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해둔 마지막 인사가 있었다.

"엄마, 고마워. 엄마 딸이라서 정말 좋았어."

식상하지만 사무치고 절절한 말이다.

 

마지막 말만 준비된 것이 아니다. 그 인사를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뒀었다. 엄마의 죽음을 오래 준비해왔다. 39년 동안 늘 준비하고 있었다. 어려서는 무의식적으로, 마음공부와 내적 여정을 한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준비했다. 내적 여정으로 치유의 눈을 떠가는 중 오래된 상복을 발견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떨결에 입었던 상복,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입었던 무섭도록 낯선 옷이다. 그것을 내다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의 서랍 깊숙이, 그러나 언제든 쉽게 찾아 꺼내 입을 수 있게 기억하며 간직하고 살았던 것이다. 쾌활함으로 위장한, 당당함으로 감췄던 불안, 가족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이 거기서 기인한 것 같았다. 앎이 즉각적으로 치유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화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상실과 애도 과정에 함께 하면서 엄마만은 잘 보내드려야지, 늘 생각했다.

 

아버지 목회를 도우면서 교우들의 죽음을 돌보던 엄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의 임종을 의연하게 지키고 진두지휘 했던 엄마다. 엄마가 일부러 외워준 것은 아닌데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생각이 난다. '옆에서 울고 그러면 안 된다. 찬송 불러 드려야 한다. 마지막 숨을 넘기는 일은 매우 힘들다. 그때는 물을 한 숟가락 준비하고 있다 한 방울을 입에 넣어 넘기도록 해드리면 수월해진다.' 매뉴얼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축복 속에 고요히 마지막 호흡을 내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엄마의 사랑받은 이들이 모여 찬송 부르는 동안 잠자듯 눈을 감으시는 것을 상상했고 기도했다.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고마워, 엄마 딸이라 좋았어." 이 말 외에 없었다. 

 

"가, 엄마 이제 가, 나는 괜찮으니 이제 가 엄마......"

39년 준비가 무색하다.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엄마 귀에 대고 뱉은 말이. 그것도 절제하지 못한 통곡과 함께. 호흡기도 차고 있었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의식이 또렷하고 다 알아듣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며칠 전 밤에 이 생각이 났다. 엄마의 호흡이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한 번 한 번 호흡을 끌어올리는 일이 힘겨운 고통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혹시 엄마가 나 때문에 그 버티고 있다면 마음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격리된 상태로 외롭게 보내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엄마에게 고통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엄마의 빛나는 영혼이 무너지는 육체 안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엄마와 마지막 통화였다. 엄마와 연결되는 유일한 끈은 전화기에 대고 부르는 찬송이었다. 행여 엄마 귀에 들리지 않을까 큰 소리로 불러야 하는데, 목소리를 크게 낼수록 울음도 함께 커지니 드레스룸 구석에 머리를 파묻고 통곡하며 불렀다. "성령 감화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호흡기에 막힌 엄마 숨소리만 들리는데, 엄마가 너무 힘겨워 보여서 엄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안심시키고 싶었다. 이제 신실이가 다 컸고, 김서방도 있어서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편히 가라고. 하지만 마지막 말이 될 줄을 몰랐다. 

 

엊그제 늦은 밤. 책을 읽고 몇 줄 글을 남기려다 "숨을 거둔 후에도 청각은 한참 더 남아 있대" 하는 말이 생각났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엄중한 사랑의 태도로 임종을 지켜야 하겠느냐, 그런 의미를 담았었다. 우리 엄마는 존경과 사랑에 둘러싸여 속에 마지막 숨을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무엇. 마지막 말이 저거였다고? 엄마가 저걸 들었다고? 저 말을 듣고 끝이었다고?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 씻어낼 수 없는 죄다. 자책감이란 말도 과분한 감정으로 가슴이 다시 죄어드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어떻게 해버려야 할 것 같은, 나를 가만 둘 수 없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동생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동생도 그랬을 것이다. 피차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알기에 각자의 몫을 감당할 뿐, 서로 더 아프게 하면 안 되었다. 참지 못하고 전화했다. "엄마랑 내가 마지막 통화할 때 내가 엄마한테 했던 말 기억하니?" 못 들었길 바랬다. 울음이 전부였기 때문에 못 알아들었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복기해보니 내가 그 말을 할 때 얼른 동생이 말을 가로채고 전화를 끊었었다. 상황을 파악한 동생이 '그때 누나 편하라고 엄마가 찬송 다 듣고 따라 불렀다고 했는데 사실 그때 엄마 의식이 거의 없었다. 찬송도 못 알아듣고 누나 말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데 확인사살과 같았다. 그랬구나. 정말 내가 엄마 귀에 대고 한 마지막 말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되돌릴 방법이 없다. 차분히 찬송 부르고 "엄마 잘 자. 곧 보러 갈게"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입에 발린 말이라도 "사랑해. 또 전화할게" 할 일이지. 비록 몸으로 함께 하진 못했지만 엄마가 늘 말하듯 찬송을 불러드렸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는데. 새롭게 견디기 어려운 밤이었다. "어머님이 당신 마음을 듣지, 말을 들으셨겠냐" 몸부림 하는 나를 끌어안고 남편이 하는 말도 위로되진 않았다. 어떤 늪으로, 죄책감의 구덩이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늪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싶긴한 건가. 

 

하지만 아침이 되니 괜찮아졌다. 밤에 했던 남편의 말을 복기해보면 이해도 되고 수긍도 되었다.  무엇보다 그런 위로의 말이 필요치 않게 말짱하다. 말짱한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엄마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말짱해지는 것이냐. 밤이 와 슬픔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 파도를 부풀리고 부풀려서 그 안에 갇혀버리고 싶다. 그렇게 슬픔에 머무르는 것이 엄마와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엄마를 잊을까 봐, 나조차도 엄마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두려운 건지 모른다. 엄마가 죽었는데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이 잔인하다 했으면서 숲이 연둣빛으로 변하는 것에 다시 설레다니. 그 숲에 안기려 하다니. 일상의 감각을 되찾는 나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어떤 사실을 일부러 지우고, 나를 고통에 빠트릴 것만 붙들려고 한다.

 

사고 나던 날 응급실에서 보고, 바로 요양병원으로 간 엄마를 처음 면회한 날은 2월 24일 내 생일이었다. 생일이라 엄마가 더 보고 싶어 돌아서면 자꾸 눈물이 났다. "면회는 못하겠지만 병원 앞에라도 갔다 올까?" 말해준 남편 덕에 병원에 갔고, 눈물로 엄마 안부를 묻다 면회를 허락받게 되었다. 아직 엄마가 호흡기 달기 전이었다. "엄마, 오늘 내 생일이야. 엄마, 나 낳아줘서 고마워. 잘 키워주서 고마워.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랑 함께 울었다. 얼굴 보고 나눈 마지막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많은 마지막이 있다. 입관식에서 엄마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 말도 있다. 그것도 마지막이다. 사실은 그렇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둘의 차이를 '자기 비하'로 구별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국가, 자유, 이상 등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추상적인 것을 잃은 것에 대한 반응'이 애도라고 했다. 대상의 상실을 자기 비하의 감정 없이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우울증은 극단적인 자기 비하로 상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현상이라고. 정확히 그 밤의 내 태도이다. 하지만 일말의 자기 비하와 죄책감, 후회 없이 애도의 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까? 그때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저 "엄마, 전염병 끝나면 보러 갈게" 하고 말 걸, "우리 딸 보고 싶다" 하면 바로 달려가서 얼굴 보여줄 걸, 더 많이 엄마 얘기 들어줄 걸...... 후회 없이 이 시간을 지날 수 있을까. 떠나보내야 하지만 붙들고 싶기도 한 내 마음을 어쩔 것인가. 프로이트의 통찰이 주는 유익이 있다. 그에 힘입어 애도에 대해 강의도 상담도 했다. 하지만 그리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밤 "엄마, 가!" 이 말이 떠올라 다시 늪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 말이 마지막 말이라고, 그 말만이 마지막 말이라고 내게 우기겠지. 엄마와의 마지막 말은 끝나지 않았다고 믿기도 한다. 요즘 자기 전엔 밤마다 기도를 하거나, 엄마에게 같은 내용을 부탁한다. "엄마, 꿈에 나와줘. 꿈에 나와서 엄마가 지금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 이 말이 엄마와의 마지막 말일 수도 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며 아직 적응 안 된 엄마 없는 날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락가락해도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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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서 안 받는다" 비위가 약한 엄마가 앞에 놓인 음식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하는 말이 그립다. 잃었던 입맛을 찾은 후에는 "입맛이 잽혔다"라고 했다. "입맛이 잽혔다" 끝에 따라붙을 "고맙다, 복 받어라"하는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들어보면 좋겠다.

 

입맛을 잡아오는 음식이 있다. 도다리 쑥국이 입맛을 찾아주진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찾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일단은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도왔다. 통영으로 불러들였다. 한 번 먹어보지도 않은 도다리 쑥국이다. 도다리라는 생선에 여린 쑥을 넣어 맑게 끓인 국이려니. 유명하다는 집을 찾았다. 상상했던 그 맛을 그럭저럭 맛있게 먹었다. 맛집에서 나오면 왈가왈부 맛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가만 걷다 "국물이 따끈했으면 더 맛있었겠다. 국물 온도가 좀 아쉽네." 했더니 남편도 동의했다. "아, 그러네!" 

 

말로 내놓고 나니 몹시, 절실하게 아쉬워졌다. 국물은 온도지! 왜 그랬을까? 사장님의 말과 태도에선 도다리 쑥국에 대한 전문가적 자부심이 넘쳤는데. 따끈한 국물이 정말 필요했는데. 며칠 전 밥을 차려 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끓여준 따뜻한 국물 먹고 싶다." 국도 끓이고 단품 요리도 하면서 잘 먹고 먹이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왔다. 그 욕구와 휴대폰 창에서 본 도다리 쑥국이 마주쳐 손뼉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따끈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 엄마 영안실 안치하고 며칠 동안 먹은 것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따끈한 맑은 국물이었다. 

 

발인예배에 왔던 친척 언니 오빠들, 메시지를 보내주는 친구와 지인들이 한결 같이 "잘 챙겨 먹으라"였다. 살 의욕도, 먹을 의욕도 없지만 그 말들이 마음에 남아 있어 뭐든 먹으려고 했다. "여보, 뭐 먹을래? 뭘 사 올까?" 잔치국수, 콩나물 해장국 같은 걸 사서 국물만 먹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따뜻하고 맑은 국물이었다. 식도나 위 어느 부분에 체망이 걸려 있나? 며칠을 그렇게 국물만 들어갔다. 국물이 아니라 따뜻함을 원했던 거다. 내장을 타고 몸 구석구석에 따뜻함이 스며들었으면. 

 

장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조카 부부가 아이와 함께 집에 와 식사를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다 답을 못하기에 나름대로 식사 준비를 했다. 식사 후 이런저런 얘기, 결국 엄마 얘기를 하는데. "고모, 나 실은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김칫국이 너무 먹고 싶어요. 끓여 보려고 해도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고. 그 맛을 알고 끓일 수 있는 사람은 고모일 것 같은데... 말을 못 했어요." 해서 같이 울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급히 김칫국을 끓여서 담아 보냈다. 다음 날 '바로 이 맛이었다'며 눈물 흥건한 메시지가 왔다. 나도 엄마가 끓여준 따뜻한 국이 먹고 싶었던 거다. 몸과 마음을 데우던 엄마의 국물을 먹고 싶었던 거다.

 

오묘한 연상작용이다. 도다리 쑥국 - 미지근한 국물 - 따끈함을 원했었지 - 따끈한 맑은 국물 - 엄마가 끓인 국 - 엄마만이 줄 수 있은 온기. 온기가 사라진 낯선 엄마 몸이 다시 떠오른다. 식어버린 엄마 몸을 매만지다 마음의 온기를 잃어버렸다. 뱃속이 가슴이 세포 구석구석이 비어 바람이 든다. 국물로 버티던 며칠 동안 집에서도 목도리를 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 추위 때문이라 여겼다. 하루 종일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웬 목도리나고 놀렸다. 통영에서 자던 밤에는 집에 있던 채윤이가 내가 했던 목도리를 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오며 다시 놀렸다. 엄마 몸이 없어졌다는 것은 엄마만의 온기가 사라진 것이구나. 

 

결핍, 비어 있는 느낌, 텅 빈 결핍의 공간에서는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분다. 아버지가 남긴 결핍의 공간에서 불던 찬바람을 맞으며 살아왔다. 찬바람에 마음이 추울 때마다 일기를 썼다. 그 텅 빈 공간을 글로 채웠다. 그렇게 쓰다 쓰다 작가가 되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 그 결핍이 치명적인 부끄러움이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자 살아온 세월인데. 돌아보면 그 세월이 나를 만들었고, 존재하게 했고, 그 세월이 그냥 나다. 엄마가 남긴 또 다른 결핍과 냉기는 다시 내 인생 후반을 이끌어 갈 것이다. 여전히 "다른 사람이 끓여준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그 다른 사람, 그 타자, 그 국물을 끓여낼 유일한 타자, 절대 타자인 엄마가 없으니 허튼 바램으로 슬픈 나를 더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뜻한 국을 끓여 주는 그 사람이 되어어 할 시간이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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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진 2020.04.05 23:29

    몸이 기억하는
    잊혀지질 못할 엄마의 온기...🧡

  2. BlogIcon pratigya 2020.04.06 11:48 신고

    그래도...언니가 잘 드셔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남편이 어디든 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행이라니. 겨우 '삶'의 최소한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행이라니. 어디 가고 싶은 곳 없냐고 또 자꾸 묻는데 역시 가당치도 않은 질문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뭐지? 그런 게 있었나? 느낌이 없어졌는데.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경탄하는 것인데 지금 어떻게 여행이 가능하지? 앞산 진달래가 피어도, 목련이 봉우리를 터트려도, 여린 새순이 돋아나는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꽃이든 낙엽이든 계절 없는 흑백의 시간을 산다고 하는 게 좋겠다. 꽃 사진을 보내오는 벗들이 있어 '아, 그렇구나. 이런 시절이지. 생명이 움트는 때……' 그제야 목련, 개나리가 색을 입고 눈에 들어오는데, "무심도 하다. 엄마가 죽었는데 꽃이 피고 움이 트다니" 하다 이내 다시 흑백 이미지가 된다. 

