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울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연재 마지막 글을 위해 고른 찬송을 불러보다 조금 울었다. 기타 들고 소리 낮춰 불렀다. 누군가를, [큐티진] 독자를 앞에 세우고 불러주는 노래가 되었다. 누군가, 또는 독자가 구체적인 얼굴이 되었다. 오랜 취업준비생의 날을 보내고 있거나, 직장생활 한다지만 일의 기쁨 같은 건 느껴보지도 못하고 근근이 버티고 사는 무표정한 얼굴. 언제 펴질지 모를 형편으로 기약 없이 결혼을 미루고 있는 커플의 안타까운 얼굴.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연애와 결혼, 원치 않게 길어지는 비혼의 시간에 당황인지 좌절인지 모르는 무력한 얼굴. 오랜 기다림 끝에 결혼했으나 금세 불행의 낭떠러지 앞에 서서 되돌아가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막막한 얼굴. 미성숙한 부모 인생의 짐을 대신 지고 희망조차 품지 못하는 얼굴, 얼굴, 얼굴들. ‘인생역전의 소망을 노래하며 연재를 끝내려고 선곡했는데 가사 속 쉬운 반전이 현실의 얼굴들과 멀게만 느껴져 눈물이 났다.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 받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고 씨 뿌린 후에 추수하네

 

괴로움 후에 평안 있고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한 후에 친구 있네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중년이 된 나의 인생 여정에도, 청년들의 시간에도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분의 선의는 작동할 것이다. 어둠 후에 올 빛, 이 눈물 그친 후에 주실 새로운 웃음, 분명 좋은 것 주시는 분임을 안다. 문제는 빛이 오기까지의 어둠 속에서 어떻게 더듬어 가야 할지. 어둠과 빛, 눈물과 웃음, 괴로움과 평안 사이 우울과 무력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재즈처럼 하나님은>의 작가 도널드 밀러를 좋아한다. 그가 쓴 모든 책을 재미 그 이상의 감동으로 읽었다. 그 많은 이야기 중에도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남은 한 장면이 있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 어느 부분에 나왔던 것 같은데 뚱뚱한 몸으로 티브이 앞에 앉아 하염없이 스낵을 먹고 있는 저자의 모습이다. <재즈처럼 하나님은>이란 책으로 소위 대박이 났지만 그 이후에 낸 책들은 잘 팔리지 않았고, 작가의 말 그대로 다시 정서가 불안해졌고 일상으로 돌아갔단다. 이후로 도널드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이 배경화면으로 깔린다. 최근작 <무기가 되는 스토리>는 기독교 아닌 일반 서적으로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니 승승장구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면서도 티브이 앞에서 감자칩 먹는 폐인 모드의 도널드를 상상하며 웃음이 나왔다. 베스트셀러와 베스트셀러 사이, 강연과 강의 사이 혼자 있는 순간 외로움과 공허감에 여전히 잠깐씩 폐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엔 저 찬송의 어두운-후에-, 연약함-후에-강건, 고독한-후에-친구가 오는 과정이 장황하게 펼쳐진다. 반전이 오기 전의 그 지난한 시간-오늘 우리의 일상과 같은-을 견디는 비법도 등장한다.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 인물이 무엇인가를 원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얻어 낸다.’이다. 물론 한 인물은 도널드 자신이며 그의 열혈 독자인 나, 또 나의 이 글을 읽는 <큐티진>의 독자 여러분이다. 우울하고, 지루하고, 무력하여 맥락 없는 오늘이 기승전결의 큰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내가, 당신이) 이야기의 이나 쯤에 있다면 숲에서 길을 잃었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며, 비참한 상황으로 설정된다. 어두움, 비바람, 수고, 슬픔, 씨 뿌림, 멀어짐, 고독. 찬송에 등장하는 것들은 이야기의 흔한 소재들이다.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갈등의 소재 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무엇이 이들을 살아남게 했는가.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 터무니없는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라고 하였다. 도널드 밀러 식으로 말하면 소망 없어 보이는 오늘이라는 조각 시간이 맥락 있는 이야기 속에 있다는 의식일 것이다. 가장 크고 확실한 이야기는 십자가와 부활, 죽음 너머의 삶이겠고. 여러분과 내가 오늘을 견디고 사는 이유일 터이다. 이러한 도가 진리이다.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

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

 

내 맘에 있는 노래의 결국은 이렇듯 예정된 해피엔딩이다.


<QTzine>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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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3

 


주일 예배 순서에 참회의 기도 시간이 있다. 솔직히 맹숭맹숭한 마음으로 눈만 감고 있는 날이 많다. 말로는 수백 수천 번 인정하고 고백했지만 실은 좀 무덤덤한 정체성이 죄인인 나이다. 익숙해서 무감각해진 것일까. 아니면 무감각 그 자체가 죄인지 모를 일이다. 투명하게 나의 를 느끼자면 어디 한 순간이라도 견딜 수 있겠는가.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찬송가 2741)

 

전도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말 중 하나가 죄인이라는 얘길 들었다. 비신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편해 하는 말이다. 뭘 그렇게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죄인, 죄인 하느냐는 것. 비신자만 그럴까. 우리도 불편하다. ‘내가 행한 것이 죄뿐이라!’ (하도 들어서)머리로는 인정, 가슴으로는? 글쎄다. 나름대로 큐티 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기도도 하고, 미운 사람 품으려 애쓰면 살고 있는데 행한 모든 것이 죄라니 좀 심하지 않은가.

맹숭맹숭하던 주일 참회의 기도시간이 뜨거워지는 때가 있다. 남편과 관계가 틀어져 말을 안 하고 있거나, 예배 가기 직전 아이들을 윽박지르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이다. 뒤틀려 무거운 마음으로 예배에 가 앉으면 오히려 일단은 심사가 더 뒤틀리는 것 같다. 누가 됐든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죄다 고발하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솔직히 그의 죄가 밝혀지는 순간 나의 치부까지 드러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다른 일로 화가 났던 걸 괜히 아이들에게 쏟아냈다는 자각이 생기면 비로소 뒤틀린 것들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만만한 아이들, 착한 남편에게 내 감정의 배설물을 쏟아놓고 말았구나! 그럴 때 꽉 쥔 주먹이 풀리고 가슴이 저릿하며 참회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내 어둔 눈 밝히시니 참 기쁘고 고마우나 그보다 더 원하오니 정결한 맘 주옵소서(2)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치오니 이러한 맘 나 얻으며 눈까지도 밝으리라(3)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냐는 태도에서 한 발만 이탈하면 작은 빛이 새어드는 것 같다. 죄가 보이기 시작한다. 빛 하나 들어올 틈 없이 온통 나의 의와 옳음으로 가득한 캄캄한 마음의 숲에 말이다. 그 작은 빛 한 줄기로 여기저기 내 마음을 조망한다. 그 신령한 빛이 닿는 지점마다 죄의 흔적으로 처참할 줄 알았건만. , 빛이 닿는 지점마다 즉시로 말끔해진다. 나 행한 것 죄 뿐인데! 죄로 가득했던 마음이라 차마 내보이기 싫어 꼭꼭 닫고 있었는데, 다 어디로 갔지? 눈물로 드린 참회의 기도는 알 수 없는 말끔함으로 끝이 난다. 죄의 고백과 끝은 용서로 주시는 정결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스캇 펙의 <주와 함께 가는 여행>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필리핀의 한 마을에 어린 소녀가 예수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마닐라의 추기경에게도 들려졌다. 추기경은 한 신부를 보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조치했다. 세 번의 조사에서 그 신부는 도저히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다고 느낀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사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고 실망한 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다. 네가 다음번에 예수님과 대화할 때 나의 마지막 고해성사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도록 해라.” 어린 소녀는 그 말에 동의했다. 한 주 뒤 그녀는 다시 소환되었고, 신부는 곧바로 물었다. “그래, 사랑하는 딸아, 지난주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느냐?” “, 신부님하고 어린 소녀는 대답했다. “그래, 네가 지난주에 예수님과 대화할 때, 나의 마지막 고해성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여쭈어 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 신부님 저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 호기심 어린 모습으로 신부는 따져 물었다. “나의 마지막 고해성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던?” 어린 소녀는 즉시 대답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잊어버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늘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우리 마음에 순도 100% 정결함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시시각각 찾아드는 자기중심성의 악함을 다 버릴 수 있겠는가.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정결함이다. 지고의 마음수련 같은 것들로도 가질 수 없는 것이 깨끗한 마음이다. 회개하는 자의 죄를 잊어버리시는 분, 도말해주시는 분의 신비하도록 놀라운 사랑 아니면 안 된다. 그저 우리는 무너지는 자존심을 부여안고 죄인 된 나의 생각과 행동을 인정할 뿐이다. 인정하고 회개할 뿐이다. 그리고 얻는 것은 용서와 정결함, 무엇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신비의 체험이다.

