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藥이 된 冊12> QTzine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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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과 21세기를 위한 영성> 정현구, 한들출판사

‘접속할 필요도 없어. 열어 보지 말아야지. 읽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가는 어느 새 클릭을 해서 읽어버리고는 마구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던 아프간 피랍과 관련한 수많은 댓글 혹은 악플들. 어느 새 깊은 상처와 독이 되어 마음과 몸에 퍼져서 불면의 밤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 날들로 이어졌던 참으로 힘겨운 여름이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지난 여름이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이유는 거기 있을 것이다. 그 댓글 또는 악플들이 겨냥하고 있는 표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 소위 말하는 네티즌들이 퍼붓는 비난의 화살은 더위와 굶주림과 공포에 유배되어 있던 그 형제자매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우리 기독교인들, 나의 몫이었다는 것 말이다. 우리는 확실히 보았다. 우리가 사는 땅 대한민국에서 우리의 기독교가 위치해 있는 지점을 빨간 펜으로 정확히 동그라미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름 우리는 할 말을 잃었었다. 그리고 자존감이라는 것이 곤두박질쳤다. ‘맞어. 우리는 그것 밖에 안 돼. 우리는 욕 먹어도 싸. 우리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저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안을 들여다보면 더 기가 막힐 걸’

이렇게 바닥에 곤두박질 쳐 나뒹구는 자존감이 일어나 서지를 못했다. 이럴 때, 우연히 손에 들어와 읽게 된 ‘주기도문’에 관한 책이 뜻밖의 보약(補藥)이 되어 배에 힘이 들어가게 하고 영적인 원기를 회복토록 해주었다. 사실 약 기운은 약봉지를 펼치자마자 ‘서문’에 쓰인 몇 문장으로 벌써 게슴츠레 한 눈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많이 부흥했고, 또 그 존재가 많이 알려졌는데 왜 그런 것일까? 생각건대 기독교란 존재가 교회를 통해서 알려지긴 했지만, 정작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깊은 영성과 사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 예수님의 사상과 그 분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의 영성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다시 사심을 잘 안다 자처하며 예수님에 관한 모든 정신적 저작권을 독점하고 있는 우리들의 문제다. 나의 문제다. 세상을 향해서 ‘나 봐바. 내가 예수님을 보여줄게. 교회 와 봐. 교회에서 예수님을 보여줄게’ 하지만 결국 내 삶에도 많은 교회 가운데도 예수님의 영성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 솔직한 사실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공연한 불신앙의 걱정 하나를 내려놓고 저자의 다음 말을 듣는다.

‘만약 기독교의 균형 잡힌 영성과 사상의 핵심이 제대로 알려진다면, 나는 많은 사람들의 기독교를 그 대안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영성과 사상의 핵심을 간결하면서도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주기도문>이다’

어려서 내가 배우지 말았으면 좋았을 노래가 하나 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늘 감사합니다. 아멘’ 아마도 말을 막 시작하던 때부터 이 노래를 배웠지 싶다. 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밥알을 입에 넣고 씹는 것 사이의 약간의 시간 차 외에 거의 노래와 밥 먹는 행위는 같이 붙어 있었던 것 같다. 밥을 봤다하면 이 노래를 자동으로 부르고 먹었으니까.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이 노래를 식기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식사를 앞에 놓으면 전혀 기도라는 느낌 없이 고개를 숙이고 이 노래의 가사를 재빠르게 한 번 훑고 나서 식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때문에 그렇게 될 때까지 아주 정신을 차리고 있던 몇 번 외에는 식탁 앞에서 진실하게 ‘양식을 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감사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주기도문 역시 마찬가지다. 내게 있어서 주기도문은 어릴 적 매일 저녁마다 텔레비전에서 가장 재미있는 프로를 할 시간에 드려지던 가정예배, 그 가정예배가 끝났음을 알리는 복음 같은 기도문이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시작하면 ‘아~ 끝났다. 예배 끝났다’ 하는 수업 마치는 종소리 같은 신호 그 이상이 아니었다. 어려서 이 기도문 안에 담긴 깊은 영성을 제대로 배웠더라면....이 나이가 되도록 그렇게나 많이도 했던 ‘주의 기도’로 인해서 내 삶과 존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현구 목사님의 <주기도문과 21세기를 위한 영성>을 밤마다 읽으며 지낸 지난 여름, 셀 수도 없을 만큼 외웠던 지난 날 외웠던 주기도문에 진실과 눈물을 담아 다시 올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그 다음 주에 이어질 설교를 기대하는 것처럼 다음 장의 내용을 기대하고 사모하며 읽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하늘로부터 시작한 기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면서 오늘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땅의 일을 구하는 것까지 내려온다. 그렇다. 하늘과 닿지 않는, 영원과 잇대어지지 않는 땅의 일에 대한 해결은 없다. 모든 땅의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닿아야 하고, 그 하늘의 뜻이 오늘 내가 사는 땅의 일에 다시 잇닿아야 한다. 그리고 결국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그 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기도문에 대한 알아듣기 쉬운 설교를 한 편 들었다고 우리의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같이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이걸 읽고도 어느 예배에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외우고 있었다. 아는 그 순간 내 몸과 행동과 생각이 함께 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글을 쓰다가 말고 의자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처음 소리를 내서 기도를 시작하자 예배가 끝나는 것 같은 몸에 붙은 타성이 고개를 들었다. 한 번을 외워 기도하고 또 한 번을 소리 내어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고, 다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불렀다. 반복이 될수록 수십 년 타성의 구정물이 빠져나가는 는 순간하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부분을 기도하는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올라온다. ‘개뿔, 내 말과 행동으로 도대체 어떻게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단 말이냐. 교만이 머리까지 닿은 나의 예배하며, 하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는 나의 욕심에 찬 하루하루를 통해서 말이다’ 주의 기도는 회개로 변하고, 눈물로 변했다.

평양부흥 100년을 맞아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올 해였다. 교회가 아니면 어느 영발 있는 선교단체에서 뭔가를 일으켜서 그 바람을 타고 나도 부흥을 경험할 것만 같던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다. 낮아진 기독교인의 자존감으로 상처가 많이 남은 한 해였다. 실컷 욕 먹어 낮아진 자존감 그대로 혼자만의 부흥을 위해서 남은 시간을 보내야지 싶다. 정현구 목사님의 말대로 주기도문이 주는 깊고, 균형 있는 영성 안에 거하는 것이 이 시대에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인 분들은 참 힘들겠다 싶다.
한 달에 한 번 쓰는 글을 가지고도 이렇게나 스트레스를 받고,
이걸 쓸려면 한 며칠은 애들 와서 얼쩡거리면 완전 불벼락을 내리고...하는데 말이다.
A4 두 장 짜리 글을 쓰면서 이렇게 머리를 쥐어 짜다니...

평생 공부하기, 독서에 대한 책과 나름의 책에 대한 글이다.
다 쓰고 남편한테 심사를 받으면서 "여보! 청년들이 이 글 읽으면 책 읽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 했더니...."아니~ 대부분 이 글을 안 읽지" 이런다.ㅜㅜ
청년들이여! 책을 읽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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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고미숙, 그린비


