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0

 


 

아무렇지 않았던 여자(남자)의 신상이 갑자기 궁금해졌다면 내 쪽에서 막 켜지기 시작한 그린라이트인 경우가 많다. 알고 싶어 하는 것, 더욱 자세한 내용이 듣고 싶다고 몸을 바짝 기울이는 것은 호감의 표현이다. “너에 대해 알고 싶어.” 이것은 사랑의 그린라이트이다. 알고 싶고, 더 잘 듣고 싶어 다가가게 되는 것, 혼자 있을 때도 어느 새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린라이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면 알았어. 알겠다고!”하는 말은 그에 반하는 뉘앙스이다. 대화나 관계의 단절을 알리는 사인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는 궁금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엔 가능성이 느껴지나 네가 말하는 거 다 알겠어.’라며 쌩 돌아선 사람은 다시 와 내 말에 귀 기울일 것 같지가 않다. 오래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여전히 너를 모르겠어. 네 얘기를 들려줘.’ 신비로 남겨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확실히 알겠어!’ 이 얼마나 교만에 찬 위험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시작하는 찬송가 310장은 강렬한 메타포를 가진 찬송 중 하나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뜨겁게 불러 본 기억 있을 법한 찬송이다. ‘은혜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을 인간의 경험이란 없으니 말이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한 소절 신파조로 부르고 이어지는 후렴의 음악적 반전이 유발하는 감정의 폭발과 감동도 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의 멜로디는 점핑판을 딛고 솟아오르듯 높이, 멀리, 확신 있게 튀어 오른다. 주먹을 꽉 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를 수밖에. 그리고 마지막은 한 옥타브 높은 종결음이다. ‘나는 화~악 씰히~ 아 네에에에에!’ 이것은 아멘을 남발하지 않을 수 없는 피날레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주일 예배에서 이 찬송을 부르던 중, 나는 (박차고 나오는) 후렴이 아니라 그 바로 앞의 가사, 그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송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난 알 수 없도다.’가 좋겠다. 단지 멜로디 진행의 기술로 감정이 불러일으켜진 것이 아니다.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시시때때 성령의 감동으로 나를 만지시지만, 느낄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음. 조금은 알 것 같지도 하지만 온전히 알 수는 없음. 더 명확하게 알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의 고백이 확실히 아는믿음의 진정한 시작이다. [난 알 수 없도다 - 나는 확실히 아네] 이 급진적인 도약의 점핑판은 알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기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소망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간절히 찾을수록 그분의 부재가 더욱 크게 다가올 뿐이어서 당혹스러운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예수님 당신 스스로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6:6, 새번역)이라 칭하셨으니 그분은 인간 앞에 부재로 현존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주님, 나는 당신에 대해 오직 모를 뿐입니다!) 불가지(不可知)의 실존을 겸허히 인정하고 얻는 신적인 확신, 이것이 은혜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우리 국토 구석구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일깨운 책이 있다. 그 책 서문에 나온 문화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책을 읽고 가 본 변산의 내소사에서는 보이는 것이 많아 감동이었다. 반면 우리는 아는 만큼 무시한다. 문화재를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감동받을 수도 있지만, 아는 만큼만 보고 보이는 만큼만 가지고 경멸을 할 수도 있다. 역시 안다는 것, 아니 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랑과 성장으로 가는 문을 닫는 일이다. 문화재도, 사랑하는 너도, 심지어 나 자신도, 신앙에 관해서도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여전히 다가가고 귀를 기울이며 숙고하는 것이다.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며 무엇을 확실하게 안다고 하는 이들을 경계할 일이다. 내가 기도해보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확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인간은 모를 뿐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는 날이 많지만 술래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숨은 곳을 다 알고 계신다. 우리가 그것만은 화악~씰히 안다!




* 월간 [빛과 소금]  7월호, '하지 못한 말, 미안해'라는 꼭지에 쓴 글입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마치고 맞은 겨울방학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친구가 집에서 축하모임을 한다고 초대를 해왔다. 교회 동기들이었고 예닐곱 명의 남자아이들과 함께 나는 유일한 여자였다. 시험 결과야 어떻든 자유로움으로 붕붕 뜬 시간을 보내는 중에 한바탕 놀 기회라니. 신나게 달려갔을 것이다. 친구 어머니께서 떡 벌어지게 차려 내놓으셨다. 기분 좋게 떠들며 식사를 하려던 찰나, 상 밑에서였는지 아니면 밖에서였는지 맥주병과 잔이 함께 들어왔다.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이미 주()를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깽판을 치고 나온 것이다. 센 여자 하나에 착한 남자 친구들이 모인 집단이라 당시 내 별명은 꼬맹이였으나 영향력이 작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밥맛, 술맛, 놀맛이 싹 다 떨어졌을 것이다. 다시 떠올리기도 부끄러운 바리새인 같은 짓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다른 친구도 아니고 교회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더 큰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당시 회심이 필요한 모태 바리새인이었다.

 

입장 바꿔 누군가 내가 한 그 짓을 했으며, 나는 그 엉망이 된 자리에 남겨졌었다면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겨진 친구들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고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이후 다시 문제 삼지 않았다. 여전히 만나면 찧고 까불며 오랜 시간 좋은 친구로 지냈다. 실은 이런 진상 바리새인 짓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름 수련회 가면 숙소 뒤편 으슥한 곳에 숨어 담배 피우는 친구들을 잡아 전도사님께 고발했다. 바리새인에 어용 경찰(‘짭새라 부르는 게 제격)이었다. 한 번은 수련회 기간 중 식사시간이었는데 친구 녀석들이 보이질 않았다. 악랄한 경찰관으로서 느껴지는 촉이 있어서 수련회 장소였던 교회를 빠져나와 가게들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어느 식당에 모여 닭볶음탕을 시켜놓고는 희희낙락하고 있는 친구들을 현장범으로 체포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한 마디에 착한 친구들은 보글보글 끓는 닭볶음탕을 입에 넣어보지도 못하고 줄줄이 수련회장으로 연행되었다. 이런 짓을 했다. 친구들아 미안했어, 라고 말하고 싶어 글을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그것이 아니다. 당시 믿음은 내가 일등이지.’ 하는 우월감으로 살았지만 인간적으로 더 성숙한 쪽은 오히려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아, 그때의 나를 받아줘서 고마워, 못 이기는 척 당해줘서 고마워.

 

바리새인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교회의 청년부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주일, 청년부 모임 후 장애인 시설 봉사를 마친 후였다. 선배 한 사람이 주도하고 몇 사람이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우르르 치킨 집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자연스레 치맥타임이 되었다. 걸걸한 여대에 다녔고 직장생활도 하면서 술과 술자리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때였다. 그럼에도 고3 겨울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불편함으로 마음이 일렁거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편하게 마실 일이지 굳이 교회 사람들과 술을 마셔야 하나?’부터 시작해서 믿음이 연약한 후배들이 시험 들면 어쩌려고까지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결코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도 아주 잘했다. 문제는 돌아와서, 그 이후 마음에 쌓았다 부수고 쌓았다 부순 정죄의 모래성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향해 보이지 않는 집게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차라리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했던 폭력적 태도가 솔직하여 순수한 듯. 얼굴을 마주하고 한 마디 비난의 말을 한 적 없지만 마음이 한 짓은 어마어마하다. 겉으로는 큰 갈등 없이 그 시절을 지냈다.

 

나이를 먹었고 나도 이제 중년이다. 인생의 정오를 지나 오후로 접어든 어느 시점,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신앙하며 살아온 모든 나날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에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긴 터널의 끝에서 내가 다시 보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율법의 우산 속을 더 안전하게 느끼며 살아온 바리새인, 내가 보였다. 아픈 깨달음과 함께 두 번째 회심의 순간이었다. 그즈음 문득 청년 시절 치킨 집에 함께 둘러앉았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주도했던 선배, ‘가끔 이렇게 알코올로 내장 소독을 한 번씩 해 줘야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애썼던 후배, 그리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조목조목 따졌던 내 마음의 소리가 부끄럽고 아프게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어떤 배역으로 등장했는지 상상도 못하겠지만 이렇듯 기회가 주어졌으니 미안했어요.’ 속으로 말해본다.

 

자신을 일컬어 부랑아라 했던, 그리하여 부랑아 복음을 설파했던 브레넌 매닝은 바리새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자신에게 아무 결함도 없다는 믿음이 그의 결함이다. 그는 남을 경멸한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자기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의에 빠져 불의하게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다.’ 과연 그 시절 나는 내가 옳다, 나만 옳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주일에 며칠 씩 교회 가서 청년부, 주일학교, 성가대 등에 남다른 봉사하며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 등 근거 충만한 자부심이었다. 말 그대로 나의 의에 빠져 죄책감 없이 누구든 정죄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 미안해해야 할 대상은 어린 날의 나, 젊은 날의 나 자신인지 모르겠다. 종교적 우월감으로 자아에 도취해 있는 동안 가장 외롭고 불행한 것은 나였으니까 말이다. 대입 시험 마치고 가장 홀가분한 시절, 신나게 먹고 놀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박차고 나와 씩씩대며 걷는 어린 나를 상상해본다. 마음의 법정을 열어 이 사람 저 사람 돌려세우며 기소하고, 선고를 내리던 젊은 날의 나를 떠올려도 그렇다. 정작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율법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내적인 자유라고는 맛보지 못했으니 정작 못할 짓은 나 자신에게 한 것이다. 어쩌다 어린 시절부터 바리새인이 습성이 몸에 딱 붙어 그 누구보다 나를 괴롭게 했다. 친구들과 이웃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켰고 그것은 다시 왜곡된 우월감이 되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우월감은 내면 깊은 곳으로 감추고 겸손한 말투와 태도로 위장하는 방식은 세련되어 간다. 어린 나, 젊은 날의 나, 아니 어제의 나에게 미안하다 말해본다. 아픈 직면과 회심을 통해 다시 그러지 말자 다짐했건만 여전히 입은 줄도 모르게 이미 입고 있는 바리새인의 갑옷이다. 미안할 줄 알면 다시 하지 말아야지! 나 자신에게, 나의 이웃에게 미안할 짓 하지 않는 오늘을 사는 것, 나의 기도는 이것이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9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짧고 굵은 사랑에의 항변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주인공 상우(유지태)의 대사지만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 되뇌어본 말이기에 명대사의 목록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휴대폰 광고 속 대사도 떠오른다.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지고지순한 태도, 사랑은 움직이고 변하는 거야, 솔직 당당하게 인정하는 태도. 어쩐 일인지 둘 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 간절하게 믿고 싶은 것은 결국 변하고 말 것임을 알기에 두려움으로 붙드는 썩은 동아줄인 지도 모른다. 바람기, 변심, 고무신 거꾸로 신기. 같은 연애 사담을 나누고자함은 아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뿐이다, 설교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찬송의 이 가사가 자꾸 입에 맴도는 탓이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미국의 낭만파 시인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시를 쓰고 가르치는 일을 노년이 되기까지 열정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 비결을 묻는 말에 정원 한 구석의 고목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고. “죽은 듯 보이는 저 나무가 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네. 그 이유는 저 나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살아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장해야 할 것 아닌가.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뜨겁게 고백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어느 뜨거운 수련회 마지막 밤이었던가? 오랜 기도가 응답되어 기쁨의 눈물과 함께 흘린 말이던가. 언젠가 신앙생활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데, 공동체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시간을 내는 것도, 주머니 털어 밥을 사고 선물을 챙겨주며 내 배가 부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다 모든 것이 맹숭맹숭해진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을 하긴 하는 건가? ‘주님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영혼 없는 고백은 찬양시간의 립싱크로만 남은 것인가? 기도, 선교, 봉사, 예배에 뜨거운 주변 친구들이 생소하기만 하다. 사랑이 식었어. 사랑이 어떻게 변하지?

