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4
(시니어 매일성경 2021/7-8월호 기고글)
전화기 발신자 창에 최 선생님 성함이 떴다. 어쩐 일이시지? 먼저 연락하시는 일이 거의 없으신데. 그것도 문자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를? 하는 생각과 동시에 ‘엇, 오늘 뵙기로 한 날이었던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선생, 오는 길이에요?” 벌써 도착할 시간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고 하시는 거다. 아, 이 집 나간 정신! 어쩌면 좋단 말인가, 죄송해서 전화기 붙들고 몇 번 절을 하고는 끊었다. 다음에 보자고 하셨으나, 그대로 차를 몰아 선생님 댁으로 갔다. 지난 만남에서 다음 약속을 잡으며 조정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날짜 몇 개를 오가다 잘못 메모해둔 것이다. 그 순간 번쩍 생각날 일이 어쩌자고 그전까지 까마귀 고기였던 것이냐.
헉헉, 선생님, 죄송해요. 선생님 전화를 받는 순간, 딱 생각이 났지 뭐예요. 다이어리에 맨 처음 약속한 날짜를 적어둔 거예요. 일정 조정은 오늘에 맞춰 다 해놓고... 메모는 그대로 두고 그것만 들여다보면서 다음 주라고... 헉헉... 아, 진짜... 죄송해요.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뛰면 얼마나 더 빨리 온다고. 이러고 숨을 헐떡거리며... 아휴, 숨 좀 돌리고 얘기해요.
정말. 젊은 것이 이렇게 정신을... 선생님도 실수하지 않으시는데요. 선생님 앞에서 죄송한 말씀인데, 선생님 저 요즘 건망증이 장난 아녜요.
(정색) 아니 자기 건망증인데 왜 나한테 죄송해? 늦어서 죄송한 건 몰라도...
정색하고 말씀하시더니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무셨다. 가볍게 한 말인데, 어느 지점에서 불편하신 거지? 맞다. 따뜻하고 배려 깊으신 분이지만 당신의 감정을 속이지는 않으시는 일이 없다. 불편한 것을 애써 감추지 않는 분이라 차라리 더 편하고 좋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하신 듯하다. 약속을 잊거나 늦은 것으로 화내시는 분이 아니다. 그건 나도 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마음이 섭섭함으로, 실망스러움으로. 짧은 시간 만감이 교차했다. 침묵을 깨고 말씀하셨다.
미안해요. 당황하게 해서. 내가 노인이면서 노인 취급 당하는 것은 싫은가 봐. 자존심인가. 선생님 건망증 얘기를 하면 되는 거지. 나를 빗대는 것이 그렇게 들려요. 노인에게 건망증은 당연한 건가? 노인은 무조건 기억도 흐릿하고, 둔하고 그런 존재인가? 말로 하자니 더 치졸하구먼. 노인은 당연히 어떠어떠하다는 선입견 깔린 말들이 싫어요. 흔한 일이니까 보통은 어쩌겠나 싶어서 참고 마는데, 정 선생이 편한가 보네. 버럭,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이고. 아이고, 참! 민망하다, 민망해.
그러고 보니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보기 드문 존경스러운 노인이며 심지어 닮고 싶은 노인이시다. 그것은 무엇보다 당신의 노인 정체성을 편안히 수용하시는 모습 때문이다. 동시에 노인 우대는 거부하곤 하셨다. 말하자면 이런 경우이다. 댁에서 함께 뭘 먹다 주방에 필요한 것을 가지러 가야 할 때가 있다. 당연히 몸이 빠른 내가 벌떡 일어나 가려 하면 극구 말리시며 굳이 당신이 직접 다녀오신다. 사소한 일일 수 있지만, 그런 노인을 많이 접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선생님 무릎이 좋지 않으신 걸 안다. 한 번 일어났다 앉았다 하시는 게 힘겹다는 것을 양가 어머니들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럴 때는 못 이기는 척 경로 우대 카드를 쓰셔도 되는데 말이다. 외부에서 여럿이 만나게 되어도 지하철로 어디든 오시겠다고 한다. 공평하게 중간 지점으로 정하는 것을 주장하곤 하셨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싶었는데 조금 이해가 된다.
