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시끌벅적한 모임이 있다. 코로나 시작 전에 만났다니까 3년 만인데, 토요일 브런치(이 얼마나 느긋하여 편안한 만남인가!)로 모였다. 달력에 이 약속을 "명일친구"라고 적어 놓은 걸 채윤이가 발견하고 빵 터졌다. “하하하하… 명일… 명일… 명일 친구!” 명일'이 아니라 '친구'에서 터진 거지. 스무 살 차이 친구들. 전에 명일동 살 때 우리 집 거실, 어느 카페, 동네 놀이터 그네... 같은 데서도 시끌벅적 만나곤 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티키타카와 터지는 폭소로 만나는 시간 동안 오디오가 비는 구간이 없다. MBTI 얘기가 나왔는데, 정신 차리고 제대로 보니 나만 외향이고 나머지 셋이 내향이다. 초등 4, 5학년 때 어린이 성가대 지휘 선생님으로 만났고, 얘네들이 지금의 채윤이 나이이던 시절 청년부 목회자의 아내로 다시 만났으니 길게는 30년이다. 알아온 세월이 30년인데, 외향과 내향의 이름을 붙여보니 낯설다. 정말? 너가 내향이라고? "저 여기서만 이래요." "야, 나도 너 네하고 있을 때만 이래.ㅋㅋㅋ"
Carl Jung이 말하는 내향과 외향 개념이 말이 많고 적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물론 외향과 내향이 드러나는 양상 중 하나가 '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냈다. 편안한 곳에 있으면 누구나 말이 많아진다. 누구나 거침없이 자기 얘기를 한다. 심지어 내향형도 그렇다. 얘네들하곤 단톡방도 시끄럽다. 감정도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깔깔 웃었다가 갑자기 울었다가... 전에 한참 단톡이 활발할 때(아, 톡이 아니라 '마이피플'이었구나...ㅎㅎ) 방 이름이 "울고웃고"였다. 중간에 외향 하나가 더 투입되었다. 반주자였던 H는 나랑 딱 10년 차이의 외향-외향, 죽이 너무나도 잘 맞는 지휘자 반주자였는데. 액면가는 외향 다섯이서 토요일 아침 브런치 카페 구석에 앉아 말과 웃음으로 꽉 채우고 나왔다. 결론은.
맛있게 먹으면 무조건 0 칼로리! 편한 사람하고 있으면 무조건 외향형!
그래도 난 찐 외향형인 게, 말하고 웃고 에너지를 '소비함으로 채운' 게 되었다. 가득 주유한 몸과 마음으로 정자역에서 집까지 탄천을 따라 걸어왔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집에 다 왔는데 머리 위가 시끄러워서 고개를 들어보니 까치 다섯 마리가 나무에 앉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너네 친구들이 편하냐? 지금 다들 외향형이구나!
더듬어 보니 결혼하고 연말마다 이 시간을 가졌다. 첫 두 해의 기록은 아마도 당시 교회에서 '1청'이라 불렸던 신혼부부 공동체 카페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가 제안을 하고, 가정별 10대 뉴스를 카페 게시판에 올렸다. 블로그를 더듬어 보니 2002년 기록부터 남아 있다. 현승이가 생기던 해이고, 채윤이가 또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인격을 드러낸 해이다. 그해 10대 뉴스 안에 들어 있었다. 아마 채윤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하루 여행을 다녀온 모양이고, 거기서 둘이 1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게 20년이 되었다.
남편의 목회 형태가 바뀌면서 성탄절부터 연말, 신년 첫 주까지 가만히 머무를 시간이 없어졌다. 특별새벽기도가 끝나는 1월 첫 주일, 그러니까 교회력으로는 주현절 저녁이 우리의 Big Family Day이다. 근사한 외식, 맛있는 케이크 같은 것으로 유혹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모이는 성인 넷의 리추얼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둘에서 셋으로, 셋에서 넷이 되어 지지고 볶는 시간을 기록한 것이 Big Family Day의 역사인데... 2023년은 넷에서 셋이 된다. 현승이가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게 되었다. 셋에서 둘이 될 날도 머지않았고.
