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글 모음/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8 인생 후반으로 떠나는 여행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8 허무의 강물 위에서 수속을 다 마쳤고, 탑승 시간까지는 넉넉하게 여유가 있다. 공항 탑승구 앞에 앉았던 그 어느 때와도 느낌이 다르다. 어쨌든 떠난다는, 여행 그 자체로 이미 가벼워지고 설레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들뜨기보다는 가라앉아 있고, 가라앉은 마음은 묵직하다. 뭐라 딱히 이름이 붙여지지 않는, 참 낯선 감정이다. 일 년여의 시간을 네팔에서 보낼 예정이다. 들뜬 설렘은 없지만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은 있다. 이른 퇴직 후에 다른 삶을 구상하겠다는 남편의 결단 뒤에 좋은 우연이 따라왔다. 네팔에서 일하며 선교하는 후배와 닿아 가서 일도 하고 선교도 돕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몇 년 기한으로 남편 혼자 떠나려 했으나, 뒤늦게 급하게 나도 일단 일 년 정도 함께 하기로 했다... 2023. 11. 1. 마지막 사랑, 애도 에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란 제목으로 중년의 영성에 대해 연재하는 글입니다. 3년 연재의 마지막 편 하나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독자 메일을 받았는데, 여기 등장하는 최 선생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쓰신 책이 있는지 물어 오셨어요. 기분 좋은 메일이었습니다. 이 글은 픽션이고, 최 선생님은 만들어진 캐릭터이니까요. 중년 영성은 노년의 삶에 닿기에 치매, 존엄사 등으로 최근 글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호의 주제는 죽음과 애도입니다. 픽션의 장점을 살려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머니의 죽음'을 그려보았습니다. "엄마 방 엄마 침대에서 편안히 돌아가셨다면, 임종을 지켰다면, 장례식을 제대로 치렀다면..." 그대로 써보았는데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쓰는, 내가 바랐던 『슬픔을 쓰는.. 2023. 9. 2. 존엄한 죽음, 그 불가능의 가능성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6 최 선생님은 주변 모든 이들을 위한 상담자 같으시다. 선생님 댁 현관 앞에서 울며 나오는 한 여자분을 만났다. 내담자려니 했는데, 친구분의 며느리란다. 얼마 전 치매 증상으로 요양병원에 가신 선생님 친구분, 그 소식으로 선생님도 한동안 적잖이 힘겨워하셨었다. 듣자 하니 어머니 요양병원 입원 후 자녀들 사이 갈등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며느리가 선생님을 찾은 것이다. 집에서 치매 어머니를 모시던 분이다. 스쳤지나 듯 마주쳤지만, 고통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일은 뭔가 남 일 같지가 않다. 선생님, 힘들어 보이세요. 좀 쉬실까요? 그러게. 기력이 없네. 이젠 상담도 접어야 할 때가 됐나 봐. 잠깐 있어 봐. 으읏짜, 내가 뭘 좀 먹어야 한다. 네, 선생님... 2023. 7. 1. 치매, 기억, 감정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5 언젠가 최 선생님과 치매에 관해 얘길 나눈 적이 있다. 지금처럼 편한 사이도 아니었고, 여러모로 민망했던 기억이다. 내가 선생님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죄송한 마음, 당황한 마음으로 ‘아무말 대잔치’로 사과드리던 끝에 툭 나온 말로 선생님께서 정색을 하셨었다. 화내시는 모습을 처음 뵈었었다. 돌아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선생님을 몰랐다. 몰라도 한참 몰랐고, 무엇보다 노인과 편하게 대화할 태도가 되어있지 않았다. 존경심도 있었지만, ‘노화’를 주제로 노인과 대화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만 했었다. 건망증, 치매 이런 얘기를 하던 끝이었는데, 어설픈 배려를 하려다 노인에 대한 선입견이 들통나 혼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한 솔직한 대화로 당시 부쩍 심해진 건망증으로 높아.. 2023. 5. 1. 아버지 너머 하나님 아버지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4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한참 낄낄거렸다. 어릴 적 교회 친구들 모임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의 나비효과였다. 친구 J가 아들이 만든 정체불명의 초콜릿인지, 빼빼로인지를 올린 것이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마시멜로를 녹이고 초콜릿 으깨고 난리를 치더라나. 맛있는 걸 그냥 먹지 왜 그걸 녹여 먹느라 고생을 하느냐, 녹여 먹으면 더 맛이냐, 하고 말았다고. 냉동실에 고이 넣어둔 걸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알고 보니 밸런타인데이에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이었다는데, 그 모양새를 보자 다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와, 이걸로 고백하면 바로 이별 통고받는 거 아냐? 맞겠는데! 아냐, 정성이라고 감동할 수도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유치원생 찱흘놀이 작품 같기도 하고, 뭉크의 ‘절규’도 떠.. 2023. 3. 1. 