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것 봐요

아이가 자라면서 혼자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면 하는 말이다. 낙서 같기도 피카소 작품 같기도 한 그림 한 장, 대충 쌓은 것 같은 블록 몇 개, 심지어 어떤 때는 도대체 뭘 보라고 부른 것인지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와우, 잘 만들었는데엄마의 피드백에 의기양양해져 또 다른 작품에 도전하며 자신감을 키우고 몸과 마음이 자랐다. 자아의식이 생기던 그때부터 우리는 바라봐 주는 누군가를 부르고 찾고 기다린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빠르게 보편화된 SNS는 앞 다투어 현시 욕구를 발산하고 충족시키는 광장이 되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있다, 난 이런 멋진 직업을 가지고 있다, 여친과 나 멋진 곳에서 데이트 중이다.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띄운다. 그리고는 페친들의 좋아요를 기다린다. 어렸을 적 엄마가 어머, 우리 아들 잘했어!’ 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관심이겠지만 그럴듯한 나를 봐주고, 부러워해주는 것이 좋다.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 더 세련되고 아니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 속 욕구는 비슷할 것이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면 왜 굳이 일기장에 쓰지 않고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내놓겠나. 올리자마자 속속 늘어나는 좋아요개수에 기분이 좋아지고 심지어 존재 자체로 인정받은 느낌까지 든다. 우린 모두는 봐주는 사람이 필요한 존재이다.

 

나도 널 본다

나도 수시로 본다. 시시각각 올라오는 친구들의 지금 여기를 본다. 친구의 글과 사진을 본다고 믿지만 많은 경우 그 ''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이다. '그 사람''그 글'이 불편하고 '보기 싫다'고 느끼지만 불편함과 보기 싫음의 절대 잣대는 없다. 그 글이 내.. 불편한 것이다. 내게는 몹시 불편한 글을 다른 멀쩡한 사람이 매우 좋다고 열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떤 친구의 여행사진에는 기분 좋게 좋아요해줬는데, 오랜만에 일상을 떠난다는 다른 친구의 공항사진에는 그래, 너 잘나가서 좋겠다. 좋은 직장이라 돈도 잘 벌고 휴가도 마음대로 낼 수 있으니하며 싸늘하게 쓱 밀어내리기도 한다. 저녁으로 뭘 먹었다는 시시한 글에 '좋아요' 누르는가 하면, 어떤 친구가 고백하는 깊은 아픔을 읽으며 '위선 떨고 있네' 하며 시야에서 쓱 치워버리기도 한다. 이런 심리적 '투사'는 일상에서 늘 일어나지만 얼굴 맞대고 커피 한 잔 하면서 자연스레 해소되는 것이 많다. 휴가내고 해외여행 간다며 공항사진 올린 친구를 우연히 만나 여행 갔더라. 잘 다녀왔어?’ 물었는데 직장 상사로 인해 사직을 고민하는 중이었다는 얘기, 그 얘길 하는 친구의 피곤하고 슬픈 눈을 마주하고는 잘 나가서 좋겠다며 뒤틀렸던 심사가 부끄러워진다. 이렇게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의 이미지로만 관계를 맺는다면 결국 투사 속에 허우적대다 과대망상, 피해망상 속에 빠져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본다

