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결혼 한 후 처음으로 같이 읽은 책이 성에 관한 책이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아쉬운 것도 많았으니 뭐라도 읽지 않았겠는가! 그 이후 조심스럽게 시작된 부부간의 ‘성’에 관한 대화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수준에 까지 이른 것 같다. 놀이로서의 성, 일상으로서의 성 그리고 그 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까지 이젠 막힘없이 대화가 오고간다.
그렇지만 과연 부부의 성을 공개적으로 타인에게 드러내고 말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과연 독자들에게 의미 있고 유익하게 읽혀질 여지가 있을까? 여러 논의 끝에 우리 두 사람은 기독교세계관에 흠뻑 젖은 부부의 성 얘기를 공개하기로 했다. 남편이 설득하고 아내가 수용한 형국이라 아내에게는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성을 말하기 :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

JP
결혼을 몇 주 앞둔 즈음에 장모님께서 우스개 소리로 하신 말씀이 있었다.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얼른 해야 되는디... 왜냐하면 남자가 힘들거든. 어이구~ 김서방 얼굴에 살빠진 것 좀 봐!” “? ...” 정말 그랬다. 보는 사람들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안됐냐고 한마디들 했었으니까.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친구, 선,후배 할 것 없이 죄다 하는 말이 “야~ 얼굴 좋아진 것 좀 봐라!” “형! 결혼하고 나니 굉장히 자신감 있어 보이는데?” “아니! 칙칙한 예전의 오빠의 모습이 어디 갔지?” 하며 결혼의 위대함을 찬미하곤 했었다. 아내도 그런 내 변화를 두고 지금도 종종 놀려대곤 한다. 아니! 도대체 내 이미지가 어땠길래?
총각 때 모습을, 기억을 거슬러 더듬어 보니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다. 소심국의 황태자라고나 할까? 나는 큰 키에 비해 몸매는 참 못났다. 비쩍 마른 상체에 비해 허벅지는 꼭 운동선수 같았고 게다가 자존심은 또 얼마나 강했던지, ‘매력 없음’으로 인한 콤플렉스에 적잖이 시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가슴이 떡 벌어진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었던지! (그건 뒤집어 보면 성적 자신감의 결여와 다를 바 없다!) 매력적으로 보이고자 한 갈망과 매력 없음이라는 현실적 자가진단의 아슬아슬한 불협화음은 사실 ‘성의 은폐와 성의 승화’ 사이에서 엇갈리는 부조화의 소음과도 같았다. 그리고 성적 욕구의 분출과 신앙적 교훈의 검열이라는 치열한 싸움과 부조화는 내게 있어서 ‘칙칙한 삶의 양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칙칙한 남자들’은 대개 성적으로 소심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내 모습은 결혼 초에 ‘과연 아내가 나에게서 성적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갖게끔 했다. 이제 욕구는 원할 때마다 대개는 충족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욕구 뒷면에 붙어있는 또 다른 욕구인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인정’이 사뭇 궁금해졌다. 육체적 매력 없음과 그로 인해 꼬여버린 내 자아상 모두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말로 나오던가! 성적 욕구는 대책 없이 때가 되면 솟아나건만 어째서 ‘그 일’은 늘 미완의 아쉬움으로 남는 것인지... 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어찌하여 영화(와 소설) 속 장면들만이 끊임없이 나를 속이려고만 하는 것인지... 나는 왜 아내 앞에서 나를 위장하는 일로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하는 것인지... 무엇보다도 답답한 것은 대화의 물꼬를 틀 방법을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다가 아내가 우연한 기회에 목사님 댁 서재에서 책 한권을 발견했는데, 우리는 지체없이 그 책을 구입했고 즉시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책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은 기독서적들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과는 달리 추상적 원리가 아닌 실제적 지침을, 거룩한 설교가 아닌 뜨거운 경험담을, 절제로서의 성 의식이 아닌 즐거움으로서의 성 놀이를, 그 밖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 책을 함께 읽는 것을 계기로 성생활에 대해 서로가 기대하던 바를 조금씩 진실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꼬가 터진 대화는 마침내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두려움과 거절과 불신의 담들을 휩쓸어 갔고 우리는 성생활이라는 바다를 즐.겁.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SS
신혼 초 얼마 안 됐던 기간 동안 나는 꽤 답답함을 느끼며 지냈던 것 같다. 남편에게 하고픈 말은 가슴에 많이 쌓여 있는데 그게 말로 잘 나오지 않는 답답함이었다. 어떤 말들은 남편을 비난하는 말이 될 것 같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 될 것 같고, 어설피 말하면 내게 되돌아 올 화살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을 꺼내서 솔직한 대화의 장으로 나가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성’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하는 것’이 여성으로 별로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 문화로부터 알게 모르게 배운) 의식과 더불어 생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말들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성’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한다는 자체로 죄의식을 가지게끔 자라왔으니까. 거기다가 결혼 전 교제시절 ‘스킨십’에 대한 고민과 죄의식(?)의 기억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그런 답답함과 숙제들을 안고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책을 읽을 때는 한 사람이 먼저 읽고 기다렸다 다음 사람이 읽는 방식이 보통인데 이 책은 침대에 누워 한 권을 가지고 함께 읽는 방식을 택했다.(이 대목에서 독자들 혀를 차겠군요. 신혼부부가 침.실.에.서 독.서.를 하다니!!!!) 이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책 자체의 탁월함은 물론이거니와 두 사람이 ‘성’에 대한 한 권의 텍스트를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본다는 방식에 있어서 말이다. 책의 내용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독서방식 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비닐로 싸인 19세 미만 구독 불가의 책이다. ‘기독교서적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의 책이 있다니?’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19세 미만의 모든 책은 불온서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준 책이기도 했다. 또 이것의 의미는 ‘결혼’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성적 자유’를 부여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용 자체가 그리 새롭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책은 우리부부의 성에 대한 대화에 ‘자연스러움’이라는 선물을 준 것 같다.
책에서 주는 정보를 가지고 시작한 대화는 점점 그 주어가 ‘나는’으로 명확해 지면서 우리 자신의 두려움, 답답함이 서서히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정작 남편이 자신의 두려움을 하나 씩 내게 말했을 때 내게 아무런 문제되지 않는 것들이었고, 나 역시 두려움을 가지고 남편에게 건넨 말들이 이해되고 수용되는 것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한편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성’에 관한 정보가 얼마나 보잘것 없고, 때로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었던지를 알게 되었다.
구성애의 아우성이 아무리 명강의라 한들 자발적으로 읽고 토론하며 참여하는 세미나식 수업만 하겠나? 세미나식 성교육! 그거였다. 돌이켜 보면 신혼 초 책읽기를 통한 ‘성’에 대한 정면돌파는 우리 부부에게 단지 성문제에 국한 되지 않고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언제든 진실한 대화로 풀어가기’의 원칙을 세우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것 같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습은 내게는 참 필요한 훈련이다. 이 때의 대화는 개인적으로 내게는 솔직하게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가시게 해 준 것 같다. 침실에서는 물론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평등한 부부되기를 추구해 갈 수 있도록 구체적 방식들을 보너스로 얻기도 했던 것 같다.


