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시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애.
곧 시가 한 세 편 정도는 나올 거야.
왠지 알지? 그래 시험이 다가오고 있어.
시험기간이 되면 왠지 시를 쓰고 싶고,
꼭 엄마랑 한 판 싸우고, 그러고 나면 시가 더 잘 써지고.
아, 대체 왜그러지?
분석쟁이 엄마가 왜 그런지 분석해본다. 일단 시험공부는 원래 싫은 것이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다보면 '그것'을 제외한 무엇을 하든 신나고 재밌을 것만 같다. 당연히 시험공부 외에 그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게 내남의 본능적 비딱 기질이다. 더 중요한 개인적인 이유가 있더라. 현승이는 '당위' 그것도 제 스스로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당위에 따르는 아이가 아니다. 범생이 기질도 있어서 시키는대로 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것도 결국 제 스스로 '안해서 튀느니 적당히 해서 묻히는 게 낫다'는 식의 의미부여가 전제되는 경우이다. 시험공부에 있어 과목에 대한 선호 편차가 심하다. 좋아하는 과목은 열심히 해서 100점, 싫어하는 과목은 시간이 많아도 안하는 걸로. 그러니 시험기간 중 9시부터 공부 끝났다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 생긴다. 다음 날 시험에 '의미 없는' 과목이 있다면 손도 대지 않을 테니 공부할 게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엄마와 한바탕 전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시를 쓴다.
또 하나, (우리 모두 나름의 편견 덩어리이지만) 공부에 대한 현승 군의 편견이 또 문제라면 문제다. 이런 편견이다. [공부 잘하는 것 = 인성을 포기하는 것, 시험성적 1등 = 학원 뺑뺑이 = 자유가 없는 불쌍한 삶] 이런 식이다. 스스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인 부분에서 더 그렇다. 엄마와의 전쟁 후 딥토킹을 하며 내비치는 무의식적 편견이다. 공부와 친구, 성적과 인성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공부 잘하는 아이 되지 않으려는 지향이 없지 않다.
다시 돌아온 시험의 계절, 어쨌든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며칠 밤 거실 탁자 차지하고 앉아서 끼적끼적 하다, 여기 참견 저기 참견, 공부 비슷한 것을 한다. 어젯밤에는 핫식스를 사다 마시더니 식구들 다 먼저 재우고 1시까지 혼자 공부하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스스로도 놀라운지 오늘 아침 이미 올백 맞은 느낌으로 들떴다. "엄마, 엄마가 기대하는 조건과 내가 기대하는 조건을 둘 다 만족시키면 어떻게 해줄 거야? 휴대폰을 어차피 바꿔줄 거 다 알아. 그래? 내가 정해? 흠...... 나를 엄청 대단한 애로 인정해줘. 너 정말 대단한 애구나! 이렇게" ㅎㅎㅎㅎㅎㅎ 그래서 이번 시험을 잘 본다면 현승이는 엄청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조건이다.
뭔가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아래의 시는 중간과 기말고사 사이, 호시절에 나온 작품이다. 역시나 풍요 속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기는 어려운 것 같다. 엄마랑 싸우거나, 어떤 일로 깊은 빡침 없이 나온 시라서 그런지 살짝 작위적인 느낌도 있고..... (엄마가 이런 평 했다는 걸 알면 또 싸우게 될 텐데...... 뭐, 그러면 또 빡침 속에 좋은 시가 나오겠지. 캬캬) 암튼 사춘기 시인은 원한다. 바램은 쟁반을 키우라거나, 구슬이 좀 커야되지 않겠냐는 꼰대짓이 아니라 굴러다니는 구슬을 잡아줄 작은 손을. 다행히 엄마의 손이 보기 드물게 작으니 그런 손이 되어주도록 하보게따!
분갈이
누구나 가슴 속에 쟁반 위 구슬을 품고 산다
저마다 구슬도 다르고 쟁반도 다르다
사춘기는 그 구슬이 마구마구 굴러다닐 때다
구슬을 멈추려면 쟁반을 잡지 말고 구슬을 바로 잡아줘야 한다
어떤 사람은 쟁반을 늘리고 싶고
어떤 사람은 큰 구슬을 원한다
나는 굴러다니는 구슬을 잡아줄
작은 손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