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줌 강의 전에 짧은 밤 산책을 나갔는데, 어디서 아카시아 향기가 여리여리 하게 코끝이 스쳤다. 어디지? 어딨는데? 아카시아 어딨는데? 좋은 순간은 좀 붙잡아 두고 싶은데, 날듯 말듯한 향을 카메라에 담을 순 없어서 옆에 있는 아무거나 찍었다. 그러니까 저 나무 그림자에서는 아카시아 향이 나는 것이다. 다음 날인가, 탄천을 걷다 밤의 그 향기를 보내던 범인의 범죄현장을 목격했다. 아닐 수도 있고... 다른 아카시아일 수도 있고. 어쨌든 좋은 향기, 봄날의 아름다움이라서... 아름다운 건 무죄!
드디어, 슬쩍 보고도 '꽃마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언뜻 보면 꽃보다는 풀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성한 초록에 점 같은 꽃이 파묻혀 있으니 말이다. 이미 아는 꽃마리의 모양을 떠올리며 찾자면 결코 찾아지지 않는다.
가만히 잘 들여다 보면 이렇게 예쁜 모양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꽃이다. 모양을 잡아 사진을 찍으려면 바람에 불곤 해서 거의 실패다. 사진을 포기하고 그저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는 것이 상책이다. '꽃마리'라는 별칭을 쓰는 내적 여정 벗 때문에 친근해진 이 꽃과는 제대로 아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정말 쓱 봐도 알 수 있다. 너라는 꽃마리.
꽃마리만 그런 거이 아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주마간산 식으로 보면 모든 들꽃이 다 그렇다. 그저 노란꽃. 애기똥풀인가? 민들레는 아니고... 이리 지나치지 않고 멈추고 쭈그리고 앉아서 들여다보면 이분도 또 존재감 뿜뿜.
씀바귀꽃이다. 학교에서 저녁 먹으로 식당 가는 길에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돌아보고, 돌아보다 고개 숙여보니 통성명하고 싶어 하는 이분이었다. 언젠가 이름을 익혔는데 씀바귀인지, 고들빼기인지 다시 헛갈려서 꽃검색을 돌려보았다. 정확히 노랑선씀바귀이다.
땅을 보고 걷는다. 그런 줄 몰랐는데 채윤이가 흉내 내줘서 알았다. 좋은 하늘, 좋은 바람을 누리러 나가서는 고개를 처박고 걷는다. 깨어 있으려 하지만 다시 '생각들'에 잠기면 땅을 보게 된다. 간밤에 꾼 꿈 생각을 하며 걸었다. 나는 또 뭘 그리 포장하고 꾸미고 있는 걸까? 꿈이 건넨 질문에 고심하노라니 땅만 보인다. 고개를 들자! 하고 목에 힘을 딱 주고 바라보니 정자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다. 어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매는 원숭이 마음을 멈추자. 고개 들고 찬 공기를, 발밑의 얼음 조각을, 아이들 소리를, 자동차 소리를 보고 듣고 느끼자. 그러자 아주 가까이에 곤줄박이 한 마리가 땅에 강림하여 삑삑거리고 있다. 아주 아주 가까이서. 이 녀석이 사라지자 머리 위에서 또 삐이삐이... (아마도) 박새 한 마리가 가까이서 혼자 놀이를 하고 있다. 아주 가까이서. 모두 같은 말을 한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라고.
근 한 달 만에 찾아와 잡수고 가셨다. 이로써 알게 된 것. 새들도 떫은 감은 먹지 않는다. 익혀서 먹는다. 직박구리가 찾아와 먹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혼자 와서 먹고, 또 내가 없는 사이에는 친구 데려와 먹고. 그걸 채윤이가 목격했고. 고맙다. 결국 찾아와 먹어 주어서. 내 마음 알아주어서... 간절히 유혹할 때는 이렇듯 넘어와 주면 좋겠다.
