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넘는 긴 여행을 다녀오려니. 두고 가기 아까운 일상이 아쉽다. 최고의 자연 풍광을 마주할 예정이지만 우리 동네 새와 풀과 나무 친구들이 늘 제일 좋으니까. 바빠서 산책 나갈 시간이 없었는데, 어제는 짐 싸야 하는 시간에 일단 우짜든지 나갔다.  막 피어나려는 개나리 꽃봉우리에 인사를 했다. 돌아오면 만개해 있겠네.

 

아이들 어릴 적에 첫 웃음, 첫 뒤집기 순간, 첫 '엄마' 발화 순간, 첫 걸음마 순간. 얼마나 경이로운 순간이 많았던가. 일하는 시간이 좋았지만, 퇴근하면 뭔가 하나를 했고! 부모님께서 흥분해서 상황을 전하시는데 어쩐지 섭섭하고 아쉽고 그랬었다. 조금은 그런 느낌이다.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나는 개나리를 보지 못하는 게 그때 그 심정으로 아쉽다. 

 

이러고 나는 가서 누구보다 그 순간에 몰입해서 감탄하고 흥분할 위인이니, 걱정은 마시고 가서 미션 수행 잘 하고, 여행 잘 마치고 오기를 빌어주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연원마을의 새와 풀과 나무와 하늘과 공기, 산책길의 개천과 마른 논과 놀이터의 아이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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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을 다녀와야 해서 냉장고를 비우는 쪽으로 끼니를 때우게 된다. 오래된 배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후식으로 먹으려는 JP를 막았다. 나는 "먹어 치운다"는 말이 싫다. 끼니를 "때운다"는 말도 싫다. 냉장고를 비운다는 것은 사실 먹어 치우고, 먹어 치운다는 것은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막았나 보다.) “그거 해줄게!"라고 했다. 며칠 전 JP가 "어머님이 하시던 그 부추 샐러드"라는 말을 했었다. 배를 갈아서 소스를 만들고 영양부추와 찢은 맛살 위에 뿌리는 샐러드이다. 마트에 갔더니 영양부추가 없다. 할 수 없이 그냥 부추 한 묶음을 샀다. 샐러드 한 접시 하고 나니 반이 남는다. 남은 게살, 냉동새우 털어 넣고 전을 부쳤다.
 
엄마 기일에 JP에게 엄마를 떠올리면 어떤 좋은 기억들이 나냐고 물었더니. 갈 때마다 정성스럽게 밥을 해주시던 것이란다.(그래서 내가 굳이, 수고스럽게, 남은 배 하나를 엄마의 샐러드로 심폐 소생하려 했나 보다.) 살림을 놓기 전까지 갈 때마다 정말 정성스럽게 밥을 해주셨다. 메뉴는 거의 비슷했지만, 정성만은 늘 새로웠다. 부추 샐러드, 모양은 비슷한데 엄마의 그 맛은 아니다.  JP는 어머니 그 맛이라고 했다. 처음 우리 집에서 식사할 때 먹고 "맛있네요!" 한 마디 하는 통에 "김서방이 좋아한다"며 이 샐러드가 빠지지 않았었다. 
 
엄마표 샐러드는 추억으로 먹었고, 남은 부추로 만든 전이 더 맛있었다. 시든 배 하나를 잘 먹어 치웠다! 한 끼를 맛있게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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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역국 끓일 때, 산후조리 하는 집처럼 산더미 같이 끓인 후에, 먹고 먹고 또 먹고 하는 게 참 좋던데. 먹다 질리면 거기에 수제비나 라면 넣어서 미역국 수제비, 미역국 라면으로 먹으면 그렇게 맛있던데... 미역국 정말 좋아하는 편. (조금만 정줄 놓았다면) 한 달 내내 남이 해주는 다양한 미역국 먹는 즐거움에 애를 하나 더 낳을 수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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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을 맞아 공인 목사로서의 짐을 벗은 남편과 좋은 아침을 누리고 있다. 렉시오 디비나 티키타카. 공인 목사로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말씀 묵상을 가르치고 나누는 일이었지만, 자연인 JP로서는 말할 것도 없다. 나 역시 가장 잘하고 싶고, 늘 하고 싶은 것이 기도이고, 그중에 "말씀에서 솟아나는 기도"이다. 남편 블로그에 그날의 묵상이 "티키" 올라오면 댓글로 달아 "타카" 한다. 그분의 이끄심을 느낀다. 감사한 아침들이다. 어제의 묵상이다. 사순시기, 마태복음이 새롭게 읽힌다. "과정으로서의 수난"이다. 예수님을 위한 과정뿐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과정인 것이 알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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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마 17:27)
“저들을 공연히 건드릴 것 없으니”(메시지성경)

