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를 마친 7월 둘째 주에는 요셉수도원 피정에 가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배나무밭이 드넓은 요셉수도원의 7월 밤은 달빛이 환하고 배나무 잎이 무성하다. 배꽃은 없지만,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시조를 읊게 되는 밤이다. 끝기도를 마치고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이런 풍경이다.

 수도원에 도착하여 안내실 앞에서 순례객을 환대하는 친구들은 멍멍이들이다. 어쩌면 이렇게 순둥순둥 하게 생겼는지... 기도하고 일하는 수사님들을 꼭 닮았다는 생각에 쓰다듬어주고 놀았다. 유독 눈에 띄는 친구 이름이 '성탄이'이다. 등에 이름표를 달고 있다. 

둘째 날 아침기도를 마치고 나왔는데 성탄이가 혼자 놀고 있다. 어이쿠, 반가워서 또 한참을 쓰다듬고 놀았다. 어쩐지 이 녀석 내게는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하다. 뭐랄까, "위로가 필요하면 쓰다듬든지, 말든지" 등을 빌려주는 느낌?

다음 날 산책길에 또 만났다. 눈이 어쩌면 그렇게 순하고 착한지... 성탄이랑 놀다 보면 잠시 후에 나타나는 수사님 한 분이 있는데, 마르코 수사님이다.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가시기도 하고, 밀짚모자에 장화 신고 소시지 공장 쪽으로 걸어 가시기도, 땀 뻘뻘 흘리며 전지 작업을 하시기도 한다. 아, 성탄이는 마르코 수사님 껌딱지였구나!

예수님 상 앞에서 저러고 수도원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성탄이는 트럭 타고 밖으로 나가신 마르코 수사님을 기다리는 거였다!

성탄이와 함께 마르코 수사님을 자꾸 마주치게 되었다. 들어간 첫날에 저녁 기도하고 돌아왔는데 방문 열쇠가 열리지 않았다. 안내 수사님이 오셨는데, 고장으로 확인되자 이걸 고칠 수 있는 분이 따로 있다며  전화를 걸더니 '마르코 수사님'을 찾았다. 금세 달려오셔서는 달그락달그락 몇 번 하셨는데 딸칵 문이 열렸다. 늘 이렇지! 해도 해도 안 되던 것이, 전문가가 와서 터치! 하면 해결된다니까. 조금 억울해 가지고 "저도 그렇게 했는데요..." 하고 안내 수사님도 "거 참, 여태 안 됐는데..." 하니까 마르코 수사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하시며 "성령님이 여신 거예요" 했다. 그리고 통째로 손잡이를 갈아야 하겠다며, 조금 이따 와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셨다. 전에 왔을 때부터 벌써 얼굴은 익히 아는 분이다. 기도 때마다 선창 하시는 노래 잘하는 수사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맥가이버시네! 성탄이가 마르코 수사님 껌딱지인 덕에 4박 5일 지내는 동안 마르코 수사님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되었다.
 
모기 물린 곳이 부풀어 올라서 약을 사러 나가는 길이었다. 해가 아주 뜨거운데 수도원 입구 안쪽에서 수사님 한 분이 전지작업을 하고 계셨다. 열사병 걸리시겠네...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약을 사고 시원한 이온 음료 한 병을 샀다. 들어가는 길에 아직 작업 중이시면 드려야지 했지만, 내가 돌아갔을 때는 다 끝내고 들어가셔야지, 이 더위에... 했는데. 아직도 계시네. "수사님, 이거 드세요" 하고 봤더니 또 마르코 수사님이시다! 어느새 무성했던 풀과 나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저러고 농부이시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어느 새 검은 수도복을 입고 기도를 선창하고 계시니 "기도하고 일하라(Ors et Labora)를 몸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요하게 기도하고 요란할 것 없이 일하는 수도자들의 삶의 리듬이 일으키는 파동이 영혼을 울린다. 할 수 있다면 일상의 수도자로 저렇게 살고 싶다.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는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면서... 아니 뙤약볕의 전지작업이나 문고리를 고치는 일과 그레고리안 선율의 기도가 다르게 들이고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수십 번을 기도하며 걸었던 저 큰 나무 사잇길은 이제 내 마음에 난 길이 되었다.  

4박5일 내가 먹을 식사를 챙겨가야 하고, 가 본 모든 피정집 중에 가장 열악한 곳이다. 수도원 피정을 이끄시는 신부님은 그래서 '사막체험'이라 부르는데. 이제 밥 챙겨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노동 봉사 하시는 분이 고추를 따주시고, 마르코 수사님이 지나가다 자두도 주시고 입맛 돋우는 일이 있다. 불편한 잠자리 견디고 일어나 새벽공기 헤치고 기도하러 걷는 기분도 좋다. 그리스도인에게 편안한 세상이 도래했는데, 부러 불편하고자 사막으로 물러난 분들이 수도원의 아버지들 아닌가. 내 마음에도 사막으로 가는 길이 나면 좋겠다.   

성탄이처럼, 마르코 수사님처럼, 예수님처럼 순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한다. 다짐해서 되는 일이 아닌 줄 알기에... 기도한다. 마르코 수사님과 여러 수사님들,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기도로 이 세상을 지탱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기도 찾아 삼만 리, 수도원 찾아 삼만 리

두어 달쯤 전인가. 연구소 선생님들과 내 꿈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기차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나만 기차역에 남겨진 꿈이었다. 하룻밤을 어딘가에서 보내야 하는데,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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