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작업이든 말씀 묵상이든 같은 텍스트를 읽고 제각각의 감동을 받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 다른 묵상과 감동을 듣는 것 자체가 '배움'이다. 여럿이 함께 하는 아름다움이다.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있었던 꿈작업에서 "남편과 함께 있다"라는 문장에 머무르며 남편과 함께 하는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함께하지만 독립하고 싶고, 외롭기에 함께하고 싶은 갈망을 보게 되었고. 남편의 인생여정과 맞물려 돌아가는 나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말씀 묵상 본문은 마태복음 13:10-17인데. 같은 본문을 읽고 같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 신비롭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감동과 깨달음인 것을 느낄 수 있다. 샬롬이 깨진 두 마음에 말씀으로 주시는 그분의 위로와 소망이다. 

JP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그런데 마귀도 이 세상에 같은 일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뒤섞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금세 수긍이 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좀 불편하기도 합니다. 역사를 생각해보면 정말 가라지 같은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의 샬롬을 깨뜨리고 찢으며 끊임없이 훼방했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그들은 그 악행에 대한 정의로운 댓가를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직 한 사람의 전인생이 끝나지 않은 현시점에 그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우리는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대체로 선한 사람인데, 후에 큰 악행을 저질렀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대체로 나쁜 사람인데, 회개하여 개과천선하여 공익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힘쓰고, 불의와 싸워야 하는 것은 언제라도 당연히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최후까지 좀 미뤄두는 것이 지혜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비유 해석이 여전히 알쏭달쏭합니다만, 붙들고 싶은 구절은 이렇습니다.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43)

주님, 영원하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거든 빛나는 존재들과 더불어 제 영혼 빛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얼굴빛을 반영하고, 믿음의 조상들의 얼굴빛을 반영하여, 제 얼굴 제 영혼이 영원히 영광스러운 빛을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어두움, 모든 죄, 모든 악행, 모든 상처, 모든 눈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다 말끔히 사라지고, 생명과 진리, 사랑과 신뢰의 빛 속에서 빛나고 또 빛나기를 원합니다. 그 나라 가기까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SS

"엉겅퀴를 묶어서 불사르는 장면은 마지막 막에 나온다.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나라에서 엉겅퀴를 뽑아 쓰레기장에 던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들은 높은 하늘에 대고 불평하겠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무르익은 삶들은 성숙하게 자라서, 자기 아버지의 나라를 아름답게 꾸밀 것이다." (메시지 성경 40-43절)

끝이 있다, 는 말씀에 소망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끝이 있기에 그 끝을 믿고 오늘을 소망으로 견뎌야 합니다. 끝을 향해가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과정'으로서의 오늘이기에 판단을 유보하고 오늘 분량의 샬롬을 살아야겠습니다. 그 끝의 심판은 맥락없이 뚝 떨어지는 판결이 아니라 제 인생의 과정으로서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지 성경의 표현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거룩하게 무르익은 삶들은 성숙하게 자라서, 자기 아버지의 나라를 아름답게 꾸밀 것이다." 그 아름다운 끝을 향해, 그 끝을 믿고, 내적 외적인 상황이 어떠하든지 오늘 하루의 샬롬을 간절하게 지키고 살겠습니다.

주님, 함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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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제일 먼저 베란다 앞에 서서 하늘을 본다.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하늘을 보면 "하늘"이라 불리는 연구소 연구원 선생님이 생각나곤 한다. 그리고 바로 글쓰기 모임에서 한 벗이 썼던 문장이 따라 나온다. "하늘이라고 늘 맑으라는 법이 있나." 오늘 하늘은 이 연상작용이 줄줄줄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그런 하늘이다. 아, 연구원 하늘이 유럽 여행을 가서 여기 없구나, 하늘이라고 맑으라는 법이 없으니... 하늘의 주인께서 오늘은 흐리기로 작정하신 날이구나. 베란다 앞 십자가는 무겁고 슬프구나. 입원 첫날을 보내셨을 어머니 생각, 안팎의 짐들의 무게가 저 십자가에 투영되었나?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있었던 꿈모임에서의 문장들이 가슴 언저리에서 맴돈다. "상처에 피흘리며 기절하듯 고개를 떨군 여자"  "원래는 하늘로 솟구쳐야 하는데 건물 안이라..." "그냥 두면 안 되겠다, 나의 힘을 보여준다." 
 
