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 밤, 10시 30분.

라면을 끓이며.


"엄마, 그 있잖아. 학교에서 그런 거 많이 하잖아. 뭐 쓰는 거.

스트레스받을 때 어떻게 합니까, 이런 거.

책을 본다, 잔다..... 여기에 먹는다가 꼭 있거든.

나는 그걸 보면서 정말 이해가 안 됐어.

웃기려고 쓴 건가? 스트레스받을 때 먹으면 풀린다는 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요즘 조금 알겠어."


저녁 일찍 먹고,

우유 한 잔에 도넛도 하나 먹었는데.

10시 넘어 라면을 끓이며.


내적 공허감을 먹을 것으로 채우는 인생의 맛을 알게 된 아들.

그놈 키 클 놈일세!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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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베이글과 매실차 한 잔 놓고 아들과 겸상. 그 짧은 시간의 통하는 대화)


현승아, 밖에 있는 자전거 지금 탈 수 있지?


왜? 오늘 자전거 타게? 안 돼, 오늘 타면 안 돼. 바람 빠졌을 거야.


저번에 너가 넣어 놨잖아. 괜찮을 거야.


아니라고, 확인해봐야 한다고. 지난번에 바람 넣어 놨는데 엄마가 안 탔잖아. 그새 바람이 빠져 있을 거야.


아니야, 얼마 안 됐잖아.


그래도 안 돼. 오늘은 타지 마. 이렇게 갑자기 얘기하지 말고 타기 전날에 꼭 얘기하라고. 내가 학교 갔다 와서 바람 넣고,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이상 없는지 확인해볼게. 그다음에 타. 내일 타.


(어머, 오빠! 현승이, 넘나 멋진 남자. 으흐흐흐..... 감동)


알았지? 이따 학교 갔다 와서 해줄게. (감동하여 녹아내리는 엄마를 알아챔) 그러면 그 다음에....... 수고했다고 용돈 좀 두둑이 챙겨줘. 킥킥. 엄마, 내가 좀 계산적이지? 엄마한테 빌려준 돈도 꼭꼭 받아내고, 돈 계산이 정확하지?

'계산적'이란 말 배웠는데 그 설명이 딱 내 얘기 같애.


아냐, 니가 무슨 계산적이야. 오히려 그 반대지. 너는 이 얘기 하면 싫어하지만 너 친구한테 되게 비싼 선물 사주고 니 생일엔 결국 선물 못 받았잖아. 그래도 괜찮다고 했잖아. 예를 들면, 니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뭘 사주거나 선물할 때 아낌없이 쓰잖아. 계산적이지 않아.


하긴, 내가 특히 엄마한테 선물할 때는 돈을 팍팍 쓰지. 엄마, 나는 돈 모아서 선물하는 게 그렇게 싫어. 


그래, 누나랑 돈 합쳐서 엄마 아빠 선물하고 해도 결코 말 안 듣지?


뭐, 돈 모아서 선물해주면 고맙다고 받지만 그 선물에 여러 사람이 다 들어 있는 거잖아. 그냥 모두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겠지. 혼자 선물 해야 진짜 내가 준 선물이고, 나 하나가 되는 거지. (나 하나가 되는 거지?!ㅎㅎㅎ)


글쿠나,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이러고 나서 빛의 속도로 교복 입고 튀어 나갔는데.

이 아이 존재의 향기가 쉬 가시질 않아서 식탁의 텅 빈 앞 자리를 한참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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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아침 식사는 어차피 시간차 공격이려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일어나는 대로, 식탁에 앉는 대로 각자 먹게 하는 것으로.

남편은 새벽회의 마치고 밖에서 먹을 테고,

꽃다운 채윤이 산발을 하고 나와 앉아 한술 뜨고 들어가고,

나는 친정에서 올케가 준 얼갈이배추 겉절이에 여유로운 혼밥이었다.

변성기 초입 현승이가 머리에 제비집 짓고 나온다.

실실 웃으며 나온다.


아놔, 엄마 내가 지금 어떻게 깼는줄 알아? 엄마 김치 씹는 소리에 깼어.

촥촥촥촥, 아주 그냥 리듬이 딱딱 맞아요.


