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의 장례식. 짧고도 긴 장례식의 마지막 시간인 하관예배는 추웠다. 날은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교우 몇 분이 장지로 찾아오셔서 찬바람 속 하관예배에 함께 하셨다. C집사님께서 전복죽을 가져오셨다. 경황 중에 어떻게 전해져 내 가방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묻고 돌아온 저녁, 텅 빈 몸에 들어간 따스함이었다. 어떻게 얼마나 먹었던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따뜻했다. 마지막 하관예배 때 차디찬 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느낌이라 덜덜 떨며 서 있었는데. 그 순간과 대비되어 따스한 기억으로 흐릿하게 남아 있다.

 

바쁜 사모님 조금 도와줘서 하나님께 칭찬 좀 받으려 한다며 몇 번 김치를 나눠주곤 하셨었다. 엄마 장례식 이후로는 거의 매주일 김치며 밑반찬을 주셨다. 눈물을 달고 사는 시절이기도 했지만, 반찬통 하나하나 꺼내 풀어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반찬 보따리는 엄마(친정 엄마) 상징의 원형 같은 것 아닌가. 집사님 반찬 우리 엄마 반찬, 비슷한 구석 하나 없지만, 딱 봐도 그냥 엄마 반찬이었다. 한참을 넙죽넙죽 얻어먹다 날씨도 더워지고 죄송해서, 어렵사리 그만 주십사고 말씀드렸을 때 그러겠노라 하시며 "이제 친정 엄마 놀이 그만 할게요.^^" 하셨다. 

 

친정 엄마 놀이. 아, 친정 엄마 놀이! 김치며 멸치 볶음, 전복죽과 약식이 친정 엄마 떠나 구멍 숭숭 뚫린 마음을 메워주는 엄마표 반찬이었다! 친정 엄마표 밑반찬 보따리는 주렁주렁 달린 내 결핍 보따리 중 하나이다. 엄마에게 김장김치, 양념 같은 것을 받아 먹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평생 착취해온 엄마를 아직도 착취할 수 있는 딸들이 얄밉고 질투가 났다. 내 손은 친정에서 올 때가 아니라 친정 갈 때 먹을 것 보따리로 무거웠으니. 아기가 된 엄마는 내가 만든 꽃게찜을 그렇게 좋아했다. 수년 전 엄마 몸이 처음 무너졌을 때, 질리도록 꽃게찜을 해다 나르곤 했다. 당시 꽃게찜을 싸들고 다니며 마음의 입이 닷발은 나와있던 것 같다. 우리도 자주 못 먹는 비싼 꽃게 사는 게 부담돼서가 아니라, 음식 만드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전 같으면 "야야, 비싼 걸 왜 하냐?" "우리 신실이 몸도 약헌디, 하지 마라." 했을 엄마가 "꽃게찜 안 혀 왔어?" 하면 마음이 턱 무너졌다. 아기같은 엄마가 귀엽기도 하지만, 어쩐지 이렇게 엄마의 존재가 작아지고 작아지다 없어져 버릴까봐, 엄마가 죽을까봐...... 아직은 엄마한테 더 받으며 살고 싶은데 주는 존재로 사는 내가 서러웠다. 늙은 엄마를 가진 내가 가여웠다.

  

20여 년 전, 결혼 초만 해도 밥 하다 전화해서 엄마 레시피 챤스를 쓸 수 있었다. "엄마, 오징어 도라지 무침 어떻게 해?" 하면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 채윤이 현승이는 외할머니가 손수 구워 정성으로 발라주시던 굴비를 흐릿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엄마의 손맛이 그리움이 된 것은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요리에서 손을 뗀 것은 물론, 뇌세포가 느슨해지면서 엄마만의 요리 레시피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더 안타까웠다. "엄마, 엄마가 해주던 곱창전골 먹고 싶은데. 육수 어떻게 내고, 곱창 손질 어떻게 했는지 가르쳐줘" "생각이 나남? 다 잊어 부렀지. 다 잊어부렀어." 벌써부터 부모의 죽음을 짊어지고 사는 나는, 엄마 반찬의 상실로 엄마의 죽음을 상상했다. 

 

그래서 유난히 친정 엄마표 김치 보따리, 스치로폴 박스에 담긴 김치 같은 것을 보면 서글퍼지곤 한다. 집사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갔다 나가셨나? 매주 반찬을 나눠주시는 것이 그저 잘 챙겨 먹으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 마음이셨을 것이다. 헌데 '친정 엄마 놀이'라는 언표가 어쩐지 내 결핍의 보따리를 알고 하시는 말씀 같이 느껴져 먹먹해졌다. 어느 날은 마지막 남은 겨울 김치 한 포기로 만드셨다며 김치전을 부쳐주셨다. '이제 김장 한 포기를 끝으로 겨울을 완전히 보냈습니다. 사모님도 마음의 겨울을 털고 일어나시길 기도합니다.' 하셨다. 딱 두 달이 되는 날이었고, 자꾸 날짜를 세며 보내는 나는 의미를 담아 더 힘을 내야지, 하던 차였다. 마지막 겨울 김치라니, 이 전을 먹으면 어쩐지 그리 될 것만 같았다. 누군가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라고 말했다면 "마음대로 털어지면 나도 털고 싶다"라고 불끈 슬픔에 젖은 화가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따스하게만 다가왔다. 봄처럼.

 

슬픔에 싸인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설픈 말을 하느니 가만히 손잡아 주는 것이 좋다. 아니 손을 잡아주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슬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어쩔 줄 모르는가. 장례식 직후, 흑백 세상을 살던 나는 만나는 누구라도 붙들고 엄마 얘길 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그저 엄마에 대해 물어봐 줬으면 싶었다. 엄마의 마지막 날이 어떠했는지,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엄마가 싫었던 때, 엄마가 좋았던 때...... 무엇이든 물어봐주면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렵다면 제대로 치루지도 못한 장례식 절차라도 물어봐 줬으면. 누구도 그것을 물어주지 않았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할 수 없어서였음을 안다. 우리 모두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른다. 죽음은 이렇게 가까이 있고, 이렇게나 명징한 인간의 운명인데 입에 올리지 못하고 일단 피하고 보려 한다. 나 역시 슬픔에 잠긴 사람 앞에서 그랬었다. 

 

말대신 건네는 음식이 말보다 크게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넙죽넙죽 받으며 민망함도 있었지만 "그래, 난 지금 돌봄이 필요한 상태야" 인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실은 얼마나 돌봄을 원했던가. 의연하게 일상을 살았지만 누군가 나를 아기처럼 안아주며 돌봐주길 기다리고 바랐던 것 같다. 지방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 점심 메뉴를 고심하던 친구가 "따뜻한 국물이 있는 밥을 생각해 봤는데......"라고 말했다. 블로그에 연재되는 애도글을 꼼꼼히 읽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이 한 마디가 그저 따뜻한 국물이었다. 엄마를 잃고 애도하는 것은 퇴행의 시간을 지나는 것인지 모른다. "엄마, 엄마" 어린아이처럼 부르게 된다. 어린아이에게 가닿는 것은 말이 아니라, 관념이 아니라 원초적인 것. 알사탕 하나, 과자 한 봉지이다. 

 

몸으로 경험한 것만 남는다. 아니 몸의 기억이 가장 오래 간다. 엄마의 음식이 미치도록 그리운 것은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학자였다면, 내가 엄마의 지성을 사랑했다면, 엄마가 남긴 글이 있고 관념이 있을 텐데. 내가 사랑한 것은 엄마의 몸. 그것이 사라지자 엄마가 해준 음식은 영영 다시는 먹지 못할 것이 되었다. 영영. 그러고 보면 정말 마음 깊이 따스하게 남은 것은 말이 아니라 '먹을 것'이다. 이 즈음 감자가 쏟아져 나오는 철이 되면 나는 감자 샐러드를 잔뜩 만들곤 한다. 햄 같은 것 넣지 않고 오이와 양파를 넣어서. 오이를 넓고 길쭉하게 썰어서 소금물에 꼭 짜서 넣으면 아삭하고 맛이 있다. 어쩌다 이것을 연례 음식으로 하게 되었지? 생각해보면 명일동 K 권사님의 감자 샐러드 코스프레다. 명일동에서 한 아파트에 사시던 권사님께서 가끔 우리 집 현관에 음식 담긴 비닐봉지를 걸어두고 가셨다. 감자 샐러드나 빨갛게 양념한 돼지고기. 맛도 있었지만 따스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리움 때문에 해마다 이 즈음이면 그때 주셨던 맛을 더듬어 비슷한 모양의 감자 샐러드를 만들게 된 것 같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는 애도하는 사람이었다. 애도하는 이를 어떻게 도울까 하는 생각이 나는 걸 보니 한 발 빠져나왔나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용기있게 다가가 그가 잃은 사람에 대해 묻고, 얘기 나눌 수 있을까. 덥석덥석 음식을 만들어 아무것 바라지 않고 그저 안기고 돌아올 수 있을까. 말보다 몸으로 사랑하여 진정한 것을 남기는 인생 후반을 살고 싶다. 동생은 엄마가 만들어 주던 양파 볶음밥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줬다고 한다. 엄마의 손으로, 몸으로 남긴 흔적이 아픈 그리움이지만 사랑의 기억이기도 하다. 다시 먹지 못할 엄마의 곱창전골과 영양부추 샐러드와 아삭 시원한 김치는 그리움이며 사랑이다.

 

C집사님의 노란색 2단 반찬통은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 마음의 위로  (0) 2020.07.07
몸이 슬프다고 말할 때  (0) 2020.06.11
고아 의식, 딸  (4) 2020.06.06
찔레꽃, 그리움의 노래들  (0) 2020.05.25
고아 의식, 아들  (0) 2020.05.20
어버이 날에_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2) 2020.05.08

 

 

 

 

엄마 돌아가시고 한 50여 일 지난날이었다. G 권사님의 아버님께서 소천하셨단 소식이다. 아, 어쩌나! 권사님은 어머님 보내드린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권사님께서 어머님을 보내드린 후 한참 힘드셨단 얘길 전해 들었다. 한 번도 제대로 위로의 마음을 건네지 못했었다. 엄마를 잃고 나니 권사님이 힘드셨단 얘기가 비로소 몸으로 알아들어졌다. 딸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엄마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많은 죽음으로 연습한다 해도 엄마를 잃는 것은 새로운 슬픔이구나! 엄마 장례 후 권사님께서 건네는 메시지 하나도 더 깊은 곳을 건드리며 다가왔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남다른 분인데, 아버님마저 보내셨구나! 싶으니 속에서 쿵, 하고 무엇 하나가 또 무너져 내렸다.

 

멀리 남해에 차려진 장례식에 내려가는 준비를 하는 차에 또 다른 비보. N 집사님의 어머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이다. 쿵! 쿵쿵! N 집사님은  G 권사님의 남편이시다. 그러니까 권사님의 시어머님 또한 같은 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부가 함께, 같은 날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는 소식이다. 죽음이 이렇게 덮칠 수 있다고? 공포가 밀려왔다. 아내의 죽음 후에 쓴 애도 일기, 『헤아려 본 슬픔』에서 C. S. 루이스가 말했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 애도는 진행 중이었고, 나는 아직 죽음의 강에 휩쓸려 내려갈 것 같은 두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슬픔은 때때로 공포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역시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무섭지는 않으나, 무서울 때와 흡사한 느낌,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지는......" 그런 상태이다.

 

하루 일정으로 남해와 보은, 두 곳에 들러 조문하는 일정으로 교우들과 함께 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큰 슬픔 중에 가장 힘이 되어줄 남편 없이, 아내 없이 각각 장례식을 치룬다는 것이. 줄줄 흐르는 권사님의 눈물은 마스크 안으로 흘러 모여 저수지가 될 것 같았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기나긴 시간을 버스에서 보냈다. 자다 깨다 하며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정신줄을 놓았다 잡았다 한 것 같기도 하고. 보은에서 조문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했다. 차에 오르는 순간 이제 끝났구나, 두어 시간이면 집에 가 편히 누울 수 있겠지 싶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났다. 휴게소 들르지 않고 논스톱으로 달리겠다고 출발한 버스인데...... 어쩌지. 어쩌지 싶으니 몸은 더욱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위로 아래로 분출할 것 같은 무엇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사님 한 분이 화장실이 급하여 첫 휴게소에서 버스를 세우셨다. 집사님을 따라 달려서 내려 낮에 남해에서 먹은 것까지 토해냈다.

 

울렁거림은 진정은 되었지만 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출발한 버스에 길게 누워 스스로 안정, 절대 안정을 진단했다. 몸 안에서는 조그만 자극에도 다시 분출하겠다는 것들이 꿈틀거렸다. 비상용으로 비닐봉지를 앞에 두고, 식은땀 흐르는 몸으로 가만히 숨만 쉬며 누워 있었다. 음악의 힘을 빌어 안정을 찾게 위해 이완시키는 음악을 틀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이 들리는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눈에서는 눈물이, 온몸에선 식은땀이. 캄캄한 창에 엄마 얼굴이 어른거린다. 엄마가 보고 싶은 거였구나. 엄마, 엄마...... 속으로 엄마를 불러보는데, 엄마가 아니다.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예원아, 예원아, 예원이 어딨니......"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뒤틀렸다. 뒤틀리는 몸과 마음을 안전벨트에 꽉 묶어두고 소리 없이 눈물과 식은땀을 흘렸다. 예원이.

 

바로 일주일 전, 예원이 장례식이었다.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 예원이 장례식이라니. 그리고 실은 아직 예원이를 말할 수 없다. 애도의 첫 단계가 '부정'이라면 예원이 만큼은 끝까지 부정하고 싶다. 예원이 소식을 들었던 밤, 모든 것이 끝났다 싶었다. 그대로 죽음의 강에 나를 던지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겠구나, 생각도 했다. 40여 일 전에 엄마를 보냈던 과정과 똑같이 화장장을 거쳐 한 줌의 재로 마주한 예원이를 세종시 어느 추모공원에 안치하고 돌아왔다. 그날 그 시간 이후로 집안에서 예원이는 금기어가 되었다. 나도, 남편도, 채윤이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괜찮은 듯 살아졌다. 남해에서 보은까지, 하루 종일 죽음을 마주했던 몸이 요동을 쳤다. 슬프다고, 슬프다고, 예원이 그 빛나는 생명이 아깝다고 몸부림을 했다. 몸이 말했다. 슬프다고, 견딜 수 없이 슬프고, 그 슬픔은 분출하고 싶은 분노이며 공포라고.

 

엄마 애도의 진행상황을 보고하는 몸의 신호가 하나 있다. 장례식 당일 마스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침 입관식에서 이미 젖었고, 하루 종일 그런 채로 다녔다. 그날 이후로 마스크 꼈던 입주위가 시도 때도 없이 실룩거린다. 마그네슘이 부족하여 눈 떨림 현상이 온다는데 그 비슷한 증상일 것이다. 암튼 아무 때나 왼쪽 입술 위가 떨렸다. 마치 어릴 적에 울음을 참으려 할 때마다 입이 삐죽거려지고, 입술이 떨렸던 것처럼. 수시로 실룩거리는 입술로 대화 중에 민망한 순간이 자꾸 생겼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나아졌다.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진도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횟수도, 강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 예원이 보내고 거짓말처럼 다시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최대한 '부정'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몸은 속아주지 않았다. 버스에 누워 몸에게 슬퍼할 것을 허락했다. 

