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 날 밤에 축복처럼 눈이 내려, 첫 아침에 이런 풍경을 마주했다.

 

이사했다. 또 이사를 했다. 제목에 '결혼 후 열네 번째 집'이라고 썼다가 사진을 고르며 바꿨다. 집을 고르는 기준, 내게 이 집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창'이다. 창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이다.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 남은 열세 집은 모두 창이다. 창이 있으나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집. 바람이 불면 덜컹덜컹 유리가 깨져 날아갈 것 같았던 집, 가장 춥고 서러운 집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 좁은 주방 한켠의 창과 거기서 보이는 나무 한 그루로 위로받았던 집. 

 

"이제 이사의 달인이 되셨겠네요." 또 이사했다고 말하면 이런 말을 듣지만. 그렇지 않다. 이사는 달인이 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사와 관련된 모든 겪어내야 할 것들은 웬만해서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다. 집을 구하는 일, 집을 구하며 향후 몇 년 가족의 진로를 생각하는 일, 대출을 받는 일, 그리고 이사 당일의 추운 마음.(이사 시점이 늘 겨울이다.) 외적으로 가장 힘든 일은 남편이 다 감당하고 있어서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내게 가장 힘든 것은 이사 당일 하루를 견디는 것이다. "신발 신으세요!"로 시작하는 이삿짐 센터 직원들의 시간은 아무리 겪어도 어렵다. 스팀청소기로 걸레질하던 내 거실과 안방을 신발 신고 누비는 그 하루가 내겐 정말 어렵다. 숨겨두었던 짐들과 먼지가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에는 수치심이,  "책이 왜 이렇게 많아요. 짐이 참 많네요." 이 말에는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여타 많은 감정들이 밀려오고 밀려가지만 짐 싸는 진도 맞춰 묵묵히 서성거린다. 마음은 한없이 서성거린다.

 

2024년 12월 22일, 나의 열네 번째 창문으로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마주한다.

 

앞 베란다에서는 해가 뜨고 주방 쪽으로는 노을이 물드는 집을 두고 오는 것이 참 아쉬웠다. 아침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오른편 하늘이 붉게 물들며 해가 뜨고, 저녁 준비를 하려고 서면 저 앞에서 다시 불게 물들며 노을이 진다. 새로 이사한 집에선 해가 지는 것을 거실 책상에 앉아 볼 수 있다. 창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모든 집에 창이 있어서, 그래도 이제는 뻥 뚫린 풍경을 볼 수 있는 창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사 시즌에는 늘 조금씩 우울하지만 창이 있으니 다시 생기가 돌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낡고 어둡고 추운 집도 그대로 두지 못하는 나이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뜻한 곳으로 만들고 마는,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 마는, 에로스 에너지를 장착한 나이니까. 감사할 것을 무한으로 찾는 나이니까. 

 

2024년 12월 19일, 나의 열세 번째 창문 앞에서 마주한 마지막 새벽 하늘. 붉게 물들며 해가 뜬다.

 

이사하고 난 다음날 아침, 말씀 묵상에서 조금 엉뚱한 포인트가 위로의 메시지로 왔다. 대림기간 묵상이었으나, "하나님과 집, 예수님과 집"이라는 키워드로 내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삼하 7:5-6)

 

