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이 되었다.
어마무시한 교장이다.
무려 '인생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우리 교회 밖에서 일하고 강의하는데 '사모'라 불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듯, 우리 교회에서 강사나 작가로 불리거나 행세할 일이 없다. 그렇더라도 지나치게 분리된 페르소나로 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어서 약간은 붕 뜬 느낌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책 출간을 교회 광고를 통해 알린 것도 최근의 길이다. 『신앙 사춘기』를 읽으신 한 집사님께서 교우들과 책모임을 도모하시고, 마지막 시간 '작가와의 대화'로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참 감사했다. 교회 안팎에서 정확하게 분리된 페르소나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경험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러운 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편하고 좋은 일인가.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여러 강의를 이어 붙여서 '인생의 빛' 학교를 교회에서 해보기로 했다. 내남이 알다시피 글 쓰고 강의하는 주제가 내 인생의 '생애 주기'를 따르는 것이었다. 글을 위한 글을 쓰고, 강의를 위한 강의를 만든 게 아니었다. 살며 마주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쓰고 성찰하고 기도하다 보니 어느새 책이 되고 강의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다. 순서가 그렇다. 그 조각들을 이어 붙여 교회에서 해보라는 남편의 제안을 덥석 수락한 것은 아니지만, 듣자마자 설레긴 했다. 덥석, 수락하지 못한 마음에는 두려움도 염려도 있지만 하기로 했다.

남편과 함께 하는 일이 재미있는 건, MBTI로 NT와 SP가 만나 스파크가 일으키는 짜릿함이다. 직관적 창의성과 논리에 실제적인 것과 재미를 덧붙이며 티키타카 하는 대화가 재미있고. 그러다 '작명'이 되면 뭔가 하나가 눈앞에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고. '인생의 빛 학교'라는 말을 만들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른 되면 행복해질까, 애인 생기면 행복해질까, 취업만 뽀개면 행복해질까, 얼른 아이 키워서 편하게 외식할 때가 되면 삶이 좀 여유로워질까, 애 대학만 합격하면, 취업만 시키면.... 이러면서 결코 다다르지 못하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인생 아닌가. 언제나 막막한 인생길을 성령의 빛에 비추어 살아가자는 뜻의 '인생의 빛'이다. 지금 여기 일상이 천국이 아니면 죽어 눈 뜬 곳이 어떻게 갑자기 천국이 되겠는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고,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이 지옥이다."라는 시에나의 카타리나의 말을 오늘에 잇대어 살아보자는 뜻이다.

소소하게 해보려고 한다. 퀴블로 로스 여사는 우리가 태어난 이유, 인생을 사는 이유 중 하나가 '배움'이라고 한다. 카를 융은 '성장'하여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도 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엡 4:13, 공동번역)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하심까지 성장해가는 것이란다. 죽는 날까지 배우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성장해가야 한다. 인생 학교의 졸업식은 죽음이고, 그 순간까지 잘 성장하여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졸업장, 개근상, 우수상, 최우수상이 아닐까 싶네. '인생의 빛 학교' 소소하게 하면서 교장이며 동시에 '출석번호 1번인 학생'이 되어보려고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든 임보라 목사님을 보내드려야 할 텐데.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어서 쓴다. 지난 토요일 늦은 밤, 뉴스에서 목사님의 부고를 접한 이후 삶의 어느 부분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하루 이틀은 우울과 절망으로 가까이 있는 가족을 힘들게 했고. 애써 눌러보는 마음인데, 보고 싶지 않으면서 보게 되는 온라인상의 뉴스와 애도 글과, 왈가왈부하는 소리들에 마음이 추슬러지질 않는다.  "임보라 목사님!"하고 편지 글도 시작해 봤으나 한 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2인칭으로 쓰기에 너무나도 몸의 연결점이 없다.

