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음터의 사랑하는 벗들이 기도 피정에 가 있다. 그 피정이 시작되었다는 포스팅을 페이스북에서 보고 '좋아요'를 누르며 잠시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 베란다 쪽에서 뭐낙 부르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쌍무지개가 펼쳐져 있다. 이렇게 선명한,  '대놓고 무지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무지개는 약속이다. 피정에 간 벗들의 기도와 삶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공동체에 관한 꿈이 있고, 고민이 많은 오랜 친구가 오랜 고민 끝에 우리 교회에 등록을 했다. 나를 알고, 남편을 알고, 우리의 기나긴 인생 여정을 알고, 목회자가 되어 살아온 나날들을 아는 친구이다. 감사와 염려가 교차하여 알 수 없는 마음이었는데... 무지개가 떴다. 약속이다. 친구의 길을, 친구의 가정을, 교회를 섬기는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유학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알바도 해야 하고... 갑자기 어른이 되어 생의 무게를 져버린 채윤이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내 가난한 젊은 날의 막막함이 생각나고, 그때의 나보다 더 강하고 성숙한 딸이 대견하지만 가엾고 안쓰럽다. 어린 날의 나를 안아주듯, 한참을 안아주었다. "내가 안고 있듯 성령님, 이 아이를 안아주세요. 저와 이 아이를 함께 안아주세요."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냥 안아주었다.  

 

이 또렷한 무지개가 떴을 때는 비가 오는 중이었다.

비가 온전히 그치고 화창하게 갠 하늘이 아니었다.

약속이다.

흐리고 비오는 날에도 사랑의 약속을 잊지 말자는, 그런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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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여정을 떠올리며 점심으로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었다. 근래 보기 드문 '폭망 요리'였다. 제대로 삶아지지 않은 파스타에 간도 맞지 않고, 총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실패였다. 무거운 몸으로 요리하느라 진을 뺐는데, 맛없는 걸 먹으면서 진이 더 빠졌다. "와하!" "오오!' 첫 입에 나오는 이 감탄사, 맛있게 먹는 즐거움이 요리하는 노고를 한 번에 씻어내는 법인데. 셋이 머리를 박고 맛없는 걸 꾸역꾸역 먹자니 피로와 졸음이 막 밀려왔다. 숟가락 놓고 바로 잠에 들어버렸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김치찌개 끓여 놓고 기다려주는 우리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늘 하지만. 엄마가 한 요리 먹어본 때는 10년도 더 전의 일이고, 심지어 집에는 김치 한 톨이 없다. 독일 출국 전날 자다 일어나서 묵은지 포함 김치 3종을 주문했다. 점심의 실패를 극복하자는 의미로 저녁에 김치찜을 했다. 와, 실패할 수 없는 요리가 김치찜인데 이걸 실패했다. 착한 현승이가 김치 때문이라고 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맛있게 만들어진 요리는 기쁨이고 활력인데. 시차로 인한 피로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꾸역꾸역 먹었더니 하릴없이 배만 부르고. 해가 넘어가고 곧 어두워질 텐데 다짜고짜 집을 나섰다. 걸어야겠다. 탄천의 들꽃 친구들에게 아직 귀국 인사를 못했지. 탄천은 온통 금계국 세상이 되었다. 작은 봄의 들꽃들이 사라지고 뜨거운 여름을 견뎌줄 금계국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옆은 모내기를 끝낸 논이다. 걷다 보니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산뜻해진다.  

 
아카시아 향이 가고 밤꽃 향기가 왔다. 이렇듯 성실하게 계절이 제 일을 하고 있다. 두어 주 사이 달라진 탄천 풍경을 느끼자니 무거웠던 몸이 발걸음과 함께 더욱 가벼워진다. 

"JESUS LOVES YOU"
저 간판도 성실하다.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요즘 대세 금계국 개망초와 함께 여전하게 서 있다. 헤롱헤롱 메롱메롱 시차 적응을 응원한다며 나 하나를 두고 피켓팅 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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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야꼬 수도원의 아침, 선물같은 고요한 시간을 얻었다. 순례객 하나 없는 공간에서 가만히 머무르는 기도를, 베네딕토 성인의 은수동굴에서 남편과 둘이 오늘의 말씀 읽기, 그리고 진짜 선물이 왔다.

