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하는 내적여정3

 

 

 

최근 리더모임을 하면서 팔수칠규 사이에 언쟁이 있었다. 그 이후 둘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해결을
이석이가 중간에서 애를 썼나보다. 결국 셋이서 모님의 거실을 방문했다.

 

모님 : 팔수와 칠규 어려운 걸음 해줘서 고맙다. 내키지 않는 자리일 텐데 함께 와줘서 고마워. 이석이가 중간
에서 애를 많이 썼구나. 아무튼 이렇게 같이 얼굴 보게 되어 다행이다.

칠규 : 모님, 뭐 너무 심각하게 생각 안하셔도 돼요. 저희 뭐 거의 다 풀었어요. 팔수가 또 마음이 넓잖아요.
안 그러냐? 팔수! 하하하하.


팔수
: 됐거든. 내가 모님 명령이라 왔다. 이석이 얼굴도 있고. 나 너랑 농담하고 그럴 기분은 아니다. 알겠냐.


이석
: 야야야……. 이제 그만 해라. 모님, 저희 커피 주시는 거죠?


모님
: 그래, 오늘 기가 막힌 커피가 있어. 평소에 잘 못 마셔보는 커핀데 블루 마운틴 생두를 선물 받았단다.
 너희 주려고 공들여서 볶았지. 커피의 맛은 보통 신맛, 쓴맛, 단맛의 조화로 설명하는데 블루마운틴은 세 가지
 맛이 조화롭기로 유명해. 커피 준비할게.





< 장 중심 >

8 : 외면화된 유형
9 : 핵심유형
1 : 내면화된 유형

무게중심 : 하복부와 소화계
주요관심 : 자신의 의지와 욕구, 힘과 정의
지배적 정서 : 분노

< 가슴 중심 >

2 : 외면화된 유형
3 : 핵심유형
4 : 내면화된 유형

무게중심 : 심장과 순환계
주요관심 : 타인 눈에 비친 자기 이미지
지배적 정서 : 불안

< 머리 중심 >

5 : 내면화된 유형
6 : 핵심유형
7 : 외면화된 유형

무게중심 : 대뇌와 신경계
주요관심 : 객관적 이치, 논리
지배적 정서 : 두려움





모님 : 햐아, 커피맛 좋다. 커피의 맛은 어떤 커피냐 보다는 누구와 마시느냐에 좌우되는 것 같아.
이렇게 너희 셋과 함께 마시니 진정한 의미에서 ‘조화’의 커피를 마시는 느낌이다.

 
이석
: 캬, 세 가지 맛의 조화라. 커피 맛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의미가 좋네요. 모님. 그렇지, 얘들아.

팔수, 칠규 : (힐끗 서로를 바라보면 뻘쭘)


모님
: 오늘은 에니어그램의 9유형을 설명하기 전에 3중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 자신의 ‘유형’을 찾
는 것보다 먼저 ‘중심’을 찾는 것이 순서라고 볼 수 있어.

칠규
: 아까 읽어보니까 3중심이 장중심, 가슴중심, 머리중심이라는 거고, 저는 머리중심인가보네요. 이석이는
 가슴중심, 팔수는 장중심인가보죠? 장중심은... 보자... 분노라... 장팔수, 이거야. 이거. 너의 그 폭발하는 분노
에 내가 아주 죽겠다니깐. 너 진짜 거 아무데서나 버럭 하는 그 성질 좀 죽여. 너는 진짜…….


팔수
: 야 임마! 너 진짜 꼬치꼬치 따지고 들고 말 많은 거 질색이야.

이석
: 어우... 야... 너희들... 자자... 커피 마시자. 모님! 말씀해 주시죠.


모님
: 호호호. 이석아!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얘네들 하고 싶은 말은 하도록 둬라. 너희들 10년 지기 친구고 서
로 신뢰하는 사이잖아. 본론으로 가자. 장(본능), 가슴, 머리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 원래 하나님께선 조화로운 세 원천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어. 헌데 이 중 한 곳에 에너지가 고착된
 것이 3중심이란다.


팔수
: 아, 또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냥 장중심이 어떤 사람인지, 고칠 점이 뭔지 그냥 간단히 설명해 주시면
 좋겠어요. 머리중심 두칠규가 왜 사사건건 저를 물고 늘어지는 지도요.

칠규 : 그건 그래요. 저도 장팔수가 왜 저렇게 단무지(순, 식, *)인지가 궁금해요.


팔수
: (순간 주먹 불끈)

칠규 : (얄미운 미소 한 자락 팔수를 향해 날리면서)모님! 제가 머리형이면 머리를 잘 쓴다는 얘기고, 가슴중심
 이석이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느낀다는 뜻인가요?


모님
: 좋은 질문이다. 중심, 또는 센터라고 하나 이것은 잘 발달했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결.핍.으로 이해를
 해야 해. 결핍을 느껴서 거기에 고착이 되었다는 거고, 때문에 너무 매여 있어서 그 중심마저도 제대로 못 쓰고
 있다는 거다.


