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2박 3일 동안 “예수마음기도 침묵 피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허다하지만, 기도의 체험이야말로 언어로 다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 깊은 만남이기에 말입니다. 기도 피정의 은혜를 다 나눌 수 없어 사진 몇 장으로 대신합니다.

내적여정 1단계에서 의식성찰 기도로 시작하여 영성과정에서 향심기도를 안내해 드리고, 동반자과정에서는 꾸준히 하시도록 북돋워 드리고 있습니다. 이 낯선 기도들을 되든 안 되든 배운 대로 해오신 벗님들의 갈망이 아름답습니다.

갈망, 목마름.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갈망이 먼저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주세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 걸어주시는 예수님, 당신의 목마름을 먼저 내보이셔서 우리 안의 깊은 갈망을 일깨우셨습니다.
 
라고 연구소 SNS에 썼다.

 

 

 
피정 가는 차 안에서 헤아려 보니 예수마음배움터 저 경당에 앉아 처음 기도드렸던 때가 30대였다. 서른여덟. 뒤늦게 이름 붙여 정리한 "신앙 사춘기", 혼란과 메마름의 극한의 시간이었다. 기도의 언어를 잃어 그분께 닿는 길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두려움은 카오스였다. 분명 그분은 언어 너머에 계신 분인데, 언어 너머에 계시는 그분과 연결되는 방법, 침묵의 기도를 나는 알지 못했다. 《신앙 사춘기》 부제가 "신앙의 숲에서 길 잃은 그리스도인에게"이다. 딱 그 상태였다. 익숙하던 그 숲, 신앙의 숲이 갑자기 낯설어진 때였다.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그때 그분께서 나를 '에니어그램'으로 낚으셨다. 에니어그램으로 낚아 데려다 앉힌 곳이 저 경당이다. 수년을 몰래 혼자 저 경당 한 구석에 앉아 기도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세월이여. 얼마나 확신이 없었고, 얼마나 두려웠고,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다. 확신 없는 채로, 두려운 채로, 외로움 가득 안고 저 자리에 앉아 기도하며 치유가 일어났다. 사춘기 너머에 더 멋진 어른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어에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을 언어 너머의 방식으로 만나가고 있다. 그랬던 내 비밀 공간을 꽉 채운 이들이 내 벗들이다. 나와 같은 신앙의 숲길을 걸어온, 어쩌면 영혼의 모양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비슷한 것을 좋아한다. 연구소를 찾아와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내적 여정의 길을 걸으며 자신 안의 기도의 갈망을 발견하고 여기까지 온 이들이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30대 후반, 40대 내내, 그리고 이제 50대 중반.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향하는 기도의 길이 감사할 뿐이다.
 

 

정성스레 기도로 준비된 공간에서 귀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 상과 그리로 향하는 작은 발걸음을 만났다. 소박하게 꾸며진 환대 공간은 여기 배움터 수녀님들의 영적 감각이다.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향해 놓여진 작은 신발로 기억 저편의 노래가 하나 떠올랐다. 내 생애 최초의 노래였을 것이다. 말을 하기 시작하며 부른 노래일지 모른다. "얘는 나이 세 살에 조선말을 다했다" 이모나 삼촌께 들었던 말 같고. 엄마는 "얘가 주댕이가 빨리 터지더니 배추김치 주댕이를 좋아한다."고도했다. 두세 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노래를 불렀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 서울 오가는 장항선 기차 안에서도 불렀다. 어린 아기가 또박또박 노래를 하니 신기해서들 시키고, 칭찬하고, 연양갱을 사주고 했던 것 같다. (채윤이 16개월에 어머니 교회에서 가족찬양을 하면서 "가서 제자 삼으라"를 불렀는데. 무대 아빠 품에 안겨서 또박또박, 정확한 음정으로 불러서 모두 놀랐던 걸 보면 상상이 되기도 한다.) 내 생애 처음 노래가 내 영혼에 늘 울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첫 노래, 첫 소망, 처음 갈망이 이것이었구나. 그래서 나는 기도에의 목마름을 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구나.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하나이고 싶은 마음이었구나. 연구소 6년, 배움터 다니기 시작한 지 17년, 이 노래 부른 때로부터 50여 년. 기도의 6년, 기도의 17년, 기도의 50년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나도 예수님 따라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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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데레사 『영혼의 성』으로 쓴 논문의 결론 부분 일부입니다. 제 기도 여정의 고민을 담아 연구하고 얻은 소소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도의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여건이 되신다면 함께 해요.
 
