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인기 있는 이유가 따로 있소?❞
영화 <두 교황>을 선택한 이유다. 이유를 따져가며 영화를 고르진 않는데. 관람하다 대사 한 문장을 듣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 나도 이게 참 궁금했지!’ 교황 베네딕토 16세 역의 안소니 홉킨스가 교황 프란치스코 역의 조나단 프라이스에게 묻는다. 내 말이 그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기비결, 나도 그게 궁금했다. 매력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다. 매력은 자석의 성질 같은 것이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 건네고 싶은 끌림 같은 것. 한 번쯤 만나서 내 얘기를 해보고 싶은 사람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게 그런 분이다. 역대 가장 존경받는 교황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은 존경심 반 팬심 반이다. 안소니 홉킨스 분의 베네딕토 16세가 묻는 ‘인기 있는 이유’를 찾아 런닝타임 2시간을 함께 달렸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찾았다. 이 글은 그것을 찾는 보물지도다.
❝로마에서는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답니다❞
제목이 <두 교황>이다. 한 교황이 아니고, 여러 교황들이 아닌 두 교황. ‘2’는 선택을 종용하는 숫자다. 2, 둘 앞에 서면 둘 중 한 편을 선택하고 하나는 버려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인다. 남자와 여자, 이성과 감정, 진보와 보수, 심지어 성과 속. 두 개의 바구니에 칼 같이 나눠담고 중간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원론이다. 둘 사이는 넘나들 수 없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의 딱지를 각각의 바구니에 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이 있으면 하나는 옳고 나머지는 틀린 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뼛속까지 이원론자인지, 생활형 이원론자인지 늘 확인한다. 제목 <두 교황>을 보는 순간 이미 한 교황 편을 들기로 작정했다. 무의식적인 작정이다. 영화 역시 나 같은 이원론자 관객의 심리를 잘 부추겨 교황선출 투표에 참여시킨다. 물론 나는 주저함 없는 한 표를 행사했다.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지도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한 턱슨 추기경에게 기꺼이 설득 당했다. 라칭거(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이 되기를 정말 원하고, 게다가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에 차있다. 벌써 편은 나뉘었고, 나는 호르헤(교황 프란치스코) 편이다. 내 편을 정하고 나니 자기 확신 뚜렷한 보수주의자 라칭거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은퇴허락을 받으려는 추기경 호르헤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만난다. 교황의 여름별장 정원에서 만난다. 언뜻 봐도 많이 다른 두 사람이니,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사사건건 부딪치고 만다. 교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강한 담을 치려는 교황과 예수의 자비로 담을 헐어야 한다는 추기경. 지키려는 보수와 변화시켜 앞으로 나아가려는 진보는 동성애, 이혼, 피임, 성직자의 삶 어느 것 하나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교회를 향한 비판이 거세지는 이유를 교황은 담 밖에서 찾는다. 서구의 상대주의, 방임주의. 추기경은 그 반대, 내부에 원인이 있다며 치명타를 날린다. 신부의 아동 성추행과 그것을 묵인한 교황! 분노와 슬픔으로 벌게진 눈을 하고 당장 그 성직자를 해임하고 교회법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고 한다. 고해신부의 몇 마디 마법 같은 말로 죄를 용서해주는 것으로는 안 된다면서. 죄는 얼룩이 아니라 치료받고 아물어야 하는 상처라며. 가장 몰입해서 관람한 장면이다. 두 사람의 논쟁을 숨 가쁘게 따라갔다.