아, 진짜?(부끄부끄. 무슨 생각이었던가? 암튼 밥이고 김치고 꼭꼭 씹으며 뭔가에 골똘했던 것 같다)


그런데 좋았어. 흐흐흐. 아, 우리 엄마가 참, 사람답게 사는구나!

뭐 이런 생각? 큭큭큭. 이런 생각이 들었어.

김치를 촥촥촥촥 씹는 소리가 뭔가 인간적인 어떤 느낌, 뭐랄까 그렇게 좋았다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큭큭큭.


그러더니 저녁 준비하는데 옆에 와서 다시.

큭큭큭. 엄마 아까 아침에 김치 씹는 소리..... 큭큭큭.

인생을 씹는 소리랄까?

참, 사람다운 소리였어. 큭큭큭큭.


(무식하게 쫙쫙 겉절이 씹는 소리에서 인생을 발견하는 너란 중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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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예뻐하시는 할머니들 있잖아.

재활용 쓰레기 정리하시는 할머니랑 저기 빌라 주차장에 앉아 계시는 분들.

나만 보면 (성대모사 돌입) '에이구, 이뿌게 생겼어. 참 이뿌게 생겼어'

이러셔.

자꾸 그러시는데 내가 가만히 지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매일 민망해 죽겠어.


안 봐도 훤하지.

'헤~' 하면서 지나가겠지.


아냐. 엄마가 몰라서 그래. 나 옛날처럼 그렇게 헤.... 말 못하고 그러지 않아.

나 요즘에는 어른들한테 싸가지 없게 많이 해.

엄마가 생각하는 거랑 많이 달라.


아, 싸..... 싸가지?!

글치. 그건 좀 니가 많이 상실했지.

내가 알지. 

하하하하 엉엉엉엉.


밤에 배고프다며 베이글에 크림치즈, 참치, 양상치 있는대로 다 넣고 

우적우적 먹더니.

먹다가말고 또 뇌가 급 뒤집어지더니 엄마랑 싸우자고 달려들더니.

그러니까 왜 엄마 아빠 결정에 내가 따라야 하냐고오~!!!!!!

내 감정이나 의견은 결국 다 무시되는 거잖아아~!!!!!!

흥분을 하더니. 흥분한 중에.....

다 먹고 나더니 휴지로 식탁에 떨어진 부스러기 줍고.

물티슈로 다시 식탁 닦으면서 입으로는 '네가지' 없는 말을 막 쏟아내더라.


사춘기에는 뇌가 뒤집어진다고.

확실이 티슈남 현승이의 뇌가 아닌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뒤집어져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싶기도 하고.....ㅎㅎㅎㅎ


그래서 찾아본 오래 전 그날 사진과 에피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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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채윤, 현승과 함께 뒹굴고 있던 어느 날.

채윤이 폰이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하더니 '네? 아, 네에~~~에' 길쭉한 몸을 베베 꼬면서 방으로 들어갑니다.

통화를 마치고는 꼬인 몸이 상당히 덜 풀린 상태로 나와서 수줍게 말합니다.

중등부 쌤인데.... 중등부 수련회 때 나 간증하래.

뭣? 간증? 니가 무슨 간증?

그러니까. 내가 못한다고 하니까. 간증이 아니라 중등부 애들이 원하는 거래. 목사님, 선생님들 말씀 이런 거 말고 선배들의 얘기를 듣고 싶다고.

그럼 니가 가서 무슨 얘기 하려고? 할 거 있어? 하고 싶어?

어..... 음...... 하고 싶어. 그래서 한다고 했어.

그래. 뭐, 안식년 얘기를 해도 되고 네 얘기 하면 되겠네.


바로 이 순간!

망부석 같은 어떤 존재. 눈빛만은 뜨거운 어떤 존재가 등 뒤에서 느껴졌습니다.

뒤에서 그대로 몸은 얼어버렸지만 눈빛만은 포스작렬인 현승이가 서 있습니다.

나 수련회 안 가. (아, 현승이는 중등부입니다)

뭘 수련회를 안 가? 무슨 말이야?

