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기도를 마치고 휴대폰의 비행기 모드를 해제한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 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직 8시가 되지 않은 시간. 우리 엄마... 아니고, 선의 아버지? 시부모님? 아닌데... 다 돌아가셨는데... 그 짧은 순간에 이미 치른 여러 번의 장례식을 다시 치렀다. 
 
이 시간에 전화할 친구가 아닌데, 보통일이 아니다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보통 일이 아닌 일이 일어났다. 새내기 직장인 딸내미를 태우고 올라와 내려가는 길인데 신갈 IC 근처에서 차가 꽉 막혀 있다는 것이다. 차 돌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 빨리 차 돌려! 브런치 먹으러 가자! 
 
보정동 카페 거리에 브런치 맛집들이 많은데... 이른 시간이라 스타벅스 밖에 없다. 아, 우리 동네 스벅 두뜨에서 선과 만나 브런치에 모닝커피를 마셨다. 이게 무슨 선물 같은 일이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우리 지금 만날까?" 이런 벙개가 가장 어려울 캐릭터다. MBTI로는 왕 J에다 바쁜 친구에게 폐 될까, 전화도 톡도 조심하는 선이다. 와, 내가 선과 벙개로 브런치를 먹고 수다를 떨다니, 이거 실화냐!
 
신의 직장에 취직한 딸을 태우고 올라와 이런 아침을 맞게 해준 친구의 인생과 신앙 여정 자체가 내게 선물이 되었다. 험난한 세월 지나며... 선, 너 여기까지 참 잘 왔다! 우리 여기까지 참 잘 왔어!
 
(블로그 폐쇄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자주 보지 못하는 우리 사이에 이 블로그가 연결점이 되고 있었음이 깨달아졌다. 이런 얘길 친구한테 한 적은 없지만, 내가 올리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읽어주는 최초의 독자로 늘 선을 떠올렸고. 내 유머를 좋아해서 빵 터져주는 그 모습도 자주 상상했다. 오랜 시간 블로그를 유지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날의 벙개 브런치 덕에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다시 믿을 힘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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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보다 이미지가 더 크게 말하는 두 권의 책을 따끈하게 받아 안았다.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상징이 필요 없다. 이미지는 상징의 아름다운 구현이다. 선사받은 두 권의 책 모두 작가로서 소장으로의 고민을 안고 지내온 한두 달의 여정과 닿아 있다.

 

남편이 활짝 핀 소국 화분 두 개를 검은 비닐에 사 들고 들어왔다.

 

"내가 말 안 해도 소국만 보면 나를 생각하라! 알아서 사 들고 들어와라! 아직도 내가 말해야 그때 살 생각을 하느냐?" 매년 가을을 원망과 타박을 들으며 시작하는 불쌍한 남편이 올해는 재난을 면했다. 이런 내 집착을 온전히 이해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더 많은 그의 마음에 있는 어떤 것들이 담겼음을 안다.

 

언어에 담거나 언어로 전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이 담긴 상징, 이미지, 그리고 또 어떤 것들. 그 어떤 것들로 전하고 받는 것이 영혼의 대화인지 모르겠다. 그분은  늘 말 너머 영혼으로 말을 걸어오시고, 문득 그 말 없는 말이 알아들어질 때가 있다. 그분이  말 걸어오심에 더욱 민감해지는 가을을 살고 싶다. 그러라고 말 걸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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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필요할 때 에니어그램"
"변화가 필요한 에니어그램"

책 제목은 『변화가 필요할 때 에니어그램』인데, 저는 "변화가 필요한 에니어그램"으로 읽으면서 추천 서문을 썼습니다. 에니어그램으로 자기 성찰의 도움을 얻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이 나왔습니다. 긴 서문을 쓰면서 에니어그램을 통해 영적 여정을 동반해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에니어그램을 도구 삼아 기도의 길을 안내하는 여정에서도 변화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서문에서 사소한 도발을 해봤습니다. 저자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을 2유형으로 보는데, 저는 4유형으로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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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문: 에니어그램, 마음의 거울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선의를 가지고 타인을 사랑하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문제는 결과가 늘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극한의 갈등으로 결별의 위기에 있는 사람조차도 각자는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고들 주장한다. 관계에서 '최선을 다함'만이 능사는 아닌 듯하다. 심지어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관계나 공동체에서 더 큰 문 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최선을 다하되, 최선을 다하는 '자기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최악이 될 수 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지만, 자기 지식에 관한 한 어느 면에서 우리는 모두 원천적 무능의 상태에 놓여 있다. 내 눈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지만 내 얼굴만은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자기 밖으로 나가서 자신을 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모두 일정 부분 나르시시스트일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관계가 파국으로 가고, 공동체가 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브레넌 매닝의 말을 빌리자면 "죄의 본질은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이다.
나는 MIBTI와 에니어그램을 좋아한다. 저마다 고유한 존재를 어떻게 열여섯이나 아홉 칸에 집어넣을 수 있느냐 하는 흔한 비판과 오명을 감수하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내 얼굴을 비춰 주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에니어그램과의 만남은 내게 일종의 구원 체험이었다. 신앙은 좋은데 인격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이율배반에 관한 고민을 해결하는 열쇠였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 1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을 깊이 알지 않고는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고는 자신을 깊이 알 수 없다." 내 마음을 외면한 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한' 바리새인이었던 나를 세리의 자리로 안내해 준 것이 에니어그램이다. 모르고 있었고, 알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을 비추었기에 많이 아팠지만, '자기 지식'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직면하다, 직면시키다