 

'긴 여행 말고, 아침 일찍 출발해 돌아오는 것으로 통영 갈까? 도다리 쑥국 먹으러 가볼까?'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도다리 쑥국 기사를 보고 툭 나온 말이 1박2일 통영이 되었다. 기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통영도, 바다도, 도다리 쑥국도 그저 흐릿한 흑백사진이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면 자동반응으로 설레곤 한다. 강동 쪽에 오래 살아서 어딘가 떠날 때 지나는 첫 관문이 동서울 톨게이트였다. 딱 그 지점을 지나면 '떠나는구나!' 들뜨곤 했었지.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익숙한 휴게소들 지나는데 덤덤한 내 마음이 슬픔을 일깨우고, 잠시 스치는 슬픔도 싫어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좋고, 설레고, 행복한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의 걱정에 내가 먼저 하는 말인데.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만큼의 시간일까. 

 

도다리 쑥국 정도 상상하고 내려간 통영에서 동백꽃을 만났다. 무계획 여행이라 그야말로 발길 닿는대로 움직이다 어느 공원을 걷는데 동백숲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다. 아, 동백꽃! 걸을 기분이 되었다. "여기 좋다. 좀 걷자." 걸어야 하니까 걷는 것이 아니라 걷고 싶어졌다. 다리에 없던 힘이 들어갔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서 만났다. 흑백이 아니라 컬러다. 아니, 흑백 속 컬러라고 하는 게 더 나을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흑백 속 컬러,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처럼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봉오리들이 색을 입고 마음에 들어왔다. 예쁘다…… …… …… 슬프도록 아름답다. 살아있는 엄마와의 마지막 연결, 전화기로 함께 찬송 부르던 장면을 두고 남편이 '찬란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시간'이라고 표현했었다. 떨어져 뒹구는 동백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찬란한 슬픔이었고, 그 슬픔은 잊었던 심미감을 흔들어 깨우는 강렬한 자극이 되었다. 엄마와 연결되었던 전화기, 아니 카메라를 꺼내 이 각도 저 각도로 담았다. 아름다움이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음악치료는 음악을 선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질성의 원리'는 음악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다. 클라이언트의 정서와 음악 사이 동질성이 있어야 한다. 가라앉은 정서에 사용하는 음악과 흥분된 사람에게 쓰는 음악을 우선 동질성이라는 기준으로 골라야 한다. 우울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다짜고짜 밝고 경쾌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음악치료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모든 치료의 원리일 것이다. '공감'이라고도 한다.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이 내 마음에 공감으로 다가왔다. 동질(同質) 성의 작용이고, 바깥의 풍경과 마음의 풍경이 공명했다. 동네 흔하게 핀 꽃을 볼수록 덤덤해지고 냉담해진 것은 동질성의 원리에서 벗어난 탓이었구나. 나는 이렇게 슬픈데, 꽃천지라니. 이토록 처절한 상실의 시간에도 생명이 움트고 있다니. 자연의 섭리조차도 나를 외면하고 고립시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만 슬퍼하라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기분을 전환하라고 채근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품고 일한다. 내면과 외적 상황의 연결, 나와 너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치유를 일으킨다. 그 어떤 연결보다 슬픔의 연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연대가 가장 치유적이다. "결코 연결되지 않겠다"는 태도로 글쓰기, 꿈집단 첫 시간에 앉았는 이들이 있다. 상처로 피 흘리는 중이라고 나는 읽는다. 몇 회기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은 보통 첫 시간의 그 사람이다. 상처를 발설하고, 내 상처와 마주 앉은 이의 아픔이 공명할 때 존재가 우리를 일깨운다. “아, 연결되어 있었어!” 좋은 얘기, 다 나아져서 이제는 괜찮은 얘기, 은혜로 축복받은 간증만으로는 어렵다. 상처는 존재의 무늬라고 박정은 수녀는 말한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연결은 상처, 실패, 상실을 투명하게 드러낼 때진정한 것이 된다. 사람의 상처와 공명하며 연결된 경험이 많지만,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자연이 동질성을 드러내 주었다. 

 

어제는 4월3일. 동백꽃으로 가슴에 담긴 4.3의 날이다. 4월 3일 저녁엔 한 동네 이 집 저 집에서 동시에 곡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일상을 살던 엄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아들, 딸이 동시에 죽임 당한 날인 것이다. 그 죽음 하나하나 내가 엄마를 잃고 모든 감각을 다 잃은 그런 살아 있는 죽음의 경험일 텐데. 그 죽음에 이름도 제대로 붙여지지 않은 채, 끝나지 않은 애도로 피맺힌 슬픔이 툭툭 떨어지는 날이다. 동백꽃은 내게 4.3의 무고한 죽음들,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들의 죽음이다. 동백꽃은 내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꽃 같은 청춘이다. 작년 1월, 성폭력 상담가 교육을 받는 중 김복동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1926년 생이다. 우리 엄마는 1925년 생이다. 장례식 어간에 인터뷰와 영상들 찾아보며 먹먹한 시간을 보냈다. 그 할머님들의 삶을 마주할 때, 또 돌아가셨단 소식이 들릴 때마다 동백꽃 한 송이 떨어지는 느낌으로 가슴이 내려앉는 것은 우리 엄마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어느 죽음이 안타깝지 않고,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은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말처럼 성별, 얼굴색, 빈부와 학식의 차이, 그 모든 차이가 태양볕 아래 눈처럼 녹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라는 기쁨을 느낀다. 내가 다른 사람과 같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큰 고통과 슬픔은 우리 모두 예외없이 힘없는 존재로 태어나 힘없는 존재로 죽는다는 것을 일깨운다. 가진 것, 이룬 것,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예외 없이 힘없는 존재로 태어나 힘없는 존재로 죽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결속시킨다.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은 '죽음'이다. 통영 어느 공원에 떨어져 나뒹구는 동백꽃은 나와 연결된 수많은 죽음, 아버지와 아버님, 엄마와 김복동, 김학순 할머님, 4월 진도 앞바다의 아이들, 제주도의 이름은 모르지만 하나하나 특별하고 고유한 죽음에 연결시켰다. 슬프지만 슬픔 속에 깊은 연결이 어떤 말로도 만져지지 않았던 마음을 만져주었다. 

 

집으로 올라오기 직전 한산도를 바라보며 바닷가 벤치에 앉았다. 한결 기운이 났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가 아름답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고마웠다. 동백꽃이 공감해준 덕이다. 집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 "여보, 나는 우리집 거실과 안방 침대가 무서워. 거기서 견뎌야 할 시간이 두려워. 그럼에도 거기서 견뎌야 할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아. 피할 수 없다는 것,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렇게 말하니 다시 마음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이젠 자꾸 밖으로 나와. 이제 다른 시간도 필요해." 절대시간은 남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떤 감각이 되살아났다. 마침 앞산에 연둣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서서히 다가오는 생명의 기운이 위협적이지 않고, 고맙고, 아름답다. 6시, 클래식 FM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간, '데니 보이'가 흘러나왔고 오랜만에 음악에 귀가 열렸다. 넘어가는 해가 남긴 한 조각 아쉬움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생명의 기운을 수줍게 머금은 나무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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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장례식 이틀 후, 동생 가족과 만나 얘기 나누는 중. 회의주의자 동생이 "결국 천국에 대한 믿음이 또렷해지지 않을까"라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 말 끝에 "천국? 나는 천국이 믿어지지 않아."라고 내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가 통곡을 되었다. 예상치 못했지만 내 속에서 나온 말이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진실이다.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훨훨 타는 화장장 불에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된 엄마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 엄마 몸이 그렇게 내 눈 앞에서 사라졌는데 다시 살아난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천국? 그런 허튼 희망을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말고, 특히 위로의 말로 건네지도 마시라. 당신 엄마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 좋은 곳에 갔다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당신 엄마 죽음 앞에서 그 말 그대로 해보시라.

 

진공상태의 경험은 없다. 트라우마로 남은 아버지 죽음의 경험이 아버님과의 이별을 다르게 경험하게 했고, 그로 인해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아버지를 황망히 빼앗기고 보낸 세월과 달랐다. 두려움이나 슬픔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다시 만날 확실한 소망으로 엄마에게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고마웠어! 곧 만나!" 특히 '곧 다시 만날 것'에 대한 믿음이 견고 해지는 나날이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지진으로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의 한 면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평생 여진의 두려움에 붙들려 살던 내 인생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입에 올리지도 말고, 죽음이나 죽음을 상상하게 하는 아프고 어두운 생각은 떠올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한 생각만 하자, 고통의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자! 오래 붙들었던 무의식적인 신념을 마주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남편도 비슷한 길 위에 섰을 것이다. 아버지,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어찌 전과 같은 삶을 살며 예전 같이 신앙하고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즈음 남편의 설교 제목이기도 했던 "죽음을 짊어진 삶"은 이때로부터 나를 이끄는 한 문장이 되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책 제목처럼  죽음을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브레넌 매닝의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는 말도 조금 알아들어졌다. 오늘 여기를 산다는 것이 현존하는 부활을 믿는 믿음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죽음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present is preset'이 된다는 것도. 실제로 아버님의 죽음으로 남편은 새로운 길을 갈 용기를 얻었다. 떠나야 할 곳을 떠나기로 결단할 수 있게 되었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남편의 결정적인 진로를 열거나 닫는 것은 모두 가까이 일어나는 죽음이었다. 융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치유의 다른 이름은 성장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치유자가 되는 내적 성장을 멈추지 말아야 함 또한 깊이 새기고 있다. 멈추지 않아야 할 성장의 정점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인생 두 아버지가 인생의 오후 시간에 접어든 내게 따스하게 가르쳐주셨다.

 

이랬던 내 입에서 부활이나 천국 같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 함께 앉았던 가족들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말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어지는 삶이었다. 죽음 이후의 삶이란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고통, 몸이 사라진 엄마의 '현재'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캄캄한 구멍 속에 빠져 있는 느낌. "우리 엄마 지금 어딨지? 엄마, 엄마 엄마 어딨어?" 몸과 함께 엄마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 구멍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까만 창 앞에 하염없이 서 있는 순간도 있었다. 엄마와 행복했던 과거는 그리움으로 고통스럽고, 사라진 엄마가 그려지지 않아 고통스럽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과 웃고, 얘기하고, 남편과 걷는 오늘의 기쁨은 미래 어느 순간의 상실의 고통이 될까 하여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맞다. 쓰는 지금은, 아니 이 며칠은 그 어둔 구덩이 속 느낌은 아니다. (쓰다 보니 알게 된 것, 쓰다 보니 알게 되는 것!)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신념이나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신앙을 부정하는 것도, 믿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동도 아니었다. 감정의 표현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내 앞에서 천국 운운하며 허튼 위로할 생각 하지 마!"라는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하관예배의 설교가 상처가 되었다. 신뢰하는 목사님이고, 좋은 설교였다. 참석한 친구는 "설교가 참 좋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힘들었다. 엄마를 땅에 묻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말씀을 듣기가 힘들었다. 빈소 없는 이상한 장례식을 치른 이틀을 지나며 몸과 마음에 남은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자꾸 주저앉으려 했다. 다른 힘듦이었다는 것은 쓰다 보니 알겠다.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들을까 먼저 방어막 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찬송을 부르면 걷던 길. 어느 어른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혼자 울며 걷던 길, 아버지 친구가 했던 그 말을 누군가 다시 할까 봐. "울지 마라. 너희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냐?" 누군가 신앙의 이름으로 허튼 위로를 건네 올까 봐 금기어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정말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그 말로 인해 빼앗긴 나날, 감정은 죄 나쁜 것이라 여겨 내 감정을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며 살아온 나날,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닿는 유일한 길이라 여겨 종교적 행위 모든 것을 대체하며 살아온 나날을 보상할 자신이 있으면 한 번 지껄여 보라 하고 싶었다.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 친구 목사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아버지 친구 목사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차라리 가만히 안아주시지요. 따스한 눈길로 가만히 바라봐 주시는 게 좋았어요."

 

캐시 피터슨의 『애도 수업』에서 위로와 격려로 건넸지만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대놓고 정리했다. 그 첫 번째 말이 "그는 더 좋은 곳에 있어", 두 번째는 "그는 더 좋은 곳에서 더 잘 지낼 거야"이다. 이 좋은 말이 왜 상처가 되는지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모르겠는 분, 아직 엄마나 아버지를 잃어보지 않은 분이라면 내 이 마음을 읽어 보시라. 쓰면서 알게 된 내 마음에 귀 기울여줘 보시라.

 

믿음의 문제라면 그 부활을 믿는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두 아버지 죽음의 상실을 짊어지고 처절하게 배운 믿음이다. 부활보다 먼저 나는 죽음을 믿는다. 확신한다. 죽음을 믿는 만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그러니 저의 불신앙을 걱정하진 않으셔도 된다. 건강도 괜찮다. 잘 먹고 잘 웃는다. 잠도 곧 잘 자게 될 것이다. 