우리 하나님께서는 집 없이 옮겨 다니시는 분이구나. 당신의 백성을 위해, 당신의 백성이 있는 곳에,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옮겨 다니시는 분이지! 몸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도 그러하셨지. 탄생부터 그러하시고, 평생 그러셨지. 대림의 은총은 '하늘 집'을 버리고 '땅의 집'을 선택하신 예수님이다. 얼마나 집이 없으셨는지... 태어날 출산 공간조차 찾을 수 없었고, 곡절 끝에 태어나 누이신 첫 집이 말의 밥통이었으니. 집이 없다고 꼭 이렇게 이사를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것이 내 고유한 부르심이구나! 깨닫는다. 좋은 집, 나쁜 집, 새 아파트, 낡은 빌라...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옮겨 다니는 동안 그분과 함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론 현존으로, 더 많은 시간 부재로 우리 집 거실, 창문 앞에 함께 계셨다. 여기는 다시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열네 번째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 글을 보내고 책을 받고 하는 출판사 등에  주소가 또 바뀌었다고 알리기가 민망해서 쓰는 글입니다. 여하튼 또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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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나 화요일 책모임을 마치고 들어오는 남편의 손에 곶감이 들려 있는 때가 있다. 많이도 아니고 네 개 정도. 집 처마에 곶감을 말리고 있는 집사님께서 아마도 익을 때마다 몇 개씩 챙겨 가져오시는 것이다. 앙증맞고 정겹다. 하나하나 익어가는 곶감을 하나하나 챙기는 손길, 아니 그전에 하나하나 일일이 따고 깎고 매다는 손길이 느껴진다. 제 속도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곶감이 되어가는 그 고유한 시간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간과 손길을 느껴지니 마음이 보인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희한하게도 보이는 것이 마음이다. 따뜻한 마음, 차거운 마음은 스쳐 지나면서도 느껴진다. 하물며 곶감이라는 物이 눈앞에 있으니 보이지 않는 마음이 훤히 드러난다. 게다가 곶감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니 몇 배로 크게 다가온다. (호랑이를 물리친, 무섭도록 맛있는 곶감이 아니냐고!) 집사님은 한결같이 우리 네 식구에게 각각, 곶감을 아니 따뜻한 마음을 건네곤 하셨다.  

 

토요일 여의도 국회 앞으로 가기 위해 원고에 매진 중이다. 매진한다고 진도가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최대한 앉아 있는 중이다. 진득하니 앉아 있는 나를 대접해야겠어서 간식을 좀 정성그럽게 챙겨봤다. 곶감과 함께 커피를 내렸는데. 커피 담은 머그잔은 도자기 공예가인 내 동갑내기 집사님의 작품이다. 지금은 교회를 떠나셨고, 잠깐의 인연이었다. 같은 동네 사는 덕에 컵과 그릇 여럿을 선사받았다. 집사님의 작품에 커피를 내리고 음식을 담을 때마다 떠올린다. 어떤 때는 선명하게 어떤 때는 스치듯 흐릿하게. 이 역시 시간과 손길이 담긴 마음이다. 전문가의 손길이다. 돌아보면 추웠던 날의 작은 온기였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는 것이 되게 하는 말과 손길과 몸짓과 물건을 선물이라 부른다. gift, 또는 은혜.

 

아가서를 묵상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와 여러 교부들, 신비가들이 왜들 모두 아가서 주석을 남겼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아가서에 이렇게 풍성히 담겨 있구나! 남편과 함께 하는 묵상이라, 부부만이 아는 길고 깊은 비밀 같은 사랑의 언어가 더 와닿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어쩌면 이렇게도 육체적인 사랑의 묘사로 잘 그려냈을까! 보이지 않는 영혼,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것과 다름 아니다. 보이는 것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과 영혼 깊이 스며있다. 마음과 몸은, 영혼과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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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식을 좋아하는 거 같아.
나도 그래. 우리는 분식을 참 좋아해.
 

