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글 모음88 아버지 너머 하나님 아버지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4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한참 낄낄거렸다. 어릴 적 교회 친구들 모임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의 나비효과였다. 친구 J가 아들이 만든 정체불명의 초콜릿인지, 빼빼로인지를 올린 것이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마시멜로를 녹이고 초콜릿 으깨고 난리를 치더라나. 맛있는 걸 그냥 먹지 왜 그걸 녹여 먹느라 고생을 하느냐, 녹여 먹으면 더 맛이냐, 하고 말았다고. 냉동실에 고이 넣어둔 걸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알고 보니 밸런타인데이에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이었다는데, 그 모양새를 보자 다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와, 이걸로 고백하면 바로 이별 통고받는 거 아냐? 맞겠는데! 아냐, 정성이라고 감동할 수도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유치원생 찱흘놀이 작품 같기도 하고, 뭉크의 ‘절규’도 떠.. 2023. 3. 1. 사춘기 오춘기 육춘기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3 친구의 축 처진 어깨, 자신감 잃은 말투가 눈에서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 일처럼 마음이 무겁다. 늦둥이로 얻어 애지중지 키우는 아들과의 갈등으로 생사를 오가고 있다. 생사가 실제 생사겠는가. 마음이 죽어간다는 뜻이다. 시들어가는 친구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커다란 덩치에 가정, 친구들, 교회 공동체…. 어디서든 해결사 역할을 하는 남자 사람 친구이다. 한 교회에 다니며 중고등부 때부터 알아왔다. 그 시절 친구 모임이 느슨하게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 시간들이 많아져서인지 더 자주 얼굴을 보고 있다. 친구 J는 우리 중 제일 늦게 결혼했다. 아들 둘을 내리 낳았는데 지금 현재 그 무섭다는 중2, 중3이고. 사춘기를 맞은 첫째, 그 뒤를 이어 다른 방식으로 질풍노도에.. 2023. 1. 2. 밤에 우리 몸은, 영혼은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2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영화 을 보았다. 80대의 제인 폰더(Jane Fonda)와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가 주인공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먼저 빠져든 것은 노인이 된 두 거장의 얼굴과 몸이었다. 저렇게 예쁘고 잘생긴 명배우도 늙는구나! 도발적인 대사에 귀가 커졌다.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요. 괜찮으시면 언제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잘래요?” 애디 무어 역을 맡은 제인 폰더가 루이스 워터스 역의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하는 말이다. 영화 속에선 오래 알고 지내던 동네 할아버지에게 동네 할머니가 불쑥 찾아가 하는 제안이고. “섹스를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밤을 견뎌보려고 그래요.”란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혼자 사는 두 노인이 외로운 밤을 견디기 위해 밤을 함.. 2022. 11. 1. 중년의 성(性), 그리고 성(聖)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1 (시니어 매일 성경 9,10월호) “섭섭해, 정 선생. Out of sight out of mind 맞지?” 돌려 말하는 법이 없으시니 말씀하시면 그게 전부인데. 정말 섭섭하시구나! 얼굴 뵌 지 한참이지만 메시지로 안부를 여쭙고 있고, 가끔 꽃 사진도 찍어 보내주시곤 하여 여전히 가까운 마음인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셨나 보다. 일이 좀 많아지기도 했지만, 내가 관계 맺는데 취약한 지점이기도 하다. 꼭 자주 만나야 하나, 각자 잘 살면 되지, 하는 생각인데 친구들에게 섭섭하단 소릴 듣곤 한다. 최 선생님께도 듣고 마네. 마침 선생님 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의가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서프라이즈로 찾아뵈었다. 상담이 있으실지 모르지만 일단 쳐들어가자. 잠깐 뵙고 오더라.. 2022. 9. 1. 황혼의 부부, 부부의 황혼 #2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0 여행의 묘미가 있다.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풍경을 만나는 기쁨의 순간이 있다. 여행뿐이랴, 삶에도 가끔 들이닥치는 그런 순간이 있다. 반면 고난 또한 늘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것이 인생이고 여행 역시 그러하다. 3박 4일, 최 선생님과의 제주여행도 그 단순한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상상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었고 동시에 생각보다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긴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선생님도 노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었다. 우리 엄마나 시어머니께 느껴지는 살아온 날이 만들어낸 고착이랄까, 그런 것 말이다. 