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갓집 며느리 우리 어머니는 '명절 루틴'으로 평생 고생을 하셨다. 명절이면 어마어마한 식구가 모이고, 어마어마한 음식을 해야 하고... 한 번쯤 안 모여도 될 텐데, 꼬박꼬박 모여서, 하던 걸 해야 하는 명절 루틴이 어머니께는 고통이었다. 그런 명절이 끝난 지 10 년이 넘었다. 어머니의 며느리인 나의 명절은 '루틴이 없는 것'이 고통이다. 이렇게 모일지, 저렇게 모일지, 누가 모일지, 어디서 모일지... 명절 루틴을 가질 수 없는 아픈 여러 이유가 어머니의 '명절 루틴'에 닿아 있고, 어머니의 전 인생에 닿아 있고, 어머니가 일군 가족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남편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우리 아이들의 인생과 닿게 되니 아플 뿐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니 그 불행의 이유를 명절마다 확인할 뿐이다.  

 

"엄마, 괜찮아? 이따 저녁 준비하는 거랑... 마음이 괜찮아?"

"응, 괜찮은데... 왜?"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안 괜찮을 수 있는 상황인 걸 아는 채윤이의 걱정이 고맙고, 또 안 괜찮지 않은 내 마음이라 나도 다행이다. 내 시작은 '안 괜찮았'으나, 나중은 심히 '괜찮은' 명절이 되어 다행이다. 힘 들이지 않은, 루틴 없는 명절음식은 국적불명이 되고 말았다. 감자 토마토 치즈 구워 먹는 라끌렛 팬에 명절 덕에 생긴 재료를 더했다. 보기 드문 아름다운 사진이 나왔다. 우리가 뭘라고... 목사라고, 선생이라고 명절을 챙겨준 손길에 감사할 뿐이다. 편하게 준비했는데 식탁은 이렇듯 풍성하고 아름답고 말았다. 

 

빠르게 전을 부쳤다. 호박전, 동태전, 육전을 남편, 채윤, 나 셋이 달려들어 빠르게 부쳤다. 어제 아침 현관문을 여는데 앞집에서 고소한 기름 냄새가 흘러나왔다.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동안 잠시 혼자 명절을 느꼈다. 어머니의 명절을 느꼈고, 우리 엄마의 명절을 느꼈고, 엄마랑 같이 전 부치던 기억에 닿았다. 루틴도 전통도 사라졌지만 몸의 기억이 만들어낸 명절 음식이 되었다. 하길 잘했다. 팬에 데워 먹으니 따뜻한 게 맛있고, 라끌렛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명절.

서로 닮은 모든 행복한 가정들은 그대로 행복하길,

제 각각의 이유로 불행한 가정들, 그 안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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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된장국을 끓였는데

새우깡 맛이 난다.

자꾸만 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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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뭇국을 이따만큼 끓여놓고 어딜 갔다 왔더니… 국물은 다 먹어 치웠는데 고명 고기가 반은 남아 있다. 국과 고명, 양 조절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

떡볶이에 그 고기를 다 때려 넣고 내친김에 구운 계란까지 올려서 단백질 폭탄으로 제조했다. 단호박도 잘라 넣었으니, 5대 영양소가 다 들어간 완전식품이 된 것인가?

떡볶이로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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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모해? 김치 내려?
응, 더치 김치!
오, 장인 정신! 하하하, 기여워!

김치말이국수를 위해 김치를 내렸다. 찬 김칫국물을 천으로 만든 친환경 여과지로 한 방울 한 방울... 그렇게 여섯 시간쯤 내리려고 했으나. 장인 정신이 부족하여 인내하지 못한다. 베보자기로 옮겨 손으로 쥐어짜는 방식, 그러니까 고종이 처음에 "양탕국"이라 부르며 마시던 커피 드립의 방식일지 모르겠다.

