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사랑꾼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귀기 직전, 썸이 한창이던 여름이었다. JP 포함 교회 청년 몇 명이 지리산 종주를 했다. 그 멤버에는 내 베프 둘이 끼어 있었고, 나는 시간도 안 되었지만 하루 등산도 아니고 지리산 종주라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장 친한 내 친구들과 썸남이 가는 산행에 끼지 못하는 마음이 어땠을꼬? 아쉬움을 뿜뿜 했을 것이다. 그때 (인생에서 아주 잠깐 사랑꾼이었던) JP가 했던 말이다.

 

누나도 같이 지리산 가시는 거잖아요. 제 마음에 담아서 가니까 같이 가시는 거예요.

 

(이 달달한 세레나데를 평생 들을 줄 알고 결혼했긔)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안다. 어떤 사람을 마음에 담는 것, 사람이 마음에 담기는 것을 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흔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누가 누구의 마음에 담겼는지 쉽게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사람이 담긴다. 내 마음에도 사람이 담겨 있다. 남몰래 담아 둔 사람이 많다. 
 
내 마음에 담긴 사람으로 기쁘고 행복하거나 아프다. 내 마음에 담긴 사람을 내가 잘 알지만, 내가 누구의 마음에 담겨 있는지는 잘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내가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 있었구나... 확인할 때가 있다. 남편과 내가 같은 날, 다른 자리에서 각각 자기 벗과 식사를 하고 들어왔는데. 각각 그 사람의 마음을 손에 들고 왔다. 각각 들고 온 것이 한 사람에게서 온 것 같은 느낌이어서 신기하고 놀라웠다. 
 
사람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고 동반하는 일을 하면서... 어떤 때, 거룩한 부담감이 임계치에 가까워 찰랑거리는 때가 있다. 그런 날, 바로 그 시간에 "언니, 소중한 언니, 언니를 위해 기도해. 함께 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 "언니, 기도로 언니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소장님께 힘주시길!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메시지가 날아들기도 한다. 내가 그 마음에 담겨 있구나! 그 마음에 기도로 담겨 있구나, 깨닫고 알게 된다. 기억한다는 것, 마음에 담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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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네 권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나침반’에서 나온 1999년 판, ‘복 있는 사람’에서 나온 2010년 판, 이번에 출간 36주년에 맞춰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된 『영적 가면을 벗어라』 입니다. 2010년 판은 두 권입니다. 네 권을 가지고 있지만, 읽은 횟수로 치면... 몇 번인지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나 공동체와 여러 번 함께 읽는 경험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책을 좋아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후배에게 ‘너를 좋아해‘라는 말 대신 이 책을 함께 읽자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네요. 아, 2010년 판의 하나는 남편의 것인데, 남편 역시 청년 리더 교육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책의 추천사를 쓰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책을 받아 펼쳐 ‘25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서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한 장 한 장 꼼꼼히 다시 읽는 저를 발견합니다. 이러다 책에 실린 추천사보다 더 긴 글을 쓰게 될 것 같네요. ‘노을이 물드는 시간’, 밖을 향하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 시간에 읽기 딱 좋은, 입에는 조금 쓰지만 몸에 좋은 약 같은 책입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추천사]

“영적 가면을 벗어라!” 이 문장은 내게 책 제목 그 이상이다. 젊은 날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 내 심장에 화살처럼 꽂힌 사랑의 메시지였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인데, 흐릿해질지언정 사라진 적은 없는 불화살의 흔적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자 바로 얼굴에 열감이 느껴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니 나의 회심 체험이었지 싶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빠르게 신앙의 행위들을 배우고 내면화하며 자랐다. 태어나 보니 한국 사람이었던 것처럼, 태어나 보니 기독교인이었고 목사의 딸이었다. 나의 첫 번째 정체성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자부심은 열정을 낳았다. 교회 공동체와 후배들을 위해 시키지 않는 희생과 헌신을 자처하며 열정을 냈다. 그렇게 젊음을 불태우던 시절에 래리 크랩의 『영적 가면을 벗어라』를 읽었다. 아니, 그 책에 나를 읽혀 버렸다. 자부심이었던 그것들이 영적 포장지라는 진단을 받았고, 부끄러움과 충격으로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적 포장지가 벗겨진 실체는 ‘이만하면 됐지, 나만큼만 해라’는 바리새적인 자부심과 특권 의식이었다. 공동체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열정을 다하는 나이건만, 왜 자꾸만 크고 작은 갈등에 휘말리며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지도 설명이 되었다. 입에 쓴 책이었다. 써도 보통 쓴맛이 아니었다.

