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20여 년 전, 전에 하던 기도로는 신앙을 부지할 수 없어서 방황하던 때 <영혼의 성>을 만나 읽었습니다. 어려운 말은 아닌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가슴 깊은 곳을 울리며 뭔가 있는 느낌이고가톨릭 책이라 생각하니 금서 읽는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혼자 읽고 또 읽고 필사하며 긴 외로운 시간 보냈습니다. 어느새 함께 나눌 벗들이 하나둘 곁으로 모이더니, 연결된 자매들의 힘을 받아서 논문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높은뜻정의교회 중보기도 세미나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 시작 전 기도생활의 어려움을 나눴는데, 제가 겪었던 부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르짖는 기도, 청원기도로 어제와 다르지 않은 기도 제목을 반복하며 오는 공허감, 무엇보다 더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은 강의 들으시는 눈빛으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타락한 권력으로 교회가 무너져가던 시기, 남자 사제 루터가 말씀을 들고 그 교회를 나오는 개혁을 했다면, 비슷한 시기를 살던 데레사는 자신의 자리에서 기도를 통해 자신을 개혁하고 공동체를 개혁했습니다. 그 기도의 기록이 <영혼의 성>입니다. 진입장벽이 높긴 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의 독서법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전형적으로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며, 마치 보석을 채굴하는 것처럼-사실이 그렇다-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저는 어제 강의에서 체험적으로 알아듣는 집사님, 권사님, 형제님들의 눈을 보았습니다. 정재상 목사님의 목회가 참 고맙습니다. 몰랐던 이 오랜 영성의 샘물들을 오늘에 잇대는 목회를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영성, 영성 목회를 거창하게 표방하지 않고도, 가만히 필요한 일을 하시는 목사님의 행보가 부럽고 감사합니다. 응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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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거긴 날씨가 어때요? 여긴 엄마가 아는 그 날씨예요. 자주 흐려요. 가득한 미세먼지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흐린 날인 건지 하늘이 늘 뿌예요. 봄이 오는 길목이 험난한 것 같네요. 엄마가 보낸 이 땅의 마지막 시간, 그때처럼 막막한 날씨의 연속이에요. 거긴 날씨가 좋죠? “햇빛보다 더 밝은 곳 내 집 있네어렸을 적에 많이 부른 노래 탓인가, 밝고 찬란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으려니 싶어요. 날씨만 상상해도 좋아요. 엄마가 얼마나 싱싱하고 생생하고 행복할까 싶어요. 요며칠 내 마음은 비가 쏟아지기 일보 직전이에요. 누구든 툭 건드리기만 해라, 울어버릴 테니, 하는 심정으로 눈물을 장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조금 전 엄마, 라고 부르는 순간 깨달았어요. , 엄마와 보낸 마지막 시간, 그 애달팠던 계절이 도래했구나!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때였죠. 기약 없는 시간, 예측 불가, 면회 불가의 시간이었어요. 엄마가 입원한 요양병원 건물 앞에 서서 올려다보던 창문, 그 너머 하늘이 마냥 흐렸던 기억이 또렷해요. 한 번, 두 번, 세 번. 엄마 없는 이 계절이 벌써 네 번째네요.

 