『영혼의 성』에서 배우는 기도는 metanoia, 즉 방향의 전환이다. 기도하는 자아, 데레사 자신의 인간적 열정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향한 에로스적 열정이 방향을 바꾸어 그대로 하나님을 향할 때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비춘다면 개신교인들의 통성기도를 향한 열정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다. 방향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기도를 ‘잘못된 기도’로 치부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지나온 기도의 여정을 긍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지점에서 자기인식의 빛이 필요하다. 여기서 자기인식이란 심리학적 자기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온 자신에 대한 성찰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자기인식이 기도의 시작이라고 『영혼의 성』은 가르치고 있다. 데레사의 여정으로 말하자면 자기인식은 우선적으로 ‘기억’이다. 짐승과 벌레가 우글거리는 성 밖에 살던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도는 맹목적 자기 망각이 아니다. 통성기도는 한국인 특유의 한(恨)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한다. (김명실.「공동체적 탄원기도로서의 통성기도: 통성기도의 정체성의 정립과 그 신학과 실천의 나아갈 방향 모색」,『신학과 실천) 공동체적으로 큰 소리로 울부짖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민족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고통의 정점에서 그것을 견디기 위해 망각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심리학에서 ‘방어 기제’는 고통의 정점에서 고통을 잊게 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방어 기제를 사용할 때는 병리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적으로 큰 소리로 울부짖는 통성기도는 기도하는 그 순간 자기를 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의식의 빛을 꺼야만 견딜 수 있는 고통의 때에는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데레사의 기도처럼 영적인 성장은 투명한 자기인식의 길과 함께 가야 한다.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고통과 인간적 욕망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명확하게 바라보고 성찰하는 것이 건강한 영성으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더 깊은 기도, 성숙한 기도를 위해서는 자기 망각으로의 순간적 초탈이 아니라 자기를 인식하고 수용하며 초월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내면을 향한 자기인식의 기도로 안내하는 『영혼의 성』이 통성기도 너머의 깊은 기도로 초대하는 초대장이 될 수 있겠다.
 
 

 
 
침묵기도 피정으로 초대합니다.
일상에서 물러나, 고요와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머무는 2박3일 '예수마음기도' 피정입니다.
 
예수마음기도란,
대침묵 피정으로 길잡이 강의와 영적 동반을 통하여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배우고 익히면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깊게 하는 영적 수련입니다.
 
♠ 일시 : 2024년 11월 8일(금) 오후 2시 -10일(주일) 오후 3시
  장소 : 예수마음배움터(경기도 파주시 한빛로 21)
  피정비 : 25만 원(1인1실)
  입금계좌 : 우리은행 38604 100758 (재) 성심수도회
  신청 : https://bit.ly/3Ymvl4t
  문의 : 010-6209-0635
 
 부분 참석은 불가합니다. 다만, 혹 주일 예배 참석하셔야 하는 분은 토요일 밤이나 주일 아침에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이 경우에도 시작기도(금요일 2시)는 같이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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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학기를 마친 7월 둘째 주에는 요셉수도원 피정에 가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배나무밭이 드넓은 요셉수도원의 7월 밤은 달빛이 환하고 배나무 잎이 무성하다. 배꽃은 없지만,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시조를 읊게 되는 밤이다. 끝기도를 마치고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이런 풍경이다.

 수도원에 도착하여 안내실 앞에서 순례객을 환대하는 친구들은 멍멍이들이다. 어쩌면 이렇게 순둥순둥 하게 생겼는지... 기도하고 일하는 수사님들을 꼭 닮았다는 생각에 쓰다듬어주고 놀았다. 유독 눈에 띄는 친구 이름이 '성탄이'이다. 등에 이름표를 달고 있다. 

둘째 날 아침기도를 마치고 나왔는데 성탄이가 혼자 놀고 있다. 어이쿠, 반가워서 또 한참을 쓰다듬고 놀았다. 어쩐지 이 녀석 내게는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하다. 뭐랄까, "위로가 필요하면 쓰다듬든지, 말든지" 등을 빌려주는 느낌?

다음 날 산책길에 또 만났다. 눈이 어쩌면 그렇게 순하고 착한지... 성탄이랑 놀다 보면 잠시 후에 나타나는 수사님 한 분이 있는데, 마르코 수사님이다.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가시기도 하고, 밀짚모자에 장화 신고 소시지 공장 쪽으로 걸어 가시기도, 땀 뻘뻘 흘리며 전지 작업을 하시기도 한다. 아, 성탄이는 마르코 수사님 껌딱지였구나!

예수님 상 앞에서 저러고 수도원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성탄이는 트럭 타고 밖으로 나가신 마르코 수사님을 기다리는 거였다!

성탄이와 함께 마르코 수사님을 자꾸 마주치게 되었다. 들어간 첫날에 저녁 기도하고 돌아왔는데 방문 열쇠가 열리지 않았다. 안내 수사님이 오셨는데, 고장으로 확인되자 이걸 고칠 수 있는 분이 따로 있다며  전화를 걸더니 '마르코 수사님'을 찾았다. 금세 달려오셔서는 달그락달그락 몇 번 하셨는데 딸칵 문이 열렸다. 늘 이렇지! 해도 해도 안 되던 것이, 전문가가 와서 터치! 하면 해결된다니까. 조금 억울해 가지고 "저도 그렇게 했는데요..." 하고 안내 수사님도 "거 참, 여태 안 됐는데..." 하니까 마르코 수사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하시며 "성령님이 여신 거예요" 했다. 그리고 통째로 손잡이를 갈아야 하겠다며, 조금 이따 와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셨다. 전에 왔을 때부터 벌써 얼굴은 익히 아는 분이다. 기도 때마다 선창 하시는 노래 잘하는 수사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맥가이버시네! 성탄이가 마르코 수사님 껌딱지인 덕에 4박 5일 지내는 동안 마르코 수사님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되었다.
 