수난을 향해 한 걸음 씩 나아가시고 예수님이 느껴집니다.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의 준비인가 봅니다. 다시 고난받을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근심합니다. 그 와중입니다. 세금 내는 문제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비시킵니다. (베드로와 자신을 하나로 묶어서 "우리가"라는 주어를 쓰십니다.) 임금의 아들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지만,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저들을 "(우리가 저들을) 공연히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건 내는 것이 낫습니다. 저들이 때리면 맞는 게 낫습니다. 저들이 빼앗아가면 빼앗기는 게 낫습니다.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 (17:22, 메시지성경) 을 공연히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운명의 길에 오른 베드로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제 곧 수난의 때가 오고, 당신의 때가 끝을 향하는 것을 아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비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돈이 없는 베드로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입만 열었는데 꼭 필요한 만큼의 동전을 얻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물고기 잡는 일은 베드로에게 가장 익숙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당하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베드로를 위해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로 체험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두고두고 기억할 것입니다. 이 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결국 그 사람들이 이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손에 넘겨서 죽게 돼. 그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거야. 나와 네가 지고 실패한 것처럼 보일 거야. 세금을 징수하는 그 사람들이 강해 보이지만,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세금 따위는 내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과 관계하기 원치 않는 사람을 공연히 건드릴 필요가 없단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저자세도 고자세도 아닌 정자세로 지킬 것을 지키도록 해. 원하는 것을 줘. 싸우지도 말고, 괜한 올무에 걸려들지도 마. 네가 가장 잘하는 고기 잡는 일 정도의 대가를 치르면, 필요한 기적을 볼 수 있을 거야. 나의 죽음을, 나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 권력자라 해도, 강해 보여도,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

 

마태복음 17:22-27

22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곧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23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거두어들이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여러분의 선생은 성전세를 바치지 않습니까?"
25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바칩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냐? 세상 임금들이 관세나, 주민세를 누구한테서 받아들이느냐? 자기 자녀한테서냐? 아니면, 남들한테서냐?"
26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남들한테서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자녀들은 면제받는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 네가 바다로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서 그 입을 벌려 보아라. 그러면 은전 한 닢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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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돌아가신 엄마의 생신이었다. 우리 나이로 100세 생신이다. 내년은 우리 엄마 탄생 100주년 기념의 해이다. 내일은 엄마의 기일이다. 4년이다. 마침 이때 '그리운 얼굴'을 주제로 기고글을 쓰고 있다. 일주일을 끙끙거리며 눈물을 훔치며 엄마 얘길 또 썼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려움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빨리 쓰고 털고 싶은데, 빨리 잘 쓰기 위해서 엄마를, 그리운 얼굴을 계속 떠올려 마주해야 한다. 도망치고 싶다. 빨리 탈고를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탈고를 위해서는 이 고통에 머물러야 한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도망갈 수는 없고, 그 마음에 머무르자니 헤집어지고 헤집어져 글을 쓸 수 없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도 거의 다 썼다. 엄마 생신, 엄마 기일 사이에 낀 오늘 탈상... 아니, 아니 탈고할 것이다. 글을 쓸 수 있어서, 글 쓸 기회가 주어져서 엄마를 자꾸 새롭게 만난다. 엄마를 새롭게 만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를, 하나님을 새로 만나는 일이다. 

 

노트북 옆 프리지어가 향기로 함께 한다.

밤에는 초도 켠다.

낮으로 밤으로 향기와 빛으로 함께 하는 그분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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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마감 압박도 있고,

줌 강의도 있고,

아침 식사는 호이호이 꿀호떡이었는데,

"아아, 며칠 동안 호텔 조식 먹었는데..."

캄보디아 단기선교 다녀온 사람들의 한 마디에

바로 일어나서 스크램블드 에그와 토마토 구이를 만들었다.

호텔 조식, 캄보디아 호텔 조식과 혼자 싸움.

몹쓸 승부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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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라 불리던 현승이가 대입에 재도전 하여 다시 새내기가 되었다.  첫 학기 시간표가 이렇다고 한다. 이 시간표에 왜 이리 마음에 왈랑거리는지 모르겠다.  물론 현승이가 마음에 들어하니 엄마로서 좋은 것은 기본인데...

 

어렸을 적에 국문과를 꿈꿔본 적이 없었는데 이 시간표, 특히 <국문학개론>과 <현대문학작품읽기> 과목을 보자 못 이룬 꿈을 이룬 느낌으로 마음이 파르르 설렜다. 설렜다는 말이 맞다. 선망이 있었던가 보다. 중고등 시절 내내 꿈꾸던 학과는 영문과였다. 영어 과목이 그렇게 재미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네가 너 자신이 되는 것이, 너로 가장 아름답게 꽃 피우는 것이 엄마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동생을 사랑하는 가장 큰 사랑이고, 인류를 위해 가장 크게 기여하는 일이야"라고 Carl Jung의 가르침으로 멘토링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멘토 없이 좌충우돌 엄마의 딸이고 동생의 누나라는 책임감으로 선택한 20대의 진로와 많은 결핍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것임을 안다. "너 자신이 되는 것이 이웃 사랑, 인류 사랑, 하나님 사랑을 사는 것이다." 라는 명제를 온몸으로 깨우치고 가르치고 있으니, 그런 가정은 불필요한 것이다. 현승이 시간표에 설레는 마음은 기분 좋은 에로스 에너지, "정신실 사롸 있네!" 살아 있다는 신호이다.  

 

우리 현승이 "되어야 할 자기"가 되어

그 누구도 아닌 현승이로 활짝 꽃 피우길...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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