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만 붙들고 사는 요즘인데. 지난 얼마간, 사이사이 쉬고 숨을 쉰 것은 나물 만들기였다. 드룹나물이다. 드룹은 데쳐서 초고추장 찍어 먹는 줄만 알았는데 된장에 심심하게 무쳤더니 진한 드룹 향은 살아 있고, 오리엔탈 드레싱의 샐러드 느낌이다.

   

 

이 모든 봄나물이 채윤이가 들고 온 것인데, 봉지를 풀면서 달래을 보더니 "오, 엄마 달래 된장찌개 해 줘!" 주문을 했다. 찌개라는 게 식구들 모두 모여 앉아서 한 그릇에 숟가락을 섞어가며 비위생적으로 막막 먹어야 맛이 나는 것인데. 세 식구 앉아서 제대로 밥 먹는 끼니가 있어야 말이지. 시들기 전에 무쳐버렸다. 오, 달래 너도 나물이구나!!!

 

 

왜 우리 엄마는 나물을 좋아하지? 저렇게 맛없는 걸 왜 좋아하지? 노인네라서 그런가? 어렸을 적에 그랬다. 나물 좋아하는 엄마 식성이 도통 이 세상 사람이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나물을 좋아하고 무치고 하는 엄마가 취나물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도통 알 길이 없네. 그래서 나도 취나물하고는 안 친한데. 해 봤다. 아, 취나물 향이 이렇구나! 나물은 '향'이구나. 드룹, 달래, 취. 제각각 향이 살아 있다. 우리 엄마는 이 향을 느끼고 좋아했던 것일까? 

 

야채를 깨끗하게 손질해서 건네 주시는 손길이 참 고마운데.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메시지 하나에 다 담을 수가 없다.  말 그대로 맛있게 감사히 잘 먹는 것이 보답이라 여겨 정성스레 무쳐서 맛있게 먹는다. 힐링, 힐링 하는데.... 이런 게 힐링인가? 초록 야채를 데치고 무치는 게, 찰진 밥에 먹는 게 이렇게 좋을 수 없다. 원고 감옥에서 잠시 풀려 나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어렸을 적에 나물 좋아하는 엄마를 사람 아닌 토끼... 이런 동물 보듯 했는데. 채윤이는 저 씁쓰름한 드룹과 취나물을 '하아... 맛있다. 남은 거 내가 다 먹어도 돼?" 하면서 촵촵촵촵 먹는다. 

 

나물 무치기! 이보다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일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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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 스크램블드 에그 주문이 들어와서 계란 두 개를 탁탁 깼는데... 노른자가 네 개다! 와, 신난다!!!! 김채윤은 노른자 싫어하는데! 스크램블 하지 말고 삶은 계란으로 줄 걸! 삶을 계란 깼는데 싫어하는 노른자가 두 개나 들어 있으면 진짜 약 오르겠다. 흰자 노른자 섞는데 정말 아까웠다. 삶은 계란의 흰자만 벗겨 먹고 노른자 남기는 아이. 약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못내 안타까워 죽는 엄마... 나란 엄마,
나란 자는... 도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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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선교 여행 때, 강의 마친 후 틈새 시간에 아보카도 커피를 대접받았다. 와, 환상의 맛이었다! 떡볶이 400인 분 만든 순간만큼이나 인상적으로 기억될 캄보디아 장면이다. 맛있으면 만들어 봐야지! 집 앞 마트로 누리던 트레이더스를 놓고 이사 왔더니 이런 게 아쉽네. 아보카도는 자루 째 싸게 파는 트레이더슨데. 여하튼 준비하여 내 감을 믿고... 토요일 아침 음료로 만들어 보았다. 성공! 환상의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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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물 딸기를 헐값에 샀더니 하도 맛이 없어서 죄 다져서 알룰로스에 비벼 두었다.

일명 딸기청이 되었다.

우유에 타서 마셨더니 스벅, 투썸 딸기라떼 부럽지 않다.

행곡하다!

 

아침 음료로 채윤에게 주었더니...

"엄마가 원고를 안 쓰니 아주 좋군!" 한다.

"행곡해? 원고 넘긴 엄마가 맛있는 거 해주니 행곡하지?" 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엄마가 재밌는 걸 하고 있어서 좋다고!"

 

그래... 뭐, 재밌으면 행곡한 것지. 난 행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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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님, 저 그거... 소장님 블로그에 있는 그 고사리파스타 먹고 싶어요.

 

이 한 마디에 요리와 환대의 열정이 끓어올랐다.

우리집에 와서 자기로 한 날,

이틀 전부터 고사리 불려 삶아 놓고 심기일전 하였다.

