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복음과 상황>의 커버스토리가 ‘중년의 영성’이었다. 여기에 나란히 실린 내 글과 남편의 글이다. ‘JP&SS의 사랑과 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함께 기고했던 일이 벌써 20여 년 전이다. 신혼일기를 썼던 지면에 중년일기를 썼다.
JP&SS의 사랑과 책과 중년 이야기
정신실
“누나도 같이 가시는 거잖아요. 제가 마음에 담아서 갈 거니까, 지리산에 같이 있는 거예요.” 이런 말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교회 청년들과 지리산 종주를 떠나던 후배 JP가 잘 다녀오라는 내 말을 이렇게 받아쳤다. 말이 없는 친구인데, 했다 하면 이렇구나! 평생 이렇듯 달달한 세레나데를 듣고 살겠구나, 하며 결혼했다. 환상이 깨지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기나긴 인생 여정 중 에로스 에너지가 폭발하는 짧은 순간이 있다. 생전 불러보지 않은 세레나데를 부르고 행복을 장담하며 결혼한다. 환상이었기에 다행이지, 음식이고 사람이고 단맛을 안 좋아하는 내가 평생 달달함 속에 살아야 했다면 고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올해 결혼 25주년을 맞았다. 마리 루티(Mari Ruti)가 말한 바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25년 치열한 사랑의 시간을 보냈고, 덕분에 꽤 괜찮은 중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결혼 3, 4년쯤 되었을 때 이 지면, <복음과 상황>에 ‘JP&SS의 사랑과 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는 기회가 있었다. 둘이 함께 쓰는 신혼일기였다. 후에 《와우결혼》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했는데, ‘와우결혼’은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의 줄임말이다. ‘와서 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싸움’을 보라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성격 차이, 재정, 출산과 육아, 가사노동, 일과 소명, 부모님과의 관계 등, 부부가 마주하는 주제를 놓고 주고받는 글을 썼는데, 한 번도 화기애애한 탈고가 없었다. 어떻게든 글이 되고 만다는 ‘마감일 마법’ 덕에 매달 결국 쓰긴 했지만, 그만두자, 도저히 같이 못 쓰겠다는 말이 수시로 나왔었다. ‘그만두자’는 것이 결혼이 아니라 기고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감일 압박과 함께 보이지 않는 독자를 세우고 싸우는 싸움이라 나름 페어 플레이였다. 덕분에 각자 본격 싸움의 기술을 연마했고, 잘 싸우고 난 후에 더 가까워지는 맛도 보았다. ‘화해한 상태로 싸우기’라는 좋은 관계의 원리도 터득했다. 연재를 마친 후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싸우고 살았답니다”이다. <복음과 상황> 덕에 사랑을 ‘성장의 문제’로 산 세월을 돌아보며 신혼일기 아닌 중년일기를 쓰는 감회가 깊다. 감사한 마음이다.
신앙 사춘기, 무의미의 숲, 중년의 현상
나이 몇 살부터 중년일까. 호르몬의 변화와 함께 완경을 하고, 이후에 오는 몸과 감정의 변화들, 흔히 갱년기 증상을 통해 여성의 중년기를 가늠한다. 중년을 연구하는 한 신부님이 ‘거꾸로 계산법’을 제안했다. 물리적 나이, 즉 살아온 시간보다는 삶을 마치는 시기로부터 헤아리라는 것이다. 태어남이 아니라 죽음의 방향에서 중년을 바라보자는 뜻이다. 일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시기일 수도 있고, ‘퇴행성’이란 말이 붙는 건강 문제가 생기거나, 삶을 지탱하던 의미나 가치들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때일 수도 있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상실감의 바람과 함께 찾아드는 것이 중년의 위기이고, 그 바람에는 죽음의 냄새가 묻어 있다. 중년 연구가들이 38세에서 60세까지 폭넓게 그 시기를 잡는 것이 이해할 만하다. 몇 살쯤, 어떤 영역의 무너짐과 상실감으로 중년을 맞이했는가는 한 사람 인생 여정의 고유함이 담긴 서사일 것이다. 내게 중년은 꽤 이른 나이에, 몸이나 정서보다 신앙의 위기와 상실감으로 먼저 왔다.
