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를,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이다. 호텔 창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별다르지 않은, 아무럴 것 없는 풍경이었는데 뭐가 아쉽지? 로마 이틀은 마음의 순례로 치면 일주일이나 보름은 되는 시간이었다. 몬테카시노와 수비아꼬의 설레는 첫 만남 후 찾아온 혼란의 시간이었다. 나는 왜 어쩌다, 왜 이 수도원 순례단원이 되었을까 물어야 했다. 왜 굳이 남편과 함께 왔어야 했나 묻고, 무엇을 기대하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점검해야 했다. 포장지 없는 말이 필요했던 것 같다. 배려하느라 눌러두었던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미안함, 두려움 같은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려놓은 수도원 순례의 그림이 있었고, 늘 그렇듯 미리 그린 그림대로 되는 여행은 없으니까. 순례를 기다리던 몇 개월 동안 한껏 부풀려 놓았던 '꿈'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의 여백은 단지 아쉬움만은 아니다. 텅 빈 충만함이라고 할까? 충만까지는 아니어도 텅 빈 그 상태로도 괜찮은, 잠잠해진 마음이다. Pax, 평화라고 해도 좋겠다. 로마를 떠나며 평화가 왔는데, 이 평화는 깃발을 휘날리며 로마군대가 진군하듯 밀려오지 않았다. 축쳐진 어깨로 터덜터덜 걷는 이에게  다가와 "무슨 일 있어요?" 말 걸어오며 가만히 걸어주는 방식으로 왔다. 엠마오 길을 소망 없이 걷는 사람들 곁에 슬며시 다가가 걷는 갈릴리 사람의 발걸음처럼.
 
독일 순례는 인솔자 없는 여정으로 확정이다.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인솔 신부님은 로마 병원에 남아야 한다. 이에 독일에서 통역 정도로 참여 하려던 가이드가 못 하겠다고 나가 떨어졌단다. 가이드가 급조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괜찮다.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기대와 꿈을 걷어내고 지난 이탈리아 일정을 돌아보니 신부님이나 가이드가 들려준 정보는 다 내 안에 있었다. 노트북에는 대학원 수업 내내 꼼꼼하게 정리한 노트 필기가 있고, 기도와 수도원에 관한 독서 기록이 있다. 검색과 번역기능도 있지 않은가. 같은 내용이라도 평생 수도원 안에서 일하고 기도하며 살았던 신부님의 육성으로 듣는다면 더 좋겠지만, 카사마리와 몬테카시노, 수비아꼬 수도원에서 체험했다. 공간에 담겨 있는 것으로 충분한 기도가 된다는 것을. 많은 설명의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실은 그러려고 비용을 들여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 아닌가. 말 대신 침묵이다. 수도원은 침묵의 공간이다. 앞으로 가는 곳마다 회랑을 걷고, 성당 한 구석에 앉아 성무일도에 참여하면 된다. 기도를 배우러 왔으니 기도하면 된다. Pax가 임한다.
 
안팎의 평화가 연결되어 있고 동전의 양면이긴 하지만, 시간 차가 있다. 마음에 임한 평화가 밖으로 흘러가 화해가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간밤의 충돌로 인해 남편을 대하는 마음이 벌쭘하고 민망하다. 그래서 피차에 서먹하다. 마음으로는 충분히 화해했지만 거리를 두게 된다. 거리 두고 말을 멈추고 있는 시간이 주는 유익이 있다. 한 발 물러서서 낯설게 바라보면 그의 존재가 새로워진다. 사람의 관계도 이렇듯 서로에게서 한 발씩 물러나고, 언어 없이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 아빠스의 권고처럼 '나쁜 말은 물론 좋은 담화도 멈추는 것'이 침묵의 덕을 닦는데 도움이 된다. 독일로 가기 위해 다시 로마 공항으로 가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는 시간, 말 없이 적당히 예의를 갖추며 각자 할 일을 했다. 아니, 내가 일하는 동안 남편은 가만히 곁을 지켜주었다. 글을 하나 써서 보내야 했는데, 이 와중에 글이 써질까 싶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일사천리로 글을 썼다. 이 무슨 쾌거인가!
 