 

충분히 슬퍼할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엄마, 예원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잊어라, 생각하지 마라,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약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감정,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는 슬퍼하는 사람을 그대로 봐주지도 않는다. 그만 해라, 언제까지 그 얘기냐. 그만하라는 압력이다. 압력에 못이겨 억압하고 만다. 가장 정직한 나,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몸이 말한다. 아직 슬퍼, 나 아직 슬프다니까.

 

애도 심리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말한다. 애도에 대한 반응은 명백하게 신체적으로 온다고. 우는 것만 아니라, 훌쩍거림, 가슴의 압박감, 딸국질, 헐떡거림, 한숨 쉬기, 목이 조이는 것 같은 호흡 곤란, 먹을 수 없음, 식욕부진, 목에 음식이 걸린 것 같은 느낌, 위와 신장의 잦은 탈, 육체적인 탈진 또는 흥분 등이다.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 David K. Switzer, 학지사) 이 명백한 반응은 가장 정직한 반응이기도 하다. 몸이 가장 정직하다. 그런 의미로, '애도'의 개념을 정립한 죽음과 애도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말한다.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라"라고. 이제는 다 잊었고 정리되었다고 머리가 말할 때도 몸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감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공교롭게도 특정한 날에 이유 없이 아프고 기분의 저하를 보이는데, 그 날은 고아원에 보내진 날이나 부모가 돌아가신 날과 같은 시기라는 것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아직 달력을 읽기에는 한참 어린 아이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앞에 나열한 신체 증상만이 아닐 것이다. 아동문학가 매들린 렝글(Madelain L' Engle)은 C. S. 루이스의 애도 일기 『헤아려 본 슬픔』을 읽음으로써, 사람마다 겪는 슬픔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자신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 읽은 것이다. 사람사람이 겪는 슬픔이 다른 것처럼 신체 증상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게는 새벽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증상, 입술 떨림이었다. 장례 후 처음으로 친구들과 일박 여행을 한 날에는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지끈 이가 부러졌다. 여행 가면 마지막까지 쌩쌩했던 내가 가장 먼저 피곤해 꼬꾸라졌다.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단체에 모임이 있어서 나간, 척 공식 모임에서는 혈압이 떨어져 시야가 흐려지고 두통이 오고 기운이 빠져나가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머리 차원에서 "괜찮아,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 움직인 날에 몸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몸이 말하는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래?" 하고 지나치기 일쑤. 유난 떠는 것처럼 비칠까 봐, 약한 모습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요즘도 간간이 입술이 위 근육이 실룩거리며 울음 참는 모양새를 한다. 이젠 잠도 잘 자고, 컨디션도 좋은 편이다. 그런가 싶더니 요 며칠 다시 서늘한 가슴으로 이른 새벽에 눈을 뜬다. 당황하지 않는다.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지만 슬픔의 강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애도는 "끝이 없고, 위로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애도의 원인인 상실, 죽은 엄마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술 떨림이 온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다 10년 쯤 후에 다시 입술 위가 실룩거린다 해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렇지. 내가 사랑하던 엄마가 없어, 하고 몸이 일깨우는 그리움과 슬픔을 그대로 마주할 것이다. 그렇게 가늘게 애도의 끈이 이어지다, 이어지고 이어지다, 저 하늘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에, 그 날에 끝이 나겠지.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 마음의 위로  (0) 2020.07.07
몸이 슬프다고 말할 때  (0) 2020.06.11
고아 의식, 딸  (4) 2020.06.06
찔레꽃, 그리움의 노래들  (0) 2020.05.25
고아 의식, 아들  (0) 2020.05.20
어버이 날에_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2) 2020.05.08

아들 현승이를 부르려는데 '운형이', 동생 이름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꽤나 반복되는 말실수다. 말실수는 무의식의 발로라는 프로이트를 끌어오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일찍부터 동생의 엄마 노릇을 자처해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겨진 늙은 엄마, 어린 동생(그래 봐야 두 살 차이인데) 사이에서 책임감을 느꼈다. 누가 지워준 것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마나한 말, 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들 있지 않은가. "이제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다, 이제 네가 잘해야 한다, 엄마에게 잘해라, 동생 잘 보살펴라......" 

 

장례식 후 외가 친가 친척들이 다같이 모여서 확대 가족회의 같은 걸 했다. 남겨진 세 사람의 먹고사는 문제와 무엇보다 남매의 교육 문제가 관건이었다. 누군가 내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꿈이 있었다. 음악을 하고 싶다고, 성악가가 되고 싶다고. 냉철한 작은 외삼촌이 딱 잘라서 말해주셨다. "안 돼, 음악은 할 수 없다. 그건 돈이 많이 들어. 아버지도 안 계신데 음악을 할 수는 없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런 식의 말씀이었다. 아, 그렇구나! 장래희망 목록에서 음악은 지웠다. 그리 아쉽지는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결국 뒤늦게 음악치료를 선택한 건 아쉬움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 가족회의가 남긴 인상은 강하다. 마음에 심긴 메시지도 분명하다.

 

아버지 없음이 의미하는 바를 인식한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겠구나, 아버지가 없으니 알아서  인생을 일궈가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 한 몸이 아니구나, 동생과 엄마은 내가 잘 돌봐야 해, 까지 갔을 것이다.  엄마가 무책임한 어른은 아니었다. 엄마 역시 자기희생적인 사람이고 책임감 또한 강했다. 그렇더라도 우리 남매에게, 특히 내게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못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더욱 엄마까지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엄마를 보며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하는 것이 내 깊은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친절하고 잘했다는 뜻은 아니다. 두려울수록 엄마에게 더 신경질적이었고, 걱정이 깊어지면 원망을 쏟아놓곤 했다. 

 

특히 경제적인 책임감을 과도하게 가져왔다. 엄마는 늘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이었고, 우리 교육에 관한 한 철저했다. 대학까지 학비 걱정을 해본 적은 없다. 청소년 시절에도 조르고 조르고 또 조르면 나이키 운동화를 사주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돈을 벌어서 엄마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부담, 동생에게 뭐라도 하나 더 사줘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엄마에게 가져다주는 게 꽤 보람이 있었다. 더 누리고 싶어서 퇴근 후에 과외 알바를 했다. 대학원 준비하며 직장 그만두고 과외에 투신(?) 했더니 수입이 훨씬 나아졌다. 학비를 위해 돈을 모으는데 아주 잘 모아졌다. 통장에 쌓이는 돈을 보며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고치긴 틀렸고 새로 사야 하는데...... 엄마의 걱정 몇 마디에 모았던 돈을 내놓았다. 냉장고를 샀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돈이 있었을 것이다. 모른 척했으면 엄마가 해결했을 것이다. 정말 내놓기 싫었는데,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순순히 내놓았다. 냉장고를 사고도 한참 서러웠다.

 

엄마와 동생을 위해서 내가 돈을 벌여야 한다는 책무감이 떠나질 않았다. 동생의 고아 의식, 즉 아버지 없는 결핍감이 물리적 힘에의 집착이 되었다면 내겐 경제적인 책임감과 정신력 같을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어린 내게 지성의 표상이었다. 아버지가 설교 준비하는 앉은뱅이책상 옆에 엎드려 산수공부를 하고 글짓기 숙제를 했다. 덧셈 뺄셈을 하는데 교과서에 나온 강아지를 개수 그대로 연습장에 그려주던 아버지 모습이 아련하다. 반공 선언문 쓰기 숙제를 하는데 '유비무환'이라는 말의 뜻을 가르쳐주며 글 안에 넣어서 써보라고 했던 기억도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것은 지성의 기반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지적인 욕구가 끝이 없는 것, 아버지 부재가 남긴, 고아 의식이 내게 남긴 결핍감일지 모른다.

 

청년 시절을 함께 보냈던 H가 나는 잊은 어떤 기억을 끄집어냈다. 주일학교 성가대 지휘를 하던 시절, 해마다 합창, 성경암송, 성경고사 등의 대회가 있었다. 노회대회에 나가서 입상하면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성가대 아이들 데리고 전국대회에 출전한 적이 몇 번 있다. 어느 해, 노회 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심사를 맡은 사람이(교수인지, 음악 선생인지 모르겠다) 어이없는 심사평을 했다. 노래는 잘했지만 지휘자의 복장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휘자인 내 치마 길이가 짧았다고! (아,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네!) 당시 자타공인 페미니스트였지만, 페미니스트이고 아니고 문제도 아니었다. 대회는 어찌어찌 마쳤지만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노회 주일학교 연합회 임원을 맡았던 당시 부장 선생님을 통해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글을 써서 전달하고, 그 발언에 대해 공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여차저차 결국 사과를 받았다. 

 

문제는 그 일을 복기하는 H의 말이었다. 나는 잊고 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며 "언니, 정말 집요하게 느껴졌어. 왜 저렇게까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조금 알겠어."라고 했다. 나도 돌이켜보니 그런 것 같다. 지금과는 비할 수도 없는 시절, 성인지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분노하고 용기를 내고, 집요할 수 있었을까? 그 일에 대한 해석이었을까? 나이가 한참 많은, (청년들에게 현자 노릇을 하던) 선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너는 아버지가 없어서 제 멋대로인 구석이 있다."라고 했다. 털썩!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아 몸부림 친 결과가 아버지 없는 아이를 드러냄이 되었다고?! 아버지 없는 애 면전에 두고 할 말인가 싶었지만 별말을 못했었다. 당시 나를 보던 주변 사람들의 시각이었겠구나, 싶다. 부드럽고 물러 터졌으며 흐리멍덩하다는 내가 가진 자아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것.

 

아버지 없음은 내 인생 지성의 부재이며, 자존심을 지켜줄 권위의 부재였다. 그렇게 내가 나를 지키며 무시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평생 읽고, 쓰고, 사유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은 것은 아버지 없음, 고아 의식의 발로이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야 하는 처절함이었다.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를 선망하고, 아버지와 동일시 하던 어린 딸, 그 아이의 선택이 이제 와 나는 한없이 가엾다.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에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떠올리며 글을 쓴 적이 있다. 참가자 넷  중 세 사람의 주제가 아버지였다. 내적 여정에서 어린 시절 작업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보다 엄마를 동일시하는 딸이 더 많고, 둘 다 고통의 근원이었을 테지만 아버가 준 고통을 더 치명적으로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 지점에서 감정이입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고, 인식했다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아버지와 동일시 되어 있었고, 심지어 우상화했다. 눈에 없는 신을 형상화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능인지 모른다. 내가 자라고 사춘기를 겪는 동안 내내 곁에 살면서 간섭하고 상처를 주었다면 모르겠지만,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는 이상화되다 못해 우상이 되었다. 엄마를 혐오하고 아버지를 이상화하며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여성인 나를 스스로 낮추고 비하했다. 이율배반적으로 외부 남성 권위에는 분노하고 대항하게 되었다. 당연히 왜곡된 가부장적 하나님이 이미지를 가졌고, 그것은 다시 내 안의 여성주의와 충돌했다. 영적 여정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분열이었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 몇 년 전에 읽은 모린 머독의 영웅의 딸』이다.  여성들 안의 영웅심리와 불안을 아버지와의 딸의 동일시로 설명하는 페미니즘 에세이다. 

 

'영웅의 딸'이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가운데 남성을 모방하는 여성을 일컫는다. 그녀는 어린 소녀였을 때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를 이상화 하고 어머니는 거부한다...... 아버지와의 지나친 동일시와 아버지처럼 되고자 하는 아버지의 딸들의 욕망은 그들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와 남자들의 세계를 모방하면서 일찍부터 그녀의 남성적인 성품을 발전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지나친 자기 동일시는 딸에게 자신감과 세상에서의 경쟁력을 심어주지만, 어머니와의 분리 속에서 그녀는 여성성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아버지의 딸'은 자신 속에 아버지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더 개별적인 정체성 수립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모린 머독의 『영웅의 딸』 중에서

 

엄마도 동생도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꼭 내게 물었다. 노인이 되면 고집쟁이 되기가 쉬운데 엄마는 내 말을 잘 들었다. 며느리와 관계에서 섭섭함을 토로하다가도 내 몇 마디에 금세 생각을 고치고 태도를 고치곤 했다. 엄마와 동생이 내게 물어올 때, 무심한 듯 응대하지만 조용히 마음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엄마나 동생이 겪는 일상의 어려움이 다 내 책임 같고, 해결해줘야 할 것 같았다. 과도한 책임감이다. 내 힘에 부치는 짐을 지고 평생 힘겹게 지내왔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아이러니하거나 신비롭게도 그 무게가 내 존재를 강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동일시되어 과도한 힘을 내어 살아온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 부끄럽고 극복하고 싶었던 모든 것이 나를 나 되게 만들었다. 차마 내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폴 투르니에 박사, 고아 대선배께서 그의 책에 먼저 썼으니 그의 입을 빌어본다.

 

고아라는 것은? 나는 항상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습니다. 폴 투르니에 『고통보다 깊은』 중에서

 

나를 형성한 것들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적당히,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책임감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다.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엄마의 딸로서, 아니 그 누구의 딸이 아닌 나로, 역할의 옷을 벗고 가볍게 살아갈 시간.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 마음의 위로  (0) 2020.07.07
몸이 슬프다고 말할 때  (0) 2020.06.11
고아 의식, 딸  (4) 2020.06.06
찔레꽃, 그리움의 노래들  (0) 2020.05.25
고아 의식, 아들  (0) 2020.05.20
어버이 날에_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2) 2020.05.08
  1. BlogIcon pratigya 2020.06.07 23:58 신고

    하나마나 한 말...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깊이 공감하고 정말 그런 말 더는 안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니의 모든 것..아름다워요...

    • BlogIcon larinari 2020.06.09 14:13 신고

      아냐, 그대는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존재가 말보다 앞서거든! 그대의 존재를 내가 아오 :)

  2. 2020.06.08 11:00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6.09 14:17 신고

      이런 메아리를 기다렸어요. 이 글을 계속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나말고 이런 누군가가 또 있어'라는 확신이거든요. 그 누군가에게 당신만 그런 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기도, 무엇보다 나만 이런 것 아니라는 그 말을 누군가에게 듣고 싶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드디어 들었네요. ^^

      이렇게 말씀 들으니 위로도 되고, 새롭게 마음이 무너지기도 해요. 아, 나도 그랬었지..... 우리 모두 잘 살아남아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어서 참 다행이에요. 특히나 좋은 남편에 좋은 아빠 되셨구요!

      사모님 형수님 이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전생에 잃어버린 남매였었잖아요. ㅎㅎㅎ 그곳의 시간들 곱게 마무리 하고 들어오셔서 뵈어요. (사모님 말로 형수님으로 가기로요!)

