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여성을 위한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초대합니다.

중년의 ‘중(中)’은 가운데입니다. 인생 등반 한가운데, 내려가는 삶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생의 오후로 가는 길목에는 생각지 못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 같지 않은 몸, 알 수 없이 밀려오는 공허감, 100세 인생이라는 노령화 사회에서 아직도 살아가야 할 기나긴 날들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입니다.

중년의 ‘중(重)’은 무거움이기도 합니다. 중년의 위기는 도전이며 기회입니다. Carl Jung은 자신이 상담에서 만난 중년 이후 내담자의 문제는 모두 ‘영적’인 문제였다고 합니다. 중년의 숲을 지나는 여성들이 함께 모여 쓰고, 읽고, 나눕니다. 글은 잘 못 쓰셔도 됩니다. 나다운 나로 생의 오후를 살고 싶은 ‘중년’을 느끼는 여성(나이 크게 괘념치 않음), 누구라도 환영합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11월 3일(화) ~ 12월 10일(화) 오전 9시30분 ~ 12시(6주간)
+ 인원 : 7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2771-4445
+ 신청 링크 : https://bit.ly/3k9xolP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생의 오후 시간 : 글로 길어 올리는 영성의 샘물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 떠나 보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여자의 몸, 글로 드러내기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어머니 하나님을 찾아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 참고도서 : <내 나이 마흔>, 안셀름 그륀, 성서와 함께
<위쪽으로 떨어지다>, 리처드 로어, 국민북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에스테스, 이루

 

중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201103~)

중년을 위한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신청양식 입니다.

docs.google.com

 

 

 

 

 

여기저기 흔하게 굴러다녀도 내겐 너무나 절실하고 소중해서 입에 올리지 않는 말이 있다. '영성'이 그렇다. 예를 들면 '일상 영성'은 내 글쓰기가 뿌리내린 곳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어쩐지 입에 올리기는 싫다. 영성 앞에는 어떤 단어를 갖다 붙여도 그럴듯하다. 연구소의 상담은 궁극적으로 영성 상담이고, 에니어그램 세미나는 영적 여정이고, 종강을 향해 가는 연구소 지도자 과정은 우리만의 '여성 영성'을 일궈가는 일이지만. 감히 '영성'이란 말을 표방할 수 없다. 이유는 단 하나, 소중해서 그렇다. 


요즘 화요일 12시는 일주일 내 마음 가장 맑아지고, 겸손해지고, 경건해지는 시간이다. 연구소 글쓰기 강좌인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가 끝나는 시간이다. 오늘은 정말 가장 은혜로운 예배를 마치고 나온 느낌이었다. 정결하게 하는 샘에 내 영혼 씻겨 나온 느낌. 과장이 아니다. 오늘만 해도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는 9시 30분 어간. 출근하는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상해 있었다. 전 같으면 견적이 이틀은 나오는 '꼬인 마음'인데. 모임 마치고 미용실 갔다 나오니 발길이 절로 남편 사무실로 향했다. 아무 일 없는 듯(없는 척이 아니라 아무 일 없는 마음이 되었다) 마주하고. 잠시 산책을 하고 사이좋게 퇴근하여 들어왔다. 읽는 여러분 별로 안 놀라시겠지만, 이건 깜짝 놀랄 일이다. 


이래저래 읽고 쓰는 모임을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해왔지만,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들과 함께 하는 글쓰기 모임이 전환점이 되었다. 듬성듬성 알았던 것을 벼락처럼 깨달았고, 순간순간 짧게 맛보던 것을 진하게 경험했다. 쓰기의 힘이 아니라 존재의 힘을 무한 신뢰하게 되었다. 고통 가운데 있는 한 존재가 쓴 진실한 글이 날카로운 칼처럼 어딘가를 찌르는 느낌, 그 느낌에 머물러 있는 것이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는데, 그 머무름이 곧 치유라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단지 글, 단지 말이 아니라 몸으로 배운 것이다. 이제 모든 글쓰기 모임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고통에 함께 머무름과 그 시간이 주는 놀라운 치유력은 내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늘 경이롭기는 하지만. 

'나'를 주제로 두고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는 시간. 나에 대해 내가 가진 이미지, 나의 기억, 나의 감정과 몸, 내가 믿는 하나님. 나, 나, 나. 나에 대해 공부하고 쓰지만 심리학적 자기 분석은 아니다. 글쓰기 지도를 하는 시간은 더더욱 아니다. 영성 모임이다.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것이지만 앞의 나와 뒤의 나는 다르다. 그래서 영성 모임이다. 영적 존재인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지금 여기의 나에서 시작하여 더듬어 가는 시간. 지금 여기의 나에서 시작하자니, 지금 여기의 나는 맥락 없는 내가 아니라 내 경험의 산물이라. 그때그때 올라오는 내 인생 이야기들을 물 흐르듯 써간다. "물 흐르듯"은 글쓰기 영성 모임의 캐치 프레이즈로 삼아도 좋을 말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글이 이끄는 길을 따라". 모인 자리에서 바로 쓰는 10분, 15분 안에 쓰는 짧은 글이 주는 깊이와 울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매시간 "내가 돈을 받으며 글을 배우고, 삶을 배운다"는 느낌이 든다.


쓰는 것은 참말로, 정말로, 진실로, 주체적인 행위이다. 그 주체성과 자발성, 그리고 투명함이 일궈내는 신비일 것이다. 주체적이고 자발적이고 투명한 태도. 이것을 가진 존재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심리적 존재? 아니다. 그 이상이다. 초월적이고 신비적이 존재. 한 사람 안에 있는 치유와 창조성의 힘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은 '영적 존재'의 증거이다.


화요일 오전 9시 30분, 나는 가장 거룩하고 영적인 시간을 마주한다. 일주일을 살게 하는 본 예배이다. 아, 심야 기도회도 있다. 토요일 자정, 맞다 밤 12시. 영적인 시간이 한 번 더 있다. 미주 서부 동부의 예배자들과 함께 심야의 글쓰기 예배가 있다. 이 즈음 내 영혼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시간들이다.  

 

 

 

 

 

  1. 2020.10.14 16:38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10.15 23:19 신고

      또 열고말고요! 함께 하신다면 더욱 기쁘게! ^^ 시차 잘 고려하여 조금 더 편하게 참여하시도록 해드리고 싶네요. 소식 알려드릴게요.

