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4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한참 낄낄거렸다. 어릴 적 교회 친구들 모임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의 나비효과였다. 친구 J가 아들이 만든 정체불명의 초콜릿인지, 빼빼로인지를 올린 것이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마시멜로를 녹이고 초콜릿 으깨고 난리를 치더라나. 맛있는 걸 그냥 먹지 왜 그걸 녹여 먹느라 고생을 하느냐, 녹여 먹으면 더 맛이냐, 하고 말았다고. 냉동실에 고이 넣어둔 걸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알고 보니 밸런타인데이에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이었다는데, 그 모양새를 보자 다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 이걸로 고백하면 바로 이별 통고받는 거 아냐? 맞겠는데! 아냐, 정성이라고 감동할 수도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유치원생 찱흘놀이 작품 같기도 하고, 뭉크의 절규도 떠오르기도 했다. 시니컬한 중2 남자애가 여친 주려고 만들었다니 귀엽기도 하고 더 웃긴 거였다. 시작은 이거였는데, 얘기가 우리 어린 시절로 흘러가 어설픈 고백 일화들이 터져 나왔다. 눈물 찍어내며 웃었다. 옛 친구들이 이래서 좋다. 지나간 날의 소소한 경험이 나이 먹을수록 소중하게 느껴진다. 긴 설명 없이 한두 마디만으로 기분 좋은 동조 현상이 일어나는, 어릴 적 많은 경험을 공유한 친구들이다. 오랜만에 한바탕 웃고 났는데 치유를 받은 느낌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J가 좀 달라 보인다. 살아난 것 같다. 특유의 자신감과 유머 감각이 살아났다. 우리 대장이 돌아왔다. 두어 달 전에는 정말 허깨비만 앉아 있는 것 같았고, 저러다 뭔 일내겠다 싶었는데. 사춘기 아들과의 갈등으로 죽으락 살락 하더니 말이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전화를 했다. 최 선생님과의 상담이 좋긴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단다. 아들과의 관계도 눈에 띄는 갈등만 없을 뿐이라고. 내가 보기엔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렇게 느껴졌다. 아들이 만든 사탕을 사진 찍어 공유한 것도 그렇고. 아이를 바라보는 J의 눈이 달라진 것 아니냐고 몰아갔다.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게, 냉동실 열고 어이없기도 하고 조금 귀엽기도 해서 웃음이 터졌는데. , 생각해보니 그런 면도 있다. 주방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 있으면 전 같으면 한마디 했을 텐데 말이야. 그냥 지나치긴 했네. 쓸데없는 짓 하는 거 보고 그냥 넘어가지 못하거든. 에잇, 포기야 포기. 말해도 소용없으니까 그냥 포기하는 거지. 애는 여전히 그 모양인데, 포기하고 나니 차라리 좀 살만해.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자포자기 같거든. 상담에서 애 얘기는 거의 안 하게 되더라고. 묻지도 않으시고. 딱히 진단도 안 해주시고, 정답도 안 가르쳐주시고 그러더라. 상담이 원래 그런 거야? 그냥 주절거리다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상담에 맞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도 숨통이 좀 트여. 고맙다! 상담사님이 아니라도 최 선생님같은 좋은 어르신 뵙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것 같애. 친구 덕분이다. 그런데 니가 나랑 대화하던 게 상담 기법인가 봐. 질문하고 한참 듣고 계속 말하게 하는 게 너랑 똑같으시던데.” 통화를 마치고 났는데 최 선생님 모습이 바로 영상지원 돼서 웃음이 났다. 이러자니 갑자기 이 사랑스러운 노인이 보고 싶어졌다.

 

제 발로 상담실에 찾아간 사람

 

어떻게 이렇게 또 바람처럼 행차를 하셨나? 신학기 돼서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바쁘죠. 바쁜데요. 질투가 나서요. 선생님 뺏길까 봐요.

? 누가 날 뺏어간대? 짐 덩어리 노인네를 뺏어가 줄 고마운 사람이 누구야? 그 귀인이 누구셔?

     에이구, 선생님. 제 친구 J. 얘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잖아요. 선생님도 저번에 사람 참 괜찮다고 칭찬하시고. 좀 불안해서요. 관리하러 왔습니다. 헤헤.

아아, 친구 만났구나! 그래, 어떻습디까? 잘 지내나?

     하하, 선생님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저는 친구를 몇 달 만에 한 번 보는데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시는 선생님께 그걸 물으러 왔고만요.

, 나는 상담이고. 일상이 어떤가 하는 거외다. 그리고 내 내담자 얘기를 당신한테 왜 해?