일상으로서의 성, 놀이로서의 성 : <야야툰>

SS
나는 늘 유머를 추구하며 수시로 낄낄거리고 깔깔거리길 좋아한다. 근엄하게 드리는 예배시간에도 내 뇌의 한 영역은 유머를 찾아 활발히 활동한다. 그러나 솔직한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고는 하지만 순식간에 ‘성’에 대한 부담감이나 두려움, 막연한 죄책감 등에서 완전한 자유로 옮아가지는 못했다. 조금씩,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여유가 생겨갈 무렵 손에 넣게 된 책이 홍승우의 <야야툰>이라는 만화책이다.
이건 적나라한 그림의 만화다. 한겨레신문에 <비빔툰>이라는 만화를 연재하고 있는 홍승우가 신문에 그릴 수 없는 부부간의 성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다. (앞으로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작가 홍승우의 <비빔툰>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30대 부부의 일상이 덜함도 더함도 없이 드러나는 만화다. 더도 덜도 아닌 일상이 그렇게도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 매번 보면서 놀라운 만화이기도 하다. <야야툰>은 주인공 정보통과 생활미의 성생활 이야기이다. 처음 만화를 펼쳤을 때, 그걸 보는 내 눈을 의심할 만큼 그림이 적나라하고 충격적이었다.(이 글 나가면 <야야툰> 잘 팔리겠는걸...)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신문에서 <비빔툰>을 보는 정도의 감흥 이상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좀 신선한 점이라 하면 다른 부부의 침실을 훔쳐보는 짜릿함 정도일까? 왜일까? 그렇게도 적나라한 그림들이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은 작가 자신이 <야야툰>에 그리는 성은 <비빔툰>에서 그리고 있는 일상의 연장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만화를 보는 우리 부부 역시 ‘일상의 미학’의 범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30대 부부의 침실을 엿보고 나서는 나는 훨씬 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부부가 함께 하는 재미있는 ‘공부하던 성’에서 ‘놀이로서의 성’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래서 폴 스티븐스는 <영혼의 친구 부부>에서 ‘성’을 ‘부부놀이’라고 표현 했나보다.

JP
익살녀인 당신이 진지남인 내게 그 책을 들이밀던 날 내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요? 아니 돈 주고 이런 책을 사오다니... 글쎄, 남의 부부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거,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어느새 손은 슬쩍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소리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 배꼽 움켜쥐고 눈물도 닦으면서 낄낄거리며 책을 읽었던 게 생각나요. 공부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심지어 놀이와 성도 늘 진지하고 의미 있게 하려고만 드는 내게 당신과 당신이 권한 <야야툰>은 오늘 여기서 일상을 즐기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군요. 비록 집에 TV는 없지만 TV보다 재밌는 당신이 있어서 난 정말 일상이 즐거워요.



성찬예배와 성 : <영혼의 친구 부부>

JP
허무개그 하나 :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시던 전도사님과 선배누님이 결혼했다. 은밀하게 데이트를 즐겼던 두 분이 폭탄선언을 한 후 일사천리로 결혼식이 거행됐다. 축복 속에 결혼식을 마친 두 분은 청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이제 두 분은 청년들 앞에 앉아 청문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여러 질문들이 오가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렸던 핵심질문을 누군가 터트린다. “신혼 첫날 밤 얘기해 주세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전도사님의 입이 열린다. “손잡고 기도하고 그냥 잤어” “뜨아~” “그럼, 둘째 날 밤 얘기해 주세요!” “성?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도 재미없더군. 결혼하면 다 알게 돼. 자, 오늘의 본문은...” “에에~”
대한민국의 모든 전도사님들이 모두 이럴 리야 없겠지만 성을 너무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첫 날 밤을 손만 잡고 기도만 한 후 그냥 잠드는 부부도 있다고 들었다. 아님 아예 신혼여행을 기도원으로 가서 철야기도 하면서 첫날밤을 보냈다든지...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 그 이후로도 성을 건강하게 여기지 못했다는 증거는 내게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 일화들을 여기에서 다 밝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어째서 나는 성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을까? 워낙 스스로 성을 금기시 여기려는 태도가 우선 문제였겠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학교에서건 교회에서건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성은 부부가 침실에서 서로 지속적인 실습을 통해 자연 섭리로 알게 되는 것일까? 혹 목사님들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가르침의 목록에서 성을 생략하는 것인가?
결혼 후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자주 골몰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결혼생활도 더 풍부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화두의 해결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측과 상식에만 머물 뿐 오래 묵혀 있다가 이제야 천방지축 나대는 이 놈의 성에 대해 혼자만의 해석 가지고는 도무지 그 신비를 풀어낼 재간이 없었다. 그 누구한테 물어봐야 식상한 대답만 나올 뿐이지 정말 내겐 새로운 해석이 절실히 필요했다.
최근 폴 스티븐스의 <영혼의 친구 부부>를 읽던 중 ‘성과 한 몸’의 신비로운 함수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는 장 바니에라는 분의 말을 인용하면서 ‘부부 성관계’를 감.히. ‘성찬 예배’에 비유하려 했는데, 이게 무지 흥미롭고 새로운 자극이 됐던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교회에서 하는 성만찬의 본연의 위치는 원래 가정이었고 집례자는 부부였다 한다. 부부는 각각 서로에게 지은 죄, 예컨대 마음에 쌓아두었던 분노와 불신들, 부당한 권리 행사와 배우자의 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지 않은 불성실 등을 서로서로 고백하고 용납한다. 그렇게 진실한 대화가 오간 후에 거행하는 헌신과 애정의 일치로서의 성관계는 고백과 용서를 축하하는 증표요 잔치이다. 그 시간은 두 사람이 한 몸이요 한 마음이 될 뿐 아니라 한 영이 되는 시간이니 그것이 곧 성찬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부부의 침실이 이와 같다면 “ 이것은 당신을 위한 내 몸입니다” 라고 말하며 기꺼이 드릴 수 있고, 또 그 연합 안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터이니 예배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폴 스티븐스의 글을 읽는 순간 나는 회한과 감동으로 가슴과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간 용납과 받아들임, 고백과 기댐의 과정을 과감히 생략한 채, 곧장 욕구만을 채우려고 했던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 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확인시켜준 폴 스티븐스 목사님에 대한 감사, 그리고 비록 꼬여있고 틀어진 채 음지에서만 활동하던 성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받아주실 수 있는 길, 그것도 예배로 받아주실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 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부부 성관계 후 둘이 꼬옥 안고 가지런히 꿇고 앉아 기도했던 것이 생각난다. 돌이켜 보니 그 날은 폴 스티븐스의 말처럼 우린 ‘한 몸’이 되어 성찬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선물로 지금의 배우자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식 날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서약했듯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부부되길 원합니다. 아멘”