 

나는 믿는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들의 연결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드는 오만불손한 내 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우리 엄마, 한솔이, 박광혜 권사님, 구은회 장로님의

몸, 그 몸들이 다시 사는 것과,

나의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4 02:11 신고

    빼앗겼던 들에 찾아온 봄을 같이 기뻐합니다~~

 

소설가 이승우의 말처럼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다. 편집된 과거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세월이 만드는 거리는 그때 그 사건을 달리 보게 한다. 엄마 죽음이 불러낸 아버님의 죽음은 다시 개정판이 되었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 격리된 몸이었다는 것이 떨쳐지지 않는 고통이다. 아버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다시 떠올리니 얼마나 축복된 시간이었던가 싶다. 1주기 즈음 쓴 글이 있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에 실었던 '아버님의 소주잔'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아버님과 함께 한 시간이 오늘도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구나 싶다. 아버님의 소주잔은 내 마음에 살아 내 종교적 독선에 찬물을 끼얹어 일깨우고 있다. 채윤이와 현승이가 이렇게 잘 큰 것은 착한 할아버지 덕분이다. 아이를 키우며, 내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의 헌신이었다. 오늘 내 일상에 아버님의 삶이, 그렇다 '삶'이다. '죽음'이 아니고. 종말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계신다. 어제 쓴 글과 겹치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나름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잘라내고 오려붙이고 확대하고 축소하며 반복되는 기억, 편집된 과거를 한 번 더 읽어주시길. 

 

 

아버님의 소주잔

설거지를 하려고보니 그릇 사이로 소주잔 하나가 뒹굴고 있다. 배시시 웃음이 샌다. 큰 녀석이 그릇장 안쪽에 있던 걸 꺼내서 물 컵으로 사용하고 휙 던져 놓은 것일 터이다.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의 집에 웬 소주잔? 이것은 정통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인 며느리가 단 한 분, 시아버님을 위해서 마련한 아버님 전용 소주잔이다.

나는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대학(그것도 걸걸한 여대)도 다니고 사회생활도 했기 때문에 술자리, 술 문화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에서의 음주행위는 상상도 못하고 자랐다. 신혼 초에 시댁에서 잔치가 있어서 처음으로 설거지 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설거지 그릇 중에 소주잔이 여러 개 있었는데 살짝 손이 떨리는 거였다. ‘아, 내가 술잔 설거지를 하다니. 우리 엄마 알면 뭐라 하실까?’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문화충격이었다.

겉으로는 ‘술도 같이 한 잔 안 마셔주는 아들 소용없다’며 호기로우셨지만 아버님도 늘 아들 며느리 눈치를 보셨다. 착하고 소심하신 아버님은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가서 한 잔 생각이 나셔도 냉큼 주문을 하지 못하셨다. 어느 날 부턴가 식당에 가면 쭈뼛거리시는 아버님에 앞서 내가 먼저 소주 한 병 주문을 했다. 착하고 소심한 아버님의 약주사랑이 참 곱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평소 말이 없으신 분이 약주 한 잔 하시면 유쾌해지시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뿐 아니라 아버님 생신을 우리 집에서 차려야 하는 날에 장을 보면서 과감하게 소주 몇 병을 카트에 담았다. 상을 받으시고 뭔가 허전하다 싶으셨던 그 순간에 냉장고에서 나온 초록색 병에 ‘아니, 이걸 샀어?’ 하면서 좋아하시던 아버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집에 소주잔이 없어서 머그컵에 소주를 따라 드셨고, 그 이후 언젠가 아버님만을 위한 소주잔을 갖춰 놓게 되었다.

그 힘들다는 ‘워킹 맘으로 두 아이 양육하기’가 아버님의 도움으로 참 수월하였다. 아이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여성보다 더 섬세하고 살뜰하게 보살피시는 아버님으로 인해 남보다 수월하게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느 정도 독립이 되었을 때도 필요할 땐 언제든 집으로 오셔서 유치원 마친 아이를 받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집에 오셔서 방과 후의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기간이 있었다. 막내아들이 늦깎이 목회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일을 하고 밤에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검정 비닐봉지로 꽁꽁 싸인 병이 하나 들어 있다. 낮 시간에 아이들과 떡볶이 간식 사다 드시며 한 잔 걸치시고 남은 막걸리였다. 행여 목회자 아들 집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가 누가 될까봐 어찌나 꽁꽁 싸매두셨는지…….

무엇을 드셔도 척척 소화시키신다고 자랑이시던 아버님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50여일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가신 지 1년이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시기에는, 남은 우리들이 떠나 보내드릴 준비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당황해하며 혼란스러워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니셨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살가운 표현 한 번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믿음 좋은 아내와 자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신다는 식으로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는 빠지지 않으셨다. 교회 일에 열심인 어머님을 향해 ‘내가 수염 영감탱이 예수한테 마누라를 뺏겼어. 아니 영감탱이가 아니지’ 하셨다. 늦게 신학교에 가서 열정을 다해 공부하는 아들이 좋은 성적에 장학금을 받아오자 못내 아쉽다는 듯 ‘이제라도 그 머리로 공무원 시험 봐라’시며 먹고 살 걱정을 하시기도 하였다.

그런 아버님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함께한 마지막 50일 동안 내가 한 짓이 무엇이었던가. 믿음 없는 아버님이 입술로 고백하시도록 해야 한다며 속으로 얼마나 안달복달 했던지. 맘먹고 사영리를 들고 아버님과 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서는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막내며느리가 제격이라며 서둘러라하는 사랑어린 재촉도 있었다. 새벽기도에 가면 내 불안에 겨워 ‘이 땅을 떠나시는 아버님이 당신의 품에 눈뜨게 해달라’며 빗물 같은 눈물을 쏟아내곤 하였다. 설상가상 아버님께서는 심방오신 분들과 예배드리는 걸 거부하셨다. 마지막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병문안을 오셨다. 간단히 예배드리려 하는데 고개를 돌리신다. 싫어하시는 것이 역력한데 그 자리에 계시도록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버님, 한 바퀴 돌까요?’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기도하시는 분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한편으론 불안의 솜방망질이던지. 믿음, 구원, 믿음, 입으로 시인, 구원.... 아, 혼란스럽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만큼 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버님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우연인지 (그 분이 계획하신 필연인지) 연거푸 세 번 씩이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미 의식을 많이 잃으신 아버님께서는 그저 모든 것을 보호자의 판단에 내어맡기고 누워계실 뿐이었다. 마지막 예배는 막내아들이 함께 한 자리였고 예배를 마치고 찬양 한 번 더 부르자는 목사님의 제안이 있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 오셨네’를 부르는 중 ‘예수 안에 생명 있네.’ 후렴을 부르는 순간 우리 착한 아버님 가만히 이 세상을 붙들었던 손을 가만히 손을 놓고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것처럼 이 땅에서의 마지막 50일 동안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큰 육체적 고통도 없이 그렇게 지내시다 하늘 그 곳으로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의 마지막 50일은 한 없이 고요하였는데, 내 마음은 양철지붕에 소나기 떨어지듯 요란했다. 그 요란한 양철지붕 아래에는 ‘나는 믿음이 있고, 아버님은 믿음이 없다’는 일말의 의문도 없는 전제가 숨어있다. 도대체 그 근거 없는 판단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아버님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일하는 엄마’ 였던 내게 든든한 기댈 언덕이셨던 아버님께서 떠나신 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돌봐주시던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돌볼 만큼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아버님께서 내게 무엇보다 큰 숙제와 더불어 엄청난 선물을 남기고 가신 탓이다.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한 마디를 마음 깊은 곳에 넣어주시고 가신 탓이다. 마지막 50일 ‘아버님 믿음의 고백, 입술의 고백....’ 이러면서 안달복달 하던 내 마음의 깊은 동기가 진정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는지, 믿음의 기도였는지를 처음부터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의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하는 영원의 원점 같은 곳으로 돌아와 섰다.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하던 기간과 신종플루 걸렸던 주간 외에는 주일에 빠져본 적이 없다?(이걸 가지고 주일 성수했다며....), 청년 때부터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교회봉사를 했다? 미운 사람이 생겨도 ‘하나님,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예수님 코스프레를 좀 하고 산다? 그런 것들에 근거한 ‘나는 믿음 있는 사람’ 라는 확신에 겨워 살아온 날들에 씌운 거품을 비로소 확인한다.

소주잔을 보면 한 잔 하신 아버님께서 흥에 겨워 부르시던 뽕짝 멜로디가 생각난다. 또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라 하시며 부르시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소심하게 흥얼거리시던 허밍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지막 50일을 걱정 대신 사랑으로 더 잘 떠나 보내드릴 걸’ 하는 후회 같은 건 넣어두려 한다. 터무니없는 ‘자기의’의 발로로 발을 동동 구르며 보냈을지언정 아버님과 하늘 아버지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 같은 사랑의 교제가 있었을 터이니. 또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 없음에 관한 걱정이랑 집어치우고, 과대 포장된 내 믿음의 자가 평가서나 돌아볼 일이다. 다만, ‘거기서 해처럼 밝게 빛나실’ 아버님이 오늘 더욱 그리운 것이다. 소주잔을 닦다 그 투명한 유리에 어른거리는 아버님의 모습이, 생색내지 않으셔서 더 따스했던 그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입으로는 ‘하늘소망’을 그럴 듯하게 노래하면서도 마음으론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천국이다. 이 땅에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손주의 작은 손을 놓자마자, 바로 그 순간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생각하니 천국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우리네 삶과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 곳인지. 아버님과 함께 한 13년 동안 내가 필요한 것을 그렇게 주시기만 하시더니 떠나시면서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두고 가셨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소주잔에 남겨두신 사랑과 선물이 어른거린다.

 

 

 

 

 

2011년 고난주간을 지나던 어느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가벼운 증상으로 입원하셨던 아버님이 위암 선고를 받으셨다. 60대, 아니 50대 같은 70대 아버님이었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을 처음 경험한 날이다.  처음 병원에선 6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했지만, 2개월이라고 하더니 50일이 되지 않아 6월 7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50일은 그렇게 건강하셨던 아버님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도 짧은 시간이었다. 죽음은 늘 그렇게 예고 없이 우리를 덮친다. 아버님의 병든 몸에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너무 짧은 봄이었다. 하지만 그 짧았던 봄은 내게 기나긴 여운을 남기며 소위 '부활 신앙'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비로소(그렇다, '비로소'다) '부활 신앙'을 실존적으로 믿게 되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이 구절을 전율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믿어졌다. 천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백지 한 장 너머에 아버님 계신 천국이 실재하는 것 같았다. 반짝, 하고 마는 믿음이 아니었다. 더는 신학적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었다. 이생의 짐이 버거워 그려보는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실체였다. 부활과 천국이 관념이 된 것은 일찍이 재난처럼 닥친  아버지 죽음의 경험이었다. 목사 아버지의 죽음이 천국의 관념을 심어주었고, 관념에 붙들려 분열의 일상을 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음 없는 시아버지의 죽음은 '몸'의 부활을 일깨웠다.   

 

아버님과 함께 한 마지막 50일, 아버님 몸과 함께 하였다. 학교 숙제, 피아노 연습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지만 거의 매일 저녁, 모든 것을 멈추고 아이들과 함께 아버님께 갔다. 고작 가서 멍하니 텔레비전보다 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무작정 갔다. 원래 말씀이 없으시지만 더욱 조용해지신 아버님, 가까스로 농담이라도 한 마디 하시면 가슴에 금이 가곤 했다. 주방 구석으로 가 숨죽이고 울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시기 전날에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두둑이 주셨다. '고맙습니다' 늘 하던 말 외에 할 수 없는 아이들, '그래' 하시는 아버님. 아무렇지 않아서 더 특별한 고통이었다. 설마 이것이 마지막일까? 마지막 용돈일까? 설마 그럴 수 있을까? 스치듯 생각했지만 마지막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셔서는 더 빠르게 멀어져 가셨다.

 

세월이 지나야 보이는 것이 있다. 돌아보면 그 50일,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의연했었다. 겨우 예배를 가 주는 정도로 신앙생활 하셨던 아버님의 '구원의 확신'에 안달복달했고, 내내 눈물로 보낸 50일이지만 꽤 어른스러웠다. 회피하지 않았다. 야위어 가는, 두려움에 더욱 긴장되어가는 아버님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고 마음에 담았다. 한 달 남았다는 진단 후에는 손발 오그라드는, 웬만해서는 누구한테도 할 수 없는 표현을 담아 메시지를 드렸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그 문자를 확인조차 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수줍음이 많은 아버님께서는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으셨다. 특히, 그 50여 일은 거의 입을 떼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님께 평생 '사랑한다'는 고백을 제일 많이 들은 사람은 채윤이와 현승이다. 그 다음은 나다. 비록 문자였지만 생애 마지막 시간에 남겨주신 말씀이다. '사랑한다 둘째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등극시켜주셨고, '둘째 딸아, 둘째 딸아' 하고 불러주셨다. 

 

아버님과 떠나시기 며칠 전, 오후 내내 아버님 곁을 지킬 시간이 있었다. 전날 채윤이가 "할아버지 손톱이 너무 길어요" 했던 말이 생각 나 손톱깎기를 챙겨갔다. 손톱 발톱을 깎아드리고, 손을 꼭 잡아 드리고, 쓰다듬어 드렸다. 죽음 같은 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 찢어지는 슬픔에도 피하지 않았다. 어려웠던 시아버님이었다. 수줍음이 많으셔서 더 조심스러웠다. 어쩐지 하나도 어려운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그날 집에 와 긴 글을 썼었다. "아버지다, 내 인생 두 번째 아버지다." 첫 아버지를 죽음에게 뺏길 때는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렇게 당한 재난으로 평생 구멍 난 마음으로 살았지만, 두 번째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후 강의하러 나가려는 순간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 울음에 묻힌 격앙된 목소리의 남편 전화를 받았다. "어서 와, 빨리 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대로 달려가 꼬옥 감은 아버님의 눈을, 아직 온기가 남은 아버님의 손을 매만지고 붙들었다.  