    • BlogIcon larinari 2020.10.22 09:48 신고

      silver님, 글쓰기 모임 공지를 올렸어요. '중년 여성' 특화인데, 중년은 생물학적 나이보다는 마음의 나이로 정의합니다. 보시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

  2. 2020.10.23 16:19

    비밀댓글입니다

 

 

2020년 9월 5일 

내적 여정 세미나 1단계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요즘 SNS 흔한 게 온라인 강의 포스터지만,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 zoom 강의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이 9월 5일은 '역사적'이란 진부한 표현이라도 갖다 붙여야 할 날이다. 지난 5월부터 zoom 강의를 경험하긴 했다. 언택트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연구소도 발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었지만 내적 여정만큼은 아니지 싶었다. 설령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내적 여정 세미나는 멈추는 게 맞지, 어떻게 화면으로 보며 마음을 나누겠냐고, 혼자 생각했다. 결국 온라인 세미나를 진행하고 말았다.  

 

2020년 5월 

미주 코스타가 온라인으로 개최된다는 소식과 강사로 초대하는 메일을 받았다. 연거푸 몇 번 거절했던 터라 죄송한 마음, 온라인이니 집에서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안도감으로 덜컥 수락하고 말았다. Kosta가 어디 그리 호락호락 하더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강의는 미리 찍어 보내야 하고, 사전 홍보 책 소개 영상 숙제도 덤으로 받았다. 휴대폰으로 대충 찍으면 되려니 싶었는데 Kosta가 호락호락해야 말이지.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겠는 웹캠과 탁상 마이크 같은 걸 검색하고, 남편은 또 어디서 얻어오고. 새로운 주제의 강의 준비도 부담 백배인데, 새로운 강의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5월 한 달을 보냈다.  알고 보면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모른다" "모르는 영역이다" 이 의식으로 내가 얼마나 두려움에 휩싸이는지 알게 되었다. 

 

2020년 7월

Fear To Faith Now, 드디어 온라인 코스타가 열렸다. 아,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전향해야 하는 지금! 새벽 5시, 강의를 위해 ktx 타러 나가보긴 했지만 강의를 할 시간은 아니다. 고요한 거실, 노트북 앞에 홀로 앉아 코스타 세미나 강의라니.  모든 것이 새롭다. (『모든 것을 새롭게』! 헨리 나우웬 신부님 책 제목 잘 지으셨네요.) 두 번의 강의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두 번째 강의를 마친 새벽, 멍하니 새벽산을 바라보며 감동을 머금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화상 강의로 메시지 전달이 제대로 되겠나, 마음의 소통이 일어나겠나,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만 빨리 끝내고 다리 뻗고 자는 게 목표다, 이것 뿐이었다. 30분도 되지 않는 질의응답 시간, 말로 글로 전해져 오는 질문과 반응에 마음 깊은 곳이 떨렸다. 상실, 애도, 고독, 영성. 3월 엄마 돌아가신 이후 붙들고 있던 것을 말로 꺼내놓을 때 어떻게 들려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것도 경험과 상황이 다른 해외 유학생들에게 말이다. 적어도 내 안에 일어난 파장은 랜선을 타고 갔다 부딪쳐 다시 돌아온 메아리였는데,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아픔과 갈망이 다르지 않다는 것.

 

온라인 Kosta 덕에 COVID-19가 가져온 변화에 빨리 적응하게 되었다. 낯선 상황, 모르는 것에 대한 내 두려움이 낳는 완고함과 방어 또한 부끄럽도록 생생하게 마주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몸과 몸이 함께 하지 않는 만남'을 폄훼하며 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주먹 불끈 쥐고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쟁이 노인네 같았다. 신비로운 인연이다. 최근 몇 년은 참석도 못했고, 예전 그 만남의 기억을 간직할 뿐 이제 멀어진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참석했던 그때처럼, Kosta는 나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한 발 내디뎌 강사로서 다른 자리에 서도록 한다. 

 

2020년 8월

올 여름은 그렇게 서서히 온라인 강의에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8월에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연구소 식구들과 zoom으로 자주 만났다. 예정된 워크숍을 거리두기 2.5단계로 인해 취소한 아쉬움에 zoom에서 모였다. 재미나게 모였다. 케이크를 준비한 생일 축하도 하고. 글쓰기 모임에선 글을 낭독하고 들으며 눈물 찍어내는 일이 잦았다. 랜선이 연결해주는 것이 아니구나! 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도 울고 웃으며 연결될 수 있구나. 랜선이 아니라, 우리들이 신비한 존재구나! 비록 몸으로 마주칠 수 없지만 영혼으로 이렇듯 연결되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존재의 신비여!

 

2020년 9월

지도자과정 2학기도 온라인 강의가 되어야 했다. 정식 개강 전에 책 나눔으로, 가벼운 수다로 zoom모임을 했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 '낯선 것에의 두려움' 뽀개기 시도였다. 어렵지 않게 2학기 개강 첫날 모임을 마쳤고. 6주 글쓰기 과정도 마쳤다. 이게 웬일인가! 고집쟁이 장로님처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했던 이유는 '몸'이었다. 몸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런데 zoom에 익숙해지다 보니 오프라인 모임보다 '몸'이 더욱 또렷이 보인다. 비록 눈동자의 흔들림은 보이지 않지만(집단 여정에서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습기, 긴장은 빼도 박도 못하는 마음의 거울이다.) 몸이 그것을 대신한다. 화면으로 보이는 몸이 말보다, 글보다 크게 말한다.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 연결과 소통의 신비란!

 

2020년 9월 6일

9월 5일 토요일 오전 10시. 역사적인 첫 온라인 내적 여정 세미나를 진행했고. 9월 6일 주일 0시 30분. Kosta 간사 수양회 강의를 했다. 식구들 잠든 한밤중에 거실에 앉아 찬양 하고, 간증을 듣고, 강의를 했다. 주제는 '희망'. 이토록 희망 없는 시절에 희망을 말하는 것은 너무 허망한 일 아닌가.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 현실이 아프거나 막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희망은 말해져야 하고, 발굴되어야 한다. 없지만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요즘 내 영성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 선생님은 14세기 여성 신비가 노르위치의 줄리안인데,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를 살았던 영적 선배, 언니이다. 아침마다 아껴서 읽는 그의 저서로 영혼이 촉촉해진다. 14세기 살던 언니가 아침마다 내게 들려주는 말이 있다. "All shall be well!" 잘 될 거다. 모든 것이 잘 될 거다. 단단한 내 고집이 부서지는 한, 그래서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한 잘 될 것이다.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 있고, 사람이 있지만 어제의 내가 깨지는 한 이 어려운 세계와 사람이 내게 흘러들 틈이 생길 것이다. All shall be well!  