그러나 쓴맛에 그치지는 않았다. 가면 너머의 초라한 민낯을 마주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웠고 고통스러웠지만, 끝은 아니었다. 열심히 한 신앙생활의 대가로 잘되고, 복 받고, 이름을 얻고 싶은 죄된 욕망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다. 사랑의 예수님을 흉내 내는 것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예수님처럼 될 때만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래리 크랩이 일깨우려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거룩한 행동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내 안의 갈망이 깨어났다. 그러니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책 제목에 그칠 수가 없다.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수용하는 영적 여정을 안내하는 이정표 같은 문장이다.

그렇게 오래전 이 화살을 맞았건만 나는 또 래리 크랩이 책에서 예언한 그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충격적 경험과 회심 체험으로 단번에 변화되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그리스도인이 된 운명인지, 일찍 만들어 쓰고 오래도록 썼기에 이 가면은 거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다. 가면이 나인지 내가 가면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가면 뒤에 숨어 밖을 바라보며 외적인 행위에 매인 습관을 당장 떨쳐 버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더욱 세련된 영적 가면을 개발하고 살았던 것 같다. 래리 크랩의 책이 번역될 때마다 가장 먼저 찾아 읽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첫 만남 이후 십수 년이 지나 나는 ‘신앙 사춘기’ 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길게 겪었다. 내적인 삶을 돌아보지 않으면 삶과 신앙이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래리 크랩이 경고하는 바로 그 일을 겪었다. 신앙 사춘기를 통해 다시금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들어야 한다.

영성 생활은 ‘과정’이다. 영적 ‘여정’이라 부를 수밖에 없음이다. 영적 가면을 인식하고 벗기 위해 정직한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한 번 체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개정판의 출간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심지어 내게는 마땅한 일이다. 언젠가 이 책으로 영성 생활에 도움받았던 이들이라면, 오늘 이 자리의 삶을 개정판으로 쓰는 의미의 일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열정을 다하는 신앙생활이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헛헛함이나 삶과 유리된 분열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뒤통수를 때리는 망치가 될 것이다. 얻어맞아 아플수록 더 큰 사랑에 안기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36년 전보다 오늘 더욱 필요한 책이다.

_정신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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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시겠어요

지난 목요일 동반자과정 1학기 종강 날이었다. 모임 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읽고 있었다. 한 학기 내적 여정을 돌아보는 것으로 이보다 좋은 주제가 없다. 강의 대신 책 나눔으로 한 학기를 정리한다. 동반자과정 4기가 되니 벌써 네 번의 책 나눔을 한 것이고, 그때마다 새롭게 다시 읽고, 가끔 꺼내 읽은 것으로 치면 족히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그래도 또 새로운 것이, 지하철에 앉아 아무 데나 딱 펼쳤는데 바로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것이다.

 

옆에서 뭔가 뜨끈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맑은 초로의 여자 분이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 오랜만에 봐서요좋네요. 행복하시겠어요"란다. 한참 쳐다본 모양이다. "(행복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좋아하는 책 읽으시는 것 같아서요. 이미 보신 책을 또 보는 거 아니에요? 좋아하는 걸 하시니 행복하시겠죠." 하고 잘 가라며 내리셨다.

