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스티카 수도원 호텔 정원

대학 친구들 중 가장 늦게 결혼했다. 남편과 만나며 결혼을 생각하던 즈음 친구들을 만났다. 육아 전쟁 중인 친구집 거실이 내 연애 얘기로 흥미진진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여러 질문 끝에 "걔가 어디가 좋냐?" 그 흔한 질문이 나왔고. 나는 어째서인지 그런 답을 했다. "가난하게 살고 싶대. 가난하게 사는 게 꿈 이래." 돌아올 반응을 예상치 않았던 건 아닌데, 아직까지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표현으로 치면 "결혼은 현실이다... "처럼 우리 엄마나 이모가 하는 걱정과 다르지 않았지만, 뭔가 다른 단절감, 깊은 외로움 같은 것이 남아 있다. 결혼도 모르고 현실도 모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상 너머의 이상이었다.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가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근본적인 지향 같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이제는 좀 알겠다. 나는, 우리 부부는 어쩌다 수도원 영성에 닿아 순례단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혼란과 울분의 로마 이틀을 보내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남편에게 물었다. 팔당대교 아래에서 강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서 했던 그 말이 생각이 나느냐고. 어떤 의미로 그런 얘길 했느냐고. 얼핏 기억이 나는 것 같다며, 그냥 예수님의 길이 그런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아, 나도 그렇게 알아들었던 것이다. "가난"이란 단어를 "예수님의 길"로 들었다. 한참 후에 읽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말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상향지향적 삶과 햐향지향적 삶 사이의 방향성이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 읽은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의 길을 알려주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하나님의 사랑은 물의 성질과 비슷해서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내적 세계에서는 나의 가장 은밀하고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면 된다. 내적 여정을 동반하는 이 자리에서 원칙처럼 새기고 있는 말씀이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베네딕도회 수도자이고, 이번 순례 여정의 끝자락에 그분이 계시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이 있다. 가슴이 뛰는 이유 중 하나이다. 

 

로마 4대 대성당 중 하나인 성요한 성당(라테란 성당) 건너편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동상이 서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사랑한 성인이다. 그에게 가난보다 더 거룩하고 중요한 것은 없었다.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면 가난과 결혼했다 하여 '가난 부인'이라 부를 정도였다. 가난 그 자체를 사랑했겠는가. 가장 큰 선생님이신, 신랑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프란치스코의 소명을 담은 언표였을 것이다. 평생 가난하게 살고자 했고,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지만 프란치스코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직물 상인이었다. 프란치스코 타고난 매력과 유창한 말솜씨, 세련된 옷차림으로 어렸을 적부터 상인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런 그가 전쟁에 참전하고 하나님을 체험한 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함께 어울려 술 마시고 즐기던 친구들에게서 멀어져 칩거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한센병 환자를 마주하게 되는데, 충동적으로 그를 얼싸안고 입을 맞춘다. 그 입맞춤에서 '단맛'이 느껴졌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가장 낮고 가난한 곳에서 단맛을 느끼는, 스승 예수님을 따르는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무너진 성 다미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중, 또 다른 체험을 한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교회를 다시 세워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문자 그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돈을 가져다 성당을 보수하기 시작한다. 변해버린 아들이 탐탁치 않았던 아버지는 이 일로 아들을 두고 소송을 제기한다. 여기서 저 유명한 "떠남"의 의례가 등장한다. 프란치스코는 그 자리에서 옷을 홀딱 벗어 아버지 발 앞에 두고 말한다. "지금부터 제게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프란치스코를 프란치스코 되게 것은 안락함을 보장하는 세속의 아버지, 부자 아버지의 아들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능력으로 거저 누리는 것들을 떨쳐내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가난이다. 마침내 알아들었을 것이다.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건물의 교회'가 아니라 '체험의 교회'라는 것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무너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는 프란치스코의 방법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서 '가난'이었다. 