새가 한 마리 날기에 “쟤 지금 나한테 오는 거다!” 했더니 진짜 얘가 내 앞에서 왔다 갔다,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고. 오늘도 새는 내게 그분의 메신저. “나 여기 있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너 있는 곳엔 어디나 내가 있다!” 말씀하신다.

오후 순례는 파르파 수도원이었다. 순례 시간 변경으로 갑자기 자유시간이 생겼는데, 이 얼마나 꿀같은 시간인가. 수도원 앞 벤치에 앉아 지금 여기의 바람과 햇살에 무장해제 상태인데, 갑자기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튀어나온 고양이 ‘지지’ 같은 애가 쓰윽 다가와 친한 척을 하는 것. 내내 곁에 앉았다 내가 일어나니 저도 일어나 또 다른 애인을 찾아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지금 여기 선물의 완성은 “아이”이지!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아이가 아침에 본 새처럼 제 엄마에게 뛰어 갔다 도망갔다 하는 것이 새보다 사랑스럽고, 고양이와 비할 수 없이 예쁘다.

얘, 키키의 고양이 지지같이 생김 이렇게 막 스킨십도 시도하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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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꼽아 놓아도, 인생은 계속되는 것이니, 최고의 순간은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과감하게 '최고의 순간'이라고 명명해 본다.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를 나누면서 Milford Sound 크루즈 타러 가는 길을 꼽았는데, 그중 하나이다.이었다.  Monkey Creek이란 곳인데, 여행기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기록하시는 서쉐석목짠님(감사합니다!)의 진도가 마침 오늘 여기(https://jayson.tistory.com/5323)여서 참을 수가 없다.
 
"아내는 표정이 정직하다. 밝음과 흐림이 분명하다. 얼굴 표정이 곧 마음상태고, 몸의 상태다."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남편의 글이다. 평생 좋은 풍경에 나를 끼워 넣어(나를 세우고 좋은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기에, 그게 아니라도 내 얼굴을 가장 많이 바라본 눈이라 일리가 있다 싶은데. 사진이 진실을 말한다. 정말 좋은 표정과 좋은 척하는 표정을 내가 봐도 알겠다. 좋은 것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이다.

 

경탄을 금치 못하는 풍광을 계속 만났지만, 정말 좋았던 것은 바로 아이들의 출몰이었다. 아이 둘을 만났다. 풍광에 잃었던 넋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겼다. 이 좋은 자연 안에서 저렇게 귀여운 아이들을 만나다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고, 빼앗긴 넋과 시선 역시 감추질 못해서 아이들 엄마와 여러 번 눈을 맞추게 되었다. 에라, 용기를 내자.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들이대고 말았다. 

 
행복감에 자신감이 충천했다. 키가 165는 되어 보이는 저 늠름한 뒷모습을 보라.

 
결혼 25주년, 인생 최고의 순간을 여러 번 갱신하며 누리게 해주신 두 분! 이번 여행에서 넷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 참 좋은데, 이 역시 사진이 담아낸 마음 같다. (몰아서 공개할 예정. 언젠가!)

 
아이들 등장에 새소리까지, 이건 거의 하늘 아래 천국이 아니던다. 영상 보고 가시겠다.

 
아이들과 새소리까지 감동인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검은색(아직 이름 모름, 차차 알게 될 수도 있음) 걷는 새 등장! 나는 또 무식해서 "이거 키위예요?" 하고 물었는데, 키위가 그렇게 야생에서 만나지는 새가 아니라고, 그래도 감동이었다. 검은 새라니, 검은색은 무의식의 빛깔이라 더 설레고 신비롭지 않은가. 과연 최고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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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도 써야 하고, 연구소 일도 해야 하는데...

글도 일도 술술 풀리지 않고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마음이 우왕좌왕한다.

주님, 제 마음이 왜 이래요? 