 

평생 그렇게 두려워 했던 죽음을 어떻게 그렇게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아닌 착한 아버님, 우리 아이들을 살뜰히 키워주신 것에 대한 사무치는 고마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암 선고받으시던 날, 병원 바닥을 뒹굴며 "아빠, 아빠" 하며 울던 시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채윤, 현승이의 '낮의 엄마'인 할아버지인데, 아이들이 느낄 상실감을 어떻게 만져줘야 할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평생 아버지와 살갑게 지내지 못한 남편이 진 죄책감의 짐이 가여워서 나라도 잘해야겠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즈음 나는 '신앙 사춘기' 어두운 숲에 있었다. 정점을 지나 일말의 빛을 감지하고 있었던 때다. 어릴 적 아버지 이미지와 혼재된 하나님, 그리운 아버지인 듯 무서운 심판자인 듯한 하나님 이미지를 버리고 새로운 관계에 돌입하는 중이었다. 아버지 죽음이 남긴 상실감의 공간을 채우던 종교 중독을 알아채고 멈추는 중이었다.

 

위로부터의 영성에서 벗어나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걸음마 하듯 배우는 여정에 있었다. 신앙의 이름으로 초월하고 회피했던 인생의 어두운 면들을 비로소 마주하는 힘이 조금 생겼을 때, 그때 아버님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암 선고는 아버지 죽음처럼 예고 없이 닥쳤지만, 시간이 주어졌다. 6개월 남았습니다, 아니 2개월 입니다, 한 달입니다. 6개월 예상이 결국 50일이 되었지만 아버지 죽음과 견주면 예행연습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50일, 허튼 부활 신앙 같은 것으로 도망치지 않고 오직 아버님의 몸을 마주했다. 교회에서 심방 오신 분들이 싫다 하시면 휠체어를 밀고 피하게 해 드렸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만만치 않았다. 마음의 전쟁은 끝이 없었지만 적어도 아버님의 몸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아버님을 보내드린 후 부활의 소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천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 소망으로 아버지 죽음 또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아버지를 뺏어간 하나님도 화해했다.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를 아버님 죽음으로 세심하게 치유해주시는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하늘 아버지와 두루 편안해졌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사라졌다고 존재가 사라질 수는 없다. 불가능이다. 아버님은 몸 그 이상이었다. 암 환자의 몸으로 사신 세월은 짧다. 아주 오랜 시간 힘세고, 건강하시며, 좋은 손재주로 뭐든 고쳐주시고, 닭백숙도 잘 끓이셨다. 그런 몸이었다. 몸이 쇠약해졌다고 아버님의 존재가 어찌 되지는 않았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님은 존재하셔야 마땅하다. 교리에 매여 아버님의 구원을 운운하던 50여 일이 부끄럽고, 부끄러울수록 아버님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 깊이 믿어진다. 아버님이 남기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2 00:14 신고

    그 선물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한 우리 언니...

죽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죽음을 토대로 삶을 구축했는데 모를 수가 있겠는가. 태어나보니 목사의 딸이었다. 구원, 십자가, 천국, 부활 같은 교리를 엄마 젖과 함께 받아먹었다. '죽음'은 그런 단어로만 해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밖에는 해석할 수 없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목사인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죽음=부활=천국'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바로 '천국'으로 승화되었다.

 

이 세상을 일찍 떠난 사랑하는 성도들 내가 올 줄 고대하고 있겠네
저희들과 한 소리로 찬송 부르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주를 뵈오리

 

이 찬송이 많이 위로가 되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 되었지만 몸으로 사는 것은 쉽운 것이 없었고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죽음이란, 가족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아버지가 안 계시거든요"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고 계속 질문을 받는 것이다. 언제, 왜 돌아가셨냐, 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시냐,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이었다. "편부 편모 가정 손 들어" 학기 초마다 이 폭력적인 질문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고. 늙은 엄마가 죽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며, 어떻게든 동생은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을 등에 지는 것이었다. 

 

죽음은 일단 '부활 신앙'에 맡겨 두고 구질구질한 일상을 살아야 했다. 구질구질 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 살아 있던 때와 똑같은 나로 살기 위해-보이기 위해- 난 얼마나 밝고 명랑한 것에 집착했는가. 친구들에게 받는 쪽지 편지에는 "신실아, 너는 정말 행복해 보여"란 문장이 흔했다. 구질구질하거나 슬퍼 보이지 않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었다. 아버지 장례식 마치고 첫 등교하던 날, 그날의 나를 잊을 수 없다. 부반장이었고, 까불이였다. 선생님들 흉내 내고 놀리는 게 일이었다. 불과 며칠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기 싫어서, 슬픈 모습 보이기 싫어서 교실에 들어서며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내 인생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페르소나가 장착되는 순간이었다. 밤에는 일기장이 흠뻑 젖도록 울며 아버지를 부르고 썼다. 아버지가 쓰던 만년필을 썼는데, 눈물에 잉크가 번져 페이지마다 볼만 했다.

 

아버지 장례식 중 기억나는 한 장면이다. 장례 행렬를 따라 울며 걷는 내게 아버지 친구가 말씀하셨다. "울지마라. 너희 아버지 천국 가셨다.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느냐" 목사님이셨다. 나는 어렸지만 사리분별은 할 수 있었다. '이게 아버지 잃은 애한테 할 소린가' 싶었다.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어쩌자고 그 말이 머리에서 내려와 가슴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를 데려간 하나님을 원망도 한 번 못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신앙생활 잘해서 나도 죽어서 천국 가야지! 내게 부활 신앙이란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천국행 열차를 꼭 잡아 타는 것이었다.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악 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이 노래를 부르며 '다시 내리지 않죠' 부분에서 안도감이 아니라 늘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어쩐지 나는 죄악 역에 억류되어 결국 그 열차 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중간에 '넌 교만하고 죄가 많아서 안 되겠다' 하차 명령을 들을 것만 같았다.

 

열차를 놓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데.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내 평생 사도신경을 몇 번이나 외웠을까. 수많은 성경공부로 쌓인 신학적 지식이 있지만, 실존적 부활 신앙은 늘 그 지점을 맴돌고 있었다. 그저 지옥이 두려울 뿐. 지옥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세계라 두려운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죽음을 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남기는 그림자를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여겼다. 또래 친구들이 다 어리게 보였다. 아버지 정도 죽어봐야 인생의 깊이를 알지! 중고등, 대학 이후까지 단짝이었던 친구는 나보다 일찍 엄마를 잃었다. 부모의 죽음에 대해 얘기한 적 없지만 그저 통하는 것이 있었다. 죽자고 그 친구와만 붙어 다녔다. 연애든 결혼이든 부모 잃은 상실감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과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죽음을 아는데 죽음을 모르는 사람과는 마음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흔적을 두려워할 뿐이었는데. 두려움이 클수록 신앙에 집착하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포는 더욱 비합리적이 되어 갔다. 아버지의 죽음은 결국 어떤 환상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누구도 내게 아버지 죽음을 말해주지 않았다. 함께 월남한 친구가 강원도에서 돌아가셨다며 새벽에 서울에 가셨다. "신실이 피아노를 알아보고 오갔다우" 했고, 나는 보조가방을 사다 달라고 했다. 다녀오겠다고 나간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 춥다고 모자를 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가셨다. 그 이후 소식은 그냥 분위기를 보고 알았다. 엄마가 서울로 갔고, 교인들이 수요예배 마치고 기도회를 했다. 밤이 깊었을 때 장로님들과 여러 교인들이 집에 와 전화로 부고를 알리며 분주했다. 그 모든 분위기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들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했다. 장례식에서도 동생에겐 아버지 모습을 보여줬다는데(고개를 돌려 보지 안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기억도 없다. 아버지는 그냥 사라졌다. 누구도 죽음을 말해주지 않았고 죽은 아버지 몸을 내 눈으로 확인한 바 없다. 그냥 추측했다. 아버지가 죽었나보다. 그렇게 40여 년을 '생각'해왔다.

 

채윤이가 중학교 1학년이던 해, 기도 피정에 가서 아버지 장례식을 하고 왔다. 기도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생생하게 만났다. 아버지 몸이 없어진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것이 아버지의 몸, 아버지의 품이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주일에 저녁 예배 마칠 때까지 양복을 벗지 않으셨다. 주일 오후, 조금 한가한 시간, 와이셔츠 위에 조끼를 입을 채로 누워 쉬는 아버지 곁으로 가면 팔베개를 내주셨다. 두껍고 든든한 팔이었다. 팔을 베고 누워 아버지 콧구멍을 간지르고 귀를 만지며 놀았다. 넓은 품이었다. 그 품이 평생 그리웠던 것이다.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 품이 그리울수록 신앙에 매달렸던 것이다. 피부에 닿던 사랑을 잃은 상실감을 신앙으로 채웠다. 삶에서는 입에 올릴 수도 없이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이 죽음이었으니, 빠르게 '천국 소망'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회피하였다. 죽음을 몰랐다. 죽음이란 다름 아닌 몸의 소멸임을 알지 못했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1 01:00 신고

    언니...저는 이제 언니의 힘이 느껴져요...
    정면돌파하시려는 힘이...
    그래서 기대하고 응원해요...

    • BlogIcon larinari 2020.04.01 22:43 신고

      맞아, 처음엔 글이 나를 일으켰지만 지금은 내가 글을 이끌어가고 있어. 분명히 그래. 다 그대 덕분이오!

 

 

 

 

 

내가 일어나기 한 시간 전 딸 채윤이가 제 블로그에 글을 썼다. '엄마'라는 제목으로 내게 쓴 편지이다.

 

엄마! 곧 있으면 엄마가 깨어날 시간이야. 엄마의 짧은 잠 끝엔 기나긴 슬픔이 기다리고 있겠지. 난 한 번도 그 시간을 엄마와 함께 해주지 못했어. 엄마가 그 어두운 세상에서 혼자 힘들어하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요즘 열 시에 일어나면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이건 가봐. 엄마가 기나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편하게 잠을 자고 있었기에.

오늘 친구들이랑 밤새 수다를 떨고 다섯 시가 다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어. 집에 있으면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인데 말이야. 잠을 자야 하는데 곧 깨어날 엄마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네.

 

오늘은 글조차 쓸 수 없겠구나, 하며 눈을 떴다. 며칠 동안 눈 뜨자마자 따뜻한 차 한 잔 들고 키보드에 앉으면 글이 흘러나왔다. 글이 고여 있는 가슴의 통증이 있다.  물 흐르듯, 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고름이 흐르듯,이다. 찐덕찐덕한 고름이 자연스럽지도 아름답지도 않게 찌질찌질 흐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흐른다는 것. 아침에 써놓은 글을 오후에 읽으면 별 생각이 다 든다. '엄마가 죽어도 글이 써지는구나. 비정하다, 비정해' 살아내야 할 하루가 끝나간다는 안도감에, 어쩌면 아침에 짜낸 고름 덕에 말짱한 생각도 스치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 생각조차도 말짱하긴 한 건가. 

 

오늘 아침엔 환부에 글이 고이지 않았다. 서늘한 가슴도, 고통스런 그리움도 아니고 텅 빈 기상이었다. "글도 쓸 수 없겠구나. 하루를 어떻게 보내지?" 몸부림도 눈물도 없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곁에는 아침마다 하는 미친년 의례에 사제로 동참하는 남편이 있다. 몸부림과 울음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안아주고는 "됐어, 이제 일어나. 울었으니 됐어" 하고 선언한다. 정말 사제의 말처럼 힘이 있다. "나가서 글 써" 하는 말은 거실로 파송하는 선언이다. 그 루틴도 없이 멍하게 누워 있는데 잠결에 습관처럼 안아주며 남편이 말했다. "세 번 울었어. 정신실 자다가 세 번 울었어." 그 말 또한 묘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울어 흘려보내지 못한 눈물이 고여 있다 고름이 되는가. 흘려보내야 한다. 가는 감정 붙들고, 오는 감정을 막는 것이 아프게 되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배웠고, 배운 대로 가르치고 있다. 실은 어젯밤엔 잠을 잘 잤다. 잠이 드는 것도 수월했다. 자면서 꾸는 꿈은 굳이 프로이트의 말을 빌지 않아도 일종의 해소라는 것을 안다. 흘려보냄이다. 꾸고 나서 잊어버린 꿈처럼 밤에 세 번 운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텅 빈 느낌이었지만 다른 말로 하면 가벼움이다. 눈을 뜨며 마음에 울린 '글을 쓸 수도 없겠구나'는 숨 쉴 공간이 생겼다는 말이기도 하다.

 

노트북을 켜는 대신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열었다. 구독하는 블로그에 새 글을 보니 채윤이가 쓴 글이 있다. 제목은 '엄마'. 채윤이가 밤새 깨어 보내주는 에너지로 내가 잘 자고, 자면서 감정을 흘려보냈을까. 그럴 것이다. 채윤이 뿐 아니라 글을 읽고 슬퍼해주는 분들, 손을 모아 함께 애도해주는 마음들이 흘려보내 주는 에너지일 것이다. 미친년 글쓰기 행위가 어떻게든 아침 첫 숨을 내쉬는 노력이라면 연결된 많은 이들의 인공호흡 같은 공감이 있다.    

 

엄마, 나는 요즘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내가 엄마를 부를 때마다 엄마는 할머니가 떠오르지 앉을까. ‘엄마’라는 이 단어가 지금의 엄마한테 너무 아픈 말이진 않을까. 그러면서 어쩌면 엄마의 슬픔의 깊이를 조금 헤아릴 수 있는게 아닐까 싶어. 나한테, 그리고 엄마한테 ‘엄마’는 결국 같은 존재니까. 나에게 엄마만이 채워줄 수 있는 자리가 있듯이 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눈물이 나와.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손녀의 눈물도 있지만 할머니를 떠나보낸 엄마를 향한 눈물도 있는 거 같아. 절대 내가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은 아닐 테니까.