 

내 무의식에는 노래 주머니가 있다. 온갖 노래가 다 들어있고, 스치듯 지나는 자극에 툭툭 튀어나온다. 아이들 어릴 적엔 함께 하는 일상이 노래였다. 길 가다 민들레를 보면 바로 재생 버튼. "길가에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18개월 우리 채윤이 노랑 저고리,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우리 채윤이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놀이터에서 시소에 앉으면 "시소 시소 올라가면 푸른 하늘 내려오면 꽃동산 재미나는 시소" 언제 어디서든 노래가 튀어나왔다. 단어 하나, 스치는 장면 하나가 노래를 불러낸다. 직접 자극이 아니어도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찬송가도, 가요도, 팝송도, 가곡도 장르 불문으로 흘러나온다. 지금은 기능이 저하되긴 했지만 거의 모든 찬송가의 가사를 4절까지 외울 수 있고, 다른 장르의 노래 가사 암기력도 이에 준한다. 음악 치료사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는 운명이다.

 

남편과 양평 치유의 숲을 걸었다. 야생의 산길이었다. 숲은 곳곳이 노래 재생 버튼이 숨겨진 곳이다. 이제 내려가자 하고, 방향을 돌려 나오는데 갑자기 바짓가랑이 붙잡는 흰색 꽃 한 무더기. 찔레꽃이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꽃밭이 있었다. 가장 안쪽에 가장 큰 꽃나무가 담 쪽으로 기울어져 서있었는데 찔레꽃이었다. 장미, 나리꽃, 붓꽃, 작약, 백일홍, 샐비어, 달리아,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했다. 아침이면 아버지가 수돗물에 호스를 꽂아 꽃밭에 물을 주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어쩐지 그 꽃밭은 아버지 것 같았다. 한데 유일하게 찔레꽃은 엄마 소유로 기억이 된다. 나무가 커서 꽃을 많이 피웠는데, 꽃이 만개하면 가시 많은 그 찔레꽃을 꺾어 교회 강대상 옆에 꽂아놓곤 했다. 손재주가 없는 엄마가, 어떻게 어떻게 화병에 꽂아놓은 품새가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꽃꽂이와 엄마는 도대체 어울리는 조합도 아니다. 그래서 더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찔레꽃은 엄마다. 

 

찔레꽃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재생 버튼이 눌렸다. 실은 엄마 돌아가시고 내내 뱃속에서 울리고 있는 노래다. 아니다. 입원 후 엄마로부터 격리된(그렇다, 이제 생각하면 엄마가 아니라 내가 우리 엄마에게서 격리된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는 자나 깨나 그리움의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었다. 장례식 후 음원 사이트에서 이 노래를 부른 모든 가수를 검색해서 들었다. 같은 멜로디의 '가을밤'이 내겐 더 익숙한 노래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부르던 노래이기도 하다.

 

가을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잠 안오는 밤
기러기 울음 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어린 마음에 가사가 절절하게 와 닿았었다. 사실 난 분리불안이 있어서 엄마가 떼놓고 어디 가질 못했었는데. 장날 장 보러 가는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울고, 엄마는 오지 말라고 쫓고, 울며 따라가다 또 혼나고. 그랬던 기억이다. 늘 그리웠다. 사실 난 엄마보다 아버지를 좋아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어릴 적에도 그리 생각했었는데. 엄마 몸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랬었다. 그러니 초등 저학년 때부터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세'는 마음에 백 번 공감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부르는 아이였는데, 좋아하던 노래들이 꼭 다 저랬다. 초등학교 때 매년 학교 대항 예술제가 열렸다. 노래, 무용, 외에도 여러 분야가 있었다. 학교 대표로 군 교육청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 도 교육청 대항에 나가고, 거기서도 입상하면 예술제를 무대에 서게 되었다. 3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로 독창 부분에 출전하곤 했다. 지정곡 한 곡, 자유곡 한 곡을 불렀다. 5학년 때 자유곡이 '은행잎'이다. 독창 지도하시던 선생님 말씀이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 대회 준비를 하며 자유곡을 고르느라 이 곡 저 곡을 부르는 중이었다. 몇 곡을 부르다 이 노래 '은행잎'을 부르고 났더니 그러셨다. "야, 너는 참 애가 무슨.... 이런 노래를 이런 감성으로 부르냐. 너 참 감수성이..." 그때 감수성이란 말을 처음 배웠다.

 

은행잎

가을 바람 솔솔솔 불어오더니
은행 잎은 한 잎 두 잎 물들어져요
지난봄에 언니가 서울 가시며
은행잎이 물들면은 오신다더니 

 

어쩐지 이런 노래들이 좋고 잘 불러졌다. 부재, 상실, 그리움이 담긴 가사들이 어린 마음에 쏙쏙 들어왔다. '은행잎'을 불러 입상을 하고 6학년이 되었다. 다시 예술제를 준비할 때가 되었을 때 자유곡 선정을 위해 여러 곡 불러보지도 않았다. 내 노래로 한 곡을 정해서 가져오셨다. '아빠 생각'이었다. 잘 불렀고, 입상을 하고 다시 예술제 무대에 섰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유곡 선정을 잘못해서, 내가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가끔은 시차의 기억에 오류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일이 먼저고, 그 때문에 이 노래를 선택했던 거지!' 6학년 대회 이후로, 다음 해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이 노래 역시 늘 깔린 내 마음의 BGM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가 다시 그리워 아프다. 가슴이 쓰리다.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었던 어린 날의 내가 가엾어 가슴이 쓰리다.    

 

아빠 생각

봄이 오니 제비도 돌아왔건만
멀리 떠난 우리 아빠 언제나 오시나
기적소리가 울릴 때면 설레이는 이 마음
아아 우리 아빠 보고픈 우리 아빠

 

내가 사랑하던 모든 노래가 이렇듯 운명을 끌고온 것일까. 어쩌자고 나는 어릴 적부터 사무치는 그리움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엄마 떠난 지 70여 일이 지났다. 엄마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엄마가. 결국 나는 이렇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았구나. 엄마가 보고 싶다. 양평 숲에서 본 그 찔레꽃을 한 잎 따먹고 올 걸 그랬나. 꽃잎에서 엄마의 맛이 났을까. 엄마, 이렇게 말고  "엄마 엄마" 꼭 두 번을 부르고 싶다. 늘 마음에 울리는 저 노래 탓인가 보다. "엄마 엄마" 불러도, "엄마 엄마" 두 번을 다시 불러 네 번을 불러도 "와이야~" 하는 답이 없다. 엄마 엄마, 부를 때마다 휑하고 부는 찬바람에 마음만 아득해질 뿐이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이 슬프다고 말할 때  (0) 2020.06.11
고아 의식, 딸  (4) 2020.06.06
찔레꽃, 그리움의 노래들  (0) 2020.05.25
고아 의식, 아들  (0) 2020.05.20
어버이 날에_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2) 2020.05.08
고아 의식  (0) 2020.05.01

부모 없는 아이는 고아, '부모 없는 아이'라는 자기 인식은 고아 의식이다. 이승우 작가의 말을 다시 빌자면, 고아 의식은 남과 다르다는 의식이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 것이다. 즉, 고아 의식을 가진 아이는 고아가 아닌 척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내적 여정으로 마음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며 확신하는 바, 사람의 지나친 노력은 모두 고아 의식에 기인한다. 온전히 믿을만한 아버지와 엄마가 있다면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자로, 자기 자신이 되어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부모는 세상에 없다. 있는 그대로 사랑 받음을 기대하고 세상이 태어났는데, 그 기대는 생애 초기부터 어긋난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먹여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보듬어주는 부모는 없다. (라고 아이는 인식한다) 뭐라도 해야, 생존 욕구든 안전 욕구든 심지어 애정 욕구도 채워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고아 의식'이란 단지 부모 없음이 아니라 부모 없는 아이처럼 온전히 돌봄받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결핍감이다. 물리적으론 살아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부재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뼈를 깎아서 해 준 사랑을 셈하는 부모가 있다면, "아빠(엄마)가 준 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 억압이었어요. 아빠가 주고 싶은 걸 준 거잖아요. 엄마가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요. 내가 원했던 건 그게 아니라고요." 하며 울부짖는 아이가 있으니. 부모가 있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있어도 부재하는 부모의 존재가 상실의 시작이다. 돈, 일, 애정, 인정과 칭찬, 분노, 지식, 종교 등 어떤 것에든 중독되어 있는 미성숙한 존재라면, 진정한 의미의 어른으로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면 그의 자녀는 실존적 고아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실존적 고아이다.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지킬 힘을 키우려 할 것이다. 내 동생에게 자기를 지키는 힘은 그야말로 물리적인 힘. 그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동생보다 싸움(맞다, 주먹으로 치는 그 싸움이다)을 잘 하고 센 인간은 없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사춘기 시절부터 키가 쑥쑥 크고 어깨가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아버지처럼 기골이 장대해졌다. 강한 아이가 되었다. 싸워서 이기고, 동네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아이로 이름을 날리고, 소위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

 

아버지 없는 모든 아들이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빈 자리』라는 쓴 도널드 밀러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은 내 동생과 달랐다. 아버지를 대신할 권위자, 권위자의 인정과 칭찬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만난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빈자리라는 고백으로 쓴 책이다.

 

동생은 스스로 제 힘을 키웠다. 싸우고 이기고, 그 끝은 합의를 봐야 하고. 엄마와 함께(누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어린 엄마가 되어) 뒷수습을 했다. 경찰서에도 갔고, 합의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어쩐지 그리 힘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비행 청소년이란 느낌보다 그냥 죽이 잘 맞는, 밤늦도록 끝도 없이 얘기를 나누는 동생일 뿐이었다.  

 

비행 청소년이고 사고뭉치였지만, 역설적으로 엄마와 내겐 든든한 힘이 되기도 했다. 늙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 해도 주지 못한 안전을 동생이 보장해 주었다. 동네 골목에서 추행을 당해도 얼른 집에 있는 동생 불러내면 그 자리에서 속시원히 해결해 주었다. 집 앞에 와 진을 치고 밤새 기다리는 등, 스토킹 하던 동기 남자애를 정리해준 전설 같은 에피소드도 있다. 그렇게 줄줄이 딸려 나오는 해결사 역할 동생에 관한 기억이 많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생은 내게나 친척들에게, 제 친구들에게 해결사이다. 불의의 냄새를 맡는 잘 발달된 육감과 몸을 아끼지 않는 싸움꾼 기질을 결국 교회 개혁을 위해 불태웠으니, 엄마 말로 하면 '이게 다 주님의 은혜'다. 

 

모르지 않았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늙은 엄마와 약한 누나를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은 힘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음을. 그렇게 만들어진 동생의 사회적 자아의 빛과 그림자까지 다 안다고 생각했었다. 동생이 세 아들의 아빠가 되고, 아이들과 관계 맺는 것을 지켜보며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모르는 아픔이구나! 같은 아버지, 같은 엄마였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취약한 엄마를 경험하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구나. 동생의 고아 의식이 '힘'으로 보상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았고, 마음 공부를 한 이후에는 명확히 이름 붙일 수 있었지만. 그것이 안타깝고 가엾어서 마음을 많이 쏟았지만 닿을 수 없는 고유한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동생이 SNS에 올린 글이다. 

시민운동에 온 시간과 마음을 쏟던 시절, 어린 아내와 아기였던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그 일을 접고 재택 해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아빠 노릇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몸으로 놀아줬고 아내 대신 훈육을 담당했다. 큰아들 수현이가 학교에서 '우리 아빠 마음은요'라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충격이 되고 마음이 아팠다. 유독 내 자식에게만 엄격한 나를 반성하던 차에 애들 학교 <아빠 사랑 캠프>에서 아들에게 읽어 줄 편지를 쓰라고 했다. 쓰면서, 낭독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수현이 뿐 아니라, 어린 시절 운형이에게도 읽어 주고 싶다.
-----------------------------------------------------------------------------------
샬롬아~
아빠가 왜 수현이를 샬롬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름, 그러니까 태명이 바로 ‘샬롬’이야. 샬롬은 헤브라이어로 ‘평화’라는 뜻인데,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랑 같은 단어야. 아빠가 수현이 태명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네가 솔로몬처럼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야. 그 이름 뜻대로 네 인생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랐던 거지.

그런데 얼마 전에 아빠가 네 행복을 깨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 몇 주 전 수현이가 학교에서 활동한 ‘우리 가족의 마음 표현하기’를 봤단다. 아빠를 동물로 비유한다면? ‘사자’, 날씨로 표현하면? ‘태풍’, 맛으로 표현하다면? ‘맵다’. 모두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더라. 그날 밤, 수현이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 혼이 날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더라.

샬롬아! 미안하다. 아빠가 혼을 내면서 너무 심하게 화를 내는 건 잘못 한 것 같다. 아빠 본심은 그게 아닌데, 그저 우리 수현이를 바르게 키우려고 그런 건데 너에게 상처를 준 것 같구나. 아빠가 다른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고 좋은 아저씨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정작 아들인 너에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생각이 든단다.

한편으로는 네가 쓴 걸 보고 안심이 되기도 하더라. 아빠가 무섭기도 하지만, ‘부드럽고’ ‘원래는 착해서 진달래’ 같고, 너희들을 ‘사랑해서 빨간색’ 같다는 내용을 보고, ‘아 그래도 우리 아들이 아빠 마음을 알아주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아빠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아니? 아빠가 초등학교 4학년, 지금 네 나이 때였단다. 그때는 아버지가 없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었지.

할아버지는 살아계실 때에도 바쁘셔서 아빠와 시간을 보내신 적이 없단다. 여행을 갔던 추억도, 운동을 했던 적도 없어.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온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혼자서 터득했는데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안 계셨지. 수염이 자라고 나서 면도하는 법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어.

샬롬이가 태어나던 날, 왜 그런지 모르지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멈추지 않아 수건 한 장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단다.(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아빠는 그때 다짐했지. 우리 살롬이에게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목욕탕도 함께 가고,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같이 좋아해 주고, 면도하는 법도 알려 줄 거라고 말이야.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가? 윗집에 살던 아저씨가 술에 취해 우리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어. 그때 아빠는 무서워서 이불 속에 숨어 자는 척하고 있었단다. 그 이후로 ‘내 가족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결국 아빠는 이렇게 강한 사람이 되었지. 네가 감당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빠가 함께 해 주고 방패가 되어 줄게.

앞으로는 힘이 세고 강해서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든든한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사랑해.

2015년 11월 7일.
수현이의 샬롬과 행복을 바라는 아빠가.

 

조카들은 어느덧 사춘기에 진입했다. 강해서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든든한 아빠가 되고자 하는 결심은 아빠의 것이다. 아이들은 제게 느껴지는대로 느낀다. 게다가 사춘기이니 부모가 준 것보다 주지 않은 것에, 부모의 미덕보다 온갖 악덕만 보는 때이다. 힘이 세고 강해서 사자 같고 태풍 같은 아빠의 든든함이 아니라 그 이면을 느낄 것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기로 결심한 아빠의 서사을 이해할 수 없다. 아빠가 없었던 적이 없으니까. 죽음의 강이 덮쳐 기댈 언덕, 아니 발 디디던 지반이 그대로 무너져 없어지는 아침을 맞아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도 넥타이를 붙들고 쩔쩔 매면서 첫 양복 입는 그런 아침도 없을 것이다. 대신 태풍 같은 아빠의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기억할 것이다. 결핍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고아 의식은 대물림 된다. 