엄마 떠나고 바로 코로나를 서너 달 앓았던 느낌이에요. 자발적 자가 격리에, 칩거하며 글을 썼어요. 오직 쓰면서 슬픔을 견뎌냈던 것 같아요. 그 몇 달, 엄마 영혼도 미처 여길 떠나지 못하고 내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해본 적도 있어요. 그리고 나는 죽은 엄마를 팔아서 또 책을 냈죠. 슬픔을 쓰는 일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슬픔을 쓰다니, 글로 쓸 수 있는 슬픔이 슬픔일까 싶었어요. 쓰면서도 수치스러웠는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신형철의 책도 있으니 슬픔은 그냥 그렇게 되는대로, 각자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쓰거나 공부하거나 그렇게 마주하는 것인가 봐요. 엄마 없는 하늘, 코로나바이러스 공포와 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쓰기로 숨을 쉬었어요. 그리고 소중한 것을 배웠어요. 슬픔을 드러내면 누군가는 같이 울어준다는 것을요. 물론 위험한 일이었어요. 그만 잊어라, 장수하시고 좋은 곳 가셨는데 뭘 그리 유별나게 구느냐, 믿음의 사람이 천국을 소망해야지... 그런 소리가 이미 들리는 듯했고요. 슬픔 앞에서, 아니 모든 감정 앞에서 다들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허둥지둥 내놓는 위로의 말이 많이들 어설퍼요. 어설픈 말은 아무 말이 되어 티슈같이 얇아진 슬픈 마음을 찢어내곤 하고요. 엄마, 그래도 내놓기 잘했어요. 상처투성이 알몸을 내보이는 것 같아 부끄러웠는데, 말없이 함께 벗어주는 이들이 있더라고요. 어설픈 말 대신 조용히 자기 흉터를 내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 드문 공감과 연결에 힘을 얻었어요. 슬픔을 쓰고, 슬픔을 내놓고, 몰래 눈물 훔치던 손들을 맞잡고 보니 내놓길 잘했구나 싶어요. 그래서 엄마, 나는 엄마를 잃고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엄마의 딸로서는 달라졌어요. 무엇보다 이렇게 새롭게 엄마를 만나고 있잖아요. 엄마도 이미 알고 있죠?

 

슬픔으로 슬픔을 공부했던신형철 교수는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 낸 사람만 바꾼다.’라고 하더라고요. 사건 속에서 감당하고 겪어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 감정이었어요. 슬픔인 줄 알았는데 무기력이었고, 감정이 없는 것 같은 감정이기도, 때로는 분노, 어떤 때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기도 했지요. 감정의 강이 흐르고 흘러 어떤 대사작용을 일으킨 것이 분명해요. 그해 부활주일 예배가 생각나요. 사상초유, 맞아요! 사상초유의 온라인 부활주일 예배였어요. 엄마 떠난 지 한 달여 지난 때였을 거예요. 노트북 앞에서 멍하니 앉아 예배를 시청하다 설교 후 부르는 찬송에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 되었어요. ‘사셨네, 사셨네...’ 이 가사에 왜 그리 화가 치밀던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몸의 부활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이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부활인가. 격한 감정을 어찌할 수 없어서 베란다로 주방으로 서성거렸던 거, 엄마 혹시 봤어요? 엄마의 몸이 견딜 수 없이 그리웠었어요. 엄마 목소리, 혈관이 툭툭 튀어나온 손등, 그리고 매끄러운 손바닥, 맨질맨질한 이마. 설령 천국에 가서 엄말 다시 만난다 해도 그 그리운 몸이 아닐 것이라는 상상 때문이었는지 부활은 고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그즈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천국 소망이었던 거 알아요? 누구든 내 앞에서 천국, 소망... 이런 어설픈 위로를 들이밀기만 해봐라. 완전 무장을 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달라졌어요. 순순한 마음이 되었어요. 천국 소망까지는 아니어도 엄마가 있는 천국을 간절히 그리는 마음이 되었어요.

 

엄마가 떠난 때가 하필 사순시기였어요. 2주기 즈음이에요. 역시 사순기간이었어요. 산책길에 바흐의 칸타타 <Actus Tragicus>를 듣고 있었어요. 귀에는 장송 음악이 울리는데, 내 몸이 담겨 걷고 있는 길은 연한 새순이 돋아난 나무며 풀로 연둣빛의 새봄이 한창이었어요. 죽음의 노래와 폭발하는 봄의 생명력이라니, 부조화로구나 싶었는데, 어쩐지 그 부조화가 나쁘지 않은 거예요. 엄마 돌아가시던 그해 사순시기의 칩거를 생각하면 2년 만의 이 봄은 믿기지 않는 현실이죠. 다시는 생명의 기쁨 따위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았었거든요. 사무치도록 그리운 엄마이지만, 상실감의 텅 빈 자리에 2년 전의 그 슬픔의 타나토스(tanatos)와는 다른 에로스(eros), 즉 생명의 기운이 일렁거렸어요. 귀에 울리는 칸타타의 합창 가사는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니라(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였죠. 엄마의 때가 얼마나 좋은 때였는지 생각했어요. 낯선 침상에 누워 외롭게 보낸 생의 마지막 시간, 혼자 내쉬었을 마지막 숨을 생각하면 어떻게도 떨쳐낼 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안타까움이에요. 사상초유의 팬데믹, 우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격리상황이었기에 엄마를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어요. 버려진 느낌은 아니었을까, 그 생각만 하면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거든요. 그 봄, 그 길에서, 엄마의 때는 가장 좋은 때였겠구나, 싶은 거예요.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장 좋을 때였다는 확신이 드는 거예요.