     그러네요. 실은 친구가 좋아 보여서요. 선생님께서 또 무슨 약을 어떻게 치셨나, 한 수 배우러 왔죠. 한결 가벼워 보이던데요. 전 같지는 않지만 살아난 느낌이에요. 감사해요.

그래, 준비되어 왔더라고. 자기 문제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고, 변화에 대한 갈망도 크고요. 알잖아. 억지로 온 내담자와 제 발로, 자발적으로 온 내담자 차이를. 암튼 정 선생 눈에 그리 보였다니 그건 정말 반갑네.

     본인은 잘 모르더라고요. 제가 얘길 하니까 그런가 하는데요.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이 악물고 엄청난 의지를 발동하는 것하고는 다른 거요.

정 선생이 사전 작업 많이 해서 보냈어. 친구가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그랬던데. 그래서 자기를 보는 용기가 있더라고. 아이가 아니라 자기 문제라는 것도 알고.

     네? 자기 문제라는 걸 안다고요? 아닌데. 엄청 애 탓만 하는데. 헤헤. 얘가 선생님 앞에서 다른 소리를 하나 보네요.

아이구, 그럼. 당연히 애 탓 먼저 하는 거지. 그래도 마음 밭이 잘 기경된 사람이라 상담하기 수월해.

     실은 그 친구가 상담을 받겠다고 해서 좀 놀랐어요. 보통 남자거든요. 인간은 원래 불안한 거다. 그게 상담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런 비슷한 얘길 해서 제가 빈정 상한 적도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심리치료 하는 친구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잖아요. 애 때문에 바닥까지 내려가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 거죠. 상담은 심각한 마음의 병이 있거나 취약한 사람들이나 찾는 거라는 의식이 강했어요. 부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중년의 초대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거기까진 기대도 안 하고요. 당장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 그런데 살아나고 있다니까요. 하하.

다행이구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빈 자리라는 책이 뭐유? 그 책 얘기를 자꾸 하대.

     그 책 얘기를요? , 제가 선물한 책이고요. 도널드 밀러라는 작가의 책인데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빈 자리는 아버지의 빈 자리예요. 아버지 없이 자란 남자가 부성애의 결핍을 마주하며 하나님을 찾아가는 얘기랄까요. 오래된 책이라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하! 아버지의 부재라.

     네, 처음 큰 아이하고 힘들어지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아요. 아이와 충돌하고 화가 조절이 안 되어 마구 운동을 했다나 봐요. 그리고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이유 없는 울음이 터졌대요.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고요. 그 울음 끝에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는 거예요. 너무 어릴 적이어서 어떤 분이었는지도 잘 모르는데, 당황스러웠다고 했어요. 저는 딱 알겠더라고요. 제가 아는 마음 같았어요.

그렇구나. 정 선생도 아버님을 일찍 여의었다고 했지?

     네. 저는 중학교 때였는데, 그 친구는 그때 이미 아버지가 안 계셨었어요. 어머니하고 둘이 살고 있었죠. J는 저에게 아버지 없는 아이의 대명사였어요. 저의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J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사춘기 때였고, 그때는 친하지도 않았는데요. 아버지 안 계셔서 가엾다고만 생각했던 J랑 제가 같은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의외예요. 선생님. 그 책 선물했을 때 심드렁했었거든요. 잘 읽히지 않는다고 했었던 것 같아요.

안 읽히던 책이 어느 날 읽히기도 하지. 경험이 사람 눈을 바꾸잖아. 아버지 부재를 감정적으로 만난 것이 아들들과의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되었나 보네.

, 그럴 수 있군요.

 

결핍에서 시작한 사랑

 

그럼! 자녀를 키우는 방식이란 게 다 자기 부모와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잖소. 자녀와의 관계뿐이오? 세상과의 관계 맺음의 원초적 경험이 제 부모와의 관계지. 배운 대로 사랑하는 거니까. 문제는 그 사랑이 대부분 결핍의 사랑이라는 게 문제고.

     결핍의 사랑이요?

그래. 결핍의 사랑! 제 부모에게 못 받은 걸 주는 것이 좋은 부모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물론 무의식적이지.

     그러네요. 우리 엄마 같은 엄마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이들 키우면서 엄마가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걸 깨닫고 소름 끼친 적 있어요. 그렇게 듣기 싫었던 말을 제가 하고 있더라고요. 말이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태도까지요. 좌절이었죠!

허허허. 정 선생만 그런 거 아니라 모든 부모가 다 그런 거니까 위로받으라고.

     모든 부모라. 그렇죠. 그쵸? 선생님.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인간 사랑의 시작은 그런 것 아닐까. 내가 못 받은 그것을 주는 게 사랑이라고 여긴단 말이야. 배곯고 자란 사람은 안 굶기는 게 사랑이고, 못 배운 한에 매인 사람은 교육에 목숨 걸고...