  1. BlogIcon iami59 2020.09.15 21:25 신고

    좋은 언니를 두셨네요.^^



나의 몸, 나의 기억, 나의 이야기를 쓰고 나누는 온라인 우물가(Zoom)로 초대합니다.

발설의 치유력은 강합니다. 내가 쓴 글을 낭독할 때, 가장 먼저 내 귀가 듣습니다. 마주 앉은 여성들, 또 다른 ‘나’들이 판단하지 않는 태도로 들어줍니다. 발설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지만, 쓰고 읽고 나눠보면 알게 됩니다. 글로 흘러나온 은밀하고 사소한 나의 이야기가 의미가 됩니다. 나만의 의미가 되고 자유가 됩니다.

‘잠잠함’을 미덕으로 강요받은 교회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초월하는 하나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사는 나, 누구도 아닌 나를 쓰는 여정은 필연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분의 이야기에 닿을 것입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9월 22일(화) ~ 10월 27일(화) 오전 9시30분 ~ 12시(6주간)
+ 인원 : 6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2771-4445
+ 신청 링크 : https://bit.ly/2QSxUrc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나는 쓰고 말하는 나다 : 치유하는 글쓰기의 힘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 떠나 보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여자의 몸, 글로 드러내기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하나님 어머니 만나기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필독서와 독후감 과제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 필독서 : <헝거> 록산 게이, 사이행성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에스테스, 이루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쓰기 영성모임  (4) 2020.10.13
zoom이 나를 보여zoom  (2) 2020.09.11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_오전반  (0) 2020.09.08
한 이름, 한 사람  (0) 2020.08.23
헨리 나우웬의 기도  (0) 2020.07.26
새와 나리  (0) 2020.07.25

 

 

메시지 성경 읽기 진도가 역대상이다. 사람 이름으로 한 장 다 채우는 건 마태복음 1장이 갑인 줄 알았는데, 역대상이 갑 오브 갑이었다. 이름으로 본문 채우기가 9장까지 이어진다. 어릴 때는 눈으로 휙 훑고 지나쳤었다. 하나님의 나와 상관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감사의 글'에 따로 모은 이름들처럼 말이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본문'이지 저자의 인간관계가 아니다.

어쩐지 이번엔 한 사람, 한 이름을 꼼꼼히 읽게 된다. 기나긴 인생이었을 것이다. 신앙과 불신앙, 사랑과 두려움을 오가며 40년, 60년, 80년을 이 땅에 머물렀을 것이다. 강한 용사이거나, 제사장이거나, 문지기로서 역할을 살며 자기를 구축했을 것이다. 고유한 인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 인격의 맥락 안에서 선택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 선택이 모여 인생 이야기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더 큰 이야기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얼굴.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다. 내 마음에 울리는 끝없는 번뇌는 한 사람과 맞닿는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도, 삶을 향한 열정을 앗아가는 것도 한 사람의 얼굴이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한 사람의 얼굴이 되고 있다.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누군가의 지금 여기를 한 사람, 한 얼굴로 채워 생기를 앗아가거나, 삶의 기쁨을 불어 넣는다는 것. 한 얼굴, 한 이름이 가진 위력이 말이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zoom이 나를 보여zoom  (2) 2020.09.11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_오전반  (0) 2020.09.08
한 이름, 한 사람  (0) 2020.08.23
헨리 나우웬의 기도  (0) 2020.07.26
새와 나리  (0) 2020.07.25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0) 2020.07.17

 

사랑하는 하나님,

제 움켜쥔 주먹을 펴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더 이상 붙들 것이 없을 때 저는 누구일까요?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설 때 저는 누구일까요?
서서히 손을 펴 깨닫게 도와주소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제가 아니라
주님이 제게 주시려는 것이 곧 저임을.
주님이 제게 주시려는 것은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_오전반  (0) 2020.09.08
한 이름, 한 사람  (0) 2020.08.23
헨리 나우웬의 기도  (0) 2020.07.26
새와 나리  (0) 2020.07.25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0) 2020.07.17
2020년 하반기 [내적여정 세미나]  (2) 2020.07.08

지금 집이 좋고, 좋고, 좋은 이유가 여럿이지만 무엇보다 좋은 이유는 새소리이다. 얼마 전까지 밤에 자려고 누우면 '뻐꾹 뻐꾹뻐꾹뻐꾹' 소리가 앞산에서 울렸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누군가 암호로 보내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잠들기 전 행복 전달자였다. 아침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이 가까이서 멀리서 들린다. 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파트 자체가 이미 높은 곳에 있어서 베란다 창 앞으로 날아다니기도 한다. 휙, 바로 코 앞에 번개 같이 지나가기도.

 

새를 찾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이 습관 중 하나인데, 거실에 앉았으면 고개를 들어올릴 필요도 없이 새가 아주 가까이 보이고 느껴진다. 이래도 되나 싶게 행복하다.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신간 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새 이야기, 인간 이야기』를 만났다. 대뜸 집어들었다.  읽다 보니 젊었을 적 읽었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 우리들의 선생님』 생각나 다시 끄집어냈다.두 권을 오가며 읽었다. 나쁘지 않은데 어쩐지 내가 아는 새, 내가 좋아하는 새들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한참을 두고 읽고 또 새를 보고, 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새소리를 듣다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새는 저 멀리 나는 새였구나! 결코 내 시야에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는, 불시에 나타났다 훨훨 날아가버리고 마는, 그 새들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집 토방에 앉아 얼마나 자주 올려다봤던가. 저 멀리 키가 큰 미루나무 위의 새 둥지, 둥지를 오가는 새들이 또렷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엄마한테 혼나고, 쓸쓸하고, 외로울 때 늘 거길 바라봤던 것 같다. 훨훨 나는 새를 보면서 '초월'을 꿈꿨다. 지금의 나를 뛰어넘고 싶은 욕구가 하늘을 보고 새를 보게 했구나 싶다. 새에 끌리는 것은 저 멀리, 여기를 초월한 어떤 세계에서의 자유 같은 것이었구나. 두 책의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나를 보게 하였다. 

