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3

 


습관을 따라 기계적으로 부르거나 은혜 충만하여 자아를 잃고 찬양하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 안전하다. 한 마디 한 마디 정직하게 곱씹으며 노래하다가 결국 속이 불편해지는 찬송이 많다. 메마른 마음에 이성만 날카로운 상태로 이 찬송을 부르다 살짝 얹히고 말았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찬송가 449)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 늘 함께 해주신다고? 안위해 주신다고? 항상 복 내려주신다고? 순종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헌신의 요구 아닌가. 예예 순종하는 반주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온 교회 기도회, 찬양연습 반주 도맡아 하는 복이다. 어깨가 뭉치도록 쉴 틈 없이 피아노 치는 일이다. 거절 못하는 착한 청년은 주일학교에서는 교사로, 청년부에서는 임원으로, 교회 행사 때마다 스태프로 쉬지 않고 일한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일이 몰린다.

 

찬송가 노랫말이 진실 아닌 것을 말하진 않을 텐데, 어찌 우리의 순종 끝에는 갈수록 즐거움 대신 탈진과 원망만 남을까. <의식의 혁명>이란 책에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에 기쁨이 차오르게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사랑대신 순종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순종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에 기쁨이 차오른다. 바꿔 말하면 순종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조건이 달라붙은 탓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순종에 무슨 조건이 있을까? 언뜻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뭔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뭔가를 찾아보기 위해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부담되는 일을 떠맡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 부탁하는 이를 민망하게 할 수 없다는 한 발 앞선 배려심도 있다. 무엇보다 거절했을 경우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이미지가 손상될까 무섭다. 거절의 대상이 사람이어도 두려운데 하물며 하나님이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순종에 달린 조건이 많다. 예수님 따라, 복음을 따르는 길은 결코 강압의 길이 아닐진대, 어찌 우리는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무거운 짐을 진단 말이다. 마음에서 동의가 되지 않고, 몸의 에너지가 한참 부족함에도 착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으로 순종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탈진이다. ‘헌신 페이라는 신조어가 적실한 표현이다. 그러면 아무 헤아림 없는, 두려움도 없는 순도 100%의 순종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수 따라가며, 예수 따라가며, 예수 따라가며

 

이 찬송의 제목이기도 한 첫 부분을 여러 번 불러본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말고, 심리학에서 보는 인간 예수님이 있다. 한 인간이 성숙해져서 가장 아름다운 인격으로 꽃피운다면 어떤 사람이겠는가. 가장 고상한 인격을 가진 인간상으로 꼽는 분이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인격이 성숙하여 가장 아름답게 꽃피웠을 때의 열매는 무엇일까? ‘자발적 희생이라고 한다. 인간이 드러내는 가장 고상한 미덕은 이것이다. 예수님을 최고의 인간상으로 꼽는 이유는 그분이 보여주신 자발적 희생때문이다. 십자가야말로 자발적 희생의 극한이 아닌가. ‘자발적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매와 벌이 두려워 순종하고, 뭐라도 해야 복을 주실 것 같아서 억지로 짐을 지는 것과 다르다.

 

그런데 솔까말, 예수님도 그렇게 쿨하게 십자가의 길로 가지는 않으셨다. 잡히시던 밤에 겟세마네 동산의 그 처절한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땀에서 피가 배어나올 만큼 혼신을 다해 물으신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14:36, 메시지 성경).”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예,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께 묻고 또 물으신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그 고통스런 갈등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신 후 마침내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신다. 자발적 희생은 주체적인 성찰과 사유를 통한 선택으로 다다르는 덕의 경지이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는 길이 끝내 즐겁고 복된 길인 이유는 자발적 순종이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예스, 예스를 남발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순종의 길이 아니다. ‘내가 과연 이 잔을 마실 수 있는가진지하게 묻고 얻은 내적 확신 속에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 길이다. 그렇게 예수를 따르고 복음에 순종하는 자, 정녕 이런 복을 누리게 되리라. 해를 당하거나 고생할 때 주가 위로해주시고, 남의 짐을 지고 슬픔 위로할 때 상급을 주시리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