성격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 주는 에니어그램은 하나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죄로 인해 깨어진 존재인 기독교적 인간관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에두르지 않는 죄의 고발은 에니어그램이 가진 독보적인 특징이다. 아홉 가지의 성격 유형마다 타고난 성격적 선물이 있고, 그것을 뒤집으면 동전의 양면처럼 근원적인 죄라는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를 외면하고 선물로 주신 재능에만 과도하게 집착해 오직 그것으로 세상을 통제하려 할 때, 즉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빗나간 열정은 분노, 교만, 거짓. 질투, 탐욕, 공포, 방종, 파렴치, 게으름의 죄가 된다는 것이다.
에니어그램은 이렇다 할 성찰 도구가 없는 한국 교회에 선물이 되었다. 교회와 선교 단체를 통해 조용하게 깊은 호응을 얻으며 전파되었다. 오용도 있었다. 죄를 '직면시키는' 수단으로 에니어그램이 사용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회개는 죄를 깨닫는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주체적이며 자발적인 현상이다. 물론 성령 안에서의 수동적 주체성이겠으나, 적어도 강압하는 인간적 힘의 작용은 아닐 것이다. '직면시킨다'는 표현에는 영적 폭력 행사, 더 나아가 영적 학대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에니어그램은 행동 이면의 내적 동기를 신기할 정도로 파헤친다. 그래서 '죄'라는 언표가 더해져 자신 아닌 타인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때 매우 위험하다.
나는 '직면시키는 에니어그램'의 피해자를 많이 만났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 교회의 영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 에니어그램 교사들에게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누구보다 에니어그램을 사랑해 열정을 쏟으며 에니어그램 교사를 자처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기독교 영성적 에니어그램을 개발하고 가르친 리처드 로어로 대표되는 1세대 에니어그램 교사들의 업적이 '죄성'의 발견과 자각 이라면, 에니어그램을 오늘이라는 상황에 비추어 새로운 지혜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균형의 에니어그램

『변화가 필요할 때, 에니어그램』은 기독교 영성적 에니어그램으로서는 드문 실용적인 안내서다. 에니어그램을 통해 내가 얻은 유익이 '죄 된 내면'을 만나는 일이었기에 가르치는 것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마치고 나면 수강한 분들의 표정에서 "그래서 어쩌라고요?" 하는 말을 읽는다. 돌아가는 뒷모습에서는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하는 말씀을 떠올리기도 한다. 화장기 없는 나의 민낯을 마주한 당황스러운 무거움을 안다. 속사람으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되는 반가운 신호이기는 하지만, 정작 홀로 걸어가야 할 침묵 기도의 길은 낯설고 막막하니까.
이 책은 반갑게도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물음에 답을 주고 있다. 에니어그램 아홉 개의 성격 유형은 장, 가슴, 머리, 세 개의 중심에서 출발한다. 어떤 정보나 상황을 접할 때, 이 셋 중 하나를 먼저 클릭한다는 뜻이다. 세 개의 중심 중 하나의 중심을 잘 쓴다기보다는 여기에 고착되어 있다고 하는 게 맞다. 그간의 에니어그램(특히 기독교 영성적 관점의) 교사들은 고착으로 인한 불균형을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 많이 가르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균형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균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론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세 개의 중요한 힘을 균형 있게 활용할 수 있다는 그 자체다. 저자가 말하는 '균형'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우리 안에 그분에게까지 자랄 무한한 힘이 있다는 믿음을 반영하기에, 이는 참 으로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이다.
1부에서는 지배적인 중심, 2부에서는 각 유형의 억압된 중심을 통해 균형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억압된 중심을 끌어내어 균형 찾기를 안내하는 2부는 에니어그램의 날개와 화살 그리고 신프로이트학파의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의 행동 양식(움츠림형, 대항영, 의존형)의 개념을 먼저 이해하고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펼친 독자라면 이미 충분히 아는 내용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자료를 참고하면서 읽으면 유익할 터이다. 지배적 중심에 더욱 고착되는 이유로 저자는 '스트레스'를 든다. 불확실한 세상,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스트레스는 평생 겪는 현실이다. "스트레스 대처, 균형, 변혁'이라는 원서의 부제처럼 진단을 넘어 처방까지 제시하는 에니어그램의 지혜를 향유해 보기 바란다.