침묵의 덕을 (닦기) 위해 때로는 좋은 담화도 하지 말아야 했다면 하물며 죄의 벌을 (피하기) 위해서 나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좋고, 거룩하고, 건설적인 담화일지라도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완전한 제자들에게 말할 허락을 드물게 줄 것이다. 수도규칙 6장

 
순례단 분위기는 조금 더 무거워진 것 같다. 불안감도 느껴진다. 인솔 신부님, 영적 안내자가 사라진 빈 자리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 "목사님, 목사님" 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출국 수속 마치고 자유시간을 위해 흩어지고자 한다. "목사님, 몇 번 게이트라고요? 아직 안 떴다고요? 어디를 보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 비행기가 무슨 색깔이라고요? 목사님은 왜 팀 스카프를 안 맸어요? 스카프 매세요. 키가 크니 목사님이 매야 잘 보이죠." 젊고 빠릿빠릿한 데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순례단원들에게 주는 위안이 있는 것 같다. 개신교 목사 부부가 왜 수도원 순례단에 오지? (심지어) 신천지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는 분들이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어준 것은 벌써부터이다. "목사님 부부가 계셔서 다행입니다. 다 뜻이 있어서 함께 하셨나 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 로마 공항의 텅 빈 시간 동안 순례단원 사이 마음의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목자를 잃은 양의 마음,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원팀의 소속감이 생겼다.


순례 이틀 째 남편의 생일이었다. 유럽 순례지에서 맞는 생일이니 특별한 축하하고 싶었지만 산 위의 수도원에서 케이크 하나 구하기가 어려웠다. 순례 초반이라 아직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그래도 슬쩍 인솔 신부님에게 정보를 흘렸는데, 저녁 식사 시간 기도 끝에 "오늘이 목사님 귀 빠진 날이랍니다" 라고 하셨다. 그 말에 바로 생일축하 노래 떼창이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목사님, 생일 축하합니다." 감동이었다. 사랑하는 신부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목사님이라니! 남편이 일어나 멋지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여기 와서 여러분들과 얘기 나누다보니 개신교인들에게 상처받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대표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희 교회에 가서 제대로 가르치고 더 잘하겠습니다." 내가 다 고마웠다. 가톨릭 교회를 향해,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함부로 하는 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말을 듣는 분들의 입장에 서보지는 못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지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말들이었다. 개신교인 가족에게 받은 깊은 상처로 말씀을 나누는 중 연실 눈물을 흘리는 자매님이 계셨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럴 때는 '목사'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가 더욱 쓸모가 있다.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사과 같이 느껴졌다. 순례 여정 중 남편의 어떤 성품이 조용히 빛을 발하는 순간을 보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하기를 참 잘한다. 질문에 그치지 않고 가만히 듣는 것도 잘 하고. 좋은 풍경을 두고 사진 찍어주는 것도 좋아하고. 오히려 나보다 더 편하게 순례단에 녹아드는 것 같다. 


