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로마로 왔다.  로마에서 이틀을 보내고 한참 지나도록 순례기가 써지질 않는다. 할 말이 없거나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글이 써지지 않는 답답함은 내게 익숙한 고통인데, 대부분은 여러 말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려 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데다 잘 쓰고 싶어 힘이 들어가는 경우가 가장 어렵다. 글 변비에 걸린다. 마감일을 코 앞두고 밤낮으로 끙끙거리며 보내는 고통의 시간이라니. "내 다시는 새로운 원고 청탁 수락하지 않겠다." 결심하지만, 지켜질 리 없다. 나를 낚는 글은 늘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잘 쓰고 싶은 욕심은 가득한 주제들이니 말이다. 내 안에서 농익지 않은 주제들 일지 모른다. 말은 늘 무성하다. 무성한 말들이 정제되어야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글이 된다. 그러니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노트북을 덮고 나가서 걷든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무성한 것들이 스스로 겨루어 꼭 필요한 것만 살아남도록 하는 시간 말이다.
 
로마는 혼란스럽고, 혼란을 유발하는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로마는 도시 전체가 관람객으로 가득차 있다. 나는 순례자인가 관광객인가. 트리비 분수 앞 인파 속에서 해맑게 동전을 던지며 사진도 찍어 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것이, 정체성 혼란인 것 같다. "관광객으로 로마에 올 수도 있었으나 나는 지금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자이지 않은가."  그리 심각해질 필요가 있나,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라고 조언하지 마시라.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나름의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여기저기 빠르게 적응하고 잘 맞추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체성, 즉 내적인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내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순례자에서 관광객으로 모드를 전환할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많은 경우에 그렇다. 나만의 이유를 발견하면 모드 전환은 언제든 가능하고, 둘 사이를 오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나는 지금 개신교인으로, 개신교 목회자의 아내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끼어 순례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내적 일관성에 비롯한 '나만의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되어 지나쳐야 했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와 죽임 당할 그리스도인들이 입장했다는 문 앞에 머물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끊임없이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이 관광객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중에 "아무 의미 없는 죽임이었죠!" 하는 말이 귀에 꽂혔다. 의미! 그렇다, 나는 의미를 묻고 싶다. 로마시민의 유흥이 되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고, 사람과 짐승이 죽을 때까지 싸우던 곳이 여기 콜로세움이다. 싸움을 '당했다'고 표현해야겠다. '유흥'이라는 의미를 위해서 죽는 죽음이라니, 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삶과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히브리서 말씀이 떠올랐다. 박해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던 시대를 생각한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이 말씀이 갑작스레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나은 부활을 사모한 나머지 굴복하고 풀려 나가는 것을 거부한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학대와 채찍질을 기꺼이 받았고 쇠사슬에 묶여 지하굴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고 톱으로 켜져 두 동강이 나고 살해되어 싸늘한 시체가 된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짐승 가죽을 두르고 집도 친구도 권력도 없이 세상을 떠돈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혹독한 세상의 가장자리로 다니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들 가운데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의 믿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메시지성경

 

 

콜로세움 관광 후엔 바로 개선문이다. 박해 뒤에 갑자기 그리스도교 공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를 공인한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박해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이다. 어렸을 적에 세계사 시간이었을까?  AD 313 년을 처음으로 들은 그날부터 시험공부를 위해 따로 외울 필요도 없이 까먹지 않는다. 드디어 기독교가 인정된 해라고 하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안도감이 들었었는지. 철이 들어 교회사를 새롭게 배우고, 영성사를 배우고 보니 기독교 공인을 천진난만하게 반겼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귀엽기도 하고, 싹수가 노란 어린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보여 씁쓸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52~1466년, 329x190㎝, 프레스코. 야전 막사에서 곤히 잠든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붉은 이불을 덮고 잠든 주인공이 콘스탄티누스다. 천사가 왼쪽 위에서부터 가파른 각도를 그리면서 날아든다. 손에는 황금 십자가를 들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뒤에는 꿈 이야기가 있으니, 꿈 선생님으로서 이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원 숙소의 아침이고, 아침 식사 시간 전에 글을 마쳐야 하니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로마 제국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뜻하지 않은 계기가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로부터 한 해 전, 그러니까 312년의 어느 날 밤이었다. 숙적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하루 앞두고 잠이 들었는데,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황제를 깨우더니 『위를 보라』고 말한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밤하늘에 십자가가 밝은 빛을 뿜으면서 걸려있고, 그 위에 황금 글씨로 「이 표식 안에서 너는 승리를 거두리라」라고 씌어 있는 것이었다. 기운과 용기를 얻은 황제는 잠에서 깨어나 당장 군단 깃발의 휘장에 십자가를 그리게 한다. 이튿날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버려 둔 채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바빴고, 큰 승리를 거둔 콘스탄티누스는 이때부터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유일한 황제가 된다.
<가톨릭신문> "노성두의 미술 이야기" 2003-09-28 제 2366호 12면

 

 

카타콤베, 무덤이기도 은신처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묻을 곳이 없었다고 한다. 좁은 통로 옆의 벽이 죄다 무덤이다.  아이가 묻힌 작은 무덤, 어른의 무덤이 있다. 가이드 없이 들어가면 길을 잃어 나올 수 없는 곳, 깊은 곳으로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한다. 추격해 오는 로마 병사들이 여기로 들어와서는 미로 같은 길에 갇혀 두려움에 떨었고 그것을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수동적이며 적극적이고 지능적인 방어로구나. 여기는 피난처인가. 피난처 밖은 위험하다. 위험 속에서 숨는 곳은 순간의 안전을 지켜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은 밖은 위험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밖이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피한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더는 위험한 일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일이 위험한 일이 된 것인가. 초대교회 영성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이라고 한다. 박해의 영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박해와 고난을 자처하는 일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곧 다시 오신다' 하셨기 때문이고. 이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근거한다. 곧, 이들이 살아생전에 오실 것이라 믿었을까. 처음엔 그리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00년, 200년 다시 오시지 않는 시절을 보내며 참 '믿음'을 발견하고 살았을 것이다. 당대에, 그 약속한 것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으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음에도 믿는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가 믿어도 된다고 하니, 맘껏 믿어도 된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기독교가 공인되자 '맘껏 믿어도 되는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박해 없는 세상을 떠나 자발적 박해로 들어간 분들이다. 사막의 교부들이라 부른다. 수도원의 시작은 여기 사막, 사막의 수도 공동체였다. 베네딕도 역시 혼란의 로마를 뒤로 하고 은수의 삶으로 갔던 것이 우연은 아닐 듯하다. 혹독한 박해의 시절이 갑자기 평안의 때로 바뀌는 혼란, 하나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공부하러 왔으나 공부가 되지 않아 방황하다 떠나기를 선택하는 혼란, 순례자로 왔으나 관광객이 되어 떠밀려 다니는 혼란. 혼란이 있는 곳이 로마이다. 여행 가이드북의 로마 소개란에 "ROMA를 거꾸로 하면 AMOR!"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혼란스러우며 동시에 어떤 사랑으로 이끄는 곳이 아닌가 싶다. 초세기 교부들에게, 성 베네딕도에게, 나에게. 그리고 이 무엇보다 순례단에. 사실 직면한 가장 큰 혼란은 로마의 순례단이 마주한 난관이다.
(혼란의 로마,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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