현승이가 성인이 되었고, 누구보다 행복한 고3으로서 나름대로 치열한 대입의 시간을 보냈다. 채윤이가 더 큰 꿈을 꾸면서 여러 면에서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남편은 현재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편안한 중년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늦게 시작한 공부로 조용히 부대끼며 담을 넘은 자의 고충과 기쁨을 함께 맛보고 있다. 각자 존재의 빛깔이 더 뚜렷해지며 가족의 연대는 느슨해져 간다. 비어 가는 느낌과 아쉬움이 마음 한 켠에 찬바람으로 분다. 누구보다 채윤이가 가족의 내적 외적 변화를 아쉬워라 한다. 오래전 이런 띵언을 남겼던 채윤이다. "아쉬운 것은 아쉬워야지 어떻게 하겠어?" 그래, 아쉬운 것을 아쉬워하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여야지. 무엇보다 지금의 모든 것을 감사하고 누려야지. 둘이든 셋이든 넷이든, 심지어 혼자이든. 지금을 누려야지.
땅을 보고 걷는다. 그런 줄 몰랐는데 채윤이가 흉내 내줘서 알았다. 좋은 하늘, 좋은 바람을 누리러 나가서는 고개를 처박고 걷는다. 깨어 있으려 하지만 다시 '생각들'에 잠기면 땅을 보게 된다. 간밤에 꾼 꿈 생각을 하며 걸었다. 나는 또 뭘 그리 포장하고 꾸미고 있는 걸까? 꿈이 건넨 질문에 고심하노라니 땅만 보인다. 고개를 들자! 하고 목에 힘을 딱 주고 바라보니 정자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다. 어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매는 원숭이 마음을 멈추자. 고개 들고 찬 공기를, 발밑의 얼음 조각을, 아이들 소리를, 자동차 소리를 보고 듣고 느끼자. 그러자 아주 가까이에 곤줄박이 한 마리가 땅에 강림하여 삑삑거리고 있다. 아주 아주 가까이서. 이 녀석이 사라지자 머리 위에서 또 삐이삐이... (아마도) 박새 한 마리가 가까이서 혼자 놀이를 하고 있다. 아주 가까이서. 모두 같은 말을 한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라고.
현승이는 중동 배낭여행 중이다. 제 몸 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공항 노숙을 불사하고 떠났다. 안전한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스스로 노선을 정하고, 그때그때 저렴한 숙소를 찾는 여행이다. 안식년 '꽃친'을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하면서 짧고 굵은 갈등 속에 선택한 소명고등학교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모든 것이 좋았고, 고등학교 생활에 어려움(현승이 자신의 어려움, 엄마로서 나의 어려움)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어려움과 갈등조차 좋았고 감사하다. 이번 여행 준비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감사가 두 배, 세 배로 커진다. 감사의 핵심은 사람, 선생님들이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만날 사람, 손!)