 

바흐의 생은 그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웠대요. 열두 살에 내가 아버지를 여의였던 것처럼. 바흐도 십 대 초반에 부모님을 잃었고, 사랑하는 첫 부인을 일찍 잃었고, 열두 명의 아이를 서너 살이 되기 전에 죽음으로 잃었다고 해요. 부모를, 아내를, 어린 자녀들을 죽음으로 잃고 잃었던 고통이 바흐 음악 곳곳에 흐르고 있어요. 바흐 음악의 아름다움은 여러 죽음과 상실의 얼굴이라니, 그 봄날처럼 찬란한 슬픔이에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 그러나 슬픔과 분노에 매몰되지 않았던 바흐, 그의 음악이 나를 위로하고 만져요. 엄마 떠나고 바흐 음악의 더욱 가깝게 들려요.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니라.” 만나고, 사랑하고,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 하나님의 때인 것처럼, 헤어지고 슬프고 절망하고 실패하는 때도 하나님의 때예요. 이렇게 받아들이고자 하니 다시 눈물이 나요. 바흐는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함께 곡을 만들었을까요. “평화롭고 기쁘게 나는 떠나네,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내 마음과 정신은 위로를 받았네, 부드럽고 고요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죽음은 나의 잠이 되었네.” <Actus Tragicus>의 마지막 아리아 가사예요.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29).”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니 이 무슨 아름다운 우연인가요? 시므온과 안나. 아기 예수님을 만난 두 늙은 예언자를 읽을 때마다 나는 엄마를 떠올려요. 과부가 되어 팔십사 세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던 안나,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안나는 꼭 엄마 같다고 생각했죠. “평화롭고 기쁘게 나는 떠나네, 죽음은 나의 잠이 되었네이것은 엄마의 노래예요.

 

엄마와의 이별 사건을 감당해낸 나는 이렇듯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가끔 그 시절 일기장을 펼쳐보면 이 감정이 어디 갔지?’ 싶어요.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의 강물에 휩쓸려 몸을 가눌 수 없었던 기억이 또렷한데, 여기저기 뒤져봐도 그때 그 감정은 없어요. 여전히 엄마 몸이 그립고, 그 손 다시 잡고 싶고, 당장이라도 전화 걸면 딸이여?”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눈물이 차오르지만. 그때와는 달라요. 슬픔의 강물은 부활주일 찬송부르던 때처럼 어느 순간 분노의 물결이 되었어요. 그리고 어떤 때는 죄책감과 우울로 얼굴을 바꾸며 찾아왔고요. 지금은 그리움이에요. 또렷한 그리움이에요. 신기한 것은 그리움이 차오르는 순간, 엄마를 가장 가까이 느껴요. 엄마, 이제야 나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몸을 입고 인간이 된 이유를 알 듯해요. 아주 잠깐 인간의 몸으로 사시다 그 몸을 버리고 돌아가신 이유를요.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이 땅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예수님의 몸이 되었어요. 그 보이지 않는 몸이 일하기 시작해요. 두려움과 호기로움 사이 좌충우돌했던 베드로의 인격이 변형되는 것을 봐요. 삼 년을 함께 먹고 자고 했던 선생님의 몸이 사라진 자리, 거기서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못다 한 삶을 살아요. 이제 선생님의 부재는 현존의 다른 이름이에요.