마음이 상했나 보네. 노인네가 이래서 힘든 거야. 미안해요, 정 선생. 고깝게 듣지는 말아요.
아, 아니에요. 선생님. 마음 상한 것 없어요. 당황하긴 했는데요 이해가 됐어요. 잠깐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어요. 정말 괜찮아요. 헤헤.
괜찮은 거 맞죠? 당황해서 말을 잃었나, 마음이 상해서 할 말이 없는 건가 싶었어요. 괜찮다니 됐고, 시간이 얼마 없으니 교정 본 것 확인해봅시다.
네네, 아휴 다시 죄송해요. 저 정말 요즘 좀 심하다 싶어요. 며칠 전에는요. 택배가 와야 할 게 있는데 안 오는 거예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전화를 했죠. 분명히 한참 전에 보냈다는 거죠. 택배사에도 연락하고 옥신각신했는데... 이게 웬일이에요. 선생님, 글쎄 제가 그걸 고이 베란다에다 모셔둔 거예요. 그런데 어쩜 그렇게 까맣게 생각이 안 나요.
하하하, 꼬시다! 사람이 그런 맛이 있어야지.
아니 웃으실 일이 아니에요. 저 정말 선생님께 상담하고 싶어요. 심각하다니까요. 그리고요. 선생님, 단어가 생각이 안 나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몇 년 전에 선배 언니 한 분이요. 말을 하다 말고 거시기, 그 뭐냐, 그거 있잖아... 이러는 걸 가지고 엄청 놀렸거든요. 영민한 언니였어요. 그래서 더 재미졌죠. 그런데 제가 요즘 그렇다니까요. 제가 외우는 데는 기계에 가까웠거든요. 사람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요. 거의 모든 찬송가의 가사를 1절부터 4절까지 다 외웠다고요. 하... 요즘 제가 하는 짓들이 이해가 안 돼요. 선생님, 저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문제는 무슨! 그럴 때가 됐지.
그럴 때가 됐다고요? 갱년기 증상인가요?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지금도 기억력이 좋으신데요. 뭘 잊고 그러지 않으시잖아요. 늘 정확하시던데요.
내가 이 수첩을 괜히 손에 붙이고 사는 줄 알우?
아닌 게 아니라 선생님의 가방엔 늘 손바닥만 한 수첩이 들어있다. 전화 통화를 하신 후에, 나하고도 약속을 잡으신 후에는 영락없이 바로 다이어리를 꺼내어 적곤 하신다. 한 바닥의 한 달 일정표에는 상담 스케줄이 빼곡하다. 여백으로 남은 날을 볼펜으로 톡톡 치시며 “이날 어때요?” 하시는 모습은 참 정겹다. 아마 먼 훗날 최 선생님을 떠올린다면 이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이 사람 또 생각이 어디로 가 있어?
엇, 네? 뭐라고 하셨어요? 잠깐 딴생각... 아니 딴생각이 아니고요. 선생님 다이어리 말이에요. 다이어리에 메모하시는 모습이 참 정겹다는 생각했어요. 헤헤.
다이어리? 수첩이지, 수첩. 전화기에 있는 걸 쓰면 편하다고들 하는데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쓰면서 손으로 한 번 더 기억하는 게 좋지. 내가 쓴 글자를 보면서 확인하는 맛이 있지요. 아니 실은 신문물 어려워요. 쓰건 게 편하지.
선생님, 저도 다시 손으로 다이어리를 써야 할까 봐요. 아니면 기억 붙들어 매기 훈련 같은 걸 하든지요.
