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되어도 시집을 못 가고 있는 딸 걱정에 밤잠을 설치시는 우리 엄마에게 '책'은 괜한 미움의 대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나날이 책꽂이의 책만 늘려가고 있었다. 딸보다는 책을 구박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시집 못 가는 이유를 책에다 덮어씌우신다. '여자가 책을 많이 읽어서 똑똑해지면 못 쓴다' 하시며...…. 하긴 나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박사과정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놈의 혼수에 수백 권의 책을 동반할 여자 좋아할 남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있겠나? 무엇보다 함께 책을 읽으며 삶을 나눌 동등한 상대로 여자를 대할 그런 남자를 만날 수나 있는 걸까?"
남편과 함께 쓴 책 《와우결혼》 중 일부이다. 저런 염려를 했었지만 다행히 나보다 책 중독 증상이 더 심한 남자를 만나서 '서재 결혼 시키기'에 성공했다. (《 서재 결혼 시키기》라는 제목의 책이 실제로 있다.) 책이 인연이 되어 만나고 같은 책을 읽다 헤어지고 다시 만난 커플답게, 우리집의 트레이드마크는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이다. 결혼 당시보다 책꽂이는 두 배가 되었지만 어느새 포화상태가 되었다. '이제 정말 책값 줄이자. 책 사지 말고 있는 책 다시 보고, 안 읽은 책 다 읽도록 하자' 다짐하고 결심하기를 반복. 잘 지켜지질 않는다. 눈치 보기 싫어서 아예 알라딘 계정을 따로 만들었는데 주문 넣을 때마다 몰래 죄짓는 느낌이다. 남편도 사정은 마찬가지. '당신 그 책 나온 거 알아? 그 책은 읽어봐야지/애들도 같이 읽어봐야 할 책이 있어/마가복음 성경공부 준비해야 하니까 꼭 필요해서 산 거야' 묻지 않은 설명이 길어지면 이미 몇 권을 지르고 난 후이다. 자신을 포기 서로를 포기. 아무튼 서재를 결혼 시키고 가꾸어 왔다.
요 며칠 책꽂이가 한 칸씩 비어간다. 남편이 출근 때마다 한 보따리씩 싸 들고 나가기 때문이다. 혼자 사용하는 사무실이 생겼으니 최대한 가지고 나가겠다는 선언을 했다. 서재 독립선언이다. 결혼 18년 되는 서재는 딴 살림을 차리게 된다. 자연스럽고도 기분 좋은 헤어짐이다. 헐렁해진 책꽂이에는 작은 소품이나 액자 같은 것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사할 집의 거실 구조와 이전의 집들과 전혀 달라서 모처럼 함께 창의력 발동 중인데 '마주 보는 책꽂이 거실'을 탈피하여 어떤 모양새가 될지 기대 반, 염려 반이다. 아무튼 이 변화가 여러 모로 시의적절하다.
이우교회 청년들과 함께 한 연애 세미나 마쳤다. 마지막 강의는 남편과 함께했는데 오랜만의 더블 강의이다. 애써 맞춰보지 않았고, 강의 구조도 느슨했다. 디스전과 은근 띄워주기를 오가면서 주거니 받거니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부부가 함께 우리의 결혼을 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의 유익이 있다. 한 발 물러서서 우리의 결혼을 바라보고, 낯선 눈으로 서로를 관찰하게 되는 경험이다. 강의 때마다 하는 말인데도 나란히 서서 듣다 보면 새롭게 들리는 것들도 있다. 남편이 20대 때 전도서를 읽으며 얻은 통찰이라고 했던 얘기가 오늘 처음 듣는 얘기처럼 맑게 들렸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온통 부정문으로 가득 찬 전도서에서 유일한 긍정적 권면이 저 말씀이었다 한다. 해 아래 모든 일이 헛되고 허망하니 오직 사랑하는 아내와 즐겁게 살라! 그래, 삶의 모든 것은 실패해도 행복한 가정, 아내와 즐겁게 사는 것만은 꼭 이뤄야겠구나. 결심했다고. 실제로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 원칙을 지키려 애썼다.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았고, 그런 선택에 대해 세상이 지지를 보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리석거나 유별나다는 식의 눈길을 받아왔다. 그러나 오늘 문득 돌이켜보니 잘한 일인 것 같다. 요즘 결혼 강의할 때마다 강조하는 바가 있는데 '결혼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은 대상을 위해서 내 마음자리를 넓히는 일이다. 사랑을 위한 성장을 지향하면 사랑의 신비가 가져다주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하고자 하지만 사랑의 성장에 관심이 없다면 거기서 행복은 영영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된다.
이번 이사는 장롱 침대를 새로 바꾸는 엄청난 일도 있다. 신혼 가구로 들였던 장롱이 더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가구를 고르며 생각해보니 이제 들이면 또 20년을 써야 한다. 20년 후면 70이다. 둘이 이생에서 함께 쓰는 마지막 장롱과 침대가 될 것이다. 아마도. 아, 이렇게 우리는 결혼생활 전반을 끝내고 후반으로 가는 것이다. 이 시점에 한 가족이 된 이우 청년들과 결혼을 이야기하며 우리를 돌아본 시간이 더욱 의미 있구나!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는 오늘 나눈 강의 내용을 힘을 다해 살아온 결혼 초반부이다. 이제 남은 날동안 하나됨의 신비로 얻은 유익을 흘려보내는 삶으로 살아야지 싶다. 서재만 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 더욱 자기 자신이 되어 홀로도 의연하게 잘 사는 삶으로. 유약한 의존이 아니라 나란히 제 발로 걷는 동반으로. 어른 부부가 되기 위해서 오늘도 새로운 떠.남.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년 만의 기적 (0) | 2017.04.09 |
---|---|
어제가 된 현재 (6) | 2017.02.28 |
이우교회 연애와 사랑 세미나 (4) | 2017.01.07 |
병원 크리스마스 (8) | 2016.12.26 |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걸으며 (20) | 2016.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