 

성장하는 사랑은 변한다. 성장이라고 하니까 마냥 커지는 느낌이지만 마음의 성장, 사랑의 성장은 위가 아니라 깊이이고 넓이이다. 통장의 잔고가 눈에 띄게 많아지는 것처럼 온갖 긍정이 보란 듯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 연애할 때 설렘의 무한충전으로 부풀어 오르던 행복함, 영화관에서 팝콘 봉투에서 손끝만 닿아도 온몸을 압도하는 찌릿하던 전율이 무한대로 커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조금 아쉽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련하긴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을 뿐임을 안다. ‘,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네,’ 실망하고, 차이로 인해 아픈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더 섬세하게 이해하게 되면서 사랑은 깊어진다.

 

그러니까 시인 롱펠로우의 나무처럼 죽은 듯 보이는 관계 속에서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면 다시 꽃이 피고, 작년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이다. 그러니까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던 뜨거움이 사라지고, 예배를 향한 열정은 잃은 지 오래, ‘교회 안 나가를 고민하다 가나안 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 자체가 소멸하여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단단한 사랑을 위해 메마른 겨울바람을 맞고 서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무성한 잎을 내고 열매를 맺던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는 시간일지 모른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어요. 이런 기도 하나 빨리 안 들어주시고. 제가 큰 걸 바란 것도 아닌데......’ 하는 순간에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아니, 살아 있는 한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 년 전에 서른 셋 젊은 싱그러운 나무 같은 몸에서 암이 발견되어 긴 시간 투병하고, 나아지고, 희망하고, 절망하다 하나님 곁으로 간 청년이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 동안 내내 가족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이 이곡이었다. 건장한 청년으로 암 선고를 받는 충격의 순간, 고쳐주실 줄 알고 희망하던 순간, 희망이 절망이 되는 순간에도 그의 영혼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노래했었나보다. 어제와 다른 사랑, 어제보다 더 깊어진 사랑의 성장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친구였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1. 2017.08.27 08:38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7.08.29 01:1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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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 한 노래 있어 8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의 창가, 낮은 책꽂이 위에 공들여 키운 화초들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남들 눈에는, 심지어 식구들에게도 그렇고 그런 들쑥날쑥 흔한 식물이겠으나 공들여 키우는 제게는 다릅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물을 주고 매만집니다. 사랑을 듬뿍 받는 녀석들이지요. 돌보는 이가 한결같지 못하여 간혹 방치될 때도 있습니다. 일이 많아 바쁘거나 마음이 메말라 화초는 물론 그 무엇도 돌볼 여유가 없는 날이 있지요. 그런 순간엔 돌보지 못한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바쁜 일이 지나고 아팠던 마음이 나아지면 비로소 잎을 축 늘어뜨린 화초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어 싱크대로 가져가 하염없이 샤워를 시켜보지만 끝내 살아나지 못하는 녀석도 있습니다. 회생불가 판정을 내리고 싱크대 안에 둔 채 하룻밤을 자고 났는데 어느 새 살아나 빳빳해진 잎을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부활이구나, 싶어 조용히 쿵쿵 심장이 뜁니다.

 

한결같지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않은 주인인 제게 스파트필름이라는 화초는 딱 마음에 드는 놈입니다. 물 줄 시기가 지나면 바로 어깨, 아니 잎들을 축 늘어뜨립니다. 온몸으로 목마름을 표현하지요. 주인의 일상과 마음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도 물 달라, 제발 물을 달라온몸으로 시위하는 녀석을 외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얼른 물을 떠다 바치며 흐릿해진 마음의 줄을 다잡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지요. 그래, 목마르다고 말을 해야지! 표현을 해야 알지! 꾹꾹 참고 아무 내색 안 하다 갑자기 시들어져 회생하지 못하고 떠나간 초록이들이 야속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화초가 목소리를 가졌다면 스파트필름 같은 녀석들은 주인님, 목마릅니다.’ 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 소리에 손을 움직여 물 한 바가지를 먼저 부어줍니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제 마음에 단비를,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소서.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먼저 갈증을 느낄 수 있어야 말이든 기도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목이 마른지, 배가 고픈지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요구하고 표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목마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능력은 목마름을 느끼는 살아 있는 감각입니다. ‘내가 목이 마르다자기 영혼의 메마름을 감지할 수 있다면요.

 

빈들의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찬송을 시작하는 첫 구절, 이 한 구절에 저는 마음을 빼앗깁니다. 오랜 가뭄에 쩍쩍 갈라진 빈들의 땅, 말라 시들어가는 위태한 풀 한 포기 같은 영혼의 상태를 간파해내는 작사자의 감각 말입니다. 우울해, 사는 게 재미가 없어, 꿀꿀해, 사람이 다 싫어, 공동체가 무슨 필요야,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나..... 툭 내뱉어진 나의 말에서 시들은 나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면요. 우울하고 외롭고 화가 나는 지금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지는 않겠지만 ,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성령의 단비로구나!’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 오래 방치된 탓에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지만, 회생 불가의 메마름이 아님을 알고 소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퍼뜩 일어서진 않겠으나 하룻밤 이틀 밤 지나며 다시 살아나 생명과 맞닿을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언약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사랑의 언약 어길 수 있사오랴

오늘에 흡족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기실 실낙원 이후의 인간은 늘 목마른 존재입니다. 연결되어 있어야할 그 무엇, 생명의 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무의식적인 결핍감은 아무 것이나 들이키게 하고 빠져들게 합니다. 애정이든, 알코올이든, 하다못해 스마트폰의 화면이든 무엇에든 사로잡혀 있고 싶게 만듭니다. 그렇게 갖고 싶던 것을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식상해지고,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도 불안하고 금세 공허해지는 이유. 무언가 더 좋은 것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입니다. 결국 애초 단절되었던 그 관계, 사랑이신 분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우리의 목마름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보며 내 영혼이 노래합니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7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미덕이긴 하지만 그러다 생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안타까운 일이지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고백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할까 말까 생각만하다 상대에게 청첩장 받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상상만 해도 아쉬움의 산사태가 밀려오는 사태네요. 좋은 생각은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 이럴까요, 저럴까요? 묻고 기도합니다. 꿈에라도 주님께서 나타나서 이래라, 저래라응답 주시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기도하고 난 어느 시점에서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숙고하고 기도하되 반드시 어느 시점, 생각의 언덕을 떠나 체험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나는 젖지 않겠다, 작심을 하고 바다에 첨벙 뛰어들어 노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 정경, 서로를 빠트리고 도망가고 파도를 타며 노는 친구들. 바라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몸을 하고 친구 여러 명이 내게 몰려옵니다. ‘갈아입을 옷 없어, 나는 빠트리지 마물에 빠지지 않으려 도망 다니다 결국은 잡혀 빠지고 맙니다. 에라, 이미 버린 몸! 하고 깊은 곳으로 헤엄쳐 나가고, 친구 목을 껴안고 물을 먹이고, 그러다 나도 짠물을 들이키고. 이것이 살아있는 체험입니다. 물가에서 앉아 바라보는 것과 차원이 다른 체험이지요.

 

왜 너 인생을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상념에 젖어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바닷물에 젖는 것이 참다운 체험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헌데 오늘 찬송은 은혜의 바다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그 바다가 바로 그 바다라고 할 때. 고통의 바다인 인생은 동시에 은혜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은혜의 체험은 다름 아닌 고통과 두려움의 한 가운데라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에게 청첩장 받는 그 순간까지 대시할까, 말까 물가에 앉아 모래성만 쌓았다 부수고 쌓았다 부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절당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고 있지요. 연애든 진로든 하다못해 오늘은 뭐하지? 일상의 작은 선택이든 풍덩 뛰어들어봐야겠습니다. 고통의 바다임을 알기에 두렵지만, 바로 그 고통 속에 뛰어들어봐야 비로소 은혜의 바다를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의 모래를 털고 출항합시다. 지금, 바로 지금 갑시다.

 

거절당할 수도 있지, 반반의 확률이니 고백하자. 그리고 결과는 감수하는 거야!

100% 흡족한 조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일단 시작해보자!

내가 공부했던 부분이니 맡아보자, 몰랐던 부분이 드러난다고 내가 바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내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자. 반대의견이 있지만 어쩌겠나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면 감수할 밖에!


  1. 2017.06.25 14:42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7.06.26 00:50 신고

      내가 딱 기도해보니까 부릉부릉 움직이는 시동 걸고 있드라구! ㅎㅎㅎ
      명단에서 이름 보고 반가웠어요. 곧 봐요!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6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Come home, Come home.

  


집밥의 맛을 아는 사람은 집을 떠나본 사람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출퇴근용 떠남일 수도 있다. 바쁜 일정으로 끼니를 거르거나 계속 매식을 해야 할 때 집에서 밥 먹은 지가 언젠지하며 집밥 생각이 난다. 긴 시간 집을 떠날 수도 있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 기숙사나 자취 생활을 시작하며 자주 독립 만세! 룰루랄라!’ 하겠지만 독립 시작, 집밥 그리움도 시작이다. 해외에 혼자 나가 있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이 더욱 간절한 집바. 집밥에 대한 그리움은 원초적인 감각인 식욕으로 대변되는 존재의 깊은 곳의 그리움이 아닐까.

