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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간증을 다 싸잡아 도매금으로 넘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나는 간증으로 재미를 본 적이 별로 없다. 재미로 간증을 듣냐고? 은혜 말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은혜 받은 것’ 이라면 그런 적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심할 때는 어떤 간증을 듣고 나서 ‘나는 왜 요모냥 요 꼴이냐? 믿음도 없고.’ 하면서 자괴감만 충만해질 때가 있다. 하나님께 이 만큼 드렸더니 몇 배로 축복해 주셨다. 이렇게 헌신했더니 연봉이 마구마구 오르더라. 내가 산 땅이 그린벨트가 풀리더라. 믿어봐라. 믿어만 봐라. 하나님께 문제를 던져봐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다 해결해 주신다. 물론 간증도 사람의 말이라 잘 된 것,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에피소드를 골라서 하다보면 좋은 얘기 성공한 얘기가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부어주시고 즉각 즉각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을 통해 나누는 것으로 은혜받고 도전받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증을 들으면 ‘아직 나는 안 돼. 지금은 뭔가가 부족한 거야. 채워져야 해. 나는 좀 더 나아져야 은혜를 받을 수 있어. 나도 지금보다 잘 살게 되는 날이 올 거야. 내 기도도 하기만 하면 딱딱 응답받는 그런 날이 올 거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 하면서 오늘 여기서가 아니라 언젠가 내가 더 나아졌을 때 만날 하나님을 그리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기 기다려’ 이 찬양을 입에 달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최소한 내가 기다리던 ‘주님의 시간’은 진로에 대해서 불투명하던 그 20대에 분명한 진로가 눈에 보이는 때, 또는 결혼 적령기라 일컫는 때를 보내며 막연한 불안과 외로움 가운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를 만나는 때, 그런 때였다. 그러니까 ‘주님의 때’는 뭔가 오늘보다는 나아지는 때라고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잘되고 성공하고 형통하게 되는 때였다. 그리고 찬양의 가사처럼 ‘기다리는 것’이 능사라 여기며 이 찬양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렇다. 묵묵히 기다리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찬양을 부르고 은혜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놓친 것이 있었다. ‘내일’이 내게 찾아올 때는 언제나 ‘오늘’로 온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그러니 주님의 뜻이 내 삶에서 이뤄지는 것은 ‘내일’이 아니라 반드시 ‘오늘’이라는 것.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어쩌면 기도할수록 찬양할수록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되는 방식으로 가기도 했던 것 같다. 오늘 채워지지 않는 모자란 부분이 채워져야만 적어도 내 믿음을 증명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삶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가만히 ‘오늘’을 들여다보면 ‘오늘’은 온통 한계와 모자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한 달 수입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아지면 여러 모로 걱정이 줄 텐데... 여기서 한 5킬로만 빼면 딱 보기도 좋고 건강해질 텐테... 그 사람과의 관계만 회복되면 교회에(직장에, 친척 모임에) 가는 게 한결 마음이 가벼울 텐데...매일 큐티하는 것만 잘하면 내가 영적으로 도약이 좀 될 텐데...우리 아버지가 나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조금만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내 자신감이 충천해질 텐데...이번 프로젝트만 완벽하게 해내면 우리 사무실에서 내 입지가 확실해질 텐데...시간이 조금만 더 여유 있다면 읽고 싶은 책 마음껏 읽을 수 있을 텐데...


어렴풋이 내게는 이러한 한계에 부딪혀 당혹스러울 즈음에 만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내게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한데 이 약점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없었던 아이러니한 기억도 있다. <모자람의 위안>은 우리 일상에 겪는 모든 한계에 대해서 총망라한 책이다. 몸의 한계, 도덕성과 영성의 한계, 지식의 한계, 자유의 한계, 로맨스나 섹스의 한계 까지. 사실 이렇게 직면하는 한계들은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고 실존의 무게로서  가벼운 것이 아닐진대 저자는 때로 가볍다고 느껴질 만큼 얘기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한계를 밝히고 한계가 주는 유익을 밝히는 한 챕터 한 챕터가 삼대지 설교(three points sermon)처럼 명확하다. 그 명확하고 유쾌한 소리는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고, 인정한 상태에서 누리는 복을 누려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가만 저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모자람’은 위로와 위안을 넘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임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햇살이 비추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 채워지지 않는 것 같은 부분에서 발견하는 ‘여백의 미’라고 할까? 우리 완전하신 아버지 완전하신 어머니이기에 과잉보호하는 부모 같지 않은 분이다. 도대체 아이가 발을 땅에 디뎌볼 사이 없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승용차로 모셔 나르며, 아이의 모든 스케줄을 완벽하게 짜서 제시하고, 자기는 못 먹어도 최고급의 교육환경과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하는 부모 말이다.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계에 부딪혀 안간힘을 쓰는 아이가 가엾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그 때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게 하는 것이 가장 사랑하는 방법임을 아는 지혜로운 부모 같은 하나님. 그 이상의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신가? 하나님의 권능의 빛이 미치지 않는 것 같은 그 여백, 그 채워지지 않아 갈증 나는 20%, 아니 20%의 한계에 숨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는 감히 헤아려보려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내 잔이 넘칠 날을 기다리면서 끝없이 감사와 축배를 유보할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잔을 들고 진심으로 ‘브라보!’를 외칠 수 있다면...


올 초 주방 일을 보기 위해 늘상 서 있는 싱크대의 눈높이에 이런 말씀을 붙여 놓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경건에 큰 도움이 됩니다(딤전6:6)’ 아닌 게 아니라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서 경건에 큰 도움이 된다. 더 채워졌으면 싶은 욕망을 가득 안고 설거지를 위해 말씀 앞에 서면 마음의 창을 다시 닦아 맑게 해주는 말씀이다. 오늘 이 순간에 내게 맡겨진 말 안 듣고 뺀질대는 아이, 내가 원하는 만큼 더 깊이 정서적으로 돌봐주지 않는 남편, 언제 수입이 줄 지 모르는 불안한 직장생활, 이제 어린 딸까지 놀려대는 내 돌출형 치아, 여전히 만나면 인사하기도 껄끄러운 뒤틀린 관계.... 이런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으면  샬롬은 저절로 이루어질 일이니 내 일상이 거룩과 경건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겠나. 오늘도 나는 채워지지 않은 잔을 들고 마음에 새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경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모자람의 위안> 도널드 맥컬로우, IVP


 <藥이 된 冊10> - QTzine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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