 

'언제고 만나겠다' 는 마음이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언제 어느 행사에서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내 주변머리로는 스쳐지나 듯하는 인사가 전부일 것이다. 이제 와...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만남이라도 몸으로 만나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한 것이 아쉽고 아쉽다. 추슬러지지 않는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다. 무고한 분이 최전방에서 혐오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다. 무고하다는 건 뭘까. 더욱 무고한 혐오의 화살을 대신 맞았다고 해야 할까, 같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성수소자와 시대의 약자들 편에 서서 함께 비를 맞은 것이 죄목이 되어 이단으로 지목되었을 때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뉴스로 보면서 숨이 턱 막히는 그 감정 때문에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화면을 껐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이렇듯 무너지는데, 목사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목사님으로 인해서 위로받았던 분들이 어떨까 생각하면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악에 맞서다 악과 닮아가기가 얼마나 쉬운가? 여러 선하고 아름다운 명분 너머 임보라 목사님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는 맑은 얼굴이었다. 기사 내용은 험악한데 거기 실린 당사자의 얼굴은 늘 맑고 선량하니 그 인상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여운이 있었다.  어떤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 것은 대체로 보는 이의 것임을 안다. 투사(projection)다. 내 눈에는 천사인데 누구의 눈에는 사탄이고 이단인 것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과 안타까움이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 미안하고 부끄럽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지만, 그 맑은 얼굴로 짐작되는 존재의 비결을 영상에서 찾았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합니다." 임보라 목사님, 혐오에 혐오로 맞서지 않았구나! 이 노래가 자꾸 입가에 맴돈다.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을 피워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목사님, 당신이 존재로 피워야 할 사랑의 꽃을 다 피우신 것일까. 그립고 아름다운 아버지의 집에서, 차별도 혐오도 없고 정통도 이단도 따로 없는 아버지의 품에서 편히 쉬시길.

 

혐오보다 강한 사랑의 길, 따르겠습니다.

남겨진 자로서 사랑의 몫을 살겠습니다. 

 

흠모하고 있는 13세기 여성 공동체 베긴의 여성들이 떠오른다. 이 급진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동체가 기존의 신학과 잣대로 규명되지 않자, 사제들과 남성 신학자들은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 당한 지도자도 있다. 그들의 탄압에 반응한 어느 무명 베긴의 시이다. 곱씹어 읽어본다. 
  
당신은 말을 하고, 우리는 행동한다.
당신은 분석하고, 우리는 응시한다.
당신은 검열하고, 우리는 선택한다.
당신은 씹고, 우리는 삼킨다.
당신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춘다.
당신은 꽃을 피우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맛을 보고, 우리는 향기를 맡는다.

 

 

여성 교인은 62.5%, '여성 담임 목회자'는 8.5%

[교회와 여성들] 여성 담임 목회자로서의 임보라 목사

www.newsnjoy.or.kr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雪花, 受  (2) 2023.02.19
쿠바 모닝커피  (1) 2023.02.08
편하면 모두 외향형  (2) 2023.02.04
情, 精誠  (0) 2022.12.11
두 신부, 두 강사, 두 목짜  (4) 2022.11.29

 

(어쩐지 올해는 쉬어가는 한 해가 될 것 같지만, 성심성의 껏 발동 걸어봅니다!)

 


| 2023년 내적 여정 동반자 ‘상처 입은 치유자’ 과정에 초대합니다.

|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을 통하여 더 깊은 자기 이해와 영적 훈련을 원하는 분, 공동체의 영적 성장을 돕는 동반자로 훈련되기 원하는 분을 위한 과정입니다.

| ‘상처입은치유자’는 자기 치유와 성장의 여정을 이웃을 위해 선물로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 2023년 4월6일(목) ~ 11월 30일(목) 오후 12시 ~ 3시 30분
   11월 29일(수) ~ 11월30일(목) 1박 2일 마침 피정
✔ 인원 : 7명 (인원 미달 시 폐강될 수 있습니다.)
✔ 대상 : 내적 여정 1단계부터 영성과정까지 수강하신 분
         (지도자과정 종강 이전까지 전 과정 재수강 필수)
✔ 문의, 접수 : 전화로만 받습니다. (010-7242-8624)

| 훈련 내용(과정 중 필요에 따라 변동 있을 수 있습니다.)

