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283 기억한다는 것, 마음에 담는다는 것 남편이 사랑꾼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귀기 직전, 썸이 한창이던 여름이었다. JP 포함 교회 청년 몇 명이 지리산 종주를 했다. 그 멤버에는 내 베프 둘이 끼어 있었고, 나는 시간도 안 되었지만 하루 등산도 아니고 지리산 종주라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장 친한 내 친구들과 썸남이 가는 산행에 끼지 못하는 마음이 어땠을꼬? 아쉬움을 뿜뿜 했을 것이다. 그때 (인생에서 아주 잠깐 사랑꾼이었던) JP가 했던 말이다. 누나도 같이 지리산 가시는 거잖아요. 제 마음에 담아서 가니까 같이 가시는 거예요. (이 달달한 세레나데를 평생 들을 줄 알고 결혼했긔)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안다. 어떤 사람을 마음에 담는 것, 사람이 마음에 담기는 것을 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흔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 2024. 7. 5. 영적 가면을 벗어라 같은 책 네 권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나침반’에서 나온 1999년 판, ‘복 있는 사람’에서 나온 2010년 판, 이번에 출간 36주년에 맞춰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된 『영적 가면을 벗어라』 입니다. 2010년 판은 두 권입니다. 네 권을 가지고 있지만, 읽은 횟수로 치면... 몇 번인지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나 공동체와 여러 번 함께 읽는 경험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책을 좋아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후배에게 ‘너를 좋아해‘라는 말 대신 이 책을 함께 읽자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네요. 아, 2010년 판의 하나는 남편의 것인데, 남편 역시 청년 리더 교육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이렇게 사랑하는 책의 추천사를 쓰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책을 받아 펼쳐 ‘25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2024. 7. 2. 아래로부터의 영성 행복하시겠어요 지난 목요일 동반자과정 1학기 종강 날이었다. 모임 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을 읽고 있었다. 한 학기 내적 여정을 돌아보는 것으로 이보다 좋은 주제가 없다. 강의 대신 책 나눔으로 한 학기를 정리한다. 동반자과정 4기가 되니 벌써 네 번의 책 나눔을 한 것이고, 그때마다 새롭게 다시 읽고, 가끔 꺼내 읽은 것으로 치면 족히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그래도 또 새로운 것이, 지하철에 앉아 아무 데나 딱 펼쳤는데 바로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것이다. 옆에서 뭔가 뜨끈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맑은 초로의 여자 분이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 오랜만에 봐서요… 좋네요. 행복하시겠어요…"란다. 한참 쳐다본 모양이다. "(행복한 걸) 어떻게 아.. 2024. 6. 29. 멜체 라면 드라마 이 내 머릿속에 '미역국 라면' 칩을 넣었다. 미역국을 보면 꼭 한 번은 거기에 라면을 끓이게 됨. 손감독과 진주작가의 꽁냥꽁냥 장면에 '파 많이 넣은 떡볶이' '평양냉면' '미역국 라면' '사골국' 등 음식이 등장하는데 희한하게 모두 내 취향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이병헌 감독 개그가 진짜 마음에 드는데... 개그 취향과 함께 음식 취향도 나랑 비슷한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됨. (아, 미역국은 내 '최애 국'이다. 현승이 낳고 산후조리원에 갔는데 끼니마다 다른 미역국이 나와서 행복했던 기억이다. 한 달 내내 미역국, 질린다며 억지로 먹는 산모가 대부분이었음. 그래서 식사 때마다 미역국 때문에 설레던 내 마음이 조금 부끄러웠던 기억... 미역국 라면을 끓이며 그 얘기를 현승에게 들려주었다.) .. 2024. 6. 22. 나로 저자되게 하심 글쓰기를 좋아하고 재능이 좀 있다고 모두 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책 출간으로 북 토크와 저자 인터뷰가 몰린 지난주를 보냈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질문이 쏟아져, 글 쓰는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꾸어보지 않은 꿈입니다. 차라리 어린 시절 내내 음악가의 꿈이 있었습니다. 작가가 된 것은 어떤 행운이 작용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은데 “야야, 니가 잘나서 된 것은 옶어. 교만하지 말어. 다~~아, 하나님 은혜여.” 평생 듣기 싫었던 말인데... 고까웠던 심정 빠지고 새롭게 들리네요. 하나님 은혜 맞습니다.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북토크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북토크였습니다. 교회 .. 2024. 6. 21. 만족감 저녁 먹으며 남편이 "현승아, 너는 어떤 때 만족감을 느껴? 만족감을 자주 느껴?"라고 했다. 내게 물은 건 아닌데 답을 찾게 된다. 흠... 나는... 끙끙거리며 쓰던 글을 완성했을 때! 그리고 갑자기 요리의 신이 임해서 전에 해보지 않았던 요리를 뚝딱 만들고 났을 때. 