 

동생과 조카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우리 아이들과의 이야기이다. 고아인 채로, 또는 고아 의식을 가지고 부모가 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엄마 돌아가시고 "이제 진짜 고아가 됐네"라는 말이 몇 번 나왔다. 동생과 대화에서도 했던 것 같다. 아직 고아이다. 아직? 아직이라니. 여전히 고아이다. 이렇듯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내 안에서 아버지 잃은 아이가 우는 날이 있다. 가끔 생떼를 쓴다. 그러면 나는 고아인 그 아이의 울음에 압도되어 어른으로 있지 못한다. 내 아이와 동급이 되어 싸우고 상처를 준다. 어른이 되지 못한 엄마 앞에서 우리 아이들은 고아가 된다. 동생의 말처럼 따스한 말을 우리 딸, 아들에게 건네야 하며 어린 시절 나에게 건네야 한다. 동생은 제 자신에게, 어린 시절의 제게 약함을 허락해야 한다. 

 

고아라 부르고, 고아 의식에 이름 붙일 일이다. 이제 진짜 고아가 되었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아 의식, 딸  (4) 2020.06.06
찔레꽃, 그리움의 노래들  (0) 2020.05.25
고아 의식, 아들  (0) 2020.05.20
어버이 날에_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2) 2020.05.08
고아 의식  (0) 2020.05.01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  (0) 2020.04.20

 

교회 말씀 묵상을 나누는 밴드에 남편이 올린 글이다.

갈 곳 없는 어버이날에 기억이 감사가 되는 묵상이다.

'어버이 은혜 감사' 너머 '하나님 은혜 감사'로 멀리 높게 바라보게 된다. 

 

<5월 8일 금요일> “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김종필)

오늘의 말씀 : 열왕기하 4:1-7

한 남자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는 예언자 수련생이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사별과 가난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빚쟁이들이 두 아들을 노예 삼으려 합니다.
이 미망인의 고통과 슬픔의 무게가
갑자기 제게 전이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기름 한 병을 붙드시니,
빚도 갚고 생활비도 되고
아들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췄지만, 제 상상력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미망인의 남은 인생은 비록 가난과 고난이었지만,
두 아들은 착한 아내를 얻고
신임을 얻어 하나는 포도원 관리 책임자가 되고
하나는 아버지를 따라 예언자 수련과정을 거쳐 인정을 받습니다.
미망인의 생은 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숨결로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그녀는 많은 새벽을 바치고
모든 상황을 바치고
두 손 위에 올려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미망인이 받은 보상은 무엇이었을까요?
부와 권력은 아니었지만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기름 한 병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가난한 두 아들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하나님 품에 안기신 장모님이 생각납니다.
목사였던 남편을 갑작스럽게 잃고,
딸, 아들 둘 데리고 가난과 고난의 길로 들어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빈자리는 영예로운 믿음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를 생각하다
가난과 고난이 역전되어 은혜와 영예가 된 장모님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버이날, 이제는 카네이션을 드리지 못하지만,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려드립니다.

주님, 미망인에게 부어주신 기름 한 병의 은혜와 긍휼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이우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1. BlogIcon pratigya 2020.05.12 17:50 신고

    아멘...
    잔잔하게 깊은 위로를 주시네요...

    • BlogIcon larinari 2020.05.13 09:27 신고

      그러게. 위로가 되더라. 남편의 입을 통해 듣는 엄마, 사위의 가슴에 남은 장모님 이야기에 MSG가 없어서 더 깊이 다가와.

탁월한 예술가 가운데 고아가 많다고 한다. 보를레르, 카뮈, 사르트르, 도스토예프스키, 단테, 볼테르, 스탕달……. 창조성의 기원이 결핍과 상처라고 말하는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지지하는 예이다.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많은 작가들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인터뷰나 글을 통해 밝히는 작가들의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표현이 다를 뿐 '결핍감'이다. 이승우 작가는 개인적 경험의 영역을 참고할 때 글쓰기의 기원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프다'라고 밝혔다. 아파서 글을 썼고,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파서' 쓰기 시작한 자신에 비추어 고아 또는 고아 의식과 창조성의 관계를 유추한다.

 

고아 의식

 

이 언표가 나의 어떤 부분에 이름을 주었다. 고아 의식의 내용은 '나는 남과 다르다'인데 이 '다름'은 주장하고 드러낼 수 없는 다름이라는 것이다. 내 말로 하자면 '부끄러운 다름'이기에 숨겨야 하는 것이고, 고아가 아닌 척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도의 작업이다. 이승우 작가는 흉내 내기의 체질화가 창작 능력의 비밀이라고 추정한다. '~척' 하고 흉내를 내다 실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창작 능력이 되는 것 아니겠냐고 한다. 이 부분은 어쩐지 비약인 듯싶고, 수긍이 되지 않는다. 소설가로서 지난한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겠으니 내가 모를 창작의 세계이겠지. 분명한 것은 고아 의식,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자의식이 나로 하여금 쓰게 했고, 여전히 쓰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방송 촬영을 하나 했다. 엄마 장례 마치고 바로 써서 보낸 기고문으로 심적 타격을 입은 터라 뭐든 새로운 일을 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었는데. 몇 번 안 되는 방송 출연 중에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프로그램 작가님 추천이라니 안심이 되고, 주제도 진행방식도 부담이 없을 듯하여 수락했다. 방송에 임박하여 작가 인터뷰를 하는데 사이다 없이 고구마를 계속 입에 넣는 느낌이었다. 당일 방송 주제가 분명히 있는데 말을 할수록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답답했다. 게다가 임팩트 있는 간증이나 일화를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괜히 수락했구나 싶었다. 역시 아직 활동할 때가 아니었는데 싶었고. 취소하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다. 출연자가 여럿이니 내가 망한다고 프로그램이 망하는 건 아니겠지, 며칠 이불킥 할 각오로 비워지지 않는 마음을 비웠다. 대본 없는 토크 방송이니 가서 나오는 말을 하자. 

 

할 수 있는 이야기, 내 이야기를 했다. 일상의 작은 실천이란 주제에 따라 '일기 쓰기' 얘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죽음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상의 작은 실천'이라는 도덕 한 스푼의 말랑한 주제에 죽음을 얘기하려니 뜬금없는 것 같았다. 작은 실천이라니! '실천'이라면 어떤 도덕적 의지의 발로일 텐데 나의 일기 쓰기 시작엔 어떤 의식이나 의지가 없었다. 의지가 있다면 생존 의지였을까. 아마 간증 프로그램에 나갈 때마다 생기는 내적 버성김은 실존과 실천 그 사이일 것이다. 처절한 실존을 실천의 덕목으로 쉽고 간단하게 언어화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러기 싫음. 그런데 아무튼 눈물 없이 담담하게, 농담도 하면서 일기 쓰기와 치유, 쓰기를 통해 나다워지는 이야기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내놓을 수 있었다.

 

진행자였던 추상미 씨의 이야기가 연결되었다. 뉴스로 본 기억으론 한참 컸을 때가 아닐까 싶었는데, 아버지 추송웅 님을 잃은 때가 열네 살이라고 한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동일시 하던 딸이라는 면에서 비슷했다. 재난 같은 아버지 상실을 내가 '쓰기'로 채웠다면 자신을 읽었다고. 친구들이 하이틴 로맨스를 읽을 때 <죄와 벌> 같은 인간 실존을 묻는 소설을 읽었다고. 끝없이 읽었다고. 짧은 한두 마디 말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지는 연결이었다. 어쩌면 그도 결핍, 상실감, 고아 의식 때문에 읽고, 또 일고, 고뇌하다 배우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연기와 작품에는 고아 의식에 기인하는 창의성이 담겨 있을 것이다. 

 

고아가 아닌 척 하는 것이 체질화가 되어 결국 실감 나는 창조성 있는 작품을 쓰게 된다는 이승우 작가와의 추론이 어쩐지 내겐 딱 들어맞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척'을 하느냐 무의식적으로 그러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고아가 아닌 척'을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했다.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첫 등교하던 날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 어느 날 아침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교실에 들어섰고, 아마도 다른 날보다 더 심하게 장난을 치고 깔깔거렸을 것이다. 장례 며칠 동안 고아 의식이 빠르게, 뚜렷하게 각인된 탓에 고아처럼 보이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다. 고아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밝고, 당차고, 칙칙하지 않게, 가엾어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밤이 와 혼자가 되면 비로소 '고아 의식'이 아니라 '고아'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를 부르는 일이 일기 쓰는 일이었다. 눈물로 일기장을 적시며 썼다. 그래야만 다시 아침이 왔을 때 하나도 슬프지 않은 말짱한 얼굴로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굴지 않을 수 있었다.

 

고아 의식, 고아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살았던 건 아닐까. 아버지가 없어서 부끄러웠고,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들킬까 더 부끄러웠다. 작년 아버지 추도식 마치고 일부러 찾아간 고향에서 그 모든 부끄러움이 나를 만들어 왔다는 것을 비로소 받아들였다. 아무리 '척'을 해도 죽었던 아버지가 살아오지 않고, 다시 아버지 있는 사랑받는 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썼는지 모르겠다.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는 것, 수치심이 나를 이끌어 오늘의 내가 되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피하지 않고, 의식하고, 애쓰고, 애쓰다 분열적이 되고, 더 깊이 상처 받으면서 말이다.

 

연구소 연구원 모임에서 책 한 권을 진하게 읽었다. 자신의 중독을 고백하며 시작하여 중독의 근원인 결핍감을 만나고, 결핍감이 가진 내 고유의 '천재성'에 눈을 뜨고 그 끝에 (역시 내 고유의)'봉인된 명령'이라 이름 하는 소명을 더듬어 보았다. 세 저자 중 한 사람이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에 매여 이런저런 중독(특히 종교중독)의 삶을 살다 치유자로 사는 오늘을 고백하며 말한다.

 

나는 상처 치유에 관한 열 권의 책을 공동으로 집필했다. 그것들은 주로 슬픔, 곧 내가 직접 경험한 많은 치유를 다루고 있다. 내용뿐만 아니라, 글 쓰는 것에 대한 나의 재능도 존(동생)의 죽음에 대한 상처에서 왔다. 나는 내가 아주 불안전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내가 이야기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썼고, 얼마 되지 않아 쓰는 것에 익숙하게 되었다. 나는 존의 죽음을 대면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선물을 발달시켰다.  『치유와 회복의 끈 소속감』 p 200

 

나 역시 그러하다. 아버지의 죽음, 고아 의식을 대면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선물을 발달시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아 의식, 상처를 초월한 '나'는 없다. 초월할 수 없다. 이 땅에 사는 한은 이 고아 의식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고 이것이 '나'이며 나의 소명이고, 내가 발견한 은총의 선물이다. 결핍이지만 은총인 나를 안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다 결국 끝에 다다를 것이다. 그 끝에서 만날 것이다. 고아 의식, 결핍과 상처, 수치심을 모두 씻은 듯 초월한 이들을. 망가진 몸에서 해방된 엄마가, 무너진 정신에서 자유로워진 예원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영혼으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 예원이가 지난주 갑자기 떠났다. 아직 믿어지지 않고 믿고 싶지 않다. 오직 지금 내게 또렷한 것은 호기심과 연민으로 반짝이던 그 눈망울뿐이다.)

 

  

 

 

 

 

40일이다. 40일, 한 달, 21일. 이런 시간을 문득 인식하곤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애도일기를 쓰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그 40일은 아침, 저녁, 하루, 이틀로 분절되지 않는 한 뭉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21일째 아침, 한 달 되던 아침은 조금 달랐던 것도 같고 오늘 아침도 그렇다. 괜히 21일, 한 달, 40일이 아닌가 보다. 며칠이 지났지? 날을 세는 때는 나로부터 한 걸음 빠져나올 때니까 말이다. 한 걸음씩 물러나 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아침엔 엄마 떠나고 읽었던 책을 모아봤다. 노트북 옆에 쌓여 있거나 침대나 소파 옆 탁자에 굴러다니던 것들이다. 기념사진 한 장 찍고 책꽂이에 꽂으려 한다. 

 

깨어 있는 시간이 고통스러울 때, 가장 좋은 진통제는 책이다. 책조차 읽을 수 없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동굴 속 40여 일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활자 덕분이다. 읽을 수 있었고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고 특권인가. '애도'를 다룬 여러 책을 읽었다. 이미 읽었던 것을 다시 읽기도, 새로 주문한 책도 있다. 세상의 모든 애도를 다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며칠은 미친 듯이 읽어댔다. 공부로 읽던 때와는 비할 수 없는 공감이었다. 나를 통과한 읽기란 이런 것이다. 정신분석 이론으로 복잡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설명'하는 내용조차 위로가 되었다. "이게 이런 말이었구나!" 비로소 알아듣게 된 문장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두 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한 인생 책으로 남을 것 같다.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와 스에모리 지에코의 에세이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이다. 이전에 읽었던 왕은철의 『애도예찬』에서 추천받은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나도 모르게 주문해 읽게 되었다. 무엇엔가 홀린 듯 선택한 것 같다. 아니, 선택되었는지 모른다. 읽는 내내 죽음이란 죽음을 다 찾아다니는 주인공 시즈토의 애도가 우리 엄마에게까지 닿을 것 같은 희망, 아니 이미 닿아 연결된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깊은 위로였다. 소설 한 권이 가장 어두운 시간을 버티는 촛불 하나가 되었다. 엄마 장례 후 처음으로 혼자 산책 나간 날이었다. 하염없이 걷다 지하철역 근처 성바오로 서점에 끌리듯 들어갔다. 막 나온 신간의 표지가 예뻐서 집어 들었다. 그대로 머리말과 몇 편의 글을 읽었다. 결혼 생활 11년 만에 갑자기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고이 키우는 중 아들이 사고 후 불치의 병을 얻고, 55세에 재혼한 철학자 남편은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고 있고 뇌출혈로 언어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이런 사람이 쓴 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긍정적이고, 언어가 곱다. 평소 같으면 선택하지 않았을 책이다. 나는 엄마가 "부활을 믿네 못 믿네" 하며 분노와 냉소를 오가는 중이었다.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지만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상실, 상실'들'을 이렇듯 순화된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고? 깊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소망으로? 묘한 끌림과 거부감이 함께 일렁였다. 그래서 샀다.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이며 그림책을 편집하는 저자의 앞에 서니 기복 심한 내 감정과 얕고 경박한 내 믿음이 보여 작아지기만 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내가 참 멀리 왔구나, 착한 믿음과 순한 언어를 너무도 많이 잃었구나...... 당장 이런 나를 내가 품고 가는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나도 절제된 언어로 이 시간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일기 쓰기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때로부터 시작한 '쓰기'가 나를 나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때의 '쓰기'는 뭐가 뭔지 모르는 쓰기였다. 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사라진 세상의 부조리를 유치한 질문으로 쓰고 또 쓴 것이다. 낮에는 그 무엇도 잃지 않은 아이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이처럼 쾌활한 웃음으로 살고 밤에는 울며 불며 쓰고 또 썼다. 어린애가 살자고 선택한 방식이라니, 얼마나 안쓰러운가. 아니 그것이 '쓰기'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아버지를 잃은 열세 살엔 뭘 모르고 썼다. 나는 뭘 모르고 글이 나를 썼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떠나보낸 나는 열세 살이 아니라 쉰둘이고, '치유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리님'(글쓰기 등 치유모임에서 쓰는 내 별칭)이다. 상실과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발설의 힘을 안다. 소름 끼치도록 경험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것이다. 뿌득 뿌득 포기하지 않고 쓰는 것이다. 엄마 떠난 40일, 그 어떤 생산적인 활동 없이 좀비 같은 날을 살지만 한 편씩 써내는 것에 사는 의미를 두고 쓰는 것이다. 처음 글쓰기가 상실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이었다면 나는 이제 충분히 의식화되어 나의 이야기를 쓰는,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작가이다.