 

 

행복합니다
 

행복하다. 이 소중한 책을 가슴으로 읽고 나눌 벗들이 있어서… 가르치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배우는 과정이라 더 그렇다. 무엇보다 이 책을 처음 만나서 읽던 그때를 떠올리면 꿈만 같은 오늘이다. 내면이 무너지고 신앙이 무너지고 몸도 함께 무너졌던 그 시절. 이전의 방식으로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시절이다. 가톨릭의 에니어그램 연구소에서 만난 영성이 한 줄기 빛이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행복한 1년을 지내고 떠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에서 처절하게 읽었던 책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을 내디디면 바로 낭떠러지일 것 같고, 그대로 지옥행일 것 같은 시절이었다. "책만 보는 바보"가 되어 읽던 시절이었는데, 돌아보면 책으로 다가온 영적 스승들과의 만남으로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혼자 읽던 책 중 하나가 <아래로부터의 영성>이었는데 마음으로 같이 읽고 나눌 벗들이 이리 많이 생겼다.

 
지난 수도원 순례 여정 중에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살고 있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다. 마침 방문하는 날에 수도원  행사가 있어서 개별 순례 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었고, 수사님 한 분 마주할 수도 없었다. 언감생신 사인 받는 기회는 못 얻어도 인증샷이라도 남겨 와야지 싶어 책을 들고 갔다. 그렇게 얻은 사진이 소중하네! 오래 머무르고 싶은 수도원이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성당과 경당에 앉아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기저기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다시 가서 오래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어쩌면 안셀름 신부님도 오래 앉아서 기도했을 지하 경당에서의 기도는 잊지 못할 것 같다. 하남의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의 기도가 십수 년의 세월 끝에 뮌스터슈바르작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 소중한 영적 벗들을 얻었다. 행복하다.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의 지저귐 같은 짧은 대화 끝데 지하철 아주머니는 떠나시고. 다시 아무렇게나 펼쳐든 책엔 이런 문구가 형관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은총으로 여기까지 온 내게 들려주는 저자의 말이다. 높은 이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마음, 가장 낮은 곳을 꿰뚫는 한 마디이다.

필자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논하는 이 순간에도 이 아래로부터의 영성 안에 공명심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내가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언제나 다시 반복하여 다음과 같이 주지시켜야 한다.
"너의 모든 영성적 노력들, 네가 저술한 수많은 책들에도 불구하고, 너는 변덕스럽고 괴팍한 감정들과 명예욕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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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멜로가 체질>이 내 머릿속에 '미역국 라면' 칩을 넣었다. 미역국을 보면 꼭 한 번은 거기에 라면을 끓이게 됨. 손감독과 진주작가의 꽁냥꽁냥 장면에 '파 많이 넣은 떡볶이' '평양냉면' '미역국 라면' '사골국' 등 음식이 등장하는데 희한하게 모두 내 취향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이병헌 감독 개그가 진짜 마음에 드는데... 개그 취향과 함께 음식 취향도 나랑 비슷한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됨. (아, 미역국은 내 '최애 국'이다. 현승이 낳고 산후조리원에 갔는데 끼니마다 다른 미역국이 나와서 행복했던 기억이다. 한 달 내내 미역국, 질린다며 억지로 먹는 산모가 대부분이었음. 그래서 식사 때마다 미역국 때문에 설레던 내 마음이 조금 부끄러웠던 기억... 미역국 라면을 끓이며 그 얘기를 현승에게 들려주었다.) 

 