SS
동감이예요~ <영혼의 친구 부부>는 우리에게 ‘몸과 영혼이 하나됨’을 더 진지하고 즐겁게 추구하도록 격려하고 꿈을 준 것 같아요. 근데, 여보! 나 사실 처음에 당신이 기도하자고 했을 때 엄청 황당했어요. 평소에 기도 별로 안 하는 사람이 이런 순간에 웬 기도? 그러니까 그게 성찬예배를 끝내는 기도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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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라하이, <아름다운 애정생활>, 권명달 역, 보이스사
홍승우 , <야야툰>, 문학과 지성사
폴 스티븐스, <영혼의 친구 부부>, IVP
 
보물 Level 1 자유로움을 경험하다

MBTI와의 첫 만남 이후, 짧지 않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통해서 흔히 말하는 나의 유형(true type)을 찾았다. 자타가 함께 인정하는 나의 유형을 찾은 이후에, 말하고 행동하는데 전에 알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알았을 때, 내 마음에 충실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이 나를 한 없이 자유롭게 한다. 부모님이나 주일학교 교육의 요구에 의해 ‘나’인줄만 알고 살았던 버거움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MBTI와의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보물 Level 2 장점을 은혜로 알게 되다

나는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잘한다. 고로 나처럼 공동체에 필요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사소한 것들을 잘 기억하고 챙긴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남달리 충만한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잘 해주고 칭찬을 잘 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나는 융통성이 있어서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수용을 잘 해준다. 고로 나는 인격이 훌륭하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둘 깨지기 시작했다. F인 나로서는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다는 것. SF인 나로서는 도대체 정보라는 것은 사람들에 관한 사소한 것들 외에는 잘 입력되지도 오래 기억되지도 않는다는 것. P인 나로서는 상황상황에 융통성을 발휘하지 말라고 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공동체에서 분위기를 좀 띄울 줄 아는 것은 ‘재미’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ESFP인 내 자신에 충실하며 나 자신이 재미있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것.
점차로 이런 것들이 깨달아져 갔다. 예전에 나 스스로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유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게는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지옥 같은 삶이었을 것이니, 내 장점 안에서 ‘나의 공로’는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것은 내 본성 안에 숨기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었다. 이것을 발견하고는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제껏 내 것이라고 생각한 내 인격의 부분들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었음을 MBTI가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보물 Level 3 나도 모르던 속마음을 알게 되다

칭찬하지 않는 사람들은(T) 무조건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I) 대부분 내숭떠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고 늘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N)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사람과는 얘기할 맛이 안 난다. 시간 좀 안 지켰다고 열 받고 화내는 사람들은(J) 인격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사람들이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 깊숙한 곳에 있었던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들이었다. 겉으로는 문제없는 듯,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 대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렇듯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밀어내고 있었다. MBTI는 내가 형제 자매들을 어떤 잣대로 바라보고 정죄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였다.

보물 Level 4 죄를 깨닫게 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주님과의 깊이 있는 교제의 시간으로 만들지 않고 끊임없이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서 관계를 찾아 가기.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이라는 피드백이 없으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누군가의 칭찬에 의해서만 일을 하고 움직이기. 진지하고 지루한 얘기들은 무조건 듣지 않고 귀를 막아버리기. 충동적으로 시간을 쓰고 충동적으로 구매하며 규모 없는 삶을 살기.

결국 MBTI는 ‘나’라는 독특한 존재가 독특하게 범하는 죄를 깨닫게 하였다. 내 영성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시 바로 내 성격유형 안에 숨겨져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는 깊이 회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영성의 길을 걷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아군과 적군을 모두 알았으니 그 싸움이 손에 잡힌 것이 아니겠는가?

보물 Level 5 믿음은 기질을 뛰어 넘는다

이렇게 MBTI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장점이 있는 그 지점에 바로 내 약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때론 좌절스럽다. 저 사람과 내가 이렇게도 다르게 생겨 먹었는데 어쩔 것인가? 나와 정반대의 유형을 가진 저 사람과 대체 어느 지점에서 만나서 대화와 삶의 일치점을 찾을 것인가?

그 때 들어야 하는 한 마디가 있었다. ‘믿음은 기질을 뛰어 넘는다!’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은 언젠가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형제자매를 위해서 기질을 한 번 두 번 뛰어넘던 우리들은 주님과 더불어 MBTI 검사결과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분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는 그 날에 우리 모두의 MBTI유형은 EI-SN-TF-JP!! 이것이 되지 않을까?