이석 : 저... 저... 모님, 제가 가슴형 이라면서요? 그럼 제가 뭐 애정결핍이나 이런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모님 : 애정결핍 그러면 환자같이 느껴지지? 결핍이라는 말이 좀 불편하게 들릴 수 있을 거야. 들어봐라. 3중심
의 결핍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 장중심의 사람들은 생애 첫 경험이 본능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기억하
는 사람들이야. 아이가 배가 고파서 울었는데 누가 와서 젖을 물려주지 않더라는 거야. 용을 쓰면서 핏줄이 터
지도록 울었더니 그제야 엄마가 젖을 물려줬어. 아이는 판단하는 거지. ‘아, 세상 만만한 곳이 아니구나. 웬만큼 울어서 밥 얻어먹는 게 아니구나. 내 밥그릇을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채워주지 않아.’라며 욕구, 힘에 매인 장중심
이 되는 거지.


팔수
: 푸하하하... 내 밥그릇 내가 챙기자. 정글에서 살아남자. 이거 제 좌우명인데요.
 

모님 : 그래, 장형들에게 있어 세상은 험난한 정글이야. 가슴형 이야길 해보자. 이들은 정서적 보살핌이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 결핍을 느꼈다는 거야. 배고픈 아이가 자연
스런 표현으로 울었더니 먹을 것을 안 줘. 그런데 어쩌다 방실방실 웃었어. 그러니까 엄마가 뒤로 넘어가면서
‘아고 이쁜 내 새끼’ 하면서 젖을 주더라는 거야. ‘아, 세상은 뭔가 사람들에게 애써야 사랑받는 거구나’ 하는 거
지. 그래서 애정관계가 이들의 가장 중요한 욕구가 되고 감정중심이 발달하게 돼. 그것이 고착화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사랑, 인정, 관계를 갈구하는 무의식적 패턴을 형성하게 되는 거야.


머리중심의 인간형은 어린 시절 경험 속에서 일찍부터 사고센터를 발달시킨 사람들이야. 예를 들면, 배고파 울
었는데 어떨 때는 왜 우냐며 따귀를 맞고 어떤 땐 젖을 얻어먹은 거지. 일관성 없는 부모나 불안한 환경 또는 어
떤 이유에서든지 자라면서 ‘아, 인생 상황판단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구나’ 라면서 사고기능을 중시하고
발달시키게 되는 거야.


칠규
: 저희 부모님이 그렇게 일관성 없는 분은 아니셨던 것 같은데 제가 머리형인 건 같아요. 뭔 일이 있으면
머리부터 돌아가거든요.


모님
: 하하하. 팔수와 칠규가 지난 번 회의 때 부딪혔던 패턴을 3중심의 관점에서 얘기해 볼게. 장형들에게 회
의란 ‘내 뜻’이거든. ‘내 뜻은 이거니까 할려면 이걸로 해’ 이거야. 장형들은 대체로 말도 짧고 분명해. 헌데 머리
형들은 밑도 끝도 없이 뱃심을 들이대는 장형들을 이해할 수 없지. ‘왜? 그러니까 왜?’를 자꾸 따져 묻거든. 회
의를 통해 이치와 논리를 찾겠다는 거지. 그러다보면 말이 말아지고 회의가 길어지는 거지 그러면 장형은 바로
버럭 하는 거야.


칠규
: 아, 바로 그거였어요. 모님! 그 날... 아니다. 그 날 뿐이 아니라 저랑 팔수랑 늘 그렇게 붙어요. 크흐흐흐.


팔수
: 그니까... 너는 왜 이리 따지고 드는 게 많냐? 머리에 든 건 많아가지고. 재수 없지만 사실 쫌 부럽다. 임
마.

모님 : 그러면, 그 때 그 순간에 이석이는 어떻게 느꼈고 행동했니?


이석
: 저는 심장이 벌렁벌렁 했죠. 일단 상황을 좀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서 쉬면서 차 한 잔 하고 다시 시작하
자고 했지요. 사실 저는 그 때 뭘 논의했었는지 기억도 안나요. 별로 관심도 없고요. 그냥 우리가 서로 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모님
: 들었니? 장형과 머리형 사이에 끼인 가슴형의 고백이야.


칠규
: 3중심이 결핍의 결과라는 건 이제 이해가 되는데요. 그러면 정말 좋은 환경에서 완벽한 부모를 만났다면
결핍을 안 느끼는 건가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모님
: 역시, 두칠규스러운 질문! 생애 첫 경험이라고 하는 그 자리에서 어린 아이가 느낀 결핍이라는 것 말이
다. 그건 부모가 안 줬다기보다는 그 때 그 어린 아이의 해석이야. 부모가 되어보니 더 절감하는 건데, 내가 아
무리 최선을 다해 사랑해도 100점짜리 엄마가 될 수 없더라. 분명히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피곤한 몸이
안 따라주고, 메마른 마음이 허락을 안 할 때가 많아. 가정의 다른 환경도 마찬가지일거야. 어쩌면 그 결핍이라
는 것은 원죄의 유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다면, 그 결핍의 자리는 힘을 쓰거나, 머리를 쓰거
나, 인간의 사랑을 받아 채워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거야. 그걸 내가 다 채워보겠다고 할 때 하나님 대신 내가
내 마음의 왕 노릇 하겠다는 거지.