정확히 서른여덟이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그 나이 되도록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신앙에의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시작은 미약하였다. 교회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예배에 앉아 있는 것, 특히 설교 듣는 일이 거북해졌다. 화선지에 튄 먹물 한 방울 같았는데 그 거북함이 신앙생활 전반, 아니 삶 전체로 퍼져나갔다. 퍼져나가고 퍼져나가면서 내 마음의 화선지는 무기력과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열정 넘치는 신앙인이었는데, 그 뜨거움은 죄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삶에 생기를 주었던 이전의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힘을 내보려 해도, 아무리 힘을 내보려 해도 힘이 나지 않는 상태, 우울증 증상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전에 하던 기도로는 신앙을 이어갈 수 없었다. 교회는 가기 싫고, 설교는 더욱 듣기 싫으니 예전 방식으로는 기도도 하길 싫으니 하나님께 가는 길을 잃은 것이었다. 이러다 하나님께 버림받겠다는, 이미 받았다는 생각으로 좌절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예전 방식의 신앙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했던 기도나 신앙적 열정이 차라리 부끄러웠고, 때로 혐오스러웠다. 적극적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로부터 떠나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떠나온 그곳으로 통하는 문이 등 뒤에서 스르르 닫히고 있었다. 앞은 칠흑 같은 곳이라 발을 뗄 수 없었다. 한 발 앞이 낭떠러지인지, 뱀이 득실대는 늪인지, 혹여 빛으로 가는 신작로일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한 발 내디딜 빛은 책에서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둔 밤’이라는 말에서 ‘빛’이 보였다. 16세기 스페인의 영성 신학자 십자가의 성 요한의 책 제목이다. 이 책 《어둔 밤》을 현대적 의미로 해제한 책에서 제랄드 메이(Gerald G. May)가 말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의 신호들이 놀랍도록 나의 칠흑 같은 시간을 비추어주었다. 여기저기서 이름만 보았던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의 원저를 읽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낯선 이 책들이 마음에 어떤 길을 내주었다. 등 뒤에서 닫힌 문을 다시 열게 될 일이 없으리라는, 다시는 이전의 신앙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신앙의 어두운 숲에서 길잃은 내게 선생님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16세기 두 저자는 또 다른 중세 영성가들을 끌고 왔다. 또, 시대를 거슬러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나를 끌고 갔다. 낯선 이 글들을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찾다 보니, 동시대 가톨릭 영성 작가들에 닿았다. 40여 년 신앙생활 동안 듣도 보도 못했던 보석 같은 책과 스승들이었다. 애써 찾아 만난 것이 아니다. 기도의 길을 찾던 내게 세기를 거슬러 기도의 스승들이 나타나고 찾아오시니 배우고 따를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몇 년을 그렇게 보내고, 그 어두운 나날들에 내 나름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아이의 신앙에서 어른의 신앙으로 가기 위한 변태의 시간, 신앙 사춘기였다. 신앙도 삶도 그 무엇도 의미 없는 무의미의 숲이었고, 중년의 현상이기도 했다.
위기가 기회가 되는 역설