 

실은 손에 김칫국물 한 방을 안 묻히고 걸러보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으나, 늘 이렇다. 결국 여기저기 묻히고 튀고 손으로 쥐어짜기 되는 것. 김치통 바닥에 남은 국물을 버리지 못한다. 엄마가 늘 그랬다. 그게 아까워서 그 국물에 동태찌개를 끓여서 혼자 먹곤 했다. 동태는 제일 싼 생선이고, 우리는 입에 대지 않았으니까. 그런 엄마가 이해도 안 되고 구질구질해 보였는데...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배워서 이렇게 되었다. 김칫국물을 버리지 못한다.

단지 우리 엄마 무언의 가르침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김치 나눔을 받곤 하는데, 김치 담그는데 드는 노동과 양념과 정성을 생각하면 허투루 먹을 수가 없다. 국물까지 아껴 먹는 것이 도리 같이 느껴진다. 그러고 싶다. 그래서 냉장고엔 김칫국물 담긴 유리그릇이 항상 여러 개다.

 

결국 여기저기 붉은 국물 묻히고 하면서 튀기고 하면서 완성이다. 오늘 더치김치는 하우스 블렌딩으로 파김치, 익은 겉절이, 백김치 국물 블렌딩이다. 산미가 좋고, 바디감은 매우 약해서 느끼한 속 달래기 딱 좋다. 여과지는 베보자기, 드리퍼는 칼리타 102. 저녁에 라끌렛 먹고 소면에 말아 들이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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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뭇국을 이따만큼 끓였다.)

또 어디가? 엄마?
연구소 워크숍.
엄마가 왜 자꾸 어딜 가지?!
엄마가 어딜 가는 게 싫어?
그야 당연히 집에 엄마가 없는 게 싫지.
다행이다. 다른 데 간다고 하면 걱정인데, 연구소 이모들이랑 가는 거라.
왜에? 다른 데는 왜 걱정이고?
강의는 엄마가 부담되니까 나도 같이 부담되잖아.
연구소 이모들이랑 가는 건 왠지 마음이 편하고 그러니까. 나도 마음이 편하지.

(무 한 개와 양지머리 한 덩이를 넣고 몇 시간을 끓여 국을 끓이고 건진 고기를 양념해서 고명으로 만들었는데... 내가 끓인 국이 맛있어서 집을 나가기가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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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야 본업이 설교하는 사람이지만,
설교를 대량생산하는 사람은 아닌데,
나는 강의하는 사람이고,
드물게 설교를 빙자한 강의를 하기도 하는 사람이지만 한 편이 기본인데.

이번 주 우리 집에서 생산된 설교가 총 열네 편이다.
신년 특별새벽기도 설교 6편.
주일 설교 1.
장례식 설교 4.
이상 남편이 낳은 설교이고.
나도 어쩌다 세 편을 낳았다.
나는 오늘로 끝이다.
남편은 내일, 아니 내일 모레… 아니 언제지?
모르겠다. 그의 끝은.

점심으로 닭갈비에 치즈 듬뿍 올려 지글지글해서 둘이 먹었다. 먹고 빠르게 자기 자리로 흩어져 각자의 끝을 향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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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이랑 같이 장을 보면서 저녁으로 뭘 해줄까, 했더니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당연히 차돌박이 얹은 된장찌개려니 하고 냉동 고기 쪽으로 향하니 아니란다. 고기 안 들어가도 된다고. 고기 말고 까만 소라 같은 거 넣으면 좋겠다고. 우렁이를 말하는 것이다. 냉이도 한 팩 사서 된장찌개를 끓이는데. 채윤이가 나와 반색을 하면서 "우렁이와 냉이라고?!!!!! 와, 2023년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어깨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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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5일 기도 피정에 다녀왔다. 낯선 고향 같은 곳이다. 어쩔 수 없는 종교의 담이 있으니 가도 가도 낯설 수밖에 없고, 밖에서 찾던 하나님을 내 안에서 찐하게 만난 곳이니(말이 되나? 내 안에서 만나려고 그 밖으로 갔다...) 영적 고향 같은 곳이다. 침묵 피정인데, 침묵 속에서 전쟁을 치르곤 했기에 이번에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갔는데. 숙제도 안고 갔는데... 웬걸! 한 시간 기도 시간은 10분처럼 지나가고, 밥은 맛있고, 9시부터 잠은 잘 오고, 화장실도 잘 가고. 방안에 든 겨울 햇살이 아름답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사랑스럽고, 마주 앉은 식탁의 자매님이 와사삭와사삭 콜라비 씹는 소리가 재밌어서 자꾸 웃음이 나오고… 어쩌자고 예정에 없던 신소희 수녀님이 피정 동반을 해주시고.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4박 5일을 보냈는데, 전쟁 없이 숙제가 조금씩 풀리고, 마음의 그물이 치워지고, 분열된 어떤 것들이 통합되는 예상치 못한 피정이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폰을 받아서 열어보니 나를 뜨겁게 기다리고 그리워 하는 사람들은 역시나 연구소 식구들. 100개 되는 톡이 쌓여 있는 연구소 톡방에 신고를 했다.