주일 저녁, 남편 혼자 있는 집에 채윤이와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빠 저녁 어떡하지? 하다, 우리가 뭘 주문해 줄까? 하다 배민으로 떡볶이를 시키고 돌아오니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먹고 있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 있는 날에는 김밥으로 식사를 하는데. 남은 김밥을 챙겨 올 때가 있다. 냉장고에 두었다 다음 날 아침에 계란물에 적셔 부쳐서 먹으면 좋은 한 끼가 된다. 미니 계란에 푹 담가 프라이팬에 부쳐서 내주었더니 "오, 좋아 좋아! 코리안 오믈렛인가?" 하고 작명을 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아파트에 곱창볶음 트럭이 온다. 곱창볶음은 냄새가 조금 나고, 순대볶음은 먹을만하다. 나는 또 순대와 순대볶음을 좀 좋아해야 말이지. 순대볶음 사 오면 집에 있는 깻잎이나 양배추, 양파 같은 걸 더 넣어 한 번 더 볶는다. 마늘이나 파고 더 넣고. 마침 알배기 배추가 있어서 채 썰어서 함께 내놓으니 식감도 좋다. 입맛도 감정도 무딘 남편이 "오, 이렇게 같이 먹으니 씹는 맛이 있고 좋다!" 한다. 남편이 그랬다. "나는 분식을 참 좋아해." "당신 순대는 안 좋아하잖아. 순대는 나만 좋아하지!" "아니야, 순대만 좋아해. 내장이 싫은 거지." 찐은 내장인데... 바부... 아무튼.
 
우리는 분식을 참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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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프레더릭 와츠 ‘희망’, 1886년.

지난 몇 달 이사야서를 묵상하며 "철저하게 절망하라"는 메시지를 읽었다. 이사야의 예언은 "너희는 망했다! 이미 망했고, 계속 망할 것이다. 오늘 하루 마음의 안정을 위해 이집트를 의지하며 희망을 말하지 말아라. 너희는 망했다." 온전한 절망에 구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래서 저 그림을 (언젠가 남편이 설교 제목으로 붙인 이름)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이라 부르며 자주 떠올리곤 한다.

 

무력한 아기의 몸으로 평화를 가져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 대림시기를 계엄 선포와 함께 맞았다. 이 무슨 믿기지 않는 아이러니란 말인가. 무력한 아기의 시간에 실탄 장착한 무력의 국민을 향한 난입이라니... 어제 하루는, 아니 이 며칠, 아니 몇 달 몇 년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이란 이 말을 머금고 산다. 국가적 위기에 더하여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다. 절망 속에 있다. 힘을 내라는 말이 무의미하고 무력한다.

 

대림기간, 이 기다림의 시간에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어젯밤 잠들기 전에 본 스웨덴 한림원에서의 한강 작가 인터뷰가 그분의 음성처럼 들렸다. 희망이 없을 때 희망하는 것이 신앙이다. “오호라,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외친 후에는 이집트가 아니라, 앗시리아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말하고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한강 작가가 느릿하고 착한 말로 내게 신앙을 일깨웠다.

 

" 때로는 희망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요즘은 얼마 전부터, 몇 달 전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일지도 모르겠는데,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생각을 한다."

 

이 절망의 순간에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어제 종일 마음을 뜯던 남편을 위해 기도한다. 삶의 무게에 지친 내 동생, 깊은 절망 속에서 기도하는 내 친구의 막막한 시간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 나라 내 조국을 위해 기도한다. 이런 시절, 군대에 갇혀 있는 생명을 사랑하는 영혼, 자유로운 영혼 우리 현승이를 위해 기도한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이라는 기도를 드린다.

 

 

우리 채윤이가 스물네 살 청년이라니, 매일 마주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 청년의 힘과 성장하는 에너지, 푸르른 생기와 함께 살면서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채윤이 태명이 "푸름이"였다. 지난 토요일에 함께 영화 <위키드>를 보고 밥을 먹으면서 이 영화와, 전신인 뮤지컬, 또 그 전신인 <오즈의 마법사>까지 세계관과 음악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내는 채윤일 보고 내가 탄성을 질렀다. 오늘 아침에는 영화에서 들었던, 음악을 자기 빛깔로 연주하고 녹음해서 바로 들여주었다. "주님, 과연 이 아이를 제가 낳았단 말입니까!" 과장이 아니다. 내가 낳았지만, 이 아이 존재의 크기와 무게는 내가 감당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청년이다.   
 