생각해 봐. 누나가 중등부 수련회 오는 것만으로도 쪽팔린데, 간증까지 해봐!

친구들이 니네 누나야? 이러고 나한테 집중하면?! 나 수련회 안 가.


채윤이는 후배들 앞에서 간증한 생각에 들떴는데

현승이는 나대는 누나 때문에 수련회도 못 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수련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최종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누나 간증할 때 화장실에 가 있을 거야. 들을 수 없어. 못 듣겠어.



채윤이와 현승이 누가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겁니다. 그렇구 말구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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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와서 첫 시험으로 기말고사 중인 현승이.

첫날 시험을 마치고 내일 수학과 체육 시험을 앞둔 밤.


나아~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 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애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딩가딩가 루시드폴 딩가딩가 고등어 딩가딩가 버스커버스커 딩가딩가 여수밤바다

딩가딩가 김창완 딩가딩가 안녕내작은사랑아 딩가딩가 신해철 세월이흘러가서


기타를 치다, 음악을 듣다.... 저러고 있다.

어떡하지?

뭐라고 한두 마디 하면.

'공부했다고, 다 했다고.'


'아니, 현승아. 다 했다는 느낌 알겠는데. 직관형(N)식으로 맥락을 이해했다고 끝내지 말고. 감각형(S)식으로 깨알같이 달달달 외워야 시험을 잘 본다니까. 의미가 없어도 일단 외워. 그렇게 외우지는 않았잖아.'

'알았어. 그럼 조금만 더 하고 나올게' 라며 들어갔는데......

어느 새 보니까 또 기어 나와서,

딩가딩가 딩가딩가 딩가딩가 딩가딩가.


'엄마, 내가 나중에 커서 유명한 사람이 되면 자서전에 그렇게 쓸게. 김현승은 어렸을 적부터 뭔가 달랐다. 남들 다 공부하는 시험기간에 기타를 치며 놀았다.'


하긴, 뭐든지 시험 기간에 하는 게 제일 재밌지.

원고 마감 코 앞일 때 블로그 포스팅 하는 맛이 쫄깃쫄깃 하지.

그래, 시험 기간인 넌 기타 치고 놀고.

할 일 많아 죽겠는 기간인 엄마는 PPT 화면이고 한글 화면이고 일단 다 내리련다.

블로그질이나 또 한 번 해보자.

인생 뭐 있어!


(어쨌든 너 내일 시험 점수만 나와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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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당해본 일이라 당황하진 않는다.

사춘기 따위!

초겨울 찬바람에 우르르 낙엽이 쓸려갈 때의 느낌,

어딘가 텅 비어버리는 듯한 상실감을 잘 견뎌내면 되더라.

내 품을 벗어나 하나의 인간이 되겠다 하는 통과의례이려니.

엄마로서는 허전한 마음 자락 잘 붙들어 매고 그저 기다릴 밖에.


그런데 내가 해 아래서 두 아이 사춘기를 겪으며 희한한 일을 보았더라.  

사춘기는 애들이 제 귓구멍을 틀어막으며 오더라.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막고는 자동차 뒷좌석에 찌그러지면서,

굳이 식구들 듣는 음악은 싫다면서,

혼자 듣고 싶은 게 따로 있다면서.


뒷좌석 오른쪽 놈 채윤이가 이어폰을 빼고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여 잠시 훈풍이 불었는데.

뒷좌석 왼쪽 놈이 머스트해브아이템 이어폰에 목숨을 걸기 시작했다.


곽진언의 신보를 듣자고 엄마 아빠 누나 짝짜꿍이 맞았는데.

굳이 혼자 다른 음악을 듣겠다며.....

굳이 혼자 들으시는 노래의 실상을 확인하니 헐이다, 헐.

'저 빳따에 누워어 외로운 물새 될까, 물살의 깊을 속을 항구는 알까'

( '저 바다에 누워' 1987년, 높은음자리, MBC 대학가요제 대상)

그래, 그 뒷좌석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되거라.

뇌가 뒤집힌다는 사춘기 아들놈의 속을 엄마가 알겠느냐.


언젠가 그 귓구녕 다시 뚫릴 날이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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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충무공 탄신 기념일에 부드러운 남자 티슈공 현승이도 생일인데.

