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강사가 되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인 걸 어떻게 알아요?’ 입니다. 애인이 있는 사람이나 솔로나 각각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말 같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기대와 좌절을 듣습니다.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싶다. 연애하고 싶다. 나만 이렇게 연애가 어려운 것인가? 어찌하여 나는 모태솔로일까? 내 짝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연애가 이렇게 힘든데 행복한 결혼이란 가능할까? 만나면 편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과 편하진 않지만 설렘이 있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을 선택해야 할까? 녹록치 않은 연애와 늦어지는 결혼에 대한 온갖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는 한 마디가 그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요?’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사람이 내 짝인지 아닌지는 나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인지 아닌지를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에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용하다는 연애강사도, 청년부 목사님도, 롤모델로 삼은 선배도 아니고 당사자인 내게 말입니다.

 
앞서 말한 질문에 담긴 기대에는 태초부터 정해진 바로 그 사람을 찾을 거라는 환상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뚜렷한 표징 같은 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일 수도 있겠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일생에 단 한 번, 나의 반쪽을 만나는 일인데요. 여기에 더하여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선배들의 러브스토리, 결혼 골인 스토리, 특히 배우자기도 딱딱 맞네스토리 등이 환상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결혼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죄다 뭔가가 있습니다. ‘결코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인데 만나고야 말았다.’ 하다못해 정말 맘에 드는 건 하나도 없지만 결혼하고 우연히 수첩에서 발견한 배우자기도 목록을 보이 어쩌면 그렇게 딱딱 맞더라.’ 나름대로 뭐라도 있습니다. 이게 함정입니다. 그 스토리들이 다 사실이지만 결혼 이후 간증 같은 고백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아름답게 해석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 거짓이란 얘기가 아닙니다. 예컨대, 성경의 요셉 이야기만 보더라도 풀스토리를 알고 성경을 읽는 우리와 구덩이에 던져진 현재를 사는 요셉 당사자의 관점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가 아니라 총리된 요셉이 생을 반추하면서 돌아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감회에 젖어 하는 고백이 바로 선배들의 결혼스토리란 말입니다. 그들도 그 시절 찌질했고, 외로움과 미숙함으로 헛발질도 했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여러분처럼요.

 
그러고 나서 그 어렵던 결혼을 한 후 이야기가 한 줄로 꿰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사람 사람마다 각각 다른 스토리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일단 결혼을 했다는 메리트 하나로 바로 자칭 연애와 결혼 멘토가 되어버리는 선배들이 많습니다. 본인의 경험에서 건져 올린 지혜(라 쓰고 훈수라 읽는다)를 나눠주고 싶은 것이 많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애 문제의 정답이 아니라 그 선배만의 입니다. 인생의 문제에서 어찌 정답이 있겠습니까. 그 선배만의 기질과, 가정의 배경과 외모, 신앙의 컬러에 맞는 방식의 인도하심이었을 것입니다. 선배들의 지도가 전부인 양 거기에 나를 맞추려니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고, 그러니 좌절할 일도 아닙니다. 나는 안 되나보다.’ 자존감 바닥에 내팽개칠 일이 아닙니다.

 
많은 청년들이 모인 수련회에서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 뿐 아니라 여러 분의 상담 전문가들이 함께 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물어볼 것이 있다며 찾아온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자친구와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헤어져야 할지를 물어왔습니다. 저는 그 정도라면 헤어질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난감한 것은 어제 다른 분께 상담을 했는데 헤어지라는 점괘(?)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누가 맞는 것입니까. 둘 다 정답입니다. 상담자 각자의 삶에서 나온 정답입니다. 경험의 한계 안에서 나온 최적의 답입니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겠다고 연애강사나 선배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듣되 상대적인 답이라는 전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 확인하면 족합니다. , 이 언니의 결혼과 삶에도 하나님이 일하셨구나. 내게도 그렇게 하시겠네. 이 형에게 이런 이야기를 주셨구나. 내게도 이야기를 주시겠네. 암요,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본인만의 스토리를 주십니다. 그러니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 어려운 결혼, 나만 극복 못하는 것 같지만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모르는 채 이나 의 과정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낙심하지 말고 쉬운 답을 찾아 남의 이야기에 나를 꿰맞추려 하지 마십시오. 찌질하고 자존감 낮은 내 일상이 그럴듯한 이야기 한 줄로 꿰어지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들을 귀도, 행동에 옮길 손과 발도 여러분 자신의 것이어야 한답니다.

 

<QTzine> 2월호 기고글


 


1월부터 <QTzine>에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
(나자연)'라는 꼭지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애강의를 하고 상담하며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한 마디가 이것입니다. 연애를 실패하는 이유중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되어 연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되라'는 말은 얼마나 모호하고 어려운 말인지요. 왜 아니겠습니다. 평생의 과업인데요. 요즘은 연애를 돕는 책이며 강의가 정말 많습니다. 연애하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실제적인 스킬이 널리고 널렸지요. 저는 그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연애 당사자들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라. 어떻게 되어라.'는 방식은 순간적으로 뭔가 연애가 잘 될 것 같은 기분은 느끼게 하지만 결국 자신의 연애를 (궁극적으로 자기의 인생을) '방법'에 의존하여 본질에 관한 고민을 회피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들을 땐 빵빵 터지고 좋았는데 실천으로 옮기자면 한없이 어려운 연애 노하우가 많아질수록 '못하는 나'에 대한 자괴감이 커져 스스로 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되어라'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불편한 것은 '더 나긋나긋해져라. 여성적이 되어라' 입니다. 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더라는 좌절의 경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더 나긋나긋해진다고 애인이 생기거나 결혼을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나 자신이 되는 것이 관건입니다.