 

결혼하고 처음, 남편과 함께 하는 삶이 참 좋다고 느끼면 0.001초도 지나지 않아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러다 남편이 죽으면 어떡하지? 행복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렇게 함께 왔다. 아이들 태어나고 자라면서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휴우, 나와 남편이 우리 애들 이 나이까지 살았어" 비합리적인 안도감이다. 채윤이가 중학교 1학년이던 12월, 비합리적인 안도감이 도를 넘었다. 한참 사춘기였던 채윤이에게 올라오는 분노의 바닥에는 "너는 엄마 아빠가 살아 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무엇이 결핍이냐?" 아이와 큰 충돌을 겪고, 12월 아버지 추도식을 지내고는 내가 알겠는 나의 비합리적 공포가 무서워 기도 피정에 갔다. 4박 5일 침묵 기도 속에서 아버지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고 나왔다. 영적 여정에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죽음을 아버지의 죽음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동시에 아이들 앞에 사는 내 죽음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별의별 육아원칙을 생각했고 책을 썼고 강의도 하지만 무의식적 원칙은 '아버지 없는 아이로 키우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단순하고 쉽지만 결코 내 힘으로 지켜낼 수는 없는 원칙. 현승이 중학교 1학년을 지내며 "다 됐어! 이제 둘 다 그때의 나보다 컸어. 나도 잘 살아냈으니 잘 살 거야." 다시 안도했다. 한 해 한 해 지나며 "현승이가 중3이야. 벌써 2년이나 더 쌓였어."  "채윤이가 성인이야. 엄마 아빠 죽어도 슬프지만 잘 살아낼 수 있어." 의식화 하진 않았지만 무의식에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두려움과 안도감이다. 

 

엄마를 잃고 미친 여자처럼 지내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딸의 마음. 상상조차 못 해봤다. 그 엄마를 위로하려면 '엄마' 하고 불러야 하는데, '엄마'라는 말을 가장 아프게 겪는 엄마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마음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면서 제 엄마에 대한 마음을 비추어 엄마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다시 공감하고. 우리 엄마, 우리 엄마의 딸, 나의 딸, 내 딸의 엄마, 내 딸의 엄마의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운 이름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한 칼로 베어내는 이름이다. 아니 그냥 우리 엄마 얘기를 하고 싶다. 엄마 얘기를 더 더 많이 하고 싶다. 우리 채윤이는 아직 엄마가 있으니, 엄마가 떡볶이도 해주고, 엄마랑 같이 쇼핑도 하고, 긴 긴 얘기도 나눌 수 있으니. 우리 엄마 얘기를 써야겠다. 고름을 짜내고 짜내서 엄마 얘길 해야겠다.

 

엄마, 요즘 나는 ‘나의 하나님’이 아닌 ‘엄마의 하나님’을 찾아. 나는 늘 엄마만큼 기도하지 못했고, 엄마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어. 그래서 나의 하나님보다 엄마의 하나님이 더 빨리 기도를 들어주실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가 지금은 쉽게 부를 수 없는 엄마의 하나님께 내가 기도할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뿐이야.

 

엄마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길이 막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엄마가 주입한 하나님이 떡하니 산처럼 막고 있다고, 내 힘으론 넘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 앞에서는 불신앙을 연기했다. "기도 혀, 기도 밲이는 없다" 이 말이 싫어서 기도하지 않는 척했다. 주일에 물건을 사고팔아 주일성수를 밥 먹듯 어기고, 성경도 안 읽고, 아이들과 가정예배 드리지 않으며,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실은 엄마에게 배운 하나님을 버리면서 그분께 더욱 가까워졌는데. 결국 엄마가 가르쳐준 예수님 사랑으로 예수님 사랑에 가 닿게 되었는데 엄마가 알아듣게 설명하지 못했다. 나도 엄마처럼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말씀에 목마른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하지 못했다. 엄마의 딸의 딸 채윤이가 엄마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저 신앙은 엄마의 엄마에게서 온 것인데. 엄마가 천국에 있든, 깊은 잠에 빠져 있든 어디서든 채윤이의 저 기도를 알았으면 좋겠다. 이게 다 엄마 덕분인 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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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larinari 2020.03.28 10:08 신고

    채윤이 글은 '새벽에 쓴 글이라 부끄럽다'며 금방 비공개로 바꿨다. 그럼에도 엄마 글에 인용하는 것을 허락해 주어 인용할 수 있었다.

  2. BlogIcon pratigya 2020.03.29 01:43 신고

    난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언니가 내 맘을 여기다 써 놓은 줄 알았어요..
    저도 정말 그 맘 때문에 셋째 볼때마다 눈물이 났었는데...
    채윤이에게도 고맙네요...

 

 

당신이 죽어가는 동안, 나는 자고 있었습니다.
내가 잠과 깨어남 사이에 만드는 어떤 틈, 어떤 구멍 속으로 
당신이 빠져버린 것만 같습니다.

내가 당신을 에레부스에 잡아두고 아직도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내일 다시
죽겠지만 꿈속에서는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당신을 아침 속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잠에 취해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면서, 나는 당신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거듭되는 이 계속적인 저버림.

<신화> 나타샤 트레서웨이

 

 

엄마가 외롭게 죽어가는 동안 잠에 빠져 있었던 것에 대한 벌인가. 내 몸을 아끼는 엄마가 주는 벌은 아닐 테고, 공평무사한 하나님의 벌인가. 공평하지만 사사로움이 없는 분은 아니다. 사사롭고 깨알 같은 분인 것은 알고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도 아니다. 나다. 엄마가 외롭게 죽어가는 동안 잠에 빠졌었고, 일에 빠졌었고, 편안함에 빠졌던 나를 향해 공평무사한 내가 내리는 벌이다. 힘들게 잠들며, 깰 때는 더욱 고통스러울지니. 외로움 속에 엄마를 떠나가게 한 죄이고, 늙어 외로운 엄마를 잊고 희희낙락 행복했던 죄, 평생 엄마를 부끄러워했던 죄, 엄마 생을 갈취하여 평안한 일상을 살았던 죄, 말 섞고 싶어 곁을 맴돌던 엄마를 피했던 죄, 주일날 돈 쓰지 말라했는데 작정하고 일부러 돈 썼던 죄. 마땅한 죄로 여겨 달게 벌을 받겠다. 힘들게 잠들며 깰 때는 더욱 고통스러울지니라.

 

미국 시인 나타샤 트레서웨이가 어머니를 애도하며 저런 시를 썼다니. 내가 비정상은 아니라는, 적어도 나만 비정상은 아니라는 것에 위안이 된다.

 

현재라는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 현재로선 잠이다. 그 처방을 손쉽게 얻어낼 수는 없다. 쉽게 받는 벌은 벌이 될 수 없으니까. 눈을 뜬 의식의 상태가 내내 슬프고 힘들다는 뜻은 아니다. 가벼운 순간들이 있다. 현승이와만 통하는 하이 개그를 하고, 눈빛 교환하며 킬킬거린다. 채윤이가 내 성대모사를 하고, 아빠가 어설프게 따라 하다 웃음이 터지면 식탁이 환해진다. 하지만 그 환한 순간 끝에 날카로운 슬픔이 덮친다. 행복하지 말아야지. 행복한 순간은 만들지 않아야겠어. 행복한 모든 순간이 누구 하나를 잃는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 돼. 자꾸 다짐하고 매일 다짐한다. 허튼 상상을 한다. 내가 죽고 없을 때, 아이들은 내가 해준 알리올리오 파스타와 김치찜과 잔치국수가 얼마나 그리울까. 그리움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예전 글을 찾아보니 처음 고관절 사고가 나기 며칠 전이다. 현승이랑 엄마 집에 갔는데 저녁을 먹고 엄마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너 나허구 한 번 나가볼 텨? 내가 좋은 디 데려가까?" 새로 이사한 단지 한쪽에 소나무 숲 아래로 데려갔다. 어스름한 늦은 저녁시간, 앞서 가는 엄마의 발걸음이 얼마나 빠르고 가벼웠는지. "솔 향내가 좋지? 코가 뻥 뚫리잖여." 그 아래 서서 농담하고 웃고 좋았다. 90에 가까운 연세였지만, 이미 많이 약해진 몸이었지만 젊고 건강 하달 수밖에 없는 짱짱한 몸이었다. 짱짱은 아니다. 그때도 이미 골다공증과 척추협착증으로 불면 날아갈 위태한 몸이었다. 그날 그 시간이 좋아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마음에 담았다. 좋음을 복기하다 환상을 덧입히다 보니 엄마 생애 가장 건강한 날처럼 느껴진다. 좋았다. 참 좋았다. 그래서 가장 아픈 장면이 되었다.

 

콧줄과 호흡기를 달고 있던 가여운 모습보다 소나무 아래 미소 짓는 엄마 얼굴이 더 아프다. 거친 호흡소리만 들리는 전화기에 대고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성령 감화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찬송 불러주며 내장이 끊어질 것 같았는데. 그 통화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목소리를 변조해 전화를 걸어 속이면 한참 놀림당하다 "이거 정신실이 아녀. 야이, 이년아!" 하던 그 소리들이다. 좋았던 시간이 가장 슬프다. 

 

내적 여정 중에 엄마 작업을 하며 어린 시절의 아픔이 올라와 다시는 엄마 얼굴 안 보겠다 다짐했던 순간이 있었다.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망쳐놓은 엄마를 용서할 수 없노라 울부짖었다. 그 과정을 통과하고 10여 년, 10여 년의 시간은 아름다웠다. 엄마와 만나는 순간순간이 가볍고 좋았다. 가볍지 말 걸, 좋아하지 말 걸, 차라리 엄마를 미워하던 그때 떠나보냈었으면.

 

아이들과 남편과, 벗들과 행복한 순간은 만들지 않겠다.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순간은 피하도록 하겠다. 좋은 느낌을 아예 느끼지 않겠다. 사랑할수록 더 멀리 하겠다. 나중에 생각날 행복한 기억을 저장해 두지 못하도록. 결심을 하니 더 캄캄해진다. 지난 토요일 밤, 엄마 떠나고 처음으로 집에 혼자 있었다. 그저 책을 읽었고, 라디오 소리만 들렸다. 바로 이거야. 웃고 떠드는 아이들도, 따뜻한 남편도 없으니 행복할 일도 없고, 쌓아둘 추억도 없어. 이렇게 살아야 해! 그렇게 인식되는 순간 두려움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어둠이 나를 덮고 거실을 덮었다. 혼자 있을 수 없었다. 

 

내적 여정을 동반하며 '지금 여기'를 살자고 얼마나 확신 있는 조언을 했던가.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한 불안과 두려움, 지나버린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실체 없는 것이라고.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고. 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금 누리는 행복, 바로 이 순간을 누리는 선택 외에 없다는 것을 안다. 행복한 오늘인데 행복하지 않을 방법도 없다. 좋은 순간 만들지 않겠다고 고립된다고 죽음이, 인생의 비극이 정복되지 않는다는 것도. 지난 4년 여, '오늘이 선물이다' 이 한 마디 붙들고 살았다. 버틸 힘을 줬고,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다. 선물이 되지 않는 오늘을 선물로 받아 살기로 하니 정말 선물이 되었다.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순간이 소중해졌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남편과 아이들, 연결되어 있는 벗들이 사랑스러워졌다. 길가의 꽃이, 멀리 보이는 나무가, 심지어 그렇게 싫었던 메마른 겨울나무도 내게 사랑을 일깨웠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받아 들지도, 팽개치지도 못하게 되었다. 다시 주어진 오늘을 살지 않을 수도, 멀쩡하게 살 수도 없지만 결국 또 살아져야 한다. 행복하고 싶지 않지만 사랑하는 가족들, 벗들로 인해서 나는 자꾸 행복하다. 행복할수록 아프지만 행복을 피해 달아나면 캄캄하다. 이런 오늘이 다시 주어졌다. 잔인한 벌이다. 내 마음을 아는지 남편이 노래를 만들었다. 나 부르라고 만든 노래다. "곡을 만들 때는 부를 사람 목소리를 염두에 두게 되거든. 정신실, 불러봐." 며칠을 지나고는 "실패야. 아무도 노래에 관심이 없어." 삐친 척을 한다. 뜻은 알지만 차마 불러지지 않는 노래이다. 오늘이 선물이라니. 

 

길가에 핀 꽃 본다 그대 눈길에 피고
그대 미소에 춤춘다 들꽃 곁에 머문다
숲 속 길 걸어간다 그대 발길에 웃고
그대 노래에 춤춘다 나무 손잡는다
오늘이 선물이다 어제도 오늘이다
주님 어제를 잊으니 내 아픔 잊혀진다
오늘이 선물이다 내일도 오늘이다
주님 내일을 여시니 내 근심 사라진다

 

그런데 남편이 모르는 일이 있다. 저 가사 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심지어 화가 나는 부분 '주님 어제를 잊으니 내 아픔 잊혀진다'를 내 마음이 무한반복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나도 몰랐다. 마음에서 저 노래, 저 가사가 계속 울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침마다 드리는 향심기도를 잊은 지 오래, '하나님' 하고 부르며 시작하는 대화를 잊은 지 오래다. 믿어지지 않는 가사를 자꾸 노래하는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 그분을 찾아 더듬는 길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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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27 11:11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3.31 23:59 신고

      그래, 소식 듣고 걱정 많이 했어. 언젠가는 선물이었던 오늘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오늘이구나. 우리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때 위로가 될까? 같이 잘 견디자!

  2. BlogIcon pratigya 2020.03.27 11:22 신고

    언니의 애도의 글 중에 저는 오늘 글이 제일 슬퍼요...많이 울었어요...

