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좋아서 한 일인데, 벗들의 축하를 막 받자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졸업 축하 선물로 소고기를 받아서 비 오는 월요일 점심에
오랜만에 다 모인 네 식구가 김치우동 곁들여서 맛있게 먹었다.
논문 하나 더 쓰고, 졸업 한 번 더 할까? 소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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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큰 의미를 부여한 졸업식은 아니었고, 사진이나 예쁘게 찍자! 싶었는데. 캠퍼스를 누비며 사진 찍는 즐거움마저 없겠으니... 글렀군! 가족 총출동의 졸업식이 어쩐지 시시할 것 같은 느낌으로 기분이 우중충했다. 학교 가는 길, 비 사이에 눈이 섞여 떨어졌다. 가지가지한다... 제대로 글렀군! 일찍 도착하여 방황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 밖에서 사진 찍어! 지금 눈이 엄청 와." 하는 소리에 튀어나가 인생 샷을 건졌다. 축복처럼 눈이 쏟아졌고, 예쁜 사진을 건졌다.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좋은 사진은 우연의 렌즈에 걸려 얻는다. 눈 감은 이 사진이 어쩐지 너무나 마음에 드는데...  갑자기 쏟아진 눈처럼 그냥 주어진, 얻어 걸린 선물이다.
 

 
반백의 머리칼로 눈 맞으며 찍은 중년 부부의 사진이 뭐로 보나 포토제닉 감이지만. 조명도 별로 안 좋은 실내에서 찍은 이 사진은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또 하나의 포토제닉이다. 이 멋진 청년들을 딸 아들의 이름으로 옆에 세우고 찍은 사진이라니.

 

가톨릭 신자 속 혼자 개신교인이라는 괜한 자격지심으로 스스로 왕따 된 면이 없지 않은데. 졸업, 마지막 날에 원우회에서 준비한 축하식에 참석하고 이리저리 몰려 사진도 찍고 보니 기쁘고 행복했다. 돌아보니 역시 사람을 얻은 시간이었구나! 수녀님, 수사님, 신부님. 좋은 벗들을 얻었다. 학위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돌았던 것도 아닌데. 굳이, 꼭 와야 했던 학교일까? 괜한 생각으로 마음의 에너지 많이 소비했는데. 마침표를 찍고 보니 굳이, 꼭, 바로 이때 있어야 할 곳이었다.  종교의 담을 넘어가 '사람'을 얻었고, 사람을 얻은 덕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음에도 다른 내가 되었다. '인맥'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궂은날을 예상치 못했듯, 졸업식 하루가 어떨지 예상치 못했다. 안팎으로(외적으로 내면적으로) 이렇게 풍성한 축하를 받게 될 줄 생각지 못했다. 실은 은밀히 다닌 학교인데 말이다. 내 교회와 가톨릭 교회, 이쪽에서는 저쪽 말을 못 하고, 저쪽에서는 이쪽 말을 못 하며 공부를 했다. 축하식이 졸업생 나눔 시간에 이런 취지의 말을 되었다. "원없이 공부했다.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에 교회도 하나이구나, 깨달았고. 하나인 교회가 또 얼마나 갈라져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도 느꼈다. 원없이 사랑했고, 원없이 아파했다." 

 

여러 개의 꽃다발, (그 지루한) 졸업식 자체도 기쁜 축제였다. 아프고 기쁜 체험이 참으로 소중하다. 그 체험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석사과정 자체, 가톨릭 학교라는 조금 무모한 선택 자체가 체험을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매한 정체성을 가지고 좋은 선생님, 좋은 공부에 몰입하여 매진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 
 
아래 바실 패닝턴 신부님의 말에 동의한다. 나라면 "생활" 대신 "삶"이라고 번역했겠으나, 여하튼 깊이 동의한다. 쉽지 않았던 대학원 생활, 무지 어려웠던 논문 기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장 자비롭고 은혜로운 초대였기에 말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만약 제가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가 제게 수도생활의 고통과 어려움을 알려 주었더라면 빨리 진로를 바꿨을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그 자체는 제가 찾는 사랑 체험을 결코 저에게 전달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체험은 오직 생활 안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후로 저는 단 하루도, 한 시도, 한 순간도 하느님의 가장 자비롭고 은혜로운 초대에 응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 _ 바실 패닝턴 『향심기도』,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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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으니 이때다! 싶어 온종일 죄책감 없이 침대에서 뒹굴었다. 읽다 자다 읽다 자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다 읽었다. 분량으로 치면 두어 시간이면 끝나겠지만, 양으로 가늠되는 책이 아니다. 제목과 표지, 작가 정보 때문에 벌써 사놓고 펼쳐보질 못했다. 교회 여성모임에서 여행 가시는 집사님께 마음을 딸려 보내고 싶어서 사놓고 펼쳐보지 못한 책을 드렸다. 그리고 바로 다시 주문했다. 같은 책을 읽으며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첫 문장이 이러니 읽어나갈 엄두가 났겠는가.
 