에니어그램은 과학이 아니다

에니어그램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벗들과 함께 "에니어그램은 과학"이라며 농담하는 때가 있다. 에니어그램 유형을 통해 알게 된 자기 지식으로 나 자신을 꽤나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차에, 또다시 내가 모르던 내 마음을 만나게 된다. 특히 3중심, 날개와 화살의 역동으로 나를 설명하는 기가 막힌 언어를 발견할 때다. 그러나 에니어그램은 엄밀하게 말해서 과학이 아니다. 심리학이라는 과학의 틀에 가둬지지 않는 직관적인 도구다.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채 짧게 잡아도 2천여 년의 영성사 안에 전해져 왔으니 현대 심리학으로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호한 지점을 품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헨리 나우웬을 2번 유형으로 본다. 나는 나우웬을 4번 유형으로 보기 때문에 그 점이 조금 불편했다. 2번 유형인 저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헨리 나우웬과의 '2유형적' 동질성에 더 많 이 주목했을 테고, 나우웬에 대한 사랑이 저자 못지않은 나로서는 나우웬의 유형을 4번의 스트레스(또는 미성숙의 화살) 방향인 2번으로 추정 하기가 싫다. 나우웬이 몇 번인지는 최종적으로 당사자만이 확인해 줄 수 있으니 천국 가서 여쭤봐야겠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에니어그램의 매력이고 미덕이다. 용어에 매이거나 단정하지 않고 열어 두고 또 열어 둔 상태로 과정을 통해 자기를 찾아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 좋다.『변화가 필요할 때, 에니어그램」은 그 길 위에 새롭게 세워진 또 하나의 이정표다.

정신실 소장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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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데레사 『영혼의 성』으로 쓴 논문의 결론 부분 일부입니다. 제 기도 여정의 고민을 담아 연구하고 얻은 소소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도의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여건이 되신다면 함께 해요.
 
『영혼의 성』에서 배우는 기도는 metanoia, 즉 방향의 전환이다. 기도하는 자아, 데레사 자신의 인간적 열정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향한 에로스적 열정이 방향을 바꾸어 그대로 하나님을 향할 때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비춘다면 개신교인들의 통성기도를 향한 열정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다. 방향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기도를 ‘잘못된 기도’로 치부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지나온 기도의 여정을 긍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지점에서 자기인식의 빛이 필요하다. 여기서 자기인식이란 심리학적 자기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온 자신에 대한 성찰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자기인식이 기도의 시작이라고 『영혼의 성』은 가르치고 있다. 데레사의 여정으로 말하자면 자기인식은 우선적으로 ‘기억’이다. 짐승과 벌레가 우글거리는 성 밖에 살던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도는 맹목적 자기 망각이 아니다. 통성기도는 한국인 특유의 한(恨)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한다. (김명실.「공동체적 탄원기도로서의 통성기도: 통성기도의 정체성의 정립과 그 신학과 실천의 나아갈 방향 모색」,『신학과 실천) 공동체적으로 큰 소리로 울부짖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민족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고통의 정점에서 그것을 견디기 위해 망각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심리학에서 ‘방어 기제’는 고통의 정점에서 고통을 잊게 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방어 기제를 사용할 때는 병리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적으로 큰 소리로 울부짖는 통성기도는 기도하는 그 순간 자기를 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의식의 빛을 꺼야만 견딜 수 있는 고통의 때에는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데레사의 기도처럼 영적인 성장은 투명한 자기인식의 길과 함께 가야 한다.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고통과 인간적 욕망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명확하게 바라보고 성찰하는 것이 건강한 영성으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더 깊은 기도, 성숙한 기도를 위해서는 자기 망각으로의 순간적 초탈이 아니라 자기를 인식하고 수용하며 초월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내면을 향한 자기인식의 기도로 안내하는 『영혼의 성』이 통성기도 너머의 깊은 기도로 초대하는 초대장이 될 수 있겠다.
 
 

 
 
침묵기도 피정으로 초대합니다.
일상에서 물러나, 고요와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머무는 2박3일 '예수마음기도' 피정입니다.
 
예수마음기도란,
대침묵 피정으로 길잡이 강의와 영적 동반을 통하여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배우고 익히면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깊게 하는 영적 수련입니다.
 
