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이거 마늘 까는 게 재밌는데. 더 까면 안 돼?"

"남은 마늘 내가 나중에 깔게."

"오늘은 이 마늘 다 까야겠다."

 

온라인 수업 중 쉬는 시간에 나와 마늘을 까는 아이. 기시감이 든다 싶었더니, 8년 전 엄마 마음에 들고자 파를 까던 아이였다. 제가 깐 마늘의 반은 제 입으로 들어간다. 마늘을 좋아하는 아이. 고기 반, 마늘 반 구워서 마늘을 더 맛있게 먹는 아이.

 

(클릭) -> 2012/10/25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 엄마와 함께 파 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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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출판단지 갈 사람?" 

일이 있는 날이라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빠지면 당연히 무산될 줄 알았는데. 이런, 쿵떡쿵떡 시간 계획을 세우더니 셋이서만 다녀왔다. 어, 이 사람들 봐라! 마키아신실, 조폭신실(JP&SS), 우리 집 실질적 군주인 나를 제쳐두고 나들이를 도모해? 3할 정도 섭섭, 7할은 홀가분이었다. 돌베개 출판사의 책 몇 권과 도서목록을 한 보따리 싸들고 와서는 전에 없던 관심 폭발이다. 엄마 우리 집에 신영복 선생님 책이 있어? 엄마는 뭐뭐 읽었어? 감옥에 몇 년을 계신 줄 알아? 나는 이제 한자 공부를 좀 하려고. 한자를 알아야 책이 잘 읽어지는 것 같아....... 사연인즉슨, 돌베개 출판사의 편집주간이신 S선생님을 만나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꿈과 진로가 1년에 한 번씩 바뀌는 현승이가 최근 아빠에게 '책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묻고 한참 얘길 나누곤 했다. 그 대화 끝에 아빠가 나름 뜻을 가지고 계획한 나들이였던 모양이다. 

 

'휴먼 라이브러리'라고, 두 아이들 모두 안식년 '꽃친'을 하면서 했던 활동이다. 말 그대로 다양한 어른을 직접 찾아가 만나 대화하면서 배움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영락없이 휴먼 라이브러리였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진 않았지만 두 아이 모두 새롭게 책에 관심을 가지고, 주신 책을 집에 와 앉은자리에서 읽어버렸다. 채윤이는 그 다음날 바로 중고서점에 가서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사 왔다. 현승이는 대안학교에 가서 한참 느슨한 생활을 하다 성적표 날아온 날, 조폭신실 엄마에게 벼락을 맞았다. 벼락을 내렸으니 제우스 신실. 참고 참았던 걸 한 번에 터뜨려 줬더니 식겁해서는 자발적(벼락 맞은 후니까 자발적이 아닌 건가?)으로 몇 가지 절제 규정을 정하고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책을 다시 열심히 읽겠다며 김훈의 <남한산성>을 뚝딱 읽더니 <칼의 노래>를 붙들고 있는 중이다.

 

정말 좋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으면 좋은데, 어느 새 커서 김훈, 신영복 같은 거장의 책을 함께 읽고 자연스러운 수다를 떨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렸을 적부터 "읽고 쓰는 것을 꾸준히 하고, 즐거워한다면 어떤 직업을 가져도 된다."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다고 책을 열심히 사주거나 독서 일기를 쓰게 하거나, 제대로 교육을 하지도 못했다.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있고. 보니까 채윤이는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엉덩이가 아닌 것 같다는 섣부른 판단을 하기도 했다. 현승이가 한때 솔직한 일기를 쓰고, 시를 짓기도 했지만 정말 '한때'였다. 다 큰 아이들을 억지로 읽고 쓰게 할 방법은 더더욱 없다. 대학에 간 채윤이가 제 안의 궁금증을 책으로 풀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도록 반가웠다. 내 책장의 페미니즘 책을 기웃거리고, 어떤 저자에 꽂혀서 읽고, 필사하고. 그 어떤 모습보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읽고 쓰는 힘이 제일이다. "나는 모른다. 배울 것이 있다. 배워야겠다”라는 태도로 읽고, 그러다 한 저자에게 푹 빠지고, 그 저자가 소개하는 다른 저자를 새로운 선생님으로 만나고. 이럴 수만 있다면 좋은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한다. 또 자기 경험을 글로 쓸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과 아픔을 겪더라도 결국 그 상처를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무늬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이고,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드는 확신이다.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다 보면, 어쩌면 그렇게 다양한 아픔이 있을까 싶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를 진행하던 처음 얼마 동안은 매 시간 글로 나온 고통의 무게에 압도되어 몸과 마음 가눌 수가 없었다. 회가 거듭되면서, 사람 사람 글이 이끄는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서 달라졌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에겐 자기 존재를 지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이 아무리 커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 고통보다 더 큰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참여자들은 글이 이끄는 길을 따라 필연 내면의 아픔을 만나게 된다. 글을 듣다 보면 늘 명치 부분에 통증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압도되진 않는다.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아직 인정할 수 없지만 발설하는 고통보다 그분 안에 있는 더 큰 힘이 내겐 보인다. 글을 쓴다는 것, 정직한 글을 쓴다는 것을 그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평생 쓰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보여주기 위한 글, 허세 가득한 글이 아니라 절실하고 진실한 글 말이다. 작가가 되는 글이 아니라, 자가 치유와 자가발전의 기반이 되는 글 말이다. 