모기 물린 곳이 부풀어 올라서 약을 사러 나가는 길이었다. 해가 아주 뜨거운데 수도원 입구 안쪽에서 수사님 한 분이 전지작업을 하고 계셨다. 열사병 걸리시겠네...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약을 사고 시원한 이온 음료 한 병을 샀다. 들어가는 길에 아직 작업 중이시면 드려야지 했지만, 내가 돌아갔을 때는 다 끝내고 들어가셔야지, 이 더위에... 했는데. 아직도 계시네. "수사님, 이거 드세요" 하고 봤더니 또 마르코 수사님이시다! 어느새 무성했던 풀과 나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저러고 농부이시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어느 새 검은 수도복을 입고 기도를 선창하고 계시니 "기도하고 일하라(Ors et Labora)를 몸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요하게 기도하고 요란할 것 없이 일하는 수도자들의 삶의 리듬이 일으키는 파동이 영혼을 울린다. 할 수 있다면 일상의 수도자로 저렇게 살고 싶다.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는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면서... 아니 뙤약볕의 전지작업이나 문고리를 고치는 일과 그레고리안 선율의 기도가 다르게 들이고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수십 번을 기도하며 걸었던 저 큰 나무 사잇길은 이제 내 마음에 난 길이 되었다.  

4박5일 내가 먹을 식사를 챙겨가야 하고, 가 본 모든 피정집 중에 가장 열악한 곳이다. 수도원 피정을 이끄시는 신부님은 그래서 '사막체험'이라 부르는데. 이제 밥 챙겨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노동 봉사 하시는 분이 고추를 따주시고, 마르코 수사님이 지나가다 자두도 주시고 입맛 돋우는 일이 있다. 불편한 잠자리 견디고 일어나 새벽공기 헤치고 기도하러 걷는 기분도 좋다. 그리스도인에게 편안한 세상이 도래했는데, 부러 불편하고자 사막으로 물러난 분들이 수도원의 아버지들 아닌가. 내 마음에도 사막으로 가는 길이 나면 좋겠다.   

성탄이처럼, 마르코 수사님처럼, 예수님처럼 순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한다. 다짐해서 되는 일이 아닌 줄 알기에... 기도한다. 마르코 수사님과 여러 수사님들,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기도로 이 세상을 지탱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기도 찾아 삼만 리, 수도원 찾아 삼만 리

두어 달쯤 전인가. 연구소 선생님들과 내 꿈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기차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나만 기차역에 남겨진 꿈이었다. 하룻밤을 어딘가에서 보내야 하는데,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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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처럼 달콤한 신학자라 불리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합니다.

첫 번째, “나를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두 번째,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세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네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많은 경우 ‘나를 사랑하는 이기적 동기’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돕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 체험이 깊어질 때 우리의 사랑은 자랍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이 아니라 그분 그 자체로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눈을 떠서 다시 나를 바라볼 때,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두려움 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어떠함’에 있지 않음을 알고, 그 사랑을 신뢰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자기 함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사랑에 닿아 자기 개방과 자기 증여로 이어지는 여정이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입니다. 2024년도 하반기 내적 여정에 초대합니다. (하반기에는 대면으로만 진행합니다.)


✔ 장소 : 경기 하남시 미사대로 410 미사강변오벨리스크 4층
✔ 인원 : 12명
✔ 비용 : 13만 원(점심과 커피 제공) / 단계별
✔ 문의 : 010-6209-0635
✔ 기본1 과정부터 영성과정까지 전 과정 수강 시 10% 할인해 드립니다.
  (영성과정 이후 환급)

✔ 일정 및 신청 :

기본 1 : 8월 30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47hVPoY

내적여정 기본 1단계(대면)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기본 1단계 신청양식 입니다.

docs.google.com


기본 2 : 9월 27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48Dhmte

내적여정 기본2단계(대면)

에니어그램 2단계 신청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심화1 : 10월 25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3NMqsfl

내적여정심화1단계(대면)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온라인 심화1단계 신청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심화2 : 11월 15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48pQWvl

내적여정 심화2단계(대면)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심화2단계 평일반 신청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영성 : 12월 20일(금) 10:00-17:30
신청 https://bit.ly/3rm7qib

에니어그램 영성과정(대면)

에니어그램 영성과정 신청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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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기사입니다. “글쓰기 삶쓰기”라는 제목이 좋아서 기쁘게 응했습니다. ‘한국기독교출판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출판소식>입니다.

평소 루틴으로 하는 일이 질문을 던지고 두세 시간씩 듣는 일인데… 이런 기회로 한 번씩 질문을 받는 입장이 되면 저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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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시겠어요

지난 목요일 동반자과정 1학기 종강 날이었다. 모임 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읽고 있었다. 한 학기 내적 여정을 돌아보는 것으로 이보다 좋은 주제가 없다. 강의 대신 책 나눔으로 한 학기를 정리한다. 동반자과정 4기가 되니 벌써 네 번의 책 나눔을 한 것이고, 그때마다 새롭게 다시 읽고, 가끔 꺼내 읽은 것으로 치면 족히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그래도 또 새로운 것이, 지하철에 앉아 아무 데나 딱 펼쳤는데 바로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것이다.

 

옆에서 뭔가 뜨끈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맑은 초로의 여자 분이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 오랜만에 봐서요좋네요. 행복하시겠어요"란다. 한참 쳐다본 모양이다. "(행복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좋아하는 책 읽으시는 것 같아서요. 이미 보신 책을 또 보는 거 아니에요? 좋아하는 걸 하시니 행복하시겠죠." 하고 잘 가라며 내리셨다.