팔수
: 아이구야, 점점 더 어려워지는군요.


모님
: 들어봐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결핍감의 소산으로 하나의 중심에 매여 있는 나 자신
을 보고 인정 하는 거야. ‘어라, 내가 머리를 써야하는 순간인데도 배짱을 들이대고 있네. 어라, 내가 애정본능
을 일깨워야할 순간에도 머리만 돌리고 있네. 어라 내가 힘으로 버텨내야할 순간에 애정에 호소하고 있네!’ 라
고 말이다.


이석
: 인정만하면 끝인가요?


모님
: 아니지. 진짜 왕에게 내가 애쓰던 자리를 내어드려야지. 이것이 우리가 매일, 매 순간 그 분께 정직하게
나가야할 이유이고. 여기서부터는 우리 각자가 그 분의 손을 잡고 가야하는 길인 것 같아. 내가 너희들 밖에서
안내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일거야.


이석
: 모님, 감사합니다! 얘들아, 우리 나가서 얘기 좀 더 하고 가자. 이제 우리 셋이 얘기하면 블루마운틴의 조
화로운 향이 막 뿜어져 나올 것 같지 않니? 헤헤.


 

 

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하는 내적여정2

 

: 모님! 안녕하세요. 우아, 커피향! 완전 좋은데요.

: 저희 5분 늦었죠? 죄송해요. 같이 만나기로 했는데 애들이 정말 시간을 안 지켜요.

: 칠규는 오고 있다는데 평소 소행을 보면 아직 집인 것 같기도 하구요. 하하하. 구민이는 전화를 안 받아요.

: 모님, 뭐 도와드릴까요? 커피 다 갈으신 거예요. 이거 계속 갈까요? 컵 꺼낼까요?

: 저 <내 안에 접힌 날개> 다 읽었어요. 대박 좋아요. 저 에녀그램 완전 기대돼요.

모님 : 자 일단 앉아서 주문 먼저 하자. 커피 마실 사람! 다른 거 원하는 사람!

: 다른 차는 뭐가 있어요?

: 야야, 다른 차는 무슨 다른 차! 오늘은 통일해서 커피 마셔.

모님 : 통일은 됐다. 팔수는 그 힘으로 나라 통일에 신경 좀 써봐라. 자, 오늘의 커피는 묵직한 맛의 케냐랑 감기 걸린
          사람   많으니
목에 좋은 카모마일 중 골라 마시자. 칠규랑 구민이도 기다릴 겸 차 준비하는 동안 이 그림 좀 보고
          있을래.





 

1 : 나는 올바르다.

2 : 나는 도움이 된다.


3 :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4 : 나는 특별하다.


5 : 나는 현명하다.


6 : 나는 책임감이 강하다.


7 : 나는 행복하다.


8 : 나는 강하다.


9 : 나는 평화롭다.










에니어그램은 9개의 거짓자아다


모님
: 이제 다 모인거지? 야, 엄청 심각하게 들여다보네.

삼진 : 모님, 3유형이 맞기는 한데 사실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거든요. 뭐든 잘하고 싶기는 하지만 ‘나는
          성공한 사람
이다’ 이렇게는 생각이 안 되는데요.

일경 : 저도 뭐 딱히 제가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은 안하지만 뭐든 제대로 완벽하게는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팔수 : 야, 니가 뭐 올바른 사람이 아니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바르지. 껄껄껄. 딱 이네요. 모님, 이석이는 머리부터 발끝
          까지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요. 사라가 대박이다. 넌 진짜 특별하잖아. 특이한가? 어우 사라 표정 바뀌는 거 봐라.
          아, 미안! 미안!

모님 : 그러는 팔수 너는? 무조건 힘으로 다 밀어붙여서 통일하고? 하하. 모두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겠지
          만 천천히
 같이 얘기를 풀어가 보자.

육미 : 네, 일단 에니어그램이 뭔지 모님의 설명을 듣고 싶어요.

모님 : 에니어그램은 아홉을 뜻하는 ennea와 점을 뜻하는 gramma으로 이루어진 말이야. 아홉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아
          까 본 그림
을 말해. 어? 그러고 보니 정확하게 유형대로 둘러 앉았네! 음, 이것은 너희가 알고 있는 아홉 가지의 성격
          유형을 의미해. 
그런데 나는 이 아홉 개의 성격유형이 아홉 개의 거짓자아로 설명 하려고 한다. 처음부터 좀 거북하
          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아는 9유형은 아홉 개의 거짓자아이며, 아홉 개의 가면이다.

