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아버지를 잃은 한 아이가 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목사였다. 장례식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이 다가와 말했다. “울지 마라, 너의 아버지 천국에 가셨는데 왜 우냐? 좋은 곳에 가셨다. 울지마라.” 아이는 그 말에 눈물을 그쳤다.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지.” 울지 않기로 작정했다. 천국에 가신 아버지를 두고 슬퍼하는 것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으면 천국에 갈 수 없고, 천국에 가지 못하면 아버지를 만날 길이 없으니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는 하늘 아버지를 믿기로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그리워 슬퍼지면, 그리운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참아야 했다. 울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생각과 상상력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내게도 좋은 분일 텐데, 우리 아버지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시려고 나는 이렇듯 아비 없는 아이로 만드신 것은 정당한 것인가?’ 물을 곳 없는 아이는 밤마다 일기를 썼다. 쓰기를 잘한 것이,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계속 물을 힘을 길렀다.

 

   이는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작가의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일찍 마주한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냐는 어린 학생들의 질문을 받을 적이 있다. 경험의 한계 안에 갇힌 나는, 나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으니 글쓰기를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마땅한 답이 없어서 둘러댄 말인데, 나와 비슷한 글쓰기 운명론자가 또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썼다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조앤 디디온(Joan Didion)이다. 그녀는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서 글 쓰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조앤 디디온 자신)에 대해 말한다. 다섯 살 적에 왜 혼자만의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설명이 불가함을 말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을 가진 사람이 그런 충동을 가지지 않을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 있는데, 그런 아이들이 글을 쓰게 된다고. 물론 그녀 자신이다. 그렇게 쓰도록 타고난 것이다.

 

   사춘기에 갑자기 아버지를 잃고, 삐뚤어진 마음이 된 아이 앞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왜 하필 글을 썼을까. ‘불안한 투덜이,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써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중에 일기를 써서 난중일기를 남겼고, 유대인 소녀 안네(Anne Frank)2차 대전 중 은신처에 숨어서 쓴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져 반전 문학의 백미로 꼽히며 읽히고 있다. 박완서 선생님은 아들을 잃은 참척의 고통을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으로 썼고, 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역시 아들을 잃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를 썼다. 후대를 위해 기록으로 남기겠노라 주먹 불끈 쥐고 쓴 글이 아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체포의 위협을 느끼며, 상실의 고통 속에서 외롭게 저항한흔적일 것이다. 마주한 현실에 비하면 미력한 몸부림 일지라도, 이들은 썼다. 인생의 고통을 글로 방어하는 사람들, 이분들도 쓸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또 없을까? 같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치유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모임을 이끌고 있다. 첫 모임에서 인사를 나누다 보면 누가 묻지도 않는 글쓰기 실력을 고백해오곤 한다. “글은 잘 못 써요.” 처음 보는 이에게 낯을 가리듯, 글쓰기 자체에도 낯을 가리며 부끄러운 태도이다. 처음엔 곧이곧대로 믿었다.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는 분들이구나, 치유에 꽂혀서 여기까지 오셨구나.’ 모임이 거듭되면 이 운명론자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진솔하게 써내는 이야기의 다채로움과 체험의 깊이가 늘 상상 그 이상이다. 그 어떤 베스트셀러 문학보다 미학적이며 감동적인 글을 만나곤 하다. 알고 보면, 대부분 이미 혼자서 쓰던 분들이다. ‘치유의 글쓰기로 손색없는 글을 이미 일기장에, 비밀 블로그에,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는 사람들이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치유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자매들도 다르지 않다. 모임에 오기 전부터, 사건을 공론화하기 전부터 그들은 쓰고 있었다. 누가 쓰라고 한 것이 아니다. 법정 다툼을 염두에 두고 한 기록도 아니다. 왜 쓰는지,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그저 썼다는 것이다. 나의 운명적 친구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글쓰기를 타고난 친구들이다.

 

글쓰기, 의미를 찾는 일

 

   이쯤 되면 글 쓰는 특정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을 찾아 모을 것이 아니라 왜 사람들이 고통 앞에서 글을 쓰는가, 물어야 할 것 같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로부터를 쓴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역시 쓰는 사람이었다. 수용소 안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무엇보다 거기서 건져 올린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을 잊지 않기 위해서 처절하게 썼다. 정신의학자인 그는 죽음이 일상인 그 수용소에서 오래 살아남는 사람을 관찰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의미, 삶의 의미,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이 생존한다! 프랭클 자신, 다른 수용소로 간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나겠다는 간절함으로 죽음의 수용소를 버텨냈다.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의미가 생존을 지탱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그는 의미치료(Logotherapy)’를 창시한다. 생의 크고 작은 고통 앞에서 저항도 무엇도 아닌 일기를 쓰는 사람은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다. 글 쓰는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갈망인지 모르겠다.