- 나의 기쁨 세상의 필요 : 소명의 재확인
- 내어맡김 : 기독교 영성적 관점에서의 에니어그램
- Centering Prayer : 행복추구 시스템으로서의 에니어그램
- 성찰 일기 : 일상영성으로서의 에니어그램
- 상처 입은 치유자 되어가기 : 나의 상처 만나기
- 인간의 얼굴을 가진 유형 : 1, 2, 3, 4, 5, 6, 7, 8, 9유형
- 유형의 소묘 : 그림으로 만나는 에니어그램
- 나를 찾아가는, 나의 이야기 : 날개와 화살
- 성격 장애와 성격유형 사이 : 카렌 호나이 갈등 대응방식
- 같은 유형 다른 빛깔 : 유형의 부속유형
- 다른 유형 같은 빛깔 : 유형의 삼원소
- 주님과 함께 쓰는 인생 이야기 : 영적 자서전 쓰기
- 치유와 회복의 영성 공동체 : 내가 살아야 할 공동체
- 마침 피정
- 독서 나눔과 특강

| 매주 읽기, 쓰기, 기도 과제가 있습니다. (영적 독서, 성찰일기 쓰기, Centering Prayer) 교육일정과 소정의 과정을 통과한 분께는 강사 자격증과 함께 강의에 필요한 ppt 등의 자료를 제공합니다. 과정이 마친 후에는 강의와 개인 영성생활을 위한 지원 공동체로 함께 합니다.

 

 

오늘 모닝커피는 갑자기 쿠바다.
쿠바 원두는 아니지만,
쿠바에 가본 건 아니지만,
가본 사람의 마음이 담긴 잔에 담겼으니
쿠바 커피다.
그들의 몸과 영혼이 주님 안에서 행복하길.

쿠바가 담긴 잔에 커피를 마시니,
한 모금 한 모금에 기도를 담게 된다.

오늘 모닝은 갑자기 커피 기도다.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雪花, 受  (2) 2023.02.19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0) 2023.02.11
편하면 모두 외향형  (2) 2023.02.04
情, 精誠  (0) 2022.12.11
두 신부, 두 강사, 두 목짜  (4) 2022.11.29

아주 시끌벅적한 모임이 있다. 코로나 시작 전에 만났다니까 3년 만인데, 토요일 브런치(이 얼마나 느긋하여 편안한 만남인가!)로 모였다. 달력에 이 약속을 "명일친구"라고 적어 놓은 걸 채윤이가 발견하고 빵 터졌다. “하하하하… 명일… 명일… 명일 친구!” 명일'이 아니라 '친구'에서 터진 거지. 스무 살 차이 친구들. 전에 명일동 살 때 우리 집 거실, 어느 카페, 동네 놀이터 그네... 같은 데서도 시끌벅적 만나곤 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티키타카와 터지는 폭소로 만나는 시간 동안 오디오가 비는 구간이 없다. MBTI 얘기가 나왔는데, 정신 차리고 제대로 보니 나만 외향이고 나머지 셋이 내향이다. 초등 4, 5학년 때 어린이 성가대 지휘 선생님으로 만났고, 얘네들이 지금의 채윤이 나이이던 시절 청년부 목회자의 아내로 다시 만났으니 길게는 30년이다. 알아온 세월이 30년인데, 외향과 내향의 이름을 붙여보니 낯설다. 정말? 너가 내향이라고? "저 여기서만 이래요." "야, 나도 너 네하고 있을 때만 이래.ㅋㅋㅋ"

Carl Jung이 말하는 내향과 외향 개념이 말이 많고 적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물론 외향과 내향이 드러나는 양상 중 하나가 '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냈다. 편안한 곳에 있으면 누구나 말이 많아진다. 누구나 거침없이 자기 얘기를 한다. 심지어 내향형도 그렇다. 얘네들하곤 단톡방도 시끄럽다. 감정도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깔깔 웃었다가 갑자기 울었다가... 전에 한참 단톡이 활발할 때(아, 톡이 아니라 '마이피플'이었구나...ㅎㅎ) 방 이름이 "울고웃고"였다. 중간에 외향 하나가 더 투입되었다. 반주자였던 H는 나랑 딱 10년 차이의 외향-외향, 죽이 너무나도 잘 맞는 지휘자 반주자였는데. 액면가는 외향 다섯이서 토요일 아침 브런치 카페 구석에 앉아 말과 웃음으로 꽉 채우고 나왔다. 결론은.

맛있게 먹으면 무조건 0 칼로리!
편한 사람하고 있으면 무조건 외향형!