 

나리꽃을 좋아한다. 글쓰기나 꿈모임, 집단 여정을 이끌 때 별칭을 쓰곤 하는데 늘 나는 'nari'이다. 꾸미지 않고 제 모양대로 피어 있는 들의 나리꽃처럼 살고자 함이다. 영성적 삶의 모토 "있는 그대로"란 뜻이기도 하다. 벗들이 길에서 본 나리꽃을 그냥 지나치치 않고 사진 찍어 보내주기도 한다. 모든 들꽃에 관심이 있지만 나리꽃은 더욱 오래 들여다 보고 마음을 담는다. 

 

새를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하고, 나리꽃을 보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어떤 땐 고개를 들어 저 멀리를 바라보고, 많은 경우 고개를 떨구고 땅으로 보며 산다. 요즘은 새와 나리꽃만으로 마음이 충만하다. 나리 철이 끝나가긴 하지만 나리 대신 능소화가 피고, 능소화가 떨어지면 또 다른 꽃과 들풀이 생명과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늘의 새와 땅의 들꽃, 그 사이 공간에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생명이었다 죽음이었다, 사랑이었다 고통이었다 들쭉날쭉이다. 시간을 아껴서 '사랑이 있는 곳, 위안(consolation)'에 더 많이 머무는 것이 좋은 일이다. 메마른 곳을 일부러 찾아 맴돌 필요는 없다. 하지만 황폐(desolation)한 곳을 무작정 피할 일은 아니다. 주어진 황폐함이라면 위안의 날을 기다리며 머무르는 것이 좋다. 그런 날에 시선을 돌려 자유로 비상하는 새를 바라보거나, 제 모습 그대로 꾸미지 않고 피어있는 나리꽃과 눈을 맞추는 것이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이름, 한 사람  (0) 2020.08.23
헨리 나우웬의 기도  (0) 2020.07.26
새와 나리  (0) 2020.07.25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0) 2020.07.17
2020년 하반기 [내적여정 세미나]  (2) 2020.07.08
나타난 선생님  (0) 2020.07.08

 

 

해야지, 해야지 하는 일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를 하게 되었다. 연구소 시작하고부터 글쓰기 강좌에 대한 요구가 있었는데 이 시절, 온라인으로 열게 되었다. 몇 자리 되지 않아 이미 마감 되었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이니 내 집 앞마당에 걸어두지 않을 수 없다. 제목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는 1992년에 나온 동인지 <또하나의 문화 9호>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대학 들어가던 해 창간된 <또하나의 문화>는 나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기둥2: 기독교 세계관 서적, 기둥3: 사회과학 서적) 특히 9호는 출간된 시리즈 중에서 top3로 소중하다. 여성으로 살고 쓰고 읽고 사유하는 것에 대한 화두를 던져 나를 흔들었다. 고정희 시인과 조한혜정 교수에 꽂혀 읽고 읽으면서 결국 쓰고 쓰는 삶을 살게 되었지 싶다. 다시 꺼내 몇 편의 글을 읽다보니 오늘의 내가 이 책 여러 문장들에 맞닿아 있다. 치유 글쓰기,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등의 모임은 이 책이 뿌린 씨앗의 열매구나, 싶은 것이다. 30년 전에 뿌린 읽고 쓰기의 씨앗이 2020년 코로나 세상에 Zoom 강좌로 피어났다. 나를 찾아가던 이야기로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 맥을 찾아가는 일을 돕게 되었다. 고민하고 방황하던 젊은 날, 곡절 많았던 지난 30여 년이 소중하기만 하다. 

 

----------------   

 

 

나음터 글쓰기 모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발설의 치유력은 강합니다. 말하고 쓰는 것은 가장 주체적인 행위이기에 그 자체로 치유이고 성장입니다. 종교 권력 하에서 ‘잠잠함’을 강요받은 교회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초월하는 하나님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를 사는 나의 몸, 나의 기억, 나의 이야기를 쓰고 나누는 온라인 우물가(Zoom)로 초대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쓰는 여정은 필연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분의 이야기에 닿을 것입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8월 5일(수) ~ 9월 9일 (수) 오후 9시 ~ 11시(6주간)

+ 인원 : 6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2771-4445

+ 신청 링크 : https://bit.ly/2C6bBdS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나는 쓰고 말하는 나다 : 치유하는 글쓰기의 힘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 떠나 보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여자의 몸, 글로 드러내기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하나님 이미지 만나기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필독서와 독후감 과제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 필독서 : <헝거> 록산 게이, 사이행성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댄 알렌더, IVP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헨리 나우웬의 기도  (0) 2020.07.26
새와 나리  (0) 2020.07.25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0) 2020.07.17
2020년 하반기 [내적여정 세미나]  (2) 2020.07.08
나타난 선생님  (0) 2020.07.08
소장 하길 잘했다!  (2) 2020.06.19


“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고는 자신을 깊이 알 수 없고, 자신을 깊이 알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다”

『기독교 강요』 장 칼뱅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자기 지식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치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 에니어그램 1단계를 시작하여 ‘내게 하나님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만나는 영성과정까지. 한 달에 하루씩 닷새의 시간 동안 전에 해보지 않은 질문, 전에 해보지 않은 기도의 여정으로 초대합니다.