 

 

행복합니다
 

행복하다. 이 소중한 책을 가슴으로 읽고 나눌 벗들이 있어서… 가르치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배우는 과정이라 더 그렇다. 무엇보다 이 책을 처음 만나서 읽던 그때를 떠올리면 꿈만 같은 오늘이다. 내면이 무너지고 신앙이 무너지고 몸도 함께 무너졌던 그 시절. 이전의 방식으로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시절이다. 가톨릭의 에니어그램 연구소에서 만난 영성이 한 줄기 빛이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행복한 1년을 지내고 떠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에서 처절하게 읽었던 책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을 내디디면 바로 낭떠러지일 것 같고, 그대로 지옥행일 것 같은 시절이었다. "책만 보는 바보"가 되어 읽던 시절이었는데, 돌아보면 책으로 다가온 영적 스승들과의 만남으로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혼자 읽던 책 중 하나가 <아래로부터의 영성>이었는데 마음으로 같이 읽고 나눌 벗들이 이리 많이 생겼다.

 
지난 수도원 순례 여정 중에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살고 있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다. 마침 방문하는 날에 수도원  행사가 있어서 개별 순례 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었고, 수사님 한 분 마주할 수도 없었다. 언감생신 사인 받는 기회는 못 얻어도 인증샷이라도 남겨 와야지 싶어 책을 들고 갔다. 그렇게 얻은 사진이 소중하네! 오래 머무르고 싶은 수도원이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성당과 경당에 앉아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기저기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다시 가서 오래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어쩌면 안셀름 신부님도 오래 앉아서 기도했을 지하 경당에서의 기도는 잊지 못할 것 같다. 하남의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의 기도가 십수 년의 세월 끝에 뮌스터슈바르작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 소중한 영적 벗들을 얻었다. 행복하다.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의 지저귐 같은 짧은 대화 끝데 지하철 아주머니는 떠나시고. 다시 아무렇게나 펼쳐든 책엔 이런 문구가 형관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은총으로 여기까지 온 내게 들려주는 저자의 말이다. 높은 이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마음, 가장 낮은 곳을 꿰뚫는 한 마디이다.

필자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논하는 이 순간에도 이 아래로부터의 영성 안에 공명심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내가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언제나 다시 반복하여 다음과 같이 주지시켜야 한다.
"너의 모든 영성적 노력들, 네가 저술한 수많은 책들에도 불구하고, 너는 변덕스럽고 괴팍한 감정들과 명예욕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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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나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두어 주 낯선 곳을 돌아다니다 오니 이 자리가 꽃자리임을 더 잘 알겠다. 집에는 엄마가 없어도 잘 해서 먹고, 제 할 일을 잘하고 지낸 남매가 있고. 소장이 없어도 강의와 나눔 준비를 잘 하여 모임을 동반하는 연구소 선생님들이 있고, 각자 자기 발로 든든히 서가는 동반자 과정 벗들이 있으니 고맙다. 기도로 기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말 잘 듣는 학생들이다. 여기에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있다. 에니어그램 3유형의 긴장과 거짓과 기만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새롭게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배우는 일은 끝이 없구나,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일은 하나님 사람을 배우는 일이니 끝이 없겠구나!
여기가 꽃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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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자다.❞(마 3:17)

꿈을 보는 눈을 닦는 강의와 함께
매주 한 분의 꿈을 나누며 나를 알아가고,
사랑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며,
이웃을 향한 연결로 나아가는
꿈과 영성 생활 강의와 나눔 안내입니다.

기존 꿈 여정 벗들에게 우선권을 드리고 있어서 꿈 나눔으로 진행되는 화요 오후반과 저녁반은 마감입니다. 수요일 오전 진행되는 [강의와 꿈나눔 기본반]에 몇 자리가 남아있습니다.

꿈 작업 원하시는 분은 대기 문자 남겨 주세요. 빈 자리가 생기거나 다음 회기 열릴 때 미리 연락드리겠습니다.

[강의와 꿈 나눔이 있는 기본 과정_12주]

✓ 일시 : 6월 12일(수) ~ 8월 28일(수)
    오전 10:00~오후 1:00
✓ 인원 : 6명
✓ 수강료 : 28만원
✓ 장소 : 온라인 Zoom
✓ 신청 링크 : https://bit.ly/376udH2

꿈과 영성생활 12주 과정

‘꿈과 영성생활’ [강의와 꿈 나눔이 함께 있는 기본 과정] 12주 과정 신청양식입니다.

docs.google.com

✓ 문의 : 010-6209-0635

[꿈 나눔 모임_12주]

✓ 일시
1. 화요 오후반 6월 11일(화) ~ 8월 27일(화) : 마감
오후 2:00~오후 4:30
2. 화요 저녁반 6월 11일(화) ~ 8월 27일(화 : 마감
저녁 8:00~저녁 10:30

✓ 인원 : 6명
✓ 수강료 : 20만원
✓ 장소 : 온라인 Zoom
✓ 문의 및 신청 : 010-6209-0635

* 12주 기본과정 수강하신 분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신청은 문자 메시지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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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충신교회 사경회를 얼마 앞두고 목사님께 기도제목을 묻는 메시지가 왔다. 기도제목을 말하는 것이 조금 어렵다. 한두 줄 말로 정리하는 게 쉽지 않다. 뭐랄까, 하나님과 조금 사무적 관계가 되는 느낌이랄까.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사이인데, 에헴... 친하지 않은 척 공개적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다. 하지만 기도제목을 물어주는 질문은 대개는 좋다. 특히 이번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말씀 준비를 위해 몇 번 통화하면서 언어 너머의 기도제목 알아차릴 분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경회를 준비하는 은밀한 하나님과의 속삭임을 있는 그대로 들려달라는 요청이었다. 기도제목을 정리하며 내 마음을 더 잘 알아차렸고, 목사님과 교우들이 기도로 준비하고 계시다는 확신에 힘이 나고 감사했다. 