<MBTI와 공동체 세우기> 마지막 글
QTzine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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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천국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 -NF기질

청년부 회장 L씨는 청년부의 모임과 뒤풀이가 어때도 상관없다. 때론 모임이 좀 학술적이어도 좋고, 때론 놀자판이 되어도 좋다. 출석률이 저조한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고 임원들이 좀 열심을 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으니…, '모임이 쓰잘 데 없이 되는 것, 즉 모임이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 그것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다. L 회장은 때로 진지하게 말씀에 대해서 나눌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속이 없는 사람처럼 푼수 짓을 해서 사람들을 웃길 수도 있지만 푼수가 되는 그 순간에도 L회장의 목적은 하나다.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

이제껏 소개한 세 가지 유형(NT, SP, SJ)에 비해서 NF 유형에 대한 설명은 좀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NF들은 이상적인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NF들의 목적은 너무 이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조차도 그 목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세 유형들이 NF와의 대화에서 보다 더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한 SP가 NF와의 오랜 대화를 마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한 마디가 '천국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반면 좀 통하는 NF들끼리의 대화는 '쩍하면 짝이고' '어하면 아'하고 알아듣는다니 NF들은 천국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NF들의 기본적인 욕구는 자아실현 내지는 자아통합이다. 이것은 독특한 자신만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검증은 아마도 따뜻한 관계들 속에서 오는 피드백을 통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NF들에게는 남달리 정서적 유대 내지는 정서적 관계, NF들 자신의 표현방식으로 말한다면 '의미 있는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NF들은 공동체 안의 따뜻한 햇살이다. 정서적인 교류에 대한 남다른 욕구와 감각이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보살피는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불사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NF일 것이다. SJ들이 끝없는 책임감으로 공동체를 지켜나간다면 NF들은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무한히 공동체를 향하여 자신을 통째로 쏟아 부을 것이다. 흔히 좀 다루기(?) 어려워서 대부분의 조장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폭탄 조원이 있다하자. 이 폭탄을 어느 NF 조장이 맘먹고 찍었다 하자. 아마도 그러면 다른 어떤 조장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깊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그 폭탄을 무장해제 시키고 공동체 안으로 정착시켜 놓고야 말 것이다.

NF들에게는 '의미'가 중요한데 그 '의미'는 NT들의 것처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의미'를 추론하는 과정과 결론이 다른 사람에게는 숨겨진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게다가 NF들이 유형의 특성상 조목조목 따져서 잘 설명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다. NF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여 결정하는 것들이 다른 유형에게는 '그 때 그 때 다르다'고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리더가 NF라면 자신의 의미법칙에 충실한 결정에 아랫사람들은 '일관성이 없는 결정'이라는 불평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혹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쳐지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진실한 자아의 통합, 진실한 관계'를 삶의 목적으로 하는 NF가 '진실하지 않다'는 평은 최악의 평이 아니겠는가? NT들에게 '무능하다'라는 평은 가급적 삼가 해야 하는 것처럼 NF에게 '진실하지 않다'라는 평도 극도로 피해야 할 말이다.

NF들이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용어들을 좀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 없이 살아갈 때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사는 힘겨움이 남다를 것이다. NF들에게 교회를 포함한 이 세상은 너무도 가볍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이상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될 때 더욱 빛을 발하고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다.
  1. 2da 2012.03.20 14:44

    사모뉨 자주올게요^^

QTzine 4월호 <MBTI와 공동체 세우기
 

갑자기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져 사람들이 집을 향해 걷는 걸음이 빨라지는 수요일 저녁. 이런 날 잡혀있는 기도회 모임이 그나마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SJ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한 번 맡은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SJ들이다.
SJ들이 있어서 연말이면 개근상 받을 사람들이 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우리의 모임은 늘 최소한의 인원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SP들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성경공부 시간은 빼 먹지 않고 시간을 채우게 될 것이며, 공작에 실패한 SP들은
결국 혼자 '땡땡이'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

SJ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를 찾으라 하면 '의무'이다. 이들의 남다른 욕구는 어딘가에 '소속' 되는 것, 그리고 그 소속된 곳에서 '의무'를 가지며 그 '의무'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충동적이기를 원하는 SP들과는 상반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SP들이 일을 해도 노는 것처럼 보인다면 SJ들은 놀아도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SJ들의 관심은 자신이 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해야만 하는 것을 하기 원하기 때문에 전통이 지켜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련회나 특별행사를 계획하는 임원 모인에서 SJ들은 '작년에도 이렇게 했으니까, 늘 이렇게 해 왔으니까' 하면서 이제껏의 방식을 유지해 나가기를 원할 것이다. SJ들이 그렇게도 예전의 방식, 전통을 따르고 싶은 이유는 이것이다. NT들이 자신의 유능감을 확인하는데서 안전함을 느끼는 것처럼 SJ들은 자신이 어딘가에 속해 있고 그것이 흔들림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 안전함을 느낀다. 잦은 변화는 흔들림 없는 소속감을 그야말로 흔들어 놓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보배라 불린다. 결석이나 지각이 별로 없이 늘 자리를 지켜주는 SJ 구성원들이 많은 소그룹의 리더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는가!게다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SJ들은 상사나 웃사람의 권위를 인정하고 잘 복종하는 사람들이다. 또 보호자적 기질인 SJ들은 한결같이 충성스럽게 공동체를 섬기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소그룹의 리더들이 역시 또 욕심 부릴 일이 아니다. 소그룹의 다수를 SJ로만 구성한다면 그 그룹은 때로 조금은 지루한 모임이 될 지도 모르며, 늘 일을 하듯 모임을 하고 일을 하듯 모임의 뒷풀이를 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SJ 리더라면 자신이 소그룹을 이끌어 가는 방식이 다분히 일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조원들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SJ의 수준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통제의 수위는 대부분의 SP들과 어떤 NT 또는 NF들에게는 보다 심한 압박(?)으로 느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SJ들에게 좋은 격려는 '일을 잘했다', 즉 이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수련회를 준비하고 마치고 뒤처리까지 확실하게 해내는 SJ총무를 그냥 돌려보내지 말 것이다. 그가 꼼꼼히 준비하고 진행한 수련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잘 치러졌는지에 대해서 한 마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SJ자신들은 열심히 근면하게 노력하는 삶 속에 하나님이 일하실 틈을 남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 혹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 조차 스스로 밀어내는 것은 아닌지 자주 돌아보면 어떨까? 하나님께서는 SJ들이 맡겨진 많은 일들을 완벽하완벽하게 끝까지 책임지기 전에 이.미. SJ들을 보배롭고 가치있게 여기신다는 사실!
<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3월호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만난 두 사람 이야기. 레크레이션이면 레크레이션, 천로역정이면 천로역정 도대체 P선생이 맡는 프로그램은 대박이 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은근히 P선생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H선생. 슬쩍 P선생의 교사수첩을 들여다보았다. 프로그램 준비를 어떻게 했길래 애들이 그렇게 재밌어서 난리를 친단 말인가?
'에게게!'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P선생이 들고 있던 다이어리에는
고작 게임 제목 몇 개만 달랑 적혀있다. 그렇다고 따로 자료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레크레이션을 맡을 때마다 온갖 책이란 책은 다 뒤지고 인터넷을 구석구석 뒤져서 깨알 같이 적는 준비를 하고도 별로 성공해
본 적이 없는 H선생은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자신보다 늘 불성실해 보이는 저 P선생의 성공을 곱게 바라볼 수가 없는 H선생…