이 더운 날에 양지머리를 덩어리 째로 넣어 미역국을 한솥 끓이고 거기에 다시 라면을 끓였다. 당연히 맛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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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좋아하고 재능이 좀 있다고 모두 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책 출간으로 북 토크와 저자 인터뷰가 몰린 지난주를 보냈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질문이 쏟아져, 글 쓰는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꾸어보지 않은 꿈입니다. 차라리 어린 시절 내내 음악가의 꿈이 있었습니다. 작가가 된 것은 어떤 행운이 작용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은데 “야야, 니가 잘나서 된 것은 옶어. 교만하지 말어. 다~~아, 하나님 은혜여.” 평생 듣기 싫었던 말인데... 고까웠던 심정 빠지고 새롭게 들리네요. 하나님 은혜 맞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북토크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북토크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서 댓글 놀이나 하던 저를 발견하시고 공적 글쓰기의 장으로 이끄신 서 대표님과의 대담으로 진행했습니다. <복음과 상황>이라는,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자리였습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주제로 글쓰기에 도전하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좋은 글은 독자가 명확한 글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늘 구체적 독자를 염두에 둡니다. 구체적이라지만 상상 속의 독자이기에 막연한 얼굴이긴 한데. 어디서들 오셨는지 얼굴을 가지고 찾아와주신 독자들이 계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의 일상과 글쓰기에 가장 큰 힘이 되는 영적 여정의 벗들인 연구소 동반자 선생님들이 대거 함께 해주셨습니다. 멀리 해외에 있는 후배는 제 친구를 대신 보냈습니다. 후배와 꼭 닮은 아름다운 귀와 표정을 지닌 친구를 보니 그리움과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책을 디자인하고 편집하고 홍보하시는 출판사 간사님들께서 진행을 돕고 오신 분들을 환대하시니... 저를 계속 쓰게 하고 ‘저자’ 되게 하신 모든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인 셈입니다. 아름다운 사진으로 자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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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으며 남편이 "현승아, 너는 어떤 때 만족감을 느껴? 만족감을 자주 느껴?"라고 했다. 내게 물은 건 아닌데 답을 찾게 된다. 흠... 나는... 끙끙거리며 쓰던 글을 완성했을 때! 그리고 갑자기 요리의 신이 임해서 전에 해보지 않았던 요리를 뚝딱 만들고 났을 때. 
 
끙끙거리던 글을 마치자마자 냉동실에 있던 갈치 몇 조각과 야채 박스에서 뒹굴던 무 한 토막을 꺼내서 우다다다 갈치조림을 하는데, 마침 고사리 불린 것이 한 줌 남아서 마지막에 넣고 졸였는데,  식구들이 "대애~박!"이라며 어떻게 여기 고사리 넣을 생각을 했냐며, 엄지 척 처묵처묵 해주실 때. 만족감이 열 배였다.   

 
또 뭐 갑자기 닭다리살에 소금 후추 등으로 최소 양념을 해서 파와 함께 구웠는데, 이거 당신이 양념한 거냐, 양념된 걸 산 거냐 하며 믿을 수 없는 맛있는 맛이라는 표정의 JP, 엄마가 한 거지! 그냥 생고기였는데 엄마가 양념한 거야, 엄마 간이 진짜 딱 맞아! 하는 아들, 처묵처묵하는 아빠와 아들을 볼 때. 만족감이란 것이 차오른다.
 
셋이 먹고 입 싹 닦으려고 했는데... 퇴근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 딸이 못내 눈에 밟혀서 퇴근 시간에 맞춰 1인분 용으로 한 번 더 해서 내놓았는데... 아, 이건 무슨 고기이고, 어디서 샀냐며 행복하게 드실 때... 참으로 만족스럽다.

 
나의 만족감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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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이다. 호텔 창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별다르지 않은, 아무럴 것 없는 풍경이었는데 뭐가 아쉽지? 로마 이틀은 마음의 순례로 치면 일주일이나 보름은 되는 시간이었다. 몬테카시노와 수비아꼬의 설레는 첫 만남 후 찾아온 혼란의 시간이었다. 나는 왜 어쩌다, 왜 이 수도원 순례단원이 되었을까 물어야 했다. 왜 굳이 남편과 함께 왔어야 했나 묻고, 무엇을 기대하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점검해야 했다. 포장지 없는 말이 필요했던 것 같다. 배려하느라 눌러두었던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미안함, 두려움 같은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려놓은 수도원 순례의 그림이 있었고, 늘 그렇듯 미리 그린 그림대로 되는 여행은 없으니까. 순례를 기다리던 몇 개월 동안 한껏 부풀려 놓았던 '꿈'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의 여백은 단지 아쉬움만은 아니다. 텅 빈 충만함이라고 할까? 충만까지는 아니어도 텅 빈 그 상태로도 괜찮은, 잠잠해진 마음이다. Pax, 평화라고 해도 좋겠다. 로마를 떠나며 평화가 왔는데, 이 평화는 깃발을 휘날리며 로마군대가 진군하듯 밀려오지 않았다. 축쳐진 어깨로 터덜터덜 걷는 이에게  다가와 "무슨 일 있어요?" 말 걸어오며 가만히 걸어주는 방식으로 왔다. 엠마오 길을 소망 없이 걷는 사람들 곁에 슬며시 다가가 걷는 갈릴리 사람의 발걸음처럼.
 
