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인디언의 기도도 있다. '위대한 신이시여, 내가 내 이웃의 모카신을 신고 한걸음이라도 걸어보기 전에는 결코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도록 해주소서' 신발은 몸과 땅이 맞닿는, 발의 옷이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내가 내 발로 든든히 선다는 것이다. 스스로 걷고 뛰며 나아가는 방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발은 존재의 근거 또는 삶의 방향성을 상징한다. 그래서인가. 주인공 셰릴이 높은 산 절벽 아래로 등산화 한 짝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의 막막함에 그저 사로잡히고 말았다. 피가 맺혀 양말에 딱 달라붙은 발가락, 덜렁덜렁하는 발톱. 그걸 뽑아내다 아아, 몸서리치며 뒤로 나자빠졌고, 세워둔 배낭이 쓰러졌졌고, 벗어놓은 등산화를 건드렸다. 등산화는 절벽 아래로 데굴데굴...... 아, 어떡해!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긴 것 같은데, 산 정상인 것 같은데 어쩌지? 정말 존재 그 자체가 빡침이라는 듯 한 마디 통쾌한 욕을 날리며 쉐릴은 남은 등산화 한 짝을 던져 버린다. 막막함으로 콱 막힌 가슴히 오히려 뚫리는 것 같다. 잘했어, 씨이. 어떻게 되겠지.
가난하고 상처 많은 가족이지만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엄마가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셰릴에게는 존재의 근거, 땅에 발을 딛고 서게 하는 신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줄 안다. 이젠 흔한 현수막 문구같은 이 말이 셰릴 엄마의 한 줄 인생이다. 술주정뱅이 폭력 남편을 피해 도망쳐 나와 남매를 키우면서 더 이상 이타적일 수 없는 희생적인 엄마이다. 이타적 엄마가 늦게 자기를 돌보며 공부를 시작한다. 엄마에게는 늘 삶을 향한 잔잔한 긍정의 에너지 가득이다. (늑대아이의 엄마도 생각난다. 영화의 엄마들은 왜 다 이러냐? 현실의 채윤이 엄마… 그만 울자!) 그런 엄마가 암선고를 받고 그 충격이 가실 시간도 없이 떠나버렸다. 존재의 근거를 잃은 셰릴은 막 살기로 작정. 신발 한 쪽 잃어버렸고 나머지 한쪽까지 던져버리는 심정으로 세상에 대고 욕하는 삶, 자신을 욕보이는 삶을 산다. 엄마도 없는데 착하게 살아서 뭐해. 착한 엄마를 그렇게 죽게한 신(이든 누구든) 다 실망시켜버릴 거야.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진 엄마의 사랑은 이 아이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껌 딱딱 씹으면서 반항과 분노의 가죽쟈켓을 입고 상담가 앞에 앉은 셰릴이 말한다. '저 그림 싫어요' '왜요?'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그리는 것 같어서요.'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나요?' 반항과 분노의 셰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온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있나? 셰릴의 PCT 홀로 수련회 주제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가? (사 43:3)' 이다. 끓이지 않은 딱딱한 등산용 식량을 씹어 먹으며, 시궁창 같은 물을 식수로 마시며, 또아리 튼 뱀을 피해 살금살금 달아나며, 짐승보다 더 짐승같은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며, 한 발 한 발 내대딜 때마다 발톱이 빠져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온몸에 상처, 상처 위에는 땟국물. 이런 프로그램으로 과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회심을 체험하는데 도움이 될까. 아, 프로그램 잘 짰다. 남편이 있지만 지금 당장 원하는 모든 남자와 섹스를 하고 헤로인을 하며 즐길대로 즐기는 삶. 이런 삶 대신 레모네이드 한 잔만 마시면 원이 없겠다는 결핍의 극한을 통과하며 셰릴의 몸과 마음에서 독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인간이 몸을 가졌다는 것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가.(누가? 인간이) 아픈 발가락을 어루만지고 냄새 나는 몸을 씻겨내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끓여진 죽을 입에 넣는 것으로 '나를 귀하게 여김'은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잠깐> 같이 영화를 본 남편이 두 가지 논평을 내놓았다. 1) 멋진 풍광이 많을텐데 굳이 그것들을 담지 않았다. 2) 영화에서 그려지는 남자들은 현실적이지가 않다. 우리 편 아니면 나쁜 나라. 1) 그러네. 카메라는 주로 셰릴의 코앞, 주변만 맴돈다.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풍광을 즐길 처지가 아니지 않나. 내면의 트래킹이다. 내면의 트래킹만이 나의 잃어버린 신발, 잃어버린 삶의 정체성을 다시 찾는 길이다. 2) 여자들은 그래.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성적인 취약함에 노출되어 있는지. 어릴 적부터 여자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일상에 숨은 나쁜 놈들의 추행을 통해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어느 모임에서 누가 말했다) 때문에 영화에서 남자들에 관한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실제로 여자들의 삶에선 지극히 현실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극한 상황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떻게 느끼고 어떤 행동을 할까? 생각만 해도 찌질하다. 대책도 없다. 신지도 벗지도, 진정한 원망도 감사도 모르고 그저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적응이라 착각하면 살겠지(살아왔다). 영화를 본 이상, 나이를 이 만큼 (처)먹은 이상 나머지 한 짝까지 내던지는 뱃심을 좀 가져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신발은 발이 아니다. 산 정상에서 등산화를 잃었다면 정말 막막한 일이지만 셰릴에게는 슬리퍼가 있었고 은박 테이프가 있었다. 무엇보다 발은 여전히 자기 것이다. 얼길설기 테이프로 두른 슬리퍼 등산화를 신고 다시 걸어나갈 수 있었다. 영화를 본 이상 잃어버린 신발에 연연해하지 않기로 하자. 고가의 신발 잃어버릴까봐 꺼먼 봉지에 담아 밥 먹는 테이블까지 들고 들어가는 비싸서 추접스러운 행동들을 삼가고 돌아보자.
어릴 적 아버지 죽음으로 신발 한짝을 잃어버린 나는 나머지 한 짝을 붙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40년 넘게 찔룩거리며 걸어왔다. 찔룩거리며 걸어온 탓에 영혼의 균형이 많이 깨졌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그러진 삶을 살고 있다. 셰릴이 혼자만의 길을 떠났던 것처럼 나 역시 혼자만의 내적 여정을 길을 떠나온 날이 있었다. 비로소 한 짝 남은 신발로 걷는 불편함도 느끼고, 굳은 살 박힌 한 쪽 발의 상처를 바라보고 조금씩 어루만질 수도 있게 되었다. 영혼의 레모네이드 한 잔을 그릴 줄 아는 감각도 민감해지고 있다. 나머지 한짝까지 벗어 던지고 맨발로 세상을 뒹굴던 셰릴도 잘했고, 찔룩거리며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던 나도 잘했다. 셰릴의 여정의 종착지는 '신들의 다리'이다. 내 종착지의 표지판에도 비슷한 말이 적혀 있을 것이다. 말은 비슷해도 함의하는 건 전혀 다르겠지만. 영화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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