     아, 그렇다면 부모 사랑은 온전한 사랑일 수 없군요. 애초부터.

그렇지. 원죄의 대물림은 결핍된 사랑의 대물림이 아닐까 싶기도 해. 내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을 거야! 하는 사람도, 좋은 부모 만나서 우리 부모님 같은 부모가 되어야지!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 나는.

     하아. 절망적이네요!

, 절망적이야. 인간의 조건이지. 그 조건 안에서 사랑하고, 성장해가는 것이 부모의 길이지 뭐. 선생님 친구 J 씨 말이야.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선생님이 느낀 변화가 있다면 그게 무얼까 생각해보는 거거든.

     네, 뭘까요? 분명 친구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 보였거든요.

아버지의 빈 자리에 이름을 붙였어. 결핍의 자리. 상담에서 나눈 얘기지만, 본인 스스로 정 선생을 신뢰하는 친구이자 상담자라 여긴다고 말했고, 정 선생한테 자기 얘길 물어봐도 된다고 했으니 편하게 말합니다.

     아, 그런 말을 했어요? , 아버지의 빈 자리. 말씀해 주세요.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생각했대. 열심히 일해서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해줬고, 무엇보다 친구 관계든 학교에서든 문제가 생기면 아빠만 믿어! 하고는 다 해결해줬대. 자기 같은 해결사 아빠는 없을 거라고.

     맞아요, 선생님. 정말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지금이야 커서 그렇지, 아이들과 얼마나 잘 놀아주는 아빤데요.

그래, 그렇게 해주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아이가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서 화가 나는데, 그 화가 끝도 없다는 거지. 그게 아이를 때리는 것으로 행동화되지 않았겠어?

     아.

아버지의 부재. 내가 받아보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주고 느끼는 일종의 질투야.

     네에? 질투라고요? 부모가 아이를 질투한다고요?

그래, 질투. 나는 부모에게 받아보지 못한 걸 줬어. 그러면 너는 내게 감사하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거 아냐? 이런 메커니즘이지.

     그렇죠. 그건 동의가 되죠. 그런데 질투까지는.

당황스럽지? 사랑이라는 것 말이야. 우리가 아이에게 하는 게 다 사랑으로 하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정작 아이는 그걸 사랑으로 받질 않는다는 거지. 제 맘 몰라주는 엄마 아빠의 잔소리로, 부당한 간섭과 통제로만 가닿는 거야. 그러면 도대체 뭐가 문제야?

     배송사고로군요! 보낸 건 사랑인데, 도착한 건 간섭과 통제라니. (손 부채질 펄럭펄럭) , 더워. 갑자기 열이 나고 가슴이 아프네요.

하하, 배송사고! 주는 사랑, 받는 사랑의 차이를 숙고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알기로 사랑의 속성은 흘러넘치는 거야. , 왜 성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잖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철철 흐른다? 흘러넘친다? 그런 말씀이 있지?

     네. 철철 흘러넘친다, 그런 말씀이 있죠. 히히.

사람이 본시 넉넉해서 나눠주면 본전 생각이 안 나. 헌데 가진 게 별로 없는데, 나도 배가 고픈데, 없는 데서 박박 긁어서 주면 본전 생각이 나거든. 언제 되돌려 받나. 어떻게 더 많이 붙여서 받나.

     그쵸. 그렇긴 하죠.

사랑이 그래. 결핍에서 시작한 사랑이니 본전 생각이 나지 않겠소? 그걸 질투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받아보지도 못한 것 줬을 때, 주고도 부러운 마음이랄까.

 

아버지의 빈 자리, 하나님의 빈 자리

 

    아, 선생님! 문득 떠오른 기억인데요. 아이들 어릴 적 가족 여행에서였어요. 숲에 있는 모험놀이터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아빠랑 신나게 놀았고요. 두 아이가 양쪽에서 아빠 손을 잡고 신나게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어요. 저는 뒤따라 혼자 걸었고요. 그런데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슬픈 거예요. 한참 후에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어요. ‘너네는 좋겠다, 아빠가 있어서.

아하!

     저 역시 치명적 결핍이라면 결핍일 것 같아요. 아이를 낳고 늘 아이 앞에서 저나 남편이 죽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있어요. 큰 아이가 제가 아버지를 잃은 딱 그 나이가 되었을 때 , 여기까지 살았다!’ 안도하는 마음이 들더라니까요. 그리고 그다음 해부터는 한 해 한 해 포인트를 쌓는 느낌인 거예요.

세상에나. 그렇게까지. 그렇구나! 에구, 우리 정 선생.

