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늘 일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해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의 의미'란 내게 '일의 기쁨'이었다. 대학 후 첫 직장인 유치원 교사를 그만 둔 즈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자체는 좋지만(그래서 일 자체는 의미가 있었다) 일하는 여건이 그렇게 비인간적인 직장생활은 하기가 싫다는(그래서 환경이 일의 의미를 앗아가고 있었다)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 이후로 새로운 공부를 하고, 그 당시로 하늘에 별 따기인 풀타임 음악치료사가 되어서의(것두 채윤일 낳고 5주 만에 첫 출근) 감동이란... 점심 때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앉아 식기도를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생애 식사기도 때 감사의 눈물을 그렇게 흘려본 적이 있었던고...
그 감동이 사라진 4년여 후에 퇴직을 하고, 일명 프리랜서 음악치료사로 약간의 강의와 함께 전전해 오고 있다. 작년 성대수술 이후로 음악치료사라는 명함을 내밀기에도 무색할 정도로 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종종 '10년 음악치료 했으니 이제 수명은 다 했어. 이젠 카페를 해야해' 라고 농담을 했었다.
최근 집 가까운 괜찮은 곳에서 풀타임 음악치료사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 잠시 맘이 흔들렸다. 내 인생 마지막으로 음악치료 한 번 더 해볼까? 이제 나이나 경력 때문에 파트타임으로 일할 곳도 없고.... 그렇게 맘이 흔들리면서 다시 한 번 소명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여유있는 시간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깊이있는 그 분과의 교제가 즐거운데 다시 빡빡한 현대인의 시계 속으로 들어가서도 이 알량한 영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주께 하듯, 성가대 지휘를 하듯,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직장동료들을 대하며 직장생활 할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출근하는 일이 너무 힘겹지 않을까?
하는 의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은 조금 불안해졌다. 그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이다. 그가 하는 말들과 때로 상관이 있고, 때론 상관이 없는 내 마음과 생각의 길이 그와 더불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싶은 가장 밑바닥의 욕구가 드러났다. 가장 깊은 욕구는 한 달에 한 번,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에 대한 기대. 그리고 전문직 여성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존경 정도였다.
보통씨가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이 사람은 절대 내놓고 얘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더군.^^) 일의 기쁨을 앗아가는 많은 이유들 중 하나는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에 목숨 걸고 일하는 것, 그리고 '전문화'라는 것이었다.('전문화'에 관한 부분은 따로 포스팅해 볼 생각) 아차! 싶었다. 이런 저런 명목 좋은 이유를 대서 남편을 설득하고 있었지만 내가 이 풀타임 자리에 마음이 심하게 흔들린 건 99.9% 따박따박 월급이었다는 것. 이러고 입사를 했으면 세 달이 가지 않아서 사직서를 못내서 안달을 할 것이었다.
그럼, 뭐 대부분 돈 때문에 일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어디 그리 흔하단 말인가? 그래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 라고 하지 않는가? 맞다. 현대인들이 대부분 그렇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기에 다들 월요일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고, 주말이 가는 소리에 불안증이 고조되고, 출근을 하면 주변 눈치 보면서 싸이하기에 바쁘고... 일 자체에서 기쁨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어째야 할까? 다시 소명을 생각했다. 소명은 부르심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머~얼리서 '일루와. 아니 아니.... 거기 아니다. 그 옆으루 가. 거기가 니 자리야. 이게 니 소명이다' 이러시는 분이 아님을 안다. 나와 아주 가까이, 아니 내 안에서 계시면서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아시는 분이다. 나와 함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가 주시는 분이다. 그걸 발견해 가는 것이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소명과 용기>의 저자 '고든 스미스'는 소명을 20대 진로 선택하면서 한 번 고민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암튼, 결론적으로 이력서를 낼까 말까 하던 고민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언제나 그렇듯 나는 다시 소명을 생각한다. 확성기를 대로 부르시는 그 어떤 거창한 부르심이 아닐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제 중년에 들어선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행복을 누리고 나누며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말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일상의 기쁨과 슬픔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일상은 '그럼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 다시 소명을 생각한다.
소명을 생각하는 나는 오늘 학교 다녀온 채윤이와 현승이를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고 블로거들의 댓글을 마음으로 받도 대화할 것이고, 회복되어가는 몸으로 인해서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할 것이고, 식구들을 위해 정성과 아이디어 가득한 저녁식사를 준비할 것이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고, 몇 권의 책을 조바심 내지 않고 마음으로 읽을 것이고, 간간이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있는 그 모든 일이 다 소명의 자리임을 순간순간 각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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