하루 종일 에니어그램 세미나 있다고 분주하던 엄마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어요.

아침에 눈뜨자마자 아빠가 '현승아, 생일 축하해'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네요.

미역국은 커녕 밥도 없다! 그러나 바뜨 당황하지 않고,

'현승아, 생일 축하해! 축하 파티는 금요일에 하자.

오늘 수요일이고, 내일은 양화진 음악회니까. 금요일에 하는 거야. 금요일이야....'

('나 밥 안 먹어'로 하루를 시작하는 현승이에게 미역국 끓이고 불고기 하고 이런 식탁은 부담일 거야. 암, 그렇고 말고. 가볍게 모닝빵 하나 먹고 가, 이러면 선물이지. 암.)

그렇게 생일은 지나갔네요.


엄마, 내 생일에 애슐리 안 가고 그냥 집에서 엄마가 한상 떡벌어지게 차려주면 안돼?

(떡벌어지게! 어떻게?ㅠㅠ) 어, 되지! 뭘 어떻게 차려줄까?

그냥 내가 평소에 양껏 먹고 싶던 거. LA 갈비를 무제한으로 먹고, 딸기도 무제한으로.... 그리고 또 먹고싶은 게..... 된장찌개. 흰 쌀밥!(읭? 네가 전래동화를 너무 많이 읽었구나!)

코올~~~~!! 흰 쌀밥,  LA 갈비, 된장찌개, 딸기 무제한으로 한한 떡벌어지게 차려줄게.

코스트코에 갔는데 현승이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케잌 세일도 하니, 어머 이건 사야죠.


식사준비 다 하고 오늘도 늦는 아빠를 기다리는데 오늘의 주인공, 주문이 있네요.

'엄마, 밥 먹고 케잌은 제발 그냥 무난하게 해줘. 그냥 딱 생일축하 노래만 불러줘.

나는 친구가 가족들을 챙겨주는 게 정말 좋은데 반대로 누가 나 챙겨주는 게 싫어.

그러니까 요란하게 하지 말고.... 노래만 불러줘. 엄마 아빠 덕담 같은 거 이런 거 하지마. 나 그런 거 하면 오글거려.'

적극 반영하여, 평범하게 밥먹고 생축 노래만 부르기로.

평범함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늘 하던대로, 잊지않고 밥 먹기 전에 남매 전쟁 한 판.

자리 가지고 한 번 싸우고, 엄마 한 번 폭발하고 요란하지 않은 평범한 저녁식사.

그리고 생일축하 노래.

감상 포인트는 아빠의 구슬픈 기타반주와 '참 좋은 아이였어....'




 

그리고 흥이 나신 아버님의 즉흥노래와 누나의 듀엣이 방언처럼 터집니다.





현승이가 딸기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는데요.

흔한 에피소드가 있지요.

현승이를 품고 있는 중 제철도 아닌 딸기가 먹고 싶었던 엄마, 또는 뱃속의 현승이.

어느 날 퇴근 길, 엄마 아빠는 현대백화점에 갑니다. 지하 식품매장에서 딸기 발견!

가격을 확인한 엄마는 헉, 뒷걸음칠 쳐 물러났지요.

이때 정답은 남자의 힘으로 제압하여 그 딸기를 사야하는 것인데,

현승이 닮아 요란스러운 걸 싫어하는 아빠는 소심하게 '그래도 사지....' 하며

엄마 뒤를 따라 나왔지요.

그리하여 두고두고 욕을 우려드시고 계시며 앞으로 그럴 예정이랍니다.

이 얘길 들어서인지, 아니면 그때 뱃속에서 느낀 좌절과 결핍감 때문인지

현승인 딸기를 좋아합니다. 자주 먹어도, 많이 먹어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말이죠.






이런 태중 비화를 가진 현승이 생일에 참으로 적절한 노래가 되겠습니다.

감상 포인트는 누나의 목춤, 현승이의 살아 있는 먹방.

현승이 생일에 딸기가 있고,

딸기가 현승이 입 안에 있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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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아직 애기 얼굴인데 코밑만 시커매진 중학교 1학년 현승이(아, 적응 안돼).