가끔 한 번씩 뵐 때는 몰랐던 점이다. 어쩌면 모르고 싶었는지도. 내 마음속 최 선생님을 좋은 노인의 표상으로 만들어 놓고 지나치게 긍정적으로만 .. 2022. 6. 30. 황혼의 부부, 부부의 황혼 #1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9 최 선생님과 함께 여행, 그것도 제주여행이다. 일이 되려면 이렇게 또 쉽다. 하루게 다르게 쇠약해지시는 선생님 모시고 햇살 좋은 날 드라이브 한 번 해야지 벼르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걷기도 전처럼 누리질 못하시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함께 공부하던 선생님 한 분이 제주 한 달 살이 중이라며 보낸 풍광 사진에 감탄하다 된 일이다. K 선생님은 모임에서 마음이 통하던 큰 언니 같은 분이다. “와, 부럽네요!” “부러우면 와요.” 이런 말을 주고받다 전격 성사되었다. 썩 건강하지도 않은 노인을 모시고 하는 여행에 이렇게 설레다니. 나답지 않은 일. 못 말리는 나의 최 선생님 사랑이다.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하아, 이런 날도 있네요. 선생님과 비행기 여.. 2022. 5. 4. 치유하는 글쓰기(월간 기독교세계) 쓸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아버지를 잃은 한 아이가 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목사였다. 장례식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이 다가와 말했다. “울지 마라, 너의 아버지 천국에 가셨는데 왜 우냐? 좋은 곳에 가셨다. 울지마라.” 아이는 그 말에 눈물을 그쳤다.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지.” 울지 않기로 작정했다. 천국에 가신 아버지를 두고 슬퍼하는 것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으면 천국에 갈 수 없고, 천국에 가지 못하면 아버지를 만날 길이 없으니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는 하늘 아버지를 믿기로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그리워 슬퍼지면, 그리운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참아야 했다. 울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생각과 상상력까지 어쩔.. 2022. 4. 1. 돈 걱정 없는 노년, 또는 중년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8 선생님께서는 지하주차장에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여러 일이 몰려 있는 날이라 몸도 마음도 분주하다. 함께 확인하고 보낼 선생님의 원고 마감날이기도 하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침에 원고를 가져다드리고 확인하시는 사이 다른 일을 보기로 했다. 아이를 태워 현장학습 장소에 데려다주는 일이다. 복잡한 일정으로 아이도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라 잠깐이지만 낯선 어른 마주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내려오시기 전에 엄마가 빨리 올라가”라며 압박하고 투덜거렸다. 나도 그게 편한데, 굳이 내려오시겠다니 말이다. 벌써 내려오셔서 엘리베이터 현관 앞에 환하게 웃으며 서 계셨다. “어이구, 잘 생긴 아들이구만. 모르는 할머니가 나타나서 주책이지? 만나보고 싶었어. 악수 한 .. 2022. 3. 5. 노년의 우정, 보험인가 로또인가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7 “어서 와, 잠깐만! 이거 한 10분 보면 끝나요.” 현관문 열어주시고 바로 다시 소파에 가 앉으시더니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신다. 뭔가 낯선 장면이다. 선생님과 드라마라... 드라마에 빠진 나의 ‘노(老) 현자(賢者)’ 최 선생님이라니! 한 손에 리모컨을 들고 넋을 놓고 계신 모습이 낯설고도 친근하여 웃음이 나왔다. “쯧쯧쯧,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어리석은 거지. 끝났네. 아아, 예고편 나오는구나. 잠깐만, 정 선생.” 그렇게 독백에 예고편까지 보시고 나의 최 선생님으로 돌아오셨다. 물론 표정은 아직 저 세상. 푹 빠지신 드라마는 몇 년 전에 방영한 였다. 나는 드라마는 못 봤지만, 작가인 노희경을 좋아한다. 포스터 이미지가 또렷하게 남아 있는데, 김혜자, 나.. 2022. 1. 1. 화석이 된 감정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6 시어머니 자서전을 써드렸다 책 표지를 들여다보고 앞뒤로 매만지며 자꾸 말씀하셨다. “아휴, 참 그 어머니 복도 많으시다, 복도 많으셔”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아 앞에 놓인 귤껍질을 찢고 또 찢어 쌓았다. 시어머니 자서전을 써드렸다. 최 선생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일에 관심이 지대하셨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며, 어머님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되겠다고 추켜세우기도 하셨다. 말은 안 했지만, 나도 딴엔 대단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에 힘든 줄 모르고 작업을 했다. 며칠에 한 번 노트북 들고 어머님을 만나 시기별로 인생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프로필 사진을 새로 찍어 표지 이미지로 넣었다. 어설프지만 책의 모양을 갖췄다. 선생님께서도 꼭 한 권 달라고 당부하셨기에 .. 2021. 11. 1. 이전 1 2 3 4 5 ···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