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클래식FM에서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간이다.
전기현님 목소리와 음악이 구분이 안 된다.
차분하고 느릿한 목소리가 노래 같고, 노래가 말 같다. 조화롭다.
라디오를 켜고 앉으려는데 염좌 잎 끝에 묻은 저녁 해 한 조각이 윙크를 한다.
큰 염좌, 중간 염좌, 작은 염좌. 세 개의 화분이 있는데 그 중 중간과 작은 애, 두 아이였다.
넘어가는 저녁해가 손톱 끝 봉숭아물처럼 주황빛을 발라놓았다.
아, 붙들고 싶은 찰나, 잡아서 늘리고 싶은 시간이다.
전기현의 ‘세음’의 시간, 이 시간 소심하게 발사하는 빛의 매력, 빛의 윙크.
너무 좋아!
하는 순간 갑자기 9시 <김미숙의 가정음악>을 씹어대고 싶은 충동. 6시 세음과 달리, 아니 세음보다 더 오래 내겐 더 소중한 FM의 시간인데 빼앗긴 것만 같다. 음악이 안 들리고 말, 아니 수다, 아니 사연 소개를 빙자한 어설픈 조언으로 귀가 시끄럽다. 이게 클래식 FM인지, 여성시대(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거다. 가령, 사춘기 아이 때문에 속상한 사연이 있다. “커피 한 잔 하시고 마음 가라앉히세요. 아이 마음을 읽어주세요. @&)j”:;$@@&!?:.... 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도 자라게 되어 있어요....@&(₩%¥+${#%....” 제발 사연 읽어주고, 곡 소개하는데 그쳤으면. 인생 조언은 묻는 사람에게만 눈맞추고 하셨으면. 결국 아침부터 라디오를 끄는 사태가 몇 번. 요즘엔 아예 켜질 않는다. 켜지 못하는 그 시간, 상실감이 크다.
세음이 좋으면 좋은 거지, 엄한 프로그램, 엄한 진행자를 씹어대?냐고, 당신이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게 구박을 주었다. 취향이 확실해서 그렇고, 치우치거나 한 쪽 편 들어 싸움 부추기는 걸 좋아해서 그렇다.
원고를 하나 쓰면서 뼛 속까지 이원론, 생활형 이원론을 생각하고 있다.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내 편 네 편... 영성의 여정은 통합을 향하는 길이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 말씀대로라면 '제3의 눈'을 얻는 것이다. 옳고 그름, 잘잘못을 따지는 관점을 초월하는 통합의 눈. 내적 여정을 걷고 동반하면서 성숙과 미성숙의 관점, 좋고 나쁨의 관점을 넘어선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절감한다. "좋은 꿈 나쁜 꿈이 없다. 모든 꿈은 개인의 성장을 도우러 온다." 책에서 수백 번을 읽어도 내 꿈을 보는 눈은 좋은 꿈, 나쁜 꿈이다.
손쉬운 초월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1의 눈, 2의 눈의 발달이 먼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구분하고, 판단하는지 모르고는 제3의 눈을 뜰 수 없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뼈에 새겨진 나만의 이원론을 인식하지 못해서는 알아들어지지도 않는다. 즉 내가 얼마나 삿된 눈을 가졌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거룩한 눈을 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취향'에 자꾸 꽂히는 것 같다. 취향, 가장 손쉽게 드러나는 개인의 고유한 욕구. 말하자면 세음을 좋아하는 취향, 거기에 더해 가정음악이 싫어 죽겠는 취향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다는 얘기다. 뜻을 품고 소중하게 여겨보려고. 그러니까 김미숙의 가정음악이 싫다는 말이지, 싫으니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세음과 세음의 시간, 해가 넘어가는 이 시간이 참 좋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