동생 군대 보내고 외동 체험 중인 덕에 한 달을 생일 축하로 지냈다. 유학을 위한 오디션 준비로 갈아 넣었던 시간을 끝내고 엄마 아빠와 제주도 여행을 가야겠다고 했다. (여행으로 생일 선물 퉁치겠다던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11월 초에 셋이 짧은 제주 여행을 했다. "내 생애 처음은 이런 가족이었잖아." 했는데 맞다. 이 아이가 우리에게 와서 살아보지 못한 삶을 열어주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아주 조그만 아이가 아장아장 걸었던 그런 날이 있었다. 둘이 호흡을 맞추고 "우웃~짜" 하고 번쩍 들어 올려주면 깔깔거리던 그 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다.
 
지난주 어느 날, 종일 있던 일정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왔다. 지하철로 마중 나온 남편이 채윤이가 저녁을 안 먹었다고, 호빵을 사다 달라했단다. 편의점 몇 군데 들렀는데 없더라며. 함께 마트에 가서 호빵을 샀다. 영어 시험을 앞두고 긴장했던 채윤이가 호빵을 보고, 아니 엄마를 보고 재잘거리다 얼굴과 마음이 확 풀린 게 느껴졌다. 주문했던 반건조오징어도 도착한 터라 호빵을 데우고, 오징어를 구워주니 애가 살아났다. 생기가 도는 채윤이를 보니 내 마음도 함께 살아나 긴 하루의 피로가  싹 달아났다. 오징어를 굽는데 속에서 노래 한 자락이 스물 거리다 입으로 튀어나왔다.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옆에서 따라 부르면서 채윤이가 그런다. "이거 무슨 노래야? 나 왜 이 노래 알아?" 내가 네게 불러준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니가 모르면서 아는 노래, 알면서 모르는 노래가 어마무시할걸!
 

 

맛있는 걸 먹고, 셋이 재미있다가도 현승이 생각이 불쑥불쑥 난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채윤이가 먼저 그런다. "아, 김현승 보고 싶다!" 채윤이 생일 축하를 하면서도 현승이 생각이 난다. 군인 월급 받아서 누나 생일 선물 사라고 돈을 보내줬다니... 짜식! 하면서 셋 모두 울컥해졌다. 현승이 없이 보낸 세 식구 3개월. 부재로 그리운 마음이 크면 클수록 오늘 함께 하는 시간에 감사하고 누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언젠가 채윤이도 어딘가로 떠날 것이고, 그러면 현승이와 셋이 그리움을 섞어 맛있는 걸 먹고 놀고 할 것이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누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노래일 것이다.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제주 여행 중 셋이서 많이 걸었다. 바닷길을 걷고 숲길을 걸었다. 걷다 돌고래를 보기도, 잔뜩 먹고 배 두드리면 밤길을 걷기도 하고, 걷다 비를 쫄딱 맞기도 했다. 20여 년 전과 그림이 많이 달라졌다. 우뚝 솟은 두 김씨 사이에 끼어 호빗족 내가 걷는다. 아빠 김씨가 놀린다. ”여보, 우웃~짜 해줄까? 채윤아, 니네 엄마 우웃짜 해주자.” 언제 이렇게 컸나. 아이가 크고 나는 작아진 오늘이 참 좋다. 채윤이 생일 파티를 하면서 어렸을 적 자장가로 틀어주었던 음악을 BGM으로 깔았다. 카세트 테이프로 사서 늘어지도록 틀어주었던 음반인데, 이사 다니면 잃어버렸고. 늘 그리웠는데 어느 날 유투브에서 채윤이가 찾아냈다. <Bless My Little Girl>. 아기 침대에 눕히고 조명을 어둡게 하고 끝없이 음악을 들려줬었다. 요즘은 내가 밤에 글을 쓰면서 틀어 놓게 된다. 어제는 혼자 이걸 들으며 "늙어서 침대에서 누워 지내야 할 시간에 이 음악 틀어 달래까?" 했다. 채윤이와 함께한 어제들이 내겐 선물이었고, 모든 내일들이 선물이겠으나, 가장 큰 선물은 오늘이다.