특별히 내적 여정 저녁반을 신설했습니다. 기본 1,2단계를 6주간 여정으로 진행합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토요반]

✔ 일시와 신청

기본1단계 : 8월 22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1SQPcu

기본2단계 : 9월 19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1QyrRj

심화1단계 : 10월 24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2ABrdFz

심화2단계 : 11월 21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3iBcmfn

영성단계 : 12월 19일(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신청 : https://bit.ly/2C8cD90

+ 장소 : 신촌 나음터 (마포구 서강로 142, 서일빌딩 5층)
+ 인원 : 9명 + 비용 : 12만 원/ 1일
+ 문의 : 010-4235-8020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저녁반]

✔ 신청 : https://bit.ly/3gD30y9

+ 일시 : 9월7일(월) ~ 10월 12일(월) 6주간, 오후 7시 ~ 9시
+ 장소 : 신촌 나음터 (마포구 서강로 142, 서일빌딩 5층)
+ 인원 : 9명 + 비용 : 단계별 12만 원/ 3주
+ 문의 : 010-4235-8020

✔ 입금계좌 : 농협 301 - 0240 - 4119 - 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와 나리  (0) 2020.07.25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0) 2020.07.17
2020년 하반기 [내적여정 세미나]  (2) 2020.07.08
나타난 선생님  (0) 2020.07.08
소장 하길 잘했다!  (2) 2020.06.19
CBS 모두의 거실  (0) 2020.06.06
  1. BlogIcon helen223 2020.07.17 18:42 신고

    미사에서는 강의 진행 안 하나요? ^^ 작년 가을에 영북도서관에서 강의를 두 번 들었는데 나머지 과정도 듣고 싶습니다. 근데 신촌은 머네요. 미사에서 강의를 기다려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7.19 23:38 신고

      오, 반가워요! 미사는 공간이 좁아서 올해에는 어려울 것 같아요. 코로나 끝나고 내년 봄에는 미사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좋아한다❞

 

2020년 6월 26일 금요일, 연구소 특강으로 신소희 수녀님을 모시고 '의식 성찰' 강의를 들었다. 2008년쯤, 같은 주제의 강의로 수녀님을 처음 뵈었다. 한 시간 남짓 수강자로 앉아서 뵌 것이 유일한 만남이었다. 그때로부터 기다렸다. 수녀님께 직접 배울 기회가 오기를.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존재를 뒤흔드는 강의여서는 아니다. 막연히 '이분은 진짜'라는 느낌이었지만,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른다. 적어도 내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었다. 강하게 끌리는 대상은 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드러낸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

 

생각 날때마다 한 번씩 수녀님을 검색했다. 어느 순간 소속된 기관에서 이름이 찾아지지 않고, 어디서도 수녀님의 강의나 피정 동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작년 2019년, '영적 식별'이란 주제의 강의에서 수녀님 성함을 보게 되었다. 6주간 영적 식별 강의를 듣고, 이후에 극적으로 2박 3일의 피정에 참석하는 믿을 수 없는 만남이 이어졌다. 수녀님에 대한 정보는 1도 없었는데. 강의와 피정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수녀님의 전공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라는 것. 신앙 사춘기의 어두운 숲을 혼자 헤맬 때, 읽고 읽고 읽다 다다른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신비가들이 수녀님 전공에 닿아 있다는 것. 올해 또 6주간 강의 들으며 배우고 있다. 십수 년의 세월을 넘어 기다리던 선생님이 나타나셨다. 

 

❝그리운 하나님❞

 

삼위일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던 어거스틴은 하나님 닮은 인간 마음 안의 삼위일체를 발견했다.(라고 수녀님의 강의를 통해 배웠다.) 지성의 삼위일체라 불리는 이것은 기억, 이성, 의지이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비출 때, 그 비추임을 알아듣는 이성이 의지에게 동의를 구하고, 의지가 예스하면서 이성과 기억과 의지가 조화롭게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된다. 그중 기억이란, 내가 누군지를 기억하는 동시에 내가 찾는 대상에 대한 기억이다. 내가 찾는 분, 그분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심장이 쿵 떨어진다. 십수 년 전 한 번 만난 수녀님의 가르침을 기다렸던 것은, 어떤 목마름이었다.

 

수녀님 특강이 있던 날 시작 인사를 하며 그 얘길 했었다. 그 세월 기다렸던 나도 대단하고, 그 시간 생전 처음 수녀님의 강의를 듣자고 모여온 사람들도 대단하다고. 나나 그들이나 어떤 목마름, 갈망을 따라온 것이라고. 어거스틴의 말로 하면 '기억'을 더듬어 찾아온 길이 아닐까. 마침 눈에 띄는 신간이 있었는데 제목은 <그리운 하나님>이다.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현대 영성가까지 여러 신비가들의 기도를 모은 작은 책이다. 책을 보는 순간 수녀님께 배운 영성가들의 가르침이 떠올랐고, 그분들의 삶과 영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운 하나님'이지 싶었다. 엊그제 수녀님께 그 책을 선물했다. 내가 뭐라고, 내게 배우러 오시는 분들이 늘 고맙다. 그분들께 수녀님을 소개하고, 함께 배우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다니! 기적이고 신비이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0) 2020.07.17
2020년 하반기 [내적여정 세미나]  (2) 2020.07.08
나타난 선생님  (0) 2020.07.08
소장 하길 잘했다!  (2) 2020.06.19
CBS 모두의 거실  (0) 2020.06.06
기승전글  (0) 2020.05.29


도배한 지 얼마 안 되는 깨끗한 흰 벽을 본 아이는 신이 납니다. 마침 손에 크레파스가 있었거든요. 엄마가 스케치북에 그림놀이 하라고 주셨어요. 뭔가 자꾸 삐져 나가는 느낌. 선 하나도 긋다 마는 느낌. 너무 좁은 건가? 그때 하얀 ‘벽’을 본 겁니다. 여기야! 속이 시원하게 그어보고 그려 봅니다. 이거지! 여기였구나. 엄마가 이걸 하라고 크레파스를 준 거야! 으아, 짜릿짜릿!

잠시 후 돌아온 엄마의 표정은...... 네, 여기까지요.

미사 나음터는 정말 좁아터져서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좁은 곳에 이렇듯 빼곡히 들어앉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그렇게 들어앉은 사람들 사이가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먼 느낌으로 불편하지 않아 감사합니다. 암튼 뭐 하나 들여놓을 수 없는 공간. 지도자 과정 시작하니 화이트 보드가 필요하지 뭡니까. 필요하지만 공간이 안 되는데 어쩌겠나 싶었는데. 연구원 샘 한 분이 아무도 몰래 혼자 머리를 쓰신 겁니다.

모니터 위에 마카펜으로 막막 쓰게 만들어 놓으신 거죠. 처음 쓸 때는 살짝 후덜덜 했지요. 두 번째 되니 아주 짜릿합니다. 새로 도배한 벽지에 그림 그리는 느낌이랄까. 블랙 보드로 변신한 모니터. 지도자 과정 1기가 연구소 식구 다섯, 과정에 참여하신 분 여섯 도합 열한 개의 우주가 만나 한 주 한 주 진행되고 있습니다. 매시간 함께 새로운 질문 앞에 서며, 우리만의 돌파구, 나만의 여정을 더듬어 가고 있습니다. 함께 더듬어 가는 영적 여정이 뭔가 짜릿합니다. 으아, 짜릿짜릿!