내, 최고의 브런치를 만들어 주겠다.

 

같이 먹던 JP와 채윤이 말잇못....

양 조절 실패, 조리시간 조절 실패로, 간 맞추기 실패.

질척질척한 밍밍한 파스타가 커다란 웍에 한 가득이었다.

 

진심, 너무 갈아 넣으면 꼭 이렇듯 스타일 무너진다는 진리.

진심 무너진 스타일을 사진이 다 구제한다는 진실, 아니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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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벅에서 좋아하던 샌드위치가 있었는데. 루꼴라 치아바타... 이런 재료와 이름이었다. 어느 날 없어졌더라고. 동네에 하나로마트가 생겼는데, 로컬푸드 코너에 가니 루꼴라 한 묶음이 1500원이었다. 양이 적지도 않아. 일단 덥석 사서는 떡볶이 위에 한 번 얹어 먹고도 한 주먹이 남았다. 어느 아침, 냉동실에 있던 치아바타를 꺼내어 바질페스토 발라주고 방토 잘라 올려주고, 냉장고에굴러다니던 치즈에 루꼴라 넣어서 와플기계에 파니니 팬으로 구웠더니... 와, 스벅 루꼴라 치아바타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이 되었다. 요즘 썩 기분이 좋지 않아 자고 일어나 뚱하고 나온 채윤이 아침으로 해주었다. 맛있다 어떻다 말하지 않지만, 표정만 봐도 안다. 얘 지금 맛있어서 행곡하다! 채윤이 어렸을 적에 내가 불러줬던 노래, 그걸 따라 부르던 우리 채윤이 특유의 발음, “아, 행곡해!"
 
물고기 둘 떡 다섯 개 작은 도시락
예수님이 기도하고 나눠주셨네
주고 주고 또 주어도 그대로 있네
먹는 사람 즐거워해 아 행곡해!
 
채윤이는 행복할 때 행곡하다고 말한다. 채윤이가 행곡하면 내가 참 행복하다. 오천 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물고기와 떡으로 밥을 먹을 때, 행곡했을 것이다. 가련한 그들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행곡하셨을 것이다.  
 

-------
 
나이를 먹어서 좋은 것이 있다. 좋은 것 안에 안 좋은 것, 안 좋은 것 안에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 안의 안 좋은 면, 안 좋은 사람이라고 치웠던 이에게서 발견하는 좋은 면이 있으니... 내 안에도 좋은 면과 안 좋은 면이 있고, 둘 다 나라고 여기니 편안해지는 것이다. 


약간 부작용인데. 안전한 곳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위험한 곳이 의외로 안전한 곳일 수 있다는 것도 좋으면서...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다소 위험한 곳이라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현시욕 넘치는 닝겐으로서 너무 표현하고 살았지... 싶어서 반성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블로그가 자주 개점휴업 상태이다. 아예 닫아버릴까, 생각도 했었으나 방법도 잘 모르겠고...

 

그래도 시시각각 불끈거리는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늘 '요리'이다. 비공개 요리 포스팅이 쌓여간다. 이렇게 하고 싶을 때는 해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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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단기선교, 캄보디아 선교여행에 다녀왔다. 그 어떤 요리보다 떡볶이에 진심인 "삶은 요리 정 선생"으로서 레전드를 찍고 왔다. 장작불 피워 450인 분의 떡볶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한 것이다!  '난생처음'에다 '선교'인데... 심지어 '캄보디아'이니 할 말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니지만, 레전드 떡볶이를 경험한, 사적으로 그 의미가 중차대한 여행이 되었다.
 
<아주 사적인 동남아>라는 프로그램은 재미있게 보았다. 남편과 닮았다는 탤런트 이선균과 장항준 감독, 그리고 낯선 두 배우까지. 캐릭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적인' 캄보디아 여행인 관찰 예능을 재미있게 보았다. 각기 다른 넷의 캐릭터가 만드는 역동에 끌려서 보다 결국 캄보디아에 꽂혀버렸는데, 방점은 '사적인'이다. 넷의 성격은 사적인 것이고, 나름 관광지 캄보디아가 아니라 사람 사는 동네 캄보디아를 배경 삼으려는 것도 사적이었다. 이선균 배우를 앗아간(잃은) 법과 언론의 생태에 대한 내 사적인 슬픔과 분노가 더해져 캄보디아는 참으로 사적인 나라가 되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동남아 장작불 요리가 떠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시간 도둑으로 치면 밥도둑 간장게장에 견줄 마력이다. 그 영상에서 본 장작불과 솥과 삽 모양의 주걱을 실물 영접하여 떡볶이를 제조하였다. 세상에! 내가 유튜브 영상 속으로 들어가다니! 첫날은 250인 분, 둘째 날은 450인분(이라고 한다). 정말로 황홀한 순간이었다. 떡, 어묵, 떡볶이 소스 스프(라는 게 있더군!)를 넣고 한 10여 분 끓이면 끝나는 요리였는데. 맛은 정말 엄지 척이었다! 장작불의 힘, 대용량 요리의 힘.
 