독일 순례는 인솔자 없는 여정으로 확정이다.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인솔 신부님은 로마 병원에 남아야 한다. 이에 독일에서 통역 정도로 참여 하려던 가이드가 못 하겠다고 나가 떨어졌단다. 가이드가 급조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괜찮다.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기대와 꿈을 걷어내고 지난 이탈리아 일정을 돌아보니 신부님이나 가이드가 들려준 정보는 다 내 안에 있었다. 노트북에는 대학원 수업 내내 꼼꼼하게 정리한 노트 필기가 있고, 기도와 수도원에 관한 독서 기록이 있다. 검색과 번역기능도 있지 않은가. 같은 내용이라도 평생 수도원 안에서 일하고 기도하며 살았던 신부님의 육성으로 듣는다면 더 좋겠지만, 카사마리와 몬테카시노, 수비아꼬 수도원에서 체험했다. 공간에 담겨 있는 것으로 충분한 기도가 된다는 것을. 많은 설명의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실은 그러려고 비용을 들여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 아닌가. 말 대신 침묵이다. 수도원은 침묵의 공간이다. 앞으로 가는 곳마다 회랑을 걷고, 성당 한 구석에 앉아 성무일도에 참여하면 된다. 기도를 배우러 왔으니 기도하면 된다. Pax가 임한다.
 
안팎의 평화가 연결되어 있고 동전의 양면이긴 하지만, 시간 차가 있다. 마음에 임한 평화가 밖으로 흘러가 화해가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간밤의 충돌로 인해 남편을 대하는 마음이 벌쭘하고 민망하다. 그래서 피차에 서먹하다. 마음으로는 충분히 화해했지만 거리를 두게 된다. 거리 두고 말을 멈추고 있는 시간이 주는 유익이 있다. 한 발 물러서서 낯설게 바라보면 그의 존재가 새로워진다. 사람의 관계도 이렇듯 서로에게서 한 발씩 물러나고, 언어 없이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 아빠스의 권고처럼 '나쁜 말은 물론 좋은 담화도 멈추는 것'이 침묵의 덕을 닦는데 도움이 된다. 독일로 가기 위해 다시 로마 공항으로 가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는 시간, 말 없이 적당히 예의를 갖추며 각자 할 일을 했다. 아니, 내가 일하는 동안 남편은 가만히 곁을 지켜주었다. 글을 하나 써서 보내야 했는데, 이 와중에 글이 써질까 싶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일사천리로 글을 썼다. 이 무슨 쾌거인가!
 

침묵의 덕을 (닦기) 위해 때로는 좋은 담화도 하지 말아야 했다면 하물며 죄의 벌을 (피하기) 위해서 나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좋고, 거룩하고, 건설적인 담화일지라도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완전한 제자들에게 말할 허락을 드물게 줄 것이다. 수도규칙 6장