강의로 책으로 배우고 내 몸으로 살아내서 빚어진 에니어그램, 기도, 치유 글쓰기를 모두 갈아 넣어 지도자 과정을 일궈가고 있습니다. 커리큘럼에 계획된 것 이상의 통찰에 내게서 나오고, 흘러가고, 다시 내게 흘러오는 것에 한 주 한 주 놀랍기만 합니다. 지식 전달에 멈추지 않고, 함께 경험하고 자라는 시간이 되자 마음 먹으니 연구원 다섯 분도 같은 마음이 되어 그 무엇 아끼지 않고 자신을 내어 놓으니 이런 공동체 어디 또 있겠나 싶습니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하반기 [내적여정 세미나]  (2) 2020.07.08
나타난 선생님  (0) 2020.07.08
소장 하길 잘했다!  (2) 2020.06.19
CBS 모두의 거실  (0) 2020.06.06
기승전글  (0) 2020.05.2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2) 2020.05.21
  1. 2020.06.25 16:25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7.07 12:59 신고

      둥이들이 많이 컸지요?
      카톡 프로필에서 예쁜 아가들 가끔 보고 있어요. 사진으로 보면 예쁜데, 키우는 현실은 얼마나 어려우실까 생각도 하고요. ^^
      마음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예배실 여기저기서 우연히 마주치던 그 기억이 새롭고 그립기도 해요.
      일하며 육아하며, 가장 치열하고도 가장 생명력 넘치는 인생의 시간들 잘 살아내시고, 작은 기쁨들 놓치지 않으시길 기도할게요 :)

 

 

 

"쓰면 말하고 싶어진다. 말해보면 읽고 들어야 함을 깨닫는다. 드러내야 부족함을 안다. 드러내야 잘 되면 잘 되는대로, 또 못 되는대로 채워야 함을 느끼게 된다. 쓰기·말하기를 하면 듣기·읽기는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강원국의 글쓰기』 중에서

 

방송에 나가거나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할 얘기도 없으면서 왜 섭외에 응했을까?” 부담감으로 잠을 설치고, 마치고 나서도 홀가분함보다는 “그 말을 왜 했지? 다른 말을 했어야지…·” 이불킥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지나고 보면, 강원국 작가님 말처럼 드러내야 부족함을 알게 되기에 저 자신의 글과 말을 돌아보는 데는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저는 여전히 제 목소리, 말투, 얼굴 생김까지 낯설고 민망하여 제대로 보진 못하지만 공유하고 알려야겠지요.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타난 선생님  (0) 2020.07.08
소장 하길 잘했다!  (2) 2020.06.19
CBS 모두의 거실  (0) 2020.06.06
기승전글  (0) 2020.05.2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2) 2020.05.21
뒤에 선 사람 : 아리마대 요셉  (0) 2020.04.11


요즘은 무슨 얘길 하다가도 결국 글쓰기 얘기다. 이번 주말 방송되는 CBS 토크 프로그램에서도, 오늘 있었던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도 기승전...... 글쓰기!였다. 코로나 블루 얘길 하다가 글쓰기, 육아 얘기 하다 글쓰기. 이렇게 되고 있다. 보통은 책 출간 즈음에 방송에도 나가고 인터뷰도 하는데, 어쩐지 맥락 없는 자리가 자꾸 생기는 중이다. 그 자리에 가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글쓰기' 예찬이라니!

 

정말 오랜 시간 준비한 연구소 지도자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긴 시간 준비한 강의보다 짧게 글쓰는 시간으로 모두들 배우는 바가 크다. 지도자 양성은 역시 글쓰기다! 자랑 삼아 페이스북에 올린 글, 옮겨 걸어놓지 않을 수 없지!

 

자기 이해를 위한 글쓰기, 치유와 성장을 위한 쓰기의 힘. 이제 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새로운 감동이며 배움입니다. 내적 여정 지도자 과정에서 매주 글을 씁니다. 함께 쓰고, 집에 돌아가 혼자 쓰고, 혼자 쓴 자기 성찰의 글을 다시 공유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쓰기 시작하면 변화가 생깁니다. 쓰는 행위가 홀로 하는 것 같지만, 함께 쓰고 그것을 나눔으로 유익은 극대화 됩니다.

예를 들면 어제는 ‘내 인생 나를 가장 오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를 항변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짧은 시간 손이 가는대로 씁니다. 글은 각 사람을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늘 놀라고 새롭게 배웁니다. 아마 이 주제로 혼자 썼다면 자기 감정에 함몰되고 말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 공간에서 쓴다는 것, 그리고 쓰는 이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느낌은 글의 방향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로를 받아주는 공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기로 약속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의식이지요.

일단 주제의 첫 번째 목표는 공간과 사람에 힘입어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였습니다. 각자 쓴 내용은 늘 자기 안에서 꽝꽝 울리지만 언어화 되지 못한 아우성일지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겠지요. ‘누군가’ 나의 편이 되어 이렇게 나를 알아주고 변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일 겁니다. 쓰는 행위는 내가 바로 그 '누군가'가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내 편이 되어 자기를 변호해주는 것이지요. 실은 이게 먼저죠! 내 속내를 가장 잘 아는, 최고의 변호사는 나니까요.

한 발 떨어져서 자신이 쓴 글을 다시 봅니다. 누군가에게 항변하고 싶은 나, 그 '나'는 어떤 모습인지. 아마 내가 되고 싶은 나, 에니어그램으로 말하면 '자아 이미지'일 것입니다. 자아 이미지에 집착하여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에 됩니다. 새로운 주제가 떠오릅니다. 손이 가는대로 써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봐줄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 거기에 덧붙여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제가 글쓰기 주제를 내주며 의도한 바는 이 지점이었습니다.)