새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부지런한 새들
가끔은 편지 대신
이슬 묻은 깃털 한 개
나의 창가에 두고 가는 새들
단순함, 투명함, 간결함으로
나의 삶을 떠받쳐준
고마운 새들
새는 늘 떠날 준비를 하고
나는 늘 남아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베란다 화분 위에 감 하나를 내놓았다. 분명 연시라고 샀는데, 다른 애들 다 익어서 후루룩 먹어버린지 한참인데, 도통 물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감이다. 연시가 아니라 단감인가? 연시인가 단감인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새들 먹이로 베란다에 내놓자는 신박한 제안을 JP이 했다. 이걸 기억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해놓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아이들을 유혹할 수 있을까, 잘게 발라 널어둘까, 견과류와 함께 내놓을까, 일단 나도 생각 중이었다. (정말 '생각'을 좋아한다. 생각을 많이 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란 사람.)
토요일 오후, 황금빛 시간 골든타임을 꼭 붙들어 산책을 나갔다. 역시나 기우는 빛이 만드는 향연이란, 쌓이고 뒹구는 낙엽 위의 황금빛을 뭐라 형언할 수가 없다. 동네 아파트 큰 나무 밑을 지나, 산길 같은 공원을 지나, 민영환 선생 묘지를 지나, 남의 동네 아파트를 가로질러 탄천에 닿았다. 삐리 삐리 삐리... 지나가는 아줌마를 휘파람으로 유혹하는 새 한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있다. (그래서 산책할 때는 이어폰을 끼지 말아야 한다. 유혹을 당하고 싶으면 말이다.)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는데, 배 부분이 노란 것이 곤줄박이로 추정되는 녀석이다.
아무리 줌으로 당겨도 노란 색은 커녕 모양도 잡히지 않지만, 여하튼 배가 노란 작은 새다. 4선 악보 맨 윗 줄에 까맣게 뭐 묻은 것 같은 그것이 곤줄박이로 추정되는 애다. 한참을 그렇게 아줌마 목을 빼놓더니 휘리릭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라졌는데, 그 녀석 찾으러 탄천길 버리고 고물상이 있는 옆길로 살금살금 뛰어가 봤다. 아니나 다를까, 네가 다시 너를 보여줄 리 없지! 넌 늘 이런 식이야! 멀쩡히 제 길 가고 있는 아줌마 마음을 빼앗아 불을 지피고 사라지곤 하지.
어쩐지 이번엔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유혹에 나선다. 감을 자르네 마네, 고민 집어 치우고 통째로 내놓아 보았다. 걸려라, 걸려라, 한 번은 걸려라. 곤줄박이든, 박새든, 어떤 녀석이든 걸려라.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멀리서 새소리가 들린다. 누구든 낚일 것이다.
시들거나 썩어가는 고구마, 당근, 양파 같은 것을 싹 틔워 키우는 재미가 있다. 주방 창틀 한 자리를 차지하는 친구들이다. 여름을 나며 고구마 여러 개가 비쩍 마르고 싹이 나고 있었다. "싹트네에에~ 싹터요오~" 그릇에 담아 키웠더니 한동안 정말 예쁘게 자랐다.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니" 엄청 지저분해지고 감당이 안 될 즈음이다. 강제 처분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고. 내일 내일, 미루고 있는데 내일이 되기 전 어느 '오늘'에 현승이가 말했다.
와, 이게 이렇게 있으니까 꼭 마녀의 부엌같다.
와하... 마녀의 부엌이라니! 얘는 왜 이리 시적이지? 마녀의 부엌이고 싶다. 마법의 연기가 부글거리는, 마담 푸르스트의 마들렌을 굽는 마녀의 부엌이고 싶다. 며칠 더 두기로 했다.
두어 주 집을 떠났다 돌아와 일상 회복 중인데, 일상 회복의 마침표는 저 녀석이 찍어주었다.