 

<기도제목>
- 제가 전할 수 있는 만큼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준비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인간적인 욕심이 되어 저를 도구로 쓰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방해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메시지를 기쁨과 자유로움으로 준비하고 싶습니다.
- 4월에 일정이 많아서 몸이 좀 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남은 며칠 동안 몸의 건강을 위해서도 더 기도하며 돌보겠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 아직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교우들이 마음과 저의 마음이 주파수가 잘 맞춰서 피차에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 함께 기도로 준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고 있는 모든 강의가 마음과 영성에 관한 것이기에 당당할 수가 없다. 마음과 영성은 '지어져 가는,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확신 있는 답을 내놓을 수 없고, 주로 내가 겪어온 이야기를, 겪어내며 기도하고 공부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걸어가자고, 우리 모두 순례자이고 영적인 여정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디 가나 비슷한 얘기를 하고 또 하게 된다. 강의가 내게 유익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말하면서 확신이 든다. 말하면서 다시 결심하게 된다. 그래, 맞아! 이렇게 가는 거야. 앞선 영성의 선배들이 그러하셨어. 솔직히 내 강의에 내가 은혜받는다.

 

내 강의에 스스로 은혜받는 것까지는 해봤다. 그리고 마이크 내려놓고 내려와서는 부끄러움에 회개 기도도 많이 드렸다. 이번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 신앙 사춘기와 영적 발달 얘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 하는 분(들)이 있다. 아이의 신앙에서 어른으로 가기 위해서 부모를 넘어서야 하듯이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지도자의 그림자를 마주해야 하고, 나의 여정은 거기서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많은 분들이 여전히 그 상처에서 나오는 피고름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자꾸 말하고 쓰면서 나는 사실 내 영적 여정 최대의 빌런인 그분을 용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용서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만남을 주선하셨다.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회개했다. 남편이 목사로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내 원망과 분노의 죄를 남편이 받는 것 아닌가 싶어서. 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분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훨씬 실망스러운 그분의 노년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렸다. 진심으로 그분의 평화를 빌게 되었다. 그분의 행보로 인해 새롭게 피눈물 흘리는 양 같은 교인들이 있기에 더욱 아픈 요즘이기도 하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너머 가여움에 겨운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금, 토 저녁 집회 후 기도회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말씀을 전하고 내려와 목사님이 인도하는 기도를 따랐다. 그냥 기도하게 되었다.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감정적 선동을 하지도 않는 기도회 인도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올라왔다. 내가 했던 말을 요약하셨을 뿐인데,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고 기도하게 되었다. 첫날은 신앙 사춘기 주제였는데 내 인생의 빌런, 그 목사님을 축복하게 되었다. 둘째 날은 '여성의 하나님' 이야기를 나눴고 하나님의 모성성에 기대어 이땅의 여성들, 낮에 만나 식사했던 집사님들, 연구소의 벗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거의 2년 전, 말씀을 전하고 내려와 이어진 기도회의 충격으로 며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있다. 몇 개월 준비한 말씀이었는데, 혹여 해석 상 오류가 있을까 하여 남편에게 신학적 검증을 받고 또 받고 했었다. 청중 가운데 내로라 하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여럿 있었기에 더욱 부담이 되었었다. 이어진 기도회는 내가 전한 본문에 대한 인도자의 해석으로 진행되었다. 실은 가볍게 흔히 겪는 일이다. 여성이며 비목회자로 겪어낼 몫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날은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몸에 생긴 발진은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호된 시련의 시간이었다. 이후 내가 내 편이 되어주는 행동을 했고, 시간이 지났고, 그야말로 치유가 되었다. 그날 기도회 인도를 했던 분의 이름을 어디서 봐도 이제 심장이 쿵 떨어지거나 박동이 빨라지진 않는다.
 