 

성인이 되어 자기를 찾느라 흔들리고 방황하는 채윤이도, 청소년기 끝에서 막막한 나날을 사는 현승이도 그저 읽고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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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짧은 소설 모음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을 읽다가 꿀재미 발견.

소설 제목은 "되면 한다" 이고,

"우리 사비 회만원이지?"

"닮은 살걀" 이런 말들.

 

이런 말장난 좋아서 껌뻑 죽는 나는 식탁에 앉아 애들에게 킬킬거리며 전해주었죠.

방역이고 뭐고 밥풀 튀면서.

"엄마, 우리 예전에 홈대 현타운"에 살 때 말야......"

웃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내 싱거운 장단에 춤춰주는 사람은 역시 현승이.

홈대 현타운, 홈대 현타운....... 나 이런 거 왜 이렇게 재밌어? 

 

여기저기 만나는 사람마다 이 얘길 전하고 살아 있는 사례를 많이 모아보았습니다.

 

번둥 천개

곱은 졸목길

야치 참채죽

중고딘 알라점(친구 자신의 실수)

흼과 꾸망(친구가 강의를 듣는 중 강사의 말 중에서 주웠다고)

자둑과 방기(젊을 때 교회 목사님 설교에서, 이 날 설교 이후 몇 개월 목사님 얼굴만 보면 터져서 죽는 줄 알았음)

오백쩜 종뻔(내 경험. 매우 어려운 분의 차를 얻어 타고 가다 어디서 내려주면 되냐는 말에 명일동 500번 종점 앞에 내리고 싶은 심정을 담음)

사랑아 보영해(방송 출연자의 실수)

 

이런 거 좋아하는데 좋은 사례와 간증 있으면 댓글이든, 메시지든 전해주십쇼!

단어의 초성을 바꿔서 발음하는 이런 현상을 '스푸너리즘(spooerism)이라고 한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뉴칼리지의 학장이었던 W. A. Spooner가 이런 실수를 자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 조금 다른 꿀잼, 사진 이야기

 

엄마, 나 꿀물 좀 먹을게.

혼자 타 먹을 수 있어? 더운물에 타서 얼음 타는데......(반사적으로 일어남)

아냐, 아냐, 엄마. 내가 혼자 할 수 있어. 바로 마실게.

바로 꿀물 마시는 현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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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이가 누나를 위해 준비한 저녁 식사.

누나 들어오기 30분 전에

엄마가 제게 차려줘 맛있고 행복하게 먹은 그대로

누나에게 해주겠다고.

 

애는 많이 쓰던데,

 

샐러드드레싱을 막막 깍두기까지 뿌리고, 

밥과 반찬 비율 안 맞고,

 

정성이 담긴 것 같기도 하고,

신경질 나서 막 차린 밥 같기도 하고,

 

누나는 잠깐 감동하고 먹기 시작하자 바로

돈가스 더 구우라 하고,

깍두기 더 꺼내고 그런다.

 

우리 현승이,

(나이는 여덟 살 아니고 열여덟 살)

마음은 참 깊고 따뜻한데,

깊고 따듯한 마음에 손이 '똥손'이라......

그 따스함과 청순함과 깊이를 못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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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ㅅ ㅣㄴ ㅐ 2020.05.05 19:02 신고

    똥손이어도 괜찮아~~~~
    너무 감동적이예요 ㅡ.ㅜ

    • BlogIcon larinari 2020.05.08 09:47 신고

      pratigya 이모가 어릴 적부터 현승이 마음에 공감을 많이 해줬던 기억 :)

우리 집은 엄마, 아빠, 누나 저까지 네 명의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누나는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누나 성격은 저와 정반대로 외향적이고 밝습니다. 저랑 누나는 싸우기도 정말 많이 싸우지만 다른 남매들에 비해 대화도 많이 하고 서로 잘 챙겨주는 남매입니다


아빠는 무겁고 깊은 사람입니다. 저의 고민을 절대로 가볍게 들으시지 않고 항상 의외의 답을 주시는 분입니다. 항상 진지할 것 같은 아빠가 가끔은 유머러스하게 농담도 많이 하시는데 그다지 재밌지는 않습니다


엄마는 세상에서 저랑 가장 웃음코드가 잘 통하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저와 가장 많은 대화를 해주시고 항상 밝은 분위기를 주십니다. 이런 엄마가 한 번 화내면 정말 무섭습니다.