연습 없이 실전에 강한 사람들,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처럼 연습 없이 순간의 작곡으로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SP이다. 이들에게는 순간의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다. NT들이 '능력'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었다면 SP들은 '행동' 즉, '순간의 행동'에 모든 걸 거는 사람들이다. 행동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때문에 SP들은 본질적으로 충동적이다. 한 번씩 놀아줘야 삶의 에너지가 나온다는 이들은 휴가를 미리 내서 계획을 세우고 노는 것은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한 어느 날 갑자기 오후 휴가를 내고는 마음에 떠오르는 일을 하는 것, 이런 류의 놀기가 최고의 휴식이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양념이다. 모임이 지루해질 즈음에 재치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워주는 사람들이다. 소그룹 공동체에 SP, 특히 외향형의 SP가 한두 명 있다면 모임이 진행되는 내내 간간이 폭소가 터지고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그룹의 리더들이 욕심을 부리다 보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소그룹의 다수를 SP로 구성한다면 매주 성경공부가 제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재미없는 지루한 시간을 오래 버티기'에 약한 SP들이 무슨 이유를 끌어다 붙이든 결국 성경공부를 대충하고 놀러가는 분위기로 만들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SP 초신자를 수련회에 데려갔다면 너무 빡세게 굴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유롭게 두는 것, 지나친 통제를 삼가는 것이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혹 당신이 SP 리더라면 '내 성경공부 인도가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조원들이 지루해하면 어떡하지?'에 대해서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신의 조원들 중에 당신만큼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NT들에게 그들의 '능력'에 대해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격려가 된다면, SP들에게는 이들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 그것을 인정해주는 것이 좋은 격려가 될 수 있다.

어느 유형이든 기질이든 장점이 있는 곳에 약점이 있듯이 '기쁨과 재미'를 추구하는 SP들 역시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양념으로서의 역할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양념이 지나치면 음식 맛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행동, 일상, 재미, 충동'에 매료되어 영성의 길에 균형을 잃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2월호

NT ; 세상은 넓은데 칭찬할 것은 너무도 없다!

이제껏 설명한 ‘쌍을 이루는 네 가지 지표’는 서로서로 조합해서 16가지의 성격유형을 만들 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MBTI 검사를 받게 되면 이 16가지 유형 중 하나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사실 어느 누가 열여섯 개의 네모 칸의 틀에 꿰맞춰져 그 속에 들어 앉아 있고 싶겠는가?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과 함께 좀 더 객관화된 나를 알고 싶어질 때, 내가 들어가 있는 그 네모 칸의 사람들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좋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나와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데 내가 가진 코드로는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 그가 들어있는 네모 칸을 들여다보면 역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MBTI 검사를 통해 16가지 유형을 살펴보면 같은 유형에서는 공통점을, 다른 유형에서는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16가지는 다시 크게 4가지 패턴으로 묶을 수 있는데, 흔히 이 네 가지 패턴을 ‘기질’이라 부른다. 기질은 ‘행동 이전의 마음의 패턴’이다. 다시 말해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고유하게 유지되는 선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기질을 이해하면 16가지 유형 안에서의 자신을 좀 더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네 가지 기질이란 SP, SJ, NT, NF를 말하는데, 이 네 기질은 각각 기본적인 욕구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때문에 각각의 유형이 외향이나 내향인 것에 상관없이 다양한 행동에 있어서 일관성을 갖게 된다.

이것은 실화다. 예전 청년부 시절에 한 점잖은 K라는 남자 후배가 있었다. 늘 진지하고 좀처럼 실없는 농담이라곤 하지 않는 후배였다. 어느 주일, 청년부 모임을 마치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정리를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K 후배가 어느 자매 옆에 서서는 ‘어디서 오이 냄새가 나지?’ ‘누나 어디서 오이 냄새가 나요’ 하는 것이다. 이 ‘오이냄새’ 운운하는 소리를 한두 더 하자 옆에 있던 한 자매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하더니만 쌩하니 퇴장해 버렸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문제의 오이 냄새는 그 자매가 뿌리고 온 향수냄새였다. 우리의 K군은 나름대로 그 향수의 향기가 좋다는 표현을 해주고 싶어서 불쑥 꺼낸 말이 ‘오이 냄새’였고, 그 말이 자신을 놀린다고 여겼던 자매는 퇴장을 한 것이다.

또 다른 실화다.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나는(필자는) 시어머님의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해 때로 이것이 칭찬인지 아부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것들을 한다. 문제는 남편! 어머님이 신경 써서 음식을 해 놓으시고 진정 칭찬을 받고 싶은 대상은 당신의 아들이다. 워낙 별로 표현이 없거니와 칭찬 같은 건 더더욱 없는 아들이니…. 어머님의 섭섭함이 지나치게 쌓여간다 싶을 무렵 남편에게 협박을 했다. ‘살아남고 싶으면 어머니 음식에 칭찬을 해 드리라’고.
남편과 둘이 어머님이 끓이신 된장찌개를 놓고 식사하는 중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된장찌개는 정말 입맛 난다니까요' 하면서 후후거리면 먹었다. 남편도 맛있게 먹기에 '맛있어? 어머니한테 표현 좀 해드려' 하고 살짝 속삭였습니다. 남편, 비장하게 알았다는 싸인. 그리고 어머니가 식탁 가까이 오시자 남편이 하는 칭.찬. 오늘은 된장찌개 맛이 이상해' 이러는 것이다. 어머니도 널름하신 표정을 ‘된장 두 가지를 섞어 넣어서 그래’ 하신다. 남편은 칭찬을 했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밥을 먹는다. 어쩔 수 없이 내가(필자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맛이 없어?' 부드럽게 말하면서 눈으로는 '똑바로 다시 말해. 죽어!' 하는 메시지를 보냈더니만 그제야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약간 오버 하면서 '아니~ 맛있지. 우리 어머니 된장찌게야 최고지!' 한다.