이번 집회에서 두 번의 기도회는 정확히 그 일에 대한 치유였다. 나를 초대하고 기도회를 인도하신 목사님은 당신의 방식대로 하던 바를 하셨겠으나, 그것이 나를 치유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시는 분이니 누군가의 존재로 누군가를 치유하신다. 좋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면, 늘 하는 방식이 치유적이어야 한다. '치유하는 현존'이 되어야 한다. 사경회의 주제가  "봄처럼 피어오르게 하소서"였는데, 처음에는 나와 좀 안 맞다는 생각을 했다. 내 메시지는 좀 무겁고 추운데... 삼일 시간 동안 적어도 내게는 새로운 생명이 불러일으켜졌다. 목사님께서 손글씨로 편지를 주셨는데, 사흘 치유와 소생의 정점이다. "안심이 됐답니다"라는 한 문장이 내 영혼을 얼마나 안심시키고 위로를 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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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 동반자 과정 시작하고 한 달. 기도가 무르익어 간다. 한 달의 목표는 마음을 여는 것이었는데.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내 마음 중심에 계신 그분께 마음을 열어야 하는(열었으면 하는) 시간이었는데.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기도를 마쳤다는 '강제 없는 보고'가 무심하게 단톡에 올라오면 순간 내 마음이 가득 채워진다. 감사합니다, 기도하는 당신 감사합니다... 어제 아우팅으로 먹고, 웃고, 걸으며 기도하면서 푸르른 하루를 보냈다. 모임을 마칠 때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리추얼을 하는데, 리추얼은 상징 행위이다. 상징에는 체험과 진실이 담겨야 한다. 체험과 진실 없는 리추얼만큼 공허한 것이 있을까. 예배는 가장 고귀한 리추얼 중 하나이다. 성도 간의 하나 됨, 하늘 아버지와의 하나 됨의 체험 없는 예배의 공허함은 넋 놓고 유튜브 영상에 빠졌다 나온 공허감과 비할 수 없다. 어제는 그저 먹고 수다 떨고 잠깐 걸으며 기도하는 대단할 것 없는 하루였지만,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의 실체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살아있는 교회였다. 푸르른 교회였다. 어제 하루의 캠핑장 교회로 인해 감사하고 감사하다. 연구소 카페 동반자방에 나눈 (모임 후 마음에 심겨진 것을 나누는)  "씨앗 심기"글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백 번, 수천 번 되뇌어도 마음을 열지 않으면 확인이 불가능한 진리입니다. 사랑을 위한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다는군요.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아니 그렇게 우리 마음을 지으신 예수님께서는)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십니다. 강제로 문을 열지 않으십니다. 강제하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나를 좋아해 달라고, 나를 사랑해 달라고 피를 토하며 매달려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은 안에서 열려야 합니다.

마주한 두 사람이 각각 안에서 열고 나오면, 그때 사랑이 시작됩니다. 연구소가 강의도 할 수 있고, 숙제도 낼 수 있고, 기도하도록 격려할 수도  있는데... 마음을 여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몫입니다. 모두 자기 마음의 문을 열고 나와야 연결이 됩니다. 마음의 왼손 바닥을 위로 하고, 마음의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오게 하여 포기야... 마음을 포개야 비로소 연결됩니다. 

연초록 나뭇잎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 친구들이 우리를 내려다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처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받아들여 연결되는 존재가 되시오, 그게 참 행복이오. 맛있게 먹고, 많이 웃고, 몸이 기뻐하는 연결의 하루를 누렸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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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20여 년 전, 전에 하던 기도로는 신앙을 부지할 수 없어서 방황하던 때 <영혼의 성>을 만나 읽었습니다. 어려운 말은 아닌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가슴 깊은 곳을 울리며 뭔가 있는 느낌이고가톨릭 책이라 생각하니 금서 읽는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혼자 읽고 또 읽고 필사하며 긴 외로운 시간 보냈습니다. 어느새 함께 나눌 벗들이 하나둘 곁으로 모이더니, 연결된 자매들의 힘을 받아서 논문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높은뜻정의교회 중보기도 세미나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 시작 전 기도생활의 어려움을 나눴는데, 제가 겪었던 부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르짖는 기도, 청원기도로 어제와 다르지 않은 기도 제목을 반복하며 오는 공허감, 무엇보다 더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은 강의 들으시는 눈빛으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타락한 권력으로 교회가 무너져가던 시기, 남자 사제 루터가 말씀을 들고 그 교회를 나오는 개혁을 했다면, 비슷한 시기를 살던 데레사는 자신의 자리에서 기도를 통해 자신을 개혁하고 공동체를 개혁했습니다. 그 기도의 기록이 <영혼의 성>입니다. 진입장벽이 높긴 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의 독서법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전형적으로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며, 마치 보석을 채굴하는 것처럼-사실이 그렇다-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저는 어제 강의에서 체험적으로 알아듣는 집사님, 권사님, 형제님들의 눈을 보았습니다. 정재상 목사님의 목회가 참 고맙습니다. 몰랐던 이 오랜 영성의 샘물들을 오늘에 잇대는 목회를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영성, 영성 목회를 거창하게 표방하지 않고도, 가만히 필요한 일을 하시는 목사님의 행보가 부럽고 감사합니다. 응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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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유다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보편적으로 곡해되는 것은 아닌가. 며칠 전 묵상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내가 팔리지 않았을 텐데..."라는 뜻이라거나. 누군가는 예수님을 배신해야 십자가 사건이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걱정. 그렇다면 차라리 유다는 악역일지언정 구원사역에 기여한 것이네, 하는 논평 등. 적어도 내가 아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게 흘러갈 수 없다. 내가 아는 예수님이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인자가 배반당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인자를 배반하여 넘겨줄 그 사람은, 이 일을 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때, 이미 배반자로 돌아선 유다가 말했다. “랍비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유다야,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마 25:24, 메시지성경)

 
당신의 운명, 아니 소명이 유다 한 사람으로 인함이 아님을 아신다. (우리도 알지 않나?) 성경에 예언되었고,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다. 누구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당신 자신도 그 운명을 거스르고 싶어서 겟세마네에서 그렇게 간구하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실 것을 아신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유다의 영혼을 향한 절절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예수님의 길이 있고 유다의 길이 있다. 너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차라리 좋았겠다는 것은, 결코 돌이키지 않는 유다의 영혼, 마지막까지 돌이킬 기회를 제공하시나 끝까지 완고한 유다의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그렇게 가까이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도 결국 천국을 거절하고 마는 그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절절한 마음이다. ‘이미 배반자로 돌아선 유다’. 돌아선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지 못하신다. '마음'은 어떻게 못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무능하기로 선택한 사랑이다. 세상 모든 것 다 할 수 있어도 "당신이 나를 좋아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우격다짐으로, 강압으로 얻어내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다.