 

상실의 텅 빈 공간에 슬픔, 분노, 죄책감, 수치심, 허무감이 밀려왔다 밀려가곤 해요. 엄마, 나 는 이제 알아요. 슬픔도 분노도 죄책감도 사랑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요. 베드로에게도 그랬을 거예요. 선생님을 지키겠노라 칼을 휘두르던 호기로움도,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제자임을 부인했던 그 비겁함도, 닭 우는 소리에 나가 통곡하던 배신에의 죄책감도, 밤을 새워 텅 빈 그물을 끌어 올리던 그 무기력과 수치심조차도 선생님을 향한 사랑이었을 거예요. 그러니 엄마, 이제 묻고 싶어요. 물을 수 있어요. 실은 엄마의 안부는 그리 궁금하지 않아요. 4년의 세월을 지내며, 상실의 시간을 겪어내며 엄마의 영혼을 느껴요. 빛나는 영혼을 느껴요. 해처럼 빛나는 그곳에서 엄마 영혼이 그렇게 빛나고 있을 거예요. 엄마, 예원이, 예원이 말이에요. 예원이는 잘 지내고 있나요? 엄마 돌아가시고 사모님, 얼마나 마음이 아프세요?”라고 메시지 보내왔던 예원이가 한 달 남짓 지나고 천국으로 떠났어요. 떠난 엄마를 새롭게 만난 시간이 애도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예원이 애도 작업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어요. 엄마를 끌어안고 슬픔의 강을, 분노의 강을, 죄책감의 강을 건너는 동안 예원이의 존재는 그저 잊고자 했어요. 죽은 예원이를 잊고자 하니 살았던 예원이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러자니 예원이 이후의 모든 젊은 죽음에 눈을 맞출 수 없었어요. 슬퍼할 자격, 분노할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아 차마 뉴스를 볼 수도 없었어요. 예원이의 안부를 묻고 싶어요. 엄마, 예원이 만났죠? 호기심 가득한 그 큰 눈을 봤죠?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고 기억하는, 그리고 훅 내미는 그 따스한 마음도요. 예원이가 검은 봉지에 홍옥을 사서 건넨 일이 있어요. 사모님이 홍옥 좋아하신다고. 홍옥은 엄마가 더 좋아하잖아요. 홍옥은 엄마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과가 된 거 거든요. 그런 아이예요. 이미 알죠? 천국에도 벌써 소문이 났을 거예요. 엄마, 예원이에게 내 안부도 전해줘요. 그리고,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도요. 지켜주지 못해서, 그렇게 절절한 긴급 구조 요청을 보내왔는데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줄 수 있어요?

 

엄마 떠나보내고 다른 내가 되었으니 저도 이제 용기를 내볼게요. 나를 그렇게 좋아하던 예원이였는데 내가 잘하지 못해서 그 생명을 놓친 것만 같아서, 누군가 네 책임이야!”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피하고만 싶었어요. 하지만 이조차도 떠난 예원이를 향한 내 부족한 사랑이었어요. 죄책감도 수치심도 내 부족한 사랑이에요. 4월 기일에는 예원이를 기억하는 청년들과 함께 작은 추도예배를 드리고 싶어요. 몇몇 청년들이 예원이 상실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조차도 외면하고 싶었어요. 엄마, 이제라도 책임지는 어른이 되어 볼게요. 죽음을 막을 수는 없어요. 피조물의 한계, 인간의 한계, 저의 한계를 받아들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있어요. 죄책감, 미안함, 분노, 허무감으로 예원 언니 예원 누나를 만나고 있는 청년들과 얘기 나누고 싶어요. 그 모든 감정이 사랑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함께 일깨워야겠어요. 드러낸 슬픔, 겪어낸 감정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이제 용기를 내볼게요. 죄책감을, 부끄러움을 드러내 볼게요.

