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사(史)를 공부하며 수도원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니 <베네딕토 수도 규칙>은 뼈대 같은 것이었다. 각각 다른 수도원들의 영성을 하나로 묶는 것이기도 하고, 이 수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에 수도회의 고유함이 결정되기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한 문서이지만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인용된 것으로 충분했다.  '규칙' 같은 말에 대한 거부반응이 본능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잘하던 일도 '너 이거 꼭 해야 해!' 강압으로 주어지면 안 하고 싶어 하는 못된 아이 같은 마음 말이다. 알고 보면 누구보다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하면서, 강압하고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빠르고 지나치게 과민반응 해버리는 면이 있다. 규칙, 규칙서. 이런 것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수도원 순례를 결정하고 꼭 읽어야겠다 싶은 것이 <베네딕토 수도 규칙>이었다. 뒤늦게 순례 참여를 결정한 남편은 수도원 관련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아니, 결정하기 위해서 이미 쌓아 두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규칙서만 잘 읽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베네딕토 수도 규칙> 머리말부터 빠져들었다. 2장의 "아빠스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부분에는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규칙서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빠스에 관한 권고들이다. 아빠스는 대수도원장( Abbas)을 일컫는 말로 아람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아빠(Abba)"에서 왔다고 한다.
 

수도원을 돌보기에 적합한 아빠스는 항상 그의 호칭을 기억하여 행동으로써 으뜸이란 명칭을 채워야 한다.(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어지며, 그분께 (바치는) 호칭으로 불리어진다.

 
2장 "아빠스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호칭을 기억하라! 아빠스라 불리는 호칭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명칭을 채워야 한다니. 이보다 분명하고 준엄한 지침이 있을까 싶다. "나는 아빠다!" "나는 엄마다!" 이 말이 담은 책임감의 무게, 그 무게를 견디는 기쁨... 나는 이것을 안다. 그리고 이 문장을 좋아한다. '자녀를 위한 어머니 기도회'가 내 아이만 잘 되라는 이기적 욕망을 부추긴다 여겨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썩 내키지 않았던 어머니 기도회 강의에 가서 본 문구가 마음을 건드렸었다. "주님, 제가 엄마입니다!" 엄마이고 아빠인 정체성을 생각하는 것, 그에 합당한 행동으로 엄마와 아빠로 불리는 그 호칭을 채우는 것의 감미로운 고통이란. 
 
누가 내게 <베네딕토 수도 규칙>을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하라 한다면, 이 규칙서는 수도승들을 위한 것이기보다 아빠스를 위한 것이라 말하겠다. 그리고 한 문장을 뽑아 내라 한다면 물론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이겠지만, 내 맘대로 2장의 저 첫 문장을 꼽겠다. 베네딕토는 한 번도 일반 수도승인 적이 없고(은수동굴 3년은 수도승이었겠다) 시작부터 아빠스였다. 사람들을 모은 적이 없으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배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 수도원을 세우기 시작했으니 시작부터 아빠스였다. 그래서 아빠스에 관한 규정들이 유독 더욱 준엄했는지 모르겠다. 성 베네딕토든 아빠스의 정체성, 즉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베네딕토가 로마로부터 물러나 수비아꼬로 가기 전에 유모와 함께 기거했던 '아필레(Affille) 마을에 들렀다. 아필레는 성 베네딕토의 첫 기적 장소라고 한다. 유모가 이웃집의 채를 빌려다 썼는데 잘못해서 그것을 깨트렸다고 한다. 그것을 붙들고 통곡하고 있는 유모를 보고 베네디토 성인이 기도를 하자 그 채가 다시 붙어 원래대로 되었단다. 이 기적이 소문이 나자 베네딕토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 떠남이 은수처인 수비아꼬에 닿았다. 성인전에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기적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의미 없는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쪼개진 채가 붙고, 물이 포도주가 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의미는 제거하고 기적만 바라는 마음이 참된 신앙이 될 리 없다. 아빠스 베네딕토를 향한 씨앗은 이미 이 첫 기적에 담겨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유모는 누구인가. 유모는 엄마 대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다. 베네딕토의 가정이 부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마로 유학을 떠나는 베네딕토를 돌보기 위해 유모가 따라갔다. 로마를 떠나 머무를 곳에서도 유모가 함께 한다. 이 기적을 행하고 길을 떠나면서 베네딕토는 유모와 결별한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에서 스스로 돌보는 어른으로의 떠남이기도 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돌보던 베네딕토를 혼자 보내야 하는 유모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얘는 나 없이 아무 것도 못해요." 엄마가 이렇게 말하며 운다면, 나는 같이 울고 말 것이다. 이웃집에 채를 돌려줄 수 없으면 상황이 많이 어려워지나 보다. 그러니 통곡을 했겠지. 절박한 유모 한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첫 기적이었다. "어머니, 저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강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안심하세요." 하는 메시지를 남기며 속세를 떠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빠스가 되기 위해서, 돌봄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돌보는 존재, 그것도 하나님을 찾는 많은 이들을 돌보는 아빠스가 되기 위해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떠나야 한다. 떠나되 이제는 나보다 약해진 부모를 안심시키고, 그를 축복하고 떠나야 한다. 규칙서에서 아빠스에 관한 부분을 읽으며 엄마인 나를 비추고, 내적 여정을 동반하는 나를 비추고, 연구소를 이끄는 나를 비춘다. 나도 모르게 한 구절 한 구절 자꾸 읽게 된다. 내가 아빠스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을 맡은 자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게 두 아이를 맡겨 주셨고, 그 아이들 앞에서 어른으로 살라고 하셨다. 연구소로 모여든 사람들의 영적인 여정을 동반하는 자로 책임을 맡겨 주시고, 소장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하신다. 아빠스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셨으나, 예수님께 부름 받은 우리 모두는 그분의 대리자이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 아닌가.
 

아빠스는 집주인이 양들 가운데서 별로 이익되는 점이 없음을 발견하거든 그것이 목자의 탓인 줄로 알아야 한다. 

 

아빠스는, 자기가 제자들에게 부당하다고 가르친 바든 무엇이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 가르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버림받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며...

 

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선행과 순명에 있어 뛰어나지 않은 한 어떤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지 말 것이다.

 

아빠스는 자기의 지위를 늘 기억하고 명칭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많이 맡겨진 이에게는 많이 요구됨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영혼들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질을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유순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벌해야 한다. 또 각자의 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순응하고 알맞게 해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착한 양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빠스는 맡겨진 양떼에 대해 장차 받게 될 목자로서의 심문을 항상 두려워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 바칠 헴을 조심하는 동시에 자신의 헴에 대해서도 염려할 것이며, 자신의 훈계로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고치게 할 때에 자기의 결점도 고칠 것이다.

 
 
 

 

아주 작은 기념 성당이 있고, 성당 주변으로는 무덤이 있었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가 인상적이다. 무덤가에는 이 나무가 주로 심겨 있다. 하늘을 향해 올곧게 치솟은 나무의 형태가 하늘을 향한 인간 영혼의 본성을 담는다 여기는 것일까. 아필레는 아주 시골 동네이다. 우리나라 시골처럼 빈집도 많다고 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족이 산책을 하는 작은 동네 아필레의 골목을 걷는 시간이 참 좋았다. 유모의 깨어진 채처럼, 작은 것으로 울고 웃는 우리의 일상이 기적이고 신비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동네였다. 이런 골목을 걷이 참 좋은 것은, 돌아갈 내 일상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아빠스, 연구소의 아빠스로 사는 일이 무겁고 좋다는 생각에 이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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