30대 초중반에 쓴 JP&SS의 사랑과 책 이야기는 진로와 소명에 대한 고민으로 끝이 난다. 당시 나는 신생학과인 음악심리치료학을 새로 공부하고 기적처럼 풀타임 직장을 얻어 일하고 있었다. 자타공인 천직이었다. 평생 직업으로 기쁘게 일하며 살 일만 남은 것 같았다. 반면 남편은 시민운동을 거쳐, 다시 대학원 공부를 하고, 말씀 묵상지 편집 일을 하면서도 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으로 지냈다. 결국 운명처럼 신대원에 입학했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실은 내 중년의 위기 또는 신앙 사춘기는 이와 맞물려 있다. 열심 있는 젊은 부부에서 목회자 부부로 갑자기 정체성이 바뀌었다. 교회는 같은 교회였다. 평신도에서 목회자로, 남편의 위치가 바뀌자 덩달아 나의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고갱님’에서 갑자기 가판대 안쪽 판매원 자리에 서게 된 형국이랄까. 정확하게 말하면 판매원의 가족이 된 것인데, 가판대 안쪽의 세계가 무시무시하게 불합리했다. 기도와 예배의 메마름은 그 위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남편은 이제 교회를 지키고, 교회의 제도를 지켜야 하는 전도사-목사의 길 위에 올라선 것이다. 얄궂게도 내게는 이때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담을 넘는 시절이 되었다. 횡적인 담을 넘어 가톨릭으로, 종적인 담을 넘어 중세와 초 세기 기독교로 넘나들며 배우고 기도했고, 급기야 천직이라 여겼던 음악치료보다 영성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신혼일기를 표방한 연재 제목이 JP&SS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책’ 이야기인 이유가 있다. 남편과 나를 중매한 것도 책이고, 연애하다 헤어지게 된 사연에도 ‘책’이 있다. 청년부 시절, 후배 JP와 좋아하는 저자가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봉호 교수님과 이현주 목사님이다. 두 분을 같이 좋아하기는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고신 교단의 장로이기도 한, 시대의 도덕 선생님으로 보수성향을 띤 손봉호 교수와 진보 신앙인의 아이콘, 면직된 목사 이현주 목사였으니까.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지! 운명적으로 사귀게 되었다. 초록에 줄이 그어진 무늬만 보고 같은 수박인 줄 알았다. 쪼개보니 빨강 노랑 수박이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달랐다. 남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이현주적이었다. 그 진보성이 내게 불안을 유발했다. 반대로 나는 더 손봉호적이었기에 남편에겐 갑갑했던 것이고. 머리형에 활자 중독 커플로서 헤어짐의 위기를 책으로 타계하려 했다. 존 스토트의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함께 읽으면서 타협 지점을 찾아보려 했는데, ‘다름’의 내용만 더 또렷해졌다. 헤어짐이 답이었다. 그 시절 내 마음에 오르락내리락 울리던 노래 가사가 있었다.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김창기의 노래이다. 남편의 개방적 진보적 신학이 버거웠고 두려웠다. 저러다 종교다원주의로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보수적인 신앙 안에서 자란 내가 저렇듯 자유의 욕구가 높은 사람을 감당하긴 어려운 일이라 여겼던지, 헤어지는 어간 자꾸 저 가사를 되뇌었다.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그랬던 남편은 고신 신대원을 나와서 제도교회의 목사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사이에 두고 설전을 벌이던 남자친구,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을 좋아하던 그 청년을 떠올려보면 상상할 수 없는 오늘이다. 반대로 ‘구원의 확신’ 같은 것을 따져 물으며 교리의 틀에 남자친구를 집어넣고 싶어 안달하던, 제도권 밖 신앙이 두려워 사랑하는 남자를 온전히 사랑하지도 못했던 나는 신앙 사춘기를 지나며 담을 넘은 여자가 되었다. 기도를 배우기 위해 가톨릭의 여러 기관을 전전하다 결국 가톨릭대학원에 들어가 아빌라의 데레사로 논문도 썼다. 가톨릭 수녀님을 인생의 스승이며 친구로 얻고, 신부님을 영성 지도자로 만나는 오늘을 살고 있다. 남편이 뒤늦게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신앙의 위기로 닥친 중년을 지나며 어쩌면 나는 개신교회를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한때 그의 원심력이 버거워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라며 떠나보내야 했었는데. 그가 목사의 이름으로 내 신앙의 구심력이 되어주었다. 모교회 전도사와 부목사, 대형교회 부목사를 경유하여 안착한 남편의 사역지는 이른바 ‘교회 사태’를 겪은 교인들이 세운 교회이다. 냉소와 불신, 특히 목회자에 대한 불신의 터 위에 선 시대적 교회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목사 노릇을 하는 남편의 ‘무너짐’이 내 늦바람을 잠재웠다. 그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화평하게 만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중년의 온갖 증상을 ‘영성의 바람’으로 알아들을 때, 위기는 기회가 된다.