 

긴 겨울이 끝난 건가, 날이 좀 따뜻하네, 싶으면 어느 새 목련 꽃봉오리가 촛대처럼 올라와 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촛대 끝이 벌어져 있고, 그러기 시작하면 대기표 받고 있던 봄꽃이 일제히 피어나기 시작한다. 생명력 가득한 이 짧은 나날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막 피어나기 시작한 개나리의 연호를 받으며 길을 걷고 있었다. 부담 되던 강의와 원고가 끝나 마음은 여유롭고 밀린 잠을 몰아서 잔 덕에 몸은 한껏 가벼웠다. 모처럼 안팎이 모두 평안한 순간이다. 만개 직전의 노란 개나리 길이 예뻐도 너무 예쁘다고 느낀 순간, 가슴 저릿하면 내 속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집에 가고 싶어요. 주님이게 무슨 소리? 집으로 가고 있는 길인데 말이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옛집이 그리운 탓이었을까? 아니다. 옛집이 아니다. 그저, 바로 그 집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다양한 층위의 갈망이 있다. 그 갈망이 우리를 어딘가로 이끌어 간다. 심리영성가들은 그 갈망을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욕구로 구분하곤 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사랑하는 사람과 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싶은 것은 신체적 욕구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좋은 관계를 맺으며 정서적인 충족감을 갈망하는 심리적 욕구도 있다. 그것이 다는 아니다. 몸도 마음도 다 편한데 뭔가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보다 진실한 것, 보다 깊은 관계에 대한 갈망. 이것은 단지 심리적 욕구 그 이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존재, 영적인 존재로서의 목마름이다. ‘주님, 집에 가고 싶어요.’ 부족할 것 없는 순간에 밀려오는 그리움, 고독감, 공허감은 나를 영적 목마름으로 이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찬송 가사의 죄 있는 자란 회심하기 전, 예수님을 알기 전 사람들만이 아닐 것이다. 매일 매 순간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는 나, 사랑받기를 거부하는 죄인인 나를 부르시는 음성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꽃길을 걷다 한숨처럼 밀려 나온 주님, 집에 가고 싶어요.’오라, 오라하시는 내 안에서 여전히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한 내 영혼의 답가일지 모르겠다. 흔히 영성을 정의하기를 인간 마음속의 진실한 갈망, 즉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속의 갈망이 이끄는 영혼의 여정이라고 한다. 집밥은 단지 밥이 아니라 엄마와 가족이 있는 따뜻한 곳인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고픈 목마름은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다. 위 찬송가를 영문 가사로 불러보니 후렴의 'home'이 얼마나 큰 따스함으로 다가오는지. Come home, come home. 작은 소리로 여러 번 불러본다.

 

Come home, come home. You who are weary come home.

Earnestly, tenderly Jesus is calling. Calling all sinner, come home

 

집으로 오렴. 내가 여기 있다.” 간절히 오라고 부르시는 음성이 시도 때도 없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건만 피하려고만 하는 우리이다. “예수님, 좀 기다리세요. 자꾸 귀찮게 하지 마시고 주일날 예배 때 만나요. 다음 수련회 저녁 기도회 시간에 만나요. 이 외로움, 분노, 실패감, 지질한 감정들 다 정리 되는대로 당신께 갈게요.” 이러는 대신 3절을 노래하며 바로 지금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 하려나주님이 만나자고 하는 곳과 장소는 죽어서 가는 저 천국만이 아니다. 신변 정리 다 하고, 웬만한 죄는 좀 털어내고, 한 듯 안 한 듯 비비크림 발라 영적인 화장을 마친 후가 아니다. 바로 지금 그분을 만나러 내 마음 깊은 곳 갈망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날이 오랜 후에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두신 영원한 집(4)’에서 두 팔 벌려 영접해주시는 그분과 헤어짐 없는 만남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hj 2017.05.23 05:07

    있다면 좋아요or하트 누르고 싶은 글이에요..


 

말끔하게 잘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 있을 때의 느낌이 있다. 백화점 의류 매장의 마네킹 사이를 걸어 아이쇼핑할 때의 기분도 비슷하다. 날아갈 듯 가벼운 봄 신상 사이에선 그럭저럭 괜찮았던 내 겨울 코트가 한 물 간 듯싶고 둔하게만 느껴진다. 여기저기 일어난 보푸라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비교를 하자면 나와 나를 비교할 수도 있다. 제일 좋은 정장을 차려 입고 결혼식 가는 나와 무릎 나온 운동복 차림으로 라면 사러 가는 나는 내 눈에도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잠시 옷을 바꿔 입어 신분까지 뒤바뀌어버린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이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몸의 자세는 물론 마음의 당당함도 달라진다. ‘왕자와 거지처럼 신분이 달라지기도 하고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다르게 매겨지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삶이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1)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 오신 예수님 참 내 구세주 (후렴)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역설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이 성화에서 보는 번듯하고 빛나는 옷이 아님을 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견디셨도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2절 가사에 힌트가 있다. 십자가 지신 그날의 옷을 상상해본다.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에 흠뻑 젖었고, 다시 마르고 또 젖고 했을 것이다. 땀에 피가 배어 나오도록 고통스럽게 기도하셨다니, 핏자국이 있을 지도 모른다. 빌라도 판결 후에 군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체취로 얼룩진 옷을 벗긴다. 그리고 왕의 옷이랍시고 자색 옷을 입힌 후에 네가 왕이냐조롱을 해댄다. 예수님의 사람 냄새로 얼룩진 옷은 결국 찢겨져 모멸의 천 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그런 예수님의 그 옷이 아름답다고? 내 기쁨이 된다고?

 

내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 열어주실 때나는 이 부분에서 눈물이 터지곤 한다. 그 영광은 몸소 당하신 고난과 수모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 수고로운 생의 끝에서 그분이 열어주시는 문을 통과할 때, 나 역시 영광의 새 옷을 입을까. 부끄러움과 외로움, 끝없는 실패로 누덕누덕 죄 된 옷을 벗어 던지고 천상의 옷을 입을까. 그 소망이 멀고도 가깝고, 아스라하며 또렷하다. 그 영광의 옷 입을 날을 그리며 이 땅을 사는 내 영혼의 누더기 옷을 직시하자니 눈물이 난다. 내가 오늘을 살 듯 역사 속에 들어와 33년을 사신 예수님, 리얼(real) 인간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셨을까. 평생 집 한 칸 없이 번듯한 옷 한 번 입지 못하셨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메마른 땅을 걷고 또 걸으시며 다니시던 그분의 행색은 영락없는 노숙자이었을 터. 하지만 권세 있는 말씀으로 어디서든 군중을 몰고 다니셨다. 예수님에 열광하던 군중은 금세 예수님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침 뱉는 자들이 되었다. 그들이 뱉은 침으로 내 주님 입으신 옷은 마지막까지 오욕으로 얼룩진다.

 

결국 옷의 문제가 아니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는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 신분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지지만 예수님은 무엇을 입어도 예수님이셨다. 땀에 절어 냄새 나는 옷을 입고도 왕이셨고, 모조품 왕의 옷을 입고 조롱당할지라도 하나님 아들이셨다. 명품 옷 입은 사람과 앞에서 추레한 옷 모양새를 셀프 스캔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나와 달리 그분은 당신의 존재로 그 입으신 옷을 영광되게 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사랑받는 자’, 이 한 마디로 이 땅을 사신 예수님을 정체성을 규정한다. 요단강 세례식에 울려 퍼진 하늘 아버지의 목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 이 천한 세상(후렴)’ 오셔서 짓밟히고 버림받아도 결코 손상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모멸과 수치의 옷을 입고도 사랑을 잃지 않는 당당함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랑받는 자, 이미 사랑 받는 자! 반대로 입은 옷에 스스로 규정당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존재의 가치가 오르락내리락 하여 흔들리는 나는 사랑받는 자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불신앙이다.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보았(3)’으니 나도 그리 살자. 몸에 걸친 옷, 사람들의 시선,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 사랑받는 자의 중심, 아름다운 중심으로 살자.


  1. BlogIcon larinari 2017.04.24 22:45 신고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유형을 '거짓자아' 또는 '성격의 페르소나'라고 부릅니다. 의도를 가지고 속인다는 뜻의 '거짓'이 아닙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며,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의미이지요. 흔히 페르소나를 '옷'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상황에 맞게 갈아입을 수 있어야만 '옷'입니다. 옷, 또는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는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선생님이면 학생들 앞에서나 선생님이고, 목사님이면 교우들 앞에서 목사님 입니다. 직함이나 역할은 '나'가 아닙니다. 인간 예수님의 페르소나는 어떠했을까요? 인간 예수님의 정체성의 근거 말이지요. 그 의미를 담아 썼습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4

 



교회 울타리 안에서 공식 비공식적인 상담한지 오래다. 그 사이 내 귀에 깔때기하나가 생겼다. ‘사모님, 공동체가 뭐죠? / 저 올해 리더 그만 둘래요. /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이 뭐죠? / 사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가 너무 약한 것 같아요.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로 가야겠어요.’ 여러 정황 속에 나온 말이지만 대부분 사랑받고 싶어요의 다른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시쳇말로 관종이라고 한다. 관심이 필요한 종자들이라는데 실은 우리 모두 관종 아닌가. SNS에 사진 올리고, 일기인 듯 일기 아닌 일기를 올리는 이유도, 심지어 갑자기 프로필 사진을 제거하는 이유조차도 나 좀 봐 주세요일 터. 단지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선한 관심 즉, 사랑을 보여 달라는 뜻이니 SNS 타임라인에 울려대는 알림은 그저 이 노래의 가사 자체일 듯하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네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 하도다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찬송가 503세상 모두 사랑 없어’. 교회에서 흔히 불리는 찬송이 아니다. 곡의 길이나 특유의 늘어지는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지 싶다. 이렇게 적나라한 가사는 불편하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노래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것은 나도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로 시작하는 가사는 내 깔때기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세상이 너무 추워. 나는 사랑이 필요해!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불편하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적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무력함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에두르는 방식으로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괜히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토라지거나, 일의 성공에 목숨을 걸거나, 방어막을 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거나. 이 대목에서 다른 찬양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나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그들를 대입했다가 다시 한 발 물러나 그들을 그들로 부르기를 반복한다. 주님, 아니 사랑이 필요한 그들을 온전히 타자로 세울 수는 없는 탓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사랑이 필요한 존재이며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채워줘야 하는 딜레마에 놓이는 것이다. 내 코가 석자인 주제에, 누구 못지않은 관종인 주제에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오늘의 찬송이 등을 떠민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 하겠네

저들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쥐어 짜내서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리는 비에 장독대 뚜껑을 열어두면 빗물이 가득차고, 가득 찬 후에는 흘러넘친다. 흘러넘치는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랍시고 쥐어짜 내주고 난 후에는 내가 너에게 해준 게 얼만데본전 생각나기 십상이다. 우리 영혼은 장독대 같은 빈 그릇일지 모른다. 장독대가 스스로 자신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생성해낼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가페라 불리는 오는 사랑이 가득 채워질 때 흘려보내는 유통자,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부어져 있다. 우리 존재에 이미 부어져 있는 사랑을 믿는 것은 사랑이신 분을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1. HJ 2017.03.29 00:23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만든 에스엔에스에 일상을 기록하는 건 어떤 마음일까요~? 그냥 진심을 털어놓고 싶은 걸까요? 요즘 그러고 있거든요^^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느껴질 때 참 난감해요. 사랑해달라고 마구 떼쓰다가도, 나는 누군가에게 진짜 사랑을 주며 살았나 돌아보면서 겸연쩍어지거든요. 여태 받은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견디기도 하고. 좋은 찬양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당.