끙끙거리던 글을 마치자마자 냉동실에 있던 갈치 몇 조각과 야채 박스에서 뒹굴던 무 한 토막을 꺼내서 우다다다 갈치조림을 하는데, 마침 고사리 불린 것이 한 줌 남아서 마지막에 넣고 졸였는데, 식구들이 "대애~박!"이라며 어떻게 여기 고사리 넣을 생각을 했냐며, 엄지 척 처묵처묵 해주실 때. 만족감이 열 배였다. 또 뭐 갑자기 닭다리살에 소금 후추 등으로 최소 양념을 해서 파와 함께 구웠는데, 이거 당신이 양념한 거냐, 양념된 걸 산 거.. 2024. 6. 19. 수도원순례11_목사에게 임한 '하느님'의 은총 로마를,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이다. 호텔 창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별다르지 않은, 아무럴 것 없는 풍경이었는데 뭐가 아쉽지? 로마 이틀은 마음의 순례로 치면 일주일이나 보름은 되는 시간이었다. 몬테카시노와 수비아꼬의 설레는 첫 만남 후 찾아온 혼란의 시간이었다. 나는 왜 어쩌다, 왜 이 수도원 순례단원이 되었을까 물어야 했다. 왜 굳이 남편과 함께 왔어야 했나 묻고, 무엇을 기대하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점검해야 했다. 포장지 없는 말이 필요했던 것 같다. 배려하느라 눌러두었던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미안함, 두려움 같은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려놓은 수도원 순례의 그림이 있었고, 늘 그렇듯 미리 그린 그림대로 되는 여행은 없으니까. 순례를 기다리던 몇 개월 동안.. 2024. 6. 11. 당신을 향한 축복 오늘 아침 연구소 카페에서 드리는 '읽는 기도'를 옮겨 놓는다. 당신을 위해 이렇게 축복하고 싶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담임 목회자로 부임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하나님 사랑하시는 자녀'라고 축복할 기회가 있었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기도회를 시작하기 직전에 공동체 식구인 재닛이 내게 말했다. "헨리, 제게 축복해 주실래요?"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에 성호를 그으며 그녀의 부탁에 약간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아니요, 그건 효과 없어요. 진짜 축복을 받고 싶어요!" 재닛이 말했다. 내 반응이 적절치 못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고 재닛에게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모두 함께 모이는 기도 시간에 진짜 축복을 해 들릴게요." 재닛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2024. 6. 9. 수도원순례10_Pax Romana, 그 어떤 시작 대학 친구들 중 가장 늦게 결혼했다. 남편과 만나며 결혼을 생각하던 즈음 친구들을 만났다. 육아 전쟁 중인 친구집 거실이 내 연애 얘기로 흥미진진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여러 질문 끝에 "걔가 어디가 좋냐?" 그 흔한 질문이 나왔고. 나는 어째서인지 그런 답을 했다. "가난하게 살고 싶대. 가난하게 사는 게 꿈 이래." 돌아올 반응을 예상치 않았던 건 아닌데, 아직까지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표현으로 치면 "결혼은 현실이다... "처럼 우리 엄마나 이모가 하는 걱정과 다르지 않았지만, 뭔가 다른 단절감, 깊은 외로움 같은 것이 남아 있다. 결혼도 모르고 현실도 모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상 너머의 이상이었다.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 2024. 6. 6. 이모 안녕, 곧 만나요! 막내 이모가 돌아가셨다. 막내 이모와 우리 엄마 아픔도 슬픔도 없는 천국에서 자유와 사랑으로 만나셨을까? 엄마 생신 사진마다 이모가 있다. 언니 생신이라고 시골에서 온갖 것을 다 바리바리 싸서 등에 지고 올라오셨었다. 김종필이란 이름 때문에, 아니 언니가 사랑하는 사위라서 남편을 참 좋아하고 예뻐하셨다. 우리 이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헤쳐온 인생, 우리 예수님께서 수고했다 애썼다 따뜻하게 안아주실 것이다. 장례식에 가서 사촌 언니들을 만났다. 큰 이모 큰딸 금순이 언니가 큰 이모와 똑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 큰 이모 오신 줄 알았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언니들은 "야, 신실아. 너 이모랑 똑같다. 한산이모 오신 줄 알았다." 했다. 한 세대가 떠나시고, 떠나신 그 자리에 우리가 앉.. 2024. 6. 6. 단호박열무국수 생애 처음 안식월을 보낸 남편의 복귀 첫 출근 날이다. 안식 후 첫날(부활하신 예수님...) 점심은 단호박열무국수를 해서 감동적으로 맛있게 먹었다. 안타깝게도 안식 후 첫날을 맞은 남편은 당연히 집에 없으니 채윤이와 둘이서 먹었다. 안식월 마지막 날인 어제 그는 혼자 홀연히 나갔다. 요셉수도원에 가서 낮기도에 참여하고는 수제 소시지를 사 왔다. 단호박열무국수에 소시지를 곁들였다. 그의 복귀 출근을 애도... 아니 응원하며 둘이 맛있게 먹었다. (단호박열무김치, 최곱니다! 감사합니다!) 2024. 6. 4. 월요일엔 오떡순 월요일 점심은 벽산아파트에 서는 알뜰장 떡볶이 아주머니가 차려주신다. 운동 갔다 오다 들러 "오뎅 떡볶이 순대 일 인분 씩 주세요."라고 하면 "순대 내장은 섞어요?" 한다. "내장 많이 주세요." 하면 '이 사람 배운 사람이네! 순대 먹을 줄 아네!' 하는 표정으로 만족스러워하며 내장을 듬뿍 섞어 주신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한 번씩 MSG 듬뿍 넣은 떡볶이를 먹어줘야 한다. 맛있고 고맙다. 고맙고 좋은 마음에 오늘은 대놓고 사진을 좀 찍어봤다. 2024. 6. 3. 이전 1 ··· 5 6 7 8 9 10 11 ··· 27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