아침에 방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하는 소리다.


나 밥 안 먹어.

나 밥 안 먹어. 배아퍼.

나 밥 안 먹어. 늦었어.


엄마로서는 이 말이 너무 듣기 싫고 아주 얄밉다.


일찍 일어난 새 아니고 일찍 일어난 엄마 아빠가 먼저 식탁에 앉아 있는데

머리에 새집 짓고 나오며 하는 말이 역시 '나 아침 안 먹어'​

고구마 먹던 아빠가 뿜었다.

'나도 어릴 때 일어나서 어머니 얼굴 보자마자 한 말이 저건데.

나 저 마음 알아. 큭큭큭큭'

따라서 웃고나니 나도 그랬던 것 같고 비기비기 꼴비기 싫던 마음이 사라졌다.


학교 가기 싫고 출근하기 싫은 마음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시간도 없다고 느껴지던 무거운 아침에 괜히 해보는 말.

나 밥 안 먹어.

그러면 엄마는 몸이 달아서 김에 밥을 싸서는 화장하는 내 입에 하나 씩 넣어주기도 했다.


아, 이 말은 '오늘 하루가 내게 무거움으로 와, 엄마' 이런 뜻인가보다.

아닌 게 아니라 중학교 가서 현승이가 하는 말들이 이렀다.


엄마, 7교시는 너무 길어. 7교시가 되면 1교시가 어제 일 같아.

엄마,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에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

집으로 와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무 오래 학교에 있어야 해.

엄마, 선생님들이 수업시간 마다 다른 분이 들어오시는데 정말 재밌어.

말하시는 게 어쩌면 다 달라. 뭔가 게속 쓰는 말도 있고 말투도 있고,

어떤 선생님은 수업은 안 하고 계쇽 자기 자랑만 해. 진짜 뭔가 웃겨.

엄마, 우리 나라에 조금 다른 학교는 없어? 뭐랄까, 조금 사람을 생각하는 학교말야.

재미없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 얘길 하시는데 7교시까지 듣고 있는 건 너무 이상해.

게다가 교복은 너무 불편하다고. 바지는 까끌까끌하고.

그렇게 불편하게 7교시나 앉아 있는 게 말이 돼?

힘들어. 나 언제까지 이렇게 학교 다녀야 해?


(생각해 보니 현승이 너 초등학교 때도 비슷한 말을 해다잉)

초딩 2주차 때 현승님 말씀(클릭)

(그리고 6개월 쯤 지난 후에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현실을 받아들인 듯)

초딩 1학년의 하루(클릭)

(1학년 겨울방학 즈음에는 말했다.)

세월은 빠르다(클릭)


급결론, 이 또한 지나가리라.

현승아, 1교시가 어제 같이 느껴지는가 하면

교복 입고 입학했던 3월이 그저께 처럼 느껴지는 방학도 올 거야.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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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도 이제 옷을 멋지게 입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 이제 옷을 좀 멋지게 입을 거야.

알겠어? 패셔니스타가 될 거라고.

나도 이제 영빈이 형아나 누가 입던 옷을 주지 말고 사는 옷을 좀 사줘.

왜 누나만 자꾸 옷을 사줘? 나도 옷을 사달라고.

나는 모자도 잘 어울리잖아.

 

라며.....

엄마 장롱 털어 1인 패션쇼 시위.

 

이 패션은 어때?

공항패션 같애?

<암살>에 나오는 사람 같애?

 

(이...... 이뿌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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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준비를 하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과일박스 귤 사이로 계란 한 알이 끼어 있는 것이다.

내가 이제 하다하다 별 짓을 다 하는구나.

냉장고에 휴대폰 넣기.

보온병에 뜨거운 커피 담아서 또 냉장고에 넣기.

노화하는 나의 뇌야, 냉장고를 부탁해.

어제 저녁에 손님 식사준비 하다 계란 몇 알 들고다녔던 기억.

그래, 한 알은 과일박스에 고이 넣어두었구나.

나중에 치매가 오더라도 MRI 찍을 필요도 없다.

냉장고에 뭐가 들었는지 보면 될 거야.