사적인 떡볶이 연구가, "삶은 요리 정선생"으로서 잊지 못할 체험을 했다. 바로 시판 가능한 떡볶이 레시피  10여 종, 어설픈 후보 레시피 10여 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때 (한영교회 청년부 TNT 시절) 12인 분 다량의 떡볶이를 척척 만들기도 했었는데. 450인 분을 찍었으니... 나는 다 이루었다. 떡볶이 인생 여기서 끝나도 여한이 없겠다.
 
아주 사적인 선교 여행, 아주 사적인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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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는 그렇게 많은 야채와 식재료들이 있는데, 장을 볼 때마다 눈에 걸리는 것들은 늘 그게 그거다. 손으로 집어 들기 전에 눈으로 들었다 놨다 하는 것 중 하나가 이 즈음엔 냉이이다. 벌써 맛있겠고, 벌써 향기롭지만... 다듬고 씻는 일이 얼마나 귀찮을까 눈길 몇 번 주다 돌아서곤 한다. 그래도 집어 들게 하는 건 "채윤이가 좋아하니까!"이다. 그런데 솔직히 채윤이만 좋아한다면 사지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엄마라면 "신실이가 좋아함"이 어떤 귀찮음을 감수하고라도 음식을 만드는 충분조건이 되겠지만, 채윤이 엄마 신실은 신실이 엄마와 다르다. 채윤이가 좋아하지만 제가 좋아하니까 결국 집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냉이 두 팩을 사서, 초록초록하게 데쳐서 심심하고 상큼하게 무쳐서 잘 먹었다. 채윤이도 신실이도, 무엇이든 무덤덤한 종필까지 맛있게 먹었다. 이 정도 초록이 맛있게 몸에 들어가면 바로 몸과 마음이 푸르게 피어나면 좋으련만... 독감 후유증 종필, 이틀 연속으로 공연하는 채윤, 이유 없이 마음을 시름시름 앓는 신실 모두 맛있게 먹고는 각자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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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볶음밥, 이라고 했으면 큰 호응을 못 얻었을 것이다. 계란볶음밥이라고 했으면 그리 따뜻한 음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알맘마 해줄까? 하는 순간 "알맘마" 해주겠다는 사람이나, 먹을 사람이나, 저녁을 안 먹겠다고 했던 사람까지 음식 너머의 따스함에 감싸였다. 장을 보러 나갈 수도 없고, 무엇이 꽉 들어찬 냉장고에 실속이 없는 저녁이었다. 실속이란, 오직 계란... 계란을 풀어 익히고 밥을 비벼 양념하는 이 단순한 밥을 아버님께서 "알맘마"라 부르며 해주셨었다. 채윤이 현승이에게 해주셨지만, 알맘마라는 말에 반색하는 것을 보면 JP의 기억에도 "있는" 음식이다. 파를 듬뿍 넣어 파기름을 내고 알맘마를 만드는 동안 우리 아버님의 착한 따스함이 생각났다. 당신의 아들, 손주들, 그리고 둘째 딸이라 하시던 내게 그 따스함을 심어 놓으셨다.
 
계란볶음밥 아닌 우리들의 알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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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나 화요일 책모임을 마치고 들어오는 남편의 손에 곶감이 들려 있는 때가 있다. 많이도 아니고 네 개 정도. 집 처마에 곶감을 말리고 있는 집사님께서 아마도 익을 때마다 몇 개씩 챙겨 가져오시는 것이다. 앙증맞고 정겹다. 하나하나 익어가는 곶감을 하나하나 챙기는 손길, 아니 그전에 하나하나 일일이 따고 깎고 매다는 손길이 느껴진다. 제 속도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곶감이 되어가는 그 고유한 시간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간과 손길을 느껴지니 마음이 보인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희한하게도 보이는 것이 마음이다. 따뜻한 마음, 차거운 마음은 스쳐 지나면서도 느껴진다. 하물며 곶감이라는 物이 눈앞에 있으니 보이지 않는 마음이 훤히 드러난다. 게다가 곶감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니 몇 배로 크게 다가온다. (호랑이를 물리친, 무섭도록 맛있는 곶감이 아니냐고!) 집사님은 한결같이 우리 네 식구에게 각각, 곶감을 아니 따뜻한 마음을 건네곤 하셨다.  

