목사님의 <사귐의 기도>를 다시 읽어 보았다. 아, 이렇게 좋은 책이었구나! 머리로 이해한 것을 몸으로 배우는 17, 18년의 세월이었네! 이 책을 함께 읽으며 "한나들"(중보기도팀 이름이 "한나 기도회")과 기도하려고 한다. 주문한 책이 교회에 도착했다며, 저러고 예쁘게 사진을 찍어 남편이 공유해 주었다. 기도는 언제나 옳다. 기도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소망이 있는 사람이다. 커피와 떡볶이와 수다와 함께... 사귀며 기도! 좋았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상  (2) 2025.03.13
Ruach루아영성심리연구소  (2) 2025.03.11
뜨개 깊은 수다  (0) 2025.02.01
모든 부치지 못한 감사 편지  (0) 2025.01.15
모든 특별한 기도  (0) 2025.01.06

 

연구소에서 새로 시작하는 따뜻한 모임 안내입니다. 이렇게 예쁜 스카프를 내 손으로 뜹니다. 안전한 공간에 둘러 앉아 조곤조곤 뜨개질 이야기, 아무 이야기 나누는 것은 덤.

 



침묵 기도를 위해 자리에 앉으면 '침묵'이란 말이 무색하게 온갖 마음의 비디오가 끝도 없이 돌아가는데요. 희한하게 뜨개질을 하면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네요. 그렇게 뜨개질로 '현존 연습'을 하신 뜨개 강사님, 뜨개질로 중보기도 하는 '나무 선생님'의 뜨개 공방을 엽니다.  

"뜨개 깊은 수다"

"깊다"고 해봐야 예쁜 스카프 만드는 뜨개질이고, "수다"라고 하지만 뜨개질 하며 마음 따뜻한 언니들과 잔잔히 나누는 한두 마디 이야기일 것입니다.

간절기에 꼭 어울리는 예쁜 뜨개 스카프를 만듭니다. 똥손도 가능다고 합니다.

일시: 2월 15일 토요일 오후 2시~5시
장소: 미사 나음터
인원 : 6명(선착순)
수강료: 3만원 (재료비 12,000원 별도_털실과 대바늘)
동반자: <숙희의 실 이야기>의 나무 샘
신청 링크 : https://bit.ly/4hBvwje
문의 : 010-7242-8624 연구원 하루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Ruach루아영성심리연구소  (2) 2025.03.11
사귐의 기도, 사귀며 기도  (0) 2025.02.09
모든 부치지 못한 감사 편지  (0) 2025.01.15
모든 특별한 기도  (0) 2025.01.06
가톨릭 잡지 계간 <평신도>  (1) 2025.01.05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란 신비하다. 침묵 속에서 만나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서도 고유한 성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말이 아니라 침묵 속 만남이라 더 또렷해지는 존재의 향기일지 모르겠다.  봉쇄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마음에 한 여인을 품고 왔다. 피정자 돕는 문지기 수녀님은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을 하고 "아, 알죠. 개신교인이신 것" 하고 맞아주셨다. 며칠 째였던가, 수도복 아닌 작업복에 장화를 신으시고 털모자를 쓰고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밝고 맑은 얼굴과 목소리로 "식사하세요!"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안아버릴 뻔했다. 식사를 해라 말아라, 기도를 해라 말아라 간섭이 있는 곳이 아니다. 새벽에 있었던 열쇠 해프닝(매뉴얼을 따르지 않는 피정자로 인해 다른 피정자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에 대한 사과 또는 도움 요청은 담당 수녀님들 몫인 것이 안타까운, 그런 일이었다.)에 대한 미안함 또는 고마움을 전하려 함인가?

 

작년 피정에서는 80을 넘기신 노 수녀님을 선물처럼 만났다. 대학원 지도교수님이 쓰신 박사논문이 12세기의 작품인 <황금서간>이고, 그 책을 번역하신 수녀님이시다.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같은 공간에서 매일 일곱 번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던 차. 선물처럼 면담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봉쇄수도원이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 만남이었고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생생한 향기로 남아 있다.  <황금서간>, 그 깊고 어려운 고서를 번역하셨기에 다소 젊고 지적인 수녀님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봉쇄수도원에 들어가신지 50년이 넘었다는, 80을 넘기신 할머니 수녀님이셨다. 그때 나눈 몇 마디 대화가 내 어떤 부분을 바꿨고, 여전히 바꾸고 있음이 신기하다. 
 
매 시간 기도하면서 수녀님들은 멀리 앉아 계시고,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계시고, 나는 안경도 안 끼고 있어서 도통 누가 누군지 가늠이 되지 않으니... 수녀님, 잘 지내셨어요? 1년 만에 또 왔어요. 감사합니다, 수녀님. 여기 계셔주셔서... 마음으로 인사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이렇듯 침묵 속에서 마음으로 건네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때로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동그란 얼굴의 귀여운 젊은 수녀님께는 참지 못하고 이름을 땄다. "수녀님, 성함이...?(속닥속닥)" "저희는 세례명이라고 해요. 사라 수녀예요.(속닥속닥)" 사라 수녀님... 기도 자리도 바깥쪽 끝자리여서 잘 보인다. 수녀님들이 들고나고 하실 때마다 축복하며 기도하게 되는데, 특별한 만남의 특별한 수녀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했다.  "사라 수녀님의 몸과 영혼이 당신 안에서 행복하게 해 주세요."
 