 

이 글들의 시작은 나를 위한 것, 숨쉬기 위한 인공호흡의 행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에 세우는 존재들이 생겨났다. 엄마를, 아버지를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고 어정쩡하게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은 저도 그랬어요, 실은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그렇게 느낄 수도 있었던 건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뒤늦게 감정이 올라와요......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나는 아버지 죽음을 글로 풀어내게 되었고, 평생 그 상실의 경험을 쓰고 또 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내 생애 가장 부끄럽고 극복하고 싶었던 아버지 부재가 결국 나를 만들었고, 나를 구축하는 힘은 '언어'였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엄마를 잃은 사람, 아버지 없는 사람인데 쓸 수 있는 내가 써야겠다. 나라도 얘기해야겠다. 아버지 잃는 것이 엄마를 잃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고, 그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지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고 말해야겠다. 빨리 정상화되지 않았어도 된다고, 당분간 미친년이었어도 된다고, 이제라도 얼어붙은 감정 몇 조각 녹여내는 것이 좋다고 떠벌이고 싶다. 내 안에 아직 다 울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고 허용해주며 나와 연결된 당신에게도 그러자 하고 싶다.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게 과분한 행운이다. 아버지 죽음의 상실감으로 인생 자체가 실존적 피해의식 덩어리이다. 정희진의 말처럼 글쓰는 사람에게 '상처'는 권력이라고, 그 상실이 내게 힘이 되었으니 이 역시 남다른 행운이다. 상실의 역설이다. 그러니 나도 감사하려고 한다.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의 저자의 곱고 맑은 감사와 긍정은 없지만 너덜너덜하고 거친 언어로 빚는 감사가 있다. 스에모리 치에코, 그녀에게 언어가 빛나는 비밀인 것처럼 내게도 나름대로 소중한 비밀이다. 내 나름의 언어로 조금 더 쓰겠다. 아버지의 부재, 엄마의 죽음과 (권력이 된) 내 상실과 상처를 조금 더 쓰려고 한다. 쉰둘의 내가 열세 살 나와 손을 맞잡고 쓰는 거다. 더는 쓰고 싶지 않을 때까지 쓰고, 발설하도록 같이 가보려 한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버이 날에_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2) 2020.05.08
고아 의식  (0) 2020.05.01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  (0) 2020.04.20
영예로운 퇴장 : 육 남매의 엄마  (2) 2020.04.19
허무의 강, 떠오르는 것들  (0) 2020.04.17
연결  (2) 2020.04.16

이제는, 이제야 엄마의 장례식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애도일기를 시작한 이유는 엄마의 영예로운 장례식 얘길 잘하고 싶어서였다.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평생 마음으로 엄마의 장례식을 준비해왔다고 하지만 정작 준비된 것은 없었다. 죽음은 또다시 예고 없는 재난으로 밀어닥쳤다. 겪어보지 않은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정신 차리고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없었다. 빈소를 차리지 않는 가족장으로 결정한 것은 단지 코로나 때문이 아니었다. 코로나를 코로나로 부르느냐, 우한 폐렴으로 부르느냐는 가족 안에서도 입장이 달랐고 그 차이가 갈등이 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해놓고도 설마 그리 빨리, 코로나도 끝나기 전에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발인예배만 드리기로 했다. 가족끼리 드리되 교우들과 친척들 중 정말 아쉬운 분들께는 열어두기로 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오직 주일 11 예배를 기준으로 지남력을 유지했던 엄마. 엄마의 뜻을 받들자면 함께 예배했고 엄마를 사랑했던 교우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목사님 두 분과 교인 서너 분을 초대하고 예배를 부탁드렸다. 입관식 후 바로 발인예배를 드리고 화장장으로 가기로. 다른 준비는 없었다. 새벽 6시, 엄마를 안치하고 그날 하루를 '이게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멍하니 지냈다. 동생 집에서 돌아와 밤에 앉았는데 이대로 엄마를 보내다니...... 싶었는지 나도 모르게 말이 툭 나왔다. "나 내일 예배에 특송 부를래. 떠나서 다다른 사랑, 그거 부를게. 채윤아 MR 준비해줘" 남편과 채윤이 동시에 말린다. "부를 수 있겠어?"란다. 실은 나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이 아니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을 뿐. 한 소절도 못 부를 거라며 가족들이 만류하는데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나 불러볼게, 안 울고 불러볼게, 나한테 힘을 줘."

 

입관식과 발인예배에 사촌 언니 오빠들이 거의 오셨다. 엄마의 특별한 동생 삼촌과 막내 이모까지. 특송 부르기 전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말씀 드렸다. 끝까지 명료한 의식, 마지막까지 외우고 붙들고 있었던 시편 23편의 말씀을. 특히 동생 전화로 엄마와 함께 찬송 부를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말을 하다 보니, 하고 보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임종을 지키진 못했고, 엄마의 마지막 시간 격리된 채 외롭게 보내드린 것이 아쉽고 아쉽지만 전화기 붙들고 찬송 부른 시간이 선물이었구나! 돌아보니 그러했다. 엄마 귀에 잘 들리게 노래를 크게 불러야겠고, 노래와 함께 울음소리도 커져 통곡이 되니 식구들 걱정 끼칠까 걱정되고. 구석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부르던 찬송들. 엄마, 동생, 나의 마지막 시간을 연결시켰구나! 그 순간은 내장이 끊어지도록 아프고 안타깝기만 했는데, 그렇게 절절하게 연결되었었다.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로 그 얘길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리고 바로 엄마가 부르는 찬송이 예배당 공간에 울려 퍼진다. '예에수 사랑허심은...... 날 사랑허심 승경이 쓰셨네' 엄마의 노래를 받아서 내가 부른다.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힘을 내서 존재를 부풀리고 섰다. 나는 어른이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는 열세 살 어린애가 아니야. 울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불렀다. 내 노래가 끝나고, 바로 엄마 육성의 시편 23편이 울려퍼진다. 

 

예배를 마치자 동생이 앞으로 나왔다. 감사 인사와 이후 일정 안내를 하려는 거겠지. 예배 시작하자마자 내 뒤에서 누군가 주체하지 못하는 울음을 울었다. 안 봐도 동생이었다. 앞에 나와 마이크 잡았는데 표정이 환하고 여유롭다.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엄마 얘길 하며 몇 번 웃음을 유발하더니 "오늘 목사님 말씀을 듣고 혼란스러운 분들이 계실 겁니다. 목사님께서 아까 저희 형제를 6남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어, 남매 아닌가? 목사님이 잘못 아셨나? 하셨죠. 그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며 생각지 못한 얘길 꺼냈다. 6남매의 진실을 더듬어 가는 것은 그대로 엄마의 신산한 삶이었다.

 

열아홉에 결혼 한 엄마는 아들 둘을 낳자마자 남편을 잃었다. 친정살이를 하며 두 아들을 홀로 키웠다. 두 오빠들 장성하여 대학을 졸업한 이후 우리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북에서 월남한 홀아비 목사였고, 엄마가 다니던 교회로 부임했다. 그렇게 아주 늦은 나이에 아버지를 만나 동생과 나를 낳았다. 여기까지 4남매다. 엄마와 아버지가 각각 수양아들, 수양딸을 삼아 키운 오빠와 언니가 있다. 그래서 6남매다. 어릴 적부터 가족소개를 할 때 남매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늘 곤란했던 기억. 어, 오빠들과 왜 성이 다 다르지? 했던 기억. 이런 가족사 역시 어린 내게는 부끄러움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부끄러움보다는 복잡한 책임감이 앞섰던 것도 같다. 마이크 잡은 동생이 엄마의 인생을 6남매 키워드로 풀면서 모두 인사를 시켰다. 이 부분, 그 순간에도 그러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짧은 장례식 중에도 2, 4, 6남매로 정리되지 않는 혼란과 곤란이 있었다. 입관식 중에 '장남, 상주 나오세요' 하면 모두 큰오빠를 보고, 큰오빠는 동생에게 손짓을 하고. 우리에겐 익숙한 상황이라 순간순간 넘길 수 있는 정도의 혼란과 곤란이긴 하다. 그럼에도 동생의 소개와 인사로 모든 것이 당당해졌다. 엄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함으로 몸을 움츠리는 오빠와 언니들까지 한 형제자매로 환대하는 시간이 되었다. 영정 속 엄마의 어정쩡한 표정이 '웃는 얼굴'로 보였다. 

 

엄마 장례식을 상상할 때 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장례식 안내 모니터에 형제들 이름이 뜰 때 어떨까? 내 지인들 중엔 '남매'로만 아는 사람도 있는데. 자녀들의 성(姓)은 각각 다 명기해야 할까? 큰 걱정은 아니었으나 소소한 곤란함이었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는 더 큰 마음의 짐이었을 것이다. 평생 품고 산 곤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당신의 인생을 복기하고 또 복기하는 것 같았다. 어릴 적에 내가  아팠던 얘기, 아버지 돌아가시고 막막했던 얘기, 결론은 늘 기도로 고난을 이겨냈다는 것이지만. 같은 얘기 하고 또 하는 게 귀찮아 나는 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정리하던 엄마에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겠는가. 어느 날 단둘이 있을 때 엄마가 그랬다. "내가 두 아들한티 너머 미안허다. 그때는 젊고 은혜도 받기 전이고 너머 많이 때리고 쌀쌀맞게 키웠어. 어트케 그렇게 모질게 키웠을꼬......"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남매, 사 남매, 육 남매 엄마로서의 인생은 어떤 것일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엄마도 혼자 걱정했을지 모르겠다. 매끈하지 못할 남매, 사남매, 육 남매 엄마인 당신 장례식을. 헌데 동생의 따뜻한 소개와 인사로 우리 모두 당당해졌다. 엄마가 남긴 우리가 모두 당당해지며 누구보다 엄마가 영예로워졌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엄마, 엄마 인생에 부끄러움이란 없어! 

 

아버지 장례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장례식 주변 어느 구석에서 찔찔 울던 남매, 누구 하나 따뜻하게 돌봐주는 어른이 없었다. 다들 조용히 "아이고 불쌍해라" 혀를 끌끌 찼겠지. 기껏 들은 말은 "울지 마라,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느냐"였고. 그랬던 남매가 어른이 되어 엄마 장례식의 주체가 되었다. 형식적인 상주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순간순간 화평을 이루는 선택을 했다. 무엇보다 엄마를 영예롭게 보내드렸다.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이 감동적인 후기를 전해온다.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생애 가장 감동적인 장례식이었다.' 나의 지인들에겐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해서, 우리 엄마의 영예로운 장례식을 자랑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육 남매의 엄마, 사 남매의 엄마, 남매의 엄마, 내 엄마.

내 엄마의 떠나는 길이 아름다웠다. 살아온 날들의 열매이며 보상이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아 의식  (0) 2020.05.01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  (0) 2020.04.20
영예로운 퇴장 : 육 남매의 엄마  (2) 2020.04.19
허무의 강, 떠오르는 것들  (0) 2020.04.17
연결  (2) 2020.04.16
분노를 위한 시간  (0) 2020.04.14
  1. BlogIcon pratigya 2020.04.21 02:49 신고

    아팠던 한 시대를 안아주고 가신 어머니 덕분에 저도 글을 쓰고 있네요. 언니..정말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너무 감사해요. 이 힘든 길을 멈추지 않고 와주셔서요..

몇 년을 두고 언제 접나, 언제 접나 하던 일을 접었다. 키보드며 무거운 악기를 들고 옮겨 다니는 프리랜서 음악치료사 생활이 15년쯤 된 것 같다. 차츰 일을 줄이고 있었고, 4년 전쯤에는 그 해를 끝으로 그만 둘 생각이었다. 가족 상황이 달라지며 하던 일들을 계속해야 했다. 계속할 뿐 아니라 더 일을 늘려야 할 상황. 악기 무게에 더해 심리적인 부담을 더 떠안는 선택을 했다. 시작부터 돕고 관여했던 한 기관에 급여 인상을 요청했다. 아이들 교육 외에 다른 일을 더 할 테니 급여를 올려달라고 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부탁이었고,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당시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몇 년 그렇게 유지해왔다.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 들었어야 했는데 무리를 하니 다음 해 오십견이 와서 고생을 했다. 오십견 지나가니 테니스 엘보라는 팔꿈치 쪽 질환이 오고. 결국 작년까지의 계약을 마지막으로 치료교육을 접기로 했다. 한 곳만 남기고! 가장 먼저 정리하고 싶은 곳이었으나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엄마 장례식 마치고 바로 수업 계획을 의논하다 그만둘 마음이 생겼다. 급여 인상 이후 몇 년 동안 미세하게 쌓인 서러움이 복받쳤다. 대놓고 갑-을이 되진 않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사이였지만 어쩐지 늘 찜찜한 감정이 남곤 했었다. 다시 그런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사무쳤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살지, 하는 짧은 질문이 스치면서 빠르게 결정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살지? 의미를 묻는 질문이 올라올 때가 있다.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요일과 일정에 따라 정해진 일을 하며 산다.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자발적으로 선택해온 오늘이기에 큰 불만이 없다. 잘 굴러가는 일상이다. 그런데 잘 굴러가는 일상의 바퀴에 '무의미'의 작은 막대기가 하나 끼면 덜그럭거리거나 잠시 멈춰 서기도 한다. 혼자 걷는 중,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특별한 이유 없이 허무의 바람이 불 때가 있었다. "이게 사는 건가? 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본향이 그리워요, 주님!" 하지만 웬만하면 일상은 다시 굴러간다. 잠시 멈춰 서게 했던 무의미의 막대기는 굴러가는 바퀴의 힘에 휙 날아가고 만다. 일상의 바퀴는 웬만하면 굴러가는 관성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 텅 빈 공허 속으로 무의미의 강물이 들이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이게 사는 건가? 의미가 찾아지지 않아도 관성을 따라 그럭저럭 흐르던 일상을 거스르는 강한 물살이 밀려오는 것이다. 허무의 강물이 밀려와 내 몸 하나 부지할 수 없을 때, 그간 붙들고 막아내고 견뎌내던 것들이 마구 떠오른다. 무의미라는 실존의 압력을 견디며 몸으로 누르고 있던 튜브공들이 무력하게 떠오른다. 어쩌어찌 견뎠던 것들이 더는 참아지지 않는다. 꽉 쥔 손에 힘이 빠지면서 하염없이 위로 떠오른다. 그렇게 떠오른 것들을 뜰채로 건져내 싹 갖다 버리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들이 남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몇 년을 두고 그만둬야 하는데, 이러다 몸이 완전 망가질 텐데, 하다 또 허접한 이유를 찾아 나를 설득해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는 나를 설득할 수 없게 되었다. 버티기 위해 온갖 좋은 이유를 갖다 댔지만 실은 나를 착취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포장하기 위해 애쓸수록 자기 연민에 빠지고, 남모르는 분노를 독처럼 몸에 쌓게 된다.