중년의 영성: 내적 자아와의 만남
여성들의 영성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영성이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테이야르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말처럼 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에, 모든 이야기와 기도는 지금 여기의 자잘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한다. 희한한 것이, 결혼한 중년 여성들의 일상성찰과 기도는 거의 남편으로 귀결한다. 남편을 위한 기도라는 뜻이 아니다. 하루를 지나며 내 마음에 일어난 온갖 감정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결국 남편이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모 셀럽 목사님이 SNS에 올린 일상 에피소드를 킥킥대며 들려주었다. “여보, K 목사님 얘긴데. 물을 마시다 남아서 나중에 먹으려고 두었대. 사모님이 그걸 그냥 버리지 그러느냐 꾸중(?)을 하시더래.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먹다 남은 물을 바로 버렸대. 그랬더니 아깝게 그걸 왜 버리냐고 또 역정을 내시더래. 어쩌라는 거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건, 그냥 남편이 뭘 해도 꼴 보기 싫다는 거야.”라고 툭 진심을 말해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드러기로 병원에 갔더니 갱년기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런 갱년기 증상도 있냐 했더니, 아무 증상에나 갖다 붙여도 갱년기로 설명이 된다고 했다. 남편과의 관계로 가면, ‘이 남자의 모든 행동이 그냥 분노 버튼인 것’에도 갱년기를 갖다 붙이면 설명이 된다. 갱년기의 아내는 화내며 꾸중하시고, 남편은 쫄려서 눈치 보다 삐지고 만다.
중년의 영성을 논하며 카를 융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 안에 남성 있고, 남성 안에 여성 있다는 조금 난해한 이론이다. 《무의식의 유혹: 우울한 남자의 아니마, 화내는 여자의 아니무스(원제:The Invisible Partners, How The Male And Female In Each Of Us Affects Our Relationships)》. 이 책의 제목이면 거의 설명이 다 되는 셈인데, 어려우시려나? 무수한 임상 경험을 담아 후려쳐 본다면 ‘화난 여자, 삐진 남자’이다. 여성에게는 여성 호르몬이, 남성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줄면서 상대적으로 여성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남성에게는 여성 호르몬의 작용이 더욱 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때가 갱년기이다. 전에 없던 분노와 힘을 표출하는 아내, 말로 하면 될 것을 삐져서 입 다물고 있거나 우울한 모습을 띠는 남편에 대한 증언이 허다하다. 카를 융에 의하면 중년기 이후의 중요한 과제는 내적인 자아와의 화해이다. 타고난 성별로 사느라 애썼던 여자와 남자는 억눌리고 숨겨졌던 여성 안의 남성(아니무스 Animus)을, 남성 안의 여성(아니마 Anima)을 발현하고 꽃피울 때 온전하고 성숙한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년 이후의 과제이다. 한 여자, 한 남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충족한 존재가 되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각각 자기 안의 이성을 잘 마주하고 살려내면 독립적이고 통합적이며 성숙한 자아가 된다는 뜻인데, 도대체 그 이성은 누구냐고?
“누나도 같이 가시는 거잖아요. 제가 마음에 담아서 갈 거니까” 지리산 종주를 떠나며 내게 남겨준 이 말, 나는 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고백이며 프러포즈였다. 중년의 끝자락에서 다시 새롭게 이 말을 듣는다. 남성의 내면에 있는 여성, 여성의 내면에 있는 남성은 ‘투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외적 세계의 스크린에 구체적인 사람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랑에 빠진 이성이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이성에게서 나는 내 안에 숨겨진 온전성을 향한 에너지를 마주한다. 남편과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때, 그의 무엇이 나를 사로잡았던가 생각해 본다. 대체로 내게 없는 것들이었다. 멋져 보이던 그것이 어느 날 버거움과 두려움이 되었다. 멋지며 동시에 버거운 것을 끌어안고 일상을 살자니 미세한 결핍감과 분노가 조용히 쌓여간다. 중년에 들어서서 허무의 파도가 들이치자 애써 붙들었던 포장지들이 벗겨져 나가고 보니, 남은 것은 ‘꼴비기 싫음’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마음에 담았던 것은 당신의 멋짐이 아니라 내 안의 아름다움이었다.
신혼일기를 연재하던 시절에 농담처럼 지은 일종의 필명이 있었는데, 진지남과 익살녀였다. 매달 글을 쓰며 싸우던 사소한 이유 중 하나는 재미와 의미였다. 의미에 치중하여 진지해지는 것이 나는 싫었고, 재미에 집착하여 가벼운 글이 되는 것을 남편은 못 견뎌했다. 식탁에 나란히 앉은 엄마 아빠의 티키타카를 관람하며 요즘 우리 아이들이 놀리며 하는 말이다. 아저씨 개그 던지고 좋아하는 아빠,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화내는 엄마에게 “익살녀 어디 갔어? 진지남 어디 갔어? 그 사람들 어디 가고... 아오, 진짜 안 어울리게 진지녀 익살남이 앉아 있어. 싸우려면 우리 없을 때 싸워.” 신혼일기 후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싸우고’ 살았던 20여 년 만에 다다른 JP&SS의 책과 사랑과 중년 이야기이다.