안심을 시킬 방법이 있는데 해줄까, 조금 더 놀릴까? 하하. 기억과 노화에 관한 논문들이 그러는데, 정 선생 안심하래요. 허허. 분명히 기억 용량이 줄고, 집중시간 짧아지고, 암기력은 떨어지지만, 전반적 인지기능은 오래 유지돼요. 적어도 내 나이에 이 정도 유지할 만큼을 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선생님은 다르시죠. 저는 선생님처럼 되지 못할 것 같다니까요. 아, 저 오늘 왜 이리 징징거리죠? 하하하. 불안해서 그런 것 같아요.
왜 그러긴 왜 그래? 나도 정 선생 나이 때 그랬다는 얘길 듣고 싶어서 그러지. 하하, 나도 그랬소, 하면 안심이 되겠어요? 재미있는 비유를 읽은 적이 있어요. 노년의 기억력 감퇴와 인지능력의 발달에 대해서요. 그게 지금 딱 맞는 얘기가 되겠네. 그걸 대서양 횡단 비행에 비유하더라고. 비행기는 이륙 후 급하게 고도를 높여야 한대요. 그러고 나서는 한참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죠. 착륙하기 전의 활강은 무척 길어요. 대서양 한가운데서 벌써 착륙이 시작되는 것이죠. 막 활강을 시작할 때, 기장이 브레이크를 밟는 것처럼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고 해요. 이때 불안해서 창밖의 대서양을 바라보면서 ‘너무 빨리 내려가는 거 아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50이 그런 나이라고 해요. 활강을 막 시작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지 실제로 고도는 거의 낮아지지도 않는대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딱 지금 정 선생이 느끼는 불안감 아니야? 하하.
맞아요. 선생님! 벌써? 벌써 이런 정신이면 5년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 10년 후에는? 싶은 거죠.
긴 활강의 시작이에요. 서서히 내려가야 하는 것은 맞고, 기억력이 낮아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지. 50부터는 어떤 의미로든 생의 오후, 내려가야 하는 시기니까요. 인지발달의 그래프도 아래로 가겠지. 날 봐요. 서서히 사라진 인지능력이지만 아직 멀쩡하잖우. 물론 생각 안 나도 나는 척, 기억하는 척 잘 감추고 있기는 해요.
꺅, 정말요? 선생님. 하하하.
에이, 괜히 말해줬네. 너무 좋아한다. 2, 30년 서서히 내려가요. 내 나이쯤 되면 이 활강 자체에 익숙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자꾸 얘기하다 보니 나도 선생님 나이 즈음에 비슷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한창 바쁘게 일하고 성취에 매여 있던 때라서 제대로 맞닥뜨리지 못했어요. 그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는나보다. 기억나는 척, 알고 있는 척하면서 정신없이 살았죠. 지금 정 선생처럼 천진하게 실수를 마주하지도 못했던 것 같네. 일에 취해 내 상태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으니, 이러나 저러나 정신줄 놓은 건 마찬가지구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크게 위안이 돼요. 실은 건망증이 심각한 지금 현재보다는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요. 이러다 금방 치매라도 오는 건 아니야, 싶거든요.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치매’는 나보다 선생님께 더 가까운 두려움이 아닐까. 금기어를 내뱉은 느낌이었는데, 조금 전 정색하며 하신 말씀을 이내 떠올려 어설픈 수습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활강을 시작한 거고. 선생님도 나도 내리막길에 서 있는 것은 마찬가지. 라고 생각하니 괜한 안절부절이 사라졌다. 아닌 게 아니라 선생님도 편안하게 말씀하셨다.
치매, 두렵지. 확률상 내가 더 가까이에 있죠. 하지만 이것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나이가 들면서 치매에 걸릴 확률이 증가하지만 65세 이상이던가? 하여튼, 5% 정도 된다고 해요. 다른 병에 걸릴 확률에 비해 특별히 높은 것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어쩌면 기억력 감소는 그 자체보다 그에 따른 불안, 이러다 치매가 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혹여 그래서 우울증에 빠진다면, 불행하게도 우울증은 기억력에 치명적이거든요.