 

이렇듯 완고한 영혼이라니, 그 완고한 영혼에 갇혀 고립되어 있다니... 그러느니 유다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거절할 자유까지 허락하시며마음을 열어 당신께 돌아서길 기다리신다그렇게 사랑하신다
 
속는 생각, 속일 생각
 
예수님의 발에 비싼 옥합을 붓는 여인에 분개한 유다가 말했다. “저렇게 한심한 일을 하다니! 이것을 큰돈을 받고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유다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꿈과 야망을 사랑한다. 그 마음이 사랑이었다면,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예수님을 몰라볼 수 없다. 3년 내내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그분의 '능력'을 보면서 "자기 꿈"을 키웠을 것이다. 그렇다 유다는 자기 꿈, 자기 이상을 사랑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조국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유다야,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라고 하신다. 무력하게 말씀하신다. 이 무력한 사랑은 아픈 사랑이다. 가장 큰 사랑이다.
 

예수님, 오늘도 제게 말씀하십니다. 신실아,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천국의 언어로 포장한 저의 마음을 꿰뚫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제 자존심을 세우고, 저의 에고를 드높이는 일을 두고
당신을 사랑하여 하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제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하시면서 저 자신에게 속고 있는 저를 일깨우십니다.
제 꿈과 이상을 사랑하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제 마음을 정조준하여 말씀하십니다.
신실아,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무력하게 온유하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알아보는 순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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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이 네 명!" 4기 동반자 과정 준비하면서 내 마음에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던 말이다. 연구소 선생님 셋이 모두 소장이다. 책임감, 자발성, 내면화된 연구소의 정신까지 모두 소장이다. 그 마음으로 일을 하니, 소장인 내가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게 4기를 개강 준비를 하고, 개강 첫날을 지냈다. 연구소 선생님 셋, 듣고 배우고 연결되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함께 해준 일곱 분의 동반자 선생님들은 선물이다. 오늘이라는 그릇에 담긴 선물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소중히 받고자 한다. 이분들의 지도자 아닌 동반자로 지낼 시간을 참된 지도자이신 그분께 맡긴다. 페이스북에 쓴 글 가져다 놓는다.

 

네 번째, 상처 입은 치유자들

4기 동반자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지도자 과정이라 불렀는데, 한 해 쉬면서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마음의 여정, 영적인 여정에 지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함께 걷는 친구, 동반자죠.

시간과 엄청난 마음의 에너지와 돈을 들여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일곱 분 선생님들이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말과?” 글과 손으로 드러내 주셨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가 소중해서 차마 몇 둘로 정리가 안 됩니다.

각자 상담과 공부로 쉴 틈 없는 연구소 식구 넷은 4기 동반자 선생님들을 동반하기 위해 '기쁨과 설렘의 초긴장' 상태로 두어 달을 보냈습니다. 개강날 지내고 모두 하아~~~ 기쁨과 안도와 설렘의 긴 숨을 내쉬었고, 떡실신의 밤을 보내고, 여독을 푸는 사람들처럼 하루를 보냈고요. 늘 그렇지만, 최고의 수혜자는 동반하는 저희들입니다. 저 자신입니다.

에니어그램 강사로, 영적 여정의 동반자로 구비시켜 드리기 위해 부드러운 채찍과 쓰디쓴 당근을 적절히 드리겠습니다. 강사이며 동반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수련과 여정 잘 동반하겠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수선해야 하는 자아' 때문이 아니라 '끊어진 연결' 때문이니, 서로 연결되고, 나 자신과 연결되어 나를 만드신 분과 연결되는 시간이 되도록 기도하며 함께 걷겠습니다. 치유적이고 아름다운 이 말.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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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새, 새소리는 내게 현존하라는 메시지이고 현존은 다름 아닌 그분을 향한 깨어남이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나.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일도 비슷한 표상이다. 이제 침묵의 새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저 잔에 커피를 내려 마시면 커피 향에 새소리, 그리고 가만하고 착한 아름다운 사람까지 떠오르니... 이건 잔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이다. 

