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왔다. 공항버스가 익숙한 우리 동네로 들어설 때, 둘이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복잡한 모든 것을 담아 내가 말했다. "긴 꿈을 꾼 것 같다." 상투적이지만 이보다 좋은 표현이 없다. 일상의 풍경에 몸이 담기고 보니 질곡의 12박 13일은 꿈이었나 싶다. 꿈인가 싶지만 꿈이 아니다. 휴대폰 카메라에 수백 장의 사진이 남아 있고, 몸이 감각하고 체험한 것들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 다만 사유와 성찰이 그 체험의 속도를 따르지 못할 뿐이다. 그 속도의 차이 또는 간극으로 인한 고통으로 글이 나오질 않았다. 시차로 인해 일찍 깨어난 새벽마다 글을 쓰곤 했다. 남편과 내가 각자의 노트북을 마주하고 앉아 쓰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로마 이후로 나는 더 나가지 못했다. 고마운 것은 남편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순례일기 쓰기를 완주했다는 것이다. 힘도 들이지 않았다. 그냥 투닥투닥 쓰더니 '일일일포(하루에 하나의 포스팅)'가 되었다. 나는 변비이지만 아침마다 황금색 변을 보는 건강한 아이처럼 글을 낳는 남편 덕에 숨을 쉴 수 있었다. 글은 숨이고 쉼이다. 이제 집에 돌아와 내 자리에 앉았으니 피할 수 없는 내 차례이다. 
 
수도원 순례, 안식월을 보내는 남편과 함께 하는 수도원 순례, 내 생애 가장 큰 '지름'이었다. 한 권의 책을 목표로 하고 글을 시작했다. 수도원 영성이 일상 영성과 다르지 않음을 나는 벌써 느끼고 있었고 그 느낌이 이끄는 더 깊은 갈망으로 오른(또는 지른) 순례였다. "일하고 기도하라"는 모토가 구체적 규범으로 구현된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오늘 여기"의 눈으로 읽어내는 순례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순례 시작부터 기대와 달랐지만 이끄신 그분의 뜻이라 믿으며 이탈리아 순례를 마치고 로마을 경유하다 글이 멈추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네 식구 모여 앉아 남편의 생일축하 촛불을 켜고 끄며 시끌벅적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이제 혼자의 시간이다. 수도원 성물방에서 산 검정색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멍, 검은 초를 가만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읽고 쓰고 기도하는 내 자리에 앉으니 좋다. 살아야 할 내 자리, 계속 써야 할 내 자리이다. 쓰지 않으면 발굴할 수 없는 보석이 일상에 가득하다. 그렇다, 가득하다. 하물며 낯선 나라의 낯선 수도원을 돌며 보낸 짧았던 순례 일상은 오죽하랴. 쓰고 싶고 써야 할 이야기가 부지기수이다. 검은 초를 밝히고 기도한다.
 
주님, 살 자리와 쓸 자리가 분리되지 않게 해주세요. 쓰는 일은 단지 쓰고 마는 일이 아니라 써서 새롭게 간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거기 계시죠? 저 여기 있습니다. 제 일상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순례 여정 무수한 이야기들을 오늘 여기 제 책상에서 글로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몸이 끝낸 순례를 몇 걸음 뒤에서 허둥지둥 따라가는 생각의 길이지만, 포기하지는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살 자리에서 살고 쓸 자리에서 쓰겠습니다. 살 자리와 쓸 자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 꽃자리입니다. 지금 여기를 살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일하고 기도하는(ora et labora) 삶입니다. 물심양면의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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