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CT Korea) 10월호에서 커버스토리로
'짝 찾아 주는 교회가 늘고 있다. 어떻게? 왜?!'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젊은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들이 바라는 연애와 결혼을 가까이서 들었다. 그 시절을 거쳐 온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삶의 궤적이었다. 다행한 일은 교회가 이들의 청춘사업이 애먼 항로로 접어들어 난파하지 않도록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점이다. 청춘의 시행착오를 홀로 암중모색하면서 해결하도록 놓아두지 않고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 새로운 흐름을 전문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난파하는 연애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새로운 흐름을 전문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난파하는 연애를 구원할 수 있을까. 세 명을 찾아 다섯 질문을 내밀었다. 우문에 현답을 주셨다. 핵심을 추려 지면에 소개한다.
(CTK 10월호 기사 중 일부)
위에서 말한 세 명의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인터뷰를 했고 저런 헤벌쭉 사진과 함께 기사화 되었습니다. ('전문가 아니므니다' 라며 펄쩍 뛰면서 책임회피하기는 그만하기로 했음. 전문가도 아니지만 전문가 아닌 것도 아닌 것으로 하기로..... 픕)
여름 동안에 라디오, 티브이, CTK 인터뷰를 연달아 했는데 마지막의 CTK 인터뷰가 제일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여운이 많이 남았는데.... '대답을 잘 못했다. 에이, 바보같이 왜 그렇게 말했을까?' 이런 느낌이 아니라 많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인터뷰를 마쳤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들이 마음에 살아 기도하며, 일상을 살며 퍼뜩퍼뜩 떠오르고 그에 더욱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인터뷰 후에 내용이 정리되어 보내져왔는데 제목을 '내가 무엇을 못 견디는지 알아야 한다' 라고 뽑으더군요. 이렇게 뽑힌 제목 또한 내게 무엇인가를 던져주었습니다. 3인을 인터뷰하신 편집장께서 비교견적(뭐래? 견적이 뭐야, 견적이? 풉) 하셔서 아무래도 개성을 찾아 뽑은 문장이라고 생각하니 말이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문장이 들어있는 질문과 답을 옮겨놓아 봅니다.
Q : 그래서 미혼 그리스도인이 배우자를 찾는 기준이나 항목들이 비그리스도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상대의 '신앙'을 그래도 먼저 몬다는데, 대체 그 신앙의 정체는 무엇이 돼야 할까. 젊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결혼을 혁신하기 위해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ㅋ
A :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든, 소개팅을 했든 보통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질문이 머무른다. 신앙을 보든, 성품, 가정의 배경을 보든 내가 무엇을 못 견디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자매가 정말 가난하게 사는 것을 견딜 수 없다면 스펙이나 경제력 따져서 결혼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나님이 중요하고 그런 것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명품 가방 꼭 매고 다녀야하는 친구들은 자기를 잘 모르는 것이다. (모르거나 속이는 것이다. 형제들도 마찬가지.) 자기를 알고 자기가 견딜 수 있는 사람ㅇ르 만나야 한다. 하지만 결혼한 이후에는 자기가 견디겠다고 한 것들은 감수해야 한다. 자기가 경제력을 선택했는데 부부가 함께 교회 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남편을 교회 등한시 한다며 닦달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결국 결혼은 선택의 문제다.
좋은 결혼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지만, 최고의 준비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허락하신 내 짝인가?'를 고민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관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보다는 내가 '저 사람의 어떤 부분을 최악의 경우에 감당할 수 있겠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입니다.(물론 아무리 머리 터져라 생각해도 결혼의 뚜껑을 열어보면 예상문제는 거의 빗나가는 법이지만) 연애와 결혼이 아니어도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평생 하고 또 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더 절실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해 새로운 마음으로 생각해봅니다. 마침, 2년을 연재해오던 <에니어그램과 함께한 내적여정>이 마지막 한 개의 글의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정 정도의 답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나 믿고 싶은 내가 아니라 '아홉 개의 틀로 보는 객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냐만은)이라는 관점으로 나는 누구인가? 정도는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 하는 것이었지요.
소설가 이인화님이 묻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오우 연애>의 정신실도 덩달아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못 견디는 지 아는 자는 누구인가. (풉,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