출소!
아니... 이제 수감인가?

출소라면 출소고 수감이라면 수감이다. "어솨요. 속세로 아니 소장님의 성소로" 이런 톡이 있었다. 나의 성소다. 그래 나의 성소 싱크대 앞(클릭하지 마요! 클릭하지 마요! ㅎㅎ)에 서자! 일상이라는 감옥에 사식을 넣는 마음으로 김치수제비 해본다. 얼마 전 채윤이랑 둘이 만들어 먹으며 종필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마시께따. 나 김치칼국수 좋아하는데..." 했던 말을 킵해뒀었다. 애들은 고모가 스테이크를 사준대서 룰루랄라 나갔고. 2022년 마지막 날 아점으로 끓여서 둘이 맛있게 먹었다. 늙은 호박 갈아서 야심 차게 전을 해봤는데, 죽사발이 되어서 대신 돈가스를 데워서 곁들였다.

마싯썻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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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까지 줌 글쓰기를 하고 5시에 상을 차려 마주 앉았다. 그 한 시간 안에는 집 앞 마트에 달려갔다 온 시간도 포함이다. 5시간 정도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리도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 가벼워졌다. 트리에 불이 반짝이고 대림초가 켜지고 캐럴이 흐르고 이 얘기 저 얘기 막힘없는 이야기, 또 이야기.

 

장비 빨에 힘입어 그야말로 '뚝딱' 준비한 상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몇 달에 한 번씩 만나 식사하는 사이이지만, 어쩐지 이번엔 좀 잘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언젠가 윤선이가 내게 심어놓은 말이 있다. “나는 은혜는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입은 모든 은혜를 잊지 않아야겠지만, 어떤 은혜들은 더욱 의식적으로 잊지 않고 자꾸 표현하며 살려고 한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의 식사에는 골든 타임이 있으니까. 빈틈없는 12월 일정 중 휴강으로 생긴 틈에 빠르게 만남을 성사시켰다. 아니면 해를 넘기게 생겼으니. 

같은 식사지만 이번에는 그런 의미로  "대접" 마인드를 많이 갈아넣은 식사였는데, 결국 또 우리가 좋고 말았다. JP(제이피 아니고 종필로 읽어야 함)이 정의한 '좋음'의 이유는 이것이다. "보기 드물게 질문하고 들어주시는 분들!"이라서. 맞다. 나도 남편도 강의와 설교로 마이크 꽤나 잡고 흔들지만, 더 많은 시간을 '듣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이분들을 만나면 우리 이야기를 하염없이 하게 된다. 그렇구나. 질문을 해주시는구나! 묻고 걱정해주고 이끌어주는 선배가 있어서 참 좋다. 결국 그래서 우리가 좋았다.

 

며칠 조금 야릇한 황폐함으로 지냈다. "내 열정이 부끄럽다, 부끄러운 나의 열정...이었다." 좋은 걸 좋아하고, 가끔 계산을 잊고 좋은 것과 좋은 사람에 투신하고, 좋은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마는 내 열정이 부끄러웠다. (아, 싫은 걸 싫어하고, 싫은 건 멀리하곤 하는데... 이제 그것엔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 새로운 발견!) "내 열정"이 부끄럽다고 말하면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아니니까. '열정'이라고 퉁친 말 뒤에 숨은 지질한 감정들은 모르니까. 