 

토요일 여의도 국회 앞으로 가기 위해 원고에 매진 중이다. 매진한다고 진도가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최대한 앉아 있는 중이다. 진득하니 앉아 있는 나를 대접해야겠어서 간식을 좀 정성그럽게 챙겨봤다. 곶감과 함께 커피를 내렸는데. 커피 담은 머그잔은 도자기 공예가인 내 동갑내기 집사님의 작품이다. 지금은 교회를 떠나셨고, 잠깐의 인연이었다. 같은 동네 사는 덕에 컵과 그릇 여럿을 선사받았다. 집사님의 작품에 커피를 내리고 음식을 담을 때마다 떠올린다. 어떤 때는 선명하게 어떤 때는 스치듯 흐릿하게. 이 역시 시간과 손길이 담긴 마음이다. 전문가의 손길이다. 돌아보면 추웠던 날의 작은 온기였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는 것이 되게 하는 말과 손길과 몸짓과 물건을 선물이라 부른다. gift, 또는 은혜.

 

아가서를 묵상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와 여러 교부들, 신비가들이 왜들 모두 아가서 주석을 남겼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아가서에 이렇게 풍성히 담겨 있구나! 남편과 함께 하는 묵상이라, 부부만이 아는 길고 깊은 비밀 같은 사랑의 언어가 더 와닿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어쩌면 이렇게도 육체적인 사랑의 묘사로 잘 그려냈을까! 보이지 않는 영혼,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것과 다름 아니다. 보이는 것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과 영혼 깊이 스며있다. 마음과 몸은, 영혼과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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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식을 좋아하는 거 같아.
나도 그래. 우리는 분식을 참 좋아해.
 

주일 저녁, 남편 혼자 있는 집에 채윤이와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빠 저녁 어떡하지? 하다, 우리가 뭘 주문해 줄까? 하다 배민으로 떡볶이를 시키고 돌아오니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먹고 있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 있는 날에는 김밥으로 식사를 하는데. 남은 김밥을 챙겨 올 때가 있다. 냉장고에 두었다 다음 날 아침에 계란물에 적셔 부쳐서 먹으면 좋은 한 끼가 된다. 미니 계란에 푹 담가 프라이팬에 부쳐서 내주었더니 "오, 좋아 좋아! 코리안 오믈렛인가?" 하고 작명을 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아파트에 곱창볶음 트럭이 온다. 곱창볶음은 냄새가 조금 나고, 순대볶음은 먹을만하다. 나는 또 순대와 순대볶음을 좀 좋아해야 말이지. 순대볶음 사 오면 집에 있는 깻잎이나 양배추, 양파 같은 걸 더 넣어 한 번 더 볶는다. 마늘이나 파고 더 넣고. 마침 알배기 배추가 있어서 채 썰어서 함께 내놓으니 식감도 좋다. 입맛도 감정도 무딘 남편이 "오, 이렇게 같이 먹으니 씹는 맛이 있고 좋다!" 한다. 남편이 그랬다. "나는 분식을 참 좋아해." "당신 순대는 안 좋아하잖아. 순대는 나만 좋아하지!" "아니야, 순대만 좋아해. 내장이 싫은 거지." 찐은 내장인데... 바부... 아무튼.
 
우리는 분식을 참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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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는 사랑니 발치 후 제 손으로 죽을 사들고 들어오기로 했다. 저녁은 패스하겠다며 빈손으로 들어오더니 "아, 약! 약 먹으려면 뭘 먹어야 하는데..." 한다. 돌발상황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누룽지만 끓여주는 건 그렇고... 누룽지에 계란을 풀어볼까? 이상한가? 생각하다... 채윤이 '최애 죽'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샤브샤브나 전골을 먹고 남은 국물에 끓이는 죽을 우리 채윤이가 엄청나게 좋아하지! 그것 뭐 맛만 비슷하면 되는 거지. 꼭 전골을 먹어야 하나?! 쯔유와 새우분말, 표고버섯 분말 같을 것을 때려 넣고 육수를 만들어서 누룽지 부숴서 끓였다. 그리고 계란을 풀었다. 성공적이다! 싱크로율 100%에 가깝다! 아깝다! 마취가 덜 풀려서 맛을 못 느끼는 김채윤이라니... 내 기분만 좋았다. 게다가 사진을 찍고 말고 할 비주얼도 아니어서 어떻게 뭐, 달리 자랑 뿜뿜 할 수가 없네.
 