잠 습관이 회복되어 아침 그 시간에 일어나고, 아빌라 데레사의 <영혼의 성>을 묵상한 후 연구소 카페에 글을 올리고, 메시지 성경으로 누가복음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고, 하나 씩 일어나는 식구들의 아침의 챙기고... 아침 루틴과 함께 일상 회복이다. 선선한 시간을 골라 탄천으로, 옆 아파트 산책로로, 주택가 골목으로 걷고 또 걸으며 익숙한 풍경을 마주하고 그새 달라진 자란 풀과 들꽃들을 마주하니 일상 회복이다.
장 보러 내려가는데 저 멀리 길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저, 저 팔자 늘어진 고양이 녀석을 보니 "와, 진짜 집에 돌아왔구나!" 싶다. 쟤는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고, 말 그대로 만인의 연인이다. 이름도 모르겠다. 연인들이 제각각 지어 부르는 듯하여 딱히 뭐라 부를 수가 없다. 나도 연인이라면 연인이니 이름 하나 지어 부르면 되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 어정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름을 부를 수 없으니 대화가 쉽게 되질 않는다. "이리 인기가 좋은데 나 같은 연인 거들떠나 보겠어" 하는 심정도 있고.
여하튼 제가 사랑받는 줄은 알아서 낮잠도 꼭 저렇게 길 한복판 가장 눈에 띄는 곳에서 잔다. 제가 예쁜 줄 아는 녀석. 카메라 셔터 소리에 눈도 안 뜨고 자세만 바꿔 눕는다. 자면서도 팬서비스 되는 우리 동네 셀럽. 진짜 집에 왔다.
식물 중에 스파트필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애가 성격이 담백하기 때문이다. 물을 많이 먹어야 하는 아이인데, 물이 떨어졌다 싶으면 온몸으로 말해준다. 어깨고 뭐고 축 처져서는 "야, 집사! 이럴래? 나 안 돌볼래?" 한다. 얼른 물을 주면 몇 시간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난다. 덜렁거리고 게으른 나 같은 집사가 키우기에는 딱이다. 꾹 참고 있다가 갑자기 말라죽어버리는 화초들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란... 수많은 화분이 죽어나가고, 그래서 베란다 풍경이 바뀌고 또 바뀌지만 늘 하나씩은 키우고 있는 것이 스파트필름이다. 네가 네 몫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처럼 나도 그럴게. 너 거기 베란다에 있고, 나 여기 거실 테이블에 있고. 각자 되어야 할 자신이 되어 생명을 누리자. 화이팅!
지방으로 내려가시는 집사님께서 작년 여름에 커피나무를 하나 남겨 주셨다. 전에 한참 커피 공부할 때 이 녀석 키우는 조건이 까다롭단 얘길 들었었다. 공들여 키우셨는데 내가 데려가 죽이면 어떡하지, 죽을 수도 있겠다, 했는데. 의외로 잘 자라서 드디어 커피 체리라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되었다. 키워보니 스파트필름 못지 않게 투명한 친구다. 사랑이 필요하다고 정직하게, 온몸으로 말한다. "어머, 미안해!" 하고 돌봄을 주면 다시 살아난다. 얼마 전에는 꽃을 피웠다. 커피 체리에 이어 커피 꽃까지 실물 영접하게 된 것이다. 10여 년 전 커피에 꽂혀서 세상의 모든 커피 책을 다 읽는 심정으로 글로 배운 커피. 그즈음 책 속 사진으로만 보던 커피나무, 커피체리, 커피꽃이다. 그 시절이었다면 엄청난 감동과 흥분이었을 텐데 덤덤하게 속 깊은 행복감으로 마주했다. 꽃보다 더 반가운 건, 저 연한 새 잎. 예수님을 빗댄 여러 비유들이 있지만 유난히 좋아하는 이사야 말씀인데. '연한 순' 같은 예수님이 나는 참 좋다. 사실 커피나무나 스파트필름이나, 모양이 그리 예쁘지는 않다. 흔하디 흔한 식물이고. 눈에 띄는 특별한 아름다움도 없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열흘 연두연두 하는 나뭇잎이 없다. 나는 안다. 좋은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물론 고통 또한!) 그렇다고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꽃이 붉어봐야 열흘이니, 붉은 꽃의 아름다움을 누릴 시간은 지금 뿐임을 안다. 오늘, 지금 누릴 뿐이다. (물론 고통 또한! 지금 여기의 고통 밖에는 없다. 머물러 충분히 고통 당하면 된다.)