저는 가족이 정말 편하고 식구들이 다 같이 있으면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근데 왜인지 모르게 가끔 식구들을 벗어나면 좀 편해지고 해방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느낌은 세상 모든 사람이 느끼는 기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가지 않고 인생의 'pause' 버튼을 누르고 1년을 지냈다. 청소년 갭이어 '꽃다운 친구들'과 함께 일 년의 방학을 가진 현승이가 다음 행보를 정했다. 갭이어 이후 그대로 집에 남아 혼자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획득하고, 혼자 입시 준비를 하고 대학생이 된 누나의 길을 따를 자신이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했고, 대입 학원에 불과한 분당의 일반 고등학교에 가기는 싫다고 했다. 고민 끝에 누나 채윤이가 툭 던진 '소명중고 있잖아' 라는 말 한 마디가 첫 이정표가 되었다. 온라인 오프라인, 인맥 라인까지 총동원 하여 알아본 학교는 지금으로선 현승에게 딱 맞는 학교이다. 입학전형 마감일을 코 앞에  두고 폭풍 준비에 돌입하여 접수를 마쳤다. 


입학원서 서류에는 현승이가 쓰는 가족소개 란이 있는데. 바로 거기 쓴 짧은 소개 글이다. 몇 문장으로 정리된 아빠, 엄마, 누나의 캐릭터가 흥미롭지만 엄마 눈에 볼드체로 강조되어 들어온 부분은 마지막 단락이다.  "근데 왜인지 모르게 가끔 식구들을 벗어나면 좀 편해지고 해방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반가운 문장이다.  제대로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으로 읽혀 고맙고 반갑지만, 어쩐지 가슴 한 곳이 텅 비어 찬바람이 휘잉 지나는 느낌이다. 



일기와 시에 비춘 현승이 가족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2011년 일기이니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기이다. 아홉 살! 현승이가 어릴 적에 참 좋아했던 위기철의 소설  아홉 살 인생』도 떠오른다. 아무튼 이렇다.


우리 엄마는 중독이 2가지 있다. 1개는 엄마 핸드폰에 있는 과일 짜르기 게임 중독이고 또 하는 패이스북 중독이다. 매일 식탁에 않으면 패이스북 아니면 과일 자르기 게임을 하한다. 아빠는 자기 중독이다. 아침에 엄마가 깨워도 잘 안 일어난다. 어쩔 때는 내가 학교를 간 다음에 깰 때도 있다. 나는 엄마 중독이다. 매일 엄마를 안은다. 엄마가 좋다. 우리 누나는 춤을 추는 게 중독이다. 매일 우리 방에서 춤을 춘다. 그럴 때 누나를 보면 너무 웃기다. 


덕분에 엄마는 과일 짜르기 앱을 바로 지우고 과일 짜르기 중독에선 벗어났으나 그 이후에도 다양한 중독에 빠져 여전히 허우적대는 중이다. 다른 식구들의 중독은... 흠... 내 알 바 아니다. 



2015년 1월에 쓴 시이니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가족의 캐릭터를 인식하는 눈이 조금 깊어졌달까, 아니면 더욱 주관적이 되었달까.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현승 특유의 반어법을 사용한 돌려까기 기술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돌려까기는 열일곱인 지금의 현승이가 다양한 장면에서 흔히 쓰는 기술이다.) 


우리 아빠는 운동도 잘하고 건강하다.

그래서 이름이 김병약(病弱)

 

우리 엄마는 글쓰는 걸 싫어하고

잠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름이 정원고(原稿)

 

우리 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머리가 좋다.

그래서 이름이 김무식(無識)

 

나는 었떤 일에도 긍정적이다.

그래서 이름이 김절망(絶望)

 

사실 우리집은 거꾸로 가족이야. 

 

* 괄호 안의 한자는 편집자인 엄마가 삽입.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기억은 다른 장소에서 다시 말할 때마다 개정판으로 다시 쓰인다. 아홉 살, 열두 살, 열일곱 살의 눈으로 보는 가족의 모습은 이렇듯 다르다.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한 인생이 무르익고 성숙하여 자기만의 빛을 낸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특히 생애 초기, '자아'를 형성한 토양이었던 가족의 이야기 같은 것들은 더더욱 그러할 것. 스무 살, 서른 살, 쉰의 현승이 글에 가족 이야기는 어떻게 그려지고 담길까. 현승이가 자기 자신의 되어 가는 서사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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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25 17:11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9.12.08 22:59 신고

      현승이 글 오랜만에 돌아왔죠? ^^ 어렸을 적에도 현승이 글을 좋아해주셨는데... 터져주셔서 감사해요 :)



#1


엄마 아빠가 모처럼 긴 식탁 수다를 이어가고 있었다. 

