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물드는 시간> 에필로그는 "인생 후반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진짜 여행이고 여행지는 네팔이다. 독자들은 어쩌면 지나칠 이야기이겠으나, 가장 무게가 실린 내용은 이것이다. 네팔에서 지낼 1년 동안 머리 염색을 끊겠다는 결심이다. 30대부터 흰머리인지 새치가 나서 일찍이 뿌리염색을 시작했다. 그전까지 말총머리로 굵고 검고 빛나는 머리칼이었는데... 한두 달에 한 번 하는 염색을 건강한 모발이 견디지를 못했다. 언젠가 염색을 끊으려 했는데 현승이가 성인 될 때까지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했는데, 성인이 되었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꾸역꾸역 하고 있다. 
 
이래저래 시기를 놓쳤더니 뿌리 쪽이 또 하얗다. 동네 두피관리 샵 같은 게 생겼는데 "뿌리염색 25,000원"이라고 쓰여 있다. 가격도 좋고, 집 앞이니 산책 나가는 길에 예약을 하려고 들어가 보았다. 예약은 무슨 예약, 바로 지금 할 수 있다고 한다. 할 때가 한참 지났으니 이게 웬 횡재냐, 덥석 앉았다. 열심히 할 일을 하는 주인장에게는 미안한데 한 시간 반 정도 앉아 염색하는 동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신상 캐기와 영업, 영업과 신상 캐기를 오가는 대화에 온갖 기를 다 빨리고 나왔다.
 
왜 이렇게 되도록 염색을 안 한 건지, 그러다 바빴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신상을 물어가며 조여 들어오는 대화. (직업을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게 어렵다. 심리치료사, 연구소 소장, 작가, 강사... 뭐라 소개해도 깔끔하게 끝나는 법이 없다.) 손톱 관리를 좀 해드릴까, 두피 케어는 이래서 좋다, 심지어 동충하초 술을 한 잔 마셔보겠느냐, 동충하초 술과 함께 두피 관리를 받으면 머리숱이 이렇게 많아진다, 동충하초가 몸에 이렇게 좋다, 비싼데 병원비 내는 것보다 낫다...  칼같이 자르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듣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친절함으로 에너지를 다 탈렸다.
 
배가 고프고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고... 뭔가 먹어야 하는데 집에 당장 먹을 것이 없다. 애들 뭘 먹일지는 생각도 안 나는데 다행히 현승이는 냉동실 고기 꺼내어 굽고 있고, 채윤이는 밥 생각이 없단다. 냉장고에 있는 건 야채... 샐러드만 먹을 수는 없는데... 탄수화물이 필요한데! 몸이 빠르게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파스타 면을 삶아서 파스타 샐러드를 만들었다. 정말 나를 위해서, 나만 위해서 만들었다. 생각 없다던 채윤이가 달라붙어 먹기에 포크질에 신경질을 담았더니 조금 먹다 나가떨어졌다.
 
좋아서 하는 요리,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요리하는 행복도 찾아야겠다. 평생 요리해 놓고 "맛있어? 맛있어? 맛이 어때?" 반응과 피드백, 인정과 칭찬에 울고 웃는다. 좋아서 해놓고 내 방식의 반응을 강요한다. 이거 신혼 때 벌써 깨달았던 건데... 나는 남편을 위해 하는 요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요리는 당신이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라고 천진한 T가 천진난폭하게 현타를 날렸었는데 말이다. 아, 사랑은 주는 사람이 정의하는 게 아니야. 받는 사람이 사랑으로 받아야 사랑이야! 이때 이후로, 이 큰 깨달음으로 강의에서 우려먹고 있지 않은가.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배려를 선제적으로 투하하고 피해의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F짓은 (다시) 좀 자제하자.
 
좋아서 하는 요리를 나를 위해서 했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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