 

그러니 가끔 만나는 무의미의 강, 허무의 강은 나를 나답게 하는 기회인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남편은 평생 해보지 않은 선택을 했었다. 결혼 후 한참 만에 신학교에 간 것은 평생 꿈꾸던 소명에 따르는 일이었다. 신학교를 마치고 한 3년 전임 목회를 하면서 인생 가장 행복한 시간,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비참한 시간을 보냈다. 평생 꿈꾸던 삶, 목회라는 이름으로 청년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행복했지만 그것은 목회자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평생 꿈꾸던 '행복'에 방점을 찍고 많은 부조리한 것들을 견뎌내고 있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사임을 결정했다. 젊은 날부터 다니며 교회의 희망을 보았던 곳이고, 우리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던 곳이다. 그런 곳을 떠나겠다고 결단했다. 단지 교회를 사임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 자체를 접겠다는 선택이었다. 목회자의 삶이 이런 것이라면, 그만두겠다는 생각이었다. 다음 행보는 백수, 이런 선택을 했다. 아버님이 떠나시고 남편 가슴에 밀려오는 허무의 강이 이끈 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 극적인 사건들이 있었고 결국 지금까지 목회를 지속하고 있다.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 인생에 길이 남을 선택이다. 선택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 아빠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애쓰며 살고 있다. 많은 것들이 버겁지만 다 의미가 있으니까 견딘다. 불편한 관계를 웃으며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상처주는 사람을 내치지 못하고 둔다. 내 몸이 다 부서져도 가족을 위하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견딘다. 다 의미가 있으니까. 가끔 허무의 강이 들이닥칠 필요가 있다. 그 모든 '의미'들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무게를 달아보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회피하지 않는 것이 먼저다. 그 강물을 온몸으로 맞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일 것이다. 공허와 허무에 오롯이 머물러야 한다.

 

엄마가 떠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확인되는 것은 빈자리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다. 이 코로나 사태가 더욱 그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일로 도피할 수도, 사람을 만날 수도, 맘 편히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그저 여기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 보니 많은 것들이 의미의 무게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조금 충동적인 결정이긴 했지만 마지막 남은 음악수업을 접은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속이 후련하다.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이 남긴 실존적 물음 앞에서 얻은 소중한 답이다.

 

그러고 보면 나이 50의 중년, 그때 맞는 부모의 죽음이란 기가 막힌 인생 타이밍이다. 하나님의 작품일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죽음이 허무의 강물로 밀려온다. 우리는 삶을 묻는다. 삶의 의미를 묻는다. 중년은 원래 그런 질문을 하는 시기이다. "내가 뭐하고 산 거지? 그렇게 애써서 가르쳐 놨더니 이 자식들이 지 혼자 큰 줄 아네. 내 인생은 뭐야?" 빈둥지 증후군으로 방황하는 시기이다. 카를 융을 비롯한 심리학자와 영성가들이 중년의 위기는 영적인 기회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뭐하고 산 거야? 묻는 그 시기에 만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너 앞으로 어떤 의미를 건지며 살래?' 영적 초대장을 받는 것이다.

 

인생은 원래 그렇게 허무한 것이었어, 이제껏 소중하게 여겨온 것들을 허무의 강에 한 번 띄워 봐, 가벼워 떠오르는 것들은 죄 건져 던져버려, 영원한 것만 붙들고 사는 것 어때?  

이런 초대가 아닐까. 상실과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회복과 치유란 그 경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로 인한 깊은 상실감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회복과 치유란 그 경험을 안고 '어떤 새로운 자리로 가서 사느냐'라고 한다. 충분히 준비되었다 자부했지만 막상 엄마가 떠난 시간은 예상과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나도 엄마를 떠나보내기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씻겨지지 않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게 되겠지. 그저 그렇게 무의미한 슬픔을 안고 살고 싶지 않다. 엄마 잃은 빈자리에 자주 생의 의미를 달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가볍게 버려질 것이라면 기꺼이 내던져 버릴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시작은 좋다. 이제 그 무거운 키보드와 악기들을 처분하는 일만 남았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  (0) 2020.04.20
영예로운 퇴장 : 육 남매의 엄마  (2) 2020.04.19
허무의 강, 떠오르는 것들  (0) 2020.04.17
연결  (2) 2020.04.16
분노를 위한 시간  (0) 2020.04.14
창피했던 엄마, 창피한 나  (0) 2020.04.11

 

 

"엄마, 외할머니 장례식 예배 말이야. 참 좋았어. 나도 많이 울었어. 그런데 엄마한테 이런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나 실은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더 났어."

 

현승이의 말이다. 현승이에겐 엄마 같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누구보다 상실감이 컸을 텐데 얼음처럼 그대로 얼어버렸었다. 울지도 않고 멍한 표정으로 장례식장을 빙빙 돌았다. 이후에도 슬픔, 그리움, 그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나도 "할아버지 얼굴이 생각이 안 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어느 날 마트의 장난감 코너에서 가만 서있는 현승일 봤다. 늘 하던 장난감 구경이 아니었다. 어느 할아버지와 아이였다.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장난감을 사주시는 모양. 물끄러미 서서 바라보고 있는 현승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엄마가 안 사주는 장난감 대신 사주시던 할아버지, 현승에게 흔하디 흔한 일, 장면이었다. 나는 아이 마음을 알겠는데, 할아버지 얘긴 거의 꺼내는 일이 없었다. 그랬던 현승이가 처음으로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단다. 그리고 내게 미안해했다. 

 

당연히 괜찮다고 말해줬다. "엄마도 외할머니만 보고싶은 게 아니라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현승이처럼 할아버지도 보고 싶어 눈물이 나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모든 죽음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어쩌면 모두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건 현승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리움, 사랑 같은 거라고 말해줬다. 

 

어릴 적 엄마를 잃은 청년이 있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다. 엄마 장례식 마치고 위로하는 메시지가 왔다. 특별히 위로가 되었다. "이제 나도 엄마 없는 사람이니까 더 친하게 지내자"라고 답신을 보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엄마 없는 존재가 된다. 모두가 가야 할 길이다. 그 점에서 공평하다. 공통점이 있을 때 우리는 연결되었다고 느끼고 더 많이 안도하게 된다. 모든 죽음은 연결되어 있고, 죽음은 우리를 연결시킨다.

 

지난 월요일에 전주에 다녀왔다. 캐나다에서 몇 년 지내고 온 남편의 벗, 내게도 좋은 벗인 부부와 그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전 날 저녁에 갑자기 약속을 잡았다. 아침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친구들 단톡방에 부고가 올라왔다.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조문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데 장례식장이 전주다. 이런 뭉클한 우연이라니! 잠시 가서 친구를 보고 왔다. 텅 빈 빈소를 지키던 친구가 첫 조문객이라며 반가워한다. 길지 않은 시간 마주 보고 눈물 글썽이며 얘기 나눴다. 어머니를 7년 전에 먼저 보내드렸다며, 어머니 얘기로 또 눈물이다. 실은 사이가 서먹했던 친구이다. 『신앙 사춘기』에 썼던 '단톡방 탈퇴 사건'을 유발했던 친구다. 이후 다시 만나긴 했지만 썩 편하지는 않았다. 비닐 덮인 텅 빈 상이 즐비한데, 한 구석에 앉아 나누는 대화가 마음을 채웠다. 한없이 가깝게 느껴지고 깊은 위로가 되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 상실감이 우리를 연결시킨다.

 

세월호 6주기이다. 아침부터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세월호 막말로 진저리가 쳐지는 김진태가 낙선해서 기쁜데, 선거 결과가 기쁜데도 자꾸만 가라앉았다. 내내 누워있다 오후엔 걸으러 나갔다. 지나치게 걸었다. 분당천을 지나 탄천까지 걸었다. 다리를 절룩이며 돌아왔다. 해가 지는데 또 눈물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많은 이들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 엄마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공평함으로 수용한다 쳐도. 자식 잃은 부모가 되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눈을 뜨고, 자식이 빠져가는 걸 하루 종일 방송으로 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가혹함이다. 그 6년을 어떻게 지냈을까. 이 엄마들은. 다시 눈물이 난다. 100년에 한 번 나올 국회, 진보정당이 얻은 힘으로 진실을 밝혀주길. 진실만이 이 엄마들 피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   

 

전주에서 장례를 마친 친구가 잘 마쳤다는 소식을 친구들 방에 올렸다. 눈물 나면 울고, 아버지 보고 싶으면 아버지 부르라고, 나도 아직 그러고 있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우리들, 함께 우는 것 말고 다른 헤어날 길이 있을까. 함께 울고, 그리고 세월호는 진실이 밝혀지고 처벌 받을 자가 받을 것을 받아야 한다. 치유는 눈물과 진실이다. 오늘만큼은 모든 연결된 죽음, 진도 앞바다 꽃다운 아이들, 사랑을 위해 눈물이 나오는 대로 울겠다.

 

어쩌자고 [전기현의 세음]에선 포레의 레퀴엠이 흘러나온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예로운 퇴장 : 육 남매의 엄마  (2) 2020.04.19
허무의 강, 떠오르는 것들  (0) 2020.04.17
연결  (2) 2020.04.16
분노를 위한 시간  (0) 2020.04.14
창피했던 엄마, 창피한 나  (0) 2020.04.11
마지막 말  (1) 2020.04.06
  1. 2020.04.16 23:54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4.18 10:35 신고

      눈물이 나면 울자. 같이 울자. 눈물 끝에는 다른 우리가 있을 거야. 분명히.

엄마 떠난 지 한 달이다.

 

그리고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던 월요일이 내 생일이었다. 사순시기를 특별한 기도의 시간으로 보내려 했었다.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코로나로 인한 우리의 아픔을 품어야지 싶었다. 아이들에 생일 선물로 화분을 사주기로 해서 화원에 갔었다. 커다란 해피트리 화분을 봤는데 어쩐지 우리 엄마 같았다. 엄마가 공들여 키우던 벤쟈민 화분이 있었다. 좀 시들라치면 잎을 닦아주고 매만지며 엄마가 기도를 했다. 그럼 또 어느새 싱싱해졌고, 키가 천정 가까이 자랐다. 자칭 타칭 죽어가는 화분도 기도로 살려내는 여인이 되었다. 바로 그 벤자면 화분과 닮을 커다란 해피트리였다. 마음으로 생각했다. 사순시기를 기도로 보내야지, 부활주일 즈음이면 코로나도 끝나고 병원의 엄마와 마음껏 면회할 수 있을 거야, 두 달이라고 했으니 부활주일 지나면 골절된 손목이 꽤 붙었을 거야, 부활주일과 함께 아픔이 끝날 거야, 그때 와서 저 화분을 사야지, 이 사순시기를 잘 보내고 엄마 닮은 저 해피트리 사러 올 거야! 

 

시간이 이런 거구나, 한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달라지고 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앞산의 연둣빛의 생명을 느낀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덜 힘들다. 부활주일 영상예배를 드렸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 첫 찬송을 부르는데 마음이 갑자기 냉랭해진다. 성경을 읽고, 설교가 시작됐는데 부활, 부활, 부활...... 이 단어를 들을수록 설교가 마음에서 멀어진다. 더욱 차거워지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웬만하면 남편의 설교에 마음이 움직이고 은혜를 받는다. 헌데 진행될수록 귀를 막고 싶은 심정. 냉소, 차가웠던 마음이 어느 순간 분노로 끓기 시작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 옆에 아이들이 앉아 있어서 내색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겨우 설교를 견디고, 기도시간 다시 눈을 감고 화를 다스리고 다시 찬송을 부른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참 좋아하는 복음성가다. '살아계신 주'. 그런데 누가 이렇게 가사를 이상하게 바꿔놓은 거야. 찬송가로 들어오면서 가사가 많이 바뀌었다. 화가 치민다.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가슴속에 넘치는 확신 우리의 가는 길에 소망 넘치네' 이 가사를 지날 때 분노가 극에 달했다. 눈물이 났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예배를 마치고 점심 준비하는데 남편이 곁에 와 표정을 살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화가 나." "왜 화가 나?" "그러게, 부활주일이라 화가 나."라는 말이 나왔다. 부활주일이었고, 부활에 대한 찬송을 부르고, 설교 주제가 부활이어서 화가 났다. 부활을 믿으라고, 소망을 가지라고 강요받는 것 같았다. 그 외 더 긴 설명은 어렵다. 장례식 며칠 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천국이 믿어지지 않아."라고 말했을 때처럼 황당한 상황이다. 부활주일이라 화가 난다니, 가족들은 그때처럼 황당할 것이다. 나는 이런 내 마음이 괜찮다. 갑작스런 감정 변화가 다소 당혹스럽긴 하지만 허용할 수 있다. "그러면 못 써!" 하는 목소리는 전처럼 크지 않다. 느낌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맘에 들어하시는 느낌이 따로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느낌에는 윤리성이 없다'라고 내 입으로 수백 번 했던 말을 내게 들려줘야 할 시간이고, 조용히 허용해주고 있다. 부활의 예수님도 그렇게 들어주실 줄 알고 있다. "그렇구나, 나의 부활이 멀게만 느껴지는구나. 엄마가 그립지? 얼마나 그리운지, 얼마나 슬픈지 알겠구나. 화내도 괜찮아. 진실로 부활을 믿고 싶고, 피부로 닿는 위로를 얻고 싶은 마음의 표현인 걸 내가 왜 모르겠니? 괜찮다. 네가 편하게 화를 내주니 오히려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좋구나. 얼마든지 더 화내고 울어도 된다. 내가 다 들어줄게."