정신실: 음악심리치료와 문화영성을 공부했다. 인간의 고통은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진정한 자기와의 연결이 끊어진 '소회된 자아'에서 기인한다는 믿음으로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라는 치유와 상담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중년의 끝자락에서
김종필
중년(中年)이라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거의 끝자락에 다다른 듯하다. 사춘기(思春期)도 시작과 끝이 있으니, 중년기도 그러하지 않을까. 얼른 끝내고 축하파티라도 하고 싶지만, 다 때가 있는 줄 안다. 일상의 매 순간들을 소중하게 마주하며 작은 평화와 작은 기쁨을 건져 올리게 되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중년기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럼 조금 더 성숙해질까? 조금 더 여유로워질까?
내 중년은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됐다. 내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그때 나는 16년을 다녔던 교회를 떠났다. 내 청년기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만난 교회였다. 교회를 통해 첫 직장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간사가 됐고, 교회를 통해 신학교에 입학해서 그 교회에서 첫 목회를 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고, 교회에서 살아있는 공동체를 체험했다. 뜨거웠던 시기였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난관과 마주했다. 아버지는 말기암 판정을 받은 후 40여 일 만에 떠나셨다. 그때 나는 교회와 목회자에게 섭섭함이 점점 쌓이던 차인지라, 내 젊은 날의 전부였던 교회를 사임했다. 그리고 병이 들었다. 열 가지 재앙이 순차적으로 내 몸을 쓰러뜨렸고, 나는 방구석과 병원을 오가는 신세가 됐다. 마지막 재앙이 끝남과 동시에 내 열정의 시기도 끝이 났다. 그리고 나이 마흔을 맞아 100주년기념교회라는 대형교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 삶과 사역을 활활 태웠던 그 청춘의 열정은 다시 오지 않았다. 처음엔 기도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홀로 앉아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30대의 열정은 두 번 다시 점화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 돌아가는 목회 일과는 정신없었고,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이었다. 그러나 내 영혼의 조종실엔 뭔가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들어와 있었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 나올 기회들을 호시탐탐 노렸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 마음이 잠시 뜨거워지곤 했기 때문이다.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고 나면 누군지도 모르는 성도들로부터 문자가 왔다.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성도들의 반응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그러다 반응이 없으면 무가치함이라는 쓸쓸한 정서와 실패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많이 받는 기술을 하마터면(?) 터득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좇으면 어떤 결과가 올지를 막연히 알았기 때문인지, 그 선택 앞에서 나는 매번 서성거렸다. 대한민국 40대 남성의 성공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높고 넓은 길로 갈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끝없이 성찰하며 십자가의 낮은 길로 갈지 갈팡질팡했고, 상승의 유혹과 하강의 은혜가 내 조종실을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즈음 안젤름 그륀의 <내 나이 마흔>이란 책을 읽었다. 아내가 먼저 읽고 내게도 권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사십 줄에 들어서 생긴 이 무기력이 중년기의 과정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중년의 위기는 단지 신체적인 변화가 아니라, 신앙의 여정 중에 결정적인 시점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자기실현을 위해 하나님을 계속 이용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청년의 열정이 식은 것은 후퇴가 아니었다. 무기력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들어선 것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골짜기였던 것이다. 중년앓이는 좋은 현상이다.