사춘기 오춘기 육춘기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3 친구의 축 처진 어깨, 자신감 잃은 말투가 눈에서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 일처럼 마음이 무겁다. 늦둥이로 얻어 애지중지 키우는 아들과의 갈등으로 생사를 오가고 있다. 생사가 실제 생사겠는가. 마음이 죽어간다는 뜻이다. 시들어가는 친구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커다란 덩치에 가정, 친구들, 교회 공동체…. 어디서든 해결사 역할을 하는 남자 사람 친구이다. 한 교회에 다니며 중고등부 때부터 알아왔다. 그 시절 친구 모임이 느슨하게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 시간들이 많아져서인지 더 자주 얼굴을 보고 있다. 친구 J는 우리 중 제일 늦게 결혼했다. 아들 둘을 내리 낳았는데 지금 현재 그 무섭다는 중2, 중3이고. 사춘기를 맞은 첫째, 그 뒤를 이어 다른 방식으로 질풍노도에.. 2023. 1. 2. 밤에 우리 몸은, 영혼은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2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영화 을 보았다. 80대의 제인 폰더(Jane Fonda)와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가 주인공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먼저 빠져든 것은 노인이 된 두 거장의 얼굴과 몸이었다. 저렇게 예쁘고 잘생긴 명배우도 늙는구나! 도발적인 대사에 귀가 커졌다.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요. 괜찮으시면 언제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잘래요?” 애디 무어 역을 맡은 제인 폰더가 루이스 워터스 역의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하는 말이다. 영화 속에선 오래 알고 지내던 동네 할아버지에게 동네 할머니가 불쑥 찾아가 하는 제안이고. “섹스를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밤을 견뎌보려고 그래요.”란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혼자 사는 두 노인이 외로운 밤을 견디기 위해 밤을 함.. 2022. 11. 1. 중년의 성(性), 그리고 성(聖)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1 (시니어 매일 성경 9,10월호) “섭섭해, 정 선생. Out of sight out of mind 맞지?” 돌려 말하는 법이 없으시니 말씀하시면 그게 전부인데. 정말 섭섭하시구나! 얼굴 뵌 지 한참이지만 메시지로 안부를 여쭙고 있고, 가끔 꽃 사진도 찍어 보내주시곤 하여 여전히 가까운 마음인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셨나 보다. 일이 좀 많아지기도 했지만, 내가 관계 맺는데 취약한 지점이기도 하다. 꼭 자주 만나야 하나, 각자 잘 살면 되지, 하는 생각인데 친구들에게 섭섭하단 소릴 듣곤 한다. 최 선생님께도 듣고 마네. 마침 선생님 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의가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서프라이즈로 찾아뵈었다. 상담이 있으실지 모르지만 일단 쳐들어가자. 잠깐 뵙고 오더라.. 2022. 9. 1. 황혼의 부부, 부부의 황혼 #2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0 여행의 묘미가 있다.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풍경을 만나는 기쁨의 순간이 있다. 여행뿐이랴, 삶에도 가끔 들이닥치는 그런 순간이 있다. 반면 고난 또한 늘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것이 인생이고 여행 역시 그러하다. 3박 4일, 최 선생님과의 제주여행도 그 단순한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상상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었고 동시에 생각보다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긴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선생님도 노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었다. 우리 엄마나 시어머니께 느껴지는 살아온 날이 만들어낸 고착이랄까, 그런 것 말이다. 가끔 한 번씩 뵐 때는 몰랐던 점이다. 어쩌면 모르고 싶었는지도. 내 마음속 최 선생님을 좋은 노인의 표상으로 만들어 놓고 지나치게 긍정적으로만 .. 2022. 6. 30. 황혼의 부부, 부부의 황혼 #1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9 최 선생님과 함께 여행, 그것도 제주여행이다. 일이 되려면 이렇게 또 쉽다. 하루게 다르게 쇠약해지시는 선생님 모시고 햇살 좋은 날 드라이브 한 번 해야지 벼르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걷기도 전처럼 누리질 못하시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함께 공부하던 선생님 한 분이 제주 한 달 살이 중이라며 보낸 풍광 사진에 감탄하다 된 일이다. K 선생님은 모임에서 마음이 통하던 큰 언니 같은 분이다. “와, 부럽네요!” “부러우면 와요.” 이런 말을 주고받다 전격 성사되었다. 썩 건강하지도 않은 노인을 모시고 하는 여행에 이렇게 설레다니. 나답지 않은 일. 못 말리는 나의 최 선생님 사랑이다.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하아, 이런 날도 있네요. 선생님과 비행기 여.. 2022. 5. 4.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