칠규 : 잠깐만요! 거짓자아라구 하셨어요? 가면이라구요? 그러면 저희가 지금 배우려고 하는 에니어그램 유형이 거짓자아
          라는
말씀이세요? 저는 가면을 좀 써봤으면 좋겠는데요. 도통 속에 있는 걸 숨길 수가 없어서 걱정인데요. 헤헤헤.
          안 그래, 
얘들아? 난 너무 솔직해서 탈이잖아. 으하하하…….

모님 : 호호호. 그래 아홉 개의 거짓자아. 칠규는 부정적인 단어를 들으니까 확 불편해지니? 역시나 솔직하네.

오필 : 그러면 진짜 자아는 뭐죠? 현명하려고 애쓰는 제 자아가 거짓자아라면 저의 진짜 자아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죠? 
혹시 진짜 자아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모습을 말씀하신다면 저는 거짓자아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모님 : 오오~ 역시 현명하신 오필님이십니다.

 


가면은 내가 아니다


모님
: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잰데 태어나보니 세상이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야. 
가만히 있어서는 사랑받거나 인정받기는커녕 밥도 못 얻어먹을 세상인거지. 하다못해 울어야 젖을 주고,
          방실방실 웃으면
이쁘다고 한 번 더 안아주는 게 부모님이고 세상이더라는거야. 그래서 나름대로 사랑받고 살아남
          고자 덧입게 된 것이 
성격유형, 즉 거짓자아라 할 수 있어. 있는 모습 그대로, 조건 없이 사랑받는 존재인 해처럼 빛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에니어그램은 여타 심리학적 성격분
          류시스템과는 접근이 다르지. 대체로 
성격유형론들이 ‘이런 성격이 너고, 너는 이런 성격이라서 그렇게 행동한 거
          야’ 라고 성격의 장점들을 부각시켜 설명한다면 
에니어그램은 아홉 유형의 집착, 치명적인 결함, 숨겨진 동기, 근본
          적인 죄를 드러내 줘. 그러니까 너희들 자신에 대한 좋은
소리 듣겠다는 생각이라면 번지 수를 잘못 찾은거다. 하지
          만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깊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분한 도움
이 될 거야.

육미 : 근데, 모님! 우리의 진짜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에니어그램의 9유형은 거짓자아라면서요. 저는 사실 저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고민 끝에 모님을 찾은 건데요. 거짓자아라면 왜 그걸 굳이 알아야 하는 거죠? 뭔가 속
          는 기분이에요.
 죄송! 흐흐흐…….

모님 : 단적으로 말하면 무슨 가면을 썼는지를 알아야 그 가면을 벗을 것 아니니. 벗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거다. 인격,
          성격을 영어
로 personality라 하지. 이 단어의 어원은 페르조나(perzona)라고 해. 페르조나란 너희도 알다시피
         원래 극장에서 배우가 배
역을 맡기 위해 썼던 가면을 말해. 사람이 살면서 사회적으로 필요해서 만든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지. 외적으로 보여 지는
페르조나와 내적이고 심리적인 페르조나가 있어. 야, 구민이 눈 떠라. 그 새 졸립
         냐?^^

: 아... 예....잔 거 아닌데.... 그냥.... 모... 눈 감고 있었... 헤헤....

모님 : 외적인 페르조나는 뭘까? 직함, 직업, 신분, 딸, 아들, 아빠, 엄마 같은 역할 등이겠지. 내적 페르조나는 흔히 성격,
         인격, 
신념, 습관, 자아 이미지, 가치관 등이 될 거야.

일경 : 그럼, 페르조나가 나쁜 거예요? 직업이나 역할에 맞게 행동하는 건 필요한 거잖아요.

모님 : 물론이지. 페르조나가 나쁜 거니까 다 벗어버리고 맨얼굴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야. 학교 선생님인 아빠가 있다
          고 하자.
이 아빠가 퇴근 후 집에서도 사사건건 가족들을 가르치고, 가르치다 말을 안 들으면 벌을 세우고, 점수로
          평가한다고 해보자.
친구를 만나도 교회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선생님으로만 살면 되겠냐는거야. 문제는 페르조나
          를 진정한 자신과 ‘동일시’하는
게 문제지. 내적 페르조나인 성격도 마찬가지야. 성격은 내가 필요해서 만들어 쓴 나
          의 얼굴이지 나 자신은 아니거든. ‘성격은
곧 나’라는 동일시가 강해지고 고착되면 마치 가면이 피부에 달라붙어서 
          내가 가면인지 가면이 난 지 모른 채 평생 주어진 배
역대로 살게 된다고 봐. 그 거짓자아에 대한 동일시는 진짜 나의
          본성을 일깨울 필요조차 못 느끼게 만들어.

팔수 : 아휴, 왜 이리 복잡해요? 좀 단순하게 짧게 설명해주시면 안돼요?

 


9가지 유형


모님
: 쉽게? 단순명료하게? 
         자,
1유형 올바르고 완벽한 사람 이지만 그렇지 못한 세상에 대한 독선적인 분노를 품은 이면이 있지.
        