    • BlogIcon larinari 2017.04.03 21:19 신고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 난감해 하지 말읍시당! ^^ 내가 누군가에게 진짜 사랑을 줬는지는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대개 '사랑'이라고 힘주어 준 것들이 폭력과 억압인 경우가 많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주었는데 상대에게 사랑으로 가 닿는 것이 있거든요. 사랑받고 싶은 마음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첫 발이 아니겠나 싶어요.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된다고 한다. 삶의 희망을 다 잃고 극단적인 선택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 말이다. 진심어린 경청은 말하는 이를 절망에서 일으키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어차피 답은 없지만 이렇게 털어놓으니 그나마 살 것 같다.’ 언젠가 속으로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고.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런대? 어쩔 수 없는 것 아는데 속상하다고. 그러니까 그냥 좀 들어달라고.” 열폭했던 기억도 있다. 좋은 벗이란, 좋은 선생님이란, 좋은 상담자란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에겐 잘 들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소위 걸어 다니는 고민상담소라 불리는, 상담의 은사가 있다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사함을 너 받으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친구는 누구인가. 부끄럼 없이 나를 다 드러낼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나를 판단하지 않을 것 같은 친구를 그대는 가졌는가. 그런 친구 한 분을 소개하며 만남을 주선하는 찬송이다. 기도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이 찬송에서 기도는 진실한 친구와 의 만남이다. 모든 것을 쏟아놓아도 좋을 진실한 친구, 예수님 말이다. ‘~어룩 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는하나님. 주일 대예배 장로님의 대표기도 속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저 높은 곳에 멀리 계신 하나님, 어쩐지 내겐 어려운 하나님. 내 지질한 얘기는 다 넣어두고 오타 하나 없이 정리된 보고서 들고 찾아뵈어야할 것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친구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이신 하나님 말이다.

 

청년 시절 교회에서 24시간 릴레이 기도회를 한 적이 있다. 중대 사안을 놓고 온 교인이 함께 기도하자는 취지였다. 퇴근 후, 내 담당 시간이 되어 교회 기도실 마룻바닥에 가 앉았다. 릴레이에서 내가 달릴 분량이 한 시간. 준비된 공식 요구사항(기도제목)을 다 읊었는데 시간이 몇 분 지나지 않았다. 개인적인 현안과 기타 등등의 기도를 해봐도 남은 시간이 길다. 앞뒤, 옆으로 슬슬 몸을 흔들며 기도 리듬은 타고 있지만 마음은 천지사방을 헤매는 분심에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삐그덕 기도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삐걱삐걱 천천히 마룻바닥을 걷는 소리. 풀썩 방석이 놓이는 소리가 난다. 그 위로 퍽 하고 짐짝 하나가 패대기쳐지는 둔중한 소리와 느낌이 내 자리까지 전달되어 온다. 그리고 바로 한숨 가득한 한 마디 주님, 너무 힘들어요.’ 그 한 마디의 무게로 기도실 마룻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청년부 후배였다. ‘주님, 너무 힘들어요이 한 마디에 그의 하루, 그의 고민, 마음의 짐이 멀뚱거리던 내게까지 온몸으로 전달되었으니. 주님의 마음은 저 한 마디에 얼마나 무너지셨을까.

 

작심하고 앉은 기도의 자리에서 냉랭한 기운 떨쳐버릴 수 없을 때, 그럴듯한 말로 또박또박 기도할 수 있지만 가슴은 도통 뜨거워지지 않을 때 떠올린다. 기도실 마룻바닥에 쿵하고 떨어지던 그 수고롭던 몸과 영혼의 무게감을. 기도의 자리에서 그분을 마주하는 것은 이렇듯 잔뜩 지고 있던 짐을 일단 내려놓는 일. 그리고는 짐 보따리 안에서 좋은 것, 고운 것 먼저 꺼내 보이며 이미지 관리할 것이 아니라 자루 째로 쏟아놓으라 한다.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감사와 함께 근심 걱정을, 기쁨과 함께 슬픔을, 사랑과 순종의 열매와 함께 단 한 사람 용서할 수 없어 메말라 갈라진 마음을 쏟아 놓으라고 말이다. 기실 정말 좋은 친구 앞에서는 그리 하지 않는가.

 

주 예수를 친구로 삼아 늘 네 곁에 모시어라.

그 영원한 생명샘물에 네 마른 목 축이어라

 

주님, 너무 힘들어요. 당신께 실망했어요. 내 기도 듣고 계신 것 맞아요? 당신이 안 계신 것만 같아요.’ 정직하게 풀어놓고 꺼내놓아 텅 빈 마음의 방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다. 공감의 여왕을 친구로 뒀다 해도 사람 친구가 주는 위로는 금세 다시 목마를 물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물을 가진 유일한 친구가 예수님임을 깨달을 때 기도는 다른 차원이 될 것이다. 이 좋은 만남으로 어느 새 사라진 슬픔은 이웃의 슬픔에 가닿을 것이다. 가만히 내 기도 들어주시는 예수님처럼 이웃의 아픔을 영혼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길지 모르겠다. 이 찬송의 시작과 끝이 다르다. 기도의 공간으로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대신 그분이 주시는 쉽고 가벼운 멍에, 사랑의 짐을 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결국이 아니겠는가.

 

주 예수의 은혜를 입어 네 슬픔이 없어지리

네 이웃을 늘 사랑하여 너 받은 것 거저 주라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이 넘치리라

주 예수를 찾는 이 앞에 참 밝은 빛 비추어라

 


  1. BlogIcon 采Young 2017.02.25 21:34 신고

    속으로 조용히 불러보고 갑니당^^


내 맘에 한 노래 있어2 [QTzine 2017년 2월호]


 

거절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 안 되는 상황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하고 보는 사람들이다. ‘예예해놓은 일 뒷감당 하면서 내가 미쳤지하면서도 말이다. ‘나는 거절을 잘 못해요라고 하는 말 뒤에 그래서 착한 사람이다라는 자의식이 깔려있는 건 아닌지. 요청받는 일이 교회 일일 때는 어떨까? 주님의 일이라면 더더욱 거절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배웠고, 조금 버거워도 십자가 지는 것이 순종의 길이라고 배웠다. 성가대 반주부터 시작해서 구역 특송 연습까지 불려 다니는 반주자가, 청년부 수련회에 단기선교며 성경학교까지 따라다니느라 여름 한 철 다 보낸 성실한 청년이 차마 불평도 못 하게 하는 찬송이 있다.

 

너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차도 주가 즐겁게 하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가라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458)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 그 길을 따르느라 힘들고 지쳐도 결코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 등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찬송 부르다보면 심지어 힘들어 하지도 말아야 할 것 같다. 아침 해같이 빛나는 뽀송뽀송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라니! 불평이나 원망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우연히 지나가다 잠깐,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진 덕에 집안이 복을 받았다는 얘기이다. 타인의 요구, 특히 교회에서 받는 봉사의 요청을 억지 십자가로 져야 할까? ‘억지로 기쁜 것은 과연 기쁜 것인가?

 

인간의 심리학적, 영적 발달에서 가장 성숙한 경지에 이를 때 드러나는 덕이 자발적 자기희생이라고 한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셨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다. 십자가는 바로 자발적 자기희생의 표상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는역설을 푸는 열쇠는 자발성에 있겠다. 착한 이미지가 손상될까봐, 상대가 섭섭해 할까봐, 순종하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두려움에 이끌리는 선택이 아니라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사랑의 선택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진 십자가는 참 기쁜 십자가일 수 있는 것이다.

 

착한 청년들의 노동력과 재능과 시간을 무한정 요구하는 교회, ‘헌신 페이권하는 교회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 시키는 교회(어른)나 시킨다고 다 하는 사람이나 분명 돌아봐야할 지점이다. 그렇다고 날 선 감정으로 내가 왜 해야 하는데요?” 교회에서 시키는 일은 일단 거부하고 보는 것이 주체적인 신앙인의 길도 아닐 것이다. 분명 사랑의 길은 희생의 길이니 말이다. 타의가 아니라 자의의 희생과 순종이 되기까지, 묻고 버티는 힘이 필요하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처럼 말이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실 수는 없나요?’ 땀에서 피가 배어 나오도록 하나님과 독대하여 지낸 밤. 그 지난한 밤을 지난 후 비로소 그러나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향해 자발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선택의 상황에서 불확실한 지점에 머무르는 것, 갈등을 오롯이 견디는 것이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맹목적으로 순종하거나 맹목적으로 거절하는 것이 쉽지 말이다. 나의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타자의 요구를 명확히 하며 그 긴장을 견뎌내는 것은 겟세마네 예수님처럼 고독한 대면이다. 이 시간을 홀로 견뎌내는 사람만이 맹목의 희생이 아니라 자발적 희생의 덕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을 자랑삼거나 방패삼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부담되는 요구를 받을 때 멈추어 보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내가 이것을 하려는 동기는 두려움인가 사랑인가?’ 다시 자문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하나님 앞에서 던질 때 그것은 정직한 기도가 된다. 그 정직한 대면 끝에 지는 짐은 억지로 지는구레네 사람 시몬의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을 따름이다. 그 길에서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지는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신비는 슬픈 이웃에게 절로 흐르는 사랑과 위로의 강물이 될 것이다.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가라

내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1. BlogIcon larinari 2017.01.24 11:00 신고

    이전의 어떤 연재글보다 애정이 가는 글인데요.
    영성적 삶, 일상의 영성을 '찬양'에 담아낼 수 있으니.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요리만 골라 차린 상 같거든요.

    MSG 첨가를 확 줄인 글이라 인기를 얻을 것 같진 않아요.
    모름지기 글이 읽히려면 도발적이거나 선정적인 요소가 들어가줘야 하는데.
    (글을 쓸때마다 안 그런 척 슬쩍슬쩍 첨가하던 재료였습니다. 하하)
    즐독(讀)!


  2. BlogIcon HungrySoul 2017.01.24 11:56 신고

    안녕하세요? 100교회 오하나집사입니다. 친구들로부터 블로그를 소개받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과 묵상 그리고 아낌 없는 나눔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리고, 저는 이 글이 정말 좋아요. 저희 구역의 20대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죠^^

    (얼마 전, 100교회 친구들 모임이 있었는데, 안희정 도지사님을 방송에서 마주칠 때마다 목사님이 떠오른다고... ^^ 새로운 교회에서 새로운 사랑도 응원합니다!)