삶은 빨래가 냉장고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초를 켜서 넣어둘 수도 있겠다.

냉장고야, 나의 뇌를 부탁해.


깜깜하도록 한강에서 놀고 들어온 현승에게 고해성사할 요량으로

현승아, 이거 봐. 엄마가 미쳤나봐.

엄마, 이 계란 내가 여기 놓은 거야.

왜~~~~~~~~~~애애?

그냥, 여기  귤만 있고, 계란 박스에 계란만 있는 게 싫어서.

좀 다르게 해보고 싶어서.

(헐) 냉장고야, 안심해. 내 뇌는 아직 괜찮아.


엄마, 그런데. 엄마한테 제안을 하나 해도 돼?

뭐? 제안해.

음.... 국이나 찌개를 할 때 말이야. 조미료를 좀 쓰면 어때?

특히 콩나물국 끓일 때는 조미료를 좀 넣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싫다는 얘기는 아니고. 건강에 좋긴 하지만 너무 물 같애서.

(확!) 냉장고야, 살림을 부탁해, 나 가출할 거야.


엄마, '운영'이란 말 알아?

회사를 운영하다, 할 때 쓰는 말이잖아.

그런데 예전 교회에 있을 때는 '운영'이란 말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거든.

여기 교회는 '운영'이란 말이 딱 맞는 것 같애.

뭔가 착착 돌아가는 '운영'이란 말이 적절한 것 같애.

원래 교회에는 운영이란 말이 안 어울리잖아.

그런데 여기 교회는 딱 맞아.

(ㅎㄷㄷ대형교회의 생리를 한 단어로! 천잰데!) 냉장고야, 이 아들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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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아~아.


우쒸, 커피 준비하라고? 그럴 줄 알았어.

엄마 아빠가 딱 앉아 있는 폼이 딱 커피 마실 타임이 된 줄 알았어.

투덜투덜 군시렁군시렁.

엄마, 세상에 커피 내릴 준비를 이렇게 잘하는 6학년이 있을 것 같애?

칭찬을 더 하라고. 더 세게 칭찬을 해.

그리고 엄마 커피 가는 기계 제발 하나 사.

엄마도 귀찮잖아. 나도 진짜 귀찮고.

나는 약하게 볶은 커피가 정말 싫어. 안 갈려. 딱딱해.

음.... 오늘은 강볶음 커피구만. 마음에 들어.


물을 끓이고, 커피를 갈고, 컵을 데우고, 여과지 접어서 커피를 담고, 주전자에 물을 채우기까지! 커피 내릴 준비를 완벽하게 해주는 아들 현승에게서 낯설지 않은 눈빛이 감지되기 시작합니다. 한 3년 쯤 전에 봤던, 정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눈빛을 채윤이에게서 봤었지요. 살짝살짝 보이다 강해지고 그 눈빛이 얼굴 전체를 잠식하면 질풍노도의 그분이 완전히 임하셨다는 싸인이 됩니다. 채윤이 사춘기 떠난 자리에 현승이 사춘기가 임하고 있습니다.


커피人 생활 7,8 년 만에 전동밀 장만했습니다. 커피 갈아줄 고사리 같은 손도 끝날 위기이고. 마침 적절한 제품을 소개받기도 해서요. 전에 커피를 가르쳐주신 어떤 분께서 핸드드립 커피의 생명은 밀에 있다며, 꼭 칼리타 전동밀을 구입하라고 하셨지만 홈바리스타가 무슨 칼리타 전동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는데요. 칼리타는 아니지만 와, 분쇄가 커피맛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하며 아침마다 커피맛에 새롭게 감동이네요.


그건 그렇구요. 저 전동밀이 배송되어 오던 날입니다. 누구보다 전동밀 구입을 기뻐하고 배송을 기다리던 현승이가 흥분하며 박스 개봉을 했습니다. 커피장 위에 자리를 잡아두고 보니 전원 꽂을 곳이 없습니다. "아빠 오면 멀티탭으로 연결시켜야겠다" 했더니 그걸 왜 아빠 올 때까지 기다리냐며 어디서 멀티탭을 찾아다 그릇장 뒤로 해서 연결를 해놓는 겁니다. 현관 앞에 덜렁덜렁 나와 있는 전선을 보며 "아빠 오면 깔끔하게 벽에 붙여달라 해야겠다" 했더니 그걸 또 왜 아빠한테 해달라 하냐며! 스카치 테잎으로 바닥에 끙끙거리며 붙이는 겁니다.