저렴한 항공권 덕에 부다페스트에서 긴 경유를 하고, 그 덕에 유명하다는 부다페스트 야경도 보았단다. 이집트로 넘어가 피라미드를 보고, 다합에서 스킨스쿠버를 하고, 무엇보다 밤에 시내산을 올라 시내산 일출을 보았다는데. 남편과 둘이 입을 헤 벌리고 영상과 사진을 보는데 "부럽다,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요르단으로 건너가 와디 럽(붉은 사막)으로 들어갔다는데, 와! "매드 맥스"에서 그 언니들이 달렸던 길이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남편은 이스라엘,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다녀온 경험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모른다. 그땅, 육화 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걸으셨던 갈릴리 호수 변을, 사도바울이 디뎠던 땅을 걸었다는 경험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듣기 싫을 정도로 그 경험을 말하고 또 말하고, 설교에 인용하고, 말씀 묵상에 인용한다. 직접 가본다는 것을 그런 것이다. 사실 나는 여행을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를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좋아하지 않거나,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갈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제치는 "여우의 신포도"인지도 모르겠다만.) 시내산 등반을 하고 일출을 바라보는 아이들 영상을 보면서 정말 가보고 싶다. 모세가 섰던 자리라니,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그 산이라니!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모 대상 강의를 하면서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잘해주고 질투한다."는 표현을 하면 대부분은 처음엔 갸우뚱 한다. 좋은 (특히 신앙이 좋은?) 부모일수록 갸우뚱의 각도가 크다. 어떻게 아이를 미워할 수 있지? 그래, 가끔 미울 수가 있다지만 질투를 한다고? 그렇다. 질투다. 나는 아이들을 질투한다. 내가 다 해주고도 질투한다. 내가 못 받아본 것을 주고, 나는 갈 수 없는 곳에 보내놓았기에 질투한다. "엄마빠가 그 정도 해줬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더 잘해야지, 어디서 그런 막 돼먹은 태도야!" 못 누려본 것을 누리게 했으니 부모를 추앙하라! 이런 마음이 얼마나 자주 올라오는지 말이다. 질투와 시기심의 은근한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말이다.
좋은 경험을 했으니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엄마빠 여행 보내줘, 이런 기대나 강요, 농담을 빙자한 허튼 말 따위도 하지 말아야지. 그저 너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라고 해야지.
하지만 나는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현승이가 부럽다. 현승이 인생이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백 번 말해야지.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2022년 송년 글쓰기의 '좋았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순간적으론 그리 강렬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힘으로 올해를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2021년에는 30여 명의 수강자들과 함께 했었다. 줌을 켜고 그냥 쓰면 된다 여겨 인원이 중요할까 싶었는데. 역시나 작은 그룹이어야겠구나, 싶었다. 예수님의 12 제자가 괜히 12가 아닌 걸 실감한다. 한 분 한 분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눈을 맞추려면 12가 적당하다. 2021년에는 연구원과 나까지 포함 12명으로 제한해 버렸다. 대신 이틀에 걸쳐 두 번 진행했다. 대기하며 아쉬워하는 분들을 모두 받아드릴까, 유혹도 있었으나 참길 잘했다.
괜히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 주간 나는 기도 피정을 다녀왔고, 다녀온 당일 밤에 바로였으니 그 여운도 있지 않았을까. 유난히 극적 경험이 없는 기도였지만, 돌아보면 그래서 더 낮아진 마음이 되었었다. 한 주간이 아니다. 그 한 달 전부터 연구소 카페에 <별이 빛난다>라는 대림 묵상집으로 아침마다 묵상 글을 나누었다. 그 여운일지도 모른다. 전에 없던 대림 시기를 보냈다. 그 한 달이 아니다. 한 학기 대학원 공부하며 마음의 부침이 심했었다. 이렇게 흔들리고 저렇게 흔들리고... 경계를 넘어간 자의 아픔을 지질하게 경험했다. 그 여운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글로 마음 다스리는 선물을 누린 내 전 생애의 여운일지 모른다. 글쓰기 시작으로 거슬로 올라가면 중학교 1학년 아버지 돌아가신 때였으니, 아버지 상실의 여운인지 모른다. 아버지 추도식이 12월이어서 내게 12월은 모든 상실과 상실로 인한 갈망과 갈망을 따라 만나는 하나님의 계절이다. 화면을 통해 가만히 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따스해지고 눈물이 자꾸 났다. 자신 안에 머물러, 주제에 따라 쓰는 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고마웠다. 일 년 돌아보며 고마운 분들, "별이 되어준 당신"에게 나도 글을 쓰고 메시지도 보내고 했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글로 함께 보낸 이 분들, 작년 송년 글쓰기에서 보고 일 년 만에 만난 분도 있지만, 이 분들이 내게는 "별이 되어준 당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호모 스크리벤스(라고 한다.), 글 쓰는 인간으로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 송년 글쓰기가 남긴 여운은 감사, 그것이다.