저 좀 살려주세요.

재밌는 일을 만들어 주시든가,

반가운 톡이라도 하나 보내주시던가 뭐라도 좀 해줘보세요.

생기, 생명의 에너지가 필요해요.

 

엎드려서 기도했다.

기도하다 졸았다.

졸다 정신 차려 다시 등을 세우고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창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보니 직박구리가 와 앉아 있다.

어제 아침에 대추로 밥상 차려놨었는데,

비가 그치자 식사하러 오신 것이다.

한 마리씩 교대로 날아와 식사하고 가신다.

글 쓰는 내내 직박구리가 곁을 지키고 있다.

 

지금도 한 마리 계심!

기도 응답 빠르고 확실하심!

(글은 계속 잘 안 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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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박 13일의 뉴질랜드 일정을 마치고 어제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공항버스에서 내려 끙끙 캐리어를 끌고 돌아섰는데 "어서 와! 보고 싶었어!' 하는 소리가 떡 버티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성실도 하여라! 떠날 때 했던 약속(긴 외출)을 지키기 위해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서 저러고 개나리가 피어 환영인사 하고 있었다. 돌아오니 봄이 되었다.

 뉴질랜드에서는 가을꽃이 한창. 남섬의 크라이스트처치 식물원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다알리아를 만났고. 그리고 많은 이름 모를 꽃을 들여다보고, 찍어주고 했다. 이국 아줌마 아저씨가 코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조금 부담스러웠으려나? 아니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 "별이 빛나는 밤"의 풍경을 만난 타카포 호숫가에도 작은 친구들이 석양을 받아 존재의 아름다움을 뿜어대고 있었다. 사진 찍어 보여주니 JP가 "율동공원 같은데!"라고 했지만 말이다. 
 

여행자 또는 방문객이 되어 누군가의 일상에 침투했다가 나의 자리로 돌아오니 며칠 경험한 그 일상들이 벌써 아스라하고, 아스라한 그리움은 그 삶의 자리들과 교회를 위한 기도가 된다. 
 
여하튼 나 돌아왔어. 연원마을의 새와 풀과 나무와 하늘과 공기, 산책길의 개천과 마른 논과 놀이터의 아이들 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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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넘는 긴 여행을 다녀오려니. 두고 가기 아까운 일상이 아쉽다. 최고의 자연 풍광을 마주할 예정이지만 우리 동네 새와 풀과 나무 친구들이 늘 제일 좋으니까. 바빠서 산책 나갈 시간이 없었는데, 어제는 짐 싸야 하는 시간에 일단 우짜든지 나갔다.  막 피어나려는 개나리 꽃봉우리에 인사를 했다. 돌아오면 만개해 있겠네.

 

아이들 어릴 적에 첫 웃음, 첫 뒤집기 순간, 첫 '엄마' 발화 순간, 첫 걸음마 순간. 얼마나 경이로운 순간이 많았던가. 일하는 시간이 좋았지만, 퇴근하면 뭔가 하나를 했고! 부모님께서 흥분해서 상황을 전하시는데 어쩐지 섭섭하고 아쉽고 그랬었다. 조금은 그런 느낌이다.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나는 개나리를 보지 못하는 게 그때 그 심정으로 아쉽다. 

 

이러고 나는 가서 누구보다 그 순간에 몰입해서 감탄하고 흥분할 위인이니, 걱정은 마시고 가서 미션 수행 잘 하고, 여행 잘 마치고 오기를 빌어주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연원마을의 새와 풀과 나무와 하늘과 공기, 산책길의 개천과 마른 논과 놀이터의 아이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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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커피가 즐거움의 한 잔일 때도,
즐거워 떠드는 수다의 한 잔일 때도,
우울감 한 잔일 때도,
우울과 무기력으로 말없는 한 잔일 때도 있는데.
 