이 마음 그대로 가지고 영적 독서와 말씀 묵상의 창들을 열었다. 말씀 묵상 밴드에 JP가 마태복음 12:22-32에 붙인 묵상이 마음을 울렸다.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 12:30)

이 세상의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가라지(원수가 뿌려 놓은 것, 악)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발본색원하여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인간 존재의 이중성 때문일 것입니다. 악은 사라지고 선한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마귀는 그 선한 사람들의 선한 행위가 누군가에게 악한 행위가 되도록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로마 권력을 내몰고, 유대 권력을 붕괴시켜, 새로운 메시아 시대를 혁명적 방식으로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겨자 씨와 같이 지극히 작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이 동네 저 동네 뿌리시고 다니셨습니다. 그 일은 지극히 작은 운동이겠지만, 언젠가 나무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가루 서 말 누룩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부풀어 올라 큰 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전진하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와 진리와 생명으로 변화된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면 눈물을 흘려 씨를 뿌리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 새들이 깃들이는 세상을 꿈꿉니다. 풍성한 나눔의 잔치가 일어나는 세상을 꿈꿉니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기대하고 소망하며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말씀과 사랑의 씨앗을 심게 하소서.

 
나도 댓글로 묵상을 남겼다. 
 

" 내버려 두어라."

"주님, 뽑아 버릴까요?" "주님, 말씀만 하세요. 제가 뽑아 버릴게요!" 의협심의 옷을 입은 이 열정이 주님을 향한 마음인지, 내 유익과 의를 지키기 위한 발로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달려드는 저의 태도입니다. 제가 가라지라 규정한 것들이 진정 가라지인지, 어쩌면 내가 가라지인지도 모를 텐데요.

"내버려 두어라", 추수하는 날, 그 끝날까지 내버려 두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저를 향한 인내와 자비의 마음이신 것을 알겠습니다. 제가 저 아닌 존재를 향한 태도로 주님께서 저를 대하신다면 벌써 뽑혀 버려졌을 텐데... 내버려 두시는 사랑, 내버려 두고 기다리시는 사랑으로 오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그러하시듯 저도 때로 내버려 두고 인내할 수 있게 하옵소서. 비록 열매를 보지 못하더라도 오늘 뿌릴 씨앗을 뿌리며 살게 하옵소서. 가려내지고 불태워질 마지막 추수의 날이 있음을 두려움으로 소망하며 오늘 순간순간 사랑을 선택하며 살겠습니다.

 
하늘이라고 늘 맑으라는 법이 있겠는가. 오늘 내게 주어진 하늘이 흐린 저 하늘이라면 오늘은 오늘의 하늘을 살아야지. 이 악물고 버티지 않으려고 한다. 흐린 하늘이라고 해서 하늘이 아닌 것은 아니니 오늘은 기꺼이 저 하늘을 살고, 저 하늘에 안기기로 한다. 하루의 끝이 올 것이고, 반드시 끝을 주시는 주님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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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좋아서 한 일인데, 벗들의 축하를 막 받자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졸업 축하 선물로 소고기를 받아서 비 오는 월요일 점심에
오랜만에 다 모인 네 식구가 김치우동 곁들여서 맛있게 먹었다.
논문 하나 더 쓰고, 졸업 한 번 더 할까? 소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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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큰 의미를 부여한 졸업식은 아니었고, 사진이나 예쁘게 찍자! 싶었는데. 캠퍼스를 누비며 사진 찍는 즐거움마저 없겠으니... 글렀군! 가족 총출동의 졸업식이 어쩐지 시시할 것 같은 느낌으로 기분이 우중충했다. 학교 가는 길, 비 사이에 눈이 섞여 떨어졌다. 가지가지한다... 제대로 글렀군! 일찍 도착하여 방황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 밖에서 사진 찍어! 지금 눈이 엄청 와." 하는 소리에 튀어나가 인생 샷을 건졌다. 축복처럼 눈이 쏟아졌고, 예쁜 사진을 건졌다.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좋은 사진은 우연의 렌즈에 걸려 얻는다. 눈 감은 이 사진이 어쩐지 너무나 마음에 드는데...  갑자기 쏟아진 눈처럼 그냥 주어진, 얻어 걸린 선물이다.
 