남편과 함께 결혼과 연애에 관한 특강을 갈 때가 가끔 있다. 남편이나 나나 청년기-정확하게 말해서 교회에서의 대학 청년부시기-를 남다른 진지함과 지난한 고민으로 보낸 터라 청년들의 일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 또한 남다르다. 생각해보면 청년의 시기에 연애와 결혼, 소명을 찾아 가는 것, 자기를 확고하게 해 가는 것(자신의 매력을 발견해 가는 것) 등이 따로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다. 연애와 결혼에 관한 얘기를 하다보면 자기 정체성에 관한 얘기를 안 할 수 없고, 소명이나 직업에 관한 얘기 또한 빠질 수 없다(많은 커플들이 헤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두 사람 중 하나 특히 형제들이 진로에 관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개인적으로 내리고 있다). 때문에 강의할 때마다 ‘이런 배우자를 허락 하소서’ 라며 목록을 적고 정리하는 시간에 ‘이런 배우자가 돼야지’ 하며 자신을 가꾸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한다. 어떤 사람이 나의 짝일까를 찾느라 쏟는 에너지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라는 얘기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소명은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풍기게 된다. 그 뭔가 다른 향기는 뭇 이성을 끌어 모으는 꽃향기가 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꽃을 찾는 나비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나비를 불러들이는 향기로운 꽃이 되는데 자신을 투자해라!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매일 빙빙 도는 뿔테 안경 끼고 양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은 채 삶에 대한 고민과 기도의 흔적을 가지고 칙칙한 번민의 나날을 보내란 말인가? 나를 가꾸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말이다. 어렴풋이 답이 나올 듯 말 듯 한 이 난제에 대한 답을 뜬금없이 <호모 쿵푸스-공부의 달인>이라는 책에서 발견한다. 이 책의 저자 고미숙의 입을 빌어 한 마디로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다. 공부하라! 매력 있는 청년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면 된다. ‘학교 다닐 때도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공부를 또 다시 하라구? 그럴 수 없다규욤!’ 라는 대답이 들리는 듯하여 사실 젊은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공부해라. 책 읽어라’ 하는 말을 강하게 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았다. 헌데 고미숙 이라는 공부의 달인은 ‘공부하고 책 읽으면 매력남, 매력녀가 될 뿐 아니라 연애에 성공한다’ 라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이 뿐 아니다. 공부를 갖다가 연애에다 끌어다 붙이고, 밥상 얘기에 끌어다 붙이고, 신체의 전이, 우정, 심지어 혁명에까지 끌어다 붙인다. 연애 성공하고 싶은 사람 공부하고, 자신의 기질을 바꾸고 싶은 사람 공부하고, 인생의 모든 순간 공부하고 책을 읽으란다. 그래서 사람을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로’ 갈라놓으니 이거 뭐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란 얘기인고?


나는 ‘공부’ 하면 시험공부가 떠오른다. 그리고 도대체 내 머리 속에는 그려지지도 않는 우리나라 어느 지방의 특산물이 뭐고, 몇 년도에 고구려가 세워졌다가 몇 년도에 망했고-아직도 내 입을 맴도는 근초고왕! 그런데 근초고왕이 몇 년도였더라?- 하는 것들을 무작정 암기해야 했던 괴로운 시험 전 날 밤이 생각난다. 그렇게 의미도 모르고 무작정 한 공부로 대학을 갔다. 전기 대학에 실패해서 후기대를 갔다는 것이 창피했다. 학교출판사가 인쇄된 교과서를 누가 볼까 감추며 들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내게도, 많은 사람들에게도 ‘공부’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다행히 대학 이후에 참 공부에 눈이 떠 즐겁게 적극적으로 공부하며 그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지만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대학생활을 하던 중 비로소 모르는 걸 알고 싶어서 책을 선택하고 읽으면서 내 몸과 마음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참 공부를 하게 된 것 같다. 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선배들은 ‘의식화 교육’을 위해서 철학 세미나라 불리는 -매주 모여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반강제적으로 가입을 시켰다. 거기서 배우는 것들이 신기하기만 하고 배우는 즐거움을 살짝 느끼게 해줬지만 나 스스로 선택한 공부가 아니라서 슬슬 자존심이 상했다. 그 모임에 나와서는 선배들이 가지고 있던 커리큘럼에 있는 책들을 혼자서 읽었다. 대부분 사회과학 책들이었고 현실참여적인 시와 소설들이었다. 단지 궁금하고 알고 싶어서 열심히 읽었다. 한 책을 덮으면 자연스레 이미 덮은 책에서 소개한 다른 책이 떠오르게 마련이어서 다음 책을 선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한 혼자공부는 여성학 책에서 종착역을 맞았다. ‘너는 유아교육학과니 여성학과니?’ 하며 친구들이 놀렸다. 바닥을 기던 학점이 들통나면 ‘야! 너 여성학과로 편입하면 수석하겠다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교육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이오덕 선생님이나 윤구병 선생님 같은 분들을 책으로 만나게 되니 세상에는 참 바른 생각으로 가르치시는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율동이나 하고 손유희나 하는 유치원 교사이고 싶지 않아서 손이 가 닿는 대로 여러 인문학 책들을 읽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다른 뉘앙스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목사님의 설교가 당혹스러워질 때는 예수님을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책들을 만나서 과외수업을 받았다.

모든 젊은이들이 가는 길, 연애와 실연의 상처로 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제 다시 연애 같은 건 안 하리라’ 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뭐가 문제지? 앞으로 또 실패하는 연애를 하기는 싫은데..’ 하면서 크리스천의 연애와 결혼에 관한 책을 손에 들고 나의 실패한 연애를 진단하면서 몇 년을 보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와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며 답을 못 찾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과 함께 연애와 결혼에 관한 책을 읽고 나누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모임을 가졌다.

결혼하고는 남편 한 사람 정도 사랑하고 이해하는 일은 내게 껌 씹으면서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 걸!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세상을 이해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마침 진로를 바꾸어 하던 공부가 음악치료였으니 ‘사람’에 대한 탐구가 이  때부터 새로운 공부 프로젝트가 되었다. 남편 한 사람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자는 목적으로 시작된 ‘관계에 관한 공부’는 결국 성격유형을 공부하는 길로 이끌었고 그 길의 끝에는 ‘전문 강사’라는 자격증이라는 의외의 선물이 준비돼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큐티진에 ‘책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이렇듯 이 지면에 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심 없이 읽어온 책을 통해 열린 길이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성적이나 학벌이 아니라, 바로 근기(根器)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충전할 수 있는 길은 단언컨대 독서밖에 없다’라고 공부의 달인 고미숙은 말한다. 근기란 ‘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에너지의 분포도 같은 것’이란다. ‘사람의 그릇’이라고도 하고 ‘카리스마’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비쳐질까를 많이 생각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책을 읽으라. 내가 잘 모르는 것인 무엇인지, 지금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찾아내어 그 답을 알려주는 훌륭한 선배들의 책을 읽으라. 그리고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친구들과 나누고, 나눈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그대! 어느새 달라지고 커진 당신의 카리스마에 세상이 놀랄 것이다.^^


 

QTzine 11월호.<藥이 된 冊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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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간증을 다 싸잡아 도매금으로 넘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나는 간증으로 재미를 본 적이 별로 없다. 재미로 간증을 듣냐고? 은혜 말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은혜 받은 것’ 이라면 그런 적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심할 때는 어떤 간증을 듣고 나서 ‘나는 왜 요모냥 요 꼴이냐? 믿음도 없고.’ 하면서 자괴감만 충만해질 때가 있다. 하나님께 이 만큼 드렸더니 몇 배로 축복해 주셨다. 이렇게 헌신했더니 연봉이 마구마구 오르더라. 내가 산 땅이 그린벨트가 풀리더라. 믿어봐라. 믿어만 봐라. 하나님께 문제를 던져봐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다 해결해 주신다. 물론 간증도 사람의 말이라 잘 된 것,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에피소드를 골라서 하다보면 좋은 얘기 성공한 얘기가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부어주시고 즉각 즉각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을 통해 나누는 것으로 은혜받고 도전받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증을 들으면 ‘아직 나는 안 돼. 지금은 뭔가가 부족한 거야. 채워져야 해. 나는 좀 더 나아져야 은혜를 받을 수 있어. 나도 지금보다 잘 살게 되는 날이 올 거야. 내 기도도 하기만 하면 딱딱 응답받는 그런 날이 올 거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 하면서 오늘 여기서가 아니라 언젠가 내가 더 나아졌을 때 만날 하나님을 그리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기 기다려’ 이 찬양을 입에 달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최소한 내가 기다리던 ‘주님의 시간’은 진로에 대해서 불투명하던 그 20대에 분명한 진로가 눈에 보이는 때, 또는 결혼 적령기라 일컫는 때를 보내며 막연한 불안과 외로움 가운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를 만나는 때, 그런 때였다. 그러니까 ‘주님의 때’는 뭔가 오늘보다는 나아지는 때라고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잘되고 성공하고 형통하게 되는 때였다. 그리고 찬양의 가사처럼 ‘기다리는 것’이 능사라 여기며 이 찬양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렇다. 묵묵히 기다리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찬양을 부르고 은혜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놓친 것이 있었다. ‘내일’이 내게 찾아올 때는 언제나 ‘오늘’로 온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그러니 주님의 뜻이 내 삶에서 이뤄지는 것은 ‘내일’이 아니라 반드시 ‘오늘’이라는 것.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어쩌면 기도할수록 찬양할수록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되는 방식으로 가기도 했던 것 같다. 오늘 채워지지 않는 모자란 부분이 채워져야만 적어도 내 믿음을 증명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삶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가만히 ‘오늘’을 들여다보면 ‘오늘’은 온통 한계와 모자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한 달 수입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아지면 여러 모로 걱정이 줄 텐데... 여기서 한 5킬로만 빼면 딱 보기도 좋고 건강해질 텐테... 그 사람과의 관계만 회복되면 교회에(직장에, 친척 모임에) 가는 게 한결 마음이 가벼울 텐데...매일 큐티하는 것만 잘하면 내가 영적으로 도약이 좀 될 텐데...우리 아버지가 나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조금만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내 자신감이 충천해질 텐데...이번 프로젝트만 완벽하게 해내면 우리 사무실에서 내 입지가 확실해질 텐데...시간이 조금만 더 여유 있다면 읽고 싶은 책 마음껏 읽을 수 있을 텐데...