 

엄마와 함께 예원이가 그립고, 예원이와 함께 오래전 천국으로 간 아름다운 청년 한솔이도 그리워요. 한솔이도 잘 지내죠? 엄마,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천국을 그릴 때가 있어요. 그리움은 내 존재에 딱 달라붙어 이제 나의 일부가 되었어요. 그리운 얼굴들을 가까이 느끼는 방법은 그리운 얼굴을 그리워하는 길밖에 없어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한 구절이 자주 생각나요.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엄마를 그리고, 엄마보다 한참 먼저 천국에 가신 아버지를 그리고, 예원이를 그리고, 한솔이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던 마음이 이제 모든 것을 그리는 마음이 되고 말아요. 그리움이 이끄는 길을 끝까지 가보면 거기엔 늘 나의 하나님이 계셔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천국에 볼모로 잡고 계시는 하나님이었어요. 그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이 나의 신앙이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그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리운 모든 영혼들을 가장 빛난 모습으로 품고 계시는 것을 알겠어요. 떠난 모든 이를 향한 그리움은 그분을 향한 그리움에 닿아요. 엄마, 나는 하나님이 그리워요. 엄마의 얼굴을 그리며 천국을 그려요.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은 천국이고,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은 지옥이라고 엄마를 닮은 중세 신비가 시에나의 카타리나(Santa Caterina da Siena 1347-1380)가 말씀하셨어요. 그리운 얼굴을 다시 만날 때까지 오늘 이 순간을 천국으로, 사랑으로 살도록 할게요. 곧 만나요. 엄마.


<복음과 상황> 4월호

 

 

그리움을 일깨우는 그리움 - 복음과상황

엄마,거긴 날씨가 어때요? 여긴 엄마가 아는 그 날씨예요. 자주 흐려요. 미세먼지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흐린 건지 하늘이 늘 뿌예요. 봄이 오는 길목이 험난한 것 같네요. 엄마가 이 땅에서 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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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유다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보편적으로 곡해되는 것은 아닌가. 며칠 전 묵상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내가 팔리지 않았을 텐데..."라는 뜻이라거나. 누군가는 예수님을 배신해야 십자가 사건이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걱정. 그렇다면 차라리 유다는 악역일지언정 구원사역에 기여한 것이네, 하는 논평 등. 적어도 내가 아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게 흘러갈 수 없다. 내가 아는 예수님이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인자가 배반당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인자를 배반하여 넘겨줄 그 사람은, 이 일을 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때, 이미 배반자로 돌아선 유다가 말했다. “랍비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유다야,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마 25:24, 메시지성경)

 
당신의 운명, 아니 소명이 유다 한 사람으로 인함이 아님을 아신다. (우리도 알지 않나?) 성경에 예언되었고,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다. 누구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당신 자신도 그 운명을 거스르고 싶어서 겟세마네에서 그렇게 간구하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실 것을 아신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유다의 영혼을 향한 절절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예수님의 길이 있고 유다의 길이 있다. 너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차라리 좋았겠다는 것은, 결코 돌이키지 않는 유다의 영혼, 마지막까지 돌이킬 기회를 제공하시나 끝까지 완고한 유다의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그렇게 가까이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도 결국 천국을 거절하고 마는 그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절절한 마음이다. ‘이미 배반자로 돌아선 유다’. 돌아선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지 못하신다. '마음'은 어떻게 못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무능하기로 선택한 사랑이다. 세상 모든 것 다 할 수 있어도 "당신이 나를 좋아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우격다짐으로, 강압으로 얻어내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다.

 

이렇듯 완고한 영혼이라니, 그 완고한 영혼에 갇혀 고립되어 있다니... 그러느니 유다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거절할 자유까지 허락하시며마음을 열어 당신께 돌아서길 기다리신다그렇게 사랑하신다
 
속는 생각, 속일 생각
 
예수님의 발에 비싼 옥합을 붓는 여인에 분개한 유다가 말했다. “저렇게 한심한 일을 하다니! 이것을 큰돈을 받고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유다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꿈과 야망을 사랑한다. 그 마음이 사랑이었다면,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예수님을 몰라볼 수 없다. 3년 내내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그분의 '능력'을 보면서 "자기 꿈"을 키웠을 것이다. 그렇다 유다는 자기 꿈, 자기 이상을 사랑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조국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유다야,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라고 하신다. 무력하게 말씀하신다. 이 무력한 사랑은 아픈 사랑이다. 가장 큰 사랑이다.
 