사람이 글을 쓰고, 글이 사람을 이끌고, 사람들이 글을 빙자하여 자신을 내놓고, 그들이 다시 쓰고... 글은 또 어두운 자아의 숲을 헤쳐 새로운 길을 내고... 끝나지 않을 이 연결이 참 좋습니다.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장 하길 잘했다!  (2) 2020.06.19
CBS 모두의 거실  (0) 2020.06.06
기승전글  (0) 2020.05.2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2) 2020.05.21
뒤에 선 사람 : 아리마대 요셉  (0) 2020.04.11
재의 수요일  (2) 2020.02.26

 

 

연구소에서 지도자 과정을 시작했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세월을, 허튼 꿈이라 조롱하는 목소리를, 양 옆에 책의 성을 쌓고 읽고 또 읽던 외로운 밤을, 두려움으로 문을 닫아걸고는 아무 말을 쓰고 또 써 쌓인 노트들을 당신은 모른다. 2008년,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의 수강자가 되어 낯설 길에 들어섰던 날로부터 오늘까지. 나는 얼마나 먼 길을 걸어온 것인가. 마흔 되기 전부터 시작된 영적 방황이었다. 나를 잃고 신앙을 잃었으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신앙을 찾아야 다시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전의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찾아지지 않았다.

 

에니어그램, 가톨릭 영성의 길로 맘 먹고 들어선 2008년 지도자 과정이었다. 과정을 마치고 연구소 식구로 초대받았을 때의 기쁨도 당신은 모른다. 강의를 하지만 모두 자원봉사다, 라 해도. 돈도 명예도 무엇보다 따스한 받아들임조차 없는 곳에 뛸 듯 기쁘게 투신했다. 오직 배움 때문이었다. 충분히 쌓인 음악치료사의 경력과 학위, 개신교 안에서 이미 알려진 프로필도 아무것도 아닌 곳인데, 그곳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황송하기만 했다. 나를 어떻게 대하든 그곳에 가서 강의를 듣고, 연구원들과 뒤풀이 하며 내적 여정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길을 잃었고, 나도 잃었고, 신앙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오래된 새로운 길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길이, 그러나 딱 봐도 내가 가고자 했던 거기로 이어질 길이 있었다. 그 생소한 문화, 생각보다 언어가 너무나 달랐던 그곳에서 반만 알아듣는 바보처럼 앉아 있었다. 모든 걸 적고, 모든 걸 기억하고, 집에 오면 복습하고, 책을 찾아 읽고 기록했다. 갑작스레 연구소와의 인연이 끊어졌다. 함께 마음을 나누던 선생님들은 "너는 버려진 거야. 인정해"라고 했지만, 정말 바보 같게도 함께 한 시간을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여전히 감사했다. 상실감은 너무나 커서 며칠 몸이 아팠고, 연애하다 헤어진 것처럼 마음에 찬바람이 많이 불었다.

 

홀로 떨어져 나왔다는 것, 내 마음을 알아들어 주는 사람들과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이 슬플 뿐이었다. 그때부턴 혼자였다. 혼자, 그 누구도 모를 가톨릭 영성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기도하고 그랬다. 책이 책을 안내하고, 또 다른 책이 안내한 절판된 책을 찾아 중고서점을 헤맸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 긴 시간을 보냈다. 에니어그램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냈다. 친구를 만났다. 믿어주고 도와주는 영혼의 벗들과 손을 잡고 우리 집 거실에서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시작했다. 욕심 없이 나처럼 목마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만났다. 왔다 떠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한 번 왔다 결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다음 단계 여정을 열고, 또 그다음 단계 강의를 준비했다. 내가 준비되니 사람들이 다가왔다. 나처럼, 꼭 나처럼 목마른 사람들은 나도 알아볼 수 있었다. 세미나 전 과정을 듣고, 다른 집단 여정에서 만나고, 소식이 끊어졌다가도 또 이어지고.

 

2018년 12월, 기적처럼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가 생겨났다. 믿기 어려울 만큼 준비된 네 사람이 내 곁에 든든하게 서 있다. 역시 목말랐던 사람들, 얼마나 목말랐으면 이렇듯 계산 없이 자기를 던져 이 샘의 물을 사겠는가. 연구원 네 사람이 없다면 지도자 과정을 개설하는 오랜 꿈이 마침내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내게 없는 것들을 기가 막히게 가진, 가진 것을 사심 없이 내놓는 사람들과 이 어려운 걸 해냈다. 공간이 작아 더 많은 사람을 뽑을 수도 없다. 지도자 과정 1기 6명이 우리에게 왔다. 얼마나 목말랐으면, 얼마나 자기를 찾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찾고 싶었으면 이 구석진 곳까지 왔다. 

 

나를 잃고, 신앙을 잃고, 길을 잃었을 때 빛이 왔다. 구원의 빛이 왔다.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왔고, 어두운 밝음으로 왔다. 쓰디쓴 달콤함으로 왔다. 자랑거리를 내려놓는 지점에서 왔고, 내가 쌓았던 착한 행실과 헌신과 섬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왔다. 내가 기나긴 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른 것처럼, 자기 아픔과 그림자를 만나며 고립의 시간을 통과했던 사람들이 오늘 지도자 과정에 온 것이다. 미루어 짐작은 되지만 결코 안다 말할 수 없는 자기의 시간을 통과해서 왔다. 에니어그램 나부랭이에 빠져서 내면이나 파고 있는 게 무슨 도움이 되냐는 조롱의 소리를 거스르고 왔다. 착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똑똑해 보이는 포장지를 벗어야 환영받을 수 있는 곳임을 알면서 왔다. 

 

2008년, 지도자 과정 수강자로 앉아 뛰던 가슴을 기억한다. 정호승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사랑한다. 내가 연구원 넷, 지도자 과정 1기 여섯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 오늘 남모를 떨림과 고마움을 사랑하는 이유는 시인의 말과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정호승-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CBS 모두의 거실  (0) 2020.06.06
기승전글  (0) 2020.05.2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2) 2020.05.21
뒤에 선 사람 : 아리마대 요셉  (0) 2020.04.11
재의 수요일  (2) 2020.02.26
임신중절, 그 선택 너머의 이야기  (0) 2020.01.27
  1. SJ 2020.05.26 11:06

    글과 상관없이.. 더 야위어진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가고, 마음이 가요... 머지않은 시간에 뵈러 갈게요.