    • BlogIcon larinari 2017.01.25 16:52 신고

      아, 반갑고 감사합니다!
      물론 공유하셔도 되고요.
      30대 구역장으로 열심히 섬기는 모습 뵀던 것 같은데 이제 20대 청년들을 섬기시는군요.
      요즘 저희 부부가 안희정 도자사님 매력에 푹 빠져 있는데, 그분 닮았다는 말에 남편 어깨가 으쓱으쓱 하고 있답니다. ^^

  3. BlogIcon onyou hisbride 2017.01.29 23:14 신고

    두번째 방문이에요. 작가님..사모님 글을 읽다보면 평상시에 고민했던 여러가지 생각의 조각들을 너무나 잘 맞춰 놓으신 것 같아서정리가 되고..참 좋아요.

    사모님 책과 글들을 읽고 저도 다시 저만의 공간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도전과 유익을 주셔서 참 감사해요! ^^

    • BlogIcon larinari 2017.01.30 18:20 신고

      아, 참 반가운 말씀이네요. ^^
      정직한 쓰기는 기도이며 성찰입니다.
      물개 박수로 응원해드려요.

      공적인 글쓰기와 강의를 하던 초기에 저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저를 괴롭혔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럴 수 없다는 것,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알았지요. 단 한 분이라도 저의 이야기로 사랑과 성장으로 자극받으신다면 그것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고요. 마음의 생긴 모양이 저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셔서 공감되실 것 같아요. 감사할 뿐이에요. ^^


내 맘에 한 노래 있어1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어느덧 주말이 가고 월요일과 맞닿은 주일 밤, 공기가 다르고 마음의 기압 또한 다르다. TV ‘개그 콘서트의 엔딩 음악이 주말의 끝을 알린다. 주일 예배와 에프터까지 마치고 탄 지하철 안은 한산하여 더욱 무거운 공기로 가득. ‘내일은 월요일. 출근! 출근! 알지?’ 일요일이 가고, 월요일이 다가오는 소리의 압박이다. 월요일이 싫은 건지, 주일의 교회 하루가 아깝도록 행복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주일의 위안이라 해두자. 교회생활이라고 마음의 부대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직장에 비하면 천국 아닌가. 오직 의무감으로 해야 하는 일이 산적한 곳, 일의 결과만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직장 말이다. 게다가 교회 사람, 회사 사람이 주는 안도감의 차이란! ‘월요병이란 것이 주말의 여유와 일하는 보통날 사이 분열을 앓는 것이라면 신자들에겐 더 치명적이다. 늦잠이나 드라마 정주행보다는 주님과 함께한 시간이 더 의미 있다 느끼는 우리니까.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442)

 

어릴 적부터 교회 죽순이로 살아온 나로서는 주일 하루, 또는 교회와 관련된 만남은 주님의 동산에 안기는 느낌이다. 아침이슬이 채 마르기 전, 아무도 없는 새벽의 정원에서 내 사랑하는 주님과 데이트. 얼마나 치유적이고 황홀한 시간인가. 성과를 내거나 성과를 입증하기 위해 일일이 보고서 작성할 필요가 없는 곳, 까다로운 고객들과 신경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귀에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그분의 사랑의 음성, 영원과 잇대어진 듯한 사랑의 순간. 우리 모두 이런 동산이 필요하다. 주일 밤에 밀려드는 공허감은 비밀의 화원에서 맛본 천상의 시간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회사가 교회 청년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부서가 청년부 소그룹 같다면, 팀장의 성숙함이 조장 언니와 같다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괜찮다. 월화수목금 시간은 가고, 다시 불금이 오고, 그리고 다시 동산의 시간이 올 테니까. 월화수목금이여, 빨리 가라.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찬양의 3절이 나의 등을 떠민다. 세상이란 괴로운 곳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다시 돌아갈 이유가 된다는 듯. 그렇다. 이 땅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산다는 것은 괴로움을 짊어지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기본설정이다. 그러니 괴로움 없는 곳을 헤맬 것이 아니라 괴론 세상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가야 한다. 동산에서 주님과 보낸 시간이 빛을 발해야 하는 곳은 동산 밖, 연약한 내 영혼이 언제라도 상처입기 딱 좋은 곳, 괴론 세상이다. 주일 예배에서, 수련회의 뜨거운 기도에서 은총을 누렸다면 그 은총을 살아 내야할 시간은 월화수목금토일이다. 일단 괴로운 세상을 괴로운 세상으로 명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시작이다. 온전히 받아들일 때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월요일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그 청아한 주의 음성이 꼭 필요한 곳은 동산이 아닌 세상임을 알게 된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동행, 늘 내 편이 되어 함께 해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굶주린 하이에나의 눈이 번뜩이는 가운데 토끼 한 마리 같은 심정, 밑 빠진 독에 끝없이 물을 길어 붓는 식으로 일하는 콩쥐의 심정, 끙끙거리며 커다란 바위를 굴려 겨우 산 정상에 세우자마자 바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시지프스 왕의 심정일 때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떠올릴 수 있겠는가. 후렴 가사의 동행은 막막한 월요일 출근길을 한 발 내디딜 힘을 준다. 개그 콘서트의 엔딩 음악이 괴론 세상으로의 복귀를 알릴 때 그 청아한 주의 음성또한 이미 내 안에 울리고 있음을 기억하자. 불안과 두려움으로 울어대는 월요병 새소리를 잠잠케 하실 음성을 살려내고 함께 노래하자.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주말, 갈 테면 가라! 월요일 올 테면 오라!




  1. BlogIcon larinari 2016.12.23 00:24 신고

    다른 사람에게 자주 하는 질문을 나에게 해봅니다.
    '가장 나답다고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
    언젠가부터 그렇게 살아오질 않아서 이끼 낀 바위 같은 나다움이지만
    찬양하고 지휘할 때이네요.

    내년부터 <QTzine>에 새로 연재하는 꼭지는 이끼 낀 나다움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라는 간판을 달고 주로 찬송가 한 곡에 마음을 담는 글을 쓰게 됩니다.

  2. 2016.12.26 13:50

    저는 복직한 이후로 월요병이 완전히 싹 없어졌어요~ㅋㅋ
    좀 슬픈 이야기 이지만 월-금은 출근을 하니 주말에 하루종일 애 보는게 쉽지가 않아서 월요일에 출근길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더라고요. 특히 긴 연휴가 끝난 다음 월요일에는 더욱더..ㅋㅋ 근데 요즘 하윤이가 엄마 엄마 하고 이쁘게 엄마를 부르고 같이 힘들지 않게 시간을 보내게 되니 괜시리 어제는 회사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놀아줄수 있을거 같은데..생각이 들면서 코가 시큰해 지더라고요. 계속 반복되겠지요? 미안함과 그만둬? 하는 갈팡질팡이 ㅠ

    • BlogIcon larinari 2016.12.26 23:47 신고

      <토닥토닥 성장일기> 읽어보았느냐? '엄마, 가지 마. 엄마 회사 가지마~~~아!' 통곡 하는 하윤이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날이 진정 갈팡질팡, 눈물 펑펑의 날이지. 아직 오지 않았다. 각오해라. ㅎㅎㅎㅎㅎ

A에게.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 있고, 오늘도 어딘가에서 그 익숙한 이름으로 불리며 무더운 일상을 살아갈 A. 당신의 이름을 잠시 상상해 봅니다. 생김새와 성품에 걸맞은 이름을 가졌겠지요. 이름 대신 A라 불리고, A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올렸던 당신을 생각하며 저도 제 이름 대신 J라 소개하겠습니다.


이동현 목사 관련 기사에서 A 님 당사자로 시작해 주변인이 I까지 등장했더군요. 그렇다면 저는 그 다음의 반경에 있는 사람 J, 특히 여성입니다. A로부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J가 있습니다. 심정적인 방어를 풀면 A의 자리에 가 앉을 수도, 모르쇠로 외면하자면 Z에 갈 수도 있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자 사람입니다. '이동현 목사 피해자 A가 드리는 편지'의 수신자 중 한 사람이고, 이 글은 그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유명 청소년 단체 목사의 두 얼굴'로 시작하는 기사엔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목회자의 성범죄 하루 이틀 일인가?' 싶었고, 이어지는 기사의 사건 분석과 방향 제시, 성찰, 회개, 회개의 촉구 등은 안 읽어도 알 것 같았습니다. 미안하지만 피로감이었습니다. 피로감. 이 얼마나 객관적이며, 거리감 있고, 연루되지 않아도 되는 속 편한 말입니까. 반응하지 않을 자유를 득하는 합리화의 근거입니까. 그러나 뉴스 목록에 있는


'이동현 목사 피해자 A가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은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A 님의 글을 읽은 다음 날 <뉴스앤조이>로부터 글을 하나 쓰면 어떻겠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기사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고, 이런 일에 객관적일 수 없어서 쓸 수 없다"는 말이 툭 하고 나왔습니다. '피로감'이라며 강 건너 불구경할 때는 언제고, 객관적일 수 없어서 쓸 수 없다니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화를 끊고 자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A 님 편지의 시작과 끝입니다.


"보복 의도 없이 2007년 있었던 유럽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저와 같이 외로움 속에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아이가 있는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인터뷰 요청에 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혹시라도 과거에 성직자와 성관계를 한 후 '주의 종을 죄에 빠지게 한 내가 죄인'이라는 수치심과 죄책감과 괴로움에 혼자 고문당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지금 혹시라도 목사 이름과 명예에 해를 끼치면 하나님나라에, 하님의 이름에 누가 될까 두려워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있는 분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알아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긴 세월 외로움 속에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웠던 A의 시간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자기 고통에 매몰되어 더 깊은 외로움에 갇히지 않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마음의 힘을 길렀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아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더 아프고 더 외로울 '아이'를 위해 두렵지만 용기를 냈구나 싶었습니다.


아프지만 더 아픈 사람을 위해 손 내미는 사람을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부릅니다. 참된 치유와 정화는 더 약한 자의 손을 잡는 연약한 손의 연대에 있다고 믿기에 A의 용기가 고맙습니다. 마음을 담아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글에서 여러 해결책을 제안하셨습니다. 그것들이 어떻게든 교회와 선교 단체 사역 일선에 실질적으로 녹아들기 바랍니다.


그러나 용기 내어 인터뷰에 응하고, 글로 생각을 밝힌 용기 있는 발설 그 자체가 이미 큰 해결을 위한 행동입니다. 저는 여자라서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를요.


늦은 밤 골목길에서 혼자 걷는 여자를 따라 걸어야 했던 남자의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앞선 여자를 안심시키려 빨리 걸어 앞지르려 했답니다. 빨리 걸을수록 여자의 걸음도 빨라지더니 급기야 가방을 안고 뛰더라고요.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기분 나쁘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계단을 오를 때도 앞에 여성이 불편할까 시간만 된다면 기다렸다 오른다고요. 지하철에서 여성 옆에 앉으면 '쩍벌'이 되지 않도록 더욱 신경을 쓴다면서 이런 남자의 심정도 알아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여자 편인데, 심정적으로 페미니스트인데 싸잡아 늑대로 치부되는 심정을 아느냐면서요. 여자들의 과도한 태도는 같은 편이 되고자 하는 남자까지 잃게 만든다고도 했습니다.


