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넌 매닝의 <아바의 자녀>를 만난 것은 에니어그램에 빠져서 꿀을 빨던 시기였다.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을 마치고 뜻밖에 연구소 강사 제안을 받았다. 고민 끝에 수락을 하고 가톨릭 단체인 연구소에 몸 담고 있던 기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수련을 받으면서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남편이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교회에 대한 희망이 메말라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신앙의 성숙과 인격의 성숙, 그리고 영적인 성숙에 대해서 풀지 못한 의문으로 살아온 내게 매일 매일 무릎을 치는 답이 주어지는 나날이기도 했다. 개신교 모태신앙으로 자란 내가 가톨릭 단체에 가서 지내면서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은 또 다른 과제였다. '같은 예수님이었는데, 사랑의 하나님이었는데 왜 이걸 교회에서 배우지 못하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하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는 아이처럼 주눅들고 긴장되었었다. 그때 브레넌 매닝을 만난 것이다. 사제서품을 받았던 그가 프란체스코회를 탈퇴하고 결혼을 했다는 것, 개신교의 (특히 나의 래래크랩!) 영성작가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저자소개만 보고 <신뢰>라는 그의 저서를 집어 들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넘너드는 저자라는 것만으로 꽂혔다. 그리고 <신뢰>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저서 <모든 것이 은혜다>까지, 어린이를 위한 책 <아바를 사랑한 아이>까지 읽고 또 읽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오가며 혼란스러운 내게, 한편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게 <아바의 자녀>는 꼼꼼하게 답해주었다. 놀랍도록 필요한 말을 내 마음에 넣어주었다.
사람의 내적동기를 살핀다는 에니어그램을 좀 배우고 나서 '남의 동기가 다 보인다'며 자만하고 판단하고 정신 못차리던 내게 브레넌은 말했다. '이 자리에 앉은 우리 중 누구도 한번이라도 남의 동기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 이면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이 아니었으면 나는 에니어그램이라는 그 좋은 도구를 가지고 사람을 난도질 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을까? 나를 구원시킨 말이었다.
진정성이란 느껴지지 않는 설교, 공허한 기도 소리, 은혜를 가장한 영적 게으름과 완고함 등으로 환멸이 깊어질 즈음이었다. 종교적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종교의 권위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서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우리 내면의 바리새인은 거짓자아의 종교적 얼굴이라고 그가 가르쳐 주었다. 내 안에 타오르던 분노와 환멸이 다른 사람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충격적 깨달음으로 나는 다시 태어나야 했다. 내 거짓자아는 싸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끌어 안아야 하는 진리를 알았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 '거짓자아의 이런 저런 면을 끌어안지 않을 때 그것은 적이 되어 우리를 방어적 자세로 몰아간다. (중략) 자신의 죄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자신의 참 자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베드로는 내면의 거짓 자아와 친구가 됐으나 유다는 자신의 거짓자아에 격분했다.
마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나는 그런 잠정적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향해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웬만한 요청들을 거절하지 못한다해도 내 마음이 외부에 영향받지 않을 딱딱한 상태이면 드러나는 것은 가짜요, 자기방어일 뿐이다. 브레넌은 이렇게 정리해 줬다. '영향을 입을 줄 모르는 심장은 인간 실존의 어두운 신비 중 하나다. 그 심장은 게으른 마음과 나른한 태도와 묵혀 둔 재능과 묻혀진 희망으로 인간 내부에서 차겁게 뛰고 있다.' 내 마음이 타인을 향하여 말랑말랑해지는 것, 무엇보다 아바의 사랑을 향해 말랑말랑해지는 것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마지막 저서 <모든 것이 은혜다>에서 보여준 그의 적나라한 고백은 한 글자도 빼놓을 수 없이 '모든 것이 내게 은혜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제였고, 영적 지도자였고, 유능한 강사였고, 저자였던) 브레넌을 그 이름 외에 달리 부를 호칭이 없다. 별다른 호칭을 가지지 않은 그가 마지막 저서에서 보여준 것은 '언해피 앤딩의 인생'이었다. 사랑을 위해서 사제 서품을 버리고 결혼을 했으나 이혼의 아픔을 안고 외롭게 노년을 보내는 그 쓸쓸함, 유능한 강사로 사람들을 감동시켜 주께 돌아오게 한 후 잠수를 타서는 알콜에 빠져들었음을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그 처절한 굴욕. 그런 적나라한 고백들은 '나는 인생 잘못 살았다.'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그의 삶에 어찌 자랑거리가 없으며, 성공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례가 없겠는가. 말년의 그에겐 '부랑아'의 여정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고 그럴 때 비로소 가슴으로 고백할 수 있는 말이 '모든 것이 은혜다'인 것이다. 온 몸으로, 전 인생으로 브레넌이 고백하는 것은 '은혜, 그렇게 값 싼 종교적 유희가 아니다' 라고 들린다.
지난 주일 아침,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단 뉴스를 들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처럼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주일 예배에 가서는 그를 마음에 품었고, 때문에 그 예배는 '브레넌 매닝 천국 환송예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천국을 향한 소망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한 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한 없이 고마운 분이다.
브레넌,
아바의 안전한 품에서 편안하시죠?
2년 전에 먼저 그 곳에 도착하신 그리운 저희 시아버님, 청년 한솔이,
오래 전, 어린 제게 크나큰 이별의 상처를 남기고 떠나
그 곳에 터줏대감이 되셨을 우리 아버지. 모두 만나셨나요?
헨리 나우웬 신부님과도 기쁘게 얼굴 마주하셨겠죠?
그 분들께 안부 전해 주세요.
특히 최근에 그 곳에 가신 저희 작은 고모 좀 챙겨 주세요.
이 곳에 사실 때 저희 남매와 엄마에게 굴욕감과 상처를 많이 주신 분이에요.
입관식에서 고모한테 말했거든요. 우리 아버지 만나면 싹싹 빌고 사과하라고요.
사과한 것이 확인되시면 이 말씀 전해 주세요.
고모도 누굴 사랑하거나 다독여 줄 처지는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고요.
그렇지만 고모를 용서하는 것은 제가 나중에 가서 직접 할게요.
저 역시 그 곳에서 그립던 모든 얼굴들 만날 수 있음을 알아요.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 라고 한 당신의 말을 기억해요.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가 있는 그 곳,
그 곳을 향해 한 걸음 씩 더 가까워지는 삶을 기쁘게 살아가며
죽음에 용감히 마주설 수 있도록 현존하는 부활을 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책 <아바의 자녀>에서 전해 준 그 고백들을 제게 선물처럼 주어진
에니어그램을 가르치면서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 일을 제 남은 인생의 소명이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고마워요. 브레넌.
거칠 것 없는 그 곳, 아바의 품에서 잘 지내세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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