좋은 것? 남는 건 허무와 상실감이라고. 금세 사라진다고.
상처 받지 않는 길은 좋은 걸 좋아하지 않는 거야.
좋은 것이 생기면 얼른 도망가. 좋을 것 같은 다른 어떤 것으로 말이야!
이러며 지금 여기 아닌 저~어기 어디를 살아온 세월이 50년 세월이다. 이젠 어리석은 환상에 붙들리지 않는다. 지금 여기의 좋음을 놓치지 않는다. 써야 할 글도 있고, 읽을 책이 쌓여 있지만 일단은 걷기 위해 나서고 본다. 토요일,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미금역 쪽을 향했다. 연습실에 있는 채윤에게 연락했다. "엄마 지금 미금역으로 가는 탄천인데. 니 연습실 가까운 것 같은데." 그리고 채윤이는 튀어 나왔다. 목마르니 음료수 사오라는 말에, 자몽쥬스와 오렌지쥬스를 사들고.
봄은 따스한 바람으로 오고, 노랑에 가까운 연둣빛 생명으로 온다. 바람은 촉각을 겨냥하고 연두 빛깔은 시각을 저격한다. 그리고... 이 좋은 봄날 토요일, 아카시아꽃은 향기로 난입한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소올~솔" 불어와 후각을 간지르지. 채윤이 만나러 가는 길에 아카시아꽃이 향기로 말을 걸어왔다. 어디, 어딘데? 향기를 좇아 고개를 들었더니 바로 그 아카시아다. "하얀꽃 잎사귀 눈송이처럼 날리..." 하며 보니까, 눈송이가 아니라 구름이 되어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다. 진짜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열흘 붉은 꽃이 없으니, 그 꽃 붉은 열흘을 누려야 한다. 어린이날 다음 날, 햇볕이 유순해지는 오후에 산책을 나섰다. 현관 앞에서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잠시 고민하다 왼쪽. 그러면 탄천 버리고 옆 동네 아파트 둘레길을 거쳐 마북공원으로 가는 것이다. 같은 산책길이라도 늘 새로운 이유가 열 개는 되지만, 으뜸은 새와 아기이다.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이름 모르는 새들과, 이름 모르는 아기들. 한 아기를 만났다. 눈이 맞았다. 웃는 나를 따라 웃는다. 엄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우리 둘이 눈 맞은 걸 그때야 알아챈다. 아기에게 손을 흔든다. 아기도 따라서 빠이빠이 한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 뒤돌아보니, 아기는 계속 손을 흔들고, 엄마가 "감사합니다." 하고 내게 인사를 한다. 감사하다니! 제가 감사하죠. ^^ 아기들은 낯선 사람의 웃음을 외면하는 일이 없다. 웃어주거나, 뚱한 얼굴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뚫어져라 바라보거나. 웃어줘도 좋고, 뚱하게 바라봐줘도 좋다. 외면하는 일이 없다. 어린이날 다음 날의 산책이었다. 전날 학교 "음악과 영성" 수업에서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들었다. 저 아가와 눈 맞추고 집에 오는 길 내내 <어린이 정경>을 들었다.