애매하게 주어를 생략해서 쓴 위의 이야기들은 불특정 페북 이용자들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즉흥적인 반응에 강하고, 감각적인 농담 따먹기는 더 좋아하는 터라 페이스북은 딱 내 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 현시욕 강한 내게 페이스북은 재미와 의미가 공존하는 놀이터였다. 문제는 항상 바보들의 놀이 비교에서 시작한다. 본업은 아니지만 어쩌다 B급 글쟁이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은 내 글과 다른 사람의 글을 줄을 세워 보여준다. ‘에잇, 이 사람은 도대체 언제 이렇게 책을 많이 읽은 거야. 글은 또 왜 이렇게 잘 써?’로 시작해서 투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마음은 금세 지옥으로 내려간다. 내 글보다 나을 것도 없는데 좋아요가 엄청나게 붙은 페친의 글을 째려보고, 허점을 찾아내고, 그러다 자존감이 쪼그라든다. 신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의 수려한 글을 읽다보면 심장이 벌떡거린다. 나보다 기수도 낮고 공부도 그리 잘했던 것 같지 않은데 교수님 호칭을 달고 있는 후배를 페친으로 만나는 날엔 유치한 줄 알지만 우울해지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 이미지를 붙들고 씨름하는 투사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치러야할 시간적 정서적 비용이 컸다.

 

나만이 나를 본다

연금술에서 바스 헤르메티스’(‘vas hermetis’ 라틴어로 헤르메스의 그릇’)라고 불리는 금을 만들 때 사용하는 그릇이 있단다. 그 안에 납을 담고 그릇을 밀봉한 뒤 열을 가하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행여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서 열기가 새어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단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그릇을 테메노스’(Temenos) 즉 심리적 그릇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나가지 않는 나만의 비밀이 있는 장소이다. 새어나가는 비밀이 없이 고요히 침잠한 심리적 에너지가 쌓일 때 납이 금이 되듯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통합된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금으로 단련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에너지를 단속할 일이다. 페이스북 등 SNS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다 뒤로 빠지고 그러다 어느 새 다시 몸을 담그고, 또 한 발 물러나고……. 이런 지점에서 나는 테메노스를 생각한다. 그럴듯한 나의 통찰과 경험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날 때 나의 테메노스에 깊이 던져두기로 하면 시끄럽던 내면이 조용해진다. 타인이 포장해 내놓은 이미지를 바라보며 혼자 소외감 느끼고, 좌절하고, 분노할 때도 내 마음의 그릇에 담겨 있어야 할 욕망들이 투사되어 나와 춤추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본다. 드러내고 표현하길 권하는 투명사회를 살면서 비밀스럽게 담아두는 것의 미덕을 깊이 생각해본다.

 

나의 페이스북 사용법

여전히 나는 페이스북 유저이다. 뭣 모르고 뛰어들어 신나게 놀아보기도, 마음을 다쳐 앓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다른 사람 아닌 내 마음에서 일렁이는 욕구와 숨어있는 욕망을 마주하게 되었다. , 내가 이 나이에도 나를 바라봐주는 눈을 그렇게나 갈망하는구나. 아무것도 아닌 좋아요하나에 울고 웃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내 모습이구나. 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페친은 영락없이 나 스스로 보기 싫어서 밀어 넣고 숨겨놓은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들이구나. 페이스북 뉴스피드을 거울로 인식하고 여기에 반사되어 꺾인 시선이 다시 내 안으로 향했을 때 생각의 전환, 일종의 회심이 일어났다. 그리고 내 의식수준과 마음그릇에 딱 맞는 페이스북 이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내 스마트폰 화면에 페이스북은 언론카테고리 안에 들어 있다. 뉴스 기능을 하는 페이지나 개인만 팔로우하여 구독하고 있다. 뉴스를 보던 무심한 눈으로 친구들의 일상을 보게 됨을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근황이 궁금한 친구는 일부러 검색해서 찾아 들어가 읽고 좋아요든 댓글이든 흔적을 남긴다. ‘조용히 훔쳐보기가 모두에게 허용되는 곳이 SNS 타임라인이다. 은밀하게 훔쳐보며 내게 필요한 정보를 슬쩍 챙기고, 그러다 부러워하고, 부러워하다 손가락질하고, 얼굴 보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낯선 웃음을 짓는 나의 관음증적 관계들. 내 영혼이 갈망하는 참된 만남은 그 관음증적 관계를 뒤집은 정반대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여.

 

* 100주년기념교회 20대 청년 회보 <100Tong>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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