 

상실과 애도는 짝이다. 상실을 벗어나(온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는 것은 애도를 통해서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젠 정설이 되었다. 충분히 슬퍼해야 떠나보낼 수 있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이 시대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 불리는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일찍이 상실을 수용하는 다섯 단계를 정리했다. '부정(그럴 리 없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 분노(왜 나야, 불공평해, 이럴 수는 없어!) - 타협(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면 이제 정말 제대로 살게요!) - 우울 - 수용'이다. 꼭 이 순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애도를 위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 다양한 감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뇌졸중으로 9년 간 마비된 몸으로 살아가던 퀴블러 로스가 죽기 한 달 전에 작업을 마친 마지막 책 『상실 수업』은 더는 이론이 아닌 자기 경험의 고백처럼 들린다. 엄마 없는 빈 자리를 마주하는 낯선 시간을 통과하며 읽으니 더욱 그러하다. 마치 내게 들려주려고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책이 다가왔다. 슬픔, 공포, 아픔이나 외로움보다 분노가 먼저 다가오면 더 강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분노가 슬픔에 앞설 수 있다. 나 역시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이란 제목으로 교회 문제로 상실감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만나기도 했다. 애도의 시간, 충분히 슬퍼하라고 하는 말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충분히 분노하라! 분노가 논리적이거나 타당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퀴블러 로스의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분노는 곧 저항의 힘이다. 다시 말해 상실의 공허감 속에 잠시나마 붙잡을 수 있는 하나의 닻이 될 수 있다. 처음에 슬픔은 마치 바다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내 누군가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 누군가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주변에 없는 사람일 수도, 사랑한 이가 죽은 후 태도가 달라져버린 사람일 수도 있다. 갑자기 큰 구조물이 올라온다. 그들을 향한 분노가 바로 그것이다. 분노는 드넓은 바다 위로 당신과 그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다리가 된다. 그것은 지지대와 같은 것이 된다. 분노의 힘으로 만들어진 그 연결선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우리는 분노를 느끼는 법보다 억제하는 법을 더 많이 알고 있다...... 화를 허락하면 할수록 마음속 깊이 감춰진 감정들을 더욱더 찾게 된다. 분노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그것을 다스리면서 숨어 있던 또 다른 감정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통은 상실을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분노의 강도가 감당하기 버거울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잃어버린 사랑의 양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반대편 출구로 나오게 될 것이다. 고통은 가라앉고, 상실의 감정들은 다시 형태를 바꾼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말라. 심지어 당신 자신이라 할지라도.

 

깔깔 웃다 갑자기 눈물이 날 때도 있고, 한 없이 내려앉던 마음에 불끈 힘이 들어갈 때도 있다. 부활주일 찬송 하나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기도 한다. 이렇듯 예측불가의 감정 상태에도 당황하지 않으려고 한다. 더욱이 나를 비난하지 않으려고 한다. 판단하지 않고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느끼려고 한다. (나 잠시 미친년이야, 엄마를 잃었는데 미치지 않는 년이 미친년이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칼끝이 내게로 향할 때는 죄책감에 끌려다니게 된다. 이 역시 '이렇게 느끼지 말자'라고 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느끼고 지나가게 둘 생각이다. 그러니 당신 옆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냥 느끼도록 두라. 감정이 오락가락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기 바란다. 다른 것을 느껴라 강요하지 말고, 그만하라고 재촉하지 말기를. 충분히 머무르다 반대편 출구로 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고통에 빠진 당사자이다. 

 

찜해 뒀던 해피트리를 생각하면, 그때 그려두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생각하면, 이렇듯 멀기만 한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다 보면 화가 나고 슬프다. 사순 시기를 기도로 근신하며 보내면 내가 바라던 그 부활을 보상으로 받을 거라 생각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 자주 화가 났지만, 엄마 죽은지 한 달 만에 맞는 부활주일이라 특별히 화가 난다. 분노를 위한 시간이다. 분노에게 내어준 시간 뒤에는 무엇인가 또 다가오리라. 어떤 미친 감정이 됐든 피하지 않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겠다. 달리 도리가 없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무의 강, 떠오르는 것들  (0) 2020.04.17
연결  (2) 2020.04.16
분노를 위한 시간  (0) 2020.04.14
창피했던 엄마, 창피한 나  (0) 2020.04.11
마지막 말  (1) 2020.04.06
따뜻한 국물  (2) 2020.04.05

엄마 꿈을 꿨다.

 

캄캄한 골목길을 통해 집으로 간다. 모퉁이를 돌아 몇 발짝 올라가서 우리 집이다. 작고 깔끔한 느낌이 일본식 집을 연상시킨다. 조금 낮은 곳으로 마주 보는 집이 있다. 우리 집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 동네다. 그 집에 사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엄마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 엄마를 존경한다는 그런 비슷한 얘길 한다. 엄마가 동네에서 대체로 그런 평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집에 들어갔는데 한복(옷고름 없는, 브로치로 고정시키는 단출한 한복)을 입은 엄마가 노트북 앞에 있다. '선교'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잘 안 써진다고 한다. 낯설게 젊고, 말이 없고, 지적인 느낌의 엄마다. 나는 아까 젊은 여자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엄마 때매 챙피해 죽겠어"라고 말한다. 엄마에 대한 호평이 좋다는 뜻인데 조금 장난스럽게 돌려서, 꼬아서 말하는 것이다.

 

잠을 깬 후에 꿈 속 마지막 말에 붙들렸다. 챙피해 죽겠어! 꿈 자아의 마음, 본의는 그게 아니다. 자랑스러워, 라거나 엄마 인기가 좋으니 덩달아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좋은 걸 좋다고 하고, 자랑스러운 걸 자랑스럽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될 것을. 왜 그러지 못했을까. 꿈속의 나는!(의식의 나도! 왜 그러지 못할까) 지난번 꿈에서는 시간이 별로 없는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었고, 나는 또 예의 그 장난스러운 태도로 설레발 하다 엄마가 하고 싶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엄마를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는 태도가 비슷하다. 감정을 있는 대로 느껴 머무르지 못하고 가벼운 농담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비슷하다. 평생, 특히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내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였다. 귀나 눈의 감각이 둔해져서 못 알아듣고 실수하는 엄마를 보며 깔깔거렸다. 실수들이 정말 귀엽고 재밌기도 했지만, 몸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노화 증상을 거부하고 회피하고 싶은 방어였다. 희화시키고, 농담과 유머로 대체하는 것이 내겐 가장 익숙한 방어기제이다. 

    

'엄마 때매 창피해 죽겠는' 느낌은 철들기 전 나를 지배하는 일상적 감정이었다. 엄마가 늘 창피했다. 버스에 타서 자리 맡기 위해 빛의 속도로 움직이던 엄마, 자리를 맡고 앉아 "신실아" 엄마의 큰 목소리. 물건 사러 가서 집요하게 깎기. 이런 창피함이야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너무나 흔한 부끄러움이지만 웃음만 나올 뿐이다. 제 부모가 하는 모든 것에 짜증내고 창피해하는 것이 사춘기 증상이니까. 그런데 어쩐지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사춘기, 청소년기 다 지나고 나름 성인이라고 자부하는 때였다.

 

엄마에겐 철야기도가 일상이었다. 매주 금요일 철야기도 외에도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 9월엔 한 달 내내 철야였다. 대학생 때 작은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전담 목회자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주변에 있던 교회 주일학교 교사 연합회 모임에 나가 찬송 율동 레크리에이션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그들과 어울려 놀며 늦은 시간 함께 동네를 걷고 있었다. 저 멀리 옷 무더기 같은 엄마가 걸어왔다. 겨울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갈 때는 옷을 입고 또 입고, 그 위에 또 입고는 하셨다. 엄마가 벗어 놓은 옷이나, 입고 움직이는 모양이 다를 바 없이 그냥 옷 무더기였다. 밖에서 엄마를 만나면 '창피함 관성'이 있어서 일단 흠칫하곤 했지만 철이 든 때였다. 흠칫, 이후에는 반갑기도 했다. 가까이 오면 장난 치며 아는 척하려고 했다. 할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멀리서 걸어오는 엄마를 보고 "저 할머니 분명히 철야기도 가신다." 하며 웃었다. 아무렇지 않았던 마음이 순간 요동치며 고개를 돌리고 엄마를 지나쳐 버렸다. 창피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그 장면은 왜 이리 지워지지 않을까.

 

엄마가 창피한 이유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엄마의 늙음이 무엇보다 창피했다. "너네 할머니 왔다" 이런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동생은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 나이 마흔 다섯에, 동생은 마흔일곱에 태어났다.) 동화 같은 데서 읽으면 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늙어서 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늦게 낳은 딸이라 나름대로 예쁘게 키우려 했던 것 같은데 뭔가 늘 이상했다. 분수 머리가 유행하던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묶어준 머리는 어딘가 친구들과 달랐고 어설펐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엄마의 사명은 오직 남매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콩나물 장사를 허드라도 서울로 가야겄다, 애들 공부시키는 방법은 서울로 가는 거 밲이는 옶다" 하고 무작정 이사를 결정했다. 교육비와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 돈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살았다. 욕구가 많고 다양한 나는 그런 엄마가 힘들었고 창피했다. 대학에 들어간 딸에게 정장 한 벌을 사주지 않았다. 대학 신입생 때 종로 어느 구두가게를 지나다 노란 구두를 봤는데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몇 날 며칠 엄마에게 사달라 졸랐다. 엄마의 뇌엔 다음 학기 등록금밖에 없었는데 노란 구두 같은 것은 입력이 될 리 없지. 결국 내가 모은 돈으로 노란 구두를 사고야 말았지만  발이 아파 몇 번 신지도 못했고.

 

가장 답답한 것은 신앙생활이었다. "주일에 물건 사면 안 된다. 새옷을 사면 주일에 먼저 입어야 한다. 교만하지 마라. 니가 잘나서 된 것 아니다. 다 하나님 은혜다. 믿는 사람이 미운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너 기도 안 허지?" 작년에 낸 『신앙 사춘기』에 '종교중독'이라 언표 했다. 그렇게 이름 붙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 지난한 싸움의 시간이었던가. 젊은 날엔 엄마와 얼굴을 맞대고, 이후엔 내 마음 엄마 목소리와 싸웠다. 『신앙 사춘기』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런 엄마를 팔아먹은 대가다. 그 글을 한 편 한 편에 담긴 눈물은 엄마 팔아먹는 딸년의 참회의 눈물이기도 했다. 평생 가장 벗어나고 싶고 극복하고 싶었던 엄마, 엄마의 종교 중독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그 사연을 팔아 글을 썼다. 가장 부끄러운 건 내 안의 종교 중독이었건만 '종교 중독자'라 이름 붙여 엄마를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그 책이 나올 즈음 엄마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리고 설명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엄마의 귀와 눈과 뇌는별 일 없다, 다들 건강하다, 잘 지낸다는 소식으로 족했다. 아니 이전부터도 엄마에게 출간 소식을 알리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내게는 목숨 같은 일이지만 엄마에겐 별 일이 아니다. 엄마에게 유일한 책은 성경이고, 평생 의미 있는 활자란 성경과 찬송 뿐이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엄마가 1년에 한 번, 어떤 때는 그 이상 성경통독을 한다는 것이 차라리 기적 같은 일이다. 성경 외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인생이다. 

 

나도 엄마가 되었고, 어떻게 해도 아이에게 부족함의 공간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엄마 됨이 아이들에게 결핍과 상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아픔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엄마인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엄마가 내게 했던 정반대로 한다 해서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엄마에게 느낀 결핍감에 매여 엄마 노릇할수록 아이와는 더 멀어진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이런 걸 받아본 적이 없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냐" 최악의 말이다. 이걸 채워주느라 저쪽에 구멍을 내고, 저 구멍 메우느라 여길 놓치는 것이다. 엄마보다 많이 배웠고, 합리적 신앙을 가졌고, 센스가 넘치더라도 아이들의 모든 욕구를 채워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원죄는 결핍감의 대물림인지 모른다. 결핍감이 낳는 갈망, 깊은 갈망, 무엇으로도 채워질 것 같지 않은 갈망. 다시 말하면 부모는 창피한 존재이다. 어느 부모랄 것 없이 부모는 자식의 부끄러움이다. 마음공부하고 일을 하며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 엄마의 모든 것이 창피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창피하지만 그건 정상이다.

 

꿈에서 엄마는 노트북을 앞에 두고 글을 쓰고 있다. 무의식의 세계, 꿈에서나 가능한 장면이다. 노트북과 엄마, 글을 쓰는 엄마란 죽었다 깨어나도...... 아, 엄마는 지금 죽었다 깨어난 건가? 꿈 얘길 했더니 남편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 어머님은 천국에서 당신이 살아오신 인생을 쓰고 계신가보다." 그렇게 상상해볼까? 죽음 직전까지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인생 가장 소중하게 붙든 말씀과 찬양을 잊지 않았던 엄마다. 노인이 될수록 허튼 말이 줄고 지혜가 빛이 났었다. 그랬던 엄마지만 지성의 결핍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땅을 살았던 엄마의 치명적 한계였다. 사고로 멍든 얼굴, 인공관절로 겨우 버티던 걸음걸이, 골다공증으로 칼슘 다 빠져나간 몸과 함께 이 땅에선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다. 몸을 벗은 빛나는 영혼은 못 배운 한, 지성의 결핍까지도 말끔히 지워진 새로운 모습일까. 그럴까. 부디 그러하기를! 엄마가 천국에서 글을 쓰면 좋겠다. 빛나는 천국에서 그 무엇보다 엄마의 지성이 빛났으면 좋겠다.

 

꿈이 드러낸 내가 모르던 마음, 모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극복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엄마가 창피한 것이다. 아니, 엄마와 연결된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엄마가 아니다. 엄마로 치환된 나의 어느 부분이다. 믿어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의 글, 나의 지적인 기반이 늘 부끄럽다. 뿌리 없는 지성이라 생각한다. 수치심과 결핍감은 끝없이 온라인 서점을 들락거리는 것으로, 불안과 혼란이 올 때마다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이 학교 저 학교 박사과정을 서핑하고 다니는 것으로, 어떤 사람들의 글을 질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잘 배운 엄마에게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한다.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맘껏 공부해서 유학도 갈 수 있었다면. 그랬으면 어땠을까. 이 유치한 상상을 자주 하는 것은 존재 깊은 곳의 수치심이다. 엄마에 대한 창피함이라고 하기엔 너무 뿌리 깊은...... 그냥 내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꿈이 드러내고 마주하게 한다. "엄마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가 아니다. 나다. 나 때문에 챙피해 죽겠는 거다. 심플한 한복을 입고,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엄마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표정으로 글을 쓰는 모습이 숭고하게 다가온다. 내 엄마다. 내 안에 그런 엄마도 있다.