 

저 잔에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나갔다. 새들의 서식지도 아닌데 귀를 사로잡는, 박새로 추정되는 새의 소리이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오래오래 올려다보며 들었다. 한참 듣다 폰카메라를 들어서 촬영을 하고, 그리고도 한참 서서 듣는데도 그 자리에 앉아 긴 노래를 불렀다. 작고, 가만하고 착한 새이다.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독수리가 그리 강한 새가 아니라고 한다. 힘과 권위를 표상하기 때문에 여러 나라와 지도자들이 문장으로 삼는 것이 독수리인데. 실제로 독수리의 울음 소리는 귀엽다고 할 정도로 작은 소리에다 그 멋진 비상 역시 힘찬 날갯짓이 아니라 최대한 바람에 몸을 실어 나는 게으른 방식이라는 것이다. 강한 부리와 발톱 때문에 먹이를 포획하는 데는 빠르지만 제 영역을 지키는 데는 그리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작은 새들이 더 강하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자주 힘과 용기를, 그리고 권력과 용맹함을 혼동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 새를 관찰해보면 오히려 작은 새들이 자신보다 훨씬 큰 상대에게 용기 있게 대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큰 소리와 함께, 깃털을 최대한 부풀리고, 강하게 날갯짓을 함으로써 누가 봐도 더 강해 보이는 적을 뒷걸음치게 만든다. 제비갈매기가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자신의 영역 위로 날아오는 갈매기를 어떻게 내쫓는지 보자(제비갈매기는 갈매기보다 몸집이 작다). 부리로 어찌나 맹렬하게 공격을 하며 달려드는지, 갈매기는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 또 주목할 점은 전혀 화려하지 않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자신의 영역과 새끼를 잘 지켜낸다는 점이다. 반면 멋진 깃털을 뽐내는 수컷은 위험이 닥치면 몸을 숨기기에 바쁘다.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66쪽

 

작고 화려하지 않은 새같은 사람이 있는데, 세상을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라 여겨 도망치고 숨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꿈이 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속일 수 없는 진실인데. 그의 꿈이 그렇게 말한다. 허둥지둥 도망치는 것 같지만,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며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에게 당하고 말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들어주고 당해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빈틈을 찾아내고 적시에, 정확하게 찌르는 힘과 판단력이 있다. 그 힘을 막무가내로 공격적으로 쓰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라도, 행여 대적해야 할 상황이더라도  가만히 공격하여 꽃봉오리 지듯 떨어트린다. 이제 그가 자신의 힘을 믿을 때가 되었다.(꿈의 내용이다) 자신의 가만한 힘을 믿어줄 때가 되었다고 꿈이 말하고 있었다. 꿈에서 깨면서 들었다는 노래의 가사가 이렇다. 저 잔에 커피를 마시고 나가서 만난 새가 오래도록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아마도 이랬던 것 같기도. 

 

나의 은총을 입은 이여 너를 아노라 
너의 마음을 내가 아노라
나의 사랑을 아는 이여 함께 가노라
내가 친히 함께 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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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보름달-그믐달로 여성의 영적 발달을 설명하는 박정은 수녀님의 사려 깊은 수다를 길잡이 삼아 달빛학교라는 이름의 여성 영성 모임을 진행했다. 30대 비혼 청년부터 60대 권사님까지, 삶의 배경과 신앙의 컬러까지 다양한 일곱 명의 여성과 함께했다. 연구소나 상담소의 프로그램에서는 만들어지기 어려운 집단이다. 교회니까, 교회라서 가능한 비균질 집단인 것 같다. 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생애 주기에 따른 일상영성 세미나 인생의 빛 학교중 하나다.

 

6회기라는 짧은 만남으로 대단한 무엇이 손에 잡힐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다양한 분들이 교회 언어를 잠시 내려놓고, 일상의 언어로 여성적 삶을 나누면서 순간이라도 성령의 숨결을 체험한다면 그것으로 족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사려 깊은 수다를 텍스트로 내걸기는 했지만, 책 얘기는 거의 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수다, 사려 깊은 수다였다. 커리큘럼도 미리 확정하지 않고 한 주 지나며 그다음 주제를 고민해서 나누는 식으로 준비했다.

 

마지막 모임은 그간의 여정을 돌아보는 여성, 상징, 리추얼이 주제어였다. 세미나 기간 중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다녀오신 벗님 한 분은 미술사를 전공하신 전문가였다. 달빛학교에서 나누고 떠올린 이야기를 품고 여행을 떠나셨고, 빈 미술관에서 만난 피터 브뤼헐의 깊은 영성적 체험을 안고 돌아오셨다. 그림과 함께 그 체험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드렸고, 기꺼이 나눠주신 나눔과 함께 여성, 영성, 연결을 주제로 한 리추얼로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었다.

 

매시간 먹을 것, 나눌 것이 풍성한 모임이었다. 여성들 모임에서 자발적인 나눔으로 흘러넘치는 생명력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본설정이다. 좋기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세대, 신앙의 컬러, 경험의 차이는 순간순간 긴장의 요인이 되었고,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긴장으로 인해 나는 더욱 낮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이끌게 되었다. 고민 끝에 영적 전통 안의 기도를 일상의 기도로 단순화하여 가르치고 배우면서 마쳤고, 결국 좋았다.

 

작고 실제적인 체험의 신비와 영성은 하찮게 여기는 풍조, 껍데기와 종교적 포장지만 남은 것 같은 제도교회에 대한 기대가 시들해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못난 울 엄마같은 교회를 포기할 수 없는 내 마음 또한 진실이다. 그 마음 사이를 오가며 기도하고 공부하는 중 영성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제도교회와 남성적 신학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면도 있다. 교회는 영성을 담아주는 제도적 그릇이 되고, 영성은 교회의 제도적 측면이 생명력으로 풍성해지도록 보완하며 함께 가야 하는 것으로.

 

달빛학교, 이 체험적이고 여성적인 교회가 내게는 일종의 교회를 향한 희망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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