여성을 조수석에 태우지 않는 배려, 사진 찍으며 여자의 어깨를 터치하지 않는 매너 손, 단둘이 있게 되면 문을 살짝 열어 두는 센스. 고맙습니다. 여성의 불리한 입장을 헤아리는 것 자체가 남성으로서 기득권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니 더욱 고맙습니다.


헌데 자기편이 되어 주는 사람조차 믿지 못하는 오래된, 아주 오래된 피해자와 약자로서의 여자의 삶이 있습니다. 그 맥락에서 A가 뒤늦게 이 일을 폭로하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직접 목소리를 낸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짚어 보고 싶습니다. A와 저, 그리고 우리 편이 되어 주는 남자들에게 확인시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앞서 걸어가는 여성이 단지 여자 사람의 몸을 가졌기에 어떤 경험을 끌어안고 평생 살아가는지, 그 여자는 길에서 만난 어떤 여자가 아니라 아내이며 누나이며 여동생이며 엄마일 수 있음을요.


여성의 몸을 가졌다는 것은 그대로 아주 취약한 조건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광고의 배경과 소재가 잘빠진 여성의 몸인 이 시대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옛날과 지금, 상류계급 여인과 신분이 낮은 여인, 많이 배우고 똑똑한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 나이 많은 여자와 젊은 여자를 막론합니다.


남자들이 사춘기가 되어 남자로서의 자기 몸을 인식하는 것과 달리 많은 여성이 어릴 적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 몸을 인식합니다. 친척 오빠, 동네 오빠, 교회 오빠. 가까이 있는 친절하며 나쁘지 않은 남자 어른들의 못된 손으로 여자인 자기 몸을 인식합니다. 어리기 때문에 세상을 총체적으로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힘이 없고, 쉽게 도움을 구할 수 없어서 이 폭력적인 경험은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들에게 어린 시절 '성추행의 기억'은 흔한 일입니다. 발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애써 발설한다 해도 도움을 받아야 할 어른에 의해서 다시 묻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못된 짓이 왜 발설되지 못하는지, 더 큰 어른에 의해 묻히고야 마는지. 이 지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A를 두 번 울리며 올가미에 가둔 가해자의 말, 이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네 인생은 망한다."
"너 나랑 이래 놓고 이제 시집 어떻게 갈래."
"네가 입을 뻥긋하면 사탄이 그 말을 이용해서 우리 사역을 망친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걸 참아라. 너 한 명만 참고 견디면 성령을 훼방하지 않게 된다."


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릴 적 교회 전도사님의 못된 손에 걸려든 일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재밌는 설교를 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담임목사의 딸이어서 우리 아버지와 전도사님의 관계, 은근한 갑을 관계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알려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엄마가 알면 아버지가 알 것이고 아버지가 알면 이 (천하에 못된 손을 가졌으나) 착한 전도사님이 쫓겨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이분의 (생계) 목숨 줄이 우리 아버지 손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모든 상황이 두려웠지만 엄마에게 발설했습니다. 온 집안과 교회가 발칵 뒤집히고 난리가 날 줄 알았던 제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발설은 제게서 끝나고 엄마는 아버지에게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 지금 쓰다 보니 제가 모르는 방식의 은밀한 발설과 조처가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습니다. 어쨌든 인간의 상처라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대한 기억입니다.

저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내게 일어난 이 어마어마한 일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 이 기억은 제게 무언의 메시지를 심어 주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여자아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일그러진 여자의 몸이 되어 갑니다.


'전도사님이 한 일이 큰 잘못은 아닐지 몰라. 원래 남자는 여자아이를 마음대로 만져도 되는 건가 봐. 그게 잘못이라면 내가 화를 내거나 거절했어야지. 내 잘못이네.'


이후로도 동네 오빠, 교회 오빠에게 몇 차례 더 추행을 경험했지만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의 저편에 묻어 버렸습니다. 여자의 몸에 대한 내면화된 목소리만 남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관련 공부를 하던 중에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왜 내 말을 듣고도 못 들을 것처럼 가만히 있었느냐고요. 엄마는 별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뜬금없는 고백을 했습니다. "부흥강사 ○○○ 목사 알지?" 하면서요.


예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씩 꼭 부흥회를 했습니다. 부흥회 기간 강사 목사님은 우리 집에서 숙식했고, 우리 집 부엌은 끼니마다 온갖 요리를 만드는 집사님, 권사님들로 북적였습니다. 귀빈 대접이었지요. 저녁 집회를 마친 후 엄마는 저녁 간식을 가지고 강사 ○○○ 목사가 기거하던 방에 들어갔고, 그 (신령한) 목사의 (더러운) 손이 엄마의 몸을 더듬었답니다. 아버지에게 얘기하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답니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나 하나 참고 견디면 모처럼 은혜로운 부흥회를, 교회를, 가정을, 부흥강사의 사역을 지켜 내게 된다. 그렇게 참고 덮어 둔 '나 하나'인 여성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때의 고백 이후로 엄마는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설명도 없이 이 얘기를 꺼내곤 합니다. 연세가 많아 기억력과 인지능력이 많이 떨어져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는 요즘에도 반복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유명한 부흥강사 ○○○ 목사의 못된 손 이야기입니다.


제게는 무력한 아이를 돕지 않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엄마가 분명한데, 이 엄마 역시 도움받지 못한 무력한 여자였으니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여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잠재적인 성적 피해자일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증언조차 할 수 없도록 길들여집니다. 교회의 여자라면 거기에 성령 훼방죄, 사역자를 시험에 들게 한 죄까지 뒤집어쓰게 되니 이중 삼중의 올가미입니다.


부모에게 학대나 폭력을 당하는 아이는 가해하는 어른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 때문에 가해자의 힘과 권력에 철저하게 굴복하여 자신이 당하는 학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를 학대하는 부모를 좋은 부모로 각색하고 부모의 죄를 자신이 뒤집어쓴다고 합니다. 종교 권력을 가진 목회자나 사역자에게 지속적인 성폭력을 당한 청소년이나 청년들도 비슷합니다. 영적인 권위를 가진, 존경하는 지도자는 부모 그 이상, 하나님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목사님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옷매무시를 고치고, 가장 좋은 과일을 대접하고, 심방 감사 봉투를 챙기는 저희 엄마가 신령한 부흥강사의 범죄를 범죄로 보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것은 수천 년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살아온 여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고, 거기에 가부장적인 종교의 굴레까지 뒤집어쓴 여자의 자기 인식입니다.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대상과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아니오'라고 당당히 말하라고 합니다. 수천 년 새겨진 대상으로서의 몸을 지닌 여성이며, 거기에 아담을 유혹하여 실낙원을 유발한 하와의 후예로서 종교적인 굴레까지 뒤집어쓴 교회 여자가 어떻게 주체로 설 수 있겠습니까.


맹목적으로 추앙하던 지도자들에게 이양했던 우리의 힘을 되찾아 올 일입니다. '주의 종'이라 우러르며 이양하고 포기한 우리의 힘을 되돌려 받는 것은 자아 팽창으로 상식적인 판단력마저 잃은 지도자들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추앙이 후광이 되고 후광이 과도한 권력이 되어 교회와 세상을 더럽히는 지도자가 난무하는 시대. '나 하나 참고 덮어 주자'가 아니라 '나 하나라도 내 발로 서자'할 때, 맹목적인 추앙과 허황된 후광 사이 악순환의 고리에 작은 충격이라도 가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강해지고 온전히 치유되는 날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아직 두렵고 여전히 아프지만 그것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며,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무력한 피해자로 남아 있지 않고 치유하고 힘을 기른 A가 되어 다행입니다. '일상을 건강하게 사는' 어른이 되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러도록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강 건너 Z로 살아서 미안합니다.


A가 내민 손을 비슷한 고통으로 외로워하고 있는 교회 동생들이 잡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꽃뱀, 마귀 사탄이라 불리며 흘린 눈물 위에 연거푸 피눈물 흘리는 자매들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발설하고 도움을 구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손 내밀어 주어 고맙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 출간작업 

# 벚꽃과 그리움 

# 술과 신앙

# 죽음과 천국

# 너나 잘하세요

# 아버지와 아들


이런 키워드가 전에 쓴 글을 하나 불러냈다.


사진의 아버님이 생일 맞은 현승이를 위해 기도문을 적어 읽고 계신다. 문득 의문이 든다. 아버님은 당신을 '신앙인'으로 규정하신 적이 있으실까? 교회에 안 빠지고 나가셨지만, 삶의 기쁨과 슬픔 앞에 가끔 기도할 줄 아셨지만 '믿음'에 관한 한 어떤 자의식도 없으셨던 듯. 믿음이 없다, 그렇게 시간이 많아도 성경을 한 번 안 읽는며 어머님께 핀잔은 많이 들으셨다. 그런 아버님이 사랑하는 손주 생일에 손수 써서 준비하셨던 기도문, 식상한 표현 뿐이어서 신선했던 그 기도가 문득 뭉클하게 그립다.


전에 크로스로에 연재했었고, 일정은 멀리 있지만 책으로 나올 글이다.

 


[아버님의 소주잔]


설거지를 하려고보니 그릇 사이로 소주잔 하나가 뒹굴고 있다. 배시시 웃음이 샌다. 큰 녀석이 그릇장 안쪽에 있던 걸 꺼내서 물 컵으로 사용하고 휙 던져 놓은 것일 터이다.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의 집에 웬 소주잔? 이것은 정통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인 며느리가 단 한 분, 시아버님을 위해서 마련한 아버님 전용 소주잔이다.

 

나는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대학(그것도 걸걸한 여대)도 다니고 사회생활도 했기 때문에 술자리, 술문화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에서의 음주행위는 상상도 못하고 자랐다. 신혼 초에 시댁에서 잔치가 있어서 처음으로 설거지 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설거지 그릇 중에 소주잔이 여러 개 있었는데 살짝 손이 떨리는 거였다. ‘, 내가 술잔 설거지를 하다니. 우리 엄마 알면 뭐라 하실까?’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문화충격이었다.

 

겉으로는 술도 같이 한 잔 안 마셔주는 아들 소용없다며 호기로우셨지만 아버님도 늘 아들 며느리 눈치를 보셨다. 착하고 소심하신 아버님은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가서 한 잔 생각이 나셔도 냉큼 주문을 하지 못하셨다. 어느 날 부턴가 식당에 가면 쭈뼛거리시는 아버님에 앞서 먼저 소주 한 병 주문을 했다. 착하고 소심하신 아버님의 약주사랑이 참 곱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평소 말이 없으신 분이 약주 한 잔 하시면 유쾌해지시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뿐 아니라 아버님 생신을 우리 집에서 차려야 하는 날에 장을 보면서 과감하게 소주 몇 병을 카트에 담았다. 상을 받으시고 뭔가 허전하다 싶으셨던 그 순간에 냉장고에서 나온 초록색 병에 아니, 이걸 샀어?”하면서 좋아하시던 아버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집에 소주잔이 없어서 머그컵에 소주를 따라 드셨고, 그 이후 언젠가 아버님만을 위한 소주잔을 갖춰 놓게 되었다.