 
반백의 머리칼로 눈 맞으며 찍은 중년 부부의 사진이 뭐로 보나 포토제닉 감이지만. 조명도 별로 안 좋은 실내에서 찍은 이 사진은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또 하나의 포토제닉이다. 이 멋진 청년들을 딸 아들의 이름으로 옆에 세우고 찍은 사진이라니.

 

가톨릭 신자 속 혼자 개신교인이라는 괜한 자격지심으로 스스로 왕따 된 면이 없지 않은데. 졸업, 마지막 날에 원우회에서 준비한 축하식에 참석하고 이리저리 몰려 사진도 찍고 보니 기쁘고 행복했다. 돌아보니 역시 사람을 얻은 시간이었구나! 수녀님, 수사님, 신부님. 좋은 벗들을 얻었다. 학위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돌았던 것도 아닌데. 굳이, 꼭 와야 했던 학교일까? 괜한 생각으로 마음의 에너지 많이 소비했는데. 마침표를 찍고 보니 굳이, 꼭, 바로 이때 있어야 할 곳이었다.  종교의 담을 넘어가 '사람'을 얻었고, 사람을 얻은 덕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음에도 다른 내가 되었다. '인맥'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궂은날을 예상치 못했듯, 졸업식 하루가 어떨지 예상치 못했다. 안팎으로(외적으로 내면적으로) 이렇게 풍성한 축하를 받게 될 줄 생각지 못했다. 실은 은밀히 다닌 학교인데 말이다. 내 교회와 가톨릭 교회, 이쪽에서는 저쪽 말을 못 하고, 저쪽에서는 이쪽 말을 못 하며 공부를 했다. 축하식이 졸업생 나눔 시간에 이런 취지의 말을 되었다. "원없이 공부했다.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에 교회도 하나이구나, 깨달았고. 하나인 교회가 또 얼마나 갈라져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도 느꼈다. 원없이 사랑했고, 원없이 아파했다." 

 

여러 개의 꽃다발, (그 지루한) 졸업식 자체도 기쁜 축제였다. 아프고 기쁜 체험이 참으로 소중하다. 그 체험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석사과정 자체, 가톨릭 학교라는 조금 무모한 선택 자체가 체험을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매한 정체성을 가지고 좋은 선생님, 좋은 공부에 몰입하여 매진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 
 
아래 바실 패닝턴 신부님의 말에 동의한다. 나라면 "생활" 대신 "삶"이라고 번역했겠으나, 여하튼 깊이 동의한다. 쉽지 않았던 대학원 생활, 무지 어려웠던 논문 기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장 자비롭고 은혜로운 초대였기에 말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만약 제가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가 제게 수도생활의 고통과 어려움을 알려 주었더라면 빨리 진로를 바꿨을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그 자체는 제가 찾는 사랑 체험을 결코 저에게 전달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체험은 오직 생활 안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후로 저는 단 하루도, 한 시도, 한 순간도 하느님의 가장 자비롭고 은혜로운 초대에 응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 _ 바실 패닝턴 『향심기도』,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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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으니 이때다! 싶어 온종일 죄책감 없이 침대에서 뒹굴었다. 읽다 자다 읽다 자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다 읽었다. 분량으로 치면 두어 시간이면 끝나겠지만, 양으로 가늠되는 책이 아니다. 제목과 표지, 작가 정보 때문에 벌써 사놓고 펼쳐보질 못했다. 교회 여성모임에서 여행 가시는 집사님께 마음을 딸려 보내고 싶어서 사놓고 펼쳐보지 못한 책을 드렸다. 그리고 바로 다시 주문했다. 같은 책을 읽으며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첫 문장이 이러니 읽어나갈 엄두가 났겠는가.
 
조금 아픈 몸으로 읽다 쉬다 하며 하루를 몽땅 들이는 방식으로 읽기를 잘했다. 나이가 들어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소설을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실을 쓰고 싶어서이다. 내가 경험한 일들을 낱낱이 쓰고 싶은데, 그 낱낱의 사실들이 사실이 아닌 척, 특히 내가 경험한 사실이 아닌 척하고 싶어서이다. 《부끄러움》을 읽으며,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철학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하여 (언감생심 이루지도 못할) 내 생각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책을 한 권 내놓을 때마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징징거리는 나는 부끄러움으로 부끄러움을 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읽다 보니 아, 부끄러움은 관념이 아닐뿐더러 형용 가능한 감정도 아니지 않은가 싶다. '은유나 상징을 배제한, 밋밋한 글쓰기'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그 해의 기억을 묘사하는 덤덤한 글을 따라가다 내 어떤 기억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다. 부끄러움은 '장면', 이미지이다. 덧붙여지는 심리분석이 아니다.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 할까?