Presnt is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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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는 사랑니 발치 후 제 손으로 죽을 사들고 들어오기로 했다. 저녁은 패스하겠다며 빈손으로 들어오더니 "아, 약! 약 먹으려면 뭘 먹어야 하는데..." 한다. 돌발상황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누룽지만 끓여주는 건 그렇고... 누룽지에 계란을 풀어볼까? 이상한가? 생각하다... 채윤이 '최애 죽'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샤브샤브나 전골을 먹고 남은 국물에 끓이는 죽을 우리 채윤이가 엄청나게 좋아하지! 그것 뭐 맛만 비슷하면 되는 거지. 꼭 전골을 먹어야 하나?! 쯔유와 새우분말, 표고버섯 분말 같을 것을 때려 넣고 육수를 만들어서 누룽지 부숴서 끓였다. 그리고 계란을 풀었다. 성공적이다! 싱크로율 100%에 가깝다! 아깝다! 마취가 덜 풀려서 맛을 못 느끼는 김채윤이라니... 내 기분만 좋았다. 게다가 사진을 찍고 말고 할 비주얼도 아니어서 어떻게 뭐, 달리 자랑 뿜뿜 할 수가 없네.
 
오이을 봤는데, 며칠 전 어느 릴스에서 본 '지중해식 샐러드' 생각이 나서 두 개를 사왔다. 채윤이가 꾸부정하게 식탁 앞에 앉아 '성공한 실패 죽'을 처묵처묵 하는 사이 막막 만들어 보았다. 그까이 꺼 막 올리브유 대충 넣고 식초 넣고... 오, 맛있다! 숙성시키면 더 맛있다니 내일 아침에 먹어야지, 하고 냉장고에 넣었는데. 성경공부 마치고 늦게 돌아온 JP의 야식으로 다 털었다. 
 
어제 종일 원고 붙들고 있었는데... 딱 두 문장을 썼다. 자괴감이 든다. 창의성이 글로 가야 하는데... 요리로 다 바꿔 먹어 버리니... (요리 책을 내겠다고 작심을 하면, 요리 아닌 다른 창의력이 폭발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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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그는 있으나 없는 존재이다. 아빠, 남편, 사람 JP는 껍데기만 남기고 내일로 이미 떠나고 없다. 설교 준비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의 동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집에서 준비하다 점심 먹고 교회에 가겠다고 하면 신경(질)이 많이 쓰인다. 요즘 주방은 시도 때도 없이 휴업 상태인데, 토요일에 이러면 뭔가 좀 해줘야 할 것만 같다. 실은 나도 주일에 강의가 있어서 그리 여유 있는 편이 아닌데. 그와 내가 다른 점은 "해야 할 일"을 앞두고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마느냐에 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하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면 유난히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떠오르고. 결국 그것을 해버리고 만다. 텅 빈 냉장고이지만, 샐러드용 야채 한 팩이 있었다. 거기에 파스타면 대충 비벼서 샐러드 파스타를 하려고 했다. 오전 운동 다녀오는 길에 방울토마토 사고, 냉동실의 새우 한 줌을 꺼내서 준비했더니,  "대충 파스타"가 아니게 되었다. 갑자기 신이 나서 발사믹 드레싱 제조하고. 맛을 보니 간이 또 딱 맞아 맛있고 난리인 것이다. 그러자... 신이 났다. 영감이 차올랐다. 곧 대림절인데, 에라! 크리스마스 리스 파스타다! 

 

노는 것도 일하는 것처럼 하는 JP, 설교 준비 파이팅!

일하는 것도 노는 것처럼 하는 나도 강의 준비 파이팅!

맛있게 먹고 힘내서 제 할 일 하는 가을 토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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