 

<QTzine> 11월호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2

 

 

쨍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듯이 멀쩡하던 마음이 급히 어두워질 때가 있다. 기분 좋은 대화에 함박웃음 짓다 무심코 확인한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 하나에 마음이 뒤집힌다. 친구의 SNS를 보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우울해질 수도 있다. 깊은 실망감 또는 좌절로 좀처럼 마음의 힘을 낼 수 없는 날이 오래 가기도 한다. 교회 나가기 싫고,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때도 있다. 시험에 들었다! 이 모든 일을 한데 묶는 말이다. 크고 작은 마음의 시험이 밀려왔다 밀려가곤 하는 것이 우리 일상이다.

 

너 시험을 당해 죄 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이 찬송이 좋다. 특히 시작 부분이 좋다. 결코 시험에 들지 말라, 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시험이라고, 너만 그렇게 자주 흔들리는 것 아니라고 토닥이며 시작하는 것 같다. 도종환 님의 시가 생각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그렇다. 이 땅에 한 존재로 피어 신앙의 여정을 간다는 것은 흔들리며 시험 당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시험을 통해 더욱 단단한 줄기로 설 것인가, 부러지고 말 것인가.

 

누구보다 자주 흔들리고 시험에 빠지는 내게는 나름의 이기는 비법이 있다. 시험을 당하되 그로 인해 더 큰 죄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다. 일단은 뒤집어진 내 마음에 대한 인정이다. ‘그래, 나 화났어, 배신감에 화났다고, 이런 대접을 받다니 정말 서럽고 슬퍼, 애썼는데 결국 이렇게 된 결과에 모든 자신감을 잃었어, 무기력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 진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냥, , 괜찮아.’ 같은 말로 포장하지 않는 것.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너 언행을 삼가 늘 조심하라

너 열심을 다해 늘 충성하고 온 정성을 다해 주 봉사하라

 

시험에 빠진 내 마음을 혼자 인식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누군가에게 토로해야 한다. 그런데 그때 선택하는 누군가가 참 중요하다. 공감을 못해줄 것 같은 친구는 당연히 패스. 잘 들어주지만 내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길 뿐인 친구 또한 조심해야 한다. 당장은 속 시원 하겠지만 돌아서고 나면 더욱 공허해지는 소통이 있다. 시험 당했을 때 마음 터놓을 친구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찬송 2절의 가사처럼 말이다.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너 언행을 삼가 늘 조심하라

 

십 수 년째 연애 강의를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된 두 사람이 연애를 한다면 갈등은 필수이다. 갈등은 필수이며, 동시에 깊은 사랑으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이다. 해결방법은 하나,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이다. 불편한 대화 끝에 헤어질까 두렵기도 하겠지만 끝까지 정직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하는 커플이 많지 않다. 불편한 얘기를 당사자에게 하는 것보다는 맘 편한 동성 친구에게 넋두리로 쏟아내는 것이 더 편하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도움이 안 되는 상담자가 또래의 동성친구일지 모른다. 당장의 위로는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방법은 당사자에게 투명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 구주의 힘과 주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나는 일상에서 맞는 모든 시험의 당사자는 예수님이라 생각한다. 영원불면의 당사자. ‘어머, 웬일이니!’ 공감 잘 해주는 친구가 주는 위안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담판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왜 이렇게 저를 막 다루시는데요? 저 할 만큼 했잖아요?’ 이런 질문은 하나님 앞에 버릇없이 구는 믿음 없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온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덮여 있더라도. 끝을 알 수 없는 장맛비가 계속 되는 날이라도. 구름 너머 푸른 하늘이 있음을 안다. 구름 너머의 푸른 하늘을 믿듯 그분의 선의만큼은 믿는 것이 나의 필살기이다. 나는 믿는다. 그분의 선의를 믿고, 선의의 결국을 믿고, 잘 이긴 후 내가 받을 상을 믿는다.

 

잘 이기는 자는 상 받으리니 너 낙심치 말고 늘 전진하라

네 구세주 예수 힘 주시리니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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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1

 

 

경험과 그것이 만들어놓은 상상력의 협소함이란! ‘, 이 찬송 들어봐.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뭐가 생각나?’ 지금까진 물어본 사람들에겐 100% 합의된 정답이다. 야외예배! 그렇다, 우리에게 이 찬송(478)은 야외 예배다. 이에 견줄 야외예배 찬송이 한 곡 더 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79) 3절 밖에 안 되고 찬송 길이도 짧아서 더 자주 뽑히는 곡이 참 아름다워라일 것이다.

 

여러 교회 청년부에 강의를 다니며 다양한 공동체 문화 일일체험 하는 것이 큰 기쁨이다. 특히 찬양시간은 흥미진진하다. 교회마다 다르고, 인도자마다 다르고, 음악적 수준도 천차만별이인데 그 모든 수준이란 것들과 상관없이, 때로 나의 취향도 뛰어넘어 가슴으로 훅 들어오는 찬양이 있다. 여름 수련회 강의로 갔던 작은 청년부의 찬양시간이었다. 기타 한 대, 키보드 한 대와 찬양 팀 서너 명이 인도하는 작은 찬양 팀이었다. 싱어 중 하나가 솔로를 했다.

 

참 아름다운 곳이라 주님의 세계는 정말로 내가 나답고 솔직할 수 있는 곳

 

정말로 내가 다답고 솔직할 수 있는 곳이라니, 그렇지, 그런 곳이 있다면! 아슬아슬 떨리는 목소리의 찬양이 마음으로 쑤욱 들어왔다. 이 수련회의 주제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두려움 없이 내가 나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곳은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 아닌가. 낯선 멜로디이지만 마음으로는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곡이 478. 싱어들 소리가 몇 파트로 쫙 갈라지더니 금세 화음으로 만났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다. 수십 년 선입관이 깨지고 야외예배 느낌은 싹 지워졌다. 바깥 풍경이 아니라 내 마음의 풍경으로 시선이 옮아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는 마태복음의 말씀일 터.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6:28-29) 예뻐지고자 뭘 더 하지 않아도 그냥 예쁜 백합화 이야기이다. 하나도 꾸미지 않았는데 저 화려한 임금 솔로몬의 옷 100벌 보다 낫다는 것이다.

 

내가 나답고 솔직하게 있어도, 애쓰지 않고 있어도 정말 저렇게 아름답다면 뭘 더 바라랴. 그나마 회사보다는 안전한 교회에서 조차도 포장지 없는 나로 있기는 쉽지 않다. ‘에잇, 너무 말을 많이 했잖아. 조금만 참을 걸 그랬어. 너무 나대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아냐?’ ‘나는 왜 이리 소심하고 바보 같을까? 아까 그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다들 한 마디 씩 하는데 질문 받고 나만 말을 못했어. 정말 한심다고 생각했을 거야.’ 매순간 가장 적절한 모습이고자 애쓰는 우리의 내면은 쉴 새 없이 손을 놀려 길쌈질 하는 형국이다.