 

그 힘들다는 워킹 맘으로 두 아이 양육하기가 아버님의 도움으로 참 수월하였다. 아이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여성보다 더 섬세하고 살뜰하게 보살피시는 아버님으로 인해서 참 팔자 좋게 일하고 양육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느 정도 독립이 되었을 때도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집으로 오셔서 유치원 마친 아이를 맞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집에 오셔서 방과 후의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기간이 있었다. 막내아들이 늦깎이 목회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일을 하고 밤에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검정 비닐봉지로 꽁꽁 싸인 병이 하나 들어 있다. 낮 시간에 아이들과 떡볶이 간식 사다 드시며 한 잔 걸치시고 남은 막걸리였다. 행여 목회자 아들 집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가 누가 될까봐 어찌나 꽁꽁 싸매두셨는지…….

 

무엇을 드셔도 척척 소화시키신다고 자랑이시던 아버님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50여일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가신 지 1년이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시기에는, 남은 우리들이 떠나 보내드릴 준비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당황해하며 혼란스러워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니셨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살가운 표현 한 번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믿음 좋은 아내와 자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신다는 식으로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는 빠지지 않으셨다. 교회 일에 열심인 어머님을 향해 내가 수염 영감탱이 예수한테 마누라를 뺏겼어. 아니 영감탱이가 아니지하셨다. 늦게 신학교에 가서 열정을 다해 공부하는 아들이 좋은 성적에 장학금을 받아오자 못내 아쉽다는 듯 이제라도 그 머리로 공무원 시험 봐라시며 먹고 살 걱정을 하시기도 하였다.

 

그런 아버님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함께한 마지막 50일 동안 내가 한 짓이 무엇이었던가. 믿음 없으신 아버님이 입술로 고백하시도록 해야 한다며 속으로 얼마나 안달복달 했던지. 맘먹고 사영리를 들고 아버님과 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서는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막내며느리가 제격이라며 기도하며 서둘러라하는 사랑어린 재촉도 있었다. 새벽기도에 가면 내 불안에 겨워 이 땅을 떠나시는 아버님이 당신의 품에 눈뜨게 해달라며 빗물 같은 눈물을 쏟아내곤 하였다.

 

설상가상 아버님께서는 심방오신 분들과 예배드리는 걸 거부하셨다. 마지막 호스피스 입원 중에 간호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병문안을 오셨다. 간단히 예배드리려 하는데 고개를 돌리신다. 싫어하시는 것이 역력한데 그 자리에 계시도록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버님, 한 바퀴 돌까요?’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기도하시는 분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한편으론 불안의 솜방망질이던지. 믿음, 구원, 믿음, 입으로 시인, 구원, , 혼란스럽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만큼 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버님이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우연인지 (그 분이 계획하신 필연인지) 연거푸 세 번 씩이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미 의식을 많이 잃으신 아버님께서는 그저 모든 것을 보호자의 판단에 내어맡기고 누워계실 뿐이었다. 마지막 예배는 막내 아들이 함께 한 자리였고 예배를 마치고 찬양 한 번 더 부르자는 목사님의 제안이 있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 오셨네를 부르는 중 예수 안에 생명 있네.’ 후렴을 부르는 순간 우리 착한 아버님, 이 세상을 붙들었던 손을 가만히 내려놓고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것처럼 이 땅에서의 마지막 50일 동안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큰 육체적 고통도 없이 그렇게 지내시다 하늘 그 곳으로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의 마지막 50일은 한 없이 고요하였는데, 내 마음은 양철지붕에 소나기 떨어지듯 요란했다. 그 요란한 양철지붕 아래에는 나는 믿음이 있고, 아버님은 믿음이 없다는 일말의 의문도 없는 전제가 숨어있다. 도대체 그 근거 없는 판단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아버님이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일하는 엄마였던 내게 든든히 기댈 언덕이셨던 아버님께서 떠나신 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돌봐주시던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돌볼만큼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아버님께서 내게 무엇보다 큰 숙제와 더불어 엄청난 선물을 남기고 가신 탓이다.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한 마디를 마음 깊은 곳에 넣어주시고 가신 탓이다. 마지막 50아버님 믿음의 고백, 입술의 고백이러면서 안달복달 하던 내 마음의 깊은 동기가 진정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는지, 믿음의 기도였는지를 처음부터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의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하는 영원의 원점 같은 곳으로 돌아와 섰다.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하던 기간과 신종플루 걸렸던 주간 외에는 주일에 빠져본 적이 없다?(이걸 가지고 주일 성수했다며), 청년 때부터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교회봉사를 했다? 미운 사람이 생겨도 하나님,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예수님 코스프레를 좀 하고 산다? 그런 것들에 근거한 나는 믿음 있는 사람라는 확신에 겨워 살아온 날들에 씌운 거품을 비로소 확인한다.

 

소주잔을 보면 한 잔 하신 아버님께서 흥에 겨워 부르시던 뽕짝 멜로디가 생각난다. 또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라 하시며 부르시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소심하게 흥얼거리시던 허밍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지막 50일을 걱정 대신 사랑으로 더 잘 떠나 보내드릴 걸하는 후회 같은 건 넣어두려 한다. 터무니없는 자기의의 발로로 발을 동동 구르며 보냈을지언정 아버님과 하늘 아버지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 같은 사랑의 교제가 있었을 터이니. 또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 없음에 관한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과대 포장된 내 믿음의 자가 평가서나 돌아볼 일이다. 다만, ‘거기서 해처럼 밝게 빛나실아버님이 오늘 더욱 그리운 것이다. 소주잔을 닦다 그 투명한 유리에 어른거리는 아버님의 모습이, 생색내지 않으셔서 더 따스했던 그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입으로는 하늘소망을 그럴 듯하게 노래하면서도 마음으론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천국이다. 이 땅에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손주의 작은 손을 놓자마자, 바로 그 순간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생각하니 천국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우리네 삶과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 곳인지. 아버님과 함께 한 13년 동안 내가 필요한 것을 그렇게 주시기만 하시더니 떠나시면서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두고 가셨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소주잔에 남겨두신 사랑과 선물이 어른거린다.








<뉴스앤조이>의 목회멘토링 사역원에서 3월에 목회 멘토링 컨퍼런스를 엽니다. 컨퍼런스에서 선택강좌 중 하나를 맡았는데 제목은 '목회자 부부의 탈진과 정서적 돌봄'입니다. 사역원 소식지에 실을 글을 하나 썼고, 소식지 인쇄본은 아직 못 받았으나 <뉴스앤조이> 홈페이지에 걸렸으니 제 집 대문에 걸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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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나 은수저는 몰라도 나는 성경책을 옆에 끼고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목사였고, 내 이름은 교회 냄새 물씬 나는 신실이였다. ‘신실아부르는 소리는 목사 딸이라는 보통명사처럼 들렸다. 초등학교 1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 우체국 안에 있던 전화국에 놀러 갔다. 처음 보는 교환원이 나를 보고는 교회 집 딸이구나. 79번 집!’ 우리 집 전화번호이다. 딱 부러지는 인상의 교환원 언니 입에서 79번이란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 게다가 나를 알고 있어. 무언가가 어린 나를 긴장시켰다. 아버지는 사사로운 일로 전화를 쓰지 못하게 했다. 전화는 물론 전기 등도 마찬가지였는데 교회 돈이 나간다는 이유였다. 교환언니의 입에서 79번이 나왔을 때 어린 나는 왜 움찔했으며 그 기억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몰래 전화를 써도 교환원 언니는 다 알고 있다는 것. ‘너는 목사의 딸로서 전화를 아껴서 쓰고 있는가, 전기는? 똑바로 해라.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중요한 목소리이다.

 

어린 눈에 아버지가 훌륭해 보였다. 도덕적이고 양심적인(이런 말을 알기 전부터) 좋은 목사님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일찍부터 아버지의 딸로 살았으며 자부심도 컸다. 부모님의 목사 딸 교육법으로 나는 나쁘지 않은 아이로 컸다. 그래서 속이 쓰릴지언정 겉으론 미소 지으며 내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미움으로 맞서지 않고 이를 악물고 스릉흠미다하기도 한다. 문제는 목사 딸 교육법이 드리운 그림자이다. 착한 행실 뒤에는 사랑보다는 두려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목사의 딸로서 일찍이 내가 터득한 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사는 법이었다. 이미 천국에 계신 아버지, 모든 짐을 벗고 자유로우실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할 마음은 없다. 누군들 위선적으로 살고 싶겠는가. 목사와 목사 가족이라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신도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그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게다가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아버지는 목사로서 신도들에게 책잡힐 여지를 한 톨도 남기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내가 목사의 딸이라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랑의 법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하나 마나 한 상상이다. 자신이 살지 못하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칠 수 없는 법. 교인들의 가지각색 기대와 시선을 천형처럼 지고 누구보다 자신들을 옥죄면서 한평생을 사신 부모님이다. 아니 우리 부모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뒤늦게 목사의 아내가 된 나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땅의 목사님들과 그 가족은 모두 ‘79번 집 사람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 할 수 없는 것은 목회자만의 실존이 아니다. 남의 눈치를 보며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하고 뒤돌아서 자신을 혐오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딜레마이다. 칼 융(Carl G. Jung)은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얼굴, 인격의 가장 겉부분을 페르소나(Persona)'라 명명하였다. 목사, 장로, 선생, 엄마, 아들 등의 직함이나 역할은 사회적 얼굴이다. 페르소나는 타자의 시선(기대)에 의해 형성되며 소속된 집단에 충실하면서 강화된다. 가면이라고도 하는 페르소나는 벗어버려야 할 불온한 것이 아니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페르소나가 진짜 나인 줄 아는 동일시가 인격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이 동일시가 극도에 다다라 페르소나와 내가 구별되지 않을 때,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이 일어나 흔히 말하는 마음의 병,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목사(종교지도자)는 역할의 특성상 보다 쉽게 페르소나와 동일시할 수 있어서 위험한 위치에 있다. 융의 투사(projection)이론이 이 메커니즘을 잘 설명해준다.