내 지하실의 그림자
중년을 앓는 동안, 나의 성격과 성향을 깊이 성찰하는 일이 잦아졌다. MBTI와 에니어그램 강사인 아내 덕에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성찰하고 인정하는 작업은 실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기 내면의 어두운 지하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제정신으로 하기 어렵다. 자칫 자기정죄와 자기혐오에 빠져 염세적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아내가 청년들과 함께 1박2일동안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진행했을 때 일이다. 나는 사람을 번호로 규정하여 분류하고 설명하는 에니어그램 방식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양한 것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너그럽게 세미나를 열어주고 옆에서 슬쩍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 감정은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아내가 에니어그램 5번을 설명할 때였다. 곁에서 한쪽 귀만 열고 엿듣던 내게 갑자기 수치심이 올라왔다. 평상시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숨겨둔 나 자신이 모두에게 까발려진 것만 같았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은 수치심에 얼굴이 뜨거워진 것이다. 나는 내가 매우 합리적인 데다가 공정하고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논리적인 사고를 하고 편견 없이 객관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관적인 편견에 빠진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자부했었다. 내 판단은 늘 괜찮았고, 내 주장은 나름 수준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대 치우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내 자의식 밑에 숨어 있었던 짙고 음흉한 내 그림자가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순식간에 늪에 빠져버렸다. 앉아 있어야 할지 나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내 지하실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 드러난 내 자아를 외면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실체를 나의 정체로 인정할 것인지 씨름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아내가 추임새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지금 여기 현존해!” 듣기 싫은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겐 심각한 나쁜 버릇이 있었다. 오롯이 여기 머물지 못했다. 자동적으로 내 사유는 미래를 배회했고, 내 앞에 있는 이들과의 마음의 교류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와 대화할 때도 대화 그 자체에 머물지 못하고 내 존재의 중심은 항상 미래일로 근심했다. 그때 시계를 보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평생 어떤 미래의 순간을 막연하게 동경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내겐 현재가 없었다. 오늘이라는 순간이 얼마나 멋진지 제대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결코 현실이 된 적이 없는 미래로 도피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건 다른 말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었고, 나 자신에 대한 못마땅한 자기부정이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갈구하는 내 영혼이 반응하고 선택하던 못된 병폐였다. 교회에서 자주 쓰던 비전이라는 말은 내 성취 욕망을 거룩하게 포장한 말과 다름없었다.
그런 복잡다단한 시기로 전환되던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죽음이라는 실체가 무서운 냄새를 풍기며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죽음은 무덤덤한 관념 용어가 아니었다. 내 실존에 딱 붙어 있는 실체였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였기에, 나는 죽음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이제 죽음은 미래의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일이다. 죽음이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질문은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이 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는다는 것은 삶의 일상적인 서술어가 됐고, 죽음 그 이후에 대한 호기심과 소망도 커졌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읽은 스캇 펙의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 던진 흥미진진한 질문 덕이다.
중년의 위기로 쾌속 진입하던 어느 날, 한 문장이 내 가슴으로 날아와 콱 박혔다.
“오늘이 선물이다” (Present is present)
그 문장은 ‘지금 이 순간’의 찬란함을 숙고하고 했고, 나는 거기에 머무는 법을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 그 일이 시작됐고, 에니어그램에 비춘 성찰에서 그 일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바쁘게 일하는 것이 얼마나 해악인지도 알게 됐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먹으며, 느리게 말하고자 했다. 길가에 핀 들꽃을 들여다보며 쭈그리고 앉는 일도 잦았다. 홀로 벤치에 앉고, 홀로 산행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매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시작에 불과했다. 중년의 진짜 훈련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네 식구가 함께 식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 아내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극도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재난이었다. 아들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고, 딸은 성년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이기를 바랐고, 기도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허용적이었고, 정죄하지 않으려 했고, 지지하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내 노력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부턴가 식사 자리에 앉으면 나는 계속 가족들에게 상처 주는 일원이 됐다. 나는 보통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대화를 했을 뿐인데, 내 말들은 가족들의 마음을 때리는 방망이가 됐다. 내 성향에 충실한 원인-결과식 대화는 심문과 정죄의 구도를 만들어냈다. 허용적이고 독립적인 내 성향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귀결됐다. 말을 해도 상처를 줬고, 말을 안해도 상처를 남겼다. 내 존재 자체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족들과 불화하는 일이 이어지는 듯했다. 하루는 아내와, 하루는 딸과, 하루는 아들과 불화했다. 억울하고 슬프고 화가 났다.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꿈이었는데, 그게 깨지니 삶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배우 (고)이선균이 드라마에서 한 말이었던가, “이번 생은 망했어.”
