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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일상292

계속 걷기: 네 발로 목발 생활, 할만하네! 약속된 강의만 어떻게 해결하면 한 달은 얼마든지 살겠네!... 싶었지. 목요일 밤에 다쳤고, 금요일 오전에 가서 깁스했고, 그리고는 주말이었다. 월요일은 원고 마감 날이었고. 그러니까 금, 토, 일, 월 내내 원고에 붙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화요일 아침 원고를 보내고 나니 그야말로 '현타'가 왔다. 냅다 밖으로 나가 걸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경안천이든, 앞산이든 어디든! 아, 원고가 끝났고 할 일이 없는데 걸을 수가 없다. 목발 생활은 할 만한 게 아니었다. 책이랑 넷플릭스랑 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열어둔 창문으로 솔솔 바람이 들어오는데 참을 수가 없다. 백팩에 책 몇 권과 커피를 담아 넣고 따아~악 짊어지고 삐걱삐걱 목발을 짚고 나섰다. 멀리는 못 가지만, 동 앞이 바로 예쁜.. 2025. 5. 21.
계속 걷기: 나의 발로 열흘 전쯤, 서울 갈 일이 있었다. 대중교통으로 나가서 명동쯤에서 약속을 잡는 일이 있다. 책이나 업무 관련이지만, 이런 만남은 대체로 설렌다. 이날은 특히 '일로 만난 사이'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나 싶은 친구를 만나는 일이었으니까. 원고 끝난 주간이라 마음도 한 없이 가벼웠다. 동네에 있는 '식빵이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싶은 식빵을 사가지고 가서 선사해야지! 시골쥐가 서울 가는 느낌으로, 설레고 기분 좋은 발걸음이었다. 빵집에 도착하니 10시에 연다고, 받아주질 않네... 시간 정말 넉넉히 잡고 나가야 한다는 채윤이 말에 넉넉히 나오긴 했지만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서 하나 놓치면 30분인데, 빵을 포기해 말아 하다 포기하지 못하기로 했다. 15분 정도 남는 시간, 상가 뒤 예쁠 것 없는 길을 걸었다.. 2025. 5. 17.
어린이 흔적 겨우, 간신히 탈고를 이룬 어린이날 밤. 산책에 나섰다. 놀이터를 빙빙 돌며 걷는 밤 산책이 참 좋은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낮에 놀다 두고 간 부서진 장난감이 놀이터 벤치에 헬렐레 누워 있는 것! 하이고... 터덜터덜 재미없이 걷던 발걸음에 폴짝폴짝 생기가 피어났다. 누가 봤으면 조금 부끄러웠을 것! 노래도 했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푸른 달과 흰구름 둥실 떠가는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끝이 아니었음! 어린이날이라 엄마가 딸기우유를 허락했는지 모르겠다. 어떡해... 아오, 귀여워! 그리고 또 노래가 나왔다. "하루 종일 우뚝 서 있는 성난 허수아비 아저씨" 노래에 다섯 살 김채윤이 가사를 붙였던. 우성상가 이층에는 채윤이 가는 병원 있어요 맞아 맞아요 .. 2025. 5. 5.
겨우 봄 봄에게 참 미안하게 됐다. 매일 마주 보면서 이렇듯 가까이 다가온 줄 몰랐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비가 오는 주일, 이 날이 지나면 벚꽃은 끝이라는 얘기라 자꾸 들렸다. 잠깐 벚꽃 아래를 걸어보기도 했으나 존재를 알아보지는 못했었다. 눈을 맞추지 못했었다. 거실 책상 앞에서 매일 보는 산이 어느새 연둣빛을 띠고 흰색과 분홍 토핑이 얹혔는데, 도통 가 볼 수가 없네... 이렇게 올봄은 끝이야, 하고 있었다.  주일에 저녁 먹고 나니 6시, 해지는 시간 7시 몇 분. 우박에 눈에 춥고 난리가 난 날씨였는데, 어느새 맑아진 하늘이었다. 다짜고짜 일어났다. 그냥 나섰다. 경안천을 염두에 두었으나 발길이 자꾸 오른쪽으로 향한다. 산이다. 5 분이면 흰색 분홍색 토핑 얹어진 지점에 이를 것 같다. 젖은 산길 오르니.. 2025. 4. 14.
겨울 실내악 겨울 실내악(室內樂) / 김현승잘 익은 스토브가에서몇 권의 낡은 책과 온종일이야기를 나눈다겨울이 다정해지는두꺼운 벽의 고마움이여과거의 집을 가진나의 고요한 기쁨이여깨끗한 불길이여죄를 다시는 저지를 수 없는나의 마른 손이여마음에 깊이 간직한아름다운 보석들을 온종일 태우며내 영혼이 호올로 남아 사는슬픔을 더 부르지 않을나의 집이여 하염없이 눈이 내리니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시간을 덮어버려 명절이 사라졌다. 갑자기 주어진 두둑해진 시간으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원고와 여러 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근심과 기도를 하면 될 텐데... 갑자기 진공상태가 된 듯하다. 모니터 앞에 앉아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키스 자렛의 피아노 소리로 충분한 것 같기도 하고. 뭐든 해야 할 것 같.. 2025. 1. 28.