NT들은 좀처럼 칭찬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칭찬이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하는 칭찬도 경우에 따라서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는 것 같다. 왜 일까? NT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힘(Power)’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자연을 대상으로 발휘되는 힘이다. 다시 말해서, 현상을 이해하고, 조정 통제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뜻한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해서 NT들이 말하는 힘은 권력이 아니라 능력과 자질과 재능과 재주와 기술 같은 것들이다. NT들은 능력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만큼 유능해지려 하기 때문에 늘 기준이 높은 사람들이다. 어떤 면에서든 이렇게 기준이 높다보니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칭찬할 꺼리가 없는 것이다. ‘칭찬 좀 하시오’ 하면 ‘칭찬할 것이 있어야 칭찬을 하죠’ 하는 것이 십중팔구 NT들의 답일 것이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지식을 축적해 가는 ‘지성’에 대한 사랑이 NT들에게는 각별할 텐데, ‘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재밌고 짜릿한 수련회를 원한다면(특히 SP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할 때 NT 회장을 잘 마크해야 할 것이다. NT 회장은 아마도 독서 토론이나 주제 토의를 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청년부에 흥미를 못 느끼는 NT를 붙들고 싶다면 거한 에프터보다는 이들의 지적인 욕구를 터치해 주는 모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분명 이들은 ‘공동체 안의 지성’이다.

NT기질의 사람들에게 ‘사기꾼’ ‘거짓말쟁이’ 등의 비난을 한다면 ‘그 말에 일리가 있을지도 몰라’ 하면서 그 비평에 수긍할지 모르겠다. NT기질은 모든 유형 중에서 가장 자기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의심과 회의를 자주 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에게 ‘무능하다’라는 비평을 가한다면 이는 쉽게 수긍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아킬레스건을 치는 일격이라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이들의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NT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고민과 의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잘 통찰하고 때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이들에게 남겨진 하나의 숙제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QTzine 200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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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와 P ; 일정표는 지켜져야 한다 VS 일정이 변경되면 즐거워진다

수련회를 준비하는 왕J(흔히 선호경향이 뚜렷한 유형들에 우리는 '왕'을 붙인다) 회장의 다이어리는 준비일정, 준비물, 역할분담을 위해서 임원들에게 지시할 것들의 메모로 넘쳐날지 모르겠다. 왕J 회장이 게다가 왕SJ라면 수련회가 다가올수록 체크해야 할 것들이 누구보다 눈에 쫘악 보일 것이다. 그런데 발 빠르게 움직여줘야 할 이놈의 왕P 총무는 회의 때마다 늦기 일쑤요, 지난 회의 때 분명히 지시한 내용에 대해서도 대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식이다. 도대체 수련회 준비를 하자는 것이냐? 말자는 것이냐 우리의 왕J 회장은 총무를 믿다가는 이번 수련회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른다.
한편, 유유자적 왕P 총무. 계속 수련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늘 그랬다. 계속 생각하고 있다가 전날이나 전전날 쯤 이런 저런 확인을 하면 된다. 급히 준비하다가 빠뜨려서 후발대로 오는 사람들에게 열나게 전화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게 또 수련회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회의 때마다 A4 몇 장씩 돌리면서 계획 세우고 체크하고 또 체크하는 왕J회장이 참으로 답답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늘 할 말은 없다. 자신은 회의에 지각했고, 생각해보니 지난 시간 회의 때 준비해오마 했던 것을 까먹은 상태였으니까.
수련회나 단기선교를 같이 한 번 계획하고 준비하고 치러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또는 그녀가 J(판단형Judging)인지, P(인식형Perceivin)인지. J와 P는 생활양식이기 때문에 가까이서 살아보고, 함께 일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생활양식 즉, 일상을 사는 방식이기 때문에 부부 사이, 연인 사이, 함께 여러 일을 해야 하는 가까운 관계에서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은 선호경향이다.
왕P가 왕J를 만나서 함께 수련회 한 번 할라치면 시집살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J들은 늘 계획해야 하고. 계획한 것을 추진해야 하고, 시간 안에 계획된 모든 것을 마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P들은 계획 자체가 부담스럽다. 일이란 모름지기 융통성을 가지고 과정을 즐기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계획이야 언제든 변경될 수 있는 것이고, 갑자기 일어나는 그런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인생의 맛이라고 생각하는 P들. 이런 왕P와 함께 일해야 하는 왕J는 빠뜨린 준비물 챙기기부터 시작해서 뒤치다꺼리와 더불어 계획대로 하지 않는 P들의 유유자적함에 스트레스 받아서 쓰러질런지도 모른다.
이러다보면 극단적으로 J의 눈에 P들은 '불성실하고 덤벙거려서 같이 일하지 못할 사람'으로 P들에게 J는 '꼼꼼하다 못해 쪼잔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 서로에게 낙인이 찍히게 되지는 않을까?

앞의 세 가지 선호유형에서 그렇듯이 문제는 '다르게 생겨 먹은 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J와 P 사이 갈등해결의 출발인 것 같다. 분명한 것은 J와 P의 이 생활양식이 그 사람의 인격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함께 일하고 함께 지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의 스타일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것! 그렇게 쪼잔한(그러나 꼼꼼한), 그렇게 덤벙대는(그러나 융통성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다면 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J라면… 헉! 계획표와 일정표대로만 돌아가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어찌 숨을 쉬고 살겠는가? 반대로 모두 P라면? 으∼ 그 정리되지 않은 책상들과 미뤄진 일들, 빠뜨려 잃어버린 물건들… J들이 있어서 수련회 준비는 계획되고 추진되고 방향성을 가지고 치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P들이 있어서 펑크 난 수련회 프로그램이 신속하게 대체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일정이 조정되기도 할 것이다.