 

투사(projection)’란 말 그대로 프로젝터(projector)를 통해서 스크린에 비췬 영상을 보고 그것이 컴퓨터 아닌 스크린에 있다고 믿는 심리 현상이다. , 나쁜 것은 자기 마음(컴퓨터)에 있는데 자기 속에 있는 줄 모르고 밖의 타인(스크린)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공연히 미운 사람, 싫어도 너무 싫은 사람, 나도 모르게 격렬히 비판하게 되는 대상 등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투사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의 어둠만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분까지 밖으로 투사하게 된다. 목사님들을 향한 과도한 존경과 기대가 그 예일 것이다. 이런 투사는 내가 살아내야 할 거룩한 삶을 대신 살아주기 바라는 책임전가와도 같다. 융 심리학자인 로버트 존슨(Robert A. Johnson)은 이것을 황금투사라 한다. 자기 안의 금과 같이 소중한 것을 투사함으로 더 고귀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이 투사는 목회자의 부정적인 면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과도한 존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받는 대상 또한 문제이다.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예수님 같은 분입니다.’ 같은 칭찬과 기대로 표현되는 황금투사를 넙죽넙죽 내면화하는 목회자는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황금 목걸이를 목에 거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생각하는 자아팽창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투사의 드라마에 갇혀 있는 한, 신도들은 성장하기 어렵고 목회자들은 자기 자신이 되어 살기 어렵다. 이것이 오늘 목회자와 목회자 아내들의 비극이 아닐까. 사모는 활달해야 하고 동시에 차분해야 하며, 적당히 세련되어야 하고 동시에 외모가 화려하면 안 된다는 등. 서로 상충하여 말이 닿지도 않는 목회자와 그 아내에 대한 기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춤출 수 없다! 그것은 장단이 아니기에. 실체가 아닌 스크린에 비춘 그들의 마음일 뿐이다. 그것을 분별해내는 눈과 황금투사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방법일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목회의 길을 가는 동안 나란히 가는 마음의 여정이어야 할 것이다. 나를 움찔하게 했던 ‘79번 집 딸이구나!’ 이 한 마디의 위력에서 벗어나는데 수십 년의 시간과 기도가 들었다. 여전히, 아직도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1. 2016.01.15 06:33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16.01.18 22:24 신고

      우리 엄마 젊었어도 이미 50이 훨씬 넘은.....ㅎㅎㅎㅎㅎ

  2. BlogIcon hs 2016.01.15 10:58

    글을 읽으며 우리 큰딸과 아이들이 떠 올랐습니다.
    많은 부분을 공감하며~~
    그래서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 BlogIcon larinari 2016.01.18 22:26 신고

      그러시죠?
      저는 가끔 '천국에 가면 계급장 다 떼고 주님 만난다'
      생각하곤 해요.
      목회자로만, 목회자 아내로만 살아서 나중에 천국생활 적응하겠나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

 

 

엄마, 이것 봐요

아이가 자라면서 혼자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면 하는 말이다. 낙서 같기도 피카소 작품 같기도 한 그림 한 장, 대충 쌓은 것 같은 블록 몇 개, 심지어 어떤 때는 도대체 뭘 보라고 부른 것인지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와우, 잘 만들었는데엄마의 피드백에 의기양양해져 또 다른 작품에 도전하며 자신감을 키우고 몸과 마음이 자랐다. 자아의식이 생기던 그때부터 우리는 바라봐 주는 누군가를 부르고 찾고 기다린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빠르게 보편화된 SNS는 앞 다투어 현시 욕구를 발산하고 충족시키는 광장이 되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있다, 난 이런 멋진 직업을 가지고 있다, 여친과 나 멋진 곳에서 데이트 중이다.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띄운다. 그리고는 페친들의 좋아요를 기다린다. 어렸을 적 엄마가 어머, 우리 아들 잘했어!’ 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관심이겠지만 그럴듯한 나를 봐주고, 부러워해주는 것이 좋다.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 더 세련되고 아니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 속 욕구는 비슷할 것이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면 왜 굳이 일기장에 쓰지 않고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내놓겠나. 올리자마자 속속 늘어나는 좋아요개수에 기분이 좋아지고 심지어 존재 자체로 인정받은 느낌까지 든다. 우린 모두는 봐주는 사람이 필요한 존재이다.

 

나도 널 본다

나도 수시로 본다. 시시각각 올라오는 친구들의 지금 여기를 본다. 친구의 글과 사진을 본다고 믿지만 많은 경우 그 ''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이다. '그 사람''그 글'이 불편하고 '보기 싫다'고 느끼지만 불편함과 보기 싫음의 절대 잣대는 없다. 그 글이 내.. 불편한 것이다. 내게는 몹시 불편한 글을 다른 멀쩡한 사람이 매우 좋다고 열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떤 친구의 여행사진에는 기분 좋게 좋아요해줬는데, 오랜만에 일상을 떠난다는 다른 친구의 공항사진에는 그래, 너 잘나가서 좋겠다. 좋은 직장이라 돈도 잘 벌고 휴가도 마음대로 낼 수 있으니하며 싸늘하게 쓱 밀어내리기도 한다. 저녁으로 뭘 먹었다는 시시한 글에 '좋아요' 누르는가 하면, 어떤 친구가 고백하는 깊은 아픔을 읽으며 '위선 떨고 있네' 하며 시야에서 쓱 치워버리기도 한다. 이런 심리적 '투사'는 일상에서 늘 일어나지만 얼굴 맞대고 커피 한 잔 하면서 자연스레 해소되는 것이 많다. 휴가내고 해외여행 간다며 공항사진 올린 친구를 우연히 만나 여행 갔더라. 잘 다녀왔어?’ 물었는데 직장 상사로 인해 사직을 고민하는 중이었다는 얘기, 그 얘길 하는 친구의 피곤하고 슬픈 눈을 마주하고는 잘 나가서 좋겠다며 뒤틀렸던 심사가 부끄러워진다. 이렇게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의 이미지로만 관계를 맺는다면 결국 투사 속에 허우적대다 과대망상, 피해망상 속에 빠져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본다

애매하게 주어를 생략해서 쓴 위의 이야기들은 불특정 페북 이용자들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즉흥적인 반응에 강하고, 감각적인 농담 따먹기는 더 좋아하는 터라 페이스북은 딱 내 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 현시욕 강한 내게 페이스북은 재미와 의미가 공존하는 놀이터였다. 문제는 항상 바보들의 놀이 비교에서 시작한다. 본업은 아니지만 어쩌다 B급 글쟁이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은 내 글과 다른 사람의 글을 줄을 세워 보여준다. ‘에잇, 이 사람은 도대체 언제 이렇게 책을 많이 읽은 거야. 글은 또 왜 이렇게 잘 써?’로 시작해서 투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마음은 금세 지옥으로 내려간다. 내 글보다 나을 것도 없는데 좋아요가 엄청나게 붙은 페친의 글을 째려보고, 허점을 찾아내고, 그러다 자존감이 쪼그라든다. 신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의 수려한 글을 읽다보면 심장이 벌떡거린다. 나보다 기수도 낮고 공부도 그리 잘했던 것 같지 않은데 교수님 호칭을 달고 있는 후배를 페친으로 만나는 날엔 유치한 줄 알지만 우울해지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 이미지를 붙들고 씨름하는 투사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치러야할 시간적 정서적 비용이 컸다.

 

나만이 나를 본다

연금술에서 바스 헤르메티스’(‘vas hermetis’ 라틴어로 헤르메스의 그릇’)라고 불리는 금을 만들 때 사용하는 그릇이 있단다. 그 안에 납을 담고 그릇을 밀봉한 뒤 열을 가하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행여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서 열기가 새어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단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그릇을 테메노스’(Temenos) 즉 심리적 그릇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나가지 않는 나만의 비밀이 있는 장소이다. 새어나가는 비밀이 없이 고요히 침잠한 심리적 에너지가 쌓일 때 납이 금이 되듯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통합된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금으로 단련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에너지를 단속할 일이다. 페이스북 등 SNS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다 뒤로 빠지고 그러다 어느 새 다시 몸을 담그고, 또 한 발 물러나고……. 이런 지점에서 나는 테메노스를 생각한다. 그럴듯한 나의 통찰과 경험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날 때 나의 테메노스에 깊이 던져두기로 하면 시끄럽던 내면이 조용해진다. 타인이 포장해 내놓은 이미지를 바라보며 혼자 소외감 느끼고, 좌절하고, 분노할 때도 내 마음의 그릇에 담겨 있어야 할 욕망들이 투사되어 나와 춤추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본다. 드러내고 표현하길 권하는 투명사회를 살면서 비밀스럽게 담아두는 것의 미덕을 깊이 생각해본다.

 

나의 페이스북 사용법

여전히 나는 페이스북 유저이다. 뭣 모르고 뛰어들어 신나게 놀아보기도, 마음을 다쳐 앓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다른 사람 아닌 내 마음에서 일렁이는 욕구와 숨어있는 욕망을 마주하게 되었다. , 내가 이 나이에도 나를 바라봐주는 눈을 그렇게나 갈망하는구나. 아무것도 아닌 좋아요하나에 울고 웃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내 모습이구나. 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페친은 영락없이 나 스스로 보기 싫어서 밀어 넣고 숨겨놓은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들이구나. 페이스북 뉴스피드을 거울로 인식하고 여기에 반사되어 꺾인 시선이 다시 내 안으로 향했을 때 생각의 전환, 일종의 회심이 일어났다. 그리고 내 의식수준과 마음그릇에 딱 맞는 페이스북 이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내 스마트폰 화면에 페이스북은 언론카테고리 안에 들어 있다. 뉴스 기능을 하는 페이지나 개인만 팔로우하여 구독하고 있다. 뉴스를 보던 무심한 눈으로 친구들의 일상을 보게 됨을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근황이 궁금한 친구는 일부러 검색해서 찾아 들어가 읽고 좋아요든 댓글이든 흔적을 남긴다. ‘조용히 훔쳐보기가 모두에게 허용되는 곳이 SNS 타임라인이다. 은밀하게 훔쳐보며 내게 필요한 정보를 슬쩍 챙기고, 그러다 부러워하고, 부러워하다 손가락질하고, 얼굴 보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낯선 웃음을 짓는 나의 관음증적 관계들. 내 영혼이 갈망하는 참된 만남은 그 관음증적 관계를 뒤집은 정반대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여.

 

* 100주년기념교회 20대 청년 회보 <100Tong>에 기고한 글입니다.

 

 

  1. BlogIcon @amie 2014.10.13 10:40 신고

    저는요.. 사람들이 저를 얼만큼 꺼려하는지 확인하려고 페북을 하는 것 같아요. 프하하. 안타까운 것은, 고유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획득하려는 나의 시도가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에요. 자기중독에 시달리는 일인임을 확인할 뿐.

    • BlogIcon larinari 2014.10.14 22:46 신고

      나 페북 댓글에서 감동 먹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얼만큼 좋아하는지 확인하려고 글을 쓰는 것 같아. 글 보고 사람을 좋아하라는 엄청난 강압을 집어 넣어 쓰고 있나 봐. 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꺼려할 거라는 택도 없는 생각을 해대는 에이미를.... 스릉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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