떠나오는 날 아침에 사라 수녀님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이런 시도 자체가 기도에 분심을 더하는 일이 될까 싶었지만, 일단 쓰기는 했다.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편지를 전하기는커녕 인사도 못하고 올라왔다. 나타나주지 않으면 만날 도리가 없으니, 이 수녀님도 새를 닮았다. 그대로 집에 가져온 편지이다. 전하지 못한 감사편지는 오래도록  감사의 기도가 될 예정이다.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 기제다. 

 

앤드루 솔로몬 <한낮의 우울>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경미한 우울감이 몇 개월 째 이어지고 있다. 피정에 들어갈 때도 여전히 다소 우울했고, 마치고 나올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우울감 속에서도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만남과 일들이 반짝이고 있다. 사라 수녀님에게 전하지 못한 감사 편지처럼, 편지보다 더 깊고 큰 감사의 마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느낀다. 소장님 보고 싶다는 말이 생각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깜짝 영상을 찍어 전송했다. 모든 감사 인사, 모든 그리움의 인사는 사랑의 인사다. 부치지 못한 감사 편지는 두고두고 긴 감사의 마음이 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절망의 마음이 우울이라면, 오늘의 이 우울은 내일의 사랑이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귐의 기도, 사귀며 기도  (0) 2025.02.09
뜨개 깊은 수다  (0) 2025.02.01
모든 특별한 기도  (0) 2025.01.06
가톨릭 잡지 계간 <평신도>  (1) 2025.01.05
감사한 연결, 기다리는 연결  (0) 2025.01.03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는데.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찬양은 죄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 같다. 기도에 관한 많은 노래가 있지만, 자주 마음에서 울리는 찬양은 이것이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때때마다 이 찬양의 어느 소절이 마음에 울리곤 한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니

 

수도원 기도 피정을 떠난다. 어젯밤부터 시작하여 밤새도록 마음의 저 깊은 바닥에서 울리는 노래이다. 기도를 위해 며칠 떠나는 것이, 봉쇄 수도원으로 떠나는 이 시간이 기다려지기는 하지만... 기분 좋기만 한 일이 아니다. 가고 싶고,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밀고 밀리면서 조금은 심난하게 된다. 기도의 속성이 그런 것 같다. 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품을 향한 자아의 태도가 그렇다. 그 품에 안기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새해 첫 주는 교회의 특새(특별한 기도회)로 보낸다. 올해에는 삼일 내내 찬양인도를 했다. 몇 년 전 처음 특새 찬양 인도를 했을 때 어느 집사님께서 칭찬해 주시길 "은쟁반에 꾀꼬리 굴러가는 소리"라고 하셨는데.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옥구슬이 아니라 꾀꼬리가 은쟁반을 굴러다닌다니! 늙어 텐션 떨어진 내 목소리에 어쩌면 그렇게 적절한 표현인지. 이 말이 내내 생각나 새벽기도 찬양 인도가 즐거웠다. 본회퍼의 옥중 편지에 곡을 붙인 "선한 능력으로"를 부르고 부르며 내 안의 선함이 불러일으켜지는 시간이었다. 함께 하는 교회 공동체 사람들의 선함이 더 뜨겁게 와닿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오늘부터 저 멀리 남해 바닷가의 수도원으로 간다. 오직 기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쇄되어 평생을 사는 수녀님들이 매일 일곱 번 씩 기도하며 사는 곳. 특별한 기도의 자리로 간다. 모든 기도가 특별하다. 매일 앉아 글 쓰고 기도하는 자리를 정리하고, 연구소의 일들을 챙기고,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먹을 것들을 해놓고, 기도하러 간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니

 

영혼의 안식을 위해,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 그리하여 다시 빛을 찾기 위해 떠난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뜨개 깊은 수다  (0) 2025.02.01
모든 부치지 못한 감사 편지  (0) 2025.01.15
가톨릭 잡지 계간 <평신도>  (1) 2025.01.05
감사한 연결, 기다리는 연결  (0) 2025.01.03
기도 50년  (2) 2024.11.17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평신도> 그리고, 우리의 <복음과 상황>... 나란히 놓고 찍고 싶었음.
 