자발적 추락과 은혜로운 상승
툭하면 벽쪽으로 몸을 돌려 일찍 잠들던 내게, 어느날 아내가 책을 추천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쓴 <위쪽으로 떨어지다>였다. 형용모순의 책 제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상대로 매우 어려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세 번을 읽었다. 왜냐하면 이 책이 중년기의 구렁텅이에 빠진 나를 구출하는 밧줄이 될 수 있겠다 느꼈기 때문이다. 중년기에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방어적인 태도’를 인식하고 버리는 것이었다. 이 말이 무기력한 내 영혼에 새로운 활력과 소망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나름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습관적인 방어적 태도로 일관해 왔었다. 아내가 서운해하면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방어한다. 딸이 화를 내면 내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방어한다. 아들이 속상해하면 다른 아빠에 비해 내가 얼마나 나은 아빠인지 설명하며 나를 방어한다. 집에서 그러니 밖에서는 오죽하랴.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그러니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교우들에게 오죽하랴. 방어적인 태도와 말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해명하지 않기로 백번 천번 다짐했다. 속으로는 억울해서 욱할 때도 있지만, 나를 보호하기 위한 해명과 방어의 언어를 멈추고 최선을 다해 수용의 언어인 ‘알겠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 했다. 아니 지금도 의지를 다해 그렇게 말한다. 해명하는 것은 나를 방어하는 것이고 타인을 아프게 하는 것이며 공감이 없는 자의 변명이 되기 때문이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내 성격의 그림자와 지하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식하게 된다.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부족한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사고뭉치나 꼰대가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은혜를 갈망하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팽팽한 긴장이 풀리고 관계가 이어진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너그러워지고 용서하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말도 줄어들고, 귀가 활성화된다. 리처드 로어는 “인생 전반부의 임무는 자기 인생을 위하여 적절한 컨테이너를 만드는 것이고 인생 후반부의 임무는 그 컨테이너에 담아서 운반하기로 되어 있는 내용물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내용물은 추락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내게 다가온다. “먼저 추락이 있다. 그 다음에 추락으로부터의 회복이 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로어 신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존재로 알아들어졌다. 추락이야말로 위쪽으로 오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에 납득이 됐다. 정말 그랬다. 내가 해명하기를 그치면 나는 한없이 추락하는 것 같은 실패감을 느낀다. 내가 지금껏 자부해왔던 나라는 존재의 장점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온다. 내 평생 빚어왔던 내 자화상이 허물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그 자발적 추락이 은혜로운 상승으로 연결된다. 형용모순 안에 진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추락하는 것을 허용했다. 적극적으로 추락하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추락이 두려워서 말과 논리와 언어와 자아를 붙들고 다시 해명하고 방어하는 순간, 나는 겉으로는 상승하고 승리한 것 같으나, 진짜 대책 없는 추락이라는 심판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오십견이 왔다. 축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최근 3개월간의 안식월을 맞아 제주도에서 홀로 한달살이 하는 동안 오십견이 고쳐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후비루 증상은 실은 심리적인 이유였다. 아주대 이비인후과에서 받은 진단이다. 그것도 나아졌다. 설교와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인도한 후에 집에 오면 수치심이 몰려왔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니 그늘도 큰 탓이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의 시선을 덜 의식할 것이다. 너무 잘하려고 스스로 몰아치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진 않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나답지 않은 나로 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나답게 살 것이다. 그러니 잘 못해도 괜찮다. 반응이 썩 안좋아도 괜찮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아도 괜찮다. 타인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그를 축복하는 습관을 기르면 된다.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말을 해도 괜찮다. 솔직하게 즉각 용서를 구하고 성장하기로 마음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성도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죄책감이 밀려오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지나가게 둘 것이다.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 차오르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기억하며 버틸 것이다. 모든 도전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것이다. 받아들이면 괜찮아지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말을 줄일 것이다. 적게 말하고, 천천히 말하고, 부드럽게 말할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인 줄 안다. 그러나 노인네가 아니라 어른이 되려면 혀를 다스려야 한다. 물론 나는 매일 실패할 것이다. 그래도 계속 전진할 것이다.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마음 깊이 감사를 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식하게 하는 현미경과도 같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알고, 마음 중심이 안정적인 평화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중년기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 같다. 그다음은 뭘까. 또다른 새로운 열정일까. 새로운 열정 다음엔 또 다른 위기가 올까. 노년의 위기일까. 큰 질병의 위기일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오늘이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김종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육개발원, Young2080<큐티진> 등에서 일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 말씀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 말씀으로 살게 하는 사람이고 싶은 목사이다. 경기도 분당에서 이우교회를 섬기고 있다. 배우자 정신실과 함께 JPSS라는 이니셜론 2000년대 중반 복상에서 장기 연재를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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