 

내가 좋은 것이구나! 열정을 쏟아내는 대상이 아니라 결국 내가 좋은 것이다. 발에 모터 달고 1시간 만에 준비한 열정의 식탁으로 내가 좋았던 것이다.  지난 주일 설교 본문은 전도서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헛되고 헛되고 헛된 세상을 살면서 먹고, 즐기고, 수고하는 것을 누리라! 오늘이라는 선물을 누리라!였다. 순간을 누리는 열정은 나를 따를 자가 없지. 부끄럽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실은 부끄럽다기보다는 슬펐던 것 같은데, 슬픔도 어제의 것으로 흘려보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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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지도자과정 마치고 저녁에는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다. 수업 들어가기 직전 전화가 왔다. 동네 친구다. (실은 교회 집사님... 인데 나를 '사모'아닌 '나'로 대해주시기에 '친구'하기로. 동네 친구이며 교회 친구) 통화는 못하고 여차저차 용건은 겉절이를 전달하겠다는 거다. 얼씨구나! 수업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들러 받아가겠다 메시지 보냈는데. 어느새 우리 집에 배달까지 해놓은 상태다. 동네 친구 덕에 의미 있는 야식 타임이었다.

아침에 채윤이가 "요즘 김장하는 때 같은데... 이럴 때 겉절이에 보쌈 해먹는 거 아니야?" 했다. "글치, 겉절이에 보쌈이지!" 그 말에 막막 식욕도 돋고, 어떤 식욕이 돋으면 자극받는 그리움... (왜 식욕은 자꾸 우리 엄마로 향하는 거야?!)에 조금 간절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겉절이 배달이라니! 늦은 하굣길 마트에 들러 보쌈용 고기 한 덩어리를 사서 막 달려와서 압력밥솥에 막막 고기를 앉혔다. 축구가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췄다.

축구 좋아하는 채윤이. 사람들 많이 모여서 얼싸덜싸 하면 에너지가 솟구치는 채윤이가 좀 안 됐다. 월드컵 첫 경기 하는 날, 그것도 카타르(지난 여름 미국 오가는 경유지로 질리도록 엉덩이 비비면 앉아 있던 카타르...)에서 말이다. 거실에 모여 앉아 야식 차려놓고 으쌰으쌰 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엄마는 축구의 'ㅊ'도 몰라. 동생 놈은 방에서 혼자 본다고 해. 그나마 같이 봐줄 아빠도 없어. 게다가 내일 11월 25일은 채윤이 생일.

생일상 차려줄 여력은 없고. 생일상 대신 전야제로 보쌈을 차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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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갯불에 잡채를 해봤다. 집에 오는 길에 재빠르게 장을 봤다. 당근 하나, 시금치 한 단,  파프리카 하나를 샀다. 당면을 삶고 야채를 따로 볶는 과정 없이 막막 만들었다. (간편 잡채 만들기 영상을 여러 번 본 터라 그냥 막 만들어졌다.) 딱히 밥 생각 없었던 채윤이는 금요 기도회 반주하러 금방 나간다더니 '잡채'에 낚여서 미적거렸다. "오, 잘했는데! 딱 잡채 맛이야!" 하면서 산더미 같은 잡채를 먹어 치우고 나갔다. 그렇지! 잡채가 잡채 맛이면 된 거지! 스터디 카페에서 돌아온 현승이는 잡채밥 산더미를 해치웠다. 셋이서 각 '일인일산더미잡채' 했더니 JP 몫이 없네. 금요기도회 마치고 와서 잡채를 먹어봐야 배만 나오니까. 