가톨릭 매체에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은데. 지도교수님 추천으로 학생(졸업생) 신분으로 쓴 짧은 글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청년 때 이 찬양 참 좋아했는데... 담 앞에 서 본 사람은 압니다. 성벽이든, 허술한 벽돌 몇 개의 담이든, 담을 허무는 일이 얼마나 피눈물 나는 일인지 말이죠. 이 매체의 독자들에게는 한 특이한 개신교인의 고백이겠으나, 하찮은 이 글이 무엇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신교인은 죄다 통성기도만 한다든지 하는 선입견을 깨는 작은 구멍이라도요. 선입견의 담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르겠어요. 광화문에 모여 전광훈 목사에게 열광하며 통성기도 하는 분들이 개신교를 대표하지 않는 것처럼, 가톨릭 신자들도 마리아교를 섬기는 이단이 아닌데요.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 중국 속담이라고 합니다.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은 오랜 시간 준비한 한 학생에게 선물로 주어진 선생님 같은 곳입니다. 그 한 학생은 심지어 가톨릭 신자도 아닌, 보수적인 개신교 모태 신앙인입니다. 제가 문화영성대학원(이하 문영원)을 알게 된 것은 십수 년 훨씬 전입니다. 우연히 듣게 된 이 대학원의 이름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입학의 가능성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늦봄 어느 날, 오랜만에 또 문영원 홈페이지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2학기 입학전형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있었고 무심코 개설과목들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영성사, 영성 신학, 신비주의와 영성… 몇몇 과목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멍하니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엄마 옆으로 딸이 다가와서 뭘 하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엄마가 언젠가는 이런 공부를 해 보고 싶어.” 했는데 딸이 하는 말이 “지금 해!”였습니다. 입학전형 서류 준비며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가능하니 다 도와주겠다면서요. 그렇게 조금 어이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우발적인 것 같지만, 우발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는 개신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또 밤낮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신앙에 관한 한 성골 진골이라는 은근한 우월감과 자부심 속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열정을 다해 교회에 봉사하고 신앙생활했습니다. 결혼 후 ‘중년의 위기’라 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에 마음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메마르고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신앙까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확실했던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예배에 가면 반감이 생겨서 그 모든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마음은 차가워지고 냉소가 깊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가 싶어 두려움과 막막함에 길을 잃은 느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우연처럼 만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언표가 저의 상태를 그대로 설명해 주는 것 같아 깜짝 놀랐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제목인 것을 뒤늦게 알았고, 그때로부터 저에게 어떤 세계가 열렸습니다. 개신교인으로서는 접할 수 없었던 중세의 영성 서적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아빌라의 데레사의 《영혼의 성》은 길을 잃어 캄캄한 기도의 길에서 만난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내용이 썩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공감과 위로가 있었습니다. 읽고 또 읽고 필사하면서 낯선 세계에서 온 기도의 선생님을 따라 어설픈 침묵 기도를 해 보았습니다. 덕분에 길을 잃었다고 느꼈던 그 어두운 숲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게 되었고, 혼자 해보는 낯선 기도의 길에서 조금은 막막하고 외로웠기에 무언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문영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즈음이었고요. 그러니 갑자기 일사천리로 진행된 문영원 입학 절차는 우발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기다려온 학생에게 선생님이 찾아오신 만남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홈페이지 개설과목에서 봤던 영성사, 영성 신학, 신비주의와 영성, 중세 여성 신비가 같은 과목을 더없이 행복하게 공부했습니다. <영혼의 성>을 만나고 십수 년 동안 남모르게 혼자 해 온 기도가 깊고 오랜 영성의 강물과 닿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공부였으니, 수업 한 번 한 번이 영적 체험 같았습니다.

행복했던 만큼의 감내할 어려움과 마주해야 하는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기도의 길은 결국 하나님께 닿는 것임을 배우고 보니 ‘교회 일치’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개신교에서 나고 자라면서 배운 ‘하나님’은 가톨릭 형제자매들이 만나는 ‘하느님’과 다른 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언어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높고 두꺼운 제도의 벽 또한 건재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집을 짓는 인간이기에 ‘하나님’과 ‘하느님’ 사이 간극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게 공부하며 일치의 기쁨도 누렸지만, 분열로 인한 소외감과 아픔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문영원 수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논문인데, 언감생심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었습니다. 논문을, 그것도 <영혼의 성>을 연구하는 논문을 쓰면서 저를 문영원까지 이끈 목마름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후 다시 저의 자리로 돌아오니 이제야 더 잘 보입니다. 문영원 입학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 담을 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횡단이 아니라 종단이었습니다. 1517년, 시대의 담을 넘어 초 세기부터 16세기 스페인에 이르는 영성의 강에 닿았습니다. 이 강물에 몸을 맡겨 흐르며 헤엄치다 발이 땅에 닿아 디디고 섰더니 원래의 내 자리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교회, 혹독하게 신앙 사춘기를 겪고 다시 돌아온 못난 우리 어머니의 품 같은 저의 교회입니다. 횡단의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단으로 밝히 알게 된 출생의 비밀이랄까요. 목마름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교회 사랑과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그리는 마음, 그것이었습니다. 준비된 학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마른 학생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학생에게 선생님으로 다가온 문영원, 여기로 이끄신 나의 주님께 사랑과 영광을 드립니다.