 
책의 마지막 몇 단락을 여러 번 읽었다. 두고두고 읽고 또 읽을 생각이다. 책이 나온 뒤에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을 쓰겠다는... 사실? 아니 진실을 향한 갈망과 용기라니!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내 기억의 장면들을 나는 쓸 수 있을까? 은유, 상징, 심리분석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기술할 수 있을까?   
 

1996년의 여름이 끝났다. 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무렵 사라예보의 시장 바닥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몇몇 작가들이 "부끄러움에 목이 멘다"라고 신문에 썼다. 그들에게 부끄러움이란 하루아침에 생겼다가 그다음 날이면 떨쳐버릴 수 있고 어떤 상황에는(보스니아 내전) 적용되지만 다른 상황에는(르완다 내전)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개념이었다. 사라예보 시장의 피바다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끄러움에 목이 멘다" 같은 표현을 나는 얼마나 자주 내뱉었던가. 내가 말하던 부끄러움이 현학적이었다고까지 느껴진다. 강의와 집단 여정 중에 '수치심'이란 말을 얼마나 자주 입에 올리는지. 인간 마음 맨바닥에 있는 감정이 수치심이며, 영성적 치유는 수치심의 치유라는 설명을 입에 달고 있는데. 내 말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진다. 이 부분을 해설한 작품 설명을 그대로 옮겨봐야겠다. "그녀에 따르면 그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부끄러움이란 하루아침에 생겨났다가 그다음 날이면 떨쳐버릴 수도 있고, 어떤 상황, 즉 보스니아 내전에는 적용되고 다른 상황, 예컨대 르완다 내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개념인 반면, 자신의 그것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없거니와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적용되고 그럼으로써 영원하게 살아 있는 실체와 같다."

 

이 책을 쓰고 있었던 지난 몇 달 동안 어떤 영화가 개봉했든 어떤 책이 발간됐든, 혹은 어떤 예술가가 죽었든 그것이 1952년에 일어난 사건이면 대뜸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일들이 까마득히 먼 그해의 현실, 어린아이였던 내 존재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1952년 일본에서 출간된 오오카 쇼헤이의 《불》이란 책에서 나는 이런 글귀를 읽었다. "이 모든 게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말하기 싫은 기억의 장면들이 있다. 그 장면이 부끄러움이고, 부끄러움이란 내 기억 속의 장면들인데... 의심할 수 없는 바는 이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 
 
이로써 나는 아니 에르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알라딘 보관함 한 페이지가 아니 에르노로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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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친구를 데려와 집에서 자겠다고 하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정확히 누구에게 고마운 건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특히 채윤이 친구는 더 그렇다. 채윤이 친구 인생사에 엄빠로서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다. 일부러 지은 죄는 아니지만 늘 미안하고 마음 아픈 지점이다.  아빠의 진로로 한 번, 두 번, 세 번... 좋은 친구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들이다. 아빠 상황, 아빠가 매인 교회 상황 때문에 초3부터 학교 친구 없는 동네에서 살기 시작. 태어나면서 유아실 동기들과 함께 자랐던 소중한 교회에서 떠나기. 좋은 찬양팀과 리더 선생님 만나 이제 막 음악과 신앙을 꽃 피우려는데 또 떠나기... 학교 친구, 교회 친구를 제대로 만들기 참 어려운 환경이었다. 대학에 가더니 친구를 만나고, 친밀감을 쌓고, 갈등을 겪어내고 하더니 후반에는 정말 활발한 친구 생활을 누리는 것을 보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하는 친구들과 신나게 음악하고, 찐 우정을 쌓고 놀고... 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행복하다. 죄책감이 덜어지는 느낌이다. 고맙다. 채윤이도 채윤이 친구들도. 드물게 친구를 데려와 자는 날 아침에는 뭔가 특별한 대접을 하고 싶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아침을 먹어야 말이지!
 