주제는 '기도'였다.

안 듣는 척 옆에 앉았던 현승이가 깜빡이도 안 켜고 끼어들었다.


그런데 뭐 주세요, 뭐 주세요,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잘못 된 거 아냐?


아, 뭔가 신앙적 성숙미 뿜뿜 풍기는 이 느낌.

왜애? 그게 왜 잘못된 기돈데?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거 아냐?

막 뭐 주세오, 대놓고 말하지 않고 뭔가 쫌 돌려 말해야 잘 들어주잖아.

뭐, 나는 괜찮은데 당신 뜻대로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천잰데!

모태 바리새인의 아들답구나!


#2


현승이 베이스기타에 입문하였다. 방에서 딩딩디딩딩 하다 툭 튀어 나왔다.


엄마, 엄마는 찬송가 말고 CCM 같은 거에서 좋아하는 곡 있어?

좋아하는 곡이 워낙 많아서. 음, 지금 생각나는 건 '오 신실하신 주'

뭐야, 자기 이름 들어갔다고 좋아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그 찬양 가사가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이렇거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 얼굴에 냉소의 빛이 어른어른.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듣기 싫어 선수를 친다.)

물론! 하나님이 자주 실망시키시지. 현실은 찬양 가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실망했다고 한 것도 결국 나중에 보면 그닥 실망할 것도 아니었더라고. 다른 뜻으로 더 좋게 된 것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 있더라고. 음냐음냐, 횡설수설, 횡횡설설수설수설, 그렇다는 거야.

(공감 1도 안 되는 표정)

그런데 신실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성실하다는 거야?

성실한데, 변함 없이 성실하다는 거야. 


그리고 설거지 하며 오토리버스 플레이어가 돌아간다.

하나님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다는 것은 진실, 매일매일 그분께 실망하는 것도 사실.

믿어져서 부르는 건지, 안 믿어져서 더 부르는 건지.

믿음의 찬양인지, 불신앙의 찬양인지 자꾸 불렀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1. BlogIcon 박성환 2019.04.04 11:56

    '모태 바리새인의 아들 답구나'에서, 4월에 첫 빵터짐이네요 사모님. 믿음의 찬양인지 불신의 찬양인지...
    그런 변함많은 저의 찬양을 들어주시길 바랄뿐이에요..

    • BlogIcon larinari 2019.04.04 20:18 신고

      그래요. 믿음인지 불신앙인지 모를 그 부끄러운 경계에서 부르는 찬양을 그분이 들으실 거예요 :)



아빠는 소파에서 신문 보시고

엄마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시고

누나는 거울 앞에 화장을 하고

나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현승이네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방학이 일 년인 힘 센 아이가 있는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이 함께 먹고 함께 일하는 현승이네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야 주방에서 설거지 하고

누나는 제 방에서 피아노 칩니다

엄마는 거실에서 책을 보시고

아빠는 이 멋진 장면 사진 찍어요






#1

선물이란 무엇인가?

주는 사람의 취향, 받는 사람의 취향. 뭣이 중한가?


#2


생일선물로 현승에게 운동화를 받았다.

선물을 주는 사람 현승이의 취향은 확고했다.


엄마 선물로 엄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운동화를 사 줄 것이다.

운동화라는 아이템도, 어떤 운동화를 선사 할 지도 결정은 내가 한다!

(주는 이의 모든 것이 확고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너무 비싸다거나 다른 선물을 제안 한다면 생일 선물은 없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사주느니 나는 엄마 생일 선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엇을 선물할 지는 내가 결정한다!


고심 끝에 운동화를 주문을 했고(커플 느낌의 제 운동화까지 사면서 세뱃돈 탕진)

기분이 날아갈 듯한 현승이가 지껄여댔다.


"엄마, 자부심을 갖고 신어야 해. 브랜드 자체는 흔하지만 그 중에도 희귀템이야.

색깔도 다른고, 딱 엄마가 좋아할 스타일이야.  