<평신도> 2024년 가을/ 계간 77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부치지 못한 감사 편지  (0) 2025.01.15
모든 특별한 기도  (0) 2025.01.06
감사한 연결, 기다리는 연결  (0) 2025.01.03
기도 50년  (2) 2024.11.17
기도 피정 안내  (2) 2024.10.15

 

후원금이 절실한데, 절실한 일을 위해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해 건너뛰고 드리는 편지입니다. 진심의 감사, 절실한 필요와 요청을 편지 한 장에 담기가 어려워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며 시간을 보낸 탓이고. 안팎의 어려움으로 더 힘을 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감사와 함께 죄송한 마음도 담아서 보내드립니다. 연구소의 소중한 벗인 “숙희의 실 이야기” 숙희 님께서 치유의 기도를 담아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엮으신 마음을 작은 선물로 동봉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에 매월 일정 정도의 금액을 기도처럼 흘려 보내고 싶으시다면 연결되어 주세요. 상담이나 내적 여정, 기도를 배우는 일, 영적인 길의 동반자로 연결될 필요가 있는 분들의 손을 잡는 일에 값있게 쓰겠습니다.  

♥ 후원 신청_https://forms.gle/EhcJ8AZbXa5LeHwa8



♥ 고마운 후원자님, 안녕하세요.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입니다. 지난 한 해 보내주신 후원의 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긴 시간 이렇다 저렇다 할 보고도 드리지 못하고 보내주시는 후원금을 넙죽 받기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보내주신 마음은 믿음이고 연결이라 생각하니 더욱 감사할 뿐입니다.

2024년 한 해, 저희는 159명의 사람과 연결되었습니다. 159명을 부르는 공적인 이름이 내담자, 혹은 수강자이지만, 마음에서 부르는 단 하나의 호칭은 “동반자”입니다.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고, 이 슬픔 많은 세상을 걷는, 메마른 땅에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걷는 동반자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뜯어고쳐야 할 고장 난 자아” 때문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과, 나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진 실존적 상태에 기인한다는 확신으로, 누가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로 후원자이신 후원자님을 부르는 마음의 호칭 역시 “동반자”입니다.

실은 지난 2년여, 연구소는 내외적 어려움을 겪어 냈고, 겪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작년 연말에 준비해 둔 선물을 이제야 보내드리게 되었답니다. 어려움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 또 어려움이 지속된다면 저희의 한계로 받아들이며 동시에 “여기까지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메시지로 알아들으려고 합니다. 올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에는 몇 개의 프로그램을 쉬면서 숨을 고르고 새로운 시간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알려드려야 할 변화가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중에 매달 보내주시는 후원금은 금액에 상관없이 저희를 격려하고 토닥이는 그분의 위로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있으나 단지 돈 때문에 연결의 손을 내밀지 못하는 분들을 발견하는 눈과 마음 주시길 기도하며, 후원금에 힘입어 선한 연결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후원자님이 보내주신 마음에 대한 보답이며 저희가 오늘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159는 숫자가 아니라 159 개의 얼굴이고 영혼입니다. 여정을 동반하면서 크고 작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일일이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는데. 마침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예수님의 기적에 관해 이런 해석을 하셨더군요.

“예수님이 행하고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 인간성의 한계와 조건 내에서 일어난다. 짜릿한 사건은 없다. 특수 효과 같은 것도 없다. 그렇다. 기적이 있기는 하다. 그것도 수많은 기적이 있다. 그러나 그 기적들은 대개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짜여 들어가 있기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에 주목할 뿐이다. 기적의 기적성이 그 배경의 친숙함, 그 관계된 사람들의 평범함 때문에 흐릿해지는 것이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 중

후원자님을 비롯하여 나음터에 연결된 모든 동반자들의 일상이 그분으로부터 오는 기적성의 배경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평범함 속에 깃든 그분의 선함이 함께 하시길요. 감사한 마음 기도 중에 잊지 않겠습니다.  

오신 주님을 기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그리는 2024년 대림절에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드림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특별한 기도  (0) 2025.01.06
가톨릭 잡지 계간 <평신도>  (1) 2025.01.05
기도 50년  (2) 2024.11.17
기도 피정 안내  (2) 2024.10.15
순하고 단순한 리듬  (1) 2024.08.13

 

지난 주말 2박 3일 동안 “예수마음기도 침묵 피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허다하지만, 기도의 체험이야말로 언어로 다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 깊은 만남이기에 말입니다. 기도 피정의 은혜를 다 나눌 수 없어 사진 몇 장으로 대신합니다.

내적여정 1단계에서 의식성찰 기도로 시작하여 영성과정에서 향심기도를 안내해 드리고, 동반자과정에서는 꾸준히 하시도록 북돋워 드리고 있습니다. 이 낯선 기도들을 되든 안 되든 배운 대로 해오신 벗님들의 갈망이 아름답습니다.

갈망, 목마름.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갈망이 먼저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주세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 걸어주시는 예수님, 당신의 목마름을 먼저 내보이셔서 우리 안의 깊은 갈망을 일깨우셨습니다.
 
라고 연구소 SNS에 썼다.