 

지금으로 충분해,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이 좋아! 이런 말이 좋은 건 안다. 내게 이런 말 들려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다지 와 닿지도 않는다. ‘말은 그렇게 하지. 내가 정말 나다운 모습 보여줘 봐? 네게 맞추려고 지금 이 순간도 애써 짓는 표정과 말, 모두 거두고? 실망하여 나가떨어질 걸. 그나마 내가 이거라도 하니까 나를 받아주는 거 아니야?’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나의 있는 그대로를 싫어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이런데 아름다운 공동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만든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바깥 풍경에서 내 마음 풍경으로 옮겨갔던 시선은 이제야 말로 다시 밖을 봐야 하는 시점이다. 고개를 들어서 들의 백합화를 보고, 심지어 공중에 나는 새에게도 눈길을 줘보라는 예수님의 뜻을 알겠다. 백합은 백합이 되려하지 키 큰 해바라기를 선망하거나 매혹적인 장미가 되려 하지 않는다. 새는 그저 새로서 창공을 날며, 시냇물을 흘러가고, 나무는 나무로 서 있다. 자연의 모든 것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끝도 없이 비교하고, 지금의 나보다 예전의 나, 더 나아진 미래의 나에 마음이 팔려있는 것은 사람들뿐이다. 그래서 때때로 야외 예배가 아니라도 자연을 바라보아야한다. 백합이 백합이고 참나무가 참나무이듯 너도 너 자신으로 충분해. 너 자신이 되어라, 하시는 주 음성이 거기서 들려, 내게 전하시는 바 그 뜻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 듯 하도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20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 하는 청년들에게 가정예배에 대한 로망을 자주 듣는다. 결혼 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이 둘러 앉아 예배드리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좋다는 것이다. 모태신앙이며 특히 부모님의 믿음이 열정적인 경우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다. 내게 가정예배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저녁 먹고 숙제도 다 하고 마음 편히 TV에 빠져들 시간이면 영락없이 들리는 소리, ‘성경 찬송 가져와라.’ 매일 밤 새롭게 귀찮고 짜증나고 지겨운 것이 가정예배였다. 교회 저녁 예배가 있는 수요일과 주일은 해방의 시간이었다. “고귀한 시간, ‘낭비예배”(마르바 던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를 고통스럽게 허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랬으니 어머니의 성경책은 나를 괴롭게 하는 율법책에 지나지 않았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솔직히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신 하나님 이야기는 기쁜 소식, 복음보다는 고된 소식에 가까웠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은 월요일에 학교 가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고, 주일성수라는 미명하에 일체의 매매 행위는 금지였다. 과자 하나도 사먹을 수 없었다. 꼭 필요한 학교 준비물도 주일에는 살 수 없었다. 교만하지 마라, 친구를 미워하지 마라, 동생을 사랑해라, 주일 성수해라, 순종해라. 지켜야할 목록은 한이 없는데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신다니 고된 복음일 수밖에. 부모님을 통해 소개받는 하나님은 내가 지은 죄를 깨알 같이 적고 있는 까다로운 기록관 같은 분, 잠복근무 하며 죄 짓기를 기다리다 걸려 넘어지는 순간 잡았다, 요놈!’ 하는 경찰관 같은 분이었다. 철이 들고 사유가 깊어지며 나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가게 되었다.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가 변하기도 했지만 어릴 적 새겨진 하나님 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그로 인해 사랑의 하나님께 온전히 안기고 내어맡기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는 가정예배며 부모님의 종교교육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이 찬송의 가사처럼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하나님이 그립고 아름답고 재밌는 분이었다면 어땠을까. 가정예배가 기다려지고 자발적으로 함께 하고 싶은 시간이었다면. 그 예배에서 읽는 성경 말씀이 달고 오묘하였다면. 텔레비전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어서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었다면 어땠을까. 내 젊은 날 하나님은 내가 뭔가를 해드려야 보상으로 복을 주시는 분이었고, 예배는 그 중 가장 큰 의무조항이었다. 고된 소식에 부응하여 늘 뭔가를 해야만 하는, 지킬 것투성이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앙생활 했다. 이런 유산을 남긴 어머니의 헤어진 성경책은 내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여기서 끝이었으면 가계를 흐르는 슬픈 하나님 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 그렇지 않다. 사춘기, 청년시절을 지나며 어머니가 소개한 하나님을 의심하며 신앙은 자라게 된다. 뭘 모르던 때는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 두려워 무작정 순종했는데, 교회 봉사 열심히 해야 좋은 배우자도 주시고 직장도 열어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님을 깨달아 가며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제목,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같은 것이 하나님의 심통이 아니라는 것, 그분과 나의 생각이 동급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가게 되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소개받은 하나님 이미지가 걸림돌인 줄 알았는데 거기 걸려 넘어져 코가 깨지고 무릎 까지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디딤돌이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성경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주시는 법은 잘 몰랐다. 그저 읽으라 했고, 기도하라 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대목에선 언제 어디서나 곧바로 목이 메어 울먹이곤 하셨다. 내 어릴 적에도 그러시더니 노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신다. , 이 순진한 십자가 사랑이 엄마의 힘이구나. 기복적 신앙이라고, 왜곡된 신앙교육에 해로운 신학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이렇게 믿음에 서 있는 것은 저 순진한 사랑과 기도 때문이구나. 수십 년 동안 일 년 일독을 지켜 온 어머니의 성경책은 나달나달 헤어져있다. 철없이 반항하고 방황하던 시절에 비하면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한결 찬송 가사에 가까워져있다. 귀하고 귀한 성경책이다. 내게도 다른 선택이 없다. 시시때때로 성경 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일 외에는.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9

 


세상에 똑같이 생긴 얼굴이 없듯 사람마다 생각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안다. 내 생각 있듯이 네 생각 또한 분명하고, 그 차이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신비라는 것도 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내 주업이고, 고유한 자기다움 찾는 여정 안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더라. 머리로는 그렇게 다 아는데 차이는 늘 힘겹고 두렵더라. 내 생각과 다른 친구의 입장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다. 그에 대해 논쟁을 하는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때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마음 한 구석 휘~잉 찬바람이 일기도 한다. 셋이 친한데 나를 뺀 두 사람이 나만 모르는 것을 공유하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렇다. 숨기는 기술이 좋아서 당황한 마음 잘 들키진 않지만 역시나 휘~잉 마음을 쓸고 지나가는 찬바람 한 줄기는 어쩔 수 없다. 스치는 그 바람, 순간포착 하여 일시정지 버튼 누르고 확대해 들여다보면 이렇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관계가 끊어지고 외톨이가 될까 지레 겁먹음이다. 어렸을 적 왕따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관계 지향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이러하기에 찬송가 406장의 2절 가사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거절당함 또는 버려짐,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에의 두려움 때문이다. 필자의 관계 집착이 과하다 느껴지시는가? 인간의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한 홈즈-라헤 척도라는 것이 있다. 가장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생의 위기는 100점으로 환산되는 사별이라고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랭킹 5위까지의 공통점이다. 이혼, 별거, 수감,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 관계의 끊어짐이다. 그렇다. 아무리 독립적인 듯 보이고 강하게 보여도 알고 보면 따스한 연길이 필요하다. 그것을 상실할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함께 춤추시는 하나님을 본떠 창조된 존재이다. 어우러지고 연결되어 있을 때 인간답고, 본성에 부합하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 행복의 극단에 있는 불행감은 단절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감정 중 하나가 끊어져 고립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에덴동산을 잃고,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과 단절된 그때로부터 시작된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 이 두려움을 인정하고 나는 찬양한다. 조금 지질해보여도 살짝 과한 자위의 노래 같지만 당당하게 부르련다.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그러고 보니 369죄짐 맡은 우리 구주도 있다. 3절이 이러하다.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에서 참된 위로 받겠네비슷한 내용이지만 이 곡의 예수님은 대놓고 좋은 친구라니 한결 더 편안하다.