오이을 봤는데, 며칠 전 어느 릴스에서 본 '지중해식 샐러드' 생각이 나서 두 개를 사왔다. 채윤이가 꾸부정하게 식탁 앞에 앉아 '성공한 실패 죽'을 처묵처묵 하는 사이 막막 만들어 보았다. 그까이 꺼 막 올리브유 대충 넣고 식초 넣고... 오, 맛있다! 숙성시키면 더 맛있다니 내일 아침에 먹어야지, 하고 냉장고에 넣었는데. 성경공부 마치고 늦게 돌아온 JP의 야식으로 다 털었다. 
 
어제 종일 원고 붙들고 있었는데... 딱 두 문장을 썼다. 자괴감이 든다. 창의성이 글로 가야 하는데... 요리로 다 바꿔 먹어 버리니... (요리 책을 내겠다고 작심을 하면, 요리 아닌 다른 창의력이 폭발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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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그는 있으나 없는 존재이다. 아빠, 남편, 사람 JP는 껍데기만 남기고 내일로 이미 떠나고 없다. 설교 준비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의 동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집에서 준비하다 점심 먹고 교회에 가겠다고 하면 신경(질)이 많이 쓰인다. 요즘 주방은 시도 때도 없이 휴업 상태인데, 토요일에 이러면 뭔가 좀 해줘야 할 것만 같다. 실은 나도 주일에 강의가 있어서 그리 여유 있는 편이 아닌데. 그와 내가 다른 점은 "해야 할 일"을 앞두고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마느냐에 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하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면 유난히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떠오르고. 결국 그것을 해버리고 만다. 텅 빈 냉장고이지만, 샐러드용 야채 한 팩이 있었다. 거기에 파스타면 대충 비벼서 샐러드 파스타를 하려고 했다. 오전 운동 다녀오는 길에 방울토마토 사고, 냉동실의 새우 한 줌을 꺼내서 준비했더니,  "대충 파스타"가 아니게 되었다. 갑자기 신이 나서 발사믹 드레싱 제조하고. 맛을 보니 간이 또 딱 맞아 맛있고 난리인 것이다. 그러자... 신이 났다. 영감이 차올랐다. 곧 대림절인데, 에라! 크리스마스 리스 파스타다! 

 

노는 것도 일하는 것처럼 하는 JP, 설교 준비 파이팅!

일하는 것도 노는 것처럼 하는 나도 강의 준비 파이팅!

맛있게 먹고 힘내서 제 할 일 하는 가을 토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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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방이 갑오징어를 좋아허잖여."

그는 ‘김서방’이 되기까지 갑오징어의 존재를 몰랐다. 김서방이 되어 장모님 밥상에서 처음 갑오징어를 먹었고, 그날부터 그는 갑오징어를 좋아하는 김서방이 되었다. 장모님은 늘 갑오징어를 준비했다.

"엄마여~"

장모님은 김서방에게 전화를 하면 늘 ‘엄마여~’라고 말했다. 늦둥이 딸의 엄마인 장모님은 김서방에겐 할머니 뻘이었다. 김서방의 외할머니와 장모님이 동갑이셨으니, 그냥 할머니이다. 그리고 김서방은 ‘엄마’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일찍 철이 들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엄마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런 김서방에게 할머니 뻘 장모님은 "엄마여~"하고 전화를 했다.

김서방이 되어 갑자기 갑오징어 좋아하게 된 그에게 갑오징어 숙회를 해주었다. “사람이 참 찬찬혀. 착허고 점잖여." 하며 김서방을 예뻐하던 우리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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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도 피정에 들어간다.
기도 피정 떠나는 마음은 늘 무겁게 가볍다.
설레면서도 벌써 지루하다.
외롭고, 무엇인가 그리워서 조금 슬프다.

오늘은 좀 다르다.
오랜 시간 홀로 가 앉아 기도하던 곳에 벗들을 인솔해서 간다.
덜 외롭고, 덜 무겁고, 덜 슬프다.

며칠 머물 짐을 싸는 일보다
남겨두고 가는 일상을 미리 챙기는 일이 더 분주하다.
이제는 각자 알아서 잘 챙겨 먹는 식구들이지만, 두고 떠나는 내 마음은 또 다르다.
소고기 뭇국을 마음 담아 끓였다.
펄펄 끓는 국은 벌써 드리는 기도이다.
기도하는 엄마, 기도하는 아내의 공석을 기쁘게 감당해주는 가족들에게 남기는 감사의 편지이다.

그리고 이제 떠난다.
침묵과 고독 속에서 애인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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