"현승아, 그런데 이렇게 헐렁하게 대충 붙여놓으면 걸려 넘어져. 벽에 딱 붙여야지" 했더니 가~압짜기 발끈! 하면서 "아 그럼 아빠가 잘하니까 아빠한테 하라고 하든지이!!!!" 하더니 북북 테잎을 다 뜯어냅니다. (오메, 성질있다야)  질풍노도가 밀려오는 듯 하대요. 가만 뒀더니 씩씩거리다 콧김 몇 번 뿜어내더니 다시 앉아 아까보다 덜 어설프게 테이프질을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빠 손을 빌어 제대로 다시 고정시키고 싶지만 현승이 무서워 말도 못 꺼내고 그냥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오는 모양입니다.

남자인 듯, 아들인 듯, 남자가 되려는 아들. 






*  본 글은 세 개의 자랑 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자랑 1 - 전동밀

자랑 2 - 커피장 뒤 벽에 걸린 iami님의 하사품

자랑 3 - 끝도 없는 아들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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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포나루를 헤집다 땀범벅이 되어 들어온 현승이는

잽싸게 샤워를 하고 벌써부터 잠옷으로 빼입고는 우크렐렐렐레.... 하고 있다.

밥을 차려놨는데 부르던 노래 한 곡이 끝나질 않아서 아직 도롱도롱 우크렐렐레 중이다.

사랑했지마~안 그대를 사랑해앴지마~아안......

원곡 가수의 분위기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소리.

(도롱도롱 도로로로롱 도롱) 그저 이이러케 멀리서 바아라 볼 뿐......

 

 

#2

 

엄마, 엄마는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뭘로 태어나고 싶어?

나는 엄마, 개미로 태어나고 싶어.

엄마, 개미가 인간이 보기에 제일 무시하기 쉽고 하찮은 거지? 그런 거 같지 않아?

개미도 생각이나 이런 게 있을까?

개미가 꼭 되어보고 싶어.

 

현승아, 밀림의 왕자 사자, 라이언 킹 이런 게 돼보고 싶지는 않아?

 

아아아니! 전혀.

나는 가장 작은 개미가 되어서 어떤 느낌인지 살아보고 싶어.

아, 그런데 개미가 느낌이나 생각이 있을까? (걱정이네)  있겠지? 없을까?

 

 

#3

 

현승, 너 오늘 사회 시험 잘 봤어?

 

어, 잘보긴 잘 봤는데 100점은 아닌 것 같아. 한 개 틀렸어.

내가 교.과.서.적으로 생각했어야 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이, 엄마. 교과서는 교과서의 틀이 있잖아. 딱 정해진 틀.

시험은 그렇게 봐야 하잖아.

그런데 내가 갑자기 상식적으로 생각한 거야.

문제가 뭐냐면 '다음 중 정부가 하는 일이 아닌 것은?' 이거였는데.

정답은 뭐냐면 '모든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준다' 였는데

나는 '국민들의 재산을 보호해준다'로 했어.

무료로 진료해주는 게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았어.

 

흠....

넌 좀 덴마크적인 애구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의 덴마크가 생각나는데!

우리 나라가 현승이의 상식에 걸맞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네.... 그랬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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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가 사줬어요. 부드러워요"

말을 하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끄럼쟁이 현승이가,

묻는 말에도 부끄부끄 대답이 어려운 현승이가,

안물!

아무에게나 다가가 했던 말입니다.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좋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고모가 사준 옷이 부드러워요.

 

현승이는 '부드러운' 것에 집착해왔습니다.

부드러운 천,

부드러운 엄마 살,

부드러운 말투,

심지어 먹는 것도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빵이 베이글이었습니다.

입에 들어가면 살살 녹아야 빵이지.

엄마가 먹으라니까,

안 먹으면 부드러운 엄마의 말투가 딱딱해질테니 억지로 먹는 거지

질겅질겅 씹어 먹는 빵이라니 딱 질색이었습니다.