 
순례단 분위기는 조금 더 무거워진 것 같다. 불안감도 느껴진다. 인솔 신부님, 영적 안내자가 사라진 빈 자리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 "목사님, 목사님" 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출국 수속 마치고 자유시간을 위해 흩어지고자 한다. "목사님, 몇 번 게이트라고요? 아직 안 떴다고요? 어디를 보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 비행기가 무슨 색깔이라고요? 목사님은 왜 팀 스카프를 안 맸어요? 스카프 매세요. 키가 크니 목사님이 매야 잘 보이죠." 젊고 빠릿빠릿한 데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순례단원들에게 주는 위안이 있는 것 같다. 개신교 목사 부부가 왜 수도원 순례단에 오지? (심지어) 신천지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는 분들이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어준 것은 벌써부터이다. "목사님 부부가 계셔서 다행입니다. 다 뜻이 있어서 함께 하셨나 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 로마 공항의 텅 빈 시간 동안 순례단원 사이 마음의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목자를 잃은 양의 마음,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원팀의 소속감이 생겼다.


순례 이틀 째 남편의 생일이었다. 유럽 순례지에서 맞는 생일이니 특별한 축하하고 싶었지만 산 위의 수도원에서 케이크 하나 구하기가 어려웠다. 순례 초반이라 아직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그래도 슬쩍 인솔 신부님에게 정보를 흘렸는데, 저녁 식사 시간 기도 끝에 "오늘이 목사님 귀 빠진 날이랍니다" 라고 하셨다. 그 말에 바로 생일축하 노래 떼창이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목사님, 생일 축하합니다." 감동이었다. 사랑하는 신부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목사님이라니! 남편이 일어나 멋지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여기 와서 여러분들과 얘기 나누다보니 개신교인들에게 상처받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대표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희 교회에 가서 제대로 가르치고 더 잘하겠습니다." 내가 다 고마웠다. 가톨릭 교회를 향해,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함부로 하는 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말을 듣는 분들의 입장에 서보지는 못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지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말들이었다. 개신교인 가족에게 받은 깊은 상처로 말씀을 나누는 중 연실 눈물을 흘리는 자매님이 계셨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럴 때는 '목사'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가 더욱 쓸모가 있다.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사과 같이 느껴졌다. 순례 여정 중 남편의 어떤 성품이 조용히 빛을 발하는 순간을 보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하기를 참 잘한다. 질문에 그치지 않고 가만히 듣는 것도 잘 하고. 좋은 풍경을 두고 사진 찍어주는 것도 좋아하고. 오히려 나보다 더 편하게 순례단에 녹아드는 것 같다. 