 

   인간에게 글 쓰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버지를 잃고 부조리한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에게, 전쟁의 포화 속 외로운 장군 이순신에게,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박완서 선생에게, 은신처에 숨은 꿈많은 소녀 안네에게, 믿었던 목회자에게 성폭력 당한 청년에게, 오랜 기다림에 지친 취업준비생에게, 신앙 사춘기를 겪으며 기쁨과 열정을 잃은 그리스도인에게, 펜데믹 세상 속 고립되고 격리된 인생에게 글 쓰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자꾸 곱씹고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말하는 이들이 있다. 모든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이다. 이미 일어난 일(경험)은 바꿀 수 없지만, 해석이 달라지면 삶에 대한 태도가 새로워진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기억은 다른 장소에서 새롭게 발화될 때마다 개정판으로 다시 쓰인다. 나와 기억이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굴 때는 의미도 맥락도 발견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내 앞에 나를 세우고 관조하는 행위이다. “죽고 싶다.” 일기장 첫 줄을 쓰는 순간, 죽고 싶은 나를 바라보는 다른 내가 생긴다. 쓰는 내가 있고, 관찰당하고 쓰이는 내가 있다. 그 두 나 사이의 거리가 새로운 관점을 만든다. 기억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한다. 쓰는 일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조리를 찾는 일이고, 부서진 고통의 조각을 이어붙여 맥락을 더듬는 일이다. 그렇다. ‘맥락화될 때 의미가 드러난다. 실패, 좌절, 상실이 마지막 귀결이 아님을 믿고 내 인생이라는 긴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찾아 쓰는 일이 글쓰기, 치유하는 글쓰기이다.

 

   그렇다면 모든 글쓰기는 치유의 글쓰기이다. 치유의 어원을 따져보면 더욱 그러하다. 치유(healing), 건강(health)은 같은 어원인 ‘hal, hale’에서 왔고 이것은 whole , 전체, 온전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Hello! 역시 같은 어원인데, 그 흔한 인사에 담긴 뜻은 온전하길 바래, 전체가 되길 바래(T0 be wholeness)”라고. 고통의 증상이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한 존재가 온전케 되는 것이 치유이다. 존재의 온전함을 향한 갈망으로 현재의 결핍과 고통을 쓰는 일은 그대로 치유의 작업이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라 불리는 이승우 작가는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며, 소설조차도 소설가 자신을 위한 치유작업이라고 했다. 소설은 그것을 쓴 작가 자신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편이며 나름의 치유책이다. 소설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작가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하다.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견딜힘을 얻는다. 세상의 불합리와 파렴치와 몰인정을 이길 힘을 얻는다.”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승우

 

   돌아보면 아버지 돌아가신 후 시작한 일기 쓰기는 아버지 상실로 들이닥친 생의 부조리에서 조리를 찾는 일이었다. 세계가 쩍 하고 갈라졌다. 갈라진 세계에서 고아의 세상으로 넘어가 살게 되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밝고 당당한 을 하며 살았다. ‘을 하느라 애쓰다 진짜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으로 밤을 맞으면 텅 빈 자아의 공간을 채우기 위해 다시 썼고. 뒤늦게 여기에 치유의 글쓰기라 이름 붙일 수 있었다. 치유의 글쓰기는 부서진 세계를 이어붙이려는 노력이었다. 낮의 나와 밤의 나를, 사랑받는 딸과 고아를,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의 하나님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쓰기를 잘했다. 쓴 덕분에 내 인생 이야기의 맥락을 찾아가고 있다. 쓴 덕분에 나처럼 부서진 인생들과 연결되어 더 큰 세계로 이어붙이게 되었다. 상실의 경험은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나를 가두고 절망 가운데 둘 수 있었지만, 쓸 운명으로 부르신 부르심에 순종하여 인생에 감추신 신비를 만져가고 있다. 쓰기를 잘했다.

 

월간 <기독교세계> 4월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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