야외 마스크 해제 후 첫 산책. 날씨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연둣빛 나뭇잎들의 명도와 채도는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니 순간의 아름다움이다. 화무십일홍이라...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하니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며 보낼 일이 아니라 열흘의 붉음을 누리자는 주의이다. 걷는 일이야 언제든 좋지만, 이런 봄날 같으랴. 야외 마스크 해제라니 마스크 벗고 오늘 분량의 붉음, 아니 연둣빛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꿈모임 벗님의 별칭 중 하나가 '꽃마리'이다. 아기 손톱보다 작은 꽃이라고, 아주 흔한데 가만히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하곤 한다. "오늘의 미션! 아기 손톱보다 작은 꽃마리를 만나는 것이다." 하며 집을 나섰다. 작은 들풀에 눈을 맞추자면 한 발 한 발 주저 않는 발걸음으로 걷는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 주저앉아 들여다보며 찾고 찾아야 한다. 과연 다음 꽃 검색도 인식을 못할 정도로 작은 꽃이었다. 사진을 찍어 단톡에 올리니 '꽃마리'님이 꽃마리가 맞다고 하셨다. 어쩌면 그렇게 조그만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도 의연하게 제 모양대로 피어있다. 누가 봐주든 말든 제 모양대로 제 자신을 뿜뿜 하고 있다. 애쓰지 않으며 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야외 마스크 해제라는데, 마스크 안 쓴 사람이 나밖에 없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다. 이러다 마스크 안 썼다고 테러 당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마스크 쓰는 게 편하단 얘길 많이 듣는다. 가리는 게 좋다고. 우리 아이들이 그렇다. 마스크 벗을 자신이 없다고. 딱히 자랑스럽지 않은 얼굴, 반쯤 가리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적당히 가리고 살며 느끼는 안전함이 있지. 그렇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동시에 착용하는 게 몹시 불편하다. 눈이 부셔도 그렇다. 마스크 벗는 대신 선글라스를 쓰고 셀카를 찍어봤더니 정말 그렇다. 내 얼굴도 그렇다. 하관을 가리고 눈을 드러내는 게 그나마 낫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 꽃마리는 아무 걱정 없이 창조주께서 만들고 꾸며주신 그대로 제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딱 열흘을 피었다 지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30)" 하시는데, 우리는 가리고 숨길 것투성이다.
산책길에 쑥 무더기를 지나칠 때마다 "아깝다, 아깝다"하며 다녔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쑥을 그냥 지나치기가 너무나 아쉽다. 바구니 한가득 뜯어 담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쑥 뜯기와 진달래 꺾기는 봄놀이의 진수다. 바구니 한가득 쑥 뜯고 놀기. (사실 친구들보다 늘 부진했다. 한가득 채워본 적이 없다. 열심히 뜯어도 한 줌이라 집에 와 제대로 뭘 해 먹어 본 적도 없다.) 어떤 날은 산에 가서 진달래를 한 아름 꺾으며 놀기. 쑥과 진달래를 보면 두고 오기가 아쉽다.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나가 걸을 수 있는데 집에서 책을 붙들고 앉아 있으면 귀에서 노래 소리가 들린다.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하려나"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나가 걸으면 하나님 마음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렇지.
연구소 워크숍을 갔는데, 또 여기저기 쑥이 지천. "우리 자유시간 한 시간만 가집시다. 나 쑥 뜯을래..." 말만 계속 하다 결국 집에 올 시간이 되고 말았다. 오는 길 점심식사로 토종닭으로 만든 닭볶음탕을 주문했더니 한참 기다리란다. 이때다 싶어 쑥을 뜯었다. 연구소 선생님들이 손을 보태니 락앤락 통 하나가 금세 찼다. 한 끼 분량의 국거리가 되었다. "쑥 비싸요. 마트에서 한 주먹 담으면 몇천 원이에요."라고 말하고 보니 이게 땅이 공짜로 주는 거였다. "돈 없이 값 없이 식재료를 주는구나!" 이게 하나님 나라구나 싶다. 쑥을 뜯는데 그 노래가 다시 들린다.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 하려나" 공짜로 주시는 은혜가 널리고 널렸다. 못 들은 체해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