P와 J를 위한 의사소통 방식
1. P는 J에게 : J와 대화하기 전에는 의사결정을 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J와
함께 일하면서 어떤 일을 계획했는데 만약 일정을 변경할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미.리.알려 주라. J들은 다가올 상황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준비하기를 원한다.
2. J는 P에게 : P와 어떤 일정을 정할 때는 J 자신의 시간표보다 여유있는
시간배정을 하라. P들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연성 있게 대처하는 것을
자연스러워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P와 함께 일할 때는 마지막 순간에 변경
사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

<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12월호


T와 F ; 인정머리 없지만 공정한, 주변머리 없지만 따뜻한

모임의 한 자매가 머리를 새로 하고 왔다. 누가 봐도 이번 파머는 좀 아니다.
뭔가 사람들의 반응을 기대하는 그녀에게 한 마디 해줘야 할 텐데….
나름대로 신경 써서 반응하는 두 사람을 보자.
F형 : (조금은 당혹스러운 듯, 그러나 애써 그렇지 않은 척, 쭈뼛거리며)
'어?…머리했네! 어…언제 했어? 음…괜찮다. 성숙한 느낌이 드네~'
T형 :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어? 머리했어? 야! 나이 들어 보인다야~.
지난 번 머리가 훨 낫다. 담부터는 이 파마 절대 하지 마라!'

F형 T형 모두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언제든 사람을 돕겠다는 의지가 충천하며 지체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 한다. 그렇게 볼 때 위의 두 반응 모두 '새로 머리를 한 자매를 위.해.서. 마음을 쓴 반응들'이라 볼 수 있다. 마음은 같은데 반응이 어찌 이렇게 천지 차이일까? 두 사람의 변을 들어보아야겠다.

F형 : 물론 제가 봤을 때도 머리가 확실히 아니었죠. 그런데 그건 자기가 더 잘 알겠죠. 설령 모르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해요? '너 안 예쁘다' 하는 소리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딨어요? 예쁘게 보면 또 예쁜 거죠. 뭐∼

T형 : 아∼ 그건 제가 사람들을 아끼는 방식입니다. 진실을 가르쳐 줘야죠. 안 어울린다는 것을 알아야 다음번에 또 그렇게 하지 않죠. 진실이 중요한 겁니다.

감정형(Feeling)의 사람들의 관심은 '사람, 내지는 관계'이다. 객관적인 사실 자체보다는 어떤 사실이 사람이나 관계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서 빨리 느끼는 사람들이다. 반면 사고형(Thinking)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판단하는 방식이나 근거는 '사실 또는 진실'이다. 상황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편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필요, 특히 정서적 필요를 빨리 알아차리고 공감을 잘 해주는 감정형(F)의 사람들은 모임을 따뜻하게 하고 기름지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지, 공평하지 않은지를 빨리 알아차리는 사고형(T)의 사람들은 모임의 방향성과 틀을 잡아가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정도를 지나칠 때인 것 같다.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이 많고 그 필요를 채우겠다는 의지 충천한 감정형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주변 사람들을 간섭할는지 모르겠다. (특히 S이자 F인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반면, 자신의 유형에 너무나도 충실하기만 할 뿐인 사고형은 바른 말 하기 좋아해서, 자신의 바른 말에 상처 받는 영혼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F들이 더 상처받기 쉽다!)

가끔 예수님은 MBTI로 어떤 유형이실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말이다. 유대 지도자들과 서슴없이 논쟁에 임하기도 하고, 또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분명하게 진실을 인식시키시는 예수님을 보면 영락없는 사고형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반면, 길 잃은 양 같은 가난한 무리를 보며,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한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모습을 통해 감정형의 또 다른 전형을 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감정형들에게도 본이 되고, 사고형들에게도 본이 되신다.∧∧

공동체 안에 사고형과 감정형을 함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섞어 놓아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발생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데 말이다. 각각이 자기 기질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공동체를 섬길 때 예수님이 섬겨주신 그 섬김을 조금은 흉내 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고형들끼리, 감정형들끼리, 끼리끼리 모여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 인격의 반쪽 밖에는 닮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다. 서로의 스타일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때로는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를 온전하게 할 뿐 아니라 나를 온전하게 하는 길일 것이다.

<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11월호

S 와 N ; 코드가 안 맞는데어떻게 같이 가냐고요?

그룹성경공부 시간에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속 시원하게
이렇게 한 번 해대고 싶다. “주제가 있으면 주제에 맞게 얘기해야지 도대체 뭔 뜬금없는 소리야? 늘 저렇게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니, 도대체 앞 뒤 말의 맥락이 있어야지 말야,
참내! 그리고 갑자기 웬 비약? 정확한 근거라고는 하나도 대지 않구 말이야.
맨날 말끝마다 우리 청년회의 비전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플랜'이라곤 없어요.
머리를 구름에 쳐 박고 사냔 말이야! 아으~ 저렇게 현학적인 인간들, 딱 질색이야!”

당신이 그러고 있는 사이 그 현학적인 인간은 속으로 이렇게 해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저렇게 맨날 영양가(의미)도 없는 정보쪼가리만 나열하고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아귀를 맞춰보겠다는 거냐? 세상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어떻게 늘 현실성, 실용성만 따지냔 말이다. 말끝마다 매뉴얼 매뉴얼 하는데 도대체 인간이 '철학'이라곤 없어요, 참내! 그리고 어떤 주제가 나와도 다 끼는구먼.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 가지구. 크게 멀리 좀 보고 살으셔, 좀∼”