 

괜히 갑자기 잡채를 한 게 아니다. 전날 반찬가게에 갔는데 예의 그 반찬가게 식 호객 행위가 있었다. "잡채 한 번 잡숴봐. 금방 해서 맛있어요." 시식 한 입 했는데 과연 맛있었다. 그런데 너무 비싸. 코딱지 만큼 놓고 오천 원이라니. "잡채는 안 하셔?" 하는 압력을 뿌리치고 나왔더니 결핍감이 남아 있긴 했던 것.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오전 일정이 천안에 있는 대안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작가의 삶, 글쓰기를 주제로 초대를 받았는데  큰 기대가 없었다. 전업 작가도 아니고, 청소년들에게 읽힐 책을 쓴 것도 아니고. 막상 가서 얘길 나누다 보니 준비되지 않은, 그러나 내 안에 있던 얘기가 나와서 신이 났다. 대안학교 친구들의 가장 큰 특징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훈련된 태도인 것 같은데, 질문을 잘한다.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글감은 어디서 찾으세요?

주로 언제 글을 쓰세요?

책을 쓰면 돈은 얼마나 벌어요?

책 한 권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요?

글쓰기가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글감은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에 '지금'이라고 말했다. 일상, 지금 이 순간이 글쓰기의 재료가 된다고 말했다. 당장 천안까지 오는 동안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곧 마감인 글에 쓸 좋은 소재를 얻었다고 했다. 매 순간이 글감이라고 했다. 마지막 질문을 하라고 했더니 "인생의 가치를 어디서 찾으세요?"란다. 오호, 이 친구들 내공 보게! 1초도 망설임 없이 "지금 이 순간!"이라고 했다. 인생의 가치는 지금 이 순간을 기쁘고 소중하게 누리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지금 친구들과 글쓰기 얘기하는 이것이 내 인생의 가치라고 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고 또한 진실이다. 내 글쓰기는 순간순간, 즉 일상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에서 나온다. 특히 실패! 그리고 존재에 달라붙은 결핍과 상실의 감각들. 친구들의 질문이 글 쓰고 사는 나를 돌아보는 자리에 세웠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잡채:JOB을 갖고 세상의 필요를 우는'이었다. 프레드릭 뷰크너의 소명에 대한 정의에서 따왔지 싶다. 집에 오는 길에 재빠르게 장을 봐서 번갯불에 잡채를 만든 건 바로 이 'JOB채'에서 불러일으켜진 식욕 또는 창작욕이었다. 채윤이가 갑자기 잡채를 왜 하냐 묻는데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오전에 갔던 강의 제목이 잡채였어. 그래서 잡채를 만들었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글감을 얻는 것도,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라는 뜻이 담긴 지금 이 순간의 잡채이다. 먹고 없어지면 다음 사람은 먹을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잡채이다. 

 

 

며칠 전 점심에 JP과 싸우느라 맛도 모르고 먹었던 음식이 '편백나무 찜'이다. 그 와중에 "나중에 집에서 해야지." 마음의 레시피로 담아 뒀었다. 편백나무로 된 찜기가 씬 스틸러였는데, 요리는 간단하다. 찜기 위에 숙주 깔고 우삼겹을 올려 10여 분 찌면 되는 것. 음식값의 반이 편백나무 찜기 값인지, 숙주와 고기는 얇게 펴놓은 정도였다. 찜기 값을 식재료로 몰아주는 방식으로 양에 승부를 걸어봤다. 수능을 일주일 앞두고 온라인 수업에 돌입한 수험생, 그리고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는 백수생 둘이 점심으로 맛있게 먹었다. 둘 중 누가 "이거 술안주 아냐?" 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유명한 짤, 이선균이 거품 반 맥주 반으로 따르는 그 장면에서 함께 먹는 게 이거랑 비슷했었다. 겨울이 오니 <나의 아저씨> 정주행 다시 가줘야 할 때가 되었는데... 고기 돌려담으면서 채윤이랑 '지폐 돌돌 말아서 만든 케이크 같다'는 얘길 했다. "부모님들이 그거 좋아하잖아. 엄마도 원해? 그런 케이크 좋아?" 안 좋겠냐? 돈인데! 모든 음식에는 수다가 있다. 오늘 먹은 편백나무 찜에는 편백나무가 없고, 저번에 싸우고 먹은 편백나무 찜엔 수다가 없었다. 뭐 하나 빠진 음식도 나름 먹을만 하고, 뭐 하나 빠진 시간과 경험도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니, 괜찮은 일인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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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가슴뼈가 빠개지는 통증을 느끼며 깼다. 울었는데 울 수 없었다. 울 수 없는 울음을 울다보니 가슴뼈가 빠개지는 것 같았다. 잠을 깼는데도 가슴팍이 얼얼하다. 오전 내내 꿈에 머물다 보니… 할 말 많지만 말하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하위 자아들이 가엾어졌다. 목소리를 갖지 못한 모든 자아들이. 내 안의, 네 안의, 우리 안의.