어렴풋이 내게는 이러한 한계에 부딪혀 당혹스러울 즈음에 만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내게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한데 이 약점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없었던 아이러니한 기억도 있다. <모자람의 위안>은 우리 일상에 겪는 모든 한계에 대해서 총망라한 책이다. 몸의 한계, 도덕성과 영성의 한계, 지식의 한계, 자유의 한계, 로맨스나 섹스의 한계 까지. 사실 이렇게 직면하는 한계들은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고 실존의 무게로서  가벼운 것이 아닐진대 저자는 때로 가볍다고 느껴질 만큼 얘기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한계를 밝히고 한계가 주는 유익을 밝히는 한 챕터 한 챕터가 삼대지 설교(three points sermon)처럼 명확하다. 그 명확하고 유쾌한 소리는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고, 인정한 상태에서 누리는 복을 누려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가만 저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모자람’은 위로와 위안을 넘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임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햇살이 비추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 채워지지 않는 것 같은 부분에서 발견하는 ‘여백의 미’라고 할까? 우리 완전하신 아버지 완전하신 어머니이기에 과잉보호하는 부모 같지 않은 분이다. 도대체 아이가 발을 땅에 디뎌볼 사이 없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승용차로 모셔 나르며, 아이의 모든 스케줄을 완벽하게 짜서 제시하고, 자기는 못 먹어도 최고급의 교육환경과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하는 부모 말이다.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계에 부딪혀 안간힘을 쓰는 아이가 가엾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그 때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게 하는 것이 가장 사랑하는 방법임을 아는 지혜로운 부모 같은 하나님. 그 이상의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신가? 하나님의 권능의 빛이 미치지 않는 것 같은 그 여백, 그 채워지지 않아 갈증 나는 20%, 아니 20%의 한계에 숨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는 감히 헤아려보려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내 잔이 넘칠 날을 기다리면서 끝없이 감사와 축배를 유보할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잔을 들고 진심으로 ‘브라보!’를 외칠 수 있다면...


올 초 주방 일을 보기 위해 늘상 서 있는 싱크대의 눈높이에 이런 말씀을 붙여 놓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경건에 큰 도움이 됩니다(딤전6:6)’ 아닌 게 아니라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서 경건에 큰 도움이 된다. 더 채워졌으면 싶은 욕망을 가득 안고 설거지를 위해 말씀 앞에 서면 마음의 창을 다시 닦아 맑게 해주는 말씀이다. 오늘 이 순간에 내게 맡겨진 말 안 듣고 뺀질대는 아이, 내가 원하는 만큼 더 깊이 정서적으로 돌봐주지 않는 남편, 언제 수입이 줄 지 모르는 불안한 직장생활, 이제 어린 딸까지 놀려대는 내 돌출형 치아, 여전히 만나면 인사하기도 껄끄러운 뒤틀린 관계.... 이런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으면  샬롬은 저절로 이루어질 일이니 내 일상이 거룩과 경건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겠나. 오늘도 나는 채워지지 않은 잔을 들고 마음에 새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경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모자람의 위안> 도널드 맥컬로우, IVP


 <藥이 된 冊10> - QTzine 10월호

<QTzine>9월호 기고글 '藥이 된 冊_9'
   
                     리영희 교수의 <대화> 대담  : 임헌영,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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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쓴 약 <대화>

두 세 시간을 마주 앉아 대화해도 힘든 줄 모르는 대화가 있다. 길어져도 지치지 않는 대화 중에 ‘수다’가 있다. 주제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주제의 일관성이란 없고, 신변잡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형국이라 깊이 또한 없다. 그럼에도 맘에 맞는 사람과의 수다는 어느 정도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내기 때문에 내게는 싫지 않은 대화이다. 제일 살 맛 나는 대화는 맘에 맞는 사람과 맘에 맞는 주제로 끊임없이 삶의 나눔과 더불어 비젼을 공유하는 대화이다. 이런 대화는 두 세 시간 쉬지 않고 떠들어도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느낌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한참 연배가 높으신 어른들과 마주 앉아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가 있다. 과연 살아온 날의 수가 다르고, 경험의 넓이와 깊이가 다르기 때문에 가만 듣고 앉아 있기만 해도 배울 것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아주 익어서 바로 먹어도 좋은 인생의 열매를 가만 앉아 얻어먹자면 감수해야 할 것도 있다. 경험과 경험이 쌓여 생긴 인생의 많은 노하우들은 쉽게 자기 자랑이 되고, 조금만 수긍해 드려도 그 자랑은 네버엔딩 스토리가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것만 없으면 참 얼마든지 앉아서 배우고 또 배울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어르신의 길고 긴 삶의 여정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삼천포로 빠질 위험 없이, 네버엔딩 스토리가 될 염려 없이 안전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리영희 교수의 ‘대화’를 읽으면서 가진 대화가 그러했다. 80이 다 되신 리영희 교수와의 만남과 길고 긴 대화였다. 이 대화는 때로 우리들이 지나온 시대의 아픔에 다시 몸을 떨게 했고, 그 불의와 질곡의 시대에 글 쓴 죄 값을 몸으로 갚으며 살아낸 곧고 강직한 한 사람의 삶에 머리를 숙이게 했다. 오직 자유를 추구하던 학문연구와 글쓰기가 오히려 그 몸을 옥에 갇히게 하는 역설적인 시대와 개인 간의 불화가 우리의 역사라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정작 이 대화가 입에 너무도 썼던 이유가 있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흐트러지지 않은 매무새로 앉아 들으려 했지만 입에만 쓴 것이 아니라 식도를 온 몸에 퍼지는 듯하여 몸과 마음이 갈팡질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쓴 맛의 정체

가끔 주일 예배에 어느 장로님께서 대표기도를 하실 때 그 예배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라크 파병 문제가 사회적 현안이 되는 그런 시점이었을 것이다. 지금 장로님께서 기도를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모양새는 기도인데 내용은 시국 강연인지 헷갈릴 때가 그런 때이다. 장로님의 기도 속에서 미국이 단지 장로님 말씀따나 우방인지 아니면 기도의 행간에서 읽혀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인지 헷갈릴 때가 그렇다.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미국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일 뿐 아니라 사탄의 농간에 놀아나는 자들이니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라고 힘주어 기도하실 때의 난감함. 휴우~

리영희 교수와의 <대화>에서 내게는 유독 굵은 글씨체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자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참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쓴 우리 선배들의 연약함이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신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그 분을 존경하고 기리며 오늘 날 이라크 파병을 외치는 그 연로하신 장로님들이 과거의 아픈 현대사에 어떻게 일관되게 강한 자의 손을 들어주며 서 계셨는지를 보아야 한다. 누구보다 합리적인 무신론자 자유와 정의를 목숨처럼 사랑하는  노 지식인으로부터 한국현대사에 비친 기독교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약한 자들로 흐르는 원래의 그 사랑에서 멀어져도 한참을 멀어져 있었다. 리영희 교수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때 저녁마다 그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해서 죽어가는 젊은이, 민간인들을 생각하면서 저녁마다 기도하지 않고 잠든 날이 없다 한다. 같은 시절 같은 사안을 두고 미국과 손잡고 베트남 파병을 격려하고 옹호했던 우리들의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밤에 불편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의 어머니, 나의 교회여