 

관계에 연연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또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같은 말씀이 주는 부담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것 같고, 누구와도 화평을 이루어야 예수님의 제자 인증 받을 것만 같다. 이러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초인적 자아상을 만들어낸다. 사랑스러운 그 사람에게도 한결같은 순도 100%의 사랑을 줄 수 없음을 안다. 하물며 밉상 그 친구까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니!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를 앞에서 나는 늘 죄책감에 허덕인다. 사랑이라곤 없는 죄인이다. 허튼 애를 써본다. 그러나 죄책감으론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없다.

 

나의 믿음이 연약해져도 미리 예비한 힘을 주시며

위태할 때도 안보하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연약한 믿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자리, 늘 부족한 사랑이어도 괜찮겠다. 대체로 연약하고 흔들리며 아주 가끔 큰 믿음 보이는 나를 위해 이미 예비 된 힘이 있단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펄럭펄럭 하다 꺼져가는 위태위태한 믿음이라도 그분이 붙드는 손은 차원이 다르다. 유한한 우리를 붙드는 영원한 팔이다. 이 대목에선 405장의 또 다른 주의 팔이 떠오른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친절한 팔이다! 영원하며 동시에 친절하고 따스한 팔이다. ‘으이그, 도대체 언제 철이 들래? 언제 나를 닮아 완전한 사랑 장착하고 모든 이들과 더불어 화평할 거냐고, 네가 그렇듯 사랑이 없으니 친구들이 너를 멀리하지. 제발 좀 완벽한 사랑의 사람이 되거라!’ 다그치고 타박하며 팔 빠지도록 끌어당기는 우리 엄마의 손과 다르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친절한 팔이다. 그 팔이 영원하다. , 주님 당신 그 팔, 팔 배게 삼아 쉬고 싶어요.

 

능치 못한 것 주께 없으니 나의 일생을 주께 맡기면

나의 모든 짐 대신 지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QTzine] 7월호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8

 



기도제목이란 이름으로 일상의 아픔을 나누는 일이 흔하다.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 해도 안 해도 어려운 연애, 어려운 처지의 친구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 하다못해 계속 실패하는 다이어트 얘기까지. 누군가 내밀한 어려움을 내놓았을 때 하지 말아야할 것이 충고, 조언, 평가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내 얘기 꺼냈다 다시는 여기서 나누나봐라!’ 결심한 적이 있다. 여러 번 있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그러려니 해, 친구를 돕다 네가 우울해지면 그건 돕는 게 아니야, 경계를 지켜야지, 하나님이 다 좋은 사람 예비하셨을 거야, 일단 살을 빼, 저녁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마. 이래라 저래라, 일해라 절해라......” 교회만큼 사랑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간섭과 판단이 흔한 곳도 드물 것이다. 답을 몰라서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애나 친밀한 관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갈등이다. 여친(또는 남친)이 침을 튀기며 쏟아놓은 말끝에 그러면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말을 했어야지. 뒤에 와서 이러지 말고 처음부터 거절해야 하는 거야.” “, 내가 앞에서 딱 거절할 수 있으면 뒤에 와서 이러겠니?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저 공감해달라고!”

 

우리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어떤 말과 행동에도 판단 받지 않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 관계적 존재인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그런 안전한 곳이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한가 말이다. 문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심리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하는 말은 어설픈 충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그래. 이런 방법도 있다고 알려주려는 거야.” 단지 도우려는 뜻, 사랑의 발로라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딱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 사랑의 발로에다 기도의 권위까지 더해진 충고와 조언은 가히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정작 입장이 바뀌어 자기가 나눈 고통에 충고 어택이 들어오면 어떨까? ‘내가 몰라서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우면 기도제목으로 내놓겠어? 제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야야. 차라리 입을 다물자.’ 결국 이해받지 못했다는 느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어렵게 꺼내놓은 기도제목에 그저 손잡아 주고 조용히 같이 기도해주면 안 돼?’ 그저 들어주고, 생색내지 않고 기도해주는 사람 찾기 어렵다. 충고와 판단이 난무하는 위험한 인간관계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 찬송 214장의 1절이다. 참된 도움이신 예수님께 간다. 내 모습 이대로 다 받아주실 것 같은 예수님께...... 라 하기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생각해보니 예수님도 뭐라 하실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이기적이고 쎈 면도 있고 신앙도 예전보다 못하다. 꼭 직장상사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 믿는 내가 더 큰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했어야 하는데 좁은 내 마음이 문제인 것 같다. 안 되겠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면 안 되겠다. 일단 주일성수를 다시 확실하게 회복하고, 부장을 사랑하는 마음 장착한 후에, 술 담배 끊고 예수님께 가야겠다. 아직은 일러, 아직은 아니다.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져가지 않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 말이 다 맞다. 스트레스 받는 것도 내 성격 탓이고, 친구를 도우려면 끝까지 도와야 하는데 힘들다고 그만 내려놓으려는 건 내 이기심이지. 여기서 몇 킬로는 더 빼야 소개팅도 나가고 연애도 할 수 있지, 늘 다이어트 실패하면서 연애는 무슨!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실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못하는 것은 소그룹 멤버도, 친구도, 예수님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이 내 안에 크게 울리는 것은 마주쳐야 소리 나는 손뼉과도 같다. 내 마음 안에 항시 대기 중인 자기비판의 손바닥이여. 스스로를 때리는 비난의 손바닥이 밖에서 들어온 충고의 손바닥과 만나 짝! 하고 큰 소리를 낸다. 사랑의 주님께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선언된 내가 여전히 거절감의 늪을 헤매는 이유이다.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아주소서

 