2유형 잘 돕는 사람인 반면 자신의 돕는 능력에 매인 교만함이 숨은 죄이고, 
       3유형
은 뭐든 성공적으로 잘하겠다는 빛 뒤에 성공을 위해 거짓도 불사하는 그림자가 있단다.
         특별한 존재로서의 자신에 매여 있는
4유형의 이면에는 모든 평범한 것들에 대한 질투가,
         현명하다고 하는
5유형은 자신이 아는 것은 물론 가진 모든 것들을 나누지 않는 인색함이 어두움으로 드리워져
         있어. 
         안전한 것을 위해 늘 책임 있고 충실한
6유형의 숨은 동기는 두려움 이고,
        
7유형은 자신을 행복, 즐거움, 기쁨 사람으로 규정하고 고통을 피하려 하며 무절제의 유혹에 빠져.
         힘의 사람이라고 하는
8유형모든 허약한 것들을 무시하는 파렴치이,
         평화의 사람
9유형은 사소한 갈등이나 스스로 주도하는 일은 피하며 나태함의 유혹에 빠져.
         아니, 표정들이 왜 그래?
길 가다가 ‘시간 있으면 커피 한 잔 하자’는 훈남의 말에 룰루랄라 따라갔는데 카페 앉자마
         자 ‘도를 아십니까’ 하는 말에 넋 나
간 노처녀처럼. 하하하하.

아홉 모두 : .............

모님 : 좀 혼란스럽고 두렵기도 하지? 그럴거야. 우리 안의 어두운 그림자들. 그것들을 우리 마음의 지하실에 숨기고 가둬
         둘 때는 
엄청난 무게의 짐이고 두려움일 수밖에 없어. 헌데 이것들을 빛으로 꺼내놓는다면 말이다. 꺼내서 ‘나의 콤
         플렉스’ ‘나의 
죄’로 이름 붙이고, 인정하고 나면 쉽고 가벼운 짐이 돼. 내가 애써 꾸민 거짓가면을 보시되 속지 않으
         시고, 왜곡된 동기를 꿰
뚫으시지만 내치지 않으시며 시종일관 나를 향한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는 그 분의 빛
         앞에 정직하게 드러내기만 하면
돼. 두렵지만 결코 혼자 가는 길은 아니다.
         사랑이며 모사(謀士, wonderful counselor)이신 그 분의 손잡고 가는 길이야. 우리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
         어보자.




                                                                                           <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 하는 내적여정1>


저는 키가 난쟁이 똥자루입니다. 양손 엄지손가락은 뭣에 눌린 듯 뭉툭하고, 앞니가 삐뚤삐툴한 리아스식 치아를 가졌습니다. 작은 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편하자고 신는 운동화조차도 높은 굽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게임의 여왕이었으나 엄지손가락으로 숫자 만드는 게임인 ‘제로게임’은 결코 도전해본 적이 없고요. 들쑥날쑥한 앞니는 의학의 힘을 빌어 줄을 좀 맞추게 되었지만 여전히 웃을 때마다 움찔하면서 입을 다무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저의 콤플렉스들입니다. 헌데, 이제부터 공개할 콤플렉스에 비하면 위에 있는 것들은 뭐 그리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음악치료사이며 MBTI와 에니어그램 강사이고, 목회자의 아내로 청년들을 만나 상담하는 일이 일상인 저. 강의하고 치료하고 상담하는 주제는 거의 가 다 ‘마음, 인간관계’ 이런 것들이랍니다. 그런 저를 괴롭히는, 40평생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제껏 잘도 숨겨왔던, 초강력 울트라 콤플렉스는 ‘관계’입니다. 제 마음 깊은 곳 은밀한 방에서는 너는 ‘관계의 실패자’이고 언제 누구와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이라며 정죄하고 조롱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새어나오곤 합니다.



넘기 힘든 관계의 벽, 교.회.언.니.