    • BlogIcon larinari 2020.04.01 00:00 신고

      어느 글 울지 않으며 쓴 것이 없지만, 눈물이 많이 고인 글이야.

 

 

 

 

6시. 현실 같은 꿈을 꾸면서 깼다. 마지막 시간처럼 동생 전화로 엄마랑 통화한다. "누나, 엄마가 아무래도 안 되겠대. 누나 도착할 시간까지 시간이 안 되겠나 봐. 하고 싶은 말이 있대" 마지막 통화 때 그랬던 것처럼 쉬익쉬익 숨 찬 호흡소리가 들린다. "왜애? 엄마 무슨 얘기 하고 싶어?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그새를 못 참고 내가 먼저 떠들어댔다. 까불거리면서. 잠을 깼다. 가슴 부위에 아픈 침을 여러 방 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찔리는 순간의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고 오래갈 만성 통증이 된 것 같다. 그 두꺼운 통증에 잠이 깼다. 왜 까불었을까? 가만히 기다렸어야지. 왜, 왜. 엄마 무슨 말하고 싶었어? 다시 잠들게. 하고 싶었던 말 해 줘. 그럴수록 잠은 멀어지고 가슴에 남은 통증과 함께 정신이 말똥말똥.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6시 30분.

 

팽목항 예배에 간 적이 있다. 예배 마치고 은화 엄마 등 가족들과 대화 시간이 있었다. 아직 딸의 몸을 찾지 못해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은화 엄마가 질문을 받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주로 세월호 인양 작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인양, 안전한 인양에 목숨 거는 이유는 딸의 몸을 찾기 위해서이다. 목까지 찬 질문이 하나 있었다. 인양을 위해서 날씨가 어때야 하는지, 배 주변으로 안전망을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지 이런 질문 말고. "은화는 어떤 아이였어요? 어떤 딸이었어요?" 이게 정말 묻고 싶었다. 세월호 인양에 대한 열정은 딸의 몸에 대한 열정이고, 뼈 한 조각으로 남은 몸에 집착하는 것은 은화라는 존재를 향한 열정 아닌가.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물었어야 했다. 

 

엄마에 대해 누가 좀 물어봐 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장례식도 못한 장례는 어떤 장례인지. 엄마 죽고 난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살아지는지. 엄마를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미워했는지. 뭐든 엄마에 대해 말을 좀 시켜줬으면. 아무도 묻지 않는다. 내가 은화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 걸까? 죽음 같은 비극은 입에 올리지 않고 멀리 쫓아버리는 것이 나은 거라서? 그렇다면 엄마 얘기 말고 그냥 엄마 잃은 사람('아이'라고 쓸 뻔 했다)으로 조금 불쌍히 생각해주면 어떨까. 

 

엄마가 죽었는데 우리 엄마에 대해 묻지도 않고 무심히 돌아가는 세상이 서럽다. 엄마가 죽었는데 개나리가 피고 활짝 핀 목련이 달빛에 아름답다니. 치과에 가서 접수를 하다 이렇게 말할 뻔 했다. "저의 엄마가 돌아가셨거든요" 엄마가 존재했었다는 것, 그리고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엄마에게 미안하다. 미안함을 달래고자 쓴다. 그리움에 압사하지 않으려 쓰고, 부재하는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쓴다. 아니 그냥 쓰기라도 해야 살 수 있어서 쓴다. 

 

장례식 마치고 쓴 '세상에서 가장 긴 장례식'이 다음 메인에 걸렸었다. 블로그 하루 유입자가 3만 명에 가까웠다. 모르는 이들의 댓글 몇 개가 달렸다. 기가 막힌 댓글도 하나 있었는데 엄마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 같아 바로 삭제했다. 댓글이 욕은 아니었다. 기독교인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를 글에 썼다고 나무라는, 모르는 사람의 말이었다. 욕보다 더 모욕적이었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쓰지 말아야 했고, 블로그든 페북에든 발행하지 말아야 했다. 아침마다 쓰는 이 글들도 누군가에게 뉴스, sns 타임라인, 여기저기 떠다니다 스쳐지나는 눈팅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엄마의 죽음을 누군가 안다고 해도 내 맘 같으랴. 딸과 같으랴. 평생 엄마의 죽음을 가불하여 두려워 했던 딸의 마음과 같으랴. 위험을 무릅쓰고 쓴다.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에서 시즈토는 애도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신문에 난 죽음을 찾아 떠돈다. 경찰서에 잡혀가고 신원조회를 당하면서 이 이상한 일을 한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시킬 수 없어서 "그냥 병으로 생각해주세요"라고 말하며. 그가 애도의 장소를 찾을 때마다 주변을 배회하며 죽은 이에 대해서 묻는다. 

 

그 사람은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그녀에게 감사를 표현한 적이 있습니까?

 

어느 누가 시즈토처럼 내게 물어주겠는가. 당신 어머니는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그녀에게 감사를 표현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시즈토가 되어 내게 질문하려고 한다. 언제까지? 아침에 눈을 뜰 때 가슴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아니, 최소 39년. (아버지 죽고 일기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 맥락의 글을 쓰고 있다)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러니 블로그에 오신 당신, 우리 엄마 죽은 얘기 듣고 싶으면 오시라. 죽음 같은 인생의 비극을 듣는 것이 싫다면 오지 마시라. 우리 엄마가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 아닐지라도, 심심풀이로 대충 읽더라도 무심히 지나가진 마시라. 못 본 척하지 마시라. 애도의 마음으로 저 질문을 한 번쯤 마음으로 해주시라. 우리 엄마 아니라 당신의 엄마, 아니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게 될 것이다. 모든 죽음은 애도 받을 가치가 있다. 심심풀이로 읽은 글에 과한 요구인 듯 부담스럽다면, 하트라도 눌러주시든가. 영혼은 담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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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26 15:04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3.27 10:00 신고

      고마워요. 내밀한 고통을 쓴다는 것, 써서 아무나 보는 것에 내놓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처럼 느껴져요. 그럼에도 쓰고, 주목받고, 알아주는 말을 듣고 싶은 양가감정. 글이 내겐 이런 것이네요. 기도 힘입을 게요.

  2. BlogIcon pratigya 2020.03.26 19:04 신고

    언니~ 완전 멋진 우리 언니~~~
    언니 계속 써주세요. 언니가 맘껏 슬퍼하면 나도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서 슬퍼할 자유가 생길 것 같아서요..
    어떤 삶을 사셨는지, 어떤 분이셨는지, 저도 만나고 싶어요.
    언니~ 우리 울면서 쓰다가 또 웃으면서 쓰고 또 울면서 쓰고 그렇게 계속 써요~~~

    • BlogIcon larinari 2020.03.27 10:01 신고

      그래, 쓰다 보면 알게 되겠지? 쓰다 보면 알게 될 거야!

  3. 2020.03.26 21:38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3.27 10:09 신고

      엄마 어디 갔을까? 천국이 어디이길래, 부활이 어떻게 된다는 거라는 거야. 천국 소망, 부활 신앙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지금. 함께 느껴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 엄마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껴져요.

      저 한때 엄마 돌아가셔도 슬프지 않겠다. 엄마 죽으면 울지도 않겠다 다짐했던 시절 있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렇게 말 안들으면 엄마도 죽는다. 엄마 죽는 걸 보고싶냐. 엄마까지 죽으면 니들은 고아다" 이런 말 너무 많이 했거든요. 어떻게 저런 잔인한 말로 협박할 수 있을까. 사무치는 미움이 한 둘이 아니에요. 그런 엄마 충분히 미워할 수 있어서, 엄마가 오래오래 살아 충분히 미워할 시간을 줘서 다행인 걸까요?

  4. 2020.03.26 21:48

    비밀댓글입니다

  5. BlogIcon SJ 2020.03.26 23:53

    갈 수만 있는 거리에 있었음 사모님 꼭 안아주러 달려갔을텐데.. 글로만 소식 접하며 넘 맘이 아리고 먹먹하고...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 또 '언어'가 아니고는 구구절절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아 이렇게 꾹꾹 눌러 씁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늘 글 속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만나뵈었던 어머님. 사랑스러운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원망'같은 깊은 감정의 또아리를 풀어내는 그 순간에도 저는 농도 짙은 사랑을 읽었던 것 같아요. 충분히 슬퍼하시고, 마음껏 애도하시길 마음으로 빌어요. 그러다보면 '존재'가 없이 '기억'만으로도 담담히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 어느 때보다 신실님 어깨 감싸안아 주고싶은 하리니한겨리혜리니 맘 드림.

    • BlogIcon larinari 2020.03.27 10:15 신고

      감사해요! 글로, 글에 담긴 마음으로 이미 안아주셨어요. 곧 얼굴 볼 수 있다는 소식 들었어요. 드디어 혜린이를 안아볼 날이 오는 거예요! 하린이 한결이는 이제 제가 안아서 번쩍 들어올릴 수 없겠지요? 곧 봐요!

  6. 박정원 2020.03.31 10:39

    선생님..
    어머니 돌아가신 후로 선생님 생각 하루도 나지 않은 날이 없어요. 어떻게 지내실까.. 내겐 엄마의 부재의 연속인데 세상은 이렇게 잘도 굴러가네...하시면서 울고 계실까? 그래도 글은 쓰고 계시겠지...글로써 아픔을 토로 하고 또 선생님의 토해낸 글들로 읽는 사람들에겐 위로와 위안을 주겠지.....

    정말 그러고 계셨네요..
    그런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읽기 싫어져요. 저의 곧 다가올 일을 보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더 읽고 싶어져요. 한 사람이 죽음을 통해 어떻게 다시 일어서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지 보고 싶어져요.
    아픔을 통한 성숙에 대해 사람은 참 이기적이에요.
    나는 경험하기 싫고,
    내가 극복하고 싶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타자를 통해 대리만족만 하고 싶어하니까요.

    무슨 말이 위로가 될까 너무 조심스럽습니다.
    열심히 쓰세요 선생님.
    선생님이 잘 하시는 방법, 선생님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열심히 쓰세요.

    선생님이 쓰신 글 꾹꾹 읽으며 같이 눈물 삼켜 드릴께요.

    • BlogIcon larinari 2020.04.01 00:06 신고

      선생님, 고마워요! 결국 혼자 겪어낼 수밖에 없는 상실이고 아픔이지만 내가 한 발 앞서 잘 걸어가 볼게요. 어서 얼굴 보고 과정 시작하면 좋겠다.

 

 

엄마가 없다. 엄마 방에도, 김포요양병원에도, 김포우리병원 응급실에도, 일산병원 응급실에도 엄마가 없다. 엄마의 몸이 없다. 그 몸은 어디 갔을까? 엄마가 죽었다는 것은 엄마의 몸이 없다는 것, 여기 없다는 것이다. '여기'란 어디지? 여기, 내가 있는 곳. 나의 세상. 2주 정도, 그 이상 엄마를 보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통화조차 하지 않고도 잘 살았다. 엄마와 별다른 연락 없이 한 달도 잘 살 수 있었다. 나의 세상이 굴러가는데 무리가 없었다. 엄마의 몸이 없어지자 세상이 이상해졌다. 엄마의 존재가, 몸이 없는 엄마가 내 세상을 장악했다. 엄마 생각만 하게 된다. 몸의 부재로 강력한 현존이 되어 버렸다.

 

2주 전, 3월 11일 수요일 아침 6시. 엄마의 몸을 안치했다. 두렵고 추운, 어둠을 끝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으로 달려가 아직 몸으로 여.기. 있는 엄마 몸을 만났다. 차가운 스테인리스에 누워 있기엔 아직 따스했다. 환자복을 입고 콧줄과 호흡기를 뗀 엄마 얼굴이다. 입관식에서 다시 만난 엄마는 눈을 너무 꼬옥 감고 있어서, 표정이 없어서 우리 엄마 같지가 않다. 맨질맨질 손을 얹고 쓰다듬기 좋았던 이마. 엄마가 너무 눈을 꼭 감고 있어서, 단정하게 누워 있고, 장례사들이 예의가 바른 통에, 너무 순순히 엄마 몸을 보냈다. 아아아아, 엄마아, 엄마아…… 절규했어야 하는데. 피를 토하며 엄마 몸을 안고 울었어야 했는데.

 

나는 엄마를 못 떨어지는 아이였다. 동네 사람들이, 교인들이 하도 예뻐해서 이 집 데려가고 저 집 데려가고 했다는데.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엄마였을 테니까. 엄마가 없으면 우는 아이였다. 우내미라고 놀림받았다. 일 년에 두 번 부흥회를 하면 강사 목사를 집에 모신다. 엄마가 교회 집사님들과 함께 식사마다 산해진미를 차려냈다. 엄마를 잘 떨어지는 동생은 이모집,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그런 경우 큰 아이를 보낼 테지만 나는 엄마 떨어져 한 밤이라도 보낸다는 것이 불가능한 아이였다.

 

세 살이나 되었을 어느 밤, 길가에서 택시 잡던 기억이 어릴 적 첫 기억에 가깝다. 큰 이모 집에 갔다 엄마 찾고 우는 통에 그 밤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얘기.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엄마가 서울인지 어딜 갔다. 서울을 가도, 외갓집을 가도 엄마 몸에 껌딱지처럼 붙어 갔을 것인데. 그날은 어쩐지 엄마만 갔다. 이제 다 컸으니 가능한 일이라고 나를 설득했을지 모른다. 엄마 없는 그 밤에 밤새 토하고 아팠다. 아버지가 당황하고, 다음 날 집에 온 엄마가 징글징글해했던 기억. 