조금 아픈 몸으로 읽다 쉬다 하며 하루를 몽땅 들이는 방식으로 읽기를 잘했다. 나이가 들어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소설을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실을 쓰고 싶어서이다. 내가 경험한 일들을 낱낱이 쓰고 싶은데, 그 낱낱의 사실들이 사실이 아닌 척, 특히 내가 경험한 사실이 아닌 척하고 싶어서이다. 《부끄러움》을 읽으며,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철학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하여 (언감생심 이루지도 못할) 내 생각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책을 한 권 내놓을 때마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징징거리는 나는 부끄러움으로 부끄러움을 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읽다 보니 아, 부끄러움은 관념이 아닐뿐더러 형용 가능한 감정도 아니지 않은가 싶다. '은유나 상징을 배제한, 밋밋한 글쓰기'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그 해의 기억을 묘사하는 덤덤한 글을 따라가다 내 어떤 기억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다. 부끄러움은 '장면', 이미지이다. 덧붙여지는 심리분석이 아니다.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 할까?

 
책의 마지막 몇 단락을 여러 번 읽었다. 두고두고 읽고 또 읽을 생각이다. 책이 나온 뒤에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을 쓰겠다는... 사실? 아니 진실을 향한 갈망과 용기라니!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내 기억의 장면들을 나는 쓸 수 있을까? 은유, 상징, 심리분석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기술할 수 있을까?   
 

1996년의 여름이 끝났다. 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무렵 사라예보의 시장 바닥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몇몇 작가들이 "부끄러움에 목이 멘다"라고 신문에 썼다. 그들에게 부끄러움이란 하루아침에 생겼다가 그다음 날이면 떨쳐버릴 수 있고 어떤 상황에는(보스니아 내전) 적용되지만 다른 상황에는(르완다 내전)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개념이었다. 사라예보 시장의 피바다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끄러움에 목이 멘다" 같은 표현을 나는 얼마나 자주 내뱉었던가. 내가 말하던 부끄러움이 현학적이었다고까지 느껴진다. 강의와 집단 여정 중에 '수치심'이란 말을 얼마나 자주 입에 올리는지. 인간 마음 맨바닥에 있는 감정이 수치심이며, 영성적 치유는 수치심의 치유라는 설명을 입에 달고 있는데. 내 말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진다. 이 부분을 해설한 작품 설명을 그대로 옮겨봐야겠다. "그녀에 따르면 그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부끄러움이란 하루아침에 생겨났다가 그다음 날이면 떨쳐버릴 수도 있고, 어떤 상황, 즉 보스니아 내전에는 적용되고 다른 상황, 예컨대 르완다 내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개념인 반면, 자신의 그것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없거니와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적용되고 그럼으로써 영원하게 살아 있는 실체와 같다."

 

이 책을 쓰고 있었던 지난 몇 달 동안 어떤 영화가 개봉했든 어떤 책이 발간됐든, 혹은 어떤 예술가가 죽었든 그것이 1952년에 일어난 사건이면 대뜸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일들이 까마득히 먼 그해의 현실, 어린아이였던 내 존재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1952년 일본에서 출간된 오오카 쇼헤이의 《불》이란 책에서 나는 이런 글귀를 읽었다. "이 모든 게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말하기 싫은 기억의 장면들이 있다. 그 장면이 부끄러움이고, 부끄러움이란 내 기억 속의 장면들인데... 의심할 수 없는 바는 이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 
 
이로써 나는 아니 에르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알라딘 보관함 한 페이지가 아니 에르노로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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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친구를 데려와 집에서 자겠다고 하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정확히 누구에게 고마운 건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특히 채윤이 친구는 더 그렇다. 채윤이 친구 인생사에 엄빠로서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다. 일부러 지은 죄는 아니지만 늘 미안하고 마음 아픈 지점이다.  아빠의 진로로 한 번, 두 번, 세 번... 좋은 친구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들이다. 아빠 상황, 아빠가 매인 교회 상황 때문에 초3부터 학교 친구 없는 동네에서 살기 시작. 태어나면서 유아실 동기들과 함께 자랐던 소중한 교회에서 떠나기. 좋은 찬양팀과 리더 선생님 만나 이제 막 음악과 신앙을 꽃 피우려는데 또 떠나기... 학교 친구, 교회 친구를 제대로 만들기 참 어려운 환경이었다. 대학에 가더니 친구를 만나고, 친밀감을 쌓고, 갈등을 겪어내고 하더니 후반에는 정말 활발한 친구 생활을 누리는 것을 보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하는 친구들과 신나게 음악하고, 찐 우정을 쌓고 놀고... 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행복하다. 죄책감이 덜어지는 느낌이다. 고맙다. 채윤이도 채윤이 친구들도. 드물게 친구를 데려와 자는 날 아침에는 뭔가 특별한 대접을 하고 싶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아침을 먹어야 말이지!
 