나름의 무엇으로 샌드위치를 해주곤 하는데. 정말 나름의 마음을 담는다. 채윤이가 마침내 어떤 친구에게 이 말을 들었다고 한다. "너네 집 베이글 샌드위치가 그렇게 맛있다며?" 음... 진짜 죽어도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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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처음 분당으로 이사 왔을 때 "서울 간다" "서울 갔다 왔더니 피곤하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렸다. 충청도나 경상도도 아니고 바로 옆이 서울인데, 굳이 "서울 간다"고들 하시네. 서울 어디냐에 따라 서울에서 서울 가는 거리보다 여기서 서울 가는 거리가 더 가깝기도 한데,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분당을 거점으로 하여 2년에 한 번씩 분당으로부터 멀어지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계속 분당이 거점이라면 몇 년 후에는 평택이다...) "아, 서울 가는 게 이런 거구나!"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멀구나... 서울이... 일 때문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일이 아니어도 한 번씩 만나고픈 사람이 대부분 서울에 있으니 서울은 가야 할 곳이다. 이래저래 적응하고 보니, 광역버스 권으로 최적의 장소가 있다. 최적의 장소에 최적의 카페가 있고, 인근이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다. 서울에서 사람을 만날 때는 거의 오직 한 카페에 간다. 아주 딱이다.
 
사람
노안이 와서 눈이 침침해져 돋보기를 쓴지 벌써 몇 년이다.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는 눈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멀리 보라!"는 그분의 메시지라 받아들이고 가까운 것을 흐릿하게 보며 살려고 한다. 눈과 귀가 밝은 태생이라 뭐든 참 잘 들리고 잘 보이고, 빠르게 판단이 되는데. 이게 걸림돌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가까운 것들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하고, 바로 어제 일이 생각나지 않아서 부끄러울 때가 있지만 받아들이며 살려고 한다. 멀리 보는 눈으로 이생의 끝에서,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만날 하나님 나라를 더욱 가까이 살 때가 된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자세히 보려는 노력 대신 보이는 만큼만 보려고 한다. 사람 마음에 민감한 태생이지만 보이지 않는 동기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힘을 빼고, 빼고 또 빼려고 한다. 누구보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그러려고 한다.
 
장소
서울만 가면, 서울에서 만날 사람이 있으면 늘 가는 카페 근처의 새로운 카페를 발견했다. 늘 가던 곳은 지하였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딱 마음에 드는 곳이다. 지하를 좋아하지 않아서 막히더라도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는 편인데, 늘 가던 카페가 지하라서 별로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편의 때문이었다. 나의 편의도 있지만, 만나는 분들의 편의가 더 많이 고려된 것이기도 하다. 만나러 어디든 오겠다는 분들을 멀리까지 오게 할 수 없어서 내가 움직여야 하는데, 너무 힘들지 않게 다다를 수 있는 최적의 서울이었다. 마침 여러 조건들이 좋았지만, 지하 카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네. 약속 장소를 정하는데 "거기는 커피가 맛있어서 좋고, 전망이랑 분위기는 건너편의 **도 좋아요."라는 톡을 보았다. "아, 전망과 분위기를 고려할 수도 있겠구나!" 대단한 깨달음도 아닌 깨달음이 왔다. 그래서 아주 편의도, 전망도, 분위기도 만족시키는 새로운 장소를 알게 되었다.
 
기도
가까이 있는 이들을 흐릿한 눈으로 보는 게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타고난 에로스 에너지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눈과 귀와 마음이 무한으로 열린다. 말하자면 잔소리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남편, 아이들에게 나는 잔소리쟁이이며 간섭쟁이이다. 나는 이제 이 열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이런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좀 분산시키는 것도 좋지. 그 누구라도 오늘 지금 새롭게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면 되는 일이다.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닌데, 심지어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이인데도 열정이 향하는 사람이 있다. 500년도 전에 살았던 아빌라의 데레사가 내겐 그러하고, 많은 저자들이 그러하다. 때로 그립고 그립고 그리운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내게 '기도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다. 내 이 넘치는 마음의 에너지가 닿고 싶은 곳은 그분의 마음이다. 그분이다.
 
기도가 맺어준 먼 동네 새 친구를 만나
새로운 카페를 알게 되고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앉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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