 

심리학으로 말하자면 애착형성이 잘 되지 못한 것이다. 엄마가 눈에 없어져도 존재한다는 신뢰가 든든하지 않은 것이다. 사물의 영속성,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물은 존재한다는 개념은 벌써 생겼을 테지만 엄마의 존재가 내 눈 앞에 사라져도 여전히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취약한 것이다.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이다. 엄마를 더 사랑하거나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어릴 적 집착과 좌절 때문에 자라서는 '차거운 딸'이 되었다. 그렇게 추구하던 엄마 몸에 스킨십도 없다고 늙어가는 엄마가 섭섭해했다. 

 

그 엄마의 몸이 여기 없다. 내 눈에 보여도 김포 풍무동에 있을 몸, 베란다에 앉아 햇볕을 쪼이고, 소파에 앉아 강아지 재롱을 보고, 다시 긴긴 낮잠을 잘 엄마가 있는 줄 알아서 잘 살았는데. 여기 어디에도 엄마의 몸이 없으니 유아기적 애착이 원초적 그리움이 한꺼번에 살아와 불안과 슬픔으로 살 수가 없다. "아이구 개운허다, 아이구 개운혀. 딸이 있응게 좋지. 손톱도 깍어주고" "얼라, 사모가 양말도 안 신고 맨발로 댕기네" "야야, 기도 밲이는 옶어. 사모가 기도허야 허는 거여" "여보세요, 정신실이여?" "미안허다, 복 받어라" 몸과 함께 목소리도 사라졌으니.

 

엄마가 몸에서 해방되기를, 찬송과 시편 23편과 자존심이 담긴 정신이 낡은 몸에서 해방되기를 얼마나 기도했던가. 하나님, 나는 괜찮아요. 나는 괜찮으니 엄마 영혼을 해방시켜 주세요. 저 몸에 담기기에 엄마 영혼이 너무 아름다워요. 한 달여,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아니 지난 몇 년, 늙어 부자유하고 짐이 되는 당신의 몸을 미안해하는 엄마를 보며 기도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천국 소망이 빛을 발해야 하는 이 시점. 아기 적에 터득한 사물의 영속성 개념이 아니라 영혼의 영속성을 알아들어야 할 지금, 나는 다시 퇴행이다. 엄마 몸은 여기 없지만 어딘가에 엄마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처음 엄마 떨어져 잤던 밤처럼 매일 어떤 감정들이 토악질로 나온다. 돌아가시기 전날 마지막 전화로 마지막 찬송을 불러드린 후에 내 인생 가장 어른스러운 말을 엄마에게 했다. "엄마, 가! 엄마 이제 가! 나는 잘 살게. 엄마 이제 편히 가!" 이럴 줄 몰랐지. 엄마 몸이 여기 없는 것이 이런 건 줄 몰랐지. 내가 어른이 된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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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잃은 지 12일이다.

 

치유 글쓰기와 여러 집단여정, 상담으로 배운 바가 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잊어라,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말의 폭력성.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에 온 사람이 그랬다. 생존자 글쓰기 모임에 나가기로 했다고 하니, 그런 데 가지 말라고. 자꾸 들춰내면 더 힘들어진다고 친구가 말렸다고. 심지어 그 자리에 온 생존자도 "몇십 년 전 일인데 뭐하러 다시 떠올려서 스스로 힘들게 하려는지 모르겠다"라고. 물론 모임이 진행될수록 그 모든 말의 폭력성을 확인하며 들춰내고 발설하는 것의 치유력을 몸으로 경험한다.

일어난 사건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사건이 남긴 정신적 외상은 '나 여기 있소'를 끝없이 외친다. 그 외침에 반응해야 한다. 애도가 필요하다. 모든 상실은 애도해야 떠나보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냥 잊어라" 해서 잊었다면 그것은 잊은 것이 아니다. 반드시 '나 여기 있소!'하고 돌아온다. 다양한 고통의 방식으로 돌아온다. 그때, 뒤늦게 정신과를 찾고 상담소를 찾는다. 게이버 메이트의 책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을 읽다보면 '몸'까지 나서서 아니라고 말할 때는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애도하지 못한 과거는 반드시 오늘의 고통으로 돌아온다. 

 

상실, 애도, 치유에 관해서는 글이 아니라 만남으로 배웠다. 더듬더듬 그 길을 안내도 하고 있다. 충분히 슬퍼하라고 격려한다. 되돌릴 수 없는 사건, 이미 벌어진 일이 주는 상실과 아픔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은 슬퍼하는 일 뿐이니 언제까지 슬퍼해도 된다고. 내게도 그렇게 말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벌써 내가 나를 질책한다. 가족들이 지겨워하지 않을까. 오버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누가 '그만 좀 해. 이제 잊어버릴 때도 됐지'라고 말하기 전에 내 안의 심판자가 먼저 손가락질을 하고 고개를 내젓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 눈치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너무 기운 없이 앉아 있었나? 나 때문에 분위기가 무겁다. 왜 나는 내게 말해주지 못하지? 충분히 슬퍼해도 된다고, 울어도 된다고.

 

남편과 아이들이 고맙다. 슬픔의 구덩이에서 헤매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일상이 쉽지 않을 텐데. 입장 바꿔 나라면 인내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각자 자기 생긴 모양대로 잘 견뎌주고 힘이 되어준다. 채윤이가 엄마를 배려하는 태도는 남다르다. 장례를 치르던 날, 아니 한 달 먼저 시작된 장례식 내내 그랬다. 엄마랑 통화하고 울고 있으면 어느 새 다가와 등 뒤에서 안아주는 품이 채윤이의 힘 있는 가슴이었다. 입관식 내내 기둥처럼 나를 붙들고 있던 남편이 영정사진을 들었을 때, 화장장에서 장지에서 내 허리를 꼭 붙들고 섰던 채윤이다. 장례식 이후에도 밀착 마크는 본능적으로 촉이 좋은 채윤이 몫이었다. 거침없이 달려와 안아주고, 붙들어주었다.

 

"엄마가 울면 가서 달래줄 수 있고, 밥을 안 먹으면 먹을 걸 챙겨줄 수도 있는데..... 잠을 못 자는 건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엄마. 그게 너무 안타까워."

 

엄마가 떠난 텅 빈 자리에 미친년처럼 앉은 엄마의 곁을 딸이 지켜준다. 그만 하라고 타박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준다. 모처럼 친구 만나러 나갔다 들어오며 "엄마 선물 있어" 하고 쇼핑백을 풀어헤친다. 쇼핑백을 들고 귀가하면 늘 제 옷, 제 화장품이 전부였는데. 친구 집 근처 빈티지샵에 갔다 왔다며 손수건, 작은 매트, 티팟을 내놓는다. 모두 엄마 선물.  이 넉넉한 손은 넉넉한 마음이다. "엄마, 더 울어도 돼"라고 말하는 마음이다. 맘껏 슬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가족들 눈치를 보는 내 곁을 지켜주는 마음이다. 나는 내게 너그럽지 못한데, 딸이 남편이 아들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니 애도의 골든타임을 유보하지 않게 한다. 지금 여기의 감정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니. 고마운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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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ry 2020.03.27 15:37

    티팟이 참 곱고 이쁘다.. 생각하면서 읽었어. 채윤이가 엄마와는 또 다른 동감과 표현이 풍부한 여인이고 딸이야.
    표현이 약하고 부족한 나로서는 부러운 모습이네..
    슬픔과 눈물로 지내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그 이상이네ㅜㅜ.
    마음껏 슬퍼하되 지난 날의 자책은 많이 말고 필요한 만큼만 하셨으면 하는 마음.
    저 티팟처럼 곱고 평온한 날이 오길 기도하며..

    • BlogIcon larinari 2020.04.01 00:08 신고

      감사해요! 다시 보니 저 티팟은 mary 언니님께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저희 곧 놀러 갈게요. 무슨 얘기든 다 들어주시는 두 분께 가서 막 쏟아 놓으면 좋겠어요.

 

 

 
엄마 떠나간지 11일이다. 생각보다 괜찮고, 괜찮은가 싶으면 상당히 괜찮지 않다. 쓰면서 버티고 있는 것 같다.  쓰고나면 조금 살 것 같아 먹고 농담하고 공원을 걷는다. 아침에 눈을 뜸과 동시에 가슴이 서늘하다. 아니 가슴이 서늘해서 잠을 깬다. 서늘함은 금세 막막함이 되거나 분노로 바뀌기도 한다. 조금 울다 벌떡 일어나 썼다. 쓰고나니 타나토스의 무게가 줄었고, 에로스 에너지가 어딘가에서 나와 마음을 일으켰다.

 

『한 말씀만 하소서』에 담긴, 아들을 잃은 박완서 선생에 비할 수 없겠으나 맘껏 울 수 없는 처지에 통곡 대신 쓴다는 말을 조금 알 듯 하다. 엄마 입관식에서조차 마음껏 울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를 배려 또는 의식하느라. 시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시누이가 했던 것처럼 뒹굴며 울고 싶었는데 그러지도 못하는 내 의식이고 나의 처지이다. 그 처지는 고스란히 엄마 인생의 처지였다.

 

일기를 쓴다. 애도일기를 쓴다. 아무 말을 쓰고 있다. 연구소 카페에 책 리뷰도 써올렸다. 어쩌다 쓰게 되었을까? 장례식 다음 날 멀리서 온 카톡 메시지 생각이 나 들춰보았다. 멀리 있는 Y에게 온 메시지이다. 브런치에 쓴 글을 캡쳐해서 보내왔다. '나는 오늘 기도한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오직 나를 위해 쓴 글이고, 한 자 한 자에 마음을 담아 내 마음으로 보낸 글인 게 분명하다. 

 

힘내라는 말도 아니고 위로를 보낸다는 말도 아니고, 우리의 만남을 복기하고 있다. Y에게 나는 누구인지, 언니가 자신에게 누구인지 썼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러니까 당신도 써라!'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했다. Y에게 글을 쓰라고 했었다. 몇 년에 한 번씩 만나 나누는 Y의 삶과 성찰들을 그냥 듣고 흘려보내기가 아까워서 기록을 하라고 했었다. 나보다 열 살은 적지만 내가 Y보다 나은 점이라곤 쓴다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아 그랬다. 그녀의 삶과 생각을 담아두고 싶어서.

 

그러니까 Y는 내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쓰는 것으로 절절한 위로의 마음을 전한 것이다. 내가 Y에게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글이다. Y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짚어냈다. 슬픔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다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흔들어 깨운다. 브런치에 쓴 글로 건네는 위로는 "언니, 그러니까 언니도 써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메시지를 주고받은 다음 날 나는 쓰기 시작했다.

 

지금 쓰고 있는 손일기장은 언젠가 Y가 선물로 준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을 디자인이며 재질이다. 오래 되어 빛이 바랬고 몇 장을 남겨두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Y는 기도나 말씀 묵상 같은 것으로 나와 연결될 것 같은 존재인데, 내 본질을 꿰뚫고 '글쓰기'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직관이 뛰어난 친구다. 내 인생 어느 시절, 교회에 대한 희망이 푸르르던 날이었다. 남편과 함께 그 희망을 살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 만난 Y 부부가 멀리 떠날 때 안타까움은 말 할 수 없었다.

 

많은 희망이 거듭된 좌절을 거쳐 절망으로 바뀌고, 절망을 넘어 체념의 나날을 사는 여정 속에 몇 년에 한 번씩 만났던 우리. 연결되어 있었구나. Y 부부와 함께 했던 짧은 가정교회 경험은 교회에 대한 꿈이 손에 잡히던 시간이었다. 나는 이제 거기서 한참 멀어졌다. 더는 희망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그리움으로 대체하며 사는 나이가 되었다. 치명적인 그리움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마음을 후벼파는 날이다. 좋았던 모든 것은 다 사라져버렸고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더불어 나였던 나도 소멸하는 건가.

 

언니, 언니는 이런 사람이길 바라잖아요. 언니, 언니는 쓰는 사람이잖아요. 나보다 한 발 앞선 시간을 살아가는 언니잖아요. 일어나서 써요! 라고 내 등을 떠민다. 좋았던 날, 좋은 사람이었던 Y가 오늘 나를 좋아해 주면서 좋은 사람 되라고, 쓰라고 한다.  

 

 
언니는 나에게 빛을 비춰주는 사람이다. 나는 은혜는 기억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언니와의 만남은 잠깐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다.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는 우리에게 언니는 글로 말로 시간으로 말하자면 언니 자신을 내어 주셨다. 너는 이제 나를 언니라고 불러.. 그래서 사모님인 언니는 나에게 지금껏 언니이다.

언니는 우리를 보내며 장미꽃을 들고 동지들과 함께 노래를 불러주셨고 20대 후반밖에 안되어 갓 결혼한 우리를 성숙하다고 해주셨고 그 반짝이는 눈으로 아름답게 봐 주셨고 두 손을 잡아주셨다. 따스하고 진심어린 온기를 가득 불어넣어 주셨다.

2년후에 만난 언니는 남편의 떨림가득하지만 깨는 그 한마디의 말을 열정적으로 칭찬해주셨고, 그 칭찬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우리의 방향을 비춰준다. 먹고 싶은게 뭐냐고 물어보시고 바로 그 음식을 손수 차리셔서 집으로 불러주셨다. 그 때 언니의 어머니를 뵈었다.

4년후에 만난 언니는 맛있는 밥을 사 주시고 멋진 사진을 남겨주셨고 사랑에 사랑을 더해주셨다. 그리고나는 고백을 하나 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든 눈물을 참지 않기 위해 마스카라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케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자의 어줍짢은 자기 합리화였음을 이제는 알았다는 것을... 언니는 너그러이 웃어주실 것이다.

그 후에 나의 아이들을 만날때마다 불혹의 나이에 얻은 우리 막내를 안고서 언니가 지었던 그 행복한 웃음은 내가 얼마나 멋진 보석들을 안고 살아가는 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값진 것이었다. 다이아몬드가 될 돌을 볼 줄 아는 지혜가 있는 그 사람을 내가 가지고 있다.