이 여운을 더듬다 생각나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의 서문을 꺼내 읽어본다.
‘너는 항상 행복해보여. 그런 너가 참 부러워’
이 말이 어쩐지 잊히질 않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 받은 쪽지에 적혀 있었지요. 당시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버지를 잃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사춘기 여자아이였거든요. 친구들 앞에서 찧고 까불며 지었던 웃음은 슬프고 누추한 나를 감추는 위장술이었을 텐데. 친구는 제대로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실은 밤마다 아버지가 그리워 울었습니다. 아버지라는 비빌 언덕이 없어지자 하루아침에 돌변한 세상은 낮도 밤처럼 어두웠고요. 친구가 본 제 모습이 진실이었으면 싶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가 계시고, 가난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항상 행복한’ 나였다면요.
‘항상 행복해 보이는 나’와 이른 나이에 생의 무게를 알아버린 ‘실제의 나’ 사이 불화를 중재한 것은 밤마다 쓰는 일기였습니다. 삶의 짐을 글로 옮기고 나면 묘하게도 무게감이 달라집니다. 이 희한한 경험은 저로 하여금 일상쓰기를 멈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경험에 세월이 더해지니 순환 고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루의 번뇌는 글이 되고, 써놓은 글은 하루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선형 선순환의 고리는 어느 한 지점을 향하는 것 같더군요. 어머나, 그 지점은 영원에 잇댄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로 빛이 들어올 틈 없는 일상의 숲에서 만나는 빈터였습니다. 거기로 갑자기 들이치는 천상의 빛이었습니다. 내 일상보다 더 큰 실재를 향해 눈이 열리고 사유의 지평이 열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설거지감이 쌓인 싱크대 앞에서도 순간이동으로 다다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아내이며 엄마로 사는 것, 딸이며 며느리이며 동시에 이 시대 부끄러운 이름 목회자의 아내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나날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 짐 모두 사라지고 ‘항상 행복한’ 날이 있으려나요. 다행히도 저의 선생님, 상담자, 구세주 그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저를 부르셨어요. 쉬운 멍에, 가벼운 짐을 함께 메고 같이 지고 가자고요. 수고하고 무거운 제 일상의 짐, 그분께 나아갈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랄 게 아니더군요. 자, 이제 저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보따리 일상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무거운 짐이 쉽고 가벼워지는 신공을 보실 수도 있어요. 비밀인데요. 제게는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기예가 있답니다. 일단 저의 성소() 싱크대 앞으로 오세요. 거기서 뵈어요!
설날이 주일 예배는 빈자리가 많았다. 아름다운 일이다. 예배 시작 인사처럼, 노인들만 계시던 시골의 어느 작은 교회의 주일예배가 꽉 차서 풍성할 것이니까. J&W 목사님 부부가 기습적으로 우리 교회에 예배에 함께 했다. 교인이 주로 젊은 사람들이어서 설날 예배를 아예 흩어지는 예배로 정했다고. 형님네 찾아온 동생 가족이다. 내적여정과 오랜 꿈여정으로 W 선생님과 함께 하고, 작년에는 남편 J 목사님까지 내적여정, 꿈여정의 벗이 되었다. 이 만남은 남편에까지 닿아 JP과 함께 <마음의 혁신> 책모임도 하시고, 신소희 수녀님의 기도 강의를 함께 들으며 여정의 동반자가 되었다. 내적여정 동생 가족과 예배 마치고 명절 식사로 파스타를 먹었다. 설날 한 나절 짧은 만남이었다. 어쩐지 진짜 가족을 만난 명절인 듯 마음의 여운이 길다. 보이지 않는 갈등을 감추고 그럴듯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포장된, 흔히 떠올리는 정상 가족, 정상 명절의 모습은 아니지만. 아니어서 더욱 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