Giotto di Bondone, Legend of St Francis 6. Dream of Innocent III, 1295

이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하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당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한센병 환자를 돌봄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프란치스코 주변으로 사람이 모여든다.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급진적 제자도는 늘 이단으로 몰리거나 거부당할 위험을 안게 된다. 제도권의 지지, 공적 인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프란치스코 역시 수도회 회칙을 만들어 교황의 허락을 받고자 한다. 그리하여 교황 이노센트 3세를 만나기 위해 라테란 성당을 찾는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함인지 라테란 대성당 맞은편에는 성당을 바라보면 두 팔을 들고 섰는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꿈 이야기가 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받아보고는 가난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이상적이라 여겨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꿈을 하나 꾸게 되는데, 무너지려는 라테란 대성당을 프란치스코가 홀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 꿈을 꾼 후에 마음을 바꾸어 회칙을 인준한다. 그리하여 가난한 삶을 살고자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탁발수도회, '작은 형제회' 라고도 불리는 프란치스코회 수도회가 설립된다.

 
고개가 빠져라 올려다 보아야 보이는 라테란 대성당이다. 그 크기가 하도 커서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크다 느껴지질 않는다. 맞은편 길 건너에는 그 교회를 바라보면 두 팔을 벌리고 섰는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있다.  그 사이에서 서니 묘한 심정이 된다. 프란치스코 옆에는 함께 했던 11명의 수사들이 지쳐 쓰러져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탁발, 그러니까 빌어 먹으며 여기까지 왔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거지, 가난뱅이, 거룩한 가난뱅이(santo poverello)들이 저 화려한 대성당 밖에 서 있다. 라테란 대성당은 당시 교황청이기도 했다. 돈과 권력의 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교회 앞에 예수님의 꿈, 가난의 꿈을 살고자 하는 수도자들이 서 있다. 성당 내부 천장은 콜롬부스가 발견하고 식민지화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공수해 온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지금도 라테란 성당에 입장하려면 (공항처럼 삼엄하진 않지만)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걸인 행색의 낮고 천한 이들이 드나들만한 곳이 아닌 것 같다. 저 보잘것없는 이들이 수도회를 설립한다니, 회칙 인준은 높은 벽을 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꿈을 동원해 저 가난한 이들의 소명의 길을 도우셨다 생각하니 뭉클해진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즈음,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연출되었다. 노숙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프란치스코 동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보란듯이 그 앞에 눕는다. 사진을 찍으라는 장면이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카메라를 들었고, 같은 생각을 했다. 로마 한복판, 머리와 온몸에 새똥을 뒤집어쓴, 썩 관리도 되지 않는 가난뱅이 성자의 동상 앞에 이보다 어울리는 그림이 있겠는가. 저 남자는 부러 작정하고 퍼포먼스를 해주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800여 년 지난 오늘의 교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돈과 권력으로 크고 화려해진 교회, 깨인 교인이라는 특권의식으로 끼리끼리 뭉쳐 담을 쌓은 교회 주변에 새똥을 뒤집어쓰고, 목마르고 배고픈 영혼들이 쓰러져 있다. 인정받는 다수가 되지 못한 소수자들이 교회 주변에서 방황한다. 혼란의 로마, 울분의 로마에서 오늘 내 조국의 교회를 본다.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섰다. 사람에 떠밀려 박물관을 훑고 나와 목마르고 지친 상태였다. 관람이 아니라 '옆에 두고 밀려서 걷기'였다. 그 많고 진귀한 소장품을 옆에 두고 말이다. 광장에 서니 그래도 숨통이 좀 트였다. 넓은 광장에 마음도 꽤 넓어졌다. 사심이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만나야 할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이 광장을 조성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1598 ~ 1680)이다. 이 광장은 대성당으로부터 두 팔이 뻗어나가 세상을 포용하는 형태이며, 베드로의 상징인 천국의 열쇠의 모양이라고 한다. 물론 그 안에 서서는 결코 조망할 수 없는 장면이긴 하다. 베르니니에 관심이 가는 것은 무엇보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체험을 형상화 한 <성녀 데레사의 법열>이라는 대리석 조각상 때문이다. 사랑의 불화살을 맞아 황홀경에 빠진 성녀의 표정이며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주름 등,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저렇게 섬세하게 조각된 성녀의 표정이 지나치게 관능적이라고 하여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로마까지 가서 이 조각상을 보지 못했지만, 내 평생 다시 로마에 가야 한다면 이 조각상을 영접하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애초 포기했기에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그러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서 제대 한쪽에 있는 베르니니의 무덤을 만난 것은 선물과 같았다. 