이 운동화를 신을 때는 꼭 그......  자부심을가져야 해. "

 


#3


엄마, 앞으로 나는 신발만은 마음대로 살 거야. 뭐라 하지 마. 나는 정말 신발을 좋아해. 저번 꽃친 캠프에서 아이과 친해진 것도 다 운동화 때문이었어. "너 운동화 예쁘다' 이런 말로 처음 친해지기 시작했어. 엄마가 꿈에 나온 신발은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했지? 신발은 내가 나를 드러내는 싶은 방법 중 하나야. 나는 정말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독특한 점을 갖고 싶어. 동시에 남과 달라서 튀는 건 또 싫어. 뭔가 남다르게 하고 싶지만 옷으로 표현하면 너무 눈에 띄게 돼. 주목받는 건 정말 싫어. 하지만 누군가 남다른 나의 모습을 알아줬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어. 신발이 딱 적절해. 신발이 튈 때 주목받는 정도는 내가 딱 견딜 수 있는 정도야. 그리고 신발 예쁘다고 주목 받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 엄마, 내가 신발 덕질을 하는 이유야. 신발은 정체성이라며! 나한텐 신발이 중요하고, 엄마 생일 선물로 엄마에게 딱 잘 어울리는 운동화 사주는 게 내가 너무 행복해."


#4


중2 어느 날, 해외 직구로 나이키 운동화를 사겠다는 가격이 가당치 않았다. 제 용돈으로 사겠다는데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가진 원칙이 있다. 중2 쯤 되면 통제 한다고 통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실패가 뻔한 선택이라도 이를 악물고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강의 하곤 한다)  운동화 덕질이 심해진다 싶었다. 생각 없는 쇼핑 덕질에 빠진 놈이 내 아들이라니! 한심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알고 있었다. 더는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5


"엄마, 마음에 들어?

사이즈는 어때?

정말 마음에 들어?

색깔 좋지? 흔한 색이 아니지? 엄마가 좋아하는 색이잖아. 그치?"


돈과 에너지를 많이 쓰는 현승이 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이 아이에게 운동화는 그냥 신발에 지나지 않음이다.


오래도록 간직할 생일 선물 운동화가 되지 싶다.  

    

  1. BlogIcon 아우 2019.03.12 09:48

    왜 또 배가 살살 아프... 나를 요래 속좁은 어른으로 만드는 현승이 이 자슥! (근데 대체 이 긴 대사를 어찌 다 기억하는거임? 이게 더 신기하다고!)

    • BlogIcon larinari 2019.03.19 00:09 신고

      예전 교회에서 가정교회 할 때. 어르신 한 분께서 젊었을 적 막나가던 시절부터 어찌어찌 교회 다니게 되신 얘기를 약간 네버앤딩 느낌으로, 그것도 사투리로 풀어 놓으셨거든. 그걸 교회 홈페이지 가정교회 게시판에 거의 그대로 글로 옮겼지. 남편이 혀를 내둘렀어. 실은 몇 년 전에 몸에 녹음기 칩 하나 심었어. ㅋㅋ

  2. SJ 2019.03.12 11:50

    적어도 저에겐.. 이 세상에서.. 저희집 애들 말고.. 이토록 디테일한 성장사를 훔쳐보는.. 유일한 아이들이 채윤,현뜽이가 아닐까 싶어요.. 꼬꼬마 시절부터 애독자였으니 :) 이 아이들이 이제 곧 어른이 될텐데, 품을 떠나면 혹여나 더이상 훔쳐볼 수 없는 이야기가 될까봐 애독자는 벌써 걱정입니다... 십여년 지나 쥬니어 채윤, 쥬니어 현뜽이의 이야기로 to be continued 되려나요? ㅋㅋ

    • BlogIcon larinari 2019.03.19 00:13 신고

      왜 아니겠어요! 성호삼츈 승주이모 처음 만난 그때가 언제예요. 처음 집에 놀러오던 날 이모가 사온 그림책, 한참을 사랑하며 읽고 또 읽고 그랬지요. 하린, 한결, 혜린이 크는걸 지켜보지 못하는 게 너무나 아쉽습니다. 곧 보겠지요?^^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이랬다 저랬다, 한댔다 안한댔다.

곡절 끝에 현승이도 일 년의 방학, 갭이어를 갖기로 했습니다.

누나의 뒤를 이어 꽃친 4기가 되었고 느슨한 청소년 백수의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설거지, 청소, 화장실 청소.

꽃친의 집 하루는 이런 일들과 함께 하지요.