내가 주도한 순례이기 때문에 부담을 지고 있었다. 순례단 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 남편이 꼭 보고 싶었던 사도바울 참수터 등에 가지 못한 것이 내 잘못이 아니건만 괜히 미안해져 눈치를 보게 되었었다. 그런 일로 남탓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다. 뭔가 꼭 얻어야지, 배워야지, 기도체험을 해야지, 남편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어야 할 텐데... 잔뜩 힘을 준 채로 혼자 마음으로 북치고 장구 치고 했다. 가만 보니 남편은 갈수록 더 밝아지고 가벼워지고 이 순례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남편에게 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뮌헨 공항에 내렸다. 뮌헨(bei den Mönchen)은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에 의해 건립된 도시이다. 비가 내린다. 기온은 뚝 떨어졌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공항으로 오다 사고가 났단다. 시작부터 뭔가 난항이지만, 수도원의 도시에 와 있는데 뭔들 순례 일정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훨씬 허허로워졌다. 아니, 이제 기대 따위가 없어졌다. 빗속에 성 오틸리엔 수도원(ST. Ottilien)을 방문하고 에탈수도원호텔(Klosterhotel Ettal Ludwig der Bayer)로 가는 길이었다. 독일에서 만난 가이드가 깜짝 선물처럼 이끌어 간 곳은  '오버아머가우(Oberammergau)' 마을이었다.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고간 페스트가 창궐하던 1633년. 이곳 주민들은 전염병으로부터 구해주시길 구하며 수난극 공연을 서약했단다. 그 이듬해 첫 공연이 열렸고,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수난극은 이후로 10년에 한 번씩 열린다. 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지난 2020년 코로나 기간에 열리지 못했다. 두 해를 미뤘지만, 2022년에 마흔두 번째 수난극이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팬데믹 초기, 사상초유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려야 했던 시기에 교인들 사이 혼란이 있었다.  그 즈음 남편이 설교 중에 이 마을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예배를 위해 모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진정한 예배이며 '이웃 사랑'이 되는지 말했던 것 같다. 바로 그 마을에 서자 남편이 기뻐 흥분하였다. 꼭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의 얼굴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탈 수도원(Ettal Abbey)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 - 1945)를 만난 것이다. 젊은 날부터 사랑하던 신학자 본회퍼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치의 폭정에 반대하는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설립과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신학자이자 루터교회 목사이다. 무엇보다 남편과 나를 이어준 분이기도 하다. 청년 시절, 성경공부 그룹의 리더이던 내가 새로운 교재를 설명하면서 "본회퍼가 말하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에 남편 귀가 번쩍 뜨였다고 했다. "아니, 저 누님은 누구시길래?..." (그렇게 종필은 신실에게 빠져들게 되었...) 그런 본회퍼 목사님이다. 수도원 벽에 개신교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니! 가톨릭 수도원 벽에 한국 분당 한 귀퉁이에 사는 순례자 목사가 가장 사랑하는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니! 1940년 즈음 본회퍼가 이곳에 4개월 여 머물렀다고 한다.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를 읽은 수도사들이 배움을 위해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수도원 전통의 영성을 개신교회 안에 살려내고자 새로운 수도회주의의 이상을 꿈을 꾸기도 했었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은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편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목사가 되어 한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는 지금, 특히 지난 7년 동안 남편은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는 말을 새기고 또 새기며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다. 《신도의 공동생활》에 나오는 말이다. 남편은 특수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민주적 교회 운영을 위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 '맡은 일' 이외의 차이가 없는 교회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오며 개신교회가 표방했던 그야말로 '만인제사장주의'의 극한을 실천하는 교회이다. 목회자들의 전횡에 깊이 상처입은 교인들의 주도적인 선택이었다. 남편도 나도 이 모든 이상에 동의하지만, 목사인 남편에게 쉬운 자리는 아니다. 잠재적 독재자, 잠재적 범죄자로서의 목사를 전제로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설교하는 일이란, 목양하는 일이란...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을 때는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꿈꾸는 교회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그 꿈은 대형교회 같은 야망도 아니다. 그의 교회를 향한 꿈이 아름답다 여겨 뒤늦은 신학교 행에 찬성하지 않았던가. 목사에게 상처 입은 이들에게는 목사 개인의 꿈 자체가 위협일 수 있음을 아프게 경험했다. 이제 그의 목회 이상은 '꿈을 내려놓는' 것이 되었다. 힘들 때마다 남편은 젊은 날부터 마음에 새긴 본회퍼의 말을 꺼내 들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의 꿈이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
 
본회퍼가 앉아 기도했을 성당, 걸으며 기도했을 회랑이 있는 이 에탈수도원은 아무래도 김종필 목사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생일선물이다. 꿈을 내려놓기 위해 자기 꿈을 미워해야 했고, 자기 꿈을 미워하기 위해 자기를 혐오하는 어두운 날을 보내야 했던 그를 위해 "여기까지 잘 왔다"라고 등을 토닥여주시는 그분의 손길이다.  "여기서 본회퍼를 만나다니!" 라는 탄성 같은 한 마디에서 남편의 영혼이 살아 춤추는 것이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신부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순례단원들이 자연스럽게 "목사님이 기도해 주세요"라는 요청을 했다. 남편은 여러 번 사양했다. 앞에 나서는 사람도 아닌데다 목사의 이름으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게다가 기도 문화도 다른 가톨릭 신자들 앞에서 기도라니. 나설 위인이 아니다. 남편이 쓴 순례기 일부를 옮겨와 본다.
 