그렇게 십년동안 두세번밖에 마주 할 수 없었지만 언니는 빛이 되어준다. 외롭다고 느껴질때, 잘 가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생길 때, 누군가에게 막 쏟아놓고 싶을 때 언니가 떠오른다. 그때마다 언니에게 카톡을 보내지 않아도 언니가 떠오르면 그저 다시 잠잠해지고 언니에게 주어진 삶을 내가 존경하는 그 이름처럼 살아내시고 있음에 나도 나에게 주어진 순간들에 신실하고 싶어진다.

어제 사랑하는 언니의 어머니가 소천하셨다. 몸으로 함께 해드릴 수 없는 나는 어떤 위로를 드릴 수 있을지, 아버지같고 어머니같은 어머니를 잃은 언니의 마음은 어떤 순간을 맞이했을지. 기도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선물을 드리고 싶다. 따뜻한 커피한잔과 언니가 오래전 보내주신 책을 몇번을 읽고도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던...그러니까 당신도 써라!에 응답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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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ratigya 2020.03.23 23:59 신고

    언니에게 받은 따스한 사랑과 위로와 격려로 생애 첫 발걸음을 떼었어요...
    그 어두움 가운데서도 저에게 빛을 나눠주시다니요...저도 따르겠습니다...그 길을..

    • BlogIcon larinari 2020.03.25 07:59 신고

      꼭이야! 꼭 따라와야 해! ^^
      리처드 로어 신부님에 의하면 인생 전반기와 후반기 삶과 영성이 전혀 다르대. 생애 전반기에는 무언가 담기 위한 컨테이너를 만드는 시간, 후반기에는 영원한 곳에 가져갈 영원한 것들을 거기에 담는 것이 영성이래. 컨테이너 튼튼하게 만든 그대, 이제부터 천천히 글로 담기야! 언니가 계속 지켜보고 있음! ^^

 

 

 

 

미친년 글쓰기.
미친년이 글을 썼다.
엄마 죽고 사흘, 밤잠을 못 자 미쳐버린 년이 글을 썼다.

엄마의 이틀 장례식을 마치고 다음날 하루는 엄마 따라 죽은 것처럼 지냈다. 아, 실은 그 아침에 일어나 엄마 장례식에서 부른 노래, 엄마의 육성을 담은 MR에 맞춰 노래를 불러 녹음을 했다. (미친년이 노래도 했구나) 울지도 않고 녹음을 해 장례식에 참석한 친척들에게 보내도록 하고, 다시 ‘살아있음’ 스위치가 나갔다. 그리고 까만 시간을 보냈다. 이런 거였구나. 엄마가 죽는다는 게. 하관예배에 들은 설교가 까만 생각 어딘가를 스쳤다. 죽는 것이 유익이라고? 다른 죽음 말고, 엄마의 죽음인데? 엄마의 죽음이 유익이라고? 오래 생각하진 못했다.

침대에 누워 까만 시간을 혼란스럽게 보내고 새벽 다섯 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흘 전 이 시간에 동생 전화를 받았다. “엄마 돌아가셨어”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지금 몇 시야?” “다섯 시야” 그 다음에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수고해”라고 말한 것 같은데. 설마 그렇게 말했을까? 바로 그 다섯 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화가 올 것 같았다. 새벽마다 전화가 올 것 같다. 엄마 돌아가셨어. 엄마 돌아가셨어.

이러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글을 쓰고 싶었다. 엄마의 장례식과 엄마의 삶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장례식을 했다면 조문객을 맞을 때마다 수십 번 했을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말하고 싶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한달음에 썼다. 엄마의 장례식에 대해서. 엄마의 장례식에 대해 쓰려니 아버지 장례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휴대폰의 앨범을 뒤져 아버지 장례식 사진을 찾아 포스팅을 했다. 인사 글을 쓰려했는지, 우리 엄마 죽었으니 나를 위로해 달란 얘길 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썼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긴 장례식'을 썼다.

글을 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포스팅을 마치고 바로 아래 글을 보니 동생이 올린 ‘부고’가 보인다. 찬찬히 읽었다. 아, 우리 엄마가 죽었지! 맞아, 엄마가 죽었어. 한바탕 울고 나니 한결 차분해졌다. 점심을 해서 현승이와 둘이 밥을 먹었다. 처음으로 밥이 목에 넘어갔다. 그렇지. 엄마 죽음을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데... 이제 괜찮아진 거야. 이게 정상이지. 엄마의 빛나는 영혼을 낡은 육신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했던 사람 나잖아. 이제 괜찮아. 친구에게 전화 했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그리고 심지어 마감을 하루 남긴, 쓰다만 원고를 썼다.

짧은 오후가 지나고 다시 까만 생각이 되었다. 며칠 밤 다시 잠을 설치고, 새벽 5시면 새로운 두려움에 눈을 뜨고 오늘이다. 그 새벽, 페이스북에 썼던 글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이걸 썼다고? 그 캄캄한 뇌로 글을 썼다고? 미친년이 미쳐서 쓴 글이구나. 『치유하는 글쓰기』에 나오는 ‘미친년 글쓰기’라는 용어를 글쓰기 강좌에서 사용하곤 했었다. 비정상적 상태의 글쓰기. 정상에 대한 강박 없는 글쓰기.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글쓰기. 그 새벽에 바로 그 미친년 글쓰기를 실행한 것이다. 그러니까 돌아보면 미친년 상태였다.

오늘 아침엔 블로그의 엄마에 관한 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한 카테고리에 모았다. 남편에게 며칠 전 새벽에 쓴 글은 미친년 글쓰기였다고 말했더니 “정신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는구나.”라고 했다. 하긴 그 글을 쓰고 분명 마음에 비쳐든 빛이 있었다. 비로소 숨이 쉬어진 것도 같다. 그 효과 잠깐이고 다시 아득해진 정신이 되었지만. 뼛속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글인지도 모른다. 봄 햇살 듬뿍 담아서 보낸다는 메시지와 함께 풍성한 후리지아 한 다발이 집에 왔다. 캄캄한 창밖을 배경으로 두니 향기로 피어나는 존재감이다. 꽃향기 맡으니 또 쓸 힘이 난다.

모르겠다. 이 또한 미친년 글쓰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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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옥금 권사님이 지난 3월11일 새벽 4시45분 소천하셨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여러 어려움 감안하여 간소한 가족장으로 장례를 마쳤습니다. 아주 짧은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장례식만큼 긴 장례식은세상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 때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재난처럼 밀려든 아버지의 죽음이 삶을 뿌리째 흔들었고, 그때로부터 죽음은 늘 가까이 있는 살아 있는 공포였습니다. 엄마의 귀가가 조금만 늦어도 죽음을 상상하고 마음에 장례식을 꾸렸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엄마의 죽음을 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저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더했습니다. 저는 엄마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동생을 키우고 교육시킬 책임감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곤 했으니. 어릴 적부터 죽음을 짊어진 삶이었습니다. 평생 마음에 상복을 준비하고 사는 셈이었으니 얼마나 긴 장례식인지.

80세가 되기 몇 년 전부터 엄마는 ‘하나님이 나를 80에 불러 가실 것이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0세가 되는 해, 하루 전날 12월 31일에는 동생과 함께 “엄마, 내일 천국 가네. 잘 가 엄마, 송구영신 예배드리고 늦잠 잘 수도 있으니까 지금 인사할게.” 놀리기도 했지요. 엄마의 죽음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만큼 저도 동생도 단단해졌습니다. 80세, 85세, 87세 천국 가는 기도 응답이 자꾸 연기 되더니 엄마의 인사에 관용구가 하나 생겼습니다. “오래 살어서 미안허다. 고맙다. 복 받어라.” 80세 천국행 기도응답은 노구의 엄마가 짐이 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으론 워낙 기도가 센 분이라 엄마가 정해놓은 시간마다 혹시, 하며 마음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80세부터 16년 간 또 다른 장례를 준비시켰습니다.

지난 2월 초에 사고로 응급실로 가신 이후 엄마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노인요양병원에 한 달여 계셨는데, 생애 가장 애달픈 한 달이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면회를 할 수 없어 외롭게 홀로 누워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쪼여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직 말씀을 잘 하시던 입원 후 20여 일, 매일 동생이 전화하여 시편23편을 외우시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연결이었습니다. 또렷이 끝까지 외우셨습니다. 3월2일, 상태가 안 좋아져 응급실로 나오셨는데 그날 잠깐 엄마를 만났습니다. 숨 쉴 기력 밖에 없는 엄마에게 “엄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해 줘.” 한 마디에 가쁜 숨과 함께 또 외웠습니다. 엄마 목소리로 듣는 마지막 시편 23편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삼일 전, 병원에서 면회를 허락했습니다.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엄마, 신실이 왔어. 엄마, 엄마” 말씀도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집에 오는 차안에서 엄마 곁에 있는 동생이 전화 연결을 해주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아 울기만 하다 저도 모르게 찬송을 불러드렸습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먼저 가신 이모들.... 엄마는 임종 전문가였습니다. “숨넘어가는 순간이 옆이서 울지 말고 찬송 불러드려야혀.” 하시던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찬송하니 엄마가 눈을 뜨고 반응하며 심지어 입을 달싹거리셨습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동생이 가서 전화하고 제가 찬송하고 엄마는 호흡으로 함께 하고. 셋이 그렇게 엄마가 사랑하던 찬송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오후에는 입을 달싹달싹 하며 따라 부르시고 찬송을 마친 후에 주르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해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엄마에게 불러드린 마지막 찬송은 ‘예수 사랑하심은’입니다. 어린 손주들에게 마르고 닳도록 불러주신 노래입니다. 졸저 『신앙 사춘기』를 탈고하고 남편과 함께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예수 사랑, 떠나서 다다른 사랑’이란 곡이고. 엄마의 찬송과 시편 암송하셨던 육성을 담아 영결예배에 불러드렸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엄마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맑은 정신, 총기를 끝까지 유지하고 계셨지요. 그 이유를 저는 압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며느리에게 늘 물으셨다고 합니다. 거의 침대에서 생활하시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 ‘지남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아셨지요. 요일은 오직 주일 11시 예배를 향한 정신이었지요. 그 지향이 엄마의 정신을 건강하게 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루지 못했지만 엄마가 그렇게 사모하던 목사님을 모시고, 엄마가 사랑하시던 두 동생, 그리고 엄마를 좋아하던 조카들과 조촐한 예배 드렸습니다.

 

 

39년 전, 아버지 장례식, 목회하던 교회 예배당에서 드렸던 영결예배를 떠올립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 일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끌고 갈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던 남매였습니다. 엄마의 영결예배에선 슬픔에 압도되지 않고 영예롭게 엄마를 보내드렸습니다. 어른이 되어 엄마의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저는 노래했고, 동생은 엄마의 96년 인생과 마지막 시간을 들려주었습니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유머감각과 따스한 연민을 잃지 않고, 엄마가 남긴 모든 이들을 영예롭게 함으로 엄마를 영예롭게 했습니다. 평생 예배만 사모하던 엄마에게 걸맞은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장례식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기나긴 장례식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오지도 않은 엄마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온 삶. 제 인생 가장 벗어나고 싶었고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 결국 저를 만들고 지켜내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떠올리며 울고 또 울어야 할 장례식이 아직 남아 있고, 이제 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의 죽음을 짊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속에서, 계속 이어질 마음의 애도와 장례식 속에서 천국을 향한 실존적 소망을 살게 될까요.

 

 

39년 전 아버지 영결예배 사진입니다. 엄마도 아니고, 단발머리 저 자신도 아니고 제 옆에서 우는 동생 얼굴, 카메라 초점에서도 빗나가 흐릿한 동생 얼굴이 평생 가장 크게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단단해진 동생에 대한 책임감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상복 언제 다시 입을까, 평생 두려워했던 건데. 장례식 마치고 동생과 얘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우리에게 상복을 안 입혔다.” 상복도 못 입어서 안타까운 이별이지만 더는 상복을 입히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마음이려니 생각해봅니다. 불멸의 다이아몬드 같이 찬란한 영혼을 가진 엄마는 오래 써서 망가진 육신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들 전해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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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목만이 2020.03.17 13:46

    그 마음.헤아릴 수도 없지만 부디 평안해지시길 기도합니다.눈물이 계속 나요.

  2. 표면수 2020.03.17 14:05

    종교을 떠나서 진실되게 살아가는 그래야만 하는 우리가족들 모습이 보입니다
    가*끔은 잊고지내는 단어 가족... 알게해주어서 고맙습니다

  3. 냉면사랑 2020.03.17 19:49

    제 나이 29, 미혼이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병석에 누우신지 2개월동안 장례를 준비했는데요. 아버지는 내내 나 죽으면 눈물 흘리지 말고 평소 좋아하던 찬송가를 오빠에게 불러달라고 하셨어요. 소원하셨던대로 아버지 가는 길에는 온 가족이 다 집에 있을 때였고 찬송 부르는 오빠의 큰 목소리가 엄마의 우는 소리를 덮었더랬습니다. 아버지의 기도와 어머니의 희생으로 지금의 제가 있기에 저 또한 아들을 위한 기도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님의 글을 읽으며 더욱 더 기도의 소망을 크게 가져 보렵니다.

  4. Kelly (은경) 2020.03.21 13:59

    너무나 늦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알게되어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평안이 가족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몸 상하시지 않게....몸과 마음 잘 돌보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3.22 14:29 신고

      아, 켈리님!
      늦지 않았어요. 적절한 타이밍의 위로예요. 감사해요.
      계신 곳도 안전하지 않은 것으로 뉴스에서 봤어요. 켈리님과 언니, 가족들의 평화를 위해 저도 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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