그렇군요! 선생님 뵙고 얼마 안 되어 하신 말씀 기억나요. 주름진 얼굴, 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요. 기억력의 감퇴 역시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겠네요.
맞아요. 아까 말한 활강이 시작되는 시점, 갱년기라고들 하죠. 갑작스러운 변화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심리를 이용한 상술이 얼마나 많게요. 한동안 내 친구들도 치매 예방 시술, 운동, 건강보조식품 정보들 공유하곤 했어요. 하긴 지금도 그러고 있긴 하지만. 아까 말한 기억력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기억력 저하에는 별다른 치료제가 없어요. 기억력 향상이나 치매 예방을 위한 탁월한 훈련도 없고요.
선생님, 어떤 논문이에요? 읽어보고 싶네요.
논문 말고 책을 한 권 읽어요. 네덜란드 심리학 교수던가? 아닌가? 하버드 교수인가? 여하튼 그래요. 제목 묻지 마요. 생각 안 나니까! 하하 참. 암튼 서재에 있어요. 이따 갈 때 가 읽어 봐요. 기억력은 자극받지 않으면 더욱 감퇴하게 되어 있어요. 제일 좋은 자극은 사회적 활동, 인간관계예요. 그러니 내가 정 선생에게 감사하지. 이렇게 나랑 같이 일도 하고, 놀아주고, 예상치 않게 약속을 까먹는 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아이고, 오늘 저녁 맛있는 거 사줘야겠네. 그런 면에서 나는 특별한 복을 누리는 거죠. 혼자 살지만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선생님 저는 조금 다른 의미로도 느껴져요.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저만 해도 솔직히 좋아서 오는 거고, 제가 얻을 게 있으니까 오는 거죠.
아이고, 기분 좋다! 노인네에게 얻을 게 있다니. 오늘 저녁 진짜 소고기 사줘야겠네.
선생님은 은퇴한 상담심리 교수로서 여든을 넘긴 연세에 아직도 상담 일을 하고 계신다. 상담료가 무료인 경우는 없지만, 상담비를 내담자가 형편에 맞게 정하도록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회기에 만 원을 받기도 하신다고. 그걸 알고 놀랐더니 현직에 계실 때 상담료 비싸게 많이 받았다고, 이젠 봉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었다. 사라져가는 기억력, 인지능력에 연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시는 것이었구나. 그 연세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총기는 여기서 오는 것일까? 선생님도 나도 잠시 말을 잃고 생각에 빠졌다. 거실 창밖 멀리 비행기 한 대가 간다. 아, 공항이 멀지 않구나. 이륙인가, 착륙인가. 방향 감각이 없어서 통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라는 비행기는 착륙을 위한 긴 활강을 시작했다는 것. 오늘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이다.
어허허, 저기 비행기 뜬다. 뜨는 거냐, 내려오는 거냐 난 잘 모르겠어. 정 선생 그런데 내가 오늘 잘난 척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 그리 의연하지 않아요. 생각은 생각이고 감정은 감정이잖소. 두렵고, 아득한 마음이 늘 있어요. 치매, 두렵지. 여기저기 아플 때는 이러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짐덩이 되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고요. 언제나 생각보다 가까운 건 감정이니까요. 모를 거예요. 50대 정 선생 나름대로 염려가 있겠지만, 이 나이, 이 몸이 되어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죠. 왜 그렇게 봐요? 앞뒤가 다르지? 하하.
그러니까 서, 선생님도 그런 두려움이 있으신 거군요... 아아...