더 나이 들어 연애계를 은퇴하기 전에 '오우 연애' 그 이후, 은혜의 연애선생으로서 마지막  총정리 한 번 하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나자연 1탄입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요량으로 카페에 자주 갑니다. 하지만 그곳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할 수 없게 만드는 유혹이 많습니다. 와이파이가 빵빵 터지는데 인터넷 접속을 안 할 수 없구요. 어쩌다 이 늙은 나이에 연애(戀愛)계를 못 벗어나고 연애강사 소릴 듣자니 옆자리 커플의 애정행각은 놓칠 수 없는 임상현장입니다. 갈등상황이기라도 하면 몸이 그 방향으로 기울면서 한 쪽 귀가 커질 지경입니다. 주책인줄 알지만 어쩌겠습니까. 어느 대학 앞 카페였습니다. 건너편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커플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세련된 남친이 한 번씩 귀엽고 수줍은 여친의 이마에 뽀뽀를 하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내가 결혼을 했으니 망정이지 골드미스 제자들() 봤으면 부러워서 죽어봐~정신 차리는 사태가 될 뻔 했습니다. 남친님이 화장실을 가시는지 자리를 비웁니다. , 그때 혼자 남은 우리 여친님의 표정. 아까 그 귀요미가 아닙니다. 무뚝뚝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의 무표정으로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폰을 들여다봅니다. 거울을 꺼내 화장을 매만집니다. 남친 등장하자 귀요미도 부활. 눈웃음과 함께 무슨 멘트를 날리는가 싶더니 다시 뽀뽀. 그리고 이중창으로 하하호호.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인가 봅니다. 남친 앞에서 짓던 표정과 혼자 남았을 때의 표정이 놀라울 정도로 다른 여친을 보니 아직 많이 긴장되나 봅니다. 남친 앞에서 편하게 있어도 충분히 예쁜데... 나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예쁜 아가씨, 너 자신이 되어 연애해.’

 

오늘도 연애 앞에서 애인의 눈에 들기 위해 물속의 다리와 수면 위 얼굴이 따로 노는 채 불안에 떨고 있는 여자, 남자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물론 사랑에 빠지면 스스로에게도 낯선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던가, 이렇게 사소한 일에 상처받는 사람이었던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놀라기도 합니다. ‘너 그런 사람이었어? 깐깐함과 도도함 안에 이렇게 착한 여자가 숨어 있었다니.’ 그렇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갑니다. 사랑의 신비입니다. 아가페(Agape)라 불리는 하나님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로맨틱 러브라 하는 에로스(Eros)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로스는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오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유효기간이 대략 16개월이라 하지요. 사랑에 빠져있는 그 순간, 영원할 것 같은 콩깍지는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부모님들 같은 으르렁 부부는 없어야지요. 처음엔 나름대로 가슴 뛰는 사랑으로 시작하셨을 테니까요. 떨어질 콩깍지라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생에 딱 이 시기, 이성을 향하여 무한 몰입하게 하는 이 충만한 에너지는 짝을 만나기 위해서 필요하기도 하며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합니다. 기나긴 인생에서 아주 짧은 시기를 지나는 감정의 쓰나미입니다. (하긴 환갑이 넘어도 에로스 에너지 충만하신 분들도 있습디다만 그분들 예외) 에로스는 지나갑니다. 연애는 짧고 결혼은 길며, 허니문은 짧고 한 인간을 받아들이기 위한 인고의 세월은 깁니다.

 

모든 연애가 결혼이 되는 것 아니지만 연애는 둘만의 몰입관계 라는 점에서 부부관계와 비슷합니다. 부부관계만큼 밀도 있는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부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보여주는 관계입니다. , 알몸이라고요? . 손으로 뱃살을 가릴 수도 없습니다. 가릴 데가 한 두 군데여야 말이지요. 알몸은 그나마 낫습니다. 나름대로 착한 사람, 고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포장하고 있는 인격의 포장지 다 벗겨지는 것에 비하면요. 많은 선배들이 결혼은 환상이 아니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결혼했던 연예인 커플을 몇 달 만에 이혼소송 기사에서 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남친이 원하는 나로 연애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오래 갈 수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해야 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나를 변화시키겠다는 결단은 아주 중요합니다만 그것조차도 나 자신이 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솔로로 해를 넘기고 억울한 한 살을 더 먹었다 해도 나 자신이 될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어떻게 연애를 시작하긴 했는데, 그래서 너무 좋은데 싱글일 때보다 불안이 높아졌다면, 연애가 힘겹다면 멈추고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고 있는가? 나 자신이 되는 것은 연애보다 결혼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