아침 버스에 오르자, 단장님이 억지로 나를 가이드 옆자리, 인솔자 선탑자 자리에 앉혔다. 신부님이 부재하여 단장님이 대신 앉아 있던 자리였는데, 목사인 나라도 거기에 앉으라는 것이다. 그저 한 명의 순례단원이고 싶었는데, 억지로 십자가가 또 지어졌다. 가톨릭 순례단원들은 목자를 잃었다. 나와 내 아내는 그저 그들 주변부에 머문 객들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양들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본회퍼가 에탈 수도사들과 어울리며 기도했을 것을 생각하며, 나도 오늘 하루 그 임무를 받아들여 순명한다. 버스에서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 신자들을 두고 기도했다. 아멘 소리가 낯설지만 은혜가 된다. 목이 멨다. 이렇게 가까운 일인데, 제도는 왜 이렇게 먼 것일까.  _남편의 블로그에서
 

맞다. 이렇게 가까운 일이다. 기도의 형식이 어떻든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하늘 아빠스는 사람이 만든 호칭에 갇히는 분이 아니다. 앞좌석 앉은 김에(마이크 잡은 김에) 방문한 순례지 관련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작고 소박한 교회 일치의 깃발이 나부끼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주어진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에 익숙한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의 자유기도를 신선하게 듣는다. 목회자도 아닌 사람들이 갑자기 시키는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신부님들조차도 자유기도에 익숙치 않아,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확실히 자유기도는 개신교인들이 가진 강점이다. 반면 정해진 기도문에 따라 드리는 가톨릭의 기도 역시 그 나름의 강점이 있다. '기도'라는 미명 하에 '자기 뜻'을 펼치고 '자기 의'를 드러낼 여지가 없다. 순례자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난다. 버스에 올라 하루를 시작할 때 정해진 기도문으로 아침기도를 드린다. 순례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저녁 기도가 있다. 아침 기도 후에 바로 묵주 기도를 드리고, 아픈 신부님을 위한 특별한 묵주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이들의 정해진 기도를 따르는 것이 순례 여정의 중요한 기도이다. 어느 아침, '사제들을 위한 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사제들을 위한 기도>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주님을 본받으려는 사제들을 지켜주시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에 올라 날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축성하는 사제들을
언제나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주소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사제들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사제들이 하는 모든 일에 강복하시어 은총의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저희로 말미암아 세상에서는 그들이 더없는 기쁨과 위안을 얻고
천국에서는 찬란히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문득 신부님들이 부럽다. 이 기도문으로 신자들의 축복 기도를 받는 신부님들이 부럽다.  아니, 이런 기도문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이 부럽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존경할 목자를 가졌다는 것과 함께 말이다. 인간에게는 존경할 대상이 필요하다. 신앙인에게는 하나님 사랑을 매개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의존이 아니라 존경할 목사님, 신부님이 필요하다. 단번에 삶과 신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가르침을 설파하는 초인이 아니라, 비록 당장 그분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렇게 따라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꿈꾸게 되는 그런 선생님 말이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으로 치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성직자주의 또는 사제주의의 양극단을 보는 것 같다. 순례여정을 기획하고 이끌어야 할 신부님이 사라졌고, 여행사도 소속 수도원도 책임있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 하나 없는 단원들에게 놀란다. 개신교인들의 순례였다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옳은 주장들이 난무할 것이다. 여행비 환불 청구가 들어갔을 것이다. 대신 이들은 기도한다. 사제를 위한 기도문으로 기도한다. 말 잘 듣는 착한 초등학생들 같다. 남편이 목회자로 서 있는 자리는 사제주의에 맞서 생긴 개신교회 중에서도 극단에 섰는 교회이다. 공동체와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공예배의 대표기도에서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조차 드물다. 부모의 말이라면 뭐든 어기고 보고, 독재자 아버지는 필요없다는 사춘기 아이들 같다.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 보면서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인으로 자란 자녀같은 신자가 있다면 어떨까. 사제와 목사를 넘어서는 영적 성숙에 이른 사람, 진정한 의미의 '만인제사장주의'를 실현하는 개인이 어딘가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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