결국, 온다면 어쩌겠어요.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건 치매가 치매인 나를 망각하게 하는 것일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잖아요. 다만 경험상, 치매의 증상은 억압된 나쁜 기억과 관련이 있다고 느껴져요. 누구는 예쁜 치매, 미운 치매라 부르기도 하더라고. 내 보기엔 나쁜 기억에 집착하고 괜한 불안에 매여 있는 것보다 주어진 오늘 잘 사는 방법밖에 없어요.
아, 선생님.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가 그래요. 치매 노인들을 돌보면서 느끼는 것이요, 평생 집착하던 것이 남는구나! 싶대요. 돈, 먹을 것, 비난이나 욕설 같은 것들 말이에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휴우, 정 선생. 이 얘기 그만합시다. 뭐 좋은 얘기라고….
익숙하고도 낯선 예의 그 쓸쓸한 표정과 함께 입을 다무셨다. 그 표정을 지으실 때마다 박완서 선생의 노년을 주제로 한 소설 제목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란 말이 떠오른다. 어떻게도 가닿을 수 없는 선생님만의 세계 같이 느껴진다. 언젠가 내 몫이 되겠지.
아, 참! 지난번에 양평 갔다 올 때 틀어준 노래 하숙생 말이어요. 덕분에 노래 찾는 법을 알게 되어 요즘 젊을 때 좋아했던 노래를 잘 찾아 듣고 있네.
히히, 다행이에요. 그런데요. 선생님, 저희 음악치료 하다 보면요, 음악 선호도 파악이 중요하거든요. 음악 선호도에서 나이가 들수록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세대 음악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2, 30대 때 유행했던 노래를 가장 좋아한대요. 선생님도 그러신 건가요?
오, 그래? 음악도 그렇구나! 내가 아까 말했던 책에서 ‘망각의 역현상 효과’라는 말이 나와요. 나이가 들며 기억력이 현저하게 감소하는데, 오래된 기억들은 더 또렷해지는 현상. 그게 주로 20대 기억이라는 거죠. 가령 노년에 쓴 자서전들을 모아 비교해보니, 20대 어간의 분량이 제일 많다는 거지. 실은 이게 연구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게 내가 실감하는 거예요. 고독하고 쓸쓸하니까 인생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던 시절을 불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기억이라는 게 의식의 작용 같지만 실은 무의식적 작용이 크거든요. 왜,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 있잖아요. 기억 저편에 있던 장면이 갑자기 생각난다던가.
선생님, 그러면 젊은 시절 행복했던 기억만 떠오르세요?
아니지. 건망증이 심해서 다 까먹어도 나쁜 기억, 아팠던 기억은 잘 잊히지 않잖아요. 잊고 싶은 건 오히려 더 생생하지. 억울한 것, 섭섭한 것도 생각하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지요. 그럴 때 내가 쓰는 방법은 ‘감사 요법’이에요. 아까 말했 듯 치매 걸리더라도 예쁜 치매로 가자는 노력이에요. 좋은 기억은 좋아서 감사하고, 억울하고 아팠던 일들이 떠오르면 그런 날을 지내고도 이만큼 사람 꼴로 사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요.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알아요? 나치에 항거하다 젊은 날 순교했던... 순교 직전에 쓴 편지 내용이라던가? 언제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안 난다니까, 이렇게! 허허허. 짧은 이 말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감사한 마음으로 씩씩하게 걷는다.” 내가 믿음이 한참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씩씩하게 살아야지 싶어요. 오늘 괴팍한 노인네 성질 못 숨겨서 미안하기도 한데 덕분에 여러 생각 해보게 됐네요. 고마워요. 앞으로도 가끔 약속 까먹어줘. 허허.
빌려주신 책은 네덜란드 호로닝언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다우어 드라이스마(Douwe Draaisma)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이다.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기억, 시간, 나이. 딱 오늘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주제다. 짧고도 긴 대화 중 세 개의 그물에 결국 걸린 것은 ‘감사’다. 감사!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기나긴 활강의 시간을 위하여! 최 선생님의, 나의, 나의 벗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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