'방학이 일 년이라서' 현승이 편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더 떠들고 싶으나 지금 떠들어대고 싶은 바로 그 얘기를 이미 책에 다 썼네요.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공식 게으름뱅이를 부려먹는 맛이 있지! 설거지 해, 빨래 돌려 놨으니 다 되면 널어, 밥 먹고 청소기 한 번 돌려라. 사춘기 끝의 키 크고 힘 세고 시간 많은 유휴 노동력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것 역시 우리 집 만의 얘기가 아니다. 아이들이 꽃친 소개 셀프 영상을 제작한 적이 있는데 싱크대, 청소기, 세탁기가 거의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한참 웃었다. 식구들이 먹은 그릇을 닦고, 밥을 안치고, 빨래를 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이다.  끼 밥을 먹는 일, 깨끗한 옷을 입고 안전한 집에 사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공부 벼슬을 하느라 제 방 정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가 가족이 먹고 입는 것을 위해 봉사한다. 밥이고 빨래고 저절로 되는 줄 살았던 아이가 제 손으로 해보면서 양말 좀 뒤집어 놓지 마라, 밥을 남기지 마라잔소리를 한다. 그 잔소리는 엄마 흉내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살아본 자의 목소리이다.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식사 전에 이런 구호를 외쳤던 것 같다.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농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선생님 먼저 드세요그러니까 밥알 하나에 담긴 수고와 땀을 기억하는 교육이었을 것이다. 참교육이다. 제 몸으로 참여하여 수고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구나, 싶었다. 제 손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공부 벼슬 하느라 여력이 없다고 미리 포기한 부분이었다. 청소년 백수 생활로 얻은 예상치 않았던 수확이다. 하하.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들은 자란다> '꽃친의 게으른 집 하루' 중에서





채윤 :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막말을 할 때, 화가 나고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나는 리더가 되긴 틀린 거 같애.


현승 : 누나, 마키아벨리를 읽어.


종필 : 오오, 김현승! 군주론?


현승 : 군주가 되려면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가 있어야 해.


채윤 : 나한테는 사자가 없어. 사자의 힘이 없어.


현승 : 사자는 엄마한테 있지. 우리 집에서 사자는 엄마한테만 있어.


종필 채윤 : (격한 공감) 맞아! 맞아!


이 백성들이 군주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군주를 앞에 앉히고 희롱하기를 서슴치 않으니.


아,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엄마는 경찰(Click!)이었는데 군주가 되다니.

13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승진했구나. 


내 이 어여쁜 백성을 위하여 성군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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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J 2019.03.12 12:22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우선, 승진 격하게 축하드리구요!!!
    옆에 혜린이 자고 있어서 크게 웃지도 못하겠고..
    야밤에는 사모님 블로그 방문을 자제해야 겠습니다...





엄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베트남 가서 그 장소와 상관 없는 생각이 막 떠오르는 거야. 그럴 수가 있나? 아무튼 가서 꽃친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 (내년에 누나처럼 '꽃다운 친구들'과 함께 1년의 안식년을 가질까 고민 중인 현승) 솔직히 나는 꽃친은 현실도피라고 생각 하거든. 그런데 베트남에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어. 꽃친은 멈추고, 그리고 되돌아 가는 거야. 다들 고등학교를 가잖아. 그게 쭉 가는 거지. 그런데 일단 쭉 나가지 않고 돌아선 거니까 회피는 회피지. 하지만 누나를 보면 되돌아서 가다보니 오히려 이 길이 진짜 누나의 길이었잖아. 길이 하나가 아니야. 방향이 하나가 아니라고. 돌아서서 가는 방향이 어떤 사람에게는 쭉 가는 방향인 거야. 그런 생각을 했어.


++


그런 방향을 정하고 그러는데 부모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애. 그런데 부모는 네비게이션이 아니야. 가장 빠른 길을 딱 정하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네비게이션이 되면 안 되고, 지도여야 해. 그냥 부모는 보여주고 아이 스스로 찾아가도록 하면 되는 거야. 엄마 아빠? 지도지! 지도야. 가끔 내가 헷갈릴 때는 네비게이션이 되어 주기도 하지. 


+++


엄마, 내가 원래 하나님을 안 믿잖아. 알지? 내가 목사 아들이지만 교회는 원래 다녔으니까 그냥 다니는 거고 예수님을 믿어서 다니는 건 아니라는 거. 그런데 실은.....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어..... 실은...... 엄마, 나 요즘 기도해. 뭘 해 달라 이런 기도는 아니고. 그냥 굉장히 모순적인 기도를 해. 말하자면 나한테 믿음이 없잖아. 아씨, 나 믿음, 은혜 이런 말 싫어하는데...... 아무튼 내가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게 되거든. 그런데 그 기도를 내가 아직 확실히 믿지 않는 하나님에게 하는 거야. 말이 안 되지? 사실 믿고 싶어서 기도하는 건 아니야. 홀로코스트나 이런 걸 생각하면 나는 하나님이 있다는 걸 아예 안 믿어. 그런데 안 믿는 하나님에게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걸 하고 있다니! 이런 모순적인 기도를 계속 해야 하나?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기도하게 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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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우 2018.08.16 22:33

    하아~ '꽃친'과 '부모'를 이렇게 깔끔하고 예리하고 선명하게 정의하다뉘!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눔(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르신 같은^^)~




[내가 좋아하는 시간 : 저녁 6시 - 8시]


93.1에서는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 나오는 시간.