그래도 난 찐 외향형인 게, 말하고 웃고 에너지를 '소비함으로 채운' 게 되었다. 가득 주유한 몸과 마음으로 정자역에서 집까지 탄천을 따라 걸어왔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집에 다 왔는데 머리 위가 시끄러워서 고개를 들어보니 까치 다섯 마리가 나무에 앉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너네 친구들이 편하냐? 지금 다들 외향형이구나!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0) 2023.02.11
쿠바 모닝커피  (1) 2023.02.08
情, 精誠  (0) 2022.12.11
두 신부, 두 강사, 두 목짜  (4) 2022.11.29
인기 거품  (0) 2022.10.05

더듬어 보니 결혼하고 연말마다 이 시간을 가졌다. 첫 두 해의 기록은 아마도 당시 교회에서 '1청'이라 불렸던 신혼부부 공동체 카페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가 제안을 하고, 가정별 10대 뉴스를 카페 게시판에 올렸다. 블로그를 더듬어 보니 2002년 기록부터 남아 있다. 현승이가 생기던 해이고, 채윤이가 또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인격을 드러낸 해이다. 그해 10대 뉴스 안에 들어 있었다. 아마 채윤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하루 여행을 다녀온 모양이고, 거기서 둘이 1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게 20년이 되었다. 

 

남편의 목회 형태가 바뀌면서 성탄절부터 연말, 신년 첫 주까지 가만히 머무를 시간이 없어졌다. 특별새벽기도가 끝나는 1월 첫 주일, 그러니까 교회력으로는 주현절 저녁이 우리의 Big Family Day이다. 근사한 외식, 맛있는 케이크 같은 것으로 유혹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모이는 성인 넷의 리추얼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둘에서 셋으로, 셋에서 넷이 되어 지지고 볶는 시간을 기록한 것이  Big Family Day의 역사인데... 2023년은 넷에서 셋이 된다. 현승이가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게 되었다. 셋에서 둘이 될 날도 머지않았고.

 

현승이가 성인이 되었고, 누구보다 행복한 고3으로서 나름대로 치열한 대입의 시간을 보냈다. 채윤이가 더 큰 꿈을 꾸면서 여러 면에서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남편은 현재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편안한 중년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늦게 시작한 공부로 조용히 부대끼며 담을 넘은 자의 고충과 기쁨을 함께 맛보고 있다. 각자 존재의 빛깔이 더 뚜렷해지며 가족의 연대는 느슨해져 간다. 비어 가는 느낌과 아쉬움이 마음 한 켠에 찬바람으로 분다. 누구보다 채윤이가 가족의 내적 외적 변화를 아쉬워라 한다. 오래전 이런 띵언을 남겼던 채윤이다. "아쉬운 것은 아쉬워야지 어떻게 하겠어?" 그래, 아쉬운 것을 아쉬워하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여야지. 무엇보다 지금의 모든 것을 감사하고 누려야지. 둘이든 셋이든 넷이든, 심지어 혼자이든. 지금을 누려야지.

 

호모 아키비스트, 기록하는 인간, 기록하는 가족이 된 것은 잘한 일이다. 

 

 

 

  

땅을 보고 걷는다. 그런 줄 몰랐는데 채윤이가 흉내 내줘서 알았다. 좋은 하늘, 좋은 바람을 누리러 나가서는 고개를 처박고 걷는다. 깨어 있으려 하지만 다시 '생각들'에 잠기면 땅을 보게 된다. 간밤에 꾼 꿈 생각을 하며 걸었다. 나는 또 뭘 그리 포장하고 꾸미고 있는 걸까? 꿈이 건넨 질문에 고심하노라니 땅만 보인다. 고개를 들자! 하고 목에 힘을 딱 주고 바라보니 정자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다. 어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매는 원숭이 마음을 멈추자. 고개 들고 찬 공기를, 발밑의 얼음 조각을, 아이들 소리를, 자동차 소리를 보고 듣고 느끼자. 그러자 아주 가까이에 곤줄박이 한 마리가 땅에 강림하여 삑삑거리고 있다. 아주 아주 가까이서. 이 녀석이 사라지자 머리 위에서 또 삐이삐이... (아마도) 박새 한 마리가 가까이서 혼자 놀이를 하고 있다. 아주 가까이서. 모두 같은 말을 한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라고. 

  

'그리고 또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혹에 넘어와 줌  (0) 2022.12.03
유혹  (0) 2022.11.06
집으로 가는 길  (0) 2022.10.19
마녀의 부엌  (3) 2022.10.03
하늘이 말했다  (0) 2022.08.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