죄로 만신창이 되어 돌아오는 탕자가 이 찬송을 부른다면 어떨까. 제가 아버지라도 자기 같은 인간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굶어죽지 않고 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진 탕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받아들여짐의 기준은 아버지께 있구나! 내 모습 이대로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탕자 체험이 필요하다. 언젠가 형편이 나아지면 아버지께 가겠노라, 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도 돌아가기만 하면 받아주시는 분께 가야겠다고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럴 때 나 스스로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며, 나 먼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돌아섬이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어릴 적 명절 아침 예배에선 늘 이 찬송을 불렀다. 앞집 친구네서는 제사가 한창인 시간이었을 테고. 목사인 아버지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참된 복의 근원을 천명하고자함이었을까. 조상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다! 하지만 어린 내게 이 찬송은 그저 떡국이나 세뱃돈, 명절에 모인 가족들의 분위기 같은 것을 연상시킬 뿐이다. 음악은 흔히 경험과 함께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바로 그 기억을 소환해내는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찬송가 28장을 부르면 어렴풋이 설날 아침을 떠올린다. 내게는 가족의 노래, 명절의 노래이다. 결혼 하고 명절 노래 한 곡을 더 얻었다. 시댁의 명절 아침 찬송은 559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내게는 생소한 가정예배였다. 그야말로 예배를 보는분이 대부분인 예배였다. 거의 어머니 한 분이 대표로 드리는 것 같았고, 다른 친척들은 구경 내지 그저 비참여의 태도로 자리만 지키셨다. 어머니께 힘을 실어드리기 위해 힘을 내어 찬송을 불러보지만 어쩐지 민망하고 어색하다.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장손 며느리인 어머님이 일찍이 홀로 신앙을 갖게 되셨다. 제사 문제로 내적 갈등을 겪으신 것은 당연한 일. 어떤 계기로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꾸겠노라 선언 하시고, 이 일로 친척들과 풀리지 않는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처음 그 자리에 합류한 시점은 오랜 갈등이 일상이 된 어느 명절이었다. 형식상 예배를 드리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앉아 있어주는 형식, 그것도 감지덕지인 분위기였다. 무언의 저항 속에서 고마워라 임마누엘힘주어 부르는 어머니의 찬송은 안타까움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렀던 찬송의 가사를 보라. 부조화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율배반이다.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즐거운 하루하루, 차라리 다른 찬송이면 어땠을까? 어쩌다 이 찬송이 명절 18번이 되었을까.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라는데 갈등에 휩싸인 동기들이 민망한 노래 속에 어정쩡하게 마주하고 있다. 조상의 복이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근본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가족들이 하나님 아버지 모셔서 믿음의 반석이 든든하다노래하고 있다. 어서 이 예배가 끝나 식사시간이 오길, 아니 이 불편한 명절 하루가 어서 지나가길. 한 발 물러 서 지켜보는 나의 심정조차 그러했다.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찬송의 가사를 일말의 아픔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부르던 나의 원가정 역시 말 못할 갈등과 사연을 배경처럼 깔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늘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명절 아침 복의 근원은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가 되었다. ‘산에서 10마일쯤 떨어져 있을 때만 그 산이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가정도 그 사정을 모를 때만 평..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C.S 루이스가 어느 편지에 썼다는 말이다. 친구가 정말 믿을 만 할 때, 충분히 친해졌다 싶을 때 보통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실은 우리 부모님 이혼하셨어, 아픈 형제자매가 있어, 부모님이 힘드셔서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어, 부모님과 소통 자체를 포기한지 오래야. 백 사람이면 백 개의 크고 작은 아픈 가족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예쁜 접시에 담긴 과일 먹는 가족은, 그런 거실은 없다.

 

가정의 달이 되어 이 찬송을 부르게 될 때 뭔가 조금 불편한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스캇펙의 그 유명한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은 고해(苦海).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가정은 따스하고 그리운 곳이지만 동시에 아픔과 갈등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금 다른 지점으로 옮겨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의 문제가 특별하고, 우리 집만이 갈등과 어려움에 휩싸여 있다고 위축되거나 불평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 문제 많고 아픔 있는 우리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이 현실감 없는 찬송은 소망의 노래가 된다. 비록 지금 믿지 않는 가족으로 가슴 아프고, 갈라진 마음으로 얼굴 마주하기 힘든 시절이라 할지라도. 예수만 섬기는, 예수만 닮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사랑이며 소망이다. 우리 인생, 우리 가정의 현실은 사철 찬바람 부는 날이지만 사철 봄바람의 나날을 그린다. 이것은 고해와 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의 소망이며 또한 소명이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6

 


내 마음에 있는 이 노래로 고백록을 써본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경계 지으며 살아온 세월이 길다. 뚜렷한 경계를 세워놓고 나는 불가침의 선 안쪽, 안전한 이쪽에 서 있다고 자신했다. 그것은 흡사 홍수로 떠밀려 내려가는 세상을 방주 안 창문으로 내다보는 안도감이며 다른 말로 하면 선민의식이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던 이런 속내가 오늘의 찬송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를 부를 때 유독 또렷하게 느껴지곤 했다. (예전 찬송 가사는 물 건.. 생명줄이었다) 후렴의 반복되는 가사는 은근히 선동적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방주의 안팎을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무모한 확신이 부끄럽다.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줄 그 누가 던지려나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누가 저 형제 구원하랴이런 가사에 몰입할 때는 나 아니면 안 된다며 앞장서다 정작 함께 힘을 모아 줄을 당겨야 할 배 안의 친구를 외면한 적도 있었다. 뜨거운 구령의 열정, 떠내려가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먹 꽉 쥐고 부르던 찬송. 그때 흘린 눈물, 떠밀려 가는 영혼을 품고 미어지는 가슴으로 드렸던 기도,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그 기도와 눈물들이 부끄럽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히 차고 넘쳤던 그 시절은 오히려 그립기도 하니 말이다. 한동안은 이 찬송을 부르지도 못했고, 입을 열어 내 안의 예수님 이야기 전하는 일에도 움츠러들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질 상 전도지 들고 노방전도를 하거나 대놓고 예수 믿으라, 교회 가자는 말은 잘 못한다. 대신 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는 물론 냉담한 시절을 보내는 교회 후배를 위한 기도만큼은 꾸준히 했다. 특히 냉담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에게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며 관심을 끈을 놓지 않았고 힘든 일상을 지나는 친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했다. 나름 보이지 않는 정성을 많이 들였다. 그러는 사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러고 있는 나는 참 좋은 선배지, 예수님의 제자의 면모란 이런 것일 거야.’ 죄가 틈입한 것이다. 생명줄 던지는 나의 마음, 위쪽으로 갈수록 높아진 것이다. 자아도취 병은 으레 치명적이 죄로 나를 이끈다.

 

너 어서 생명줄 던지어라 저 형제 지쳐서 허덕인다

시험과 근심의 거센 풍파 저 형제를 휩쓸어 몰아간다

 

시험과 근심의 풍파로 떠밀려 가는 형제자매에 대한 진심어린 연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인생의 답이라는 고귀한 진실을 알리고픈 열망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선한 일을 통해 오직 나를 높이는 수단 삼고자 하는 죄의 본성에 민감하지 못한 탓이었다. ‘민감은커녕 오랜 시간 알아채지도 못하고 신앙생활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찬송이다. ,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자기성찰만 하며 입 다물고 있겠다는 것은 아니다. 요 며칠 운전 하며, 걸으며, 설거지 하며 흥얼흥얼 많이 불렀다. 다시 이 찬송을 부른다.

 

너 빨리 생명줄 던지어라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랴

보아라 저 형제 빠져간다 이 구조선 타고서 속히 가라

 

내 노력으로 얻은 보상으로 생명줄 잡았다고 자신한다면 그 줄은 생명줄 아닌 썩은 동아줄임에 틀림없다. 물에 빠져 허덕이는 것은 예수님 모르는 그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왜곡된 특권의식에 허덕이는 나의 현주소일 것이다. 나도 저 형제, 빠져가는 형제와 똑같은 처지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모태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구원 방주 자동 탑승이 아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 소중한 생명줄을 붙들어야 함을(2:12). 방주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하나님 놀이는 그만두고 속히 손 내밀어 형제의 손을 잡을 일이다. 나를 스치는 공허한 눈빛, 근심어린 표정의 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생명으로 연결되고 연대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위험한 풍파는 빨리 지나고 곧 건너편 언덕에 이를 것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내게 주어진, 그들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은 지금 여기이다!

 

위험한 풍파가 곧 지나고 건너편 언덕에 이르리니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나 곧 생명줄 던져서 구원하라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5

 


제목이 내가 매일 기쁘게(찬송가 191)’이다. 이런 제목의 찬양을 부르면서 울 수 있을까? 빠른 템포로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온몸 들썩들썩 손뼉 치며 찬양하면서 말이다. 물론 너무 기뻐서 울기도 하니까 당연히 울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내가 매일 기쁘게찬양을 하면서 아픈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내가 해봐서 안다. 이 찬송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 콕 찍어 정해준 나의 찬송이다. 밝은 성격에 익살 떨며 깔깔거리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이기에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같은 가사와 딱 들어맞는 캐릭터라는 것. 동의한다. 내게 가장 쉬운 감정이 기쁨이다. 그러니 찬송가 191내가 매일 기쁘게는 나의 찬송이 맞다.