 

내가 몰랐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엄마가 있다. 야학에서 공부하던 얘길 엄마가 자주 했었다. 수학을 배우는데 십의 자리 뺄셈 배우는 날에 결석했다고 했다. 다음 시간에 가서 시험을 치는데 배우진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봉게 앞이서 꿔다 쓰면 되겄다 싶어' 그렇게 풀었단다. 배우지도 않고 100점을 맞았다고, "옥금이가 보통 비상헌 머리가 아니다"라고 선생님이 칭찬을 했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서울에 왔을 때 아버지 양복을 하려고 뒀던 천으로 엄마가 투피스를 맞춰 입은 적이 있다. 그레이 색 천의 재킷과 스커트는 지금 생각해보면 'KEITH' 느낌이 나는 세련된 투피스였다. 비단 장사를 하던 엄마가 남는 천으로 한복을 해 입으면 교인 중 어떤 집사님들이 그렇게 질투를 하더라고 했다. 늙고 무식하고 감각 없는 엄마보다 내가 몰랐던 엄마가 더 광활할지 모른다. 꿈은 내 수치심에 가둬둔 엄마를 다시 만나라고 말한다. 아니 꿈의 엄마가 새롭게 만나자고 말 걸어온다. 다른 엄마를 만나봐야겠다. 슬픔고 죄책감을 피하지 않고, 애도의 시간에 오롯이 머물며 새 엄마를 만나야겠다. 필연, 엄마가 아니라 다른 나와의 만남이겠지.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결  (2) 2020.04.16
분노를 위한 시간  (0) 2020.04.14
창피했던 엄마, 창피한 나  (0) 2020.04.11
마지막 말  (1) 2020.04.06
따뜻한 국물  (2) 2020.04.05
슬픔의 연대  (0) 2020.04.04

 

 

 

 

준비해둔 마지막 인사가 있었다.

"엄마, 고마워. 엄마 딸이라서 정말 좋았어."

식상하지만 사무치고 절절한 말이다.

 

마지막 말만 준비된 것이 아니다. 그 인사를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뒀었다. 엄마의 죽음을 오래 준비해왔다. 39년 동안 늘 준비하고 있었다. 어려서는 무의식적으로, 마음공부와 내적 여정을 한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준비했다. 내적 여정으로 치유의 눈을 떠가는 중 오래된 상복을 발견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떨결에 입었던 상복,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입었던 무섭도록 낯선 옷이다. 그것을 내다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의 서랍 깊숙이, 그러나 언제든 쉽게 찾아 꺼내 입을 수 있게 기억하며 간직하고 살았던 것이다. 쾌활함으로 위장한 우울, 당당함으로 감췄던 불안, 가족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이 거기서 기인한 것 같았다. 앎이 즉각적으로 치유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화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상실과 애도 과정에 함께 하면서 엄마만은 잘 보내드려야지, 늘 생각했다.

 

아버지 목회를 도우면서 교우들의 죽음을 돌보던 엄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의 임종을 의연하게 지키고 진두지휘 했던 엄마다. 엄마가 일부러 외워준 것은 아닌데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생각이 난다. '옆에서 울고 그러면 안 된다. 찬송 불러 드려야 한다. 마지막 숨을 넘기는 일은 매우 힘들다. 그때는 물을 한 숟가락 준비하고 있다 한 방울을 입에 넣어 넘기도록 해드리면 수월해진다.' 매뉴얼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축복 속에 고요히 마지막 호흡을 내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엄마의 사랑받은 이들이 모여 찬송 부르는 동안 잠자듯 눈을 감으시는 것을 상상했고 기도했다.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고마워, 엄마 딸이라 좋았어." 이 말 외에 없었다. 

 

"가, 엄마 이제 가, 나는 괜찮으니 이제 가 엄마......"

39년 준비가 무색하다.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엄마 귀에 대고 뱉은 말이. 그것도 절제하지 못한 통곡과 함께. 호흡기도 차고 있었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의식이 또렷하고 다 알아듣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며칠 전 밤에 이 생각이 났다. 엄마의 호흡이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한 번 한 번 호흡을 끌어올리는 일이 힘겨운 고통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혹시 엄마가 나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격리된 상태로 외롭게 보내는 엄마의 시간이 견딜 수 없었다. 엄마에게는 더 큰 고통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엄마의 빛나는 영혼이 무너지는 육체 안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엄마와 마지막 통화였다. 엄마와 연결되는 유일한 끈은 전화기에 대고 부르는 찬송이었다. 행여 엄마 귀에 들리지 않을까 큰 소리로 불러야 하는데, 목소리를 크게 낼수록 울음도 함께 커지니 드레스룸 구석에 머리를 파묻고 통곡하며 불렀다. "성령 감화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호흡기에 막힌 엄마 숨소리만 들리는데, 엄마가 너무 힘겨워 보여서 엄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안심시키고 싶었다. 이제 신실이가 다 컸고, 김서방도 있어서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편히 가라고. 하지만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다. 

 

엊그제 늦은 밤. 책을 읽고 몇 줄 글을 남기려다 "숨을 거둔 후에도 청각은 한참 더 남아 있대" 하는 말이 생각났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엄중한 사랑의 태도로 임종을 지켜야 하겠느냐, 그런 의미를 담았었다. 우리 엄마는 존경과 사랑에 둘러싸여 평화로운 마지막 숨을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무엇. 마지막 말이 저거였다고? 엄마가 저걸 들었다고? 저 말을 듣고 끝이었다고?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 씻어낼 수 없는 죄다. 자책감이란 말도 과분한 감정으로 가슴이 다시 죄어드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어떻게 해버려야 할 것 같은, 나를 가만 둘 수 없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동생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동생도 그랬을 것이다. 피차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알기에 각자의 몫을 감당할 뿐, 서로 더 아프게 하면 안 되었다. 참지 못하고 전화했다. "엄마랑 내가 마지막 통화할 때 내가 엄마한테 했던 말 기억하니?" 못 들었길 바랬다. 울음이 전부였기 때문에 못 알아들었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복기해보니 내가 그 말을 할 때 얼른 동생이 말을 가로채고 전화를 끊었었다. 상황을 파악한 동생이 '그때 누나 편하라고 엄마가 찬송 다 듣고 따라 불렀다고 했는데 사실 그때 엄마 의식이 거의 없었어. 찬송도 못 알아듣고 누나 말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데 확인사살과 같았다. 그랬구나. 정말 내가 엄마 귀에 대고 한 마지막 말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되돌릴 방법이 없다. 차분히 찬송 부르고 "엄마 잘 자. 곧 보러 갈게"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입에 발린 말이라도 "사랑해. 또 전화할게" 할 일이지. 비록 몸으로 함께 하진 못했지만 엄마가 늘 말하듯 찬송을 불러드렸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는데. 새롭게 견디기 어려운 밤이었다. "어머님이 당신 마음을 듣지, 말을 들으셨겠냐" 몸부림 하는 나를 끌어안고 남편이 하는 말도 위로되진 않았다. 어떤 늪으로, 죄책감의 구덩이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늪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싶긴한 건가. 

 

하지만 아침이 되니 괜찮아졌다. 밤에 했던 남편의 말을 복기해보면 이해도 되고 수긍도 되었다.  무엇보다 그런 위로의 말이 필요치 않게 말짱하다. 말짱한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엄마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말짱해지는 것이냐. 밤이 와 슬픔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 파도를 부풀리고 부풀려서 그 안에 갇혀버리고 싶다. 그렇게 슬픔에 머무르는 것이 엄마와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엄마를 잊을까 봐, 나조차도 엄마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두려운 건지 모른다. 엄마가 죽었는데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이 잔인하다 했으면서 숲이 연둣빛으로 변하는 것에 다시 설레다니. 그 숲에 안기려 하다니. 일상의 감각을 되찾는 나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어떤 사실을 일부러 지우고, 나를 고통에 빠트릴 것만 붙들려고 한다.

 

사고 나던 날 응급실에서 보고, 바로 요양병원으로 간 엄마를 처음 면회한 날은 2월 24일 내 생일이었다. 생일이라 엄마가 더 보고 싶어 돌아서면 자꾸 눈물이 났다. "면회는 못하겠지만 병원 앞에라도 갔다 올까?" 말해준 남편 덕에 병원에 갔고, 눈물로 엄마 안부를 묻다 면회를 허락받게 되었다. 아직 엄마가 호흡기 달기 전이었다. "엄마, 오늘 내 생일이야. 엄마, 나 낳아줘서 고마워. 잘 키워주서 고마워.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랑 함께 울었다. 얼굴 보고 나눈 마지막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많은 마지막이 있다. 입관식에서 엄마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 말도 있다. 그것도 마지막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둘의 차이를 '자기 비하'로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국가, 자유, 이상 등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추상적인 것을 잃은 것에 대한 반응'이 애도라고 했다. 대상의 상실을 자기 비하의 감정 없이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우울증은 극단적인 자기 비하로 상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현상이라고. 정확히 그 밤의 내 태도이다. 하지만 일말의 자기 비하와 죄책감, 후회 없이 애도의 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까? 그때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저 "엄마, 전염병 끝나면 보러 갈게" 하고 말 걸, "우리 딸 보고 싶다" 하면 바로 달려가서 얼굴 보여줄 걸, 더 많이 엄마 얘기 들어줄 걸...... 후회 없이 이 시간을 지날 수 있을까. 떠나보내야 하지만 붙들고 싶기도 한 내 마음을 어쩔 것인가. 프로이트의 통찰이 주는 유익이 있다. 그에 힘입어 애도에 대해 강의도 상담도 했다. 하지만 그리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밤 "엄마, 가!" 이 말이 떠올라 다시 늪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 말이 마지막 말이라고, 그 말만이 마지막 말이라고 내게 우기겠지. 엄마와의 마지막 말은 끝나지 않았다고 믿기도 한다. 요즘 자기 전엔 밤마다 기도를 하거나, 엄마에게 같은 내용을 부탁한다. "엄마, 꿈에 나와줘. 꿈에 나와서 엄마가 지금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 이 말이 엄마와의 마지막 말일 수도 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며 아직 적응 안 된 엄마 없는 날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락가락해도 되는 거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노를 위한 시간  (0) 2020.04.14
창피했던 엄마, 창피한 나  (0) 2020.04.11
마지막 말  (1) 2020.04.06
따뜻한 국물  (2) 2020.04.05
슬픔의 연대  (0) 2020.04.04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3  (1) 2020.04.03
  1. 2020.04.10 21:36

    비밀댓글입니다

 

 

"속이서 안 받는다" 비위가 약한 엄마가 앞에 놓인 음식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하는 말이 그립다. 잃었던 입맛을 찾은 후에는 "입맛이 잽혔다"라고 했다. "입맛이 잽혔다" 끝에 따라붙을 "고맙다, 복 받어라"하는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들어보면 좋겠다.

 

입맛을 잡아오는 음식이 있다. 도다리 쑥국이 입맛을 찾아주진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찾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일단은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도왔다. 통영으로 불러들였다. 한 번 먹어보지도 않은 도다리 쑥국이다. 도다리라는 생선에 여린 쑥을 넣어 맑게 끓인 국이려니. 유명하다는 집을 찾았다. 상상했던 그 맛을 그럭저럭 맛있게 먹었다. 맛집에서 나오면 왈가왈부 맛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가만 걷다 "국물이 따끈했으면 더 맛있었겠다. 국물 온도가 좀 아쉽네." 했더니 남편도 동의했다. "아, 그러네!" 

 

말로 내놓고 나니 몹시, 절실하게 아쉬워졌다. 국물은 온도지! 왜 그랬을까? 사장님의 말과 태도에선 도다리 쑥국에 대한 전문가적 자부심이 넘쳤는데. 따끈한 국물이 정말 필요했는데. 며칠 전 밥을 차려 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끓여준 따뜻한 국물 먹고 싶다." 국도 끓이고 단품 요리도 하면서 잘 먹고 먹이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왔다. 그 욕구와 휴대폰 창에서 본 도다리 쑥국이 마주쳐 손뼉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따끈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 엄마 영안실 안치하고 며칠 동안 먹은 것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따끈한 맑은 국물이었다. 

 

발인예배에 왔던 친척 언니 오빠들, 메시지를 보내주는 친구와 지인들이 한결 같이 "잘 챙겨 먹으라"였다. 살 의욕도, 먹을 의욕도 없지만 그 말들이 마음에 남아 있어 뭐든 먹으려고 했다. "여보, 뭐 먹을래? 뭘 사 올까?" 잔치국수, 콩나물 해장국 같은 걸 사서 국물만 먹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따뜻하고 맑은 국물이었다. 식도나 위 어느 부분에 체망이 걸려 있나? 며칠을 그렇게 국물만 들어갔다. 국물이 아니라 따뜻함을 원했던 거다. 내장을 타고 몸 구석구석에 따뜻함이 스며들었으면. 

 

장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조카 부부가 아이와 함께 집에 와 식사를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다 답을 못하기에 나름대로 식사 준비를 했다. 식사 후 이런저런 얘기, 결국 엄마 얘기를 하는데. "고모, 나 실은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김칫국이 너무 먹고 싶어요. 끓여 보려고 해도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고. 그 맛을 알고 끓일 수 있는 사람은 고모일 것 같은데... 말을 못 했어요." 해서 같이 울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급히 김칫국을 끓여서 담아 보냈다. 다음 날 '바로 이 맛이었다'며 눈물 흥건한 메시지가 왔다. 나도 엄마가 끓여준 따뜻한 국이 먹고 싶었던 거다. 몸과 마음을 데우던 엄마의 국물을 먹고 싶었던 거다.

 

오묘한 연상작용이다. 도다리 쑥국 - 미지근한 국물 - 따끈함을 원했었지 - 따끈한 맑은 국물 - 엄마가 끓인 국 - 엄마만이 줄 수 있은 온기. 온기가 사라진 낯선 엄마 몸이 다시 떠오른다. 식어버린 엄마 몸을 매만지다 마음의 온기를 잃어버렸다. 뱃속이 가슴이 세포 구석구석이 비어 바람이 든다. 국물로 버티던 며칠 동안 집에서도 목도리를 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 추위 때문이라 여겼다. 하루 종일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웬 목도리나고 놀렸다. 통영에서 자던 밤에는 집에 있던 채윤이가 내가 했던 목도리를 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오며 다시 놀렸다. 엄마 몸이 없어졌다는 것은 엄마만의 온기가 사라진 것이구나. 

 

결핍, 비어 있는 느낌, 텅 빈 결핍의 공간에서는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분다. 아버지가 남긴 결핍의 공간에서 불던 찬바람을 맞으며 살아왔다. 찬바람에 마음이 추울 때마다 일기를 썼다. 그 텅 빈 공간을 글로 채웠다. 그렇게 쓰다 쓰다 작가가 되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 그 결핍이 치명적인 부끄러움이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자 살아온 세월인데. 돌아보면 그 세월이 나를 만들었고, 존재하게 했고, 그 세월이 그냥 나다. 엄마가 남긴 또 다른 결핍과 냉기는 다시 내 인생 후반을 이끌어 갈 것이다. 여전히 "다른 사람이 끓여준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그 다른 사람, 그 타자, 그 국물을 끓여낼 유일한 타자, 절대 타자인 엄마가 없으니 허튼 바램으로 슬픈 나를 더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뜻한 국을 끓여 주는 그 사람이 되어어 할 시간이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어야 할 시간이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피했던 엄마, 창피한 나  (0) 2020.04.11
마지막 말  (1) 2020.04.06
따뜻한 국물  (2) 2020.04.05
슬픔의 연대  (0) 2020.04.04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3  (1) 2020.04.03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2.1  (0) 2020.04.02
  1. 윤진 2020.04.05 23:29

    몸이 기억하는
    잊혀지질 못할 엄마의 온기...🧡

  2. BlogIcon pratigya 2020.04.06 11:48 신고

    그래도...언니가 잘 드셔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