나의 열네 번 째 창 이사했다. 또 이사를 했다. 제목에 '결혼 후 열네 번째 집'이라고 썼다가 사진을 고르며 바꿨다. 집을 고르는 기준, 내게 이 집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창'이다. 창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이다.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 남은 열세 집은 모두 창이다. 창이 있으나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집. 바람이 불면 덜컹덜컹 유리가 깨져 날아갈 것 같았던 집, 가장 춥고 서러운 집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 좁은 주방 한켠의 창과 거기서 보이는 나무 한 그루로 위로받았던 집.  "이제 이사의 달인이 되셨겠네요." 또 이사했다고 말하면 이런 말을 듣지만. 그렇지 않다. 이사는 달인이 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사와 관련된 모든 겪어내야 할 것들은 웬만해서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다. 집을 구하는 일, 집을 구하.. 2024. 12. 23.
Behold the fowls of the air 2024년 10월 31일 오전 11시. 정신이 번쩍 드는, 아름다운 설교 한 편을 들었다. 아름다운 가르침이 지천에 널렸다. 입을 닫고 눈과 귀만 열고 있다면.(존 스토트 신부님에게 자연 관찰하는 법을 가르치신 그분 아버님 말씀이라고 한다.) 보시다시피 예수님은 새를 우리의 선생님으로 삼으신다. 복음서에 나오듯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참새 한 마리가 제일 똑똑하다는 인간에게 신학자요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수치다. 공중에 있는 작은 새의 수만큼 우리에겐 많은 교사와 설교자가 있다. 그들의 생생한 본은 우리를 당황케 한다... 그러므로 나이팅게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당신은 훌륭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주님의 주방에 .. 2024. 10. 31.
선물로 온 코로나 8월 15일 끼어 1박 2일, 대부도에서 강의로 불태웠다. 작은 교회 청년부 두 곳을 달렸다. 두 교회 수련회 장소가 4분 거리에 있었으니 달렸다고 하기는 좀 뭐 하네. 여하튼 조금 세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불태우고, 그리고 달렸다. 펜션 수련회에 앉았노라니 청년 시절 수련회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30여 년이 지났는데, 그 느낌이 그대로 살아왔다. 8월 15일은 일 년 중 가장 인기 있는 날이다. 전국의 교회 청년부 수련회가 몰려 있어서 그렇다. 당첨은 늘 선착순이다. 제일 먼저 연락온 곳과 약속을 잡고, 이후에 오는 섭외 전화가 몇 통이 되었든 거절해야 한다. 인기가 아무리 좋아도 한 번의 강의만 가능한 것이다. 여러 상황이 교차하여 달리는 1박 2일, 세 번의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한 교회와는.. 2024. 8. 19.
약속 나음터의 사랑하는 벗들이 기도 피정에 가 있다. 그 피정이 시작되었다는 포스팅을 페이스북에서 보고 '좋아요'를 누르며 잠시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 베란다 쪽에서 뭔가가 부르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쌍무지개가 펼쳐져 있다. 이렇게 선명한,  '대놓고 무지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무지개는 약속이다. 피정에 간 벗들의 기도와 삶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공동체에 관한 꿈이 있고, 고민이 많은 오랜 친구가 오랜 고민 끝에 우리 교회에 등록을 했다. 나를 알고, 남편을 알고, 우리의 기나긴 인생 여정을 알고, 목회자가 되어 살아온 나날들을 아는 친구이다. 감사와 염려가 교차하여 알 수 없는 마음이었는데... 무지개가 떴다. 약속이다. 친구의 길을, 친구의 가정을, 교회를 섬기는 우리 가정을 지켜.. 2024. 7. 24.
시차 적응 응원 팻말 이탈리아 여정을 떠올리며 점심으로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었다. 근래 보기 드문 '폭망 요리'였다. 제대로 삶아지지 않은 파스타에 간도 맞지 않고, 총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실패였다. 무거운 몸으로 요리하느라 진을 뺐는데, 맛없는 걸 먹으면서 진이 더 빠졌다. "와하!" "오오!' 첫 입에 나오는 이 감탄사, 맛있게 먹는 즐거움이 요리하는 노고를 한 번에 씻어내는 법인데. 셋이 머리를 박고 맛없는 걸 꾸역꾸역 먹자니 피로와 졸음이 막 밀려왔다. 숟가락 놓고 바로 잠에 들어버렸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김치찌개 끓여 놓고 기다려주는 우리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늘 하지만. 엄마가 한 요리 먹어본 때는 10년도 더 전의 일이고, 심지어 집에는 김치 한 톨이 없다. 독일 출국 전날 자다 일어나서.. 2024.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