 

그러나 내 아무리 긍정의 사람이지만 늘 기쁘게 수는 없는 일이다. 지탱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로 어깨가 축 쳐지고 마음의 생기가 바짝 말라버린 어느 날이었다. 기쁘게 찬양하자는 인도자의 템포와 따라 손뼉 짝짝 치면서 찬송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전주가 끝나고 저 가사를 입에 담는 순간 눈물 둑이 터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가슴이 딩딩 울리는 통증이다. 한때 내가 숲의 새처럼 이 노래 하던 적이 있었는데, 공동묘지 사이를 휘파람 불며 걸어갈 기세로 소망과 긍정의 날을 살았는데. 그 기쁨의 날과 메마른 순간의 간극이 너무 크다. 슬픔이라고도, 막막함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어 흐르는 눈물이고 아픔이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여기서 노래하는 기쁨은 외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의 감정만은 아니다.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나를 알아주는 말이 무성하고, 몸은 건강하여 활기가 넘칠 때 흘러나오는 콧노래가 아니다. 순례의 길, 좁은 길이다. 성공하고 인정받는 것에 취해서 기뻐 그 자리에 안주한다면 순례의 길이 아니다. 누구보다 빨리 고지에 오르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제치고 달려야 하는 길, 성공을 위해 사랑과 진실을 유보하고 달리는 길을 좁은 길이 아니다. 그 순례의 길, 좁은 길에서 밤낮 기뻐할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의 감정이거나 노래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타고난 밝고 명랑한 성품에 힘입어 좋아라 손뼉 치며 부르는 찬송, 피상적인 기쁨 그 이상의 고백일 것이다. 많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바, 기쁨이 사라진 메마른 땅을 밟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행복과 기쁨이 꼭 좋은 것, 그 반대는 피해야할 것도 아니다.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1),

십자가 앞에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도(2),

기쁜 마음으로 주의 뜻을 행함(3)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음(벗을 날에 대한 소망, 4)

 

이유는 한 하나! 주의 영, 성령이 함께 하심이다. 평안과 기쁨은 성령 충만의 중요한 지표라고 한다. 내 안에 기쁨이 사라진 것도 서글퍼 눈물이 흐르는데, 성령 충만의 부재라고? , 나는 이 찬송을 계속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든 스미스 목사님은 저서 <예수의 음성>에서 우리 마음의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말한다. 기쁨과 평화는 성령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주는 시금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인다. ‘성령의 임재에 대한 중요한 지표로서 기쁨과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기쁨이나 평화가 유일하게 정당한 정서적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노, 두려움, 슬픔, 절망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불안정한 세상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찬송을 계속 부르기로 한다. 찔찔 짜면서 나는 숲에 새와 같이 기쁘다노래할 것이다. 깨어진 세상을 살며 때로 슬픔과 분노가 기쁨을 향한 정직한 발돋움이 될 수 있기에. 내가 주님 안의 참된 평화를 맛보았던 그 어느 날에도, 그 다른 어느 날 죄에 빠져 평안함이 없을 때에도, 그 어느 기쁨의 날을 그리워하며 상실감에 젖어 눈물 흘릴 때에도 주의 영은 함께 하시니 말이다. 기쁨의 근원이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4

 


말보다 표정과 눈동자가 더 크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수심 가득한 눈동자에 펴지지 않는 표정이 이미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아냐, 별일 없어, 잘 지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히려 별일 없다는 말이 더 큰 어려움 속에 있다는 뜻일 터이다. 답도 없는 내 얘기 해봐야 상대에게 걱정만 끼칠 뿐이거나,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다. 괜히 나 혼자 힘들어 하는 것이다자기최면의 말일지도.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었네

 

우리 어머니의 찬송이기도 하다. 엄마가 낮고 작은 소리를 읊조리듯 저 찬송을 부르고 있다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딴 근심이 무지 많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져야할 때 기도하듯 노래하셨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는 눈으로 전하는 메시지와 말이 다른 경우와 같다. 내 마음에도 이 찬송이 크게 울릴 때가 있다. 삶의 무게에 무릎이 꺾이며 휘청거리는 순간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미소 짓고 괜찮아요, 잘 지내요, 견딜 만 해요하고 돌아서서 눈물지으며 부르는 노래이다.

 

단 한 사람, 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그 한 사람만 있다면 결국 삶을 등지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마주 앉아 실은 조금 힘들어라고 말하는 순간 대개 근심의 보따리가 봉인해제 된다. 풀어 놓다보면 조금 힘든 게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이 찬송이 그러하다. 딴 근심 없다며 시작한 찬송의 나머지 가사들은 오히려 딴 근심들의 나열이다. 흥얼흥얼 따라 불러 그 짐 보따리에서 풀려 나온 것들은 우리 모두의 핵심적 고통이다.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한숨(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늦어지는 결혼, 쉽게 찾아지지 않는 진로로 오지 않은 내일은 희망보다 두려움이다. 누구를 사랑한다 해도 나 같은 사람 누가 좋아해주겠나싶어 스스로 거절당해버리고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두려움이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끼리는 좋은 관계로 잘 지내는 것 같아 스스로 외톨이 됨이다. 이 모든 압박과 두려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각하니 나오는 것은 한숨 뿐. 친구들은 흔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내게는 도달하지 못할 삶이다. 그 이유가 단지 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더욱 작아지고 누추해질 뿐이다. 돈이 있다면 이 불안과 가족의 불화까지도 싹 해결될 것 같다. 돈만 많이 준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두려움과 한숨과 궁핍함을 담아 꽁꽁 싸맨 우리의 짐보따리여.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찬송을 입에 붙이고 사시던 우리 어머니는 기도응답 체험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산 증인이다. 소중한 재봉틀을 도둑맞았는데 기도로 찾았다든가, 오직 기도로 분열되어 무너져가는 교회가 봉합되었다든가, 남편을 일찍 여의고 맨주먹으로 아이들을 키웠지만 훌륭하게 잘 키워냈다는 식의 이야기가 끝도 없다. 그렇게 따지면 딴 근심 없다며 슬쩍 꺼낸 얘기는 알고 보면 여러 근심 얘기이고, 결국의 근심은 기도제목이 되었고 그 기도제목은 모두 응답되었다는 그 흔한 은혜의 깔때기이다.

 

과연 그 내용이 팩트일까 아닐까를 가지고 괜한 트집을 잡아 엄마에게 싸움을 걸어본 적도 있다. 하나님께 마음이 삐뚤어지면 괜히 엄마의 찬송을 신파조라 홀대하며 귀를 막기도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찬송보다 기도의 본질을 더 잘 담을 수 있을까 싶다. 표정에, 눈빛에 가득한 근심을 알아봐주는 이에게 속 시원히 털어 놓고 싶은 마음의 고통. 그것을 쏟아놓는 장소와 대상이 십자가 그늘 밑이 되는 것이다. 산 같이 버티고 있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쓉니다, 포인트쌓는 것만이 기도가 아닐 것이다. 두려움과 가난함, 무기력의 한숨. 보따리 안에 꾸겨 넣은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진실한 기도의 시작이다. 진솔한 고백을 어떻게 시작하지, 무슨 말로 시작하지 하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에둘러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주님, 제가 당신 안에 있는데 뭐 딴 근심이 있겠습니까그 말 너머에 담긴 두려움과 무수한 딴 근심을 이미 보아주시는 분이 금방 나를 무장해제 시키실 것이다. “실은 두렵고 한숨만 나는 저의 궁핍함이 부끄럽고 화가 나요.” 그러면 그분과의 진짜 만남이 시작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간증이 하나둘 쌓여갈 것이다. 내 어머니의 믿기지 않는 기도의 여정처럼.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3

 


습관을 따라 기계적으로 부르거나 은혜 충만하여 자아를 잃고 찬양하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 안전하다. 한 마디 한 마디 정직하게 곱씹으며 노래하다가 결국 속이 불편해지는 찬송이 많다. 메마른 마음에 이성만 날카로운 상태로 이 찬송을 부르다 살짝 얹히고 말았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찬송가 449)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 늘 함께 해주신다고? 안위해 주신다고? 항상 복 내려주신다고? 순종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헌신의 요구 아닌가. 예예 순종하는 반주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온 교회 기도회, 찬양연습 반주 도맡아 하는 복이다. 어깨가 뭉치도록 쉴 틈 없이 피아노 치는 일이다. 거절 못하는 착한 청년은 주일학교에서는 교사로, 청년부에서는 임원으로, 교회 행사 때마다 스태프로 쉬지 않고 일한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일이 몰린다.