♠ 일시 : 2024년 11월 8일(금) 오후 2시 -10일(주일) 오후 3시
  장소 : 예수마음배움터(경기도 파주시 한빛로 21)
  피정비 : 25만 원(1인1실)
  입금계좌 : 우리은행 38604 100758 (재) 성심수도회
  신청 : https://bit.ly/3Ymvl4t
  문의 : 010-6209-0635
 
 부분 참석은 불가합니다. 다만, 혹 주일 예배 참석하셔야 하는 분은 토요일 밤이나 주일 아침에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이 경우에도 시작기도(금요일 2시)는 같이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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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있었습니다. 3년 전 작가님의 신작 낭독회를 듣고 그날, 두근거리는 감동에 적었던 일기를 찾아보았습니다.

수천 개의 바늘이 온 몸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은 본래 그곳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 함께 있는 이들과 나는 그 사랑을 향해 기꺼이 걷겠노라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의 마음이 오늘 소장님께 드리고픈 감사의 마음과 닮아 있어 적어봅니다.

여름과 가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 10. 11. 참나무 교사회 미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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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연구소 개소 6주년이 되었네요. 6주념 특강으로 설레는 만남을 준비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아빌라의 데레사 논문을 쓰다 발견한 분인데. 잠시 이 분에 빠져서 논문 쓰는 일이 뒷전이 될 뻔 했다지요. 최대환 신부님은 대학원에서 같은 수업을 재수강 할 정도로 좋았던 교수님입니다. 이 특강을 성사시킨 자체가 이미 뿌듯하네요. 가을 날 오후 피정 같은 시간이 되실 거예요. 서울숲 바로 옆이고 핫한 성수동이니 맛집 탐방, 서울숲 걷기... 이런 일정으로 나들이 하셔도 좋겠네요. 오세요!


[나음터 영성 특강]
에디트 슈타인의 ‘존재’를 향한 여정

 


아우슈비츠에서 나치에 의해 죽임당한 에디트 슈타인(1891년~1942년)을 아시나요? 철학자이자 가르멜수녀회 수도자였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50여 년 삶의 여정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여성들, 아니 모든 이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엄격한 전통적 유대교 신앙을 받고 자랐습니다. 자라면서는 무신론적 지성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문학 등을 공부한 뒤 독일의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의 개인 조교가 됩니다(그 다음 조교는 ‘하이데거’).

우연히 <아빌라의 테레사 자서전>을 읽고 유대교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1933년 42세 나이로 쾰른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해 봉쇄의 삶을 사는 중 1942년 8월 2일에 체포되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했기에 박해대상이 아니었지만, 유대인 태생으로서 유대인과 함께 하겠다는 결심으로 수용소에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중 가스실에서 살해됩니다.

그녀 안의 어떤 질문이 철학자가 되게 했고, 또 어떤 갈망이 봉쇄수도원으로 이끌었으며, 어떤 소명이 부당한 죽음을 받아들이게 했을까요? ‘에디트 슈타인의 존재를 향한 여정’에 함께 하는 가을 특강에 초대합니다. 가을이 물들어가는 서울숲 옆에 마련된 공간에서 에디트 슈타인과 함께 내 존재의 방향과 의미를 묻는 시간 가져보시겠습니까?

철학자이며 사제이신 최대환 신부님께서 강의해 주십니다. 소설가 김훈 선생님은 “나는 최대환 신부님의 글을 읽고 나서 인간의 영성과 하느님의 신성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쉽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종교적 미사여구 없이 철학, 문학,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돌리게 하고 우리 안의 영성을 일깨워주시는 좋은 선생님이십니다.  

+ 강사 : 최대환 신부
+ 일시 : 2024년 10월 10일(목) 오후 3:00 ~ 5:00
+ 인원 : 선착순 30명
+ 장소 : 성동구 서울숲2길 32-14 갤러리아포레 지하 3층 B328-2
+ 참가비 : 이만 원(후원자, 내적 여정 참가자 만 원)
+ 문의 : 010-2771-4445
+ 신청 링크 : https://bit.ly/3kDbLfR

 

에디트 슈타인의 ‘존재’를 향한 여정

나음터 영성 특강 강의 신청 양식입니다. + 강사 : 최대환 신부 + 일시 : 2024년 10월 10일(목) 오후 3:00 ~ 5:00 + 인원 : 30명 + 장소 : 성동구 서울숲2길 32-14 갤러리아포레 지하 3층 B328-2 + 참가비 : 이만

docs.google.com

 

 

다녀드른 모든니레 부모에게 툰동하딧뚀. 
그거슨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 니리이다.
고래서 삼당이십쩔말씀.

 
이렇게 처음 요절 말씀을 외웠던 현승이가 청년이 되어 주일 예배 대표기도를 하였다. 반주하는 누나 채윤이가 기도 후 송영으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고 주님의 평화를 내려주소서"를 쳤는데, 멜로디에서 가사가 들렸다. 
 
주님, 이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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