예수님, 오늘도 제게 말씀하십니다. 신실아,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천국의 언어로 포장한 저의 마음을 꿰뚫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제 자존심을 세우고, 저의 에고를 드높이는 일을 두고
당신을 사랑하여 하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제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하시면서 저 자신에게 속고 있는 저를 일깨우십니다.
제 꿈과 이상을 사랑하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제 마음을 정조준하여 말씀하십니다.
신실아, 나를 속일 생각을 마라.
무력하게 온유하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알아보는 순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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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호가 '삶은요리'였었는데. 삶은요리 정신실 선생... 고백하자면 요리를 놀이로 하는 것이지 삶이 요리는 아니었다. 재밌으려고 요리하기 때문에 요리는 거의 놀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요알못, 요리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아무리 가르쳐도 깨우치질 못하는 남편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하라는" 대로는 안 하고 "하는" 대로 한다더니. 삶은요리 정신실 선생 옆에서 25년 살더니... 이런 것만 배웠다. 제주에서 혼자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저러고 사진을 보내왔다. 요리로 노는 것만 가르쳤다. 25년 동안.
 

 

재미 끼워넣기

옅은 무기력과 우울감이 오래 가고 있다. 아침 준비하려고 앉았다 무심코 클릭해서 본 영상으로 반짝, 무엇이 들어왔다. 오, 오늘 아침은 이거야. 꾹꾹 눌러 모양을 만들어 토스터에 구운 식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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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꼽아 놓아도, 인생은 계속되는 것이니, 최고의 순간은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과감하게 '최고의 순간'이라고 명명해 본다.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를 나누면서 Milford Sound 크루즈 타러 가는 길을 꼽았는데, 그중 하나이다.이었다.  Monkey Creek이란 곳인데, 여행기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기록하시는 서쉐석목짠님(감사합니다!)의 진도가 마침 오늘 여기(https://jayson.tistory.com/5323)여서 참을 수가 없다.
 
"아내는 표정이 정직하다. 밝음과 흐림이 분명하다. 얼굴 표정이 곧 마음상태고, 몸의 상태다."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남편의 글이다. 평생 좋은 풍경에 나를 끼워 넣어(나를 세우고 좋은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기에, 그게 아니라도 내 얼굴을 가장 많이 바라본 눈이라 일리가 있다 싶은데. 사진이 진실을 말한다. 정말 좋은 표정과 좋은 척하는 표정을 내가 봐도 알겠다. 좋은 것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이다.

 

경탄을 금치 못하는 풍광을 계속 만났지만, 정말 좋았던 것은 바로 아이들의 출몰이었다. 아이 둘을 만났다. 풍광에 잃었던 넋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겼다. 이 좋은 자연 안에서 저렇게 귀여운 아이들을 만나다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고, 빼앗긴 넋과 시선 역시 감추질 못해서 아이들 엄마와 여러 번 눈을 맞추게 되었다. 에라, 용기를 내자.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들이대고 말았다. 

 
행복감에 자신감이 충천했다. 키가 165는 되어 보이는 저 늠름한 뒷모습을 보라.

 
결혼 25주년, 인생 최고의 순간을 여러 번 갱신하며 누리게 해주신 두 분! 이번 여행에서 넷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 참 좋은데, 이 역시 사진이 담아낸 마음 같다. (몰아서 공개할 예정. 언젠가!)

 
아이들 등장에 새소리까지, 이건 거의 하늘 아래 천국이 아니던다. 영상 보고 가시겠다.