나는 일찍이 혼자 되셔서 당신 몸 돌보지 않으시고 오직 자녀들 교육시키는 것에 모든 걸 걸고 살아오신 홀어머니의 딸이다. 우리 어머니는 믿음이 좋으시고, 기도를 열심히 하시고, 순진하시지만 참으로 많은 인간적인 약점을 갖고 계신다. 사춘기 즈음에는 어머니의 약점이 부끄러워서 어머니와 나란히 저자거리를(?) 걷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자라고 철이 들면서 홀로 고생고생해서 나를 키우신 어머니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방어태세가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나에 대한 비판은 백 번 양보해서 ‘그렇지. 내게 그런 약점이 있지’ 라고 힘들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우리 어머니에 대한 어떤 비판도 소화해내기 힘들었다. 우리 어머니의 약점을 내가 다 아니까 가벼운 농담으로라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더 나이를 먹고 나 역시 약점을 지닌 엄마가 되고 난 후에 ‘어머니를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약점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약점을 객관적으로 아는 이상, 그로 인해서 생긴 친척들과의 관계 문제든 무엇이든 조용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 노쇠하고 힘이 없어진 어머니를 향한 효도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비난을 독이 오른 짐승처럼 전투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나와는 상관없는 어머니 개인의 문제라고 고개를 돌릴 것이 아니라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리영희 교수가 말하는 한국교회 편이 아니라, 리영희 교수 편에 서고 싶은 내게는 불가능한 선택에 대한 이기심도 쓴 맛을 더하는데 한 몫 하였다. 처음 책을 펼치고 읽을 때의 마음에 비하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훨씬 차분해진 마음이었다. 100년 전 평양에서 도덕적, 영적 죄에 대한 회개의 운동을 일으킨 그 분들이 우리의 선조인 것처럼 신사참배를 하고, 악한 강자의 손을 들어주어 힘을 실어주던 그 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분들의 연약함 점과 죄를 이제 우리의 것으로 알고 그 비난의 화살을 우리 몸으로 막아내겠다는 자가 처방이 몸과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사랑하고 끌어안기 위해서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고 들으며 쓴 맛을 감내하는 것이 먼저인 것은 분명하다.

이현주 목사님의 책 제목이 마음을 친다. 나의 어머니, 나의 교회여! 아프간 피랍사태로 교회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순간이 있었다. 때론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아픈 비난, 때론 어처구니없는 비난에 ‘나의 어머니, 나의 교회여!’라 외치며 가슴 치며 회개할 일이 아니겠나.

< 큐티진 > 8월호, '藥이 된 冊' _ 래리크랩의 <파파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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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려 ‘여보세요’하고 받기가 무섭게 ‘엄마다’ 하면서 친정 엄마의 거룩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너 기도 해야겄다. 니 외숙모 말이다. 지난 번이(에) 넘어졌잖냐. 그려(래)서 허리를 아주 못 쓰게 됐단다. 니 외삼촌 어쩐다냐. 그려(래)서 다 합심혀(해)서 기도허(하)자구 전화혔(했)다. 내가 지금 이모들이랑 다 전화혔(했)는디(데) 아무튼지 간에 합심혀(해)서 기도허(하)자. 니 외숙모 화장실 출입 정도는 허(하)게 혀(해)달라고 기도혀(해). 그려(래)야 니 외삼촌이 살지, 꼼짝도 못허구 누워 있으면 워쩌~어. 너 어렸을 적부터 니 기도는 잘 들어주시 잖여~ 알었지. 꼭 기도혀(해)라. 나는 오늘 저녁이(에) 철야 간다. 끊는다.’ 딸깍!

매 주 금요일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철야기도를 하시고, 매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에는 아예 한 달 내내 철야기도로 헌신하시는 80을 넘기신 노 권사님의 기도이다. 오늘도 엄마는 밤을 지새우면 외숙모와 외삼촌의 성함을 부르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화장실 출입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로 허리가 회복되게 해주시라’고 애타게 기도하실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 명령을 하달 받은 권사님의 교만한 딸은 ‘하나님! 외숙모가 화장실 출입 정도는 하도록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주님 뜻대로 인도하옵소서. 주님, 당신의 뜻이라면 외숙모를 회복시켜 주시고 외삼촌을 위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고상을 떨 확률이 많다.


기도! 특히, 기도의 응답! 믿음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가슴 벅찬 소망을 안겨주는 말이다.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런 확신이 마음에 차오르면 당장 돈이 없지만 내일이면 밀린 월급을 받을 사람처럼 답답한 마음에 소망의 빛이 반짝하고 비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소망을 품고 기도한다. 또 ‘기도응답의 조건’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될 줄로 믿쓉니다’를 빼 먹지 않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했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 아닌 ‘거절’ 판정을 받았다고 느껴졌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입사원서를 내고 기도했던 회사에서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모시겠습니다’하는 답신을 받거나, 찍어두고 기도했던 형제나 자매로부터 ‘미안한데 사귀는 사람 있어요’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말이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기도로 사시는 분이다. 매일 새벽기도와 일주일에 한 번 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기도, 1년에 두 달은 아예 매일매일 철야기도를 하시며 한평생을 살아오셨다. ‘나는 기도 안하면 죽는다’라고 고백하시는 분이다. 이런 어머니조차 많은 기도응답의 간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표현하면 응답된 기도만큼이나 기각 내지는 미결인 기도제목도 많다는 것을 나는 안다. 될 줄로 믿고 기도했으나 딸이 대입에서 낙방을 하기도 했고, 당신의 혈압이 떨어지기를 기도했으나, 허리의 통증이 나아지길 기도하셨으나 여전히 고통을 지닌 채 기도로 밤을 지새우신다.


이렇듯 기도에 대한 깊은 갈망과 더불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일말의 의혹을 품고 나는 늘 기도한다.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만난 김영봉의 <사귐의 기도>를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분명하게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지니 요정을 불러내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맞다. 간청하는 기도는 기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내 마음에 사는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싫어. 나는 아빠가 날 사랑한다는 것보다 지금은 사탕이 더 좋아. 당장 지금 사탕을 사 줘. 그래야 날 사랑하는 아빠가 의미가 있어. 사탕 사 줘’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당장 눈앞에 산적한 나와 이웃의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되는 기도가 더 좋다고 솔직하게 아주 은밀히 나는 고백한다. 아니, 최소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하는, ‘기도할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거야’ 라는 말이 피차에게 궁색하거나 공허한 위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할 뿐 아니라 하나님 손에 들려진 쇼핑백 안에 있는 선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운동이든 어떤 기능이든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초보자에게는 아주 능숙한 전문가보다는 나보다 조금 먼저 시작한 선배의 코치가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 분야의 대가가 된 사람은 이제 시작하는 내가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너무 멀리 가 있기 때문에 ‘쉽게 가르치는’ 것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를 펼치고 초반부부터 안심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가 목사님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닌 상담심리학자라는 것,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점 중에 하나가 ‘기도’라며 기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기도 콤플렉스가 있는 나를 안심시키고 무장해제 시켰다. 안심을 하다못해 ‘이런이런... 래리 크랩이 젊은 시절에 이랬다면 지금의 나보다도 못한 거 아냐?’ 하며 은근 자만심까지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래리 크랩 특유의 마음을 읽어내는 전술에 휘말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파파기도’를 입게 달고 살았다. 운전을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심지어 남편과 갈등에 휩싸일 때조차도 바로 ‘나의 파파’를 부르며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파파기도는 너무 쉬운 기도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의 나를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기도이다. 그러나 파파기도는 아주 어려운 기도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안다는 건 얼마나 긴 영적여정인가? 이렇게 되면 기도는 단지 기도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누구이신 것과 내가 누구인 것을 규명하는 문제는 믿음의 본질을 꿰뚫는 문제가 아닌가?