내가 주도한 순례이기 때문에 부담을 지고 있었다. 순례단 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 남편이 꼭 보고 싶었던 사도바울 참수터 등에 가지 못한 것이 내 잘못이 아니건만 괜히 미안해져 눈치를 보게 되었었다. 그런 일로 남탓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다. 뭔가 꼭 얻어야지, 배워야지, 기도체험을 해야지, 남편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어야 할 텐데... 잔뜩 힘을 준 채로 혼자 마음으로 북치고 장구 치고 했다. 가만 보니 남편은 갈수록 더 밝아지고 가벼워지고 이 순례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남편에게 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뮌헨 공항에 내렸다. 뮌헨(bei den Mönchen)은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에 의해 건립된 도시이다. 비가 내린다. 기온은 뚝 떨어졌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공항으로 오다 사고가 났단다. 시작부터 뭔가 난항이지만, 수도원의 도시에 와 있는데 뭔들 순례 일정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훨씬 허허로워졌다. 아니, 이제 기대 따위가 없어졌다. 빗속에 성 오틸리엔 수도원(ST. Ottilien)을 방문하고 에탈수도원호텔(Klosterhotel Ettal Ludwig der Bayer)로 가는 길이었다. 독일에서 만난 가이드가 깜짝 선물처럼 이끌어 간 곳은  '오버아머가우(Oberammergau)' 마을이었다.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고간 페스트가 창궐하던 1633년. 이곳 주민들은 전염병으로부터 구해주시길 구하며 수난극 공연을 서약했단다. 그 이듬해 첫 공연이 열렸고,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수난극은 이후로 10년에 한 번씩 열린다. 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지난 2020년 코로나 기간에 열리지 못했다. 두 해를 미뤘지만, 2022년에 마흔두 번째 수난극이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팬데믹 초기, 사상초유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려야 했던 시기에 교인들 사이 혼란이 있었다.  그 즈음 남편이 설교 중에 이 마을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예배를 위해 모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진정한 예배이며 '이웃 사랑'이 되는지 말했던 것 같다. 바로 그 마을에 서자 남편이 기뻐 흥분하였다. 꼭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의 얼굴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탈 수도원(Ettal Abbey)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 - 1945)를 만난 것이다. 젊은 날부터 사랑하던 신학자 본회퍼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치의 폭정에 반대하는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설립과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신학자이자 루터교회 목사이다. 무엇보다 남편과 나를 이어준 분이기도 하다. 청년 시절, 성경공부 그룹의 리더이던 내가 새로운 교재를 설명하면서 "본회퍼가 말하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에 남편 귀가 번쩍 뜨였다고 했다. "아니, 저 누님은 누구시길래?..." (그렇게 종필은 신실에게 빠져들게 되었...) 그런 본회퍼 목사님이다. 수도원 벽에 개신교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니! 가톨릭 수도원 벽에 한국 분당 한 귀퉁이에 사는 순례자 목사가 가장 사랑하는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니! 1940년 즈음 본회퍼가 이곳에 4개월 여 머물렀다고 한다.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를 읽은 수도사들이 배움을 위해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수도원 전통의 영성을 개신교회 안에 살려내고자 새로운 수도회주의의 이상을 꿈을 꾸기도 했었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은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편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목사가 되어 한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는 지금, 특히 지난 7년 동안 남편은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는 말을 새기고 또 새기며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다. 《신도의 공동생활》에 나오는 말이다. 남편은 특수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민주적 교회 운영을 위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 '맡은 일' 이외의 차이가 없는 교회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오며 개신교회가 표방했던 그야말로 '만인제사장주의'의 극한을 실천하는 교회이다. 목회자들의 전횡에 깊이 상처입은 교인들의 주도적인 선택이었다. 남편도 나도 이 모든 이상에 동의하지만, 목사인 남편에게 쉬운 자리는 아니다. 잠재적 독재자, 잠재적 범죄자로서의 목사를 전제로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설교하는 일이란, 목양하는 일이란...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을 때는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꿈꾸는 교회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그 꿈은 대형교회 같은 야망도 아니다. 그의 교회를 향한 꿈이 아름답다 여겨 뒤늦은 신학교 행에 찬성하지 않았던가. 목사에게 상처 입은 이들에게는 목사 개인의 꿈 자체가 위협일 수 있음을 아프게 경험했다. 이제 그의 목회 이상은 '꿈을 내려놓는' 것이 되었다. 힘들 때마다 남편은 젊은 날부터 마음에 새긴 본회퍼의 말을 꺼내 들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의 꿈이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
 
본회퍼가 앉아 기도했을 성당, 걸으며 기도했을 회랑이 있는 이 에탈수도원은 아무래도 김종필 목사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생일선물이다. 꿈을 내려놓기 위해 자기 꿈을 미워해야 했고, 자기 꿈을 미워하기 위해 자기를 혐오하는 어두운 날을 보내야 했던 그를 위해 "여기까지 잘 왔다"라고 등을 토닥여주시는 그분의 손길이다.  "여기서 본회퍼를 만나다니!" 라는 탄성 같은 한 마디에서 남편의 영혼이 살아 춤추는 것이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신부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순례단원들이 자연스럽게 "목사님이 기도해 주세요"라는 요청을 했다. 남편은 여러 번 사양했다. 앞에 나서는 사람도 아닌데다 목사의 이름으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게다가 기도 문화도 다른 가톨릭 신자들 앞에서 기도라니. 나설 위인이 아니다. 남편이 쓴 순례기 일부를 옮겨와 본다.
 