밤 늦게까지 일정이 있어서 늦게 출근하겠노라는 남편과 채윤이와 나를 위해서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때려 넣어서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었다. 뭐라도 먹어서, 먹여서 힘을 내게 해야지! 올리브유에 구운 가지는 언제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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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 요리 먹어본 지 오래됐다."
연이은 강의에, 학교 발표에, 급히 마감해야 하는 원고에... "나도 내가 한 음식 먹어본 지 오래됐다." 수능을 한 달 앞둔 현승에게 통 크게 백지 메뉴판을 주었다. "먹고 싶은 거 뭐야? 다 해줄게." "김치찜? 삼겹살이 통으로 들어가 있는 김치찜!" 주문 그대로 제작해서 내놨다. 그나저나 나는 내가 한 음식이 왜 이리 맛있어? 사장님 기분 좋아서 계란찜 서비스도 내보냈다.

몰려 있던 일이 지나가고, 즉 정크푸드의 시간이 지나가고 밥을 좀 해먹을 수 있는 때가 왔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가면 저녁까지 밥 먹을 틈 없는 채윤이를 위해서 아침부터 닭볶음탕을 해야지 싶었다. 마침 또 레슨 시간에 맞추려면 바로 나가야 한다네. 그러면 또 살짝 땡큐지! 나도 여유 있게 준비하고 나갈 수 있으니. "그러면 주말에 해야겠다." 했더니 "레슨 마치고 집에 와서 먹고 갈 수 있어." "끝났어. 안 하는 걸로 마음먹었어. 뭐 사 먹어." 하고 보냈는데...

사장님 마음이 또 좀 그러네. 정말 가스레인지 불 말고, 번갯불에 닭볶음탕을 했다. 11시나 되어 집에 돌아왔다. 늦은 밤에 만난 채윤이가 "엄마, 레슨 마치고 오면서 집앞에서 버스를 내리는데. 닭볶음탕 때문에 너무 마음이 설레는 거야. 버스 정류장 살짝 내리막길이잖아? 나도 모르게 거기서 폴짝폴짝 뛰면서 내려오는 거야. 쪽팔렸어." 했다. 내 마음이 갑자기 폴짝폴짝 뛰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한동안 매일 그런 결심을 했다. '아이들과 행복한 추억은 만들지 말자. 나만이 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도 해주지 말자. 내가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그 모든 기억이 슬픔이 되고 고통이 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자....' 이런 비합리적 생각을 현명함이라며 붙들고 있었다. 엄마 떠난 자리에서 그리움이 사랑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사랑이다. 부재하는 대상은 그리움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

너에게 오늘 메뉴판을 준다. 백지 메뉴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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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로 떡볶이를 하는데, 사진을 찍어 놓으면 늘 같은 떡볶이 같아서 걱정했더니, 그러면 치즈 하나 올려, 무심하게 한 마디 해줘서, 약간 다른 떡볶이 그림을 얻었다. 무시로 만드는 떡볶이가 있고, 무심한 듯 속 깊은 딸이 있고, 끝나지 않는 수다가 있는 여유로운 토요일 점심이었다. 무지 좋은 가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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