초유의 사태 코로나19 정국이다. 온 나라와 개인의 일상을 멈춰 세운 바이러스를 부르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이분되어 있다. 우한폐렴으로 부르는 사람, 코로나로 부르는 사람 사이에 견고한 담장이 서 있는 듯하다. 저쪽 편 사람이라고 느껴지면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아도 벌써 분노 섞인 피로감이 밀려온다. 분단된 남쪽에서 정치 정서적으로 다시 한 번 나뉘어 오갈 수 없는 땅에 사는 느낌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담을 세우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인 줄 알면서도 나 역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때로 드러내고, 때로 흥분한다. 두 교황의 물러섬 없는 입장차를 관객의 객관, 객관적 관객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골수팬이며, 호르헤 추기경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어쩐지 영화초반 콘클라베의 투표 때처럼 확실하게 마음이 기울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한 말 중 어느 것도 동의할 수 없소”라는 말로 대화는 끝났다. 기시감이 드는 슬픈 단절감이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정원에서 교황을 기다리던 호르헤 추기경에게 수녀가 우산을 하나 주었었다. 비가 오지 않으니 필요 없다는 말에 수녀가 복선을 깐다. “로마에서는 뭐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렇다. 이제 영화의 시작이고, 두 사람 사이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은가. 게다가 잊을 만하면 교황이 찬 심박조율기가 소리를 낸다. 정신을 일깨운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커피 드시겠소?❞
두 번째 대화가 시작된다. 밤이다. 낮이 가고 밤이 왔고, 쉼의 공간에서 다시 만났다. 용건이 있는 호르헤 추기경이 은퇴서류를 꺼내자 교황은 그냥 조용히 쉬자고 한다. 그리고 말을 건넨다. “차나 커피 드시겠소?”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대화로는 날씨 얘기가 딱이다. 아니면 차나 커피를 권하는 것. 뻔하고 흔한 이 제안이 좋았다. “아니요, 밤늦게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서요.” “나도 그렇소.” 두 사람 대화가 처음으로 교차한다. 낮의 정원에서 평행선을 달리던 두 교황이, 각각 와인과 환타를 마시며 혼밥 했던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오늘 밤은 형제처럼 있고 싶소.” 그리고 밤의 대화가 시작된다. 환한 낮에 내놓기 어려운 속내 드러낼 용기가 생기는 시간이다.
확신의 아이콘과도 같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아니 라칭거 형제가 불확실함과 모호함에 대한 두려움을 꺼내놓는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호르헤 추기경의 이야기 역시 불확실 아니, 확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호르헤는 신부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위해 오래 기다렸다. 이렇다 할 확신 또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자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얄궂게도 신은 청혼하러 가는 길에 호르헤를 부르신다. 청혼의 아름다운 시간을 기대하고 나온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신감의 상처를 남기고 신과 결혼한 호르헤 베르골리오의 러브스토리이다. “커피 한 잔 할래요?”로 시작한 밤의 대화는 좋아하는 음악, 텔레비전 프로그램, 점점 가벼워지다 농담으로 끝난다. 늘 혼자였던, 인기 없는 라칭거가 호르헤에게 말한다. “같이 있으니 좋군요.” 형제처럼 함께 보낸 시간이다.
❝당신이 신이 아닌 것을 용서합니다❞
호르헤 추기경에게는 용건이 있었고, 베네딕토16세 교황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두 교황의 세 번째 만남 장소는 바티칸 교황청의 중심이다. 교황의 계획은 종신직인 교황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교황으로 적절한 사람은, 아니 꼭 필요한 사람이 베르골리오라는 확신이다. 말, 행동, 생각 등 어떤 것에도 동의가 되지 않는 사람, 자신과 너무나 다른 베르골리오가 말이다. 전통의 수호자, 보수의 아이콘인 라칭거가 스스로 전통을 허물어 종신직에서 물러나겠다니.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의 충격적인 선언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호르헤의 용건이 아니라 라칭거의 계획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정원에서의 날 선 논쟁도, 형제처럼 함께 한 밤의 대화도 다 라칭거 계획의 일부였다. 라칭거의 파격 선언과 제안대로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면 넘어야 할 산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산은 물론 담장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다. 호르헤 자신 안에.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 시절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예수회 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많은 신부와 수녀들이 군사정권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베르고글리오는 정권에 저항하던 예수회 사제들과 친구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십자가처럼 지고 있다. 죄책감에 그치지 않고, ‘독재자의 친구’라는 오명을 주홍글씨처럼 가지게 되었다. 진보의 아이콘, 가난한 이들의 신부, 소박한 삶을 사는 인기쟁이 추기경에겐 이런 흑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호르헤를 선택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겐 계획이 있었고, 또 호르헤 추기경에 대한 파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비밀처럼 품은 부끄러움을 누군가 이미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괜찮다고 말해줄 때는 치유가 일어난다. 