구석진 곳, 작은 무덤이라 더 좋았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대성당을 바라보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무실 창이 보인다. 삼종기도 하러 나오는 곳이라 뉴스에서 가장 많이 보던 그 곳이다. 맨 윗 칸,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창이다. 잠시 저 창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을 뿐이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이 부럽다. 내게 현시점 존경하는 신앙인을 한 사람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그는 즉위 후 교황명으로 가난을 사랑한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땄다. 이름으로 다 설명되는 그분의 이후 행보이다. 과연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벗'이다. 무엇보다 나는 2014년 방한 시의 여러 일들을 잊을 수 없다. 시복미사를 집전을 위해 광화문으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유민이 아빠를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파파, 파파'를 목놓아 외치던 장면이 있다.  그 영상을 보면서 '파파'에 담긴 피 울음에 같이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교황이 타신 차가 바로 앞에 오자 '파파, 파파'하는 소리는 절규에 가까워졌다. 파파 여기 봐주세요! 여기로 와주세요! (다시 심장이 뛰고 눈물이 차오른다.) 차가 멈춰 서고 교황이 내리고 유민이 아빠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셨다. "파파, 파파" 부르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꼭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소리 같이 들렸다. 2014년 당시 예수님께서 이땅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제일 먼저 세월호 가족의 손을 잡아주지 않으실까, 생각했는데. 유민아빠에게 다가가 손잡아주는 교황의 모습은 내 상상을 실현시킨 장면이었다. 교황을 만난 세월호 유가족들이 참사 이후 처음으로 위로 받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저 으리으리한 성 베드로 성당은 교황 프란치스코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사는 집, 입는 옷... 이전의 관례를 다 깨며 전에 없는 파격적인 교황의 길을 가고 있다. 가난을 사랑한, 빈자의 친구 프란치스코가 천장에 금을 입힌 집에 사는 것은 상상되지 않는 부조화이다. 그럼에도 저분은 부조화 속 조화를 보여주신다. 제도 종교의 수장, 가장 높은 곳에 앉은 교황으로서 가난을 사랑하는 지향을 거두지 않는다. 하나가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갈 수 없는 길일 것이다. 성 베드로 광장에 서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계실 그 방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위를 향하고 동시에 아래로 향하는 영성의 길을 생각한다. 베네딕토가 왔다가 떠났던 로마, 성 프란치스코가 찾았던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가 계시는 지금 여기 로마를 떠나며 통합의 길을 생각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남자와 25년을 살았다. 단 한 번도 돈 걱정 없는 날을 살아보지 못했지만, 절대 가난을 산 적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길과 세상의 길의 방향이 다르다는 감각은 잊지 않았다. 그 감각을 일깨워 아이를 키우고 각자의 진로를 선택하며 여기까지 왔다. 신대원을 마치고 전임 사역자가 되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크고 깨끗한 아파트에 살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우리 형편에 맞지 않는 넓고 더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싫어"라는 내 말(싫어서 싫은 것이 아니라 좋아서 싫은 것이었다)에 보내온 친구의 냉소가 생각난다. 음악조차도 성적으로 줄 세우는 예술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일 년 안식년을 가지기 위해 예고 합격증을 포기했을 때 "아이를 바보로 만들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물리적 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봐도 마음고생이 뻔할 목회지를 선택했을 때 '신앙을 가장한 맹목적 희생, 하나님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라며 애정을 담아 말리던 노(老) 스승님의 말씀도.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하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구나, 싶다. 옳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부름 받았기에, 그 지점에서 부부의 마음이 딱 맞았으니까. 우리에겐 이것이 예수님의 길로 가는 방향이니까. 그렇게 살다 수도원 영성에 끌리고 여기 이 순례 여정에 와 있는 것이다. 가난하게 살고자 하는 꿈이 여기 이 순례 여정까지 이끌었다.
 
25년, 따로 또 같이 인생 순례길을 잘 걷는 우리 부부이다. 그런 부부가, 그런 부부이기에... 로마 이틑 날 밤, 우리는 다퉜다. 다소 격렬하게 말다툼을 했다. 그 다툼 끝에 내 정직한 몸에 발진이 생겼다. 발진은 반가운 '증상'이다. 마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증상이다. 겉으로만 평화, 아니 외적 평화를 가장한 내적 불화의 관계보다 때로 다투고 열을 내는 것이 낫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이기 위한 다툼이었다. 이렇게 혼란과 울분의 로마 이틀을 보내고 우리는 내일 독일로 간다. 독일의 수도원에서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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