 

코스트코에 가면 (저렴 리스트 상품 1순위라) 꼭 사와야 하는 것이 베이글.

며칠 새 베이글 열두 개를 뚝딱 다 먹어치웠습니다.

입짧 위짝(입 짧고 위 작은) 가족에게 흔한 일이 아닌데요.

현승이가 맛있다며 아침 저녁으로 찾아 먹은 탓입니다.

 

우리 현승이가 달라졌어요!

김현승이 어떻게 이렇게 베이글을 좋아해?

식성이 싹 바뀌었네.

엄마 아빠가 뼈 있는 농담을 했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뇌가 뒤집어진다고 합니다.

또는 뇌가 전격 확장공사에 들어가기 때문에 '공사 중' 상태가 된다고요.

채윤이 두뇌 확장공사가 끝나는 시점이라서 느낌 알죠.

덕분에 엄마 아빠는 그런 감각을 조금 익혔습니다.

두뇌 재개발 공사 시작하려고 공사 자재 들여오는 소리가 들린다니까요.

현승이 두뇌 공사 시작입니다.

그 전조 증상인지 식성이 살짝 뒤집어지니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한 2년 공사가 진행되려면 집안이 좀 시끄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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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휴지걸이를 떼내고 얼기설기 수제품 휴지걸이로 교체.

심심해서 그냥 만들어봤다고 하는 현승이 작품입니다.

심심해서? 일 없으면 발바닥이나 긁어, 라고 말씀하시던 우리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데.

차마 그 목소릴 들려주지 못했고.

저게 뭐냐, 없어 보이게, 라고도 하지 못했고.

그냥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여러 생각이 납니다.

 

현승이의 손길에서 아버님의 향취가 느껴집니다.

아버님은 수선의 손을 가지고 계셨고 뭐든지 고치셨지만 미학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셨지요.

예를 들면,

우리 신혼집이 구옥이긴 했어도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샛노랑으로 도배한 예쁜 집이었습니다.

여름이 와서 현관에 발을 걸어야 했는데

심사숙고 끝에 파스텔톤의 야리야리한, 보기만 해도 왈랑왈랑 신혼 분위기 물씬의 발을 사서 걸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길이가 짧네요.

그래도 뭐 예쁘니까.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와보니

아버님 수선의 손이 다녀가셨나봅니다.

천도 아니고 폴리에스테르도 아닌 그 무엇이 야리야리 발 아래 덧대어 있는 겁니다.

창고에서 찾아내셨을 법한 자재를 손바느질로 얼기설기.......

아~번~니~~~~~임.

 

현승이가 서너 살때 하늘색 오리털 파카를 입었었습니다.

하도 침을 흘려대서 앞자락이 얼룩얼룩하긴 했지만 예쁜 파카였습니다.

그 안에 쏙 들아가서 침 질질 흘리던 오통통한 내 너구리가 그리워지네요.

파카의 지퍼가 고장났는데.....

또 어느 날 퇴근해보니. (퇴근이 문제였나? 당시 퇴근을 없앴어야 했나?)

하늘색 파카에 빨간색 지퍼가 한 땀 한 땀 흰색 실로 바느질 되어 있는 겁니다.

얼기설기 손바느질 말이죠.

아~번~님~~~~~~임.

 

그땐 참 속상했던 일인데 이렇게 그리움과 그리움으로 추억하게 될 줄이야.

피는 못 속인다는 말 이상이 느낌입니다.

한 사람의 이 세상을 다녀가고, 

삶의 방식과 향기가 그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흔적처럼 남겨진다는 것.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니 다시 이별의 계절입니다.

하남 신안아파트 옆 개천길에 볒꽃이 흐드러지던 날 아버님이 암선고를 받으셨지요.

퇴원하시는 아버님이 뒷자석에 계신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운전하다

옆에 앉아 시누이라 하릴없이 벚꽃 얘길 했었습니다.

 

수선의 손 아버님 돌아가신 이후로 주방의 칼이 늘 성이 차지 않습니다.

칼은 정말 기똥차게 갈아주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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