 

 

 
피정 가는 차 안에서 헤아려 보니 예수마음배움터 저 경당에 앉아 처음 기도드렸던 때가 30대였다. 서른여덟. 뒤늦게 이름 붙여 정리한 "신앙 사춘기", 혼란과 메마름의 극한의 시간이었다. 기도의 언어를 잃어 그분께 닿는 길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두려움은 카오스였다. 분명 그분은 언어 너머에 계신 분인데, 언어 너머에 계시는 그분과 연결되는 방법, 침묵의 기도를 나는 알지 못했다. 《신앙 사춘기》 부제가 "신앙의 숲에서 길 잃은 그리스도인에게"이다. 딱 그 상태였다. 익숙하던 그 숲, 신앙의 숲이 갑자기 낯설어진 때였다.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그때 그분께서 나를 '에니어그램'으로 낚으셨다. 에니어그램으로 낚아 데려다 앉힌 곳이 저 경당이다. 수년을 몰래 혼자 저 경당 한 구석에 앉아 기도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세월이여. 얼마나 확신이 없었고, 얼마나 두려웠고,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다. 확신 없는 채로, 두려운 채로, 외로움 가득 안고 저 자리에 앉아 기도하며 치유가 일어났다. 사춘기 너머에 더 멋진 어른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어에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을 언어 너머의 방식으로 만나가고 있다. 그랬던 내 비밀 공간을 꽉 채운 이들이 내 벗들이다. 나와 같은 신앙의 숲길을 걸어온, 어쩌면 영혼의 모양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비슷한 것을 좋아한다. 연구소를 찾아와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내적 여정의 길을 걸으며 자신 안의 기도의 갈망을 발견하고 여기까지 온 이들이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30대 후반, 40대 내내, 그리고 이제 50대 중반.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향하는 기도의 길이 감사할 뿐이다.
 

 

정성스레 기도로 준비된 공간에서 귀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 상과 그리로 향하는 작은 발걸음을 만났다. 소박하게 꾸며진 환대 공간은 여기 배움터 수녀님들의 영적 감각이다.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향해 놓여진 작은 신발로 기억 저편의 노래가 하나 떠올랐다. 내 생애 최초의 노래였을 것이다. 말을 하기 시작하며 부른 노래일지 모른다. "얘는 나이 세 살에 조선말을 다했다" 이모나 삼촌께 들었던 말 같고. 엄마는 "얘가 주댕이가 빨리 터지더니 배추김치 주댕이를 좋아한다."고도했다. 두세 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노래를 불렀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 서울 오가는 장항선 기차 안에서도 불렀다. 어린 아기가 또박또박 노래를 하니 신기해서들 시키고, 칭찬하고, 연양갱을 사주고 했던 것 같다. (채윤이 16개월에 어머니 교회에서 가족찬양을 하면서 "가서 제자 삼으라"를 불렀는데. 무대 아빠 품에 안겨서 또박또박, 정확한 음정으로 불러서 모두 놀랐던 걸 보면 상상이 되기도 한다.) 내 생애 처음 노래가 내 영혼에 늘 울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첫 노래, 첫 소망, 처음 갈망이 이것이었구나. 그래서 나는 기도에의 목마름을 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구나.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하나이고 싶은 마음이었구나. 연구소 6년, 배움터 다니기 시작한 지 17년, 이 노래 부른 때로부터 50여 년. 기도의 6년, 기도의 17년, 기도의 50년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나도 예수님 따라갈 거야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톨릭 잡지 계간 <평신도>  (1) 2025.01.05
감사한 연결, 기다리는 연결  (0) 2025.01.03
기도 피정 안내  (2) 2024.10.15
순하고 단순한 리듬  (1) 2024.08.13
2024년 하반기 내적 여정  (0) 2024.07.30

 

아빌라의 데레사 『영혼의 성』으로 쓴 논문의 결론 부분 일부입니다. 제 기도 여정의 고민을 담아 연구하고 얻은 소소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도의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여건이 되신다면 함께 해요.
 
『영혼의 성』에서 배우는 기도는 metanoia, 즉 방향의 전환이다. 기도하는 자아, 데레사 자신의 인간적 열정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향한 에로스적 열정이 방향을 바꾸어 그대로 하나님을 향할 때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비춘다면 개신교인들의 통성기도를 향한 열정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다. 방향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기도를 ‘잘못된 기도’로 치부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지나온 기도의 여정을 긍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지점에서 자기인식의 빛이 필요하다. 여기서 자기인식이란 심리학적 자기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온 자신에 대한 성찰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자기인식이 기도의 시작이라고 『영혼의 성』은 가르치고 있다. 데레사의 여정으로 말하자면 자기인식은 우선적으로 ‘기억’이다. 짐승과 벌레가 우글거리는 성 밖에 살던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도는 맹목적 자기 망각이 아니다. 통성기도는 한국인 특유의 한(恨)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한다. (김명실.「공동체적 탄원기도로서의 통성기도: 통성기도의 정체성의 정립과 그 신학과 실천의 나아갈 방향 모색」,『신학과 실천) 공동체적으로 큰 소리로 울부짖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민족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고통의 정점에서 그것을 견디기 위해 망각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심리학에서 ‘방어 기제’는 고통의 정점에서 고통을 잊게 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방어 기제를 사용할 때는 병리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적으로 큰 소리로 울부짖는 통성기도는 기도하는 그 순간 자기를 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의식의 빛을 꺼야만 견딜 수 있는 고통의 때에는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데레사의 기도처럼 영적인 성장은 투명한 자기인식의 길과 함께 가야 한다.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고통과 인간적 욕망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명확하게 바라보고 성찰하는 것이 건강한 영성으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더 깊은 기도, 성숙한 기도를 위해서는 자기 망각으로의 순간적 초탈이 아니라 자기를 인식하고 수용하며 초월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내면을 향한 자기인식의 기도로 안내하는 『영혼의 성』이 통성기도 너머의 깊은 기도로 초대하는 초대장이 될 수 있겠다.
 
