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여 잠시 성북천을 걸었다. 길 오른쪽에는 심긴 꽃들이, 왼쪽에는 자라난 꽃들이 피어있다. 산책길을 화려하게 하며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개종된 품종의 작은 장미이지만 나는 왼쪽이다. 오늘은 이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할 수 있었다. 콩다닥냉이. 어쩌면 이렇게 이름도 귀여운 것이냐. 길에서 꽃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모든 들꽃과 눈을 맞출 수 있다. 꽃마리는 들꽃 중에 아주 작은 들꽃이기 때문이다.
내게 꽃마리를 발견하는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은 '꽃마리'이다. 꽃마리라는 별칭을 쓰는 나음터 벗 순연 샘이다. 어느 날 홀연히 내적 여정에 나타나 꾸미지 않고 자기를 보여주더니, 글쓰기 여정을 두 번 반복해서 듣더니, 꿈여정까지 깊이 들어왔다. 평생 "그러니까 너도 써라, 그러니까 당신도 써라"를 주문처럼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쓴다. 어떤 사람만 쓴다. 꽃마리는 쓰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멈추지 않고 손에 모터를 단 듯 써 내려가는 글은 길이 되었다. 꿈을 꾸고, 꿈을 적고, 꿈을 나누고, 다시 글을 쓰고... 기도하고, 향심기도 하고... 기도로 깨달은 바를 실행하고... 그렇게 글이 낸 길을 따라가다 아버지를 만나 화해하고, 화해한 상태로 천국에 보내드린 꽃마리의 시간이 내겐 잊을 수 없는 카이로스이다.
이번 텀 꿈여정 끝나면 데이트 신청을 하려 했다는 말에 반가웠다. 글이 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옳고 그른 행동은 없다. 직장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행동일 수도, 그만두는 행동일 수도 있다. 꽃마리가 여차저차 교회를 옮겼다는데, 가만 들어보니 내가 아는 교회이다. "커피, 에니어그램, 향심기도, 이 모든 것을 일상 안에서!" 내가 교회를 한다면 이런 게 어우러질 텐데, 바로 그런 교회였다. 물론 나는 교회를 할 수도 없고, 이런 교회를 꿈꾸지도 않는다. 다만, 있다면 반갑고, 이런 교회 하나 쯤은 있어야지 생각한다. 남편 안식월 찬스를 쓰는 중이니, 어느 교회나 갈 수 있다. 주일에 꽃마리와 만나 데이트를 하고 데이트의 끝은 예배로 하기로 정했다.
교회 옮긴 이야기를 들려주며 "나리(순연 샘이 꽃마리일 때 나는 나리이다.) 를 통해 여성적 리더십을 경험한 이후에 설교나 교회의 어떤 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라고 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말이다. <신앙 사춘기> 출간이 남긴 책무감 비슷한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단지 교회를 비판하고, 목사를 혐오하고, 하나님께 대들자는 선동이 아니었는데. 글이 그렇게 소비되는 면이 있었다. 사춘기는 필요하다, 사춘기를 통과하며 어른이 된다, 신앙 여정에서 열정이 식을 때도 있고 삐뚤어지는 마음이 될 때도 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때 삐딱함은 믿음 없음도 아니고... 무엇보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교회를 비판하고 목회자를 혐오하며 평생 신앙 사춘기로 살기로 작정한 이들에게 괜한 무기를 공급한 것은 아닌지 싶을 때가 있다.
꽃마리와 함께 예배 드리며 "여기는 꽃마리를 위한 교회구나!" 싶었다. 안심이 되었다. 단지 교회가 꽃마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 같아서가 아니다. 꽃마리의 마음에 이미 어떤 교회가 잘 세워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 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고 알아듣는 사람이 꽃마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만 알까? 꽃마리 자신이 알아야 하는데... 자신이 걸어온 길, 여태껏 해왔던 선택들이 선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아름답다는 것을 믿어줘야 하는데... 또 한 번의 자기 다운 삶을 위해 떠나고 안착할 8월의 꽃마리를 응원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예배 중 여러 번 떼제 찬양을 불렀다. 떼제 찬양 좋아하는데, 마지막에 부른 찬송가 221장에 받은 은혜가 크다. 구절구절이 마음에 박혀 눈물이 났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다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 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 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다시 만나리
꽃마리와 함께 보낸 주일 한 나절의 식사와 커피, 예배가 천국의 교제 같은 참 좋은 친교였다. 믿음과 소망, 교회와 공동체가 일치하는 '하나'인 시간이었다. 체험의 교회였다. 반짝 빛나는 체험의 교회가 우리 사이에 세워졌었다. 마지막 절을 부르는데 더욱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이별은 참 슬프지. 오늘 우리가 체험한 이 교회는 다시 카피할 수는 없지. 각자의 교회를 잘 살기를. 교회가 내게 주는 것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께서 주시는 힘으로 때로 교회보다 큰 존재로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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