한낮에도 컴컴한 거실이 잠시 밝아지는 시간.

넘어가는 해가 주방 쪽 길쭉한 창으로 잠시 고개 내밀고 지나가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사람 : 까칠하고도 부드러운 사람]


자아가 다소 강한 듯하여 매운 맛이 있는 까칠한 사람.

감추지 못하고 끝끝내 드러낸 까칠함 있어 부끄러울 것 있는 사람.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잃을 수 없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나 : 열심히 공부하고 마냥 널부러지는 나]


강의와 글쓰기를 위해서 중독자처럼 강박적으로 읽는 나.

뭐 하나 끝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혼자 잘 노는 나.

어떤 경우에도 나의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


[드물게 찾아온 찰나의 기쁨]


해 넘어가는 저녁 7시 어간에 여유로이 집을 누리는 게 얼마만이냐.

까칠한 중 3이 어디 안 가고 옆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또 얼마만인가.

"엇, 시간이 이렇게 됐네. 현승아, 라디오 좀 틀어줘"

"왜 엄마?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 들으려고? 오늘은 김현승의 세상의 모든 음악 어때?"

하고 제 돈으로 새로 산 블루투스 스피커 연결하여 음악 들려주는 시간.

그리하여 비틀즈와 김광석과 마마무가 돌아가며 열창하는 '김현승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 시간.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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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6일, 할아버지 7주기 추도예배 가는 길.

거리거리 펼쳐진 선거 현수막에 대화 주제는 6.13 지방 선거.

엄마 아빠는 선거일 전에 사전 선거 하겠다는 말에 '그러면 선거날에는 완전 노는 거냐'는 현승이 질문.

결국 휴일에 어떻게 노느냐, 어떻게 놀았느냐, 로 대화 주제가 흘러간다.


엄마 : 우리 이번 선거일에 예봉산 갈까? 털보 아저씨네 하고. 

아빠 : 맞아, 8년 전이네. 지방선거 날이었지?

엄마 : 등산 갔다가 명일동에서 같이 투표했는데. 얘들아 털보 아저씨한테 말씀 드려볼까? 

        예봉산 갈래? 아이스 께~~~~에끼, 기억 나?

채윤 : 나는 좋아. 

현승 : 아니, 난 그럴 수 없어. 휴일이 두 번인데 두 번 다 가족한테 쓰는 건......

엄마 : 가족, 의문의 일패!

아빠 : 그래, 현승아. 선거날은 친구들이랑 농구 하고, 게임 하고 놀아. 바이바이(사춘기 나라로 잘 가)~

현승 : 나 떠나온지 오래 됐는데.........

아빠 : 알아. 알고 있어. 이제 곧 돌아올 때가 됐지.

채윤 : 내가 있잖아. 내가 이렇게 돌아와 있잖아.

현승 : 아냐, 끝이야. 돌아가는 거 없어.

엄마 : 누나는 돌아왔잖아. 돌아온 거 아냐?

현승 : 아냐, 누나도 그런 건 아냐. 

아빠 : 알았어. 이제 엄마 아빠만 남은 거 다 알아. 아빠는 엄마만 있으면 돼.



그리하여 다시 허전한 마음에 8년 전 예봉산 갔던 날 털보 아저께서 찍어주신 사진을 찾아본다. 

한 장 한 장 다 예뻐서 막 올려본다. 

우리 모두 '그 나라'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

아니 존재는 알았으나 실체는 몰랐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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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ami 2018.06.08 13:44

    하이코야~ 저런 시절이 있었네요.^^ 세월 참 유수 같이 흘러버렸네요.
    간만의 예봉산 산행 즐거우시길!

    • BlogIcon larinari 2018.06.10 01:03 신고

      문득 이 장면이 떠오르죠? ^^
      목장 여자들 영화 나들이 하고 남자들은 아기 보던 날이 있었지요. 채윤이 아빠는 목짠님 댁에서 아직 갓난쟁이였던 현승이와 채윤일 봤지요. 영화 보고 커피 마시며 놀다 늦은 밤이었는데, 목짠님 현승이 안고 1층으로 나오시며 '지금 시간이 몇 시냐' 투덜투덜 하셨습니다. ㅎㅎ

      예봉산은 자체 파토 났고요. 저는 지금 마음의 1/3이 삿뽀로에 있습니다. 따라다니는 제 그림자 보이시죠? ^^



자기 색이 분명해,

이런 말을 가만히 보면 '자아'와 '색'을 잇는 보편적인 상징이 있다.