MBTI의 두 번째 지표인 감각(S: Sensing)과 직관(N: iNtuition)은 환경을 지각하는데 사용하는 렌즈라 할 수 있다. 즉 '환경이 어떻다면 우리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하는 문제로서, 감각 혹은 직관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의 차이를 말한다. 융(Jung)은 이러한 감각/직관에 의한 지각의 기능을 '비합리적'이라고 설명했는데, 그것들이 우리의 의식적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감각을 활용해 지각하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직관을 활용해 지각을 한다는 것이다.
오감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S(감각형)들은 자연스레 사실적 정보들을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또 자신이 가진 실제적 정보들을 삶에 활용하려고 할 것이고, 그러는 만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이 탁월할 것이다.
반면, 직관 내지는 육감으로 정보를 모으는 N(직관형)들은 여러 사실들로부터 '통찰'을 얻어내기를 좋아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사실적 표현보다는 암시적,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붉은색 장미를 보고 감각형들이 장미의 색깔, 향기, 부드러운 꽃잎을 먼저 지각한다면, 직관형들은 그 붉은 장미로부터 연상되는 그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다보면 (나머지 세 지표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도대체 감각형과 직관형 사이에 교집합이라곤 없다. 일의 '실용성'만을 따지는 감각형 회장과 어떤 것의 '의미'에만 몰두하는 직관형 총무가 마주 앉아서 청년부 수련회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고 치자. 수련회의 주제나 목적을 토의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픈 직관형과 개개 프로그램을 쌈박하게 짜 보고 싶은 감각형 사이에 언뜻 보아 교집합이 있느냐 말이다. (흔히 감각형은 '땅의 언어'를 말하고 직관형은 '하늘의 언어'를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적당히 타협하는 방식을 체득했기 때문에 내 보기에 옳아 보여도 끝까지 주장하지는 않는(못한)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서두에 있는 독백을 삼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으∼ 정말 이 인간하고는 코드가 안 맞아!!'
잘 대화하겠다는 선한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과의 대화가 자꾸 미끄덩거리면서 교차점이 찾아지지 않는다면 의심해 보라. 혹 '지각하는 방법이 다른가?' 즉, 감각으로 지각하는 코드와 직관으로 지각하는 코드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코드가 안 맞는 감각형을(직관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서두의 독백을 다시 한 번 힘차게 내뱉으며 돌아설 것인가? 열쇠는 이것이라 생각된다. 무.의.식.적.지.각! 상대방이 지각하는 방식은 내가 지각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답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감각형 독자들이 들고 일어서려나?∧∧) 해서 '코드가 맞지 않음이 당연한, 창조의 원리'를 인정하고 들어갈 때, 두 유형 간에도 상생의 가능성은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조금만 배려해 준다면 우리는 '숲도 보고 나무도 보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감각형은 직관형과 의사소통할 때 '일의 의미, 가능성'에 대해서 설명해 줄 것!
직관형은 감각형에게 더 많이 '구체적인 예'를 들어줄 것!

E와 I


예수님의 제자도는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라 한다. 그 제자도를 따르기 위해 우리는 정말 열심히 공동체를 지향해 나간다. 그런데 그 놈의 공동체 안에는 왜 그리 문제가 많은 것일까? 육안으로 보면 깔끔한 침대 매트리스가 몇 백 배 확대 현미경을 대고 보면 진드기가 득실거리는 것처럼, 화기애애하고 서로를 위한 섬김과 기도가 넘쳐나는 것 같은 소그룹 모임마다 왜 그리 복잡한 '관계문제'가 득실거리며, 그것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인가? 무엇보다 그 문제의 핵심에 '내'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 관계 문제의 구조를 파악하는 큰 틀로서 MBTI를 손에 넣고 난 다음, 나는 한결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흔히 관계에서 상처주고 상처받는 근본적인 원인이 '죄'라고 말하지만, 그 '죄'는 '각자의 기질적인 특성'이라는 옷을 입고 저질러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칼 융(Karl Jung)의 심리학을 배경으로, 상반되는 네 쌍의 지표를 가지고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 성격검사 도구이다. 네 쌍의 지표가 결합해 16가지의 성격유형을 만들어내는데, 모든 사람을 16가지 틀에 잡어 넣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사람을 이해하는 16가지 큰 틀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MBTI라는 창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비춰보면서, 사람들이 키가 작거나 크거나, 머리칼이 직모이거나 곱슬인 것처럼, 어떤 성격들은 나와 다르게 그렇게 태어났음과, 그 다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는 유익을 누리는 소그룹이 많아졌으면 하는 기대로 글을 시작한다.

남편과 함께 소그룹 모임에 나란히 앉을 때가 많다. 때로는 가벼운 수다가 때로는 깊은 나눔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가는 가운데 남편의 깊은 심호흡이 들린다. 그리고 '음…그…'하는 들릴락말락하는 소리. 소위 말해서 '남편식 발동걸기'이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고, 그 말을 하기 위해서 기회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순간 누군가 짧은 침묵의 공간을 가로채고 나선다면 '음…그…음…꿀꺽' 하고 말을 삼키는 소리가 뒤따라 들린다. 그러기를 두서너 번 반복하다가 어떤 모임에서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임을 마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그 모임의 리더는 시종일관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조원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 저 사람 디게 말도 없네.' 혹은 그 리더가 보다 강한 외향형의 사람이라면 '아∼ 저런 사람들은 어떻게 말을 시켜? 무슨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말야. 내 말을 먹나?' 이러면서 난감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외향형(E)이 질문을 듣고 대답하기까지는 3초가 걸린단다. 그러나 내향형(I)에게 동일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7초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외향형의 리더는 내향형의 조원에게 '이번 주 어떻게 지내셨어요?' 질문을 하고나서 자신의 기준으로 1초, 2초, 3초 후에 속으로 '에이∼ 또 말을 먹지' 하면서 화제를 바꾸기 십상이다. 7초의 발동을 걸던 내향형은 언제나처럼 '꿀꺽' 나머지 4초와 함께 준비하던 대답을 삼켜버릴 것이니 '말을 먹는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지 싶다.
마찬가지로 '3초 vs. 7초'의 원리로 생각해보면 끊임없는 수다 속에 내향형들이 신나게 떠들어대는 화자의 입만 따라 고개를 옮겨가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한 사람의 말과 말 사이에 도저히 7초라는 시간의 여유(Term)가 주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아예 말 자체를 포기하고 있기로 작정한 지 오래됐을 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빠른 리더는 여기까지 읽는 동안 뭔가 하나 건졌을 것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침묵을 두려워하지 말자! 최소한 7초의 침묵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서 내향형의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자!' 물론 7초의 기회가 많아진다 해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활용하고자 하는 내향형들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본의 아니게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실수는 원천봉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외향형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내향형들이 생각을 정리해서 말을 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외향형들은 말을 하고 떠들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니 그들의 입을 막는 것은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외향형들의 수다(?) 역시 배려 받아야 마땅한 공동체 안의 자산인 것이다. '아∼ 따, 디게 나서기 좋아하네.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네' 하면서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그들의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강은교 님의 시 <사랑법>을 패러디해 정리해 보면,
'떠들고 싶은 자 떠들게 하고, 침묵하고 싶은 자 침묵하게 하라.
그러나 침묵하는 자를 떠들게 하고 싶거든 언제든 7초의 여유를 두고 기다리라!

외향 에너지 방향, 주의초점 내향
Extraversion Introversion

감각 인식기능(정보수집) 직관
Sensing iNtuition

사고 판단기능(판단, 결정) 감정
Thinking Feeling

판단 이행양식·생활양식 인식
Judging Perce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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