 

 
 
침묵기도 피정으로 초대합니다.
일상에서 물러나, 고요와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머무는 2박3일 '예수마음기도' 피정입니다.
 
예수마음기도란,
대침묵 피정으로 길잡이 강의와 영적 동반을 통하여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배우고 익히면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깊게 하는 영적 수련입니다.
 
♠ 일시 : 2024년 11월 8일(금) 오후 2시 -10일(주일) 오후 3시
  장소 : 예수마음배움터(경기도 파주시 한빛로 21)
  피정비 : 25만 원(1인1실)
  입금계좌 : 우리은행 38604 100758 (재) 성심수도회
  신청 : https://bit.ly/3Ymvl4t
  문의 : 010-6209-0635
 
 부분 참석은 불가합니다. 다만, 혹 주일 예배 참석하셔야 하는 분은 토요일 밤이나 주일 아침에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이 경우에도 시작기도(금요일 2시)는 같이 하셔야 합니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한 연결, 기다리는 연결  (0) 2025.01.03
기도 50년  (2) 2024.11.17
순하고 단순한 리듬  (1) 2024.08.13
2024년 하반기 내적 여정  (0) 2024.07.30
인터뷰_글쓰기 삶쓰기  (2) 2024.07.05

 1학기를 마친 7월 둘째 주에는 요셉수도원 피정에 가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배나무밭이 드넓은 요셉수도원의 7월 밤은 달빛이 환하고 배나무 잎이 무성하다. 배꽃은 없지만,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시조를 읊게 되는 밤이다. 끝기도를 마치고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이런 풍경이다.

 수도원에 도착하여 안내실 앞에서 순례객을 환대하는 친구들은 멍멍이들이다. 어쩌면 이렇게 순둥순둥 하게 생겼는지... 기도하고 일하는 수사님들을 꼭 닮았다는 생각에 쓰다듬어주고 놀았다. 유독 눈에 띄는 친구 이름이 '성탄이'이다. 등에 이름표를 달고 있다. 

둘째 날 아침기도를 마치고 나왔는데 성탄이가 혼자 놀고 있다. 어이쿠, 반가워서 또 한참을 쓰다듬고 놀았다. 어쩐지 이 녀석 내게는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하다. 뭐랄까, "위로가 필요하면 쓰다듬든지, 말든지" 등을 빌려주는 느낌?

다음 날 산책길에 또 만났다. 눈이 어쩌면 그렇게 순하고 착한지... 성탄이랑 놀다 보면 잠시 후에 나타나는 수사님 한 분이 있는데, 마르코 수사님이다.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가시기도 하고, 밀짚모자에 장화 신고 소시지 공장 쪽으로 걸어 가시기도, 땀 뻘뻘 흘리며 전지 작업을 하시기도 한다. 아, 성탄이는 마르코 수사님 껌딱지였구나!

예수님 상 앞에서 저러고 수도원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성탄이는 트럭 타고 밖으로 나가신 마르코 수사님을 기다리는 거였다!

성탄이와 함께 마르코 수사님을 자꾸 마주치게 되었다. 들어간 첫날에 저녁 기도하고 돌아왔는데 방문 열쇠가 열리지 않았다. 안내 수사님이 오셨는데, 고장으로 확인되자 이걸 고칠 수 있는 분이 따로 있다며  전화를 걸더니 '마르코 수사님'을 찾았다. 금세 달려오셔서는 달그락달그락 몇 번 하셨는데 딸칵 문이 열렸다. 늘 이렇지! 해도 해도 안 되던 것이, 전문가가 와서 터치! 하면 해결된다니까. 조금 억울해 가지고 "저도 그렇게 했는데요..." 하고 안내 수사님도 "거 참, 여태 안 됐는데..." 하니까 마르코 수사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하시며 "성령님이 여신 거예요" 했다. 그리고 통째로 손잡이를 갈아야 하겠다며, 조금 이따 와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셨다. 전에 왔을 때부터 벌써 얼굴은 익히 아는 분이다. 기도 때마다 선창 하시는 노래 잘하는 수사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맥가이버시네! 성탄이가 마르코 수사님 껌딱지인 덕에 4박 5일 지내는 동안 마르코 수사님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되었다.
 