한 잔을 다 마셔가는데 띠용!
스타워즈 쓰리피오의 눈이 나타났다.
커피잔 가득했던 감정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쓰리피오의 사랑스러운 인격(?)의 향기가 빈 잔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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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하게 설거지하다 멀쩡한 고무장갑을 가위로 잘랐다.
그게 나야...
심지어 마음에 드는 고무장갑이라 요즘 설거지 담당 자처했는데.
그걸 왜 때문에 어떻게 자를 수가 있지?
그게 나야...
 
맥락없이 이 노래가 자꾸 생각나고.
난 이 노래 참 좋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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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라고 늘 맑고 푸르러야 하는 것은 아님을 알기에
어두운 하늘, 
무거운 하늘,
먹구름 하늘에도 많이 순순한 마음이 되었는데...
 
그래도 모름지기 하늘이면 맑고 푸르고 그래야 하늘 아닌가 싶어
부아가 치밀거나 무기력해질 때가 있다.
 
그러면 가끔 하늘이 창조성 끌어올려 작품 활동을 해주기도 한다. 신비롭다.
 
어느 새벽의 하늘,
어제 저녁의 하늘 사진이다.
어느 새벽에는 밤새 마음이 천국이었는지, 기분 좋게 눈을 떠 베란다 앞에서 저런 장난스러운 하늘을 만났고.
며칠 타나토스 에너지 상승하여 황폐해진 마음이었던 어제 저녁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오렌지빛 황홀경을 만났다.
 
이런 하늘, 저런 하늘, 하늘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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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가 끝나고 저녁 바람이 선선해질 즈음엔 나뭇잎들에 '노랑 끼'가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초록에 노랑을 섞으면 연두가 되지만, 초봄 새 잎이 나올 때의 그 연둣빛이 아니다. 여름 끝, 가을 초입은 '노랑 끼' 있는 잎을 좋아한다. 스러짐의 계절을 받아들일 준비라 여겨져서일까? 잠시 어정쩡한 빛을 띠다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제각각 숨겨둔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붉은색, 노란색 단풍이 들면 나무 인생 가장 화려한 시절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 영광이 짧다는 것도 나는 안다. 화려한 영광 뒤에서 이들은 힘을 빼고 있다. 꽉 쥔 손을 펴며 힘을 빼고 있다. 바람 한 번 휘리릭 불면 우수수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떨어져 뒹굴며 버석버석 말라 이리 뒹굴고 저리 차이고 하다 쓰레기가 되어 자루에 담겨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텅 빈 나뭇가지... 그 텅 빈 나목 사이로는 파란 하늘이 훤히 보인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가르침이며 기도인가.
 
이게 순리인데 말이다. 송충이 놈들이 기승을 부려 탄천의 나무들이 때 이른 이상한 나목이 되어 버렸다. 나무 인생 얼마 되지도 않을 색의 향연, 그 절정은 누려보지도 못하고 갉아 먹힌 잎들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깔끔한 선으로 남은 겨울 나무가 아니다. 가지 끝 잎맥이 그대로 남은, 한 많은 여인의 머리카락 같은 모양새로 슬픈 하늘을 드러낸다. 송충이에게 화가 났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바닥에 기어 다니는 송충이를 발견하면 콱 밟아 버릴까 싶었다. 그렇다고 콱 밟을 수도 없고... 한두 마리가 아니라 지뢰를 피하듯 걸어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송충이를 피하며 걷는 길. 갑자기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송충이들이 귀여워 보였다. 픽 웃음이 나왔다. 송충이가 뭔 죄야? 송충이는 송충이 본분에 충실할 뿐인데...
 
언젠가 불곡산을 걷다 마주친 실뱀과의 만남도 떠오른다. 작은 오솔길을 가로지르는 실뱀을 발견하고는 소리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 얼어 붙어 있었다. 잠시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얼어붙었었는데, 정신 차리고 다시 걸으며 생각하니 뱀은 뱀의 길을 갔을 뿐이었고. 길 건너는 뱀을 보고 혼자 기절할 정도로 놀라 나자빠진 건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지 뭔가. 송충이는 송충이의 일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서서 제 주변의 생명체들과 어우러지고 있다. 단풍 화려한 나무, 우수수 떨어지는 예쁜 장면을 보겠다는 건 내 바람이지 나무의 뜻인지 아닌지는 어찌 알겠는가. 송충이에 갉아 먹혀 저 모양이 되어도, 나무가 괜찮다는데 내가 왜 슬퍼하고 화를 내고 한다는 말인가.
 