 
아이들과 새소리까지 감동인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검은색(아직 이름 모름, 차차 알게 될 수도 있음) 걷는 새 등장! 나는 또 무식해서 "이거 키위예요?" 하고 물었는데, 키위가 그렇게 야생에서 만나지는 새가 아니라고, 그래도 감동이었다. 검은 새라니, 검은색은 무의식의 빛깔이라 더 설레고 신비롭지 않은가. 과연 최고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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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중 한 달 제주에서 지내는 남편에게 다녀왔다. 애월의 어느 편집샵에 들어가 구경을 하다 둘이 함께 "김채윤!" 했다. 우리 채윤이 닮은 브로치, 그리고 약간 현승이 같은 강아지...를 선물로 사 왔다. 아우, 귀여워... 이것들... 김채윤, 김현승! (마음이 간질간질)

받아 든 스물다섯 채윤이는 "인정이 되네. 내가 봐도 나네. 그런데 어디서들 이런 걸 잘도 골라 와?" 하면서 되려 엄마 아빠를 귀여워했다.
 
누가 누굴 귀여워 하는 거?
 
자주 집을 비우고, 주일에는 남매끼리 교회에 가는데. 목사 아빠 둔 죄로 "내 교회" 아닌 "아빠 교회" 다니게 하는 것이 늘 미안한 일이다. 아빠 때문에 다니는 교회인데, 아빠 없이 둘이 가서 있다 오는 생각을 하면 주일마다 마음이 찌릿하다. 우리와의 인연으로 교회에 온 벗들이 있는데, 마음이 쓰인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왔는데, 채윤이가 식탁에 앉아 프라이팬 째로 잡채를 처묵처묵 하고 계셨다. 교회 설립 기념 주일이어서 점심에 반찬이 많았다고. 집사님들이 남은 반찬 싸고 있는데... 챙겨주실 것 같은 집사님 곁에 알짱거려서 얻어 왔다며. 일하는 월요일 퇴근하고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
 
다음 날 점심에 달래간장에 비벼 먹도록 잡채밥으로 줬더니 "이렇게 정갈한 밥상은 오랜만이군!" 하면 또 좋아하셨다. 귀엽고, 대견하며, 엄마를 귀여워하는, 고마운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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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이 네 명!" 4기 동반자 과정 준비하면서 내 마음에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던 말이다. 연구소 선생님 셋이 모두 소장이다. 책임감, 자발성, 내면화된 연구소의 정신까지 모두 소장이다. 그 마음으로 일을 하니, 소장인 내가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게 4기를 개강 준비를 하고, 개강 첫날을 지냈다. 연구소 선생님 셋, 듣고 배우고 연결되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함께 해준 일곱 분의 동반자 선생님들은 선물이다. 오늘이라는 그릇에 담긴 선물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소중히 받고자 한다. 이분들의 지도자 아닌 동반자로 지낼 시간을 참된 지도자이신 그분께 맡긴다. 페이스북에 쓴 글 가져다 놓는다.

 

네 번째, 상처 입은 치유자들

4기 동반자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지도자 과정이라 불렀는데, 한 해 쉬면서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마음의 여정, 영적인 여정에 지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함께 걷는 친구, 동반자죠.

시간과 엄청난 마음의 에너지와 돈을 들여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일곱 분 선생님들이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말과?” 글과 손으로 드러내 주셨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가 소중해서 차마 몇 둘로 정리가 안 됩니다.

각자 상담과 공부로 쉴 틈 없는 연구소 식구 넷은 4기 동반자 선생님들을 동반하기 위해 '기쁨과 설렘의 초긴장' 상태로 두어 달을 보냈습니다. 개강날 지내고 모두 하아~~~ 기쁨과 안도와 설렘의 긴 숨을 내쉬었고, 떡실신의 밤을 보내고, 여독을 푸는 사람들처럼 하루를 보냈고요. 늘 그렇지만, 최고의 수혜자는 동반하는 저희들입니다. 저 자신입니다.

에니어그램 강사로, 영적 여정의 동반자로 구비시켜 드리기 위해 부드러운 채찍과 쓰디쓴 당근을 적절히 드리겠습니다. 강사이며 동반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수련과 여정 잘 동반하겠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수선해야 하는 자아' 때문이 아니라 '끊어진 연결' 때문이니, 서로 연결되고, 나 자신과 연결되어 나를 만드신 분과 연결되는 시간이 되도록 기도하며 함께 걷겠습니다. 치유적이고 아름다운 이 말.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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