아침 버스에 오르자, 단장님이 억지로 나를 가이드 옆자리, 인솔자 선탑자 자리에 앉혔다. 신부님이 부재하여 단장님이 대신 앉아 있던 자리였는데, 목사인 나라도 거기에 앉으라는 것이다. 그저 한 명의 순례단원이고 싶었는데, 억지로 십자가가 또 지어졌다. 가톨릭 순례단원들은 목자를 잃었다. 나와 내 아내는 그저 그들 주변부에 머문 객들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양들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본회퍼가 에탈 수도사들과 어울리며 기도했을 것을 생각하며, 나도 오늘 하루 그 임무를 받아들여 순명한다. 버스에서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 신자들을 두고 기도했다. 아멘 소리가 낯설지만 은혜가 된다. 목이 멨다. 이렇게 가까운 일인데, 제도는 왜 이렇게 먼 것일까.  _남편의 블로그에서
 

맞다. 이렇게 가까운 일이다. 기도의 형식이 어떻든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하늘 아빠스는 사람이 만든 호칭에 갇히는 분이 아니다. 앞좌석 앉은 김에(마이크 잡은 김에) 방문한 순례지 관련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작고 소박한 교회 일치의 깃발이 나부끼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주어진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에 익숙한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의 자유기도를 신선하게 듣는다. 목회자도 아닌 사람들이 갑자기 시키는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신부님들조차도 자유기도에 익숙치 않아,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확실히 자유기도는 개신교인들이 가진 강점이다. 반면 정해진 기도문에 따라 드리는 가톨릭의 기도 역시 그 나름의 강점이 있다. '기도'라는 미명 하에 '자기 뜻'을 펼치고 '자기 의'를 드러낼 여지가 없다. 순례자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난다. 버스에 올라 하루를 시작할 때 정해진 기도문으로 아침기도를 드린다. 순례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저녁 기도가 있다. 아침 기도 후에 바로 묵주 기도를 드리고, 아픈 신부님을 위한 특별한 묵주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이들의 정해진 기도를 따르는 것이 순례 여정의 중요한 기도이다. 어느 아침, '사제들을 위한 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사제들을 위한 기도>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주님을 본받으려는 사제들을 지켜주시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에 올라 날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축성하는 사제들을
언제나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주소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사제들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사제들이 하는 모든 일에 강복하시어 은총의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저희로 말미암아 세상에서는 그들이 더없는 기쁨과 위안을 얻고
천국에서는 찬란히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문득 신부님들이 부럽다. 이 기도문으로 신자들의 축복 기도를 받는 신부님들이 부럽다.  아니, 이런 기도문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이 부럽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존경할 목자를 가졌다는 것과 함께 말이다. 인간에게는 존경할 대상이 필요하다. 신앙인에게는 하나님 사랑을 매개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의존이 아니라 존경할 목사님, 신부님이 필요하다. 단번에 삶과 신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가르침을 설파하는 초인이 아니라, 비록 당장 그분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렇게 따라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꿈꾸게 되는 그런 선생님 말이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으로 치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성직자주의 또는 사제주의의 양극단을 보는 것 같다. 순례여정을 기획하고 이끌어야 할 신부님이 사라졌고, 여행사도 소속 수도원도 책임있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 하나 없는 단원들에게 놀란다. 개신교인들의 순례였다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옳은 주장들이 난무할 것이다. 여행비 환불 청구가 들어갔을 것이다. 대신 이들은 기도한다. 사제를 위한 기도문으로 기도한다. 말 잘 듣는 착한 초등학생들 같다. 남편이 목회자로 서 있는 자리는 사제주의에 맞서 생긴 개신교회 중에서도 극단에 섰는 교회이다. 공동체와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공예배의 대표기도에서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조차 드물다. 부모의 말이라면 뭐든 어기고 보고, 독재자 아버지는 필요없다는 사춘기 아이들 같다.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 보면서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인으로 자란 자녀같은 신자가 있다면 어떨까. 사제와 목사를 넘어서는 영적 성숙에 이른 사람, 진정한 의미의 '만인제사장주의'를 실현하는 개인이 어딘가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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