 

찬송가 노랫말이 진실 아닌 것을 말하진 않을 텐데, 어찌 우리의 순종 끝에는 갈수록 즐거움 대신 탈진과 원망만 남을까. <의식의 혁명>이란 책에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에 기쁨이 차오르게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사랑대신 순종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순종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에 기쁨이 차오른다. 바꿔 말하면 순종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조건이 달라붙은 탓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순종에 무슨 조건이 있을까? 언뜻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뭔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뭔가를 찾아보기 위해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부담되는 일을 떠맡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 부탁하는 이를 민망하게 할 수 없다는 한 발 앞선 배려심도 있다. 무엇보다 거절했을 경우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이미지가 손상될까 무섭다. 거절의 대상이 사람이어도 두려운데 하물며 하나님이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순종에 달린 조건이 많다. 예수님 따라, 복음을 따르는 길은 결코 강압의 길이 아닐진대, 어찌 우리는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무거운 짐을 진단 말이다. 마음에서 동의가 되지 않고, 몸의 에너지가 한참 부족함에도 착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으로 순종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탈진이다. ‘헌신 페이라는 신조어가 적실한 표현이다. 그러면 아무 헤아림 없는, 두려움도 없는 순도 100%의 순종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수 따라가며, 예수 따라가며, 예수 따라가며

 

이 찬송의 제목이기도 한 첫 부분을 여러 번 불러본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말고, 심리학에서 보는 인간 예수님이 있다. 한 인간이 성숙해져서 가장 아름다운 인격으로 꽃피운다면 어떤 사람이겠는가. 가장 고상한 인격을 가진 인간상으로 꼽는 분이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인격이 성숙하여 가장 아름답게 꽃피웠을 때의 열매는 무엇일까? ‘자발적 희생이라고 한다. 인간이 드러내는 가장 고상한 미덕은 이것이다. 예수님을 최고의 인간상으로 꼽는 이유는 그분이 보여주신 자발적 희생때문이다. 십자가야말로 자발적 희생의 극한이 아닌가. ‘자발적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매와 벌이 두려워 순종하고, 뭐라도 해야 복을 주실 것 같아서 억지로 짐을 지는 것과 다르다.

 

그런데 솔까말, 예수님도 그렇게 쿨하게 십자가의 길로 가지는 않으셨다. 잡히시던 밤에 겟세마네 동산의 그 처절한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땀에서 피가 배어나올 만큼 혼신을 다해 물으신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14:36, 메시지 성경).”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예,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께 묻고 또 물으신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그 고통스런 갈등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신 후 마침내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신다. 자발적 희생은 주체적인 성찰과 사유를 통한 선택으로 다다르는 덕의 경지이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는 길이 끝내 즐겁고 복된 길인 이유는 자발적 순종이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예스, 예스를 남발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순종의 길이 아니다. ‘내가 과연 이 잔을 마실 수 있는가진지하게 묻고 얻은 내적 확신 속에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 길이다. 그렇게 예수를 따르고 복음에 순종하는 자, 정녕 이런 복을 누리게 되리라. 해를 당하거나 고생할 때 주가 위로해주시고, 남의 짐을 지고 슬픔 위로할 때 상급을 주시리라!




길을 가다 우연히 듣는 노래에 옛사랑의 추억이 소환되는 경우가 있다. 연애하던 시절 함께 들었던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애써 찾아 들은 것도 아닌데) 그 즈음 유행했던 노래들이 그러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안에 저장된 기억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농간인데, 그중 갑은 크리스마스캐럴이다. 한 두 마디 말로 짚어내기 어려운 크리스마스 느낌을 살려내는 것은 시즌이 되면 가는 곳마다 귀에 걸려드는 캐럴메들리이다. 어릴 적 산타클로스를 소환하고, ‘올해도 솔크(솔로 크리스마스)외로운 감정에 부채질하고, ‘벌써 한 해가……흘러가는 시간의 감각을 일깨운다.

 

뭔가 들뜨고 한 편으로 차분해지는 크리스마스 느낌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은 아니지만 본말이 바뀐 것은 분명하다. 성탄절의 주인공을 찾아볼 길은 없다. 돌잔치에 가서 보는 주인공 아기의 딱한 신세 같다. 불편한 한복, 낯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흥청망청 시끄러운 분위기에 울고불고 하다 지쳐 잠든 아기 말이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의 근황 나누는 목소리, 술잔 부딪치는 소리, 이벤트 회사에서 나온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마이크 울림만 요란하다. 아기는, 주인공은 어느 구석 유모차 안에서 불편한 잠으로 이 피곤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오 베들레헴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친 줄 너 어찌 모르나(찬송가 1201)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던 날, 세상은 잠들어 있었다. 단지 생물학적 잠이 아니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심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가난한 부부의 아들로, 그것도 혼전임신이라는 소문 속에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일 리가 없다. 영적으로 깊이 잠 든 사람들의 눈에는 그러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깜박이던 별들만이 이 엄청난 출생을 알아채고 경이로움으로 더 밝고 높게 빛났을 것.

 

2017, 다시 돌아온 성탄절. 백화점 건물 외벽에, 교회의 높은 십자가에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화려하다. 아파트 입구에 서있는 소나무까지 번쩍번쩍 반짝반짝 조명 옷을 칭칭 감고 있다. 이렇게나 화려하고 캐럴이 장르별로 울려대며 시끌벅적하지만 2017년 성탄절에도 영적 수면상태는 여전한 것 같다. 아니 영적 어두움의 깊이는 화려함과 요란함에 정비례하는 듯하다. 베들레헴이니 마구간이니 하는 가난하고 낮고 천한 것들은 이제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다. 누구도 되길 원치 않는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 갑의 갑, 갑 위의 갑으로 가길 욕망한다. 여전히 세상은 죄의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예수그리스도의 평화와 생명은 주목받지 못한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 잠자는 동안에 평화의 왕이 세상에 탄생하셨도다

저 새벽별이 홀로 그 일을 아는 듯 밤새껏 귀한 그 일을 말없이 지켰네(2)

 

율동과 연극 연습을 하고 선물교환용 선물 준비에 분주하지만 이 날이 기리는 바로 그것에 눈 뜨지 못한 사람은 선물받지 못한 사람이다. 돌잔치의 들뜬 분위기를 즐기며 먹고 마시지만 나는 누구이고 여긴 또 어디인가자기 인식과 현존 감각이 없다. 3절 가사의 주 오심을 모르는사람은 자기 동네 마구간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태어나셨는데 잠이나 쿨쿨 자는 사람이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거니는 동안 그 곁을 바삐 지나쳤을 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함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다. 캐럴에 흔들거리고, 그러다 조금 쓸쓸함에 젖어 성탄절 보내나 정작 그 주인공의 마음에는 관심 없는 우리이다.