송충이는 송충이의 일을 하고,
갉아 먹힌 잎으로 나무는 제 운명의 남다른 가을을 살고,
나는 나의 2023년 가을 길을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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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도 산책이 가능한,

얼마 안 되는 시절이다.

낮에 나가야 하나하나 눈을 맞출 수가 있는데.

뷰 포인트다.

논이 있고, 

멀리 든든한 배경의 나무가 있고.

이 즈음엔 심지어 코스모스가 바로 앞에서 유혹을 한다.

 

 

내적 여정은 기도의 여정이라는 안내를 하면서

"이 날씨에 산책하지 않는 것은 죄예요."

했더니

 

어느 간사님이 

"저녁에 설교가 있어서, 설교 준비하느라 죄를 짓네요."

했다.

 

 

내가 "하이고, 죄 중에 잉태한 설교네요."

했다.

 

 

많은 경우,

설교는 죄에서 잉태하지.

어쩌면 좋은 설교는 더욱 죄에서.

 

 

어쨌든 나가 걷지 않으면 죄가 될 정도의 

좋은 날들이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들꽃 한 송이를 보듬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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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계절이 계절의 때를 알고 찾아오고,
계절이 떠날 때를 알아 순순히 떠난다.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계절,
제 때를 알고 찾아온 계절이 교차할 때, 
나의 계절을 생각한다.
 
계절이 좋은 설교이고
계절을 마주할 때 나는 정직한 구도자가 된다.
깊고 고요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럴 땐 이런 이유로
저럴 땐 저런 이유로
산책을 포기할 수 없지만,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이 이 즈음 같은 때가 없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보느라 이 즈음 산책 길엔 목이 빠진다.
이 즈음엔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낮이고 밤이고 간에.
 

 

*  재밌는 사연 끼워 팔기 * 


(JP와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며 등 대고 대화 중)
JP : 야아, 공기가 차다. 계절이 지나가고 있어...  
SS : 그러게... 계절이 지나가고 있네... (사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이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약간 병짓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어떤 단어로 버튼이 눌리면 내 안에 있는 시나 노래 가사가 막 줄줄 나온다. 평생 있던 증상인데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JP : 와아... 당신 왜 서울대 못 갔어?
 
-------
 
(JP와 채윤이 식탁에 마주 앉아서)
 채윤 : 배 맛있다. 달다... 아빠, 배나무에도 꽃이 피어?
JP : 당연하지! 배꽃이 예쁘지.
SS : (계란프라이 만들면서 등으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배꽃... 배꽃?... 이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귀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병짓...)
JP : 와놔, 정신실 왜 서울대 못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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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나서자마자 빰에 닿는 바람에...
그 가벼운 밤 공기에...
가을로 가득 찬 계절이 지나는 하늘에...
이미 다 써놓으셨으면서…
읽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
숨이 막히도록 느끼고 있는데...
.
.
.
.
.
.
.
대놓고 이러신다.
지나가는 사람 다 보는데 민망하게 이러신다.
안다구요. JESUS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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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줌 강의 전에 짧은 밤 산책을 나갔는데, 어디서 아카시아 향기가 여리여리 하게 코끝이 스쳤다. 어디지? 어딨는데? 아카시아 어딨는데? 좋은 순간은 좀 붙잡아 두고 싶은데, 날듯 말듯한 향을 카메라에 담을 순 없어서 옆에 있는 아무거나 찍었다. 그러니까 저 나무 그림자에서는 아카시아 향이 나는 것이다. 다음 날인가, 탄천을 걷다 밤의 그 향기를 보내던 범인의 범죄현장을 목격했다. 아닐 수도 있고... 다른 아카시아일 수도 있고. 어쨌든 좋은 향기, 봄날의 아름다움이라서... 아름다운 건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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