PAPA기도를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서 단지 기도가 아닌 ‘나’와 ‘그 분’이 계신 정확한 지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붉은 동그라미를 칠 수 있게 된다.


Present : 내 안에 어떤 일이든 간에 파악 가능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Attend :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예의 주시하기.
Purge :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놓기.

Approach : 하나님을 나의 ‘1순위’로 여기고 나아가기.


이 순서에 따라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비로소 PAPA의 손에 들려진 쇼핑백이 아니라 PAPA와 눈과 눈을 마주대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응답받지 못했던 기도에 대한 혼동과 오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말이다. 무엇보다 좋은 이 책의 효능은 책을 읽다말고 기도하기 위해 책을 내려놓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연애를 잘 하기 위한 책을 들고 아무리 공부한들 연애를 잘 하게 되겠는가. 기도는 결국 그 분과 더불어 대화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할 수 있는 한 다 열어 그 분의 말씀을 들어보는, 기도 그 자체로 배워지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겠나.


잠이 빨리 깬 새벽에,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이 상한 날에, 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열심히 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느껴지고 삶의 모든 것이 공허해질 때,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로 꽝꽝거리며 설거지를 하다가도 바로 그 순간에 파파를 부를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파파에게로 가 진실하게 내 상황을 보고하고, 왜 더 빨리 파파에게 올 수 없었는지를 고백하고, 그 순간 무엇이 내게 1순위였는지를 고백한 후에 귀 기울여 파파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다. 그렇게 기도하는 날이 오랠 때 나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즐겁게 안식할 날> 린 바압, 윤인숙 옮김, IVP


안식일이 안 쉬는 날이 되는 이유


그 옛날 청년시절부터 나의 교회생활은 ‘봉사의 생활’이었다. 봉사라는 의미가 교회에서 사용될 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다 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고, 찬양팀을 하고, 소그룹의 리더를 하고....이런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다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가끔 교회봉사와 신앙생활, 때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삐 움직이는 그 봉사의 현장 어느 곳에 숨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것도 있었다. 주일 이른 아침부터 끼니도 거르면서 밤이 맞도록 동분서주하면서 보내는 주일,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 뭔가 할 도리를 다 한 듯 뿌듯한 자족감.  또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 돈 되는 일도 아니고 그저 희생뿐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열심히 봉사를 할 때 교회 어르신들과 동료들로부터 받는 ‘입 마르는 칭찬의 달콤함’ 맛보지 않으면 모르는 은근한 맛이렷다.

때로 힘에 부치는 봉사를 하며 주일을 너무 빡세게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 두 가지 메리트가 나를 쉬지 못하게 한다. 내가 이래 뵈도 구원을 공짜로 받았는데 하나님께 뭔가 도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뼈 빠지게 봉사할 때 나를 어여삐 보아주시는 그 많은 따스한 눈길들.

그렇다. 내게 있어 안식일이 ‘안식일’ 되지 못하고 ‘안 쉬는 날’이 되는 이유는 내 자체로는 하나님도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존재만으로는 안 된다. 뭔가 성과를 내줘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나는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행위 없이 내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나는 과감히 안식할 수 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닌 이유


시간이 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를 찾는다.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한다. 관계의 존재로 말이다. 내 속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내가 털어놓는 만큼 내게도 자신을 드러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좀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친밀해지고 단짝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 나는 뜬금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떤 친구가 내가 거북해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하다. 역시 예상치 못했던 감정, 배신감 같은 것이 고개를 든다. 가끔은 내가 친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과시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오버하며 친한 척을 해보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어떻게든 연결되고 걸쳐져야만 안심이 되는 내 본성은 내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조차도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마음과 시간의 모든 공간을 그냥 텅 빈 상태로 두지를 못하고 어떻게든 사람들로 채워보려는 욕구 말이다. 시간이 나면 사람을 만나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전화 통화를 한다. 그 정도의 여유조차도 나지 않는다면 늦은 시간 사이버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미니홈피, 블로그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이는 일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그러나 결코 진정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설거지 다 하고 뭐 할거야? 쉴 거야? 컴퓨터 하면서 쉴거야?” 컴퓨터 앞에 앉은 엄마에게 또 묻는다. “엄마! 지금 일하는 거야 쉬는 거야? 어? 이건 누구 홈피야?” 키보드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빠르게 타닥타닥 날 때는 엄마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의자에 약간 기대앉은 상태로 느리게 따닥따닥 클릭하는 소리가 나는 건 쉬고 있는 것이다. ‘아니야! 사실은 엄마는 지금 쉬는 게 아니고 엄마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쉼을 찾.아.다.니.고 있는 거야’라고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겠다.


모든 것 내려놓고 안식하기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안식함’을 통해 거룩한 삶의 리듬 속에 살고 있는 <즐겁게 안식할 날-Sabbath Keeping>의 저자 린 바압, 그녀의 결단과 그에 따른 열매가 부럽다. 도통 삶에서 여백두기를 못견뎌하는 내게, 여백이 생기면 그 여백을 뭔가로 채우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내게 그녀는 조용하지만 따끔한 일깨움을 준다. 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으로 채워야할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충대충 일과 사람으로 틀어막아 수습하려했던 공허함은 바로 나를 만드신 분께로 가서 다시 튜닝이 필요하다는 싸인 이라고 말이다. 튜닝 되지 않은 악기는 합주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독주를 할 때도 스스로의 귀를 불편하게 만들고야 만다. 줄이 다 풀어져서 삶의 연주가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뒤늦은 수습에 나설 것이 아니라, 저자 책에서 보여주는 삶처럼, 아니 하나님께서 보이신 방법대로 여섯째 날에는 정확하게 쉬는 자리로 가는 리듬을 회복해야겠다. 매일 매일 주어지는 나만의 시간을 무엇엔가 걸쳐지는 것으로 얄팍한 위안을 삼을 것이 아니라 비워두고 내려놓고 쉬는 시간이 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 해야겠다.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중동에서 2년 동안의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우연히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 살게 되고, 거기서 전혀 새로운 문화경험을 하면서 발견한 보물이 오늘 이 책을 통해서 내게 전해졌다. 그 간에도 나의 하나님은 수도 없이 내 귀에 속삭이셨을 텐데....‘얘야! 일은 그만하고 내게 안겨 그냥 쉬거라. 뭘 그리 다른 쉼과 위안을 찾아다니는 것이냐? 그냥 나를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너와 함께 산책하고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단다. 내게로 와서 쉬거라. 지쳐서 파김치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지금 나와 함께 휴가를 떠나자는 말이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단다. 나를 찾아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너다워지고 너의 영이 충만해진단다. 내게로 오렴. 내게와 와서 쉬렴’ 그렇게도 안타깝게 속삭이셔도 도통 못 알아듣는, 도대체 ‘참된 쉼’을 모르는 나를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분의 딸을 사용하셨다. 가 가장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처방이 되는 ‘책’을 써서 내 손에 들려지게 하는 이 방식으로 말이다.

 

감기 몸살과 함께 끙끙 앓으면서 쓴 글.

감기가 와서 앓은 것인지,

글의 무게 때문에 앓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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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혁명> - 클리포드 윌리엄스 지음, 최규택 옮김, 그루터기 하우스



오버가 필요한 찬양 인도자

애써 좀 무덤덤해지려 노력하는 편인데도 나는 ‘찬양 인도자’에 대한 취향이 좀 까칠한 편이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기 때문에 직업상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고 배치하는 방식에 대해서 까다로울 수 있다고 스스로 진단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걸려서 넘어가지 못하는 문제는 단지 음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적으로 찬양 인도자나 싱어들의 ‘표정’ 이다. 아마도 찬양하며 받는 은혜가 충만하다보면 자연스레 나오는 감격에 넘치는 표정을 감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찬양 인도자의 멘트나 표정이 ‘오버다’ 싶을 만큼 심하게 홀리하거나 가사와 상관없이 한결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회중석에 앉아서 찬양을 할 때는 오히려 낫다. 내 맘 하나 잘 추슬러서 찬양에 집중하면 되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회중석에 앉아서 인도자와 싱어를 씹어대던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설 때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찬양의 가사에 마음을 쏟자’라고 다잡아먹지만 역시나 회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결국 어느 새 표,정.관.리.에 들어간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의 난감함이란.