나름의 무엇으로 샌드위치를 해주곤 하는데. 정말 나름의 마음을 담는다. 채윤이가 마침내 어떤 친구에게 이 말을 들었다고 한다. "너네 집 베이글 샌드위치가 그렇게 맛있다며?" 음... 진짜 죽어도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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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처음 분당으로 이사 왔을 때 "서울 간다" "서울 갔다 왔더니 피곤하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렸다. 충청도나 경상도도 아니고 바로 옆이 서울인데, 굳이 "서울 간다"고들 하시네. 서울 어디냐에 따라 서울에서 서울 가는 거리보다 여기서 서울 가는 거리가 더 가깝기도 한데,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분당을 거점으로 하여 2년에 한 번씩 분당으로부터 멀어지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계속 분당이 거점이라면 몇 년 후에는 평택이다...) "아, 서울 가는 게 이런 거구나!"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멀구나... 서울이... 일 때문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일이 아니어도 한 번씩 만나고픈 사람이 대부분 서울에 있으니 서울은 가야 할 곳이다. 이래저래 적응하고 보니, 광역버스 권으로 최적의 장소가 있다. 최적의 장소에 최적의 카페가 있고, 인근이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다. 서울에서 사람을 만날 때는 거의 오직 한 카페에 간다. 아주 딱이다.
 
사람
노안이 와서 눈이 침침해져 돋보기를 쓴지 벌써 몇 년이다.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는 눈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멀리 보라!"는 그분의 메시지라 받아들이고 가까운 것을 흐릿하게 보며 살려고 한다. 눈과 귀가 밝은 태생이라 뭐든 참 잘 들리고 잘 보이고, 빠르게 판단이 되는데. 이게 걸림돌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가까운 것들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하고, 바로 어제 일이 생각나지 않아서 부끄러울 때가 있지만 받아들이며 살려고 한다. 멀리 보는 눈으로 이생의 끝에서,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만날 하나님 나라를 더욱 가까이 살 때가 된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자세히 보려는 노력 대신 보이는 만큼만 보려고 한다. 사람 마음에 민감한 태생이지만 보이지 않는 동기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힘을 빼고, 빼고 또 빼려고 한다. 누구보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그러려고 한다.
 
장소
서울만 가면, 서울에서 만날 사람이 있으면 늘 가는 카페 근처의 새로운 카페를 발견했다. 늘 가던 곳은 지하였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딱 마음에 드는 곳이다. 지하를 좋아하지 않아서 막히더라도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는 편인데, 늘 가던 카페가 지하라서 별로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편의 때문이었다. 나의 편의도 있지만, 만나는 분들의 편의가 더 많이 고려된 것이기도 하다. 만나러 어디든 오겠다는 분들을 멀리까지 오게 할 수 없어서 내가 움직여야 하는데, 너무 힘들지 않게 다다를 수 있는 최적의 서울이었다. 마침 여러 조건들이 좋았지만, 지하 카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네. 약속 장소를 정하는데 "거기는 커피가 맛있어서 좋고, 전망이랑 분위기는 건너편의 **도 좋아요."라는 톡을 보았다. "아, 전망과 분위기를 고려할 수도 있겠구나!" 대단한 깨달음도 아닌 깨달음이 왔다. 그래서 아주 편의도, 전망도, 분위기도 만족시키는 새로운 장소를 알게 되었다.
 
기도
가까이 있는 이들을 흐릿한 눈으로 보는 게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타고난 에로스 에너지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눈과 귀와 마음이 무한으로 열린다. 말하자면 잔소리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남편, 아이들에게 나는 잔소리쟁이이며 간섭쟁이이다. 나는 이제 이 열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이런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좀 분산시키는 것도 좋지. 그 누구라도 오늘 지금 새롭게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면 되는 일이다.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닌데, 심지어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이인데도 열정이 향하는 사람이 있다. 500년도 전에 살았던 아빌라의 데레사가 내겐 그러하고, 많은 저자들이 그러하다. 때로 그립고 그립고 그리운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내게 '기도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다. 내 이 넘치는 마음의 에너지가 닿고 싶은 곳은 그분의 마음이다. 그분이다.
 