    • BlogIcon larinari 2020.05.26 21:17 신고

      남은 시간 잘 마무리 하고,
      마지막 추억 쌓고 오셔서 기쁘게 만나요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렘브란트

고난주간 지나고 있습니다. 성금요일과 부활주일 사이, 성토요일입니다. 작년에 깊은 공감으로 읽은 셸리 램보의 『성령과 트라우마』의 부제목은 '죽음과 부활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이었습니다. 금식과 눈물 콧물로 성금요일을 지내고, 우리는 바로 부활의 새벽으로 도약했습니다. 부활을 성경공부로만 배운 탓입니다. 정작 우리의 일상은 이미 덮친 고통의 실존을 살아내는 토요일인데 말입니다. 상실과 애도의 시간 성토요일. 저는 더 이상 여기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머물러 느끼고, 견디고, 애도가 필요한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 뿐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은 상실의 늪에서 오지 않은 부활을 상상하는 법을 배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깊이 머무르지도 못합니다. 남편이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 일주일 동안 소설 같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신학도로서 본문을 연구한 후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상상력을 덧입혔습니다. 이번 주에는 밴드에 글이 올라오는 알람 소리로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로마 병사들, 빌라도, 백부장이 등장했는데 오늘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오늘 아리마대 요셉의 목소리는 유난히 공감이 됩니다. 전문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집에만 있자니 너무 분하고 답답했습니다. 골고다로 가자니 차마 그분의 죽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열린 산헤드린 의회 때, 광기에 휩싸인 의원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반대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습니다. 니고데모 의원과 저, 단 두 사람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이려 드는 의회원들의 기만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자기들이 하는 일이 여호와의 명예를 가리는 일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내세우고, 전통을 보수하고, 나라의 안위를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도둑놈들임을 백성이 다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온갖 특혜는 다 누리며 권세를 부리는 의회원들은 죽은시체나 다름없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위선에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언젠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실 때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바꿔주실 줄 믿었습니다. 그분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 의원과 저 요셉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다고 했을 때, 드디어 그날이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어떤 방법일지는 잘 모르지만, 선생께서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때가 왔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선생을 배신했습니다. 의회는 유월절 전에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와 저는 여러 사람을 만나 어떻게 해서든 이를 막아보려고 했는데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가만두면 안되었습니다. 그동안 정체를 숨긴 채 중립적인 척하면서 예수 선생을 지켜주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비겁했습니다. 제가 더 확실히 노력했어야 했는데. 저 때문에 선생님의 운동이 좌절된 것 같아 비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옷을 차려입고 골고다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그분이 죽었다고 알려줬습니다. 아,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시간은 벌써 오후 3시쯤 되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안식일이 시작될 텐데, 자칫 선생의 시신은 공동묘지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서둘러 빌라도의 공관으로 갔습니다. 총독을 단독으로 찾아가 만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쪽저쪽에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는 숨지 않기로 했습니다. 더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시신이라도 잘 거둬 최소한의 장례를 치르게 해야 그나마 제 마음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패로 몰려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사람을 보내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순순히 내어 주더군요. 그는 끝까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음을 입증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었습니다. 빨리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얼른 한 사람을 시장으로 보내 시신을 쌀 삼베를 넉넉하게 사 오게 하고, 또 다른 종을 보내 제가 죽으면 가족 묘로 사용하려던 무덤에 선생의 시신을 임시 안치할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올라온 예수의 어머니와 여인들에게 장례 절차를 설명해 드리려고 저는 서둘러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마침 예수의 시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마치 아기를 안 듯 안고 있는 모습에 저는 기어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내었어야 했는데. 돈을 좀 써서라도 의회원들의 마음을 좀 돌려놨어야 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시신을 들것에 옮겨 두고, 운구할 종들을 지목했습니다. 예수 선생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습니다. 니고데모 의원의 말을 듣고 저 역시 밤에 그를 찾아갔었지요. 저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오래 기다리고 기도해왔던 메시아 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무수히 보아왔던 랍비들과 달랐습니다. 따뜻했지만 그 지성은 말할 수 없이 깊었습니다. 율법의 의미가 그렇게 선명하게 이해될 줄 몰랐습니다. 예수의 묵직한 손을 무심코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너덜너덜해진 그의 손은 차마 보기가 민망하고 끔찍했습니다. 가만히 예수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 보았습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랍비여, 저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가져다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용기가 없어서 오늘 새벽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마귀처럼 날뛰는 의회에서 제가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제가 미온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목숨 부지하고자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지 못한 까닭입니다.’

저는 울움을 참아야 했습니다. 곧 안식일이 시작되면 모든 게 허사가 됩니다. 얼른 움직여야 했습니다. 무덤은 가까웠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선반 위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준비한 향품과 향료를 서둘러 발랐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삼베로 시신을 둘둘 싸매었습니다. 마지막 얼굴을 가리기 전에 선생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다짐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죽었지만, 여러 차례 다시 살아나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선생님의 꿈은 내 안에서 죽지 않았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예수여, 잘 가시오. 못다 이룬 꿈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 이어 보겠습니다. 당신의 가족들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얼굴을 삼베로 싸매고, 인사를 드리고,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돌을 굴려 무덤을 막았습니다. 1년 후에나 다시 와서 흙으로 되돌아간 시신의 뼛조각을 모아 유골함에 담아 드릴 때나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여인들이 울면서 무덤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보낸 백부장의 부하들이 무덤 앞을 지키기로 했나 봅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갈 것을 대비하는 모양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그동안 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왔습니다. 실은 의회에서 제가 예수의 제자임을 알리면 저는 곧장 파문당할 것이고, 제 사업장은 위기를 맞을 것이 분명합니다. 선생께서도 제게 굳이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라고 하진 않으셨습니다.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당신의 시신을 거두는 때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하고 송구할 뿐입니다.

3일 후 선생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갈릴리를 다녀온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저도 부활하신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할 일이 많을 거라며, 사도들과 한마음으로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긴히 부탁하셨습니다. 지난번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의회에 붙잡혀 왔을 때 이미 의회원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을 풀어주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들은 광장에서 복음을 전했고, 저와 니고데모는 의회에서 우리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일로 정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야고보 사도는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힘내십시오. 여러분 뒤에 제가 있습니다. 니고데모 의원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 두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맡은 의회원 요셉 드림

<마가복음 15:40-47>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승전글  (0) 2020.05.2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2) 2020.05.21
뒤에 선 사람 : 아리마대 요셉  (0) 2020.04.11
재의 수요일  (2) 2020.02.26
임신중절, 그 선택 너머의 이야기  (0) 2020.01.27
내적 여정 1단계 세미나 추가 개설  (1) 2020.01.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