사춘기를 지나며 정체성과 신앙적 자의식이 새로워지던 시기부터 저를 떠나지 않는 한결같은 의문과 좌절 하나가 있습니다. 왜 학년이 올라가서 반이 바뀔 때마다 싫은 아이가 한두 명 씩 꼭 있는 걸까? 1년만 버티면 되겠지. 어차피 반이 바뀔 테니까 하는 생각은 하나마나입니다. 반이 달라져도 어김없이 또 다른 비호감은 예비 되어 있었으니까요. 학교에서 만나는 비호감은 그래도 낫습니다. 딱히 싸운 일도 없는데 사사건건 나를 걸고넘어지는 것 같고, 뭘 해도 예쁘게 보이질 않는, 그러다보니 어느 새 말 한 마디 나누기도 긴장되는 교.회.언.니.에 비하면요. 학교친구도 동네언니도 아니고 교회언니란 말이지요. 주일예배 한 번 드릴 때마다 ‘사랑’이란 단어를 최소 세 번 이상은 말하게 되는 곳이 교회잖아요. 좋게 말하면 신앙의 컬러가 다른 거고, 쉽게 말하면 그냥 이유 없는 비호감이예요. 사랑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을 좋게 생각해보려는 노력도 해보고요. 대입 시험을 칠 때는 ‘언니, 기도할게요. 축복해요’라고 적은 카드와 초콜릿을 주기도 했고 애써 생일도 챙기곤 했습니다. 그러다 눌러놓은 미움과 분노가 쌓이고 쌓이면 편한 친구 하나 앉혀놓고 끝도 없이 그 언니를 씹어대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뭘 해도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일 년에 한 번 있는 수련회의 저녁집회와 기도회는 소망의 시간이었지요. 뜨거운 기도회가 정점을 찍을 무렵 무엇인가에 이끌려 우리는 평소 불편했던 사람을 찾아가 손을 맞잡고 기도했었고, 물론 저는 그 언니와 부둥켜안고 회개와 화해의 눈물 콧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미워하지 않으리라. 아~ 이젠 보혈의 공로로 다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리라..... 짜자잔. 그리고 ‘마지막회’ 라는 자막이 올라가면서 저의 이야기가 마치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련회가 끝나면 여지없이 다시 속세(?)로 돌아와야 했고 어떻게든 다음 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가고 있었지요. 안타까운 건 뜨거웠던 기도회의 감동은 어디로 가고 그 언니와는 헌신예배 때 부를 찬양 선곡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다시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은근 걸고넘어지고, 은근 비꼬고, 은근 밀어내기를 다시 반복하는 그녀와의 일상. 그 날의 회개와 화해와 불타오르던 사랑은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 저는 나이도 먹고, 학벌도 높아지고, 신앙의 경륜이 쌓였으며,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곁엔 이기적인 직장동료의 모습으로, 불편한 시댁식구의 모습으로 둔갑한 그 교.회.언.니.가 늘 함께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저의 내면의 목소리는 기로에 섭니다. ‘나는 안 돼. 내가 지금 누굴 치료한다고? 누굴 상담한다고? 나와 상담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치는 이 사람이 내가 어떤 인간인줄 알까? 내 안에 어떤 폭탄이 숨겨져 있는 지 그 실체를 알아도 날 지금처럼 신뢰해줄까? 난 애초부터 밴댕이 속 같이 좁아터진 인간이었어.’ 라면서 자기비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아무 일 없다는 식으로 가는 겁니다. 오랫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 관계는 ‘내 문제가 아니라 너의 문제야. 나는 진짜 열심히 사랑하려 노력했어. 그러나 마음을 열지 않았던 건 너야. 그러니 나는 선한 편이고, 너는 나쁜 나라지. 그런 식으로 사는 너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복을 받을 일 없고 조만간 큰 코 다치게 될 거야. 오케이! 노우 프라블럼!’ 라면서 책임전가하고 합리화하기.



관계에 있어 좋은 이정표를 만나다 

그.런.데. 자기비하와 책임전가회피를 오락가락 하는 내면의 전쟁 속에서도 끊임없이 양심을 터치하는 어떤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 손길에 대한 희미한 자각은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과 자유함에 이르는 막연한 초청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관계라는 무거운 짐에 대한 인식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부르심과 맞닿았고 그 지점에서 목이 말랐고 그 목마름은 ‘성령충만한 삶’에 대한 갈망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 날 그 날 잠시 마른 목을 축이며 근근이 살아가는 삶 대신 흐르고 넘치는 생수의 강에 몸을 맡기고픈 영원에의 목마름이었지요. 그렇게 목말라 우물가에 있는 저에게 ‘엣다, 이거 하나 읽어봐라’ 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처럼 <내 안에 접힌 날개>라는 책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펼친 그 책의 서두에 에니어그램은 마치 20여 년 전부터 널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제게 도전장 같은 질문 하나를 던졌고 도전장은 초정장이 되어 저를 깊은 내면의 여정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왜 그토록 자주 하나님께로 또는 이웃에게로 향해 나가지
못하고 계속
우리 자신과 부딪히는가?’