게다가 찬양팀의 윗분이나 교회의 어르신들이 ‘아놔~ 앞에 서 있는 싱어들 좀 웃으라고. 표정 좀 밝게 하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찬양을 좀 하란 말이지. 그래야 보는 사람도 찬양할 맛이 나는 거 아닌가?’ 이러실 때 정말 난감하다. 개그맨도 아닌데 마음의 상태와는 상관없는 표정을 지으란 말인가? 무대에 선 희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연기를 보여 달라는 것인가?


고상한 행동, 불순한 동기

교회 주일학교 게시판에 초등부 아이가 글을 하나 올린 걸 보았다. 내용이라곤 별로 없는 짧은 글이었다. 그 내용도 없는 글을 올린 이유를 밝혀 놓은 것이 재미있다. ‘제가 이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요… 1번 달란트 받고 싶어서, 2번 칭찬받고 싶어서…예요’ 아이니까 가능한 자기표현이 아닐까 싶다. 보다 현명한(?) 방법이라면 달란트(이걸 모으면 나중에 큰 선물과 바꾸게 된다)와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 아니었겠나? 이렇게 바로 오토매틱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의 처세와는 달리 아이들의 꼼수는 치밀하지가 못하다.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어른인 내게는 어떻게나 빠른 시간에 어떻게나 교묘한 방식으로 자동화되어있는지… 나 역시 칭찬 받고 싶어서, 내가 하는 훌륭한 생각을 드러내고 싶어서, 이런 멋진 나를 사람들이 좀 부러워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에 ‘바울을 괴롭힐 요량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해야하는 그 살벌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괴롭히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 사람들은 뭐라 하며 복음을 전했을까?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살 길입니다. 제가 이렇게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1번 바울보다 더 유능한 전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2번 바울의 속을 최대한 뒤집어 놓기 위해서 입니다’ 라 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기에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는 않았을까?


분열된 마음의 통합혁명

내 속에서 결코 드러내고 싶지도, 나 스스로 인식하고 싶지도 않은 나의 불순한 동기들이 숨어 있는 방을 발견했다. 그 방에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안부를 물어보는 선한 행동과 짝을 이루어 ‘예수님을 닮은 자’처럼 보이고 싶은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었고, 찬양을 하면서 짓는 은혜에 취한 표정을 통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은혜를 끼치도록 해야겠다는 발칙한 동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방을 발견하고 영 마음이 찝찝해 어쩔 줄을 모를 때 내 손에 들려진 책이 『마음의 혁명』이다. 그렇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숨은 이기적인 동기를 인식하고 내 마음의 분열성을 인식하는 일은 ‘혁명’같은 경험이다. 감기 정도의 자각증상을 느끼며 藥이 되려니 하고 펼쳐든 이 책은 내게 ‘암’을 선고했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았다.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면 됐지 뭐 숨은 동기 까지 이 잡듯 뒤져야 하는 거냐고 물으니 바로 그거란다. 선한 행동으로 끼치는 유익과 그로 인해 오는 반대급부에 중독이 되어 있는 내 영혼의 엑스레이 사진을 내미는 것이다. 영원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영원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으로 살다가는 영혼이 죽는다며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처방전을 내주었다. 정말 나쁜 사람은 누구인가? 나쁜 뜻을 가지고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 아니다. 나쁜 뜻을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헌데 그 뜻이 딱히 나쁘다기보다 불.순.하.다.면 그것은 날이 갈수록 나를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의 혁명’을 통과하며 나는 결심했다. 분열된 마음, 다중성 속에 빠진 마음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빠져나와 ‘마음의 투명함’을 위해 매일 매일 내 속의 숨을 동기를 들춰보겠다고 말이다. 마음의 단일성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도 사람도 내 이기적인 동기를 위해 도구로 삼지 않겠다는 결심과 다르지 않다. 찬양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칭찬일 뿐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은혜 충만한지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설령 그것을 드러냄으로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겠다는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을 돌아보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지 ‘내가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찬양하는 찬양 인도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찬송가 204장)’ 찬양인도를 위해 앞에 설 때마다 끊임없이 이 찬양을 되뇌인다. 찬양 인도자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그들을 바라보며 내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수많은 자기중심적 단편 영화들의 필름을 잘라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저 찬양 시간에 투명한 마음으로 서서 찬양하는 것으로 인해 ‘자아’도 간 곳 없고, 영향력을 끼치고픈 ‘사람들’도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록 말이다.

찬양 시간에 찬양만을 목적으로 진실하게 찬양하는 인도자, 삶에서 사람과 사랑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여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통합된 마음과 자아로 이슬처럼 맑고 투명해지기를….

QTzine 4월호 원고랍니다.

책에 관한 얘기를 쓰는 것이긴 하지만 책얘기 보단 제 삶의 얘기가 더 많죠.

이번 글은 너무 힘들고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라서 클럽에도 쓰지 못했던 얘기를 썼네요.


글의 제목은 달지를 못해서 아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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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기술> - 루이즈 스미디스, 배응준 옮김, 규장

<용서의 미학> - 루이스 스미디스, 이여진 옮김, 이레서원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거예요?

여덟 살 다섯 살 두 아이가 토닥토닥 싸우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눈여겨 볼 때가 있다. 엄마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개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 참고 지켜보면 두 사람(아이)간의 갈등의 생성과 진행과 해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부가 된다. 여러 번 관찰하면서 얻는 결론은 ‘누가 누구보다 더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싸움의 빌미를 어느 한 편이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 맞으면 최소한 그것 보다는 더 때리려 하면서 갈등을 심화시키는 걸 보면 결국 사소한 싸움을 갈등으로 갈등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은 책임인 것 같다. 맨 처음 싸우게 된 원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상대의 약점을 드러내고 비난하다가 피차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극에 달하면 결국 ‘누나랑 안 놀아’ ‘나두 너랑 다시는 안 놀아’하고 파국을 맞는다. 비단 애들 싸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양상이 더 복잡하고 좀 더 고상하고 세련된 언어로 표현될지 모르나 성인이 된 이 엄마도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갈등을 겪고 심화시키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다.

‘순수하게 일방적인 과실에 의한 갈등은 없다’라는 생각의 전제 때문인지 나는 관계 문제 에 있어서 ‘용서’를 해결로 들고 나올 때 머리로 수긍이 되는 것처럼 마음으로 동의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하는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라고 할까?  ‘용서’는 손양원 목사님처럼 무고하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죽인 사람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쌍방과실인데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쌍방과실이면 그 과실의 정도를 드러내고 보험처리를 해야지 말이지.


제가요? 제가 용서하라구요?

몇 년을 두고 화해를 시도했지만 좀처럼 화해는커녕 더 꼬여만 가는 가족 중 한 사람과의 관계문제가 있었다. 마음먹고 그 관계를 해결해 보자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래 된 갈등이 한 번의 대화로 미끈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상상된 일이었다.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고 하는 사건부터 시작해서 상대방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은 같지 않았다. 상처를 주고받았다는 그 무게 또한 동일한 저울로 측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대화나 해명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건 무조건적인 사과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나의 논리를 포기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였다. 나에 대한 비난을 ‘맞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유야무야 그 대화의 장은 파장이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정당화하며 항변할 많은 말이 있지만 화해를 위해서 그것을 포기했다. 같이 화를 내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는 것보다 잘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마음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릎까지 꿇으며 화해를 청하는 내게 끝까지 고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분노가 마음속에서 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받은 상처의 기억이 새롭게 각인되면서 분노의 끈은 나를 꽁꽁 묶는 것 같았다. 내팽개쳐진 자존심이 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밟히고 또 밟히며 뒹구는 듯하였고 그 날 그 순간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졌다.


용서의 미.학.이라구요?