모기 물린 곳이 부풀어 올라서 약을 사러 나가는 길이었다. 해가 아주 뜨거운데 수도원 입구 안쪽에서 수사님 한 분이 전지작업을 하고 계셨다. 열사병 걸리시겠네...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약을 사고 시원한 이온 음료 한 병을 샀다. 들어가는 길에 아직 작업 중이시면 드려야지 했지만, 내가 돌아갔을 때는 다 끝내고 들어가셔야지, 이 더위에... 했는데. 아직도 계시네. "수사님, 이거 드세요" 하고 봤더니 또 마르코 수사님이시다! 어느새 무성했던 풀과 나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저러고 농부이시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어느 새 검은 수도복을 입고 기도를 선창하고 계시니 "기도하고 일하라(Ors et Labora)를 몸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요하게 기도하고 요란할 것 없이 일하는 수도자들의 삶의 리듬이 일으키는 파동이 영혼을 울린다. 할 수 있다면 일상의 수도자로 저렇게 살고 싶다.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는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면서... 아니 뙤약볕의 전지작업이나 문고리를 고치는 일과 그레고리안 선율의 기도가 다르게 들이고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수십 번을 기도하며 걸었던 저 큰 나무 사잇길은 이제 내 마음에 난 길이 되었다.  

4박5일 내가 먹을 식사를 챙겨가야 하고, 가 본 모든 피정집 중에 가장 열악한 곳이다. 수도원 피정을 이끄시는 신부님은 그래서 '사막체험'이라 부르는데. 이제 밥 챙겨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노동 봉사 하시는 분이 고추를 따주시고, 마르코 수사님이 지나가다 자두도 주시고 입맛 돋우는 일이 있다. 불편한 잠자리 견디고 일어나 새벽공기 헤치고 기도하러 걷는 기분도 좋다. 그리스도인에게 편안한 세상이 도래했는데, 부러 불편하고자 사막으로 물러난 분들이 수도원의 아버지들 아닌가. 내 마음에도 사막으로 가는 길이 나면 좋겠다.   

성탄이처럼, 마르코 수사님처럼, 예수님처럼 순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한다. 다짐해서 되는 일이 아닌 줄 알기에... 기도한다. 마르코 수사님과 여러 수사님들,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기도로 이 세상을 지탱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기도 찾아 삼만 리, 수도원 찾아 삼만 리

두어 달쯤 전인가. 연구소 선생님들과 내 꿈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기차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나만 기차역에 남겨진 꿈이었다. 하룻밤을 어딘가에서 보내야 하는데, 내

larinari.tistory.com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 50년  (2) 2024.11.17
기도 피정 안내  (2) 2024.10.15
2024년 하반기 내적 여정  (0) 2024.07.30
인터뷰_글쓰기 삶쓰기  (2) 2024.07.05
아래로부터의 영성  (2) 2024.06.29


꿀처럼 달콤한 신학자라 불리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합니다.

첫 번째, “나를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두 번째,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세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네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많은 경우 ‘나를 사랑하는 이기적 동기’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돕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 체험이 깊어질 때 우리의 사랑은 자랍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이 아니라 그분 그 자체로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눈을 떠서 다시 나를 바라볼 때,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두려움 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어떠함’에 있지 않음을 알고, 그 사랑을 신뢰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자기 함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사랑에 닿아 자기 개방과 자기 증여로 이어지는 여정이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입니다. 2024년도 하반기 내적 여정에 초대합니다. (하반기에는 대면으로만 진행합니다.)


✔ 장소 : 경기 하남시 미사대로 410 미사강변오벨리스크 4층
✔ 인원 : 12명
✔ 비용 : 13만 원(점심과 커피 제공) / 단계별
✔ 문의 : 010-6209-0635
✔ 기본1 과정부터 영성과정까지 전 과정 수강 시 10% 할인해 드립니다.
  (영성과정 이후 환급)

✔ 일정 및 신청 :

기본 1 : 8월 30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47hVPoY

내적여정 기본 1단계(대면)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기본 1단계 신청양식 입니다.

docs.google.com


기본 2 : 9월 27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48Dhmte

내적여정 기본2단계(대면)

에니어그램 2단계 신청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심화1 : 10월 25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3NMqsfl

내적여정심화1단계(대면)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온라인 심화1단계 신청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심화2 : 11월 15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48pQWvl

내적여정 심화2단계(대면)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심화2단계 평일반 신청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영성 : 12월 20일(금) 10:00-17:30
신청 https://bit.ly/3rm7qib

에니어그램 영성과정(대면)

에니어그램 영성과정 신청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 피정 안내  (2) 2024.10.15
순하고 단순한 리듬  (1) 2024.08.13
인터뷰_글쓰기 삶쓰기  (2) 2024.07.05
아래로부터의 영성  (2) 2024.06.29
꽃자리  (0) 2024.05.31

인터뷰 기사입니다. “글쓰기 삶쓰기”라는 제목이 좋아서 기쁘게 응했습니다. ‘한국기독교출판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출판소식>입니다.