기도가 맺어준 먼 동네 새 친구를 만나
새로운 카페를 알게 되고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앉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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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모시고 민속촌에서 몇 시간 보내고 명절이 끝났다. 나의 명절은 이렇게 끝나고 남편의 명절은 아직 길게 남아 있다. 주일 설교가 남아 있고, 설교 마치고는 어머니 모시고 1박2일 여행하는 일정이 남았다. 명절 시작은 혼자 어머니께 가서 하룻밤 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산더미 같은 만두를 빚고, 열 가지 넘는 전을 부치며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짐이 무겁던 나의 명절은 가고,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부서진 어머니를 돌보는 짐을 진 남편의 명절이 왔다. 어머니를 뵈면서 어머니보다 더 부서진 마음으로 힘겨운데 의연하게 감당하는 남편이 자랑스럽다. 끝없이 변하는 명절의 풍경, 끝없이 다가오는 생의 변화에 따라 기꺼이 변하는 모습이 고맙다. 
 
오늘 말씀 묵상의 본문은 마 11:25-30인데, 여기 붙인 남편의 묵상 또한 인상 깊다. 에니어그램 5유형인 남편의 앎, 지식에 대한 고백이다. 지성을 선물로 받은, 또는 지성에 집착하는 사람 5유형으로서 좌절하고 깎이며 다다른 자기 비움임을 알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사랑을 살며 버티고 있는 5유형의 아름다운 고백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마 11:25)

주 예수님,
우리에게 지성을 주셔서 지식을 추구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한 섭리하고 계시오니,
주 예수님은 모든 지식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신학뿐 아니라,
교육학, 경제학, 물리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모든 분야의 진정한 설계자는 주 예수님이십니다.
주 예수님, 그러하오니,
지식 안에서 영과 진리와 생명과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주님 앞에 서있게 해주십시오.
언제든지, 무엇인든지 ‘안다’고 할 때,
삼위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알게 해주십시오.
나의 지식은 부분적 지식일 뿐입니다.
이 지식을 움켜잡을 때 도리어 진리가 닫히고,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여 둘다 구덩이에 빠질 뿐입니다.
주 예수님, 책을 통해 배운 지식, 자연을 통해 배운 지식,
사람을 통해 배운 지식, 여러 미디어를 통해 배운 지식,
그 지식에 갇혀, 지식의 주인인 양 교만을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
늘 어린 아이처럼 새로운 세상에 대해 열린 질문을 던지고,
마음으로 배우게 해주시며,
주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 열어 보여주시는 그 신비의 힘,
하늘나라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체험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을 향한 제 지식이 제 삶과 우리 삶과 만나게 해주시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인격이 담긴 지식이 되게 해주십시오.

 
 

Panta Rhei, 모든 것은 흐른다. 흐르는 삶에 몸을 맡기고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여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참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모든 다가오는 날들을 새로운 날로 사는 것이 "새로 오는 아침을 새롭게 하시는 것에 성실하신, 성실하게 새로우신(애 3:23)" 그분 닮은 삶이고 영성이지...

 
To live means to grow,
To grow means to change,
To change means to de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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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프다고 음악치료를 해달라고 했다. 음악치료 손 놓은지 오래되어 치유력이 별로 없다고 소용 없다고 했다. 음악치료 대신 밥 치료를 시전했다. 치료인지 뭔지도 모르고 처묵처묵 하시지만, 결국 치료가 될 껄! 밥은 힘이 세다.
 
라고, 어젯밤에 침대에 누워 폰으로 일단 작성해 두었는데... 오늘 아침 말씀 묵상에서 확신을 얻었다. "지극히 작은 일로 참된 제자가 된다"고 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작은 치유의 기도를 기억하실 거라는 확신이 든다.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 올린 마 10:32-11:1 묵상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10:42)

내가 너희를 부른 일은 큰 일이지만, 주눅들 것 없다. 작게 시작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를테면,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을 주어라. 베풀거나 받는 지극히 작은 일로 너희는 참된 제자가 된다. 너희는 단 한도 잃지 않을 것이다.(10:42, 메시지성경)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삶이 너무나 거창하다고 여겨집니다. 엄청난 박해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만 하는 소설 <침묵>에 나오는 기리스탄들의 상황이 상상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밟거나 죽음을 택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요. 예수님께 순종하기 위해 가족을 버려야 할 것 같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 같은...

주님, 저같은 쫄보가, 이기심 가득한 제가 과연 그런 순종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못할 것 같아요...

제 마음을 벌써 알고 계시는 듯, 메시지 성경으로 읽는 마지막 절에서 말씀해 주시네요. 거창한 일이 아니라고요. 작고 좁은 마음 그릇을 가진 저이지만...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작은 베풂, 작은 용서, 작은 사랑으로 시작하라고 격려해 주시네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하는 미미하고 어설픈 순종을 주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씀으로 들려서 용기가 생깁니다. 주님,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가오는 가까이 있는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잔 내어주는 기회를 잃지 않는 오늘 하루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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