루이스 스미디스가 <용서의 미학>이라는 처방전을 주었다. 처방전의 제목을 보고는 ‘용서? 또 용서야? 여태 용서했는데 또 용서? 나 자신만 괴롭히는 용서?’ 하고는 심드렁하게 처방전을 펼쳐보았다. 루이스 스미디스는 내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용서한 적이 없는 것 같소’ 그랬다. 용서가 무엇인지 새로 배워야 했다. 내가 했던 것들은 용서라는 이름으로 묵인하고 그저 좀 이해하려고 애쓰고 때로는 용서의 모양만 빌려서 예수님 닮은 척 하려는 것이었다. 이 용서라는 처방전은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그 날보다 더 아픈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용서를 통해서 그 고통의 순간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와 나를 꽁꽁 묶어서 결코 멈추지 않는 고통의 엘리베이터 안에 갇아 두게 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맞춤 처방전이었기에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꼭꼭 씹어서 먹고 조금씩 원기가 회복되어 갔다. 용서가 시작되었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용서가 조금씩 되어가고 있으며 결국에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계의 회복이 지고지순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사로잡혀 있던 내 자신도 보게 되었다. 과연 필립 얀시가 평한 대로 루이스 스미디스는 ‘용서 전문가’였다.


용서의 종착역은요?

그렇게 용서의 바다에 헤엄치며 은혜를 경험하고 있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오래 준비하던 시험에 1차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평온을 되찾았던 마음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비록 내가 용서했을지언정 그 사람이 잘돼서는 안 된다는 유치한 시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나는 용서했으니까 내 대신 하나님께서 보복을 하셔야죠. 그러니까 제 앞에서 잘 되게 하지 마세요’ 요나처럼 울부짖었다. 그러자 또 다시 그 날의 기억이 아로새겨지면서 고통이 되살아났다. 용서의 마지막 단계는,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는 ‘내게 상처 준 사람이 잘 되도 괜찮다는,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것’이라고 책에 씌여 있었다. 웬만큼 용서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다다르지 못할 목표를 두고 애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좌절이 되었다. 현명한 용서 전문가는 이런 염려까지도 놓치지 않고 위로하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분명하게 정했다면 용서의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라고. 또 상처가 깊을수록 용서는 더디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될 것이니 서두르지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어느 주일 예배에서 나는 찬양을 하고 있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그렇다.용서라면 도가 튼 분이 있지 않은가? ‘용서를 위해서 여기 태어났다!’ 라며 머나 먼 여행을 떠나오신 분이 있지 않은가? ‘내가 했던 방식 그대로를 다 가르쳐줄테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갔던 그 길을 지나 한 걸음 한 걸음 용서의 여정을 걸어보자. 내가 있잖니’하며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손잡아 주시는 그 분이 느껴졌다. 그래. 진짜 용서 전문가와 함께 가는 거야!

        
조기옥 글 참 잘 읽었어요. 굉장히 힘들게 쓰여진 것 같아요...
제가 용서라는 단어를 받아들인 건 성경을 통해서 였어요.
그때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더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더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였어요.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대상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내가 더 나이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나이가 어린 상대에게 내가 용서를 받았다면 그가 나보다 나이많은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 나이와 성별을 떠나 용서를 하는 사람은 상대보다 더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일 거예요.
아마도 용서해줄 상대가 도저히 납득, 이해 불가, 불가, 불가한 상대일지라도 용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는 건 내 마음 안에 더많은 사랑이 들어와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지요.
상대가 나의 용서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건 내 몫이 아니라는 것.
사랑이 이미 상대에게 넘어간 것이니까요.

다만 사랑이란 언젠가 봄눈 녹듯 강팍한 마음을 녹여낸다는 진실만은 버리지 않은채
서서히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용서인 것 같아요.
용서를 한다는 건 어찌보면 신의 영역이었던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 흉내라고 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에구 열심히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거이 참 힘들지요...

저도 한동안 무지무지 힘들때 성경에서 그걸 깨닫고 펑펑~ 펑펑펑펑~ 울었답니다...^^ (07.03.03 00:03) 댓글삭제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  정혜신, 개마고원



>>호감 vs 비호감


중학교 1학년 때 일기장에 그런 짓을 했었다. 일기장 한 페이지 가운데 줄을 그어 영역을 나누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분류해서 적었다. 막 자기 정체성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사춘기에 관계중심적인, 관계지향적인 기질에 어쩌면 그리도 충실한 놀이를 하였는지…. 호감이냐, 비호감이냐. 요즘 들어 많이 듣게 되는 이 용어는 자주 써 먹게 된다. 쓰면서 ‘아~ 참 쓰기 좋은 말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누구는 좋아. 누구누구는 싫어’라고 말하는 것보다 ‘저런 스타일 완전 비호감이야’라고 표현하면 어쩐지 좀 덜 유아적으로, 보다 세련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딱 두 집단으로 나눠서 ‘호감, 비호감’으로 분류할 수는 없어도 성인이 된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의 ‘호감, 비호감’의 잣대로 사람들을 가른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조차도 그 분류의 절차며 결과를 뚜렷하게 표명하지는 않는다. 특히 ‘호감’이라면 몰라도 어떤 사람을 ‘비호감이다. 싫다’고 단적으로 말하는 것은 인격적 미성숙을 드러내는 것이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알고 있다. 성인이 된 나는 알고 있다. ‘좋은 사람(good object)’ 과 ‘나쁜 사람(bad object)’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좋음과 그렇지 않음이 공존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에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있어서 내게 비호감이면 ‘나쁜 사람’일 확률이 많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 보이지 않는 산등성이 건너편


몇 년에 한 번, 마음먹고 시작한 어떤 사람과의 대화에서 죽사발이 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최근에 ‘대화로 죽사발 되기’를 다시 한 번 경험했다. 마음먹고 어떤 대화를 할 때는 ‘내가 이 정도 표현해 주면 이 정도 반응이 나오겠지’ 하는 식의 그림은 누구나 그릴 것이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밑그림을 그려놓고 대화를 시작했는데 상대방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예상치 못하는 반응을 보일 때, 그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흔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이런 당혹스러운 대화를 만들어낸 주범은 대부분 ‘나의 시나리오’ 상의 문제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상대방과 대화의 장에 나가기까지 내 머릿속에서 그려졌던 그림이 상당히 자기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어떤 행동에 대한 ‘나 중심적인 해석’이 잘못된 시나리오를 제작하게 되고, 그 시나리오를 들고 대화를 시작하면 성공할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대화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는 ‘사람은 참으로 다르다. 내 맘 같은 사람이 없다’라며 무성의하게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는다. “내 맘 바꿔 넘(남) 맘 생각혀 봐라”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께 많이 들었던 얘기다. 내 맘을 바꿔서, 그대로 온전히 바꿔서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산의 이쪽에 서 있는 내가 산등성이 저 쪽에서 이 산을 바라보며 산세를 그리고 있는 상대방과 같은 산모양을 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말이다. 나는 나를 뛰어넘어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고 하지만 ‘객관화’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님을 관계나 대화의 실패를 통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 서른여덟 명, 남의 속마음


나는 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방의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추측한다. 추측하면서 대부분의 경우 ‘내 추측이 옳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 내 추측이 오답임이 밝혀질 때, 그리고 그 판단착오에 대한 벌을 고스란히 ‘관계의 삐걱거림, 관계의 틀어짐’으로 받아야 할 때 나는 정말 당혹스럽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의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두 권의 책을 읽으면 총 38명 남자와 여자들의 속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름 하여 ‘심리평전’이다. 저자 자신의 사람에 대한 ‘호감/비호감’의 취향을 온전히 뛰어 넘을 수는 없다 하여도 읽다보면 ‘전문가의 손길(눈길?)’에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38명의 사람들, 대충 알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는 사람이라 할 수도 없는 유명인사의 행동과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인식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내가 그렇게도 다다르고 싶었던 산등성이 저 쪽으로 다가가는 느낌이다. 서른여덟 명의 타인을 이렇게 저렇게 씹어(?)보면서 소화를 시키고 나니 완전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 덩어리가 남았다. 여전히 사람들을 향해서 자연스럽게 드는 호감, 비호감의 정서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내게 비호감이면 더 생각해 볼 여지없이 ‘안 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내 유아적인 버릇을 딱 짚어주고 있다. 저자는 ‘현실감각’이라고 정의하며 설명하는 이것이 내게는 ‘성숙한 관계 맺기를 위한 1단계 과제’라고 여겨진다.