파일을 가지고 있는 교황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차기 교황에 적합하다 인정해준다. 그런데 은밀한 부끄러움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교황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호르헤 스스로 자기를 받아주어야 했다. 젊은 날의 자신과 화해해야 했다. 아니 용서해야 했다. 여름별장 정원의 첫 대화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값싼 용서를 비판했던 호르헤 추기경. 그 날선 비판의 칼끝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죄를 씻을 수 없고,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를 겨눈 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그것은 자신과의 화해이며 무엇보다 용서여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정신적 자만심에 시달린다오. 당신은 신이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일 뿐입니다.” 형제인 라칭거가 교황의 권위를 가지고 일깨워준다. 그리고 교황으로서 추기경의 죄를 용서한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교황의 용서가 바로 신의 그것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선언은 얼마나 중요한가. 가톨릭의 전통이 가진 고해성사의 힘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들렸다. “당신이 신이 아닌 것을 용서합니다.” 호르헤도 나도 우리 모두는 신이 아닌데,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신적인 완벽함, 결벽을 요구하며 비난하는가. 나도 그 선언을 듣고 싶다. “당신은 신이 아니고. 신이 아니기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합니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인기의 비결을 묻는 교황 베네딕토16세에게 호르헤 추기경이 답했다. “그냥 나 자신으로 살려고 할 뿐입니다.” 그냥 자신으로 사는 거라…. 질문보다 더 어려운 답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교황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나답게 살려고 할 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군요.” 자기다워진다는 것, 얼마나 막막하여 어려운 일인가. 인기의 비결을 찾아 여기까지 왔건만 싱거운 답이다. 보물이 이렇게 쉽게 숨겨져 있을 리 없지! 이번에는 교황이 추기경에게 고해성사를 청한다. ‘삶을 즐기는 용기가 없었다’ 고백한다. 나름대로 자기다움에 충실한 라칭거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즐길 수 있는 용기’인 듯하다. 성추행 범죄를 덮어준 것보다 본질적인 죄인지 모른다.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 수많은 당위의 담을 쌓아 자신을 가두는 것. 라칭거 역시 용서받음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즐기지 못하던 자기와의 화해라고 할까.
원칙주의자 라칭거, 자부심에 찬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실패를 인정한다. 호르헤 신부가 젊은 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것을 보상하는 삶을 살고 있듯이. 자기다움이란 실패, 또는 실패에 대한 아픈 성찰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실패자에 머무르지 않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떠안는 태도를 두 교황에게서 본다. 자기 안에 갇혀 성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해성사를 봐줄 신부, 죄를 사해줄 신의 대리자, 아니 그저 함께 해주는 형제가 필요하다. 자기다움으로 가는 길엔 분명 나를 비춰주는 거울인 누군가가 필요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의 대화는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두 형제의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보물을 찾았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 또는 둘을 넘어 제 3의 자리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실패한 나에 멈춰 있지 않고 화해라는 신발을 신고 계속 움직이는 것. 생각이 다른 너와 나 사이 옳고 그름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정작 답은 라칭거의 입에서 나왔다. “당신은 권력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고 특별하게도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추기경님은 달라졌어요.”
호르헤는 호르헤대로 라칭거는 라칭거대로 나는 나대로 내가 살아온 방식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실패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화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용건’ 아닌 ‘계획’을 가지고 내내 대화를 이끌어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마음이 끌린다. 프란치스코 교황만큼이나. ‘둘’을 보면 꼭 하나로 기울고 싶은, 편을 나누고 싶은 이 버릇을 좀 고치고 싶다. 아니, 이런 나와 화해하는 쪽으로 멈추지 말고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커피 아니고, 와인도 환타도 아닌 맥주로 음료수 통일한 두 교황이 월드컵을 관람하는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다. 물론 같은 편을 응원하지는 않는다. 이겨야 맛이고 지면 기분은 나쁘겠지만 승리만이 옳고, 진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독일이 이겨도 아르헨티나가 이겨도 상관없다. 양쪽 모두를 기분 좋게 응원할 뿐이다. 두 교황이 다 좋고, 우리에겐 두 교황 모두 필요하다.
- 격월간지 <민들레> Vol.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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