 
그렇습니다. 제가 콤플렉스라고 고백한 문제는 사실 지속적으로 나 자신과 부딪히는 문제였습니다. ‘관계문제’라고 이름을 붙이면 나 아닌 타인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니까 마치 내 마음 바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꼬인 관계’는 엉켜있는 내면을 반사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에니어그램이라는 거울은 이제 대놓고 제 내면을 비추어 줍니다. 20년을 끙끙거려왔던 초강력 울트라 콤플렉스는 빙산의 일각이었지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아’라는 끝도 없는 이기심의 늪을 직면하고 부인하는 과정 없이 이웃에게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부인’이란 그저 ‘화장실 청소와 복도청소가 있다면 나를 낮춰서 먼저 화장실 청소를 선택하는 것, 누군가와 나의 생각이 다를 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조금 더 쿨하게 내 의견을 포기하는 것, 갈등이 일어났을 때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등 주일학교 설교의 결론부분 적용처럼 몇 가지 덕목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니어그램은 ‘부인’은 아는데 ‘자기’는 몰라서 영적 성숙을 향한 큰 걸음을 떼지 못하는 제게 좋은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 당신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이 누구인가요?’ 라고 빌 하이빌스 목사님은 묻습니다. 일천한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함께 찬양팀을 섬기던 친구가 내년엔 찬양팀 그만두고 주일학교 교사를 해야 하겠다는데 실은 그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당신 때문이라면, 하루는 맑고 하루는 흐린 종잡을 수 없는 당신의 기분에 모임의 모든 사람들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쉽게 말해놓고 일이 닥치면 번번이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김을 빼는 당신에게 당신의 친구들이 기대를 접은 지 오래라면, 밤늦도록 긴 얘기를 나누며 헤어진 당신의 동역자가 ‘저 친구 도통 자기 속을 정직하게 얘길 하지 않아’ 하는 공허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몸이 안 좋아 좀 쉬어야겠다며 사직서를 낸 직장 동료의 진짜 사직이유는 바로 당신의 아무렇지 않게 던져대는 모욕적인 말을 견디기 어려워서라면, 새로이 GBS조를 짜는데 모든 조장들이 내심 맡고 싶어 하지 않는 기피 조원 1순위가 당신이라면....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나의 진실이라면 어떻습니까? 이보다 더 많은 나의 의도하지 않은, 생각지도 못한 약점들로 지금 누군가를 말 못할 고통을 받고 있다면요. 그리고 나없는 어떤 곳에서 그 모든 얘기가 진실처럼 회자된다면요. 마치 내가 지금 누군가를 향해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무슨 소리냐고?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넌 왜 그렇게 받아들이냐고
? 저는 이제 최소한 그렇게 다짜고짜 방어하고 부정하는 건 조금 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에니어그램이 준 선물이지요. 어쩌면 나보다 타인이 나의 실체와 특히 약점에 관한한 더 잘 볼 수있다는 것도 인정해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힘이 빠지다보니 ‘관계의 문제’는 오늘도 여전히 저의 아킬레스건이지만 조금 숨통이 트이고 살짝 가볍게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이 느껴져요. 문제는 여전하지만 그게 제 발목을 잡고 늘어지게 두지 않는 걸 배웠으니가요. 무엇보다 ‘
, 의 노력, 의 은사, 의 기도, 의 헌신...’ 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서 조금 공간이 생기니 이미 충만히 계셨던, 그렇게도 목마르게 젖어 들고 싶었던 그 분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초대장을 쓴다는 게 길어졌습니다. 여러분을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여정에 초대합니다. 에니어그램과 함께 하는 여정을 위해 다음 달부터 여러분을 저희 집 거실로 초대하겠습니다. 저희 거실은 커피가 있고, 음악이 있고, 책이 있는 북카페 같은 곳입니다. 무엇보다 저희교회 청년들이 딱딱하고 칙칙한 ‘사모님’ 대신 ‘모님’이라고 불러주는 제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볶은 신선한 원두를 정성을 담아 핸드드립 한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여러분과 마주앉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에니어그램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제 초대, 받아주실거죠?




< 큐티진 > 8월호, '藥이 된 冊' _ 래리크랩의 <파파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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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려 ‘여보세요’하고 받기가 무섭게 ‘엄마다’ 하면서 친정 엄마의 거룩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너 기도 해야겄다. 니 외숙모 말이다. 지난 번이(에) 넘어졌잖냐. 그려(래)서 허리를 아주 못 쓰게 됐단다. 니 외삼촌 어쩐다냐. 그려(래)서 다 합심혀(해)서 기도허(하)자구 전화혔(했)다. 내가 지금 이모들이랑 다 전화혔(했)는디(데) 아무튼지 간에 합심혀(해)서 기도허(하)자. 니 외숙모 화장실 출입 정도는 허(하)게 혀(해)달라고 기도혀(해). 그려(래)야 니 외삼촌이 살지, 꼼짝도 못허구 누워 있으면 워쩌~어. 너 어렸을 적부터 니 기도는 잘 들어주시 잖여~ 알었지. 꼭 기도혀(해)라. 나는 오늘 저녁이(에) 철야 간다. 끊는다.’ 딸깍!

매 주 금요일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철야기도를 하시고, 매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에는 아예 한 달 내내 철야기도로 헌신하시는 80을 넘기신 노 권사님의 기도이다. 오늘도 엄마는 밤을 지새우면 외숙모와 외삼촌의 성함을 부르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화장실 출입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로 허리가 회복되게 해주시라’고 애타게 기도하실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 명령을 하달 받은 권사님의 교만한 딸은 ‘하나님! 외숙모가 화장실 출입 정도는 하도록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주님 뜻대로 인도하옵소서. 주님, 당신의 뜻이라면 외숙모를 회복시켜 주시고 외삼촌을 위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고상을 떨 확률이 많다.


