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갓집 막내며느린데, 심정적으론 맏며느리로 살았다. 거듭되는 명절을 통해 단련된 23년 차. 막내며느리, 맏며느리 상관없이 대한민국 며느리이며 딸이며 여자는 엇비슷한 짐을 지고 산다. 곡절없이 지나는 명절이 없다. 명절이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문제다. 구조를 파계하여 며느리 명절을 잘 지내고 엄마에게 갔다.
엄마 산소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채윤이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외할머니한테 가자." 명절 오후, 사랑의 의무 또는 의무의 사랑의 짐을 내려놓는 시간에는 엄마에게 갔었다. 그리 편하진 않았었다. 명절 음식을 차려놓고 맞아주는 친정엄마가 아니었다. 또 다른 어떤 며느리를 착취함으로 생존하는, 전적으로 의존된 엄마였다. 엄마를 중심으로 엄마 집에 모여든 친정 식구들은 엄마 며느리에겐 또 다른 부담이었다. 딸의 정체성으로 친정을 찾는 마음도 편하진 않았었다.
눈이 와서 얼마나 다행인가. 조금 다른 풍경이라서. 불과 2년의 시간이지만, 뻔한 감정이 되기에는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뻔한 감정으로 슬퍼하지 않고, 그저 엄마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냥 엄마를 생각하니 그 어느 때보다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워 이제 막 엄마를 잃은 느낌이었다. 눈 덮인 세상이 평온하니 조용히 흐르는 눈물 몇 줄기를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강화도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맛있는 디저트를 즐기기로 했다. 적당히 슬퍼하고, 주어진 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마음으로달리는 길. 철새로 추정되는 어느 가족을 발견했다. 차를 세우고 혼자 내려 조심조심 다가갔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 가족, 퍼드득 자리를 뜨고야 만다. 덕분에 날아오르는 더 나은 순간을 포착했다.
늦은 점심으로 먹어 더 맛있는 칼국수, 핸드드립 커피와 장인이 구운 빵도 좋았다. 내 마음엔 또 다른 시간의 강이 흐른다.
엄마가 내 마음에 살아있다. 이제야 슬픔이 무엇인지 알겠다. 엄마가 내 마음에 살아 있다는 것은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니까. 이것이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인데, 갈수록 누구와도 나눌 수는 없는 감정이다. 가족은 물론 같은 엄마를 잃은 동생과도 말이다. 동생이 평생 만난 엄마와 나의 엄마가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으니. 엄마 돌아가시고 매일 새롭게 다른 엄마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평생 엄마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 천국에 있는 엄마 영혼은 매일 매 순간 내가 모르는 새로운 시간을 사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사람 마음이 참. 엄마만 살아 있으면 지금을 살아내느라 힘든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것 깉은 환상이라니.
엄마, 거긴 어때? 거기 모든 것이 매 순간 새롭지? 여기랑는 딴판이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고 지옥 가는 모든 길이 지옥이라고 시에나의 카타리아 성인이 말씀하셨는데. 내가 지금 매 순간을 새롭게 살아야 엄마 있는 그곳에 닿을 텐데... 엄마, 새로운 시간을 살자고 마음을 새롭게 하니 새롭게 엄마가 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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