어떤 색이 됐든 제 색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도 끼고 저기에도 속하며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회색분자'라 한다.

때로 철저하게 회색분자가 되어야 하지만,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되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좋은 사람 이미지 심어주기 위해 여기에도 맞추고 저기에도 흥흥 하는 회색 옷은 좀 아닌 것 같다.


사춘기의 옷은 검정이다.

다섯 살 때쯤 채윤이와 "채윤아, 핑크 말고 얼마나 예쁜 색이 많은 줄 알아?"하며 싸웠던 적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만 고집하여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랬던 아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만 고집하는 시절이 왔으니 사춘기였다.

그 또한 미칠 지경이었으나 마음을 다잡아 먹은 탓인지 핑크만큼 열이 받진 않았다.


현승이 역시 암흑의 사춘기에 진입했다.

대부분 옷이 흰색 면티를 바탕으로 한 검정 또는 회색 같은 것들.

두 번째 암흑기를 접한 엄마는 놀랍지도 않고, 열받지도 않고, 자포자기와 무기력으로 응대.

나긋나긋한 감성으로 엄마 마음의 빈 공간을 채워주던 녀석이라

가끔 오는 쎄~한 상실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흑암의 기운을 잘 버텨내고 있다.


벌써 중 3이고, 졸업 앨범 사진을 찍는단다.

변변한 옷이 없어서 채윤이까지 대동하고 옷을 사러 갔다.

여기서나 하는 말이지만, 옷 하나 모자 하나 사는데도 아주 그냥 지랄맞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암튼, 엄마 감각보단 누나 감각이 나을 듯하여 채윤이까지 데리고 가서 산 옷이

민트색 후드티이다.

엄마도 누나도 아닌, 제가 딱 고른 것이다.


집에 와선 너무 튀면 어쩌지, 그냥 검정을 살 걸 그랬지,

하더니 사진 잘 찍고 왔다.  친구들이 예쁘다 했다며.

"엄마, 그런데 사춘기에는 왜 그리 복잡한 거야? 나는 내향형인데 사람들이 나를 특별하게 봐줬으면 좋겠고,

그렇다고 나를 주목하면 싫고. 튀고 싶지는 않지만 또 뭔가 멋지고 싶고...... 왜 이리 복잡하지?"

(얌마, 사춘기 아니라도 다 그래. 인간이 원래 복잡해!)


색깔 있는 옷을 입는다는 것은 분명 변화인데, 사춘기 복잡한 다크 포스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단 뜻인가?

아이에서 성인으로 가는 통과의례를 끝내고 조금 차분하게 자기 색을 찾아가겠지.

토요일, 혼자 등산을 하고 집에 가는 길 장을 봤는데 집에 다 와 힘이 빠졌다.

집에 있는 현승에게 전화 하여 '진짜 진짜 미안한데........'하며 초저자세로 굽신굽신.

나와서 짐을 좀 들어달라 했더니 투덜투덜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어째 짐 들어주는 폼새가 좀 나긋나긋해진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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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ry 2018.05.28 14:25

    ㅎㅎㅎㅎㅎ 읽다가 나도 모르게 '옷 하나 모자 하나.... 초월하다' 요부분 드레그 좌~악!
    워쪄 2~3년 더 참고 기다려야할텐데... 그래도 젤 미운시절은 지나간거네.

    • BlogIcon larinari 2018.05.29 07:38 신고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데. 어젯밤에도 아주 꼴비기 싫음 한 바가지 추가했어요. 멀쩡해질 날이 있겠지요? ㅎㅎㅎㅎ



이 노래를 좋아하던 아이, 

우크렐레 들고 기타 들고 딩가딩가 '네모의 꿈'을 부르며 베짱이 놀음 하던 아이,

난생 처음으로 학원생이 되다.


이제 공부 좀 해봐야겠다며, 공부 하는 방법을 지난 기말시험 칠 때 처음 알알았다며

수학학원에 가야겠다고 하여 미루고 미루다 등록했다.

"이제 나도 진정한 분당 아이가 된 것 같아. 드디어 나도 평범한 분당 중학생이 되는군"


진정한 분당 중학생이 되어 하교 후 바로 학원 가서 8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기특하고 짠하여 같은 반찬이지만 정성스레 담다보니 네모 반찬들이 줄을 섰네.

네모난 떡갈비, 네모난 깍두기, 네모난 두부.

그래도 리필해서 먹은 건 동그란 오이고추.


이랬던 현승이

이랬던던던던 현승이

네모난 학원 세상으로 떠나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걸

주윌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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