기도! 특히, 기도의 응답! 믿음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가슴 벅찬 소망을 안겨주는 말이다.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런 확신이 마음에 차오르면 당장 돈이 없지만 내일이면 밀린 월급을 받을 사람처럼 답답한 마음에 소망의 빛이 반짝하고 비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소망을 품고 기도한다. 또 ‘기도응답의 조건’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될 줄로 믿쓉니다’를 빼 먹지 않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했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 아닌 ‘거절’ 판정을 받았다고 느껴졌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입사원서를 내고 기도했던 회사에서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모시겠습니다’하는 답신을 받거나, 찍어두고 기도했던 형제나 자매로부터 ‘미안한데 사귀는 사람 있어요’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말이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기도로 사시는 분이다. 매일 새벽기도와 일주일에 한 번 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기도, 1년에 두 달은 아예 매일매일 철야기도를 하시며 한평생을 살아오셨다. ‘나는 기도 안하면 죽는다’라고 고백하시는 분이다. 이런 어머니조차 많은 기도응답의 간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표현하면 응답된 기도만큼이나 기각 내지는 미결인 기도제목도 많다는 것을 나는 안다. 될 줄로 믿고 기도했으나 딸이 대입에서 낙방을 하기도 했고, 당신의 혈압이 떨어지기를 기도했으나, 허리의 통증이 나아지길 기도하셨으나 여전히 고통을 지닌 채 기도로 밤을 지새우신다.


이렇듯 기도에 대한 깊은 갈망과 더불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일말의 의혹을 품고 나는 늘 기도한다.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만난 김영봉의 <사귐의 기도>를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분명하게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지니 요정을 불러내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맞다. 간청하는 기도는 기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내 마음에 사는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싫어. 나는 아빠가 날 사랑한다는 것보다 지금은 사탕이 더 좋아. 당장 지금 사탕을 사 줘. 그래야 날 사랑하는 아빠가 의미가 있어. 사탕 사 줘’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당장 눈앞에 산적한 나와 이웃의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되는 기도가 더 좋다고 솔직하게 아주 은밀히 나는 고백한다. 아니, 최소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하는, ‘기도할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거야’ 라는 말이 피차에게 궁색하거나 공허한 위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할 뿐 아니라 하나님 손에 들려진 쇼핑백 안에 있는 선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운동이든 어떤 기능이든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초보자에게는 아주 능숙한 전문가보다는 나보다 조금 먼저 시작한 선배의 코치가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 분야의 대가가 된 사람은 이제 시작하는 내가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너무 멀리 가 있기 때문에 ‘쉽게 가르치는’ 것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를 펼치고 초반부부터 안심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가 목사님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닌 상담심리학자라는 것,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점 중에 하나가 ‘기도’라며 기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기도 콤플렉스가 있는 나를 안심시키고 무장해제 시켰다. 안심을 하다못해 ‘이런이런... 래리 크랩이 젊은 시절에 이랬다면 지금의 나보다도 못한 거 아냐?’ 하며 은근 자만심까지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래리 크랩 특유의 마음을 읽어내는 전술에 휘말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파파기도’를 입게 달고 살았다. 운전을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심지어 남편과 갈등에 휩싸일 때조차도 바로 ‘나의 파파’를 부르며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파파기도는 너무 쉬운 기도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의 나를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기도이다. 그러나 파파기도는 아주 어려운 기도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안다는 건 얼마나 긴 영적여정인가? 이렇게 되면 기도는 단지 기도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누구이신 것과 내가 누구인 것을 규명하는 문제는 믿음의 본질을 꿰뚫는 문제가 아닌가?

PAPA기도를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서 단지 기도가 아닌 ‘나’와 ‘그 분’이 계신 정확한 지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붉은 동그라미를 칠 수 있게 된다.


Present : 내 안에 어떤 일이든 간에 파악 가능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Attend :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예의 주시하기.
Purge :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놓기.

Approach : 하나님을 나의 ‘1순위’로 여기고 나아가기.


이 순서에 따라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비로소 PAPA의 손에 들려진 쇼핑백이 아니라 PAPA와 눈과 눈을 마주대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응답받지 못했던 기도에 대한 혼동과 오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말이다. 무엇보다 좋은 이 책의 효능은 책을 읽다말고 기도하기 위해 책을 내려놓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연애를 잘 하기 위한 책을 들고 아무리 공부한들 연애를 잘 하게 되겠는가. 기도는 결국 그 분과 더불어 대화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할 수 있는 한 다 열어 그 분의 말씀을 들어보는, 기도 그 자체로 배워지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겠나.


잠이 빨리 깬 새벽에,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이 상한 날에, 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열심히 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느껴지고 삶의 모든 것이 공허해질 때,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로 꽝꽝거리며 설거지를 하다가도 바로 그 순간에 파파를 부를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파파에게로 가 진실하게 내 상황을 보고하고, 왜 더 빨리 파파에게 올 수 없었는지를 고백하고, 그 순간 무엇이 내게 1순위였는지를 고백한 후에 귀 기울여 파파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다. 그렇게 기도하는 날이 오랠 때 나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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