 

오 놀라우신 하나님 큰 선물 주시니 주 믿는 사람 마음에 큰 은혜 받도다

이 죄악 세상사람 주 오심 모르나 주 영접하는 사람들 그 맘에 오시네(3)

 

성탄으로 시작한 성육신은 십자가와 부활로 향해간다. 그것은 사함을 위한 예수님 희생의 여정이니 간절함으로 4절을 노래할 수밖에 없다. ‘오 베들레헴 예수님 내 맘에 오셔서 내 죄를 모두 사하고 늘 함께 하소서내 마음, 그 마구간보다 더 비좁고 악취로 가득한 곳일지언정 그분을 모셔야겠다. 반짝이는 성탄 트리와 흥겨운 캐럴 메들리에 취해 잠든 영혼을 깨워 조금 다른 성탄 노래를 불러보자. 보일 듯 말 듯 높게 빛나는 별빛처럼 고요하게 성탄 찬송을 불러보자. 성탄 찬송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을 진지하게 부르다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게 될지 모른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1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소개 받을 때가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무얼까. 친절한 사람, 합리적인 사람, 잘 돕는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유연한 사람 등. 나는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부를까 생각해보니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에 둘러싸인 삶은 행복하다. 위선적인 사람, 위협적인 사람, 비열한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산다면 불안이고 불행일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싶고,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꿈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좋다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눈동자를 그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을까? 민망함도 두려움도 없이 오래오래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연민과 사랑을 잊을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다 알고, 이미 받아주는 듯한 그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눈빛 교환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또한 세상의 모든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다 담은 소리이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 대답을 기다린다. 재촉도 추궁도 없이 내가 준비되어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내 말을 다 들은 후 말없이 자기 몸의 일부를 보여준다. 처참한 상처의 흔적이다. 놀란 내게 그 목소리가 말한다. ‘당신을 위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렇듯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를 옥죄던 사슬이 풀어졌다. 내 영혼을 꽁꽁 묶어 더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가던 그 사슬, 죄의 사슬이 말이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1)

 

그 사랑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신이 그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자국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는 말

네 지은 죄 사했다 하시니 나의 죄짐이 풀렸네 (2)

 

찬송가 134장은 나를 꿈꾸게 한다. 그리하여 2000년 전 갈릴리로 이끈다. 거기서 어떤 사람, 어떤 남자, 참 좋은 사람을 만난다. 그렇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난한 동네의 한 남자로 이 땅에 오셨다. 어떤 좋은 남자, 한 좋은 사람으로! 일상의 언어로 쓴 하나님 말씀이라 일컫는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그 사람예수를 읽어본다. ‘둘러앉은 사람들을 일일이 쳐다보며 말씀하셨다(3:34).’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정한 종교에 노하여, 그들의 눈을 하나씩 쳐다보셨다(3:5)’ 사람 예수님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손으로 병자의 몸에 손을 대며 스킨십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의 앞에 앉아 거짓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르침 받은 사람들은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메시지 속으로 들어간 나도,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찬송 가사에 잠긴 나도 그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 역사 속으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는 자주 사람의 몸을 입고오셨다고 말하면서 잠시 사람으로 둔갑하신 신화 속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사나운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 했네

그 파도가 주 말씀 따라서 아주 잔잔케 되었네

 

그렇게 사람 좋은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는 능력, 병을 고치는 치유력,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까지 보여주신다. 게다가 가난한 백성을 율법의 짐으로 옭아매는 종교 지도자들을 도통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눈 똑바로 뜨고 하실 말씀을 하셨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 천하다 멸시받는 이방 여인까지 일일이 눈 맞추던 따스한 사람 예수님은 풍랑 앞에서, 종교 권력 앞에서 누구보다 강하고 물러섬 없는 사람이었다.

 

꿈이 아니다. 한 밤의 꿈일 수 없다. 그 만남은 꿈을 깨서 2017년 가을을 걷는 나의 일상에서 오히려 생생하다. ‘좋은 사람의 기준을 몸소 제시하셨기에 그에 따라 오늘을 살고자 한다. 갈릴리 사람처럼 살고자 하는 나의 오늘에 그분은 살아 계신다.


나 주께서 명하신 복음을 힘써 전하며 살 동안 그 갈릴리 오신 이 내 맘에 항상 계시기 원하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통일 찬송가 번역) 곧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4)

 


< QTzine> 11월호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0

 


 

아무렇지 않았던 여자(남자)의 신상이 갑자기 궁금해졌다면 내 쪽에서 막 켜지기 시작한 그린라이트인 경우가 많다. 알고 싶어 하는 것, 더욱 자세한 내용이 듣고 싶다고 몸을 바짝 기울이는 것은 호감의 표현이다. “너에 대해 알고 싶어.” 이것은 사랑의 그린라이트이다. 알고 싶고, 더 잘 듣고 싶어 다가가게 되는 것, 혼자 있을 때도 어느 새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린라이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면 알았어. 알겠다고!”하는 말은 그에 반하는 뉘앙스이다. 대화나 관계의 단절을 알리는 사인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는 궁금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엔 가능성이 느껴지나 네가 말하는 거 다 알겠어.’라며 쌩 돌아선 사람은 다시 와 내 말에 귀 기울일 것 같지가 않다. 오래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여전히 너를 모르겠어. 네 얘기를 들려줘.’ 신비로 남겨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확실히 알겠어!’ 이 얼마나 교만에 찬 위험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시작하는 찬송가 310장은 강렬한 메타포를 가진 찬송 중 하나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뜨겁게 불러 본 기억 있을 법한 찬송이다. ‘은혜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을 인간의 경험이란 없으니 말이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한 소절 신파조로 부르고 이어지는 후렴의 음악적 반전이 유발하는 감정의 폭발과 감동도 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의 멜로디는 점핑판을 딛고 솟아오르듯 높이, 멀리, 확신 있게 튀어 오른다. 주먹을 꽉 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를 수밖에. 그리고 마지막은 한 옥타브 높은 종결음이다. ‘나는 화~악 씰히~ 아 네에에에에!’ 이것은 아멘을 남발하지 않을 수 없는 피날레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주일 예배에서 이 찬송을 부르던 중, 나는 (박차고 나오는) 후렴이 아니라 그 바로 앞의 가사, 그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송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난 알 수 없도다.’가 좋겠다. 단지 멜로디 진행의 기술로 감정이 불러일으켜진 것이 아니다.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시시때때 성령의 감동으로 나를 만지시지만, 느낄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음. 조금은 알 것 같지도 하지만 온전히 알 수는 없음. 더 명확하게 알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의 고백이 확실히 아는믿음의 진정한 시작이다. [난 알 수 없도다 - 나는 확실히 아네] 이 급진적인 도약의 점핑판은 알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기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소망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간절히 찾을수록 그분의 부재가 더욱 크게 다가올 뿐이어서 당혹스러운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예수님 당신 스스로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6:6, 새번역)이라 칭하셨으니 그분은 인간 앞에 부재로 현존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주님, 나는 당신에 대해 오직 모를 뿐입니다!) 불가지(不可知)의 실존을 겸허히 인정하고 얻는 신적인 확신, 이것이 은혜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우리 국토 구석구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일깨운 책이 있다. 그 책 서문에 나온 문화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책을 읽고 가 본 변산의 내소사에서는 보이는 것이 많아 감동이었다. 반면 우리는 아는 만큼 무시한다. 문화재를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감동받을 수도 있지만, 아는 만큼만 보고 보이는 만큼만 가지고 경멸을 할 수도 있다. 역시 안다는 것, 아니 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랑과 성장으로 가는 문을 닫는 일이다. 문화재도, 사랑하는 너도, 심지어 나 자신도, 신앙에 관해서도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여전히 다가가고 귀를 기울이며 숙고하는 것이다.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며 무엇을 확실하게 안다고 하는 이들을 경계할 일이다. 내가 기도해보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확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인간은 모를 뿐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는 날이 많지만 술래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숨은 곳을 다 알고 계신다. 우리가 그것만은 화악~씰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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