평소 루틴으로 하는 일이 질문을 던지고 두세 시간씩 듣는 일인데… 이런 기회로 한 번씩 질문을 받는 입장이 되면 저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게 됩니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하고 단순한 리듬  (1) 2024.08.13
2024년 하반기 내적 여정  (0) 2024.07.30
아래로부터의 영성  (2) 2024.06.29
꽃자리  (0) 2024.05.31
꿈과 영성생활  (0) 2024.05.25

 

행복하시겠어요

지난 목요일 동반자과정 1학기 종강 날이었다. 모임 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읽고 있었다. 한 학기 내적 여정을 돌아보는 것으로 이보다 좋은 주제가 없다. 강의 대신 책 나눔으로 한 학기를 정리한다. 동반자과정 4기가 되니 벌써 네 번의 책 나눔을 한 것이고, 그때마다 새롭게 다시 읽고, 가끔 꺼내 읽은 것으로 치면 족히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그래도 또 새로운 것이, 지하철에 앉아 아무 데나 딱 펼쳤는데 바로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것이다.

 

옆에서 뭔가 뜨끈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맑은 초로의 여자 분이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 오랜만에 봐서요좋네요. 행복하시겠어요"란다. 한참 쳐다본 모양이다. "(행복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좋아하는 책 읽으시는 것 같아서요. 이미 보신 책을 또 보는 거 아니에요? 좋아하는 걸 하시니 행복하시겠죠." 하고 잘 가라며 내리셨다.

 

 

행복합니다
 

행복하다. 이 소중한 책을 가슴으로 읽고 나눌 벗들이 있어서… 가르치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배우는 과정이라 더 그렇다. 무엇보다 이 책을 처음 만나서 읽던 그때를 떠올리면 꿈만 같은 오늘이다. 내면이 무너지고 신앙이 무너지고 몸도 함께 무너졌던 그 시절. 이전의 방식으로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시절이다. 가톨릭의 에니어그램 연구소에서 만난 영성이 한 줄기 빛이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행복한 1년을 지내고 떠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에서 처절하게 읽었던 책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을 내디디면 바로 낭떠러지일 것 같고, 그대로 지옥행일 것 같은 시절이었다. "책만 보는 바보"가 되어 읽던 시절이었는데, 돌아보면 책으로 다가온 영적 스승들과의 만남으로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혼자 읽던 책 중 하나가 <아래로부터의 영성>이었는데 마음으로 같이 읽고 나눌 벗들이 이리 많이 생겼다.

 
지난 수도원 순례 여정 중에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살고 있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다. 마침 방문하는 날에 수도원  행사가 있어서 개별 순례 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었고, 수사님 한 분 마주할 수도 없었다. 언감생신 사인 받는 기회는 못 얻어도 인증샷이라도 남겨 와야지 싶어 책을 들고 갔다. 그렇게 얻은 사진이 소중하네! 오래 머무르고 싶은 수도원이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성당과 경당에 앉아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기저기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다시 가서 오래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어쩌면 안셀름 신부님도 오래 앉아서 기도했을 지하 경당에서의 기도는 잊지 못할 것 같다. 하남의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의 기도가 십수 년의 세월 끝에 뮌스터슈바르작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 소중한 영적 벗들을 얻었다. 행복하다.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의 지저귐 같은 짧은 대화 끝데 지하철 아주머니는 떠나시고. 다시 아무렇게나 펼쳐든 책엔 이런 문구가 형관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은총으로 여기까지 온 내게 들려주는 저자의 말이다. 높은 이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마음, 가장 낮은 곳을 꿰뚫는 한 마디이다.

필자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논하는 이 순간에도 이 아래로부터의 영성 안에 공명심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내가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언제나 다시 반복하여 다음과 같이 주지시켜야 한다.
"너의 모든 영성적 노력들, 네가 저술한 수많은 책들에도 불구하고, 너는 변덕스럽고 괴팍한 감정들과 명예욕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년 하반기 내적 여정  (0) 2024.07.30
인터뷰_글쓰기 삶쓰기  (2) 2024.07.05
꽃자리  (0) 2024.05.31
꿈과 영성생활  (0) 2024.05.25
기도, 기도제목, 기도회의 치유  (1) 2024.05.07


꽃자리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나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두어 주 낯선 곳을 돌아다니다 오니 이 자리가 꽃자리임을 더 잘 알겠다. 집에는 엄마가 없어도 잘 해서 먹고, 제 할 일을 잘하고 지낸 남매가 있고. 소장이 없어도 강의와 나눔 준비를 잘 하여 모임을 동반하는 연구소 선생님들이 있고, 각자 자기 발로 든든히 서가는 동반자 과정 벗들이 있으니 고맙다. 기도로 기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말 잘 듣는 학생들이다. 여기에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있다. 에니어그램 3유형의 긴장과 거짓과 기만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새롭게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배우는 일은 끝이 없구나,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일은 하나님 사람을 배우는 일이니 끝이 없겠구나!
여기가 꽃자리이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뷰_글쓰기 삶쓰기  (2) 2024.07.05
아래로부터의 영성  (2) 2024.06.29
꿈과 영성생활  (0) 2024.05.25
기도, 기도제목, 기도회의 치유  (1) 2024.05.07
푸르른 날, 푸르른 교회  (1) 2024.04.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