‘감이 없다는 게 별거 아니다. 다른 현실이란 있을 수 없고 내가 알고 있고 좋아하는 것만 현실이라고 우기다 보면 필연적으로 현실감각을 잃게 된다. 현실감각을 유지하려면 타인의 행위 뒤의 동기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현상적 시각이 필요하다. 내가 보고 싶은 상황만 보지 말고 나와 타인의 전체적 현실을 동시에 인식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으니 문제다’<사람vs사람>에서.


>> 참고서를 참고하고, 교과서 저자에게 가기


예수님은 우리를 관계 속으로 부르셨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라고 배웠다. 나날이 기도가 뜨거워지고, 전도에의 열정이 불타오르고, 믿음의 진보가 느껴지는데 ‘관계’는 제자리걸음이라면 한 번 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성숙한 관계는 정혜신의 말처럼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현상학적으로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행동 뒤의 동기를 인식할 수 있는 인지력’이 전제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책은 신앙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정신과 의사의 심리비평에 그치지 않는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만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를 때 첫 걸음을 떼기 위한 도입서의 역할을 해주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바로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관계의 문제가 척척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사람이 다르다는 것도 알고 대충 나와 어떻게 다른 것도 알겠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최대한 ‘선의의 해석’을 하도록 하자. 이 책의 행간에서 건져 올린 또 하나의 처방이다. 선의의 해석을 해도 여전히 용납되지 않는 비호감의 문제는 우리를 ‘이렇게 다르게 만들어 놓으신’ 그 분께 가져간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그 산을 만드시고, 그 산 위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시는 그 분의 손에 궁극적 열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 파산 그리고 망상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을 쏟아 부었던 공동체와 사람들로부터 내침 당했다고 느껴졌던 적이 있었다. 깜깜한 절망의 벽이었다. 청년부의 대모(大母)로 온갖 궂은 일 마다 않고 사람들 섬기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소그룹 모임의 교재가 마르고 닳도록 읽고 요약하고 또 정리하며 주일을 맞는 리더였으며, 조원들의 생일을 하나하나 정성으로 챙겼으며, 수련회 때는 20여 명 청년들의 식사를 도맡아 하면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후배들과 밤이 깊도록 기나긴 전화로 얘기를 들어주고 함께 울어 주었다. 아~ 그만하면 정말 완벽한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 아니었던가.


나와는 직접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관계 문제에 휘말렸다. 그리고 서서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 신화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돕겠다는 의도로 누군가에게 했던 어떤 말들이 오해와 곡해가 덧붙여져서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한 번 봇물이 터지자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내게 들리는 나에 대한 얘기는 그저 악한 것뿐이었다. 그 때가 되도록 신앙의 위기라고는 별로 겪어보지 못했던 범생이 크리스천이었기에 내게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이제 남은 건 '최종 부도 처리' 이것뿐인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교제하던 형제와 짧은 교제 후 헤어져서 질퍽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범생이 크리스천에게는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안 나가거나 청년회를 당분간 쉬는 선택은 없다. 주일마다 나가서 예전처럼 모든 걸 다 하지만 내 영혼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주일 모임을 마치고 사람들이 에프터로 우~ 몰려가면 혼자 집으로 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망상에 빠졌다. '모두 모여서 내 얘기를 하고 있을 거야. 그 자리에 따라 가지 못한 나를 보면서 고소해 할 거야….' 망상은 말 그대로 망상! 근거 없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심화되고 확대 되었다. 공동체의 그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망상과 고립감이 짝을 이루어 나를 공동체 밖으로 더 멀리 더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 두려움과 두려움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힘든 상황에서 그나마 책이 손에 잡힌다는 것이 내게는 큰 은혜다. 바로 그러한 영적 파산의 위기에서 래리 크랩의 『격려 상담』(두란노)을 손에 들게 되었다. 특별한 기대 없이 차오르는 고통을 잊어보자는 생각에 아무 거나 골라잡은 것이 제목도 고리타분한 이 책이었다. 그러나!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 개의 단어가 내 시각과 지각과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관.계. 그리고 두.려.움. 이 두 단어가 주일은 물론 매일 시시각각 공동체 사람들을 향해서 망상에 사로잡힌 나의 심리적 영적 상태를 명쾌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동체의 친구들과 후배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빠져 혼미해져 있었고, 이제껏 내게는 따뜻한 둥지 같은 '안전한 관계'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모든 것을 잃었다 느끼고 있었다.


래리 크랩은 조근조근 내 자존심을 한 올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진단해주고 치료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게 가득 차 있다고. 그런데 그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만 그 두려움을 가장하기 위해서 농담, 때론 침묵, 논리적인 토론, 속이는 눈물 같은 것들을 고안해 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실은 영적인 위기를 느끼면서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지금의 나'만이 두려움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나'도 그러했고, 지금 나를 빼놓고 에프터 하고 있는 '그들'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힌트를 주었다. 그렇구나!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핵심적인 감정이 두려움이라니…. 그렇다면 두려움에 떠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 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두려움 덩어리, 나 외의 모든 '너'도 두려움 덩어리.


>>> 출발지 사랑, 도착지 두려움


이 책은 내내 '다른 사람을 어떻게 격려할까?' 하는 내용이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비결을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격려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책에 빠져 내 문제가 잊혀지는 것인지 모를 진통제 같은 효과가 있었다. 읽고 곱씹어 보니 그것은 단지 진통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끝없는 두려움의 분명한 해결책과 해결 책임자를 찾아내니 진통제 아닌 치료제가 거기 있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두려움은 누구의 몫인가? 바로 나의 몫이다. 사람들의 농담과, 경직된 말투와, 지나친 친절함과, 헛웃음 뒤에 숨어 있는 두려움을 발견해 격려하라고 하나님이 부르셨다. 그것을 위해서 '관계'로 부르셨다. 그렇다면 내 두려움은 누구의 몫인가? 그것은 내 이웃의 몫인가?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을 향해 내 두려움을 감당해 달라고 해야 하는가? No! 내 두려움은 하나님 몫이다.


이런 통찰을 얻고 난 후에 나는 부도 직전의 영적인 상태를 털고 일어났다. 마음의 바닥에 너저분하게 깔려 있던 이불을 털어 개켜놓고, 커튼을 열어 햇볕을 맞아들이고, 창문을 열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고립됐다고 느끼던 내 고통과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이제껏 날 위협하는 존재로 느껴서 두려웠던 사람들의 두려움을 보는 투시력(^^)이 생겼고, 그것을 터치할 방법을 알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커지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팁을 얻었다. 내가 그렇게도 열심히 섬겼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내 마음을 몰라주고 나를 배신했는지 말이다. 이 일을 경험하기 전에도 나는 사람들을 격려한다고 말을 하고 많은 액션을 취했었다. 그런데 그 말과 액션들이 많은 경우 격려의 모양은 입고 있었지만 진정한 격려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두려움을 겨냥하기는 했으나 나의 두려움에서 출발한 격려는 진정한 격려가 되어 사람의 영혼을 만질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소명으로 나눠주신 이 '격려'는 내게서는 '사랑'이라는 활에서 쏘아져서 내 형제의 '두려움'을 겨냥하여 다다라야 하는 것이다.


다시 나는 새로운 액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불성실한, 사랑이 없는 리더라는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내게 맡겨진 사람들에 대한 솟아오르는 사랑으로 조원들에게 전화를 하고, 엽서를 보내고 성경공부를 준비하게 되었다. 내 부족한 사랑으로 그들의 두려움에 닿기를 기도하면서….

2006/12/29
        
정신실 내년 1월호 부터 <큐티진>에 '藥이 된 冊'이라는 꼭지로 쓰는 글.
쓸 때는 늘 고통스럽지만 결국 글은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을 정리하고 자라는 과정이 된다.
'쓸 게 없어요' 하고 엄살을 하는데 늘 멍석을 깔아주시며 격려해 주시는 서목자님 덕에 생각이 자라고
마음이 자라는 기회를 얻게 된다. 서목짠님! 감사합니다! (06.12.29 17:30) 댓글수정삭제
정신실 2월호 글을 쓰다가 진도가 안나가서 이러구 있음. (06.12.29 17:30) 댓글수정삭제
정운형 잘썼음. 2월호도 기대 됨. (06.12.30 13:14)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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