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살 만큼 사셨죠. 더 아프지 않고 돌아가시면 복이죠."
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엄마가 병원에 계셔서요. 곧 요양병원으로 가실 건데... 그 이후에 좀 여유가 생길 것 같아요. 네, 연락 드릴께요"
라고, 요즘 자주 말하고 있다.
"다시 걸으실 수 있을까요? 연세가 많으시기 때문에... 음.... 그리고 한 쪽이 골절되셨으면 다른 한 쪽도 골절 가능성 있습니다. 꼭 이것 때문이 아니어도 병원에 입원하고 그 날 돌아가시는 분도 있으니까 보호자께서 알아두셔야 하고요..."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은 듯, 원래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살 만큼 살았다구요? 도대체 얼마나 살아야 살 만큼 산 건데! 세상 어느 누구가 자기 엄마를 살 만큼 살았다며 기꺼이 죽음에 내어줄 수 있는데!!! 내 평생 살아 있는 동안에 엄마가 살아 있다해도 살 만큼 산 게 아니라구요!"
"산책도 하고, 혼자 버스 타고 교회도 가던 우리 엄마가 침대에 누워 꼼짝을 못해요. 내가 이 생각만 하면 돌아버릴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가.... 혼자 화장실도 못간다구요. 그래서 내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잡고 일상을 살아나갈 기분이 아니라구요."
"뭐라? 다시 걸을 수 있겠냐니! 다시 걸으실려고 노인네가 수술을 했는데. 다시 걸을 수 있겠냐구요? 다시 혼자 걷기 위해 수술하고 이 먼 요양병원 까지 온 우리 엄마를 놓고 의사라는 당신이 고작 할 수 있는 말이 그 날 돌아가시는 분도 있다고? 저 분이 누군줄 알아?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
오늘 엄마를 김천에 있는 노인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왔다.
누군가 나를 아이처럼 대해준다면 통곡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누구든 나를 아이처럼 대해 줄 리 없고, 무엇보다 나는 아이가 아니다.
덤덤하게 어른스럽게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나 처럼 사는 이는 나 밖에 없음을 안다.
그래서 '네, 맞아요. 사실 만큼 사셨죠. 엄마가 병원에 계셔서 제가 좀 바빠요. 아, 그렇죠. 연세가 있으니 장담할 수 없겠죠." 라며 살고 있다.
나와 같은 하루를 보낸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슴 한복판이, 몸의 일부분인 가슴이 이런 방식으로 아픈 하루를 보낸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엄마와 인사하고 병원을 나왔다.
코너를 도니 유리벽을 통해서 엄마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엄마가 멍한 얼굴로 바가지를 앞에 놓고 양치질을 하고 계셨다.
내 슬픔에 겨워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지만,
오늘 하루를 엄마 처럼 산 사람은 엄마 밖에 없다.
엄마의 외로움을, 엄마의 쓸쓸함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헤아려지지 않는 엄마의 하루라 생각하니,
엄마처럼 사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엄마의 오늘 하루는 나와 다르고 나는 거기에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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