     어후. 이게 왜 눈물이 나죠. 울 타이밍이 아닌데.

눈물이 나면 울 타이밍이지. 괜찮아요. 괜찮아.

     네, 선생님. 아이들을 아빠 없는 아이는 키우지 않는 게 소중한 목표였어요. 단지 아빠 없음이 아니라, 아버지 부재로 제가 감당해야 했던 많은 짐을 제 아이들에게는 지우지 않겠다고 저도 모르게 다짐했어요. 맞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엄마 아빠가 다 있는 저희 아이들이 부러웠어요. 엄마 아빠가 다 살아있고, 알아서 다 해주는데 뭐가 부족하냐, 싶으면 정말 화가 났어요. , 다 해주면서 질투하고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것 맞네요. (어쩌자고 터진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가만히 내 등만 쓸어주시는 최 선생님)

     받지 못한 걸 주느라 고생했네. 장하다. 정 선생.

아버지나 엄마 없는 아이들은 비빌 언덕 없는 느낌으로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더 붙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 어렸을 적에 그런 생각도 잠깐 했다니까요. 아버지 있는 애들은 하나님이 왜 필요하지? 웃기죠? 실은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가 되어 주시지도 않았어요. 저 스스로 아버지 자리를 메워야 했으니까요. (다시 눈물 바람)

     음. 아버지의 빈 자리, 하나님의 빈 자리.

?

     이제야 알아듣겠어. 책 제목 말이야. 친구 J 씨도 비슷한 말을 했거든. 그 책 얘기를 하면서 말이야. 하나님조차도 자기를 도울 수 없다고 느꼈던 것 같대.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아이와 갈등으로 정말 오갈 데 없이 막막해졌는데,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죽음까지 생각하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는 거야. 본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의 빈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빈 자리를 채우며 사느라 온 힘을 다 썼다고. 그때 희한하게 아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는 거야. 정말 아이를 위해서 해준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자기 두려움이었다고.

     자기만족이요? 아이에게 해주는 것들이 내 맘 편하자고 하는 일이라는 거죠?

그런 비슷한 거겠지. 사실 상담 안에서 대단한 게 있었던 것은 아니거든. 내가 모르는 일이 이 사람 안에서 일어나고 있구나, 싶었어. 이게 말로만 듣던 하나님 상()의 치유인가 봐.

     하나님 상의 치유.

영성 치유에서는 그렇게 말하더라고. 하나님 상의 치유가 가장 강력한 치유라고. 이거로구나! 친구의 마음이 그렇게 가벼워진 것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이에게 너그러워진 것은.

     아, 그래요?

글쎄, 나는 신앙이 짧아서 잘은 모르겠어. 영성 치유의 이론이 이렇게 조금 알아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말은 취소해야겠다. 부끄럽네.

     무슨 말씀을 취소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라고. 하나님 뜻, 하나님 은혜. 이런 걸로 방어하면 앞뒤 꽉 막혀서 상담이 안 된다고.

     아! 기억나요, 선생님.

그래, 강력한 방어기제인 것도 맞다. 하지만 왜곡된 하나님 상이 치유되는 건 심리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용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 J , 남다른 내담자였거든. 마음 밭이 좋구나, 정말 치유되고자 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스스로 아버지의 빈 자리에서 하나님의 빈 자리를 만나고 있었어. 그 빈 자리에서 진짜 하나님을 만났나 봐. 아버지 부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니야. 어느 누가 온전한 사랑을 받았겠소? 결핍으로 시작하는 사랑인데! 아버지의 빈 자리, 어머니의 빈자리. 영혼으로 느끼는 부재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카를 융이 했던 말이 생각나네. 중년기 이후 찾아온 내담자들의 문제는 결국 모두 영적인 문제였다고.

     아, 영적인 문제요! 하나님의 빈 자리.

 

그리고는 최 선생님도 입을 다무셨다. 넘어가는 해가 만든 부드러운 붉은 빛이 거실 깊숙이 들어왔고. 나 역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터진 눈물이 부끄럽... 아니, 부끄럽지는 않다. 이 눈물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 것만 같다. 아버지의 빈 자리, 어쩌면 하나님의 빈 자리로 데려갈지 모르겠다. 친구에게 일어난 알 수 없는 변화처럼 내가 만든 하나님 상 너머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말이다. 어디로 이끌든 괜찮을 것 같다. 아이가 만든 초콜릿에 허허 웃던 새털처럼 가벼워 보이던 J의 얼굴이 떠오른다. 삶의 문제는 여전한데